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20미터쯤 되는 지붕을 씌운 진입로가 있고, 그 초입에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연해주의 사업가이자 체육인, 사회운동가였던 김 미하일 이크노코비챠(Ким Михаила Пяк-Ноковича, 1952-1998)를 기리는 비석입니다.

 

 

방문단 일행은 비석 주위에 둘러서 황광석 선생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성공적으로 사업을 일군 후에 연해주와 러시아 극동지역의 고려인 디아스포라 사회의 발전에 공헌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 이분이 최재형 선생 같은 분이었다고 덧붙이셨습니다.

 

 

저는 비석의 글을 읽어보려 했으나 러시아어를 모르기 때문에 내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오른쪽 위에 새겨진 김 미하일 선생의 다부진 모습과 왼쪽 아래에 무궁화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의지가 강한 분이며 대한민국에 연대감을 가지셨던 분이었구나, 짐작했을 뿐입니다.

 

 

대신 사진을 여러 장 찍어 두었는데, 나중에 구글링을 해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려인 문화센터 방문을 마치고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구글 번역기로 비문을 번역했습니다.

 

 

"Мне всегда хотелось жить по Н. Островскому - чтобы не было мучительно больно за бесцельно прожитые годы..." М. Ким. (나는 언제나 오스트롭스키의 말처럼 살기를 원했다. “목적 없이 살아버린 세월에 대한 고통에 시달리지 않도록...” 미하일 김.)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이름이 나옵니다.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Островский, 1904-1936)는 저도 대학시절에 읽었던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Как закалялась сталь, 1930-1934)의 저자입니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 확인하려고 인용문을 찾아봤습니다. 역시 맞습니다. “목적없이 살아버린 세월에 대한 고통에 시달리지 않도록...”<강철>의 제23장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의 앞뒤를 조금 더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이다. 생명은 단 한번 주어진다. 그러므로 목적 없이 살아버린 세월에 대한 고통에 시달리지 않도록, 사소한 과거사에 매달렸던 부끄러움에 휩싸이지 않도록, 그리고 죽을 때에 모든 생명과 모든 힘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 즉 인류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쏟아지도록, 그렇게 살아야 한다. 결국 생명은 우스꽝스런 질병이나 비극적인 사고로 끝나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러한 생각에 잠겨서 코르챠긴은 동지의 무덤을 떠났다.“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김 미하일 선생이 오스트롭스키의 이 말을 간직하며 살았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강철>은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에 이는 곧 오스트롭스키의 삶을 요약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의 생애도 그랬지만, <강철>이 출판된 과정도 쉽지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 태생인 그는 12살 때 학교를 그만 둔 뒤, 식당 종업원과 발전소 견습공 등으로 노동자의 삶을 시작했고, 러시아 혁명과 내전에 참전해 척추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공산주의 운동을 계속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일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썼습니다.

 

 

1924<강철> 초고를 완성해 출판사에 보냈으나, 이 원고는 분실됐습니다. 1930년 그의 건강은 악화되고 거의 실명에 이르렀지만, 오스트롭스키는 <강철>을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1권의 5장까지는 자신의 손으로 썼지만, 이후에는 다른 사람이 그의 구술을 대필했습니다.

 

 

1931101권이 완성됐을 때, 원고에는 19명의 필체가 섞여있었으므로, 오스트롭스키가 저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문헌학적 조사를 거쳐야 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1932년에 제2권이 완성되어 출판되자, 오스트롭스키는 내 삶이 헛되지 않았다고 했다는 군요.

 

 

오스트롭스키를 전범으로 살았던 김 미하일 기념비는 그의 사후 20년만인 2018518(음력 55일 단오)에 맞춰 제막됐습니다. 그런데 아직 한두 의문이 더 남아 있습니다.

 

 

비문에는 그의 이름이 김 미하일 이코노코비챠로 되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를 김 미하일 페트로비치라고 부르더군요. 같은 이름일까요? 그리고 김 미하일 선생이 어째서 46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했는지도 궁금합니다만, 언젠가 알게 되겠지요. (jc, 202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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