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행정구역 개편 전후의 지명을 대조하여 작성된 보고서 <신구대조 조선전도 부군면리동 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1916, 越智唯七編纂, 중앙시장 발행)><해동지도(1750년경)><경상도지도(1872)>, 그리고 <지도(1884)>를 비롯한 6개 고지도를 조사한 결과 오늘날의 통영이 춘원면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남익삼씨의 고향은 당시의 춘원면자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이 들었다. 그의 매장인허증에 나타난 주소 맨 마지막의 선삼촌(先三村)’이라는 지명 때문이었다. 선삼촌(先三村) 혹은 선삼(先三)이라는 지명은 <신구대조 조선전도 부군면리동 명칭일람>에 수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고지도를 조사하던 중 필자는 춘원면의 바로 북쪽에 광삼면(光三面)’이 있었고, 한자 먼저 선()’자는 빛 광()’자와 유사하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어쩌면 남익삼씨 매장인허증에 기록된 선삼촌광삼촌의 오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고지도에 나타난 지명은 광삼이 아니라 광삼으로 그보다 북쪽에 위치한 광일면광이면에 이어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조사대상이 되었던 가장 오래된 고지도 <해동지도(1750년경)>에 따르면 광일면은 광내일운면(光內一運面), 광이면은 광내이운면(光內二運面)의 줄임말이었다. 그러나 이 지도에 광내삼운면(光內三運面)이 나타나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18세기에는 광삼면이 설치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상도지도(1872)>에서는 춘원면 소재 통제영의 현관인 원문(轅門) 바로 북쪽에 광삼면이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다. <해동지도> 시기에는 없었던 광삼면이 <경상도지도> 제작 이전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경상도지도>는 남익삼씨가 출생(1878년경)하기 전에 제작되었으므로 그가 이곳에서 출생했다면 그의 고향은 춘원면이 아니라 광삼면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광삼면은 이후 다시 사라졌다. 남익삼씨 출생 직후에 제작된 <지도(2, 1884)>에는 원문의 이남 지역은 춘원면으로 그대로 표기되어 있었지만 원문 바로 북쪽에 자리잡았던 광삼면이라는 표기는 사라진 반면, 그보다 더 북쪽에는 광일면과 광이면이 그대로 존속했다.

 

 

다시 말해 이때쯤이면 광삼면은 춘원면에 이미 이속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랬기 때문에 남익삼씨의 매장인허증의 주소에 춘원이라는 말과 선삼(先三, 광삼(光三)의 오기로 추정)’이라는 말이 동시에 등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마도 광삼면은 나중에 설치된 작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춘원면에 이속되면서 광삼촌(光三村)으로 격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광삼촌이 매장인허증에 선삼촌으로 오기된 것으로 추정된 것이다.

 

광삼면/촌 지역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통영군에 속하게 되었던 반면, 광일면과 광이면은 고성군에 남겨졌다. 광일면은 고성군 거류면에, 광이면은 고성군 동해면에 포함되어 그 이름이 사라졌다.

 

반면 광삼촌 지역은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도내면과 함께 통영시의 광도면이 되었다. 광도면은 광삼면도내면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었기 때문에 광삼면은 그 일부나마 통영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남익삼씨의 고향은 경상남도 고성군 춘원면 광삼촌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아직 추정이다. 매장인허증에 기록된 남익삼씨의 고향 주소 중에서 절반 이상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 춘육(春六)이라고 읽힐 수도 있는 지명이, 그런 지명이 당시 조선의 행정구명 목록에 없다는 이유로 춘원(春元)의 오기라고 단정한 점, 선삼(先三)이라는 표기도 광삼(光三)의 오기라고 추정한 점 등이 모두 사실에 부합할 경우에만 사실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매장인허증의 남익삼씨 주소는 모호했고, 그 밖의 다른 자료가 없으니 이렇게 추정이라도 해 보는 것이 필자로서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 추정을 발판으로 그의 조선 내 연고를 찾아보는 수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2022/8/31, 조정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