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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ウリ訪問団><舞踊靴>名前日本めて団体訪問しました交流協力のためです宝塚玉瀬村ここの滿福寺境内国楽コンサートをいました

 

このコンサートは<舞踊靴>合流してくださった<風流会>会員いてくれた音楽会です朝鮮人犠牲労働者5のための慰労音楽会でありこの々の100年以上慰めてこられた玉瀬村壇心会婦人会そして滿福寺僧侶たちにげる感謝音楽会でした

 

 

この先例ぐため<2ウリ訪問団>風物公演準備しましたありがたいことに林寅出(イム·インチュル)先生主導するソンツッペ公演受諾してくださいました。 「ソンツッペ機会がある善意くにという意味けられた名前だそうです今回躊躇なくてくださる善意せてくださいました

 

風物する事前知識十分ではないのでソンツッペ演奏者たちの演奏こうと熱心いかけましたこれまで林寅出先生主導風物公演4回参観しました

 

 

このような参観経験じてったことは3つでした、「ソンツッペ演奏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りからも「韓国最高水準風物組」するという評価もよくかれました

 

林寅出先生自身李光壽(·グァンス)先生一番弟子として<民族音楽院>城南支会代表でもあります李光壽先生にもおいして挨拶わしながら林寅出先生についてあれこれいてみましたが弟子する自負称賛がすごかったです

 

 

第二林寅出先生<イルとノリ(=仕事)>ソンツッペ代表めていますがこのつの風物組演奏履歴がすごいですまず林寅出先生自身30年以上演奏経歴<イルとノリ>ソンツッペなくとも10年以上貫禄った風物組です

 

らの演奏日程10回近公演むことなくわれていましたおそらくハンブルク時代のビートルズもここまで実戦演奏邁進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でしょう

 

 

第三感心したのは林寅出先生家族風物家族だというでしたさんも風物とソリ(=)実力者3子供がみんな風物芸者です次男林東明(イム·ドンミョン)国立伝統芸術高等学校1年生すでに風物だけでなく各種伝統遊連行専門家です

 

息子のキャリアをいでいません当然ですわりましたしみの職業わりますからねおそらくほとんどの子供たちがそうしているでしょうところが林寅出先生3子供皆父親足跡いますはその事実驚異的でしたこれは林寅出先生風物演奏実力だけでなく家族する人格性品証拠だといます

 

 

今回<2ウリ訪問団>風物公演には林寅出先生息子林東明君参加します4演奏者林寅出先生呼吸にしてきた実力のある々だといていますこれらの々の演奏きながらはそのような評価誇張されたものではないことに同意します

 

林寅出先生ソンツッペ演奏者たちは今回風物公演出演料らないことにしましたこれはプロの演奏者する礼儀ではなくましい慣行ではないことをよくっていますしかしこの々は<チームアイ><舞踊靴>目指韓日両国市民交流協力のために気軽才能寄付形式ることにしてくださいましたしかし才能寄付今回公演だけにられ公演定例化していく場合来年からは合当出演料げることになるといます

 

 

幸いなことに、演奏団の旅費や宿泊費などの経費は主催側で支払います。 したがって、今回の風物公演は入場料を受け取る正式演奏会で行われます。 風物公演必要費用入場料予想収入そしてその間隔めるための方法<チームアイ><舞踊靴>役員たちが議論します

 

 

今回風物公演収益公演ではないと予想されますしかし今回経験をしっかりねて来年出演料まで支給できる演奏会にしていきます(jc, 202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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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 <1차 우리방문단><무용신>의 이름으로 일본을 처음 단체 방문했습니다. 교류와 협력을 위해서입니다. 다카라즈카의 타마세 마을을 방문했고, 이곳의 불교사찰 만푸쿠지(滿福寺) 경내에서 국악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이 콘서트는 <무용신>에 합류해 주신 <풍류회> 회원들이 열어주신 음악회입니다. 조선인 희생 노동자 5분을 위한 위로의 음악회이자 이분들의 넋을 1백년 이상 위로해 오신 타마세 마을의 단심회(壇心會)와 부인회, 그리고 만푸쿠지의 스님들께 드리는 감사의 음악회였습니다.

 

 

이 선례를 이어 <2차 우리방문단>은 풍물공연을 준비했습니다. 고맙게도 임인출 선생이 주도하시는 <선뜻패>가 공연을 수락해 주셨습니다. <선뜻패>선한 뜻으로 선뜻 나선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번에도 주저 없이 선뜻나서는 선한 뜻을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풍물에 대한 사전 지식이 충분하지 않아서 <선뜻패> 연주자들의 연주를 들어보려고 부지런히 쫓아 다녔습니다. 그동안 임인출 선생 주도의 풍물 공연을 네 번 참관했습니다.

 

 

이같은 참관 경험을 통해 제가 알게 된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선뜻패>의 연주가 빼어나다는 것입니다. 주변에서도 한국 최고 수준의 풍물패에 속한다는 평도 많이 들었습니다.

 

임인출 선생 자신이 이광수 선생님의 수제자로서 <민족음악원> 성남지회의 대표이기도 하십니다. 저는 이광수 선생님도 뵙고 인사를 나누면서 임인출 선생에 대해 이모저모로 여쭈어봤는데, 제자에 대한 자부와 칭찬이 대단하셨습니다.

 

 

둘째, 임인출 선생은 <일과놀이><선뜻패>의 대표를 맡고 계신데, 이 두 풍물패의 연주 이력이 엄청납니다. 우선 임인출 선생 자신이 30년이 넘는 연주 경력을 가지셨고, <일과 놀이><선뜻패>도 적어도 10년 이상의 관록을 가진 풍물패들입니다.

 

이들의 연주 일정은 한 달에 10회에 가까운 공연으로 쉴 새 없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함부르크 시절의 비틀즈도 이렇게까지 실전 연주에 매진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셋째, 제가 특히 감탄한 것은 임인출 선생의 가족이 풍물 가족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아내 분도 풍물과 소리의 실력자이시고, 세 자녀가 모두 풍물 재주꾼들입니다. 특히 둘째인 임동명군은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1학년생으로 벌써 풍물뿐 아니라 각종 전통 놀이 연행의 전문가입니다.

 

제 아들은 제 경력을 이어받지 않았습니다. 당연합니다. 세상이 변하고 있고, 선호되는 직업도 달라지니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자녀들이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임인출 선생의 세 자녀는 모두 아버지의 족적을 따르고 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이 경이로웠습니다. 이는 임인출 선생의 풍물 연주 실력뿐 아니라 가족에 대한 그의 인격과 성품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2차 우리방문단>의 풍물 공연에는 임인출 선생의 아드님 임동명군도 참여합니다. 다른 4분의 연주자들도 임인출 선생과 호흡을 같이해 온 실력 있는 분들이라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이 분들의 연주를 들으면서 저는 그 같은 평가가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임인출 선생님과 <선뜻패> 연주자들은 이번 풍물공연의 출연료를 받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이는 전문 연주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바람직한 관행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분들은 <팀아이><무용신>이 지향하는 한일 양국 시민의 교류와 협력을 위해 선뜻 재능기부 형식을 취하기로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재능기부는 이번 공연에만 국한되며, 공연을 정례화해 나갈 경우, 내년부터는 합당한 출연료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인 것은, 연주단의 여비와 숙박비 등의 경비는 주최 측에서 지불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이번 풍물 공연은 입장료를 받는 정식 연주회로 진행됩니다. 풍물 공연에 필요한 비용과 입장료 예상 수입, 그리고 그 간격을 메우기 위한 방법은 <팀아이><무용신> 일꾼들이 논의할 것입니다.

 

 

이번 풍물공연이 수익이 날 공연은 아닐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이번의 경험을 잘 축적해서 내년에는 출연료까지 지급할 수 있는 연주회로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jc, 202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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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ウリ訪問団>来日目的1次訪問じです。 『交流協力です交流協力いの状況立場理解する機会えますまた相互理解協力じておいの利益ることができます

 

 

<舞踊靴><チームアイ>交流協力まず学生たちと青年のためのものです韓国日本学生たちがびの平等機会青年たちが就職公正機会保障されるようにしようということですこのような交流協力両国市民文化理解する機会にもなります

 

韓国日本何世紀にもわたって対立葛藤歴史強調されてきましたしかしこれは政治的軍事的対立葛藤であって市民間対立葛藤ではないといます

 

 

でも両国市民対立葛藤ではなく交流理解協力共生がはるかにいといます市民はおいに訪問協力相生することをんでいますただ敵対感社会的雰囲気のために平和相生もれているだけだといます

 

<チームアイ><舞踊靴>関心活動在日朝鮮学校(=ウリ學校)生徒たちに集中していますしかしそれに限定される必要はありません日本韓国学生青年たちが皆私たちの関心対象であり後援対象ですただウリ學校する日本社会政策的制度的差別しいのでこれに優先的関心っているわけですね

 

 

<チームアイ><舞踊シーン>がウリ學校舞踊部後援めたのは4年前鄭世和(チョン·セファ)先生出会いのためですたちは201911大阪かれたウリ學校舞踊コンテストでいました学生たちの舞踊公演にすっかりれた舞踊部学生たちのためにかしたいげると鄭世和先生舞踊靴プレゼント提案しました仕事はそのようにまりました

 

20203四国神戸のウリ學校舞踊靴配信されて以来今年まで7にわたる舞踊靴キャンペーンに500人余りが参加わせて3500ウォンが募金され1400足余りの舞踊靴日本全域のウリ學校舞踊部学生たちにされました

 

 

<舞踊靴>がウリ學校舞踊部後援するのは生徒たちが日本でも韓国伝統文化せずけているからですこの舞踊文化伝統1930年代日本朝鮮舞踊めた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からまったものですがでは日本だけでなく中国延辺ロシアの沿海州そして中央アジアの高麗人でも共有され享有される文化です

 

したがって<舞踊靴>がウリ學校生徒たちがいでいる韓国文化伝統後援することは適当なことだといますこれにして日本<チームアイ>会員々も同意してくださり舞踊靴キャンペーンに積極的活躍してくださっています

 

 

またたちは<宝塚朝鮮人追悼碑>についてりました日本による植民地時代 兵庫県宝塚地域無念をされた朝鮮人労働者5える追悼碑です

 

たちは宝塚玉瀬村住民朝鮮人犠牲者100年以上祭祀してこられた事実感動けました在日朝鮮人日本人研究者社会活動家犠牲者発掘記録祭祀ついに追悼碑てたことに感謝気持ちもつようになりましたこの感謝気持ちをすために構成されたのが<ウリ訪問団>です

 

 

<ウリ訪問団>韓国日本市民人類愛公正平等機会るための交流協力行事だとえますいに理解配慮感謝することが<ウリ訪問団>のすべきことです

 

 

<2ウリ訪問団><風物公演><同胞交流会>じて韓日両国市民実質的交流協力促進するために最善くします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jc, 202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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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우리방문단>의 일본 방문 목적은 1차 방문 때와 같습니다. “교류와 협력입니다. 교류와 협력은 서로의 상황과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또 상호 이해와 협력을 통해 서로의 이익을 꾀할 수 있습니다.

 

 

<무용신><팀아이>의 교류와 협력은 학생들과 청년을 위한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학생들이 배움의 평등한 기회를 가지고, 청년들이 취업의 공정한 기회를 보장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같은 교류와 협력은 양국 시민의 문화를 이해하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한국과 일본은 수세기 동안 대립과 갈등의 역사가 강조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 군사적 대립과 갈등이지 시민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양국 시민들은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교류와 이해, 협력과 상생을 바라는 분들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시민들은 서로 방문하고, 배우고, 협력하고, 상생하기를 원합니다. 다만, 적대감을 부추기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평화와 상생을 바라는 목소리가 묻혀있을 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은 <팀아이><무용신>의 관심과 활동이 재일조선학교(=우리학교) 학생들에게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한정될 필요는 없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학생들과 청년들이 모두 우리 관심의 대상이고, 후원의 대상입니다. 다만 우리학교에 대한 일본사회의 정책적, 제도적 차별이 심하기 때문에, 여기에 우선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지요.

 

 

<팀아이><무용신>이 우리학교 무용부를 후원하기 시작한 것은 4년전 정세화 선생님과 저의 만남 때문입니다. 우리는 201911, 오사카에서 열린 우리학교 무용경연대회에서 만났습니다. 학생들의 무용 공연에 홀딱 반한 제가 무용부 학생들을 위해 뭐라도 하고 싶다고 말씀드리자, 정세화 선생께서 무용신 선물을 제안하셨습니다. 일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20203, 시코쿠와 고베의 우리학교에 첫 무용신이 전달된 이래, 올해까지 7차에 걸친 무용신 캠페인에 연인원 5백여명이 참여하셨고, 모두 약 35백만원이 모금되어, 14백여 켤레의 무용신이 일본 전역의 우리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전달됐습니다.

 

 

<무용신>이 우리학교 무용부를 후원하는 것은 어린 학생들이 일본에서도 한국의 전통에 뿌리를 둔 문화를 꿋꿋하게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무용 문화의 전통은 1930년대 일본에서 조선무용을 시작하신 최승희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지금은 일본뿐 아니라 중국의 연변, 러시아의 연해주,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 사이에도 널리 공유되고 향유되는 문화입니다.

 

따라서 <무용신>이 우리학교 학생들이 이어가는 한국문화 전통을 후원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일본의 <팀아이> 회원 분들도 동의해 주셨고, 무용신 캠페인에 적극 참여해 주고 계십니다.

 

 

또 우리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하여 알게 됐습니다. 일제강점기 효고현 다카라즈카 지역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신 조선인 노동자 5분을 기리는 추도비입니다.

 

우리는 다카라즈카 타마세 마을 주민들이 조선인 희생자들을 1백년 이상 제사해 오신 사실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재일동포와 일본인 연구자들과 사회활동가들이 희생자들을 발굴하고, 기록하고, 제사를 지내다가, 마침내 추도비를 세우신 것에 깊은 감사의 마음도 가지게 됐습니다. 이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 <우리방문단>입니다.

 

 

<우리방문단>은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인류애를 바탕으로 공정하고 평등한 기회를 조성하기 위한 교류와 협력의 행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고, 보답하고, 감사하는 것이 <우리방문단>의 할 일입니다.

 

 

<2차 우리방문단><풍물 공연><동포 교류회>를 통해 한일 양국의 시민들 사이에 실질적인 교류와 협력을 진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jc, 202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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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踊靴>在日朝鮮学校(=ウリ學校)舞踊部後援するですが今年活動多様化しました1には1ウリ學校訪問団宝塚朝鮮人追悼碑玉瀬村滿福寺訪問<風流会>国楽演奏会かれました尼崎ウリ學校訪問して授業参観もしました

 

 

3月末から4月中旬までの1月間8回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展開450ウォンを募金して150舞踊靴日本全土のウリ學校におけしました

 

 

5には招待されていた大阪朝鮮学校70周年記念同胞招請宴には出席できませんでしたがそのわり玉瀬朝鮮人犠牲者参拝墓前にムクゲをえましたこのムクゲ植樹会には<1江陵フォーラム>共同代表金重男(キム·ジュンナム)姜承昊(カン·スンホ)先生事務局長趙殷慧(チョ·ウネ)先生<和江(ファガン)文化財団>李洪範(·ホンボム)先生参加しました

 

訪問団はまた宝塚駅われた高校無償化朝鮮学校めることをめる集会にも参加しました

 

 

6には李洪範先生率いる和江文化財団大学生訪問団宝塚姫路などの関西地域在日朝鮮人痕跡探訪しました鄭世和(チョン·セファ)辛輝浩(シン·フィホ)先生など日本<チームアイ>会員々の案内和江文化財団訪問団学生たちはこの地域居住してきた在日朝鮮人過去現在についてきとした印象けることができました

 

 

7には鄭世和金在浩(キム·ジェホ)先生九州広島のウリ学校訪問8回目舞踊靴キャンペーンで用意された舞踊靴生徒たちにしましたこのつの地域ウリ学校生徒減少傾向急激なだけでなく東京大阪かられているためいつも多少疎外されていた地域だったということですそのためかたち3訪問大変歓迎してくださいました

 

 

9には<舞踊靴><24回江陵人権映画祭>後援しました江陵人権映画祭去年から<1江陵フォーラム>江陵進歩活動家主軸となって組織めた映画祭韓国では20年以上歴史3大人権映画祭します今年地域映画祭れて全国的宣伝されめた元年となり野外上映というしい様式みた意味ある映画祭となりました

 

 

今回<江陵人権映画祭>には日本<チームアイ>鄭世和先生制作したドキュメンタリー玉瀬100年伝説初演されましたこの地域犠牲になった朝鮮人労働者5犠牲発掘され記録され慰霊され追悼碑てられるようになった過程これを媒介江陵宝塚江原道兵庫県交流協力まった経過描写したというきな意味があります

 

 

これからは11<2次舞踊靴ウリ訪問団>来日準備する時期です今回訪問時期1110-1334予定され1111西宮市風物公演1112在日同胞交流会訪問目的まりました

 

1111風物公演西宮市立若竹公民館われます風物演奏会6構成された林寅出(イム·インチュル)先生風物團中心となり現地でも具良美(·リヤンミ)河栄守(·ヨンス)先生演奏参加することになりますまた西宮小学校在学中朝鮮人生徒たちの演奏1演目ほどまれるということです

 

 

一方1112同胞交流会大阪朝鮮学校運動場渉外してわれる可能性いですがこの行事大阪兵庫奈良京都地域在日朝鮮同胞々をいて風物風流びで一緒わる同胞祭りになるものと期待しています

 

 

風物公演同胞交流会韓国<舞踊靴>日本<チームアイ>準備実務担当しますがこの行事成否くの々の参加にかかっているといますあと2月余りあるだけですがこれからしっかり準備すれば韓国同胞在日同胞める大切機会になると確信しています

 

<舞踊靴>会員々の関心参加をおいします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2023/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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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신>은 재일조선학교 무용부를 후원하는 모임입니다만, 올해는 활동이 다양해졌습니다. 1월에는 1차 우리방문단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와 타마세 마을의 만푸쿠지를 방문, <풍류회>의 국악연주회가 열렸습니다. 아마가사키 조선학교를 방문해서 수업참관도 했고요.

 

 

3월말부터 4월 중순까지 약 한달 동안 제8차 무용신 캠페인을 전개, 약 450만원을 모금해서 150켤레의 무용신을 일본 전역의 우리학교에 전달했습니다.

 

 

5월에는 초청받았던 오사카 조선학교 70주년기념 동포초청 잔치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 대신 타마세 마을을 방문해서 조선인 희생자 참배묘 앞에 무궁화를 심었습니다. 이 무궁화 식수회에는 <제1강릉포럼>의 공동대표 김중남, 강승호 선생과 사무국장 조은혜 선생, <화강문화재단>의 이홍범 선생이 참가하셨습니다. 

 

방문단은 또 다카라즈카 역사에서 열린 고교무상화에 조선학교를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는 집회에도 참여했습니다.

 

 

6월에는 이홍범 선생이 이끄시는 <화강문화재단>의 대학생 방문단이 다카라즈카와 히메지 등의 간사이 지역 재일조선인의 흔적을 탐방했습니다. 정세화, 신휘호 선생님 등 일본 <팀아이> 회원 분들의 안내로, 화강문화재단 방문단의 젊은 학생들은 이 지역에 거주해 온 재일조선인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생생한 인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7월에는 정세화, 김재호 선생과 제가 큐슈와 히로시마의 조선학교를 방문, 8차 무용신 캠페인으로 마련된 무용신을 학생들에게 직접 전달했습니다. 이 두 지역의 조선학교는 학생 감소 추세가 급격할 뿐 아니라, 도쿄와 오사카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항상 다소간 소외되던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세 사람의 방문을 대단히 환영해 주셨습니다.

 

 

9월에는 <무용신><24회 강릉인권영화제>를 후원했습니다. 강릉인권영화제는 작년부터 <1강릉포럼>을 포함한 강릉의 진보활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하기 시작한 영화제로, 한국에서는 2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3대 인권영화제에 속합니다. 올해는 지역영화제를 벗어나서 전국적으로 홍보되기 시작한 원년이 되었고, 특히 야외상영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시도한 의미있는 영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번 <강릉인권영화제>에는 일본 <팀아이>의 정세화 선생께서 제작하신 다큐멘터리 <타마세 마을의 1백년 전설>이 초연되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 5인의 희생이 발굴되고, 기록되고, 위령되고, 결국 추도비가 세워지게 된 과정과, 이를 매개로 강릉과 다카라즈카, 강원도와 효고현의 교류와 협력이 시작된 경과를 묘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11월의 제2차 무용신 우리방문단의 일본 방문을 준비할 시기입니다. 이번 방문의 시기는 1110-13일의 34일로 예정되었고, 1111일의 니시노미야 풍물공연과 1112일의 재일동포 교류회가 주요 방문 목적으로 결정되었습니다.

 

1111일의 풍물공연은 니시노미야(西宮) 시립 와카다케 코민칸(若竹公民館)에서 열리게 됩니다. 풍물연주회는 6명으로 구성된 임인출 선생님의 풍물패가 중심이 되고, 현지에서도 구량미, 하영수 선생님께서 연주에 참여하시게 됩니다. 또 니시노미야의 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조선학생들의 연주도 1연목 정도 포함될 것이라고 합니다.

 

 

한편, 1112일의 동포교류회는 오사카의 조선학교 운동장을 섭외해서 이뤄질 가능성이 큽니다만, 이 행사는 오사카와 효고, 나라와 교토 지역의 재일동포분들을 초청해서 풍물과 풍류, 음식과 놀이로 함께 어우러지는 동포 잔치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풍물공연과 동포교류회는 한국의 <무용신>과 일본의 <팀아이>가 준비와 실무를 담당하지만, 이 행사의 성패는 많은 분들의 참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2달 남짓이 남았을 뿐이지만, 지금부터 잘 준비하면 한국 동포와 재일 동포 사이의 유대를 끈끈하게 다질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무용신>과 여러 자매단체 회원 분들의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23/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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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회 강릉인권영화제> 99-10일 강릉시 월화거리에서 열립니다. 이번 강릉인권영화제의 주제는 노동자의 인권입니다. <무용신>과 자매단체들이 <제24회 강릉인권영화제>를 후원합니다.

 

 

이번 강릉인권영화제에는 특별한 다큐멘터리가 한편 출품, 상영됩니다. <타마세 마을의 1백년 전설>이라는 제목인데,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얽힌 이야기이고, 일본 <팀아이>의 정세화 선생께서 제작하신 작품입니다.

 

지난 3년동안 저희 <무용신>은 한편으로 우리학교(=재일조선학교) 무용부를 후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 효고현 다카라즈카에서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 5분이 억울한 죽음을 추도해 왔습니다.

조사연구를 통해 다카라즈카 타마세 마을의 단심회와 부인회가
108년 동안 이들을 위령 제사해 왔고, 2020년에는 이들을 위한 추도비를 세우신 분들이 계심을 알게 됐습니다.

 

 

저희는 희생자의 한 분인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릉이었음을 확인한 후, 강릉시가 추도비 건립자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해 줄 것을 청원했습니다.

 

이 청원은 받아들여져서 2022 4월 강릉시장 명의의 감사패가 6명의 일본인과 2명의 재일동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후 한국동포들과 재일동포들의 추도비 참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과정이 재일동포 사진가 정세화 선생에 의해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고, 2023년 2월 일본 상영을 거쳐, 오는 9월 24회 강릉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무용신>과 자매단체들이 강릉인권영화제를 후원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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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에는 3대 인권영화제가 있습니다. 인천, 서울과 함께 강릉의 인권영화제가 그것이지요. 이들은 올해 24(강릉), 26(서울), 28(인천) 영화제를 개최합니다. 코로나 기간의 휴지기를 포함하면 사반세기를 넘긴 인권옹호 영화제들입니다.

 

 

강릉인권영화제는 서울과 인천에 비해 소규모의 지역 영화제로 개최되어 오던 중, 코로나로 인한 3년간의 휴지 끝에 폐지 논의가 제기됐었습니다. 그러나 <1강릉포럼(공동대표 김중남, 강승호 선생, 사무국장 조은혜 선생)>이 영화제 유지를 제안했고, 작년의 23회에 이어 올해 24회 인권영화제를 개최하게 된 것입니다.

 

저희는 폐지 위기를 넘어선 강릉인권영화제가 사반세기의 역사를 이어나갈 뿐 아니라, 규모 있고 내실 있는 영화제로 발돋움하기를 기대합니다. 이같은 바람 속에서 <무용신>과 자매단체 회원들과 <조각배 콘서트>의 음악가들은 올해의 강릉인권영화제를 후원하기로 했습니다.

 

 

후원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1) 3백만원을 모금해 강릉인권영화제 조직위원회에 전달함으로써 영화제 준비와 개막 공연에 도움이 되고자 하며, (2) 영화제에 즈음해 강릉인권영화제 방문단을 구성해서 참여하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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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강릉인권영화제>의 원활한 준비와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여러분의 후원이 절실하게 필요해요. 고맙습니다.

 

행사제목: <24회 강릉인권영화제> 후원

모금목표: 3백만원

모금기간: 2023 716-815.

후원계좌: 카카오뱅크 3333-23-1600864 (무용신 강릉인권영화제 후원, 조정희, 010-8564-7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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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99-10, 12일의 영화제 참가를 위한 강릉 방문단에 참여하실 분들도 연락해 주세요. <무용신> 단톡방에 초대드려서, 강릉 방문단 준비위원회의 도움을 받으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3/7/14, 조정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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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北亞歴史財団発行した資料集<日本地域朝鮮人犠牲者追悼碑(2019)>によりますと日本にはおよそ170朝鮮人追悼碑建立されています日本全土りながら朝鮮人追悼碑して記録してきた安海龍(アン·ヘリョン)先生この資料集まれていない追悼碑30基以上あるといいますそれで日本には朝鮮人追悼碑200ほどてられているわけです

 

<宝塚朝鮮人追悼碑>はこの200にはまれませんでしたわずか3年前2020326建設されたからです最近建てられたこの追悼碑いろいろと特徴的です

 

 

まず<宝塚朝鮮人追悼碑>はその淵源100年以上さかのぼりますこの追悼碑記録された5朝鮮人犠牲者1914から1929死亡したからです

 

宝塚西谷村役場発行した埋葬認許證によりますと最初犠牲者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さんは191483埋葬され南益三(ナム·イクサム)さんは1915121張長守(チャン·ジャンス)さんは1915324埋葬されましたさん神戸水道改修工事中事故くなった々です

 

 

一方旧福知山線鉄道改修工事参加していた尹吉文(ユン·ギルムン)さんと吳伊根(·イグン)さんは1929326の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くなりましたそのため宝塚朝鮮人追悼碑犠牲者10994年前事故くなったのです

 

第二死後忘られていたこれらの犠牲者くの努力によって発掘され記録され祭祀されついに追悼碑てられました鉄道工事犠牲者二人1993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近藤富男調査チームによって発掘されました没後64ぶりでした兵庫県朝鮮関係研究権威者である堀内稔飛田雄一先生資料けを提供しました

 

 

一方水道工事中くなった3完全れられ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玉瀬婦人会仏教寺院·滿福寺住職毎年慰霊祭ってきたからですしかし108年間続いたこの慰霊祭事玉瀬世界にはられていませんでした

 

20202追悼碑建設中だった近藤富男先生にその事実らされ水道工事犠牲者3鉄道工事犠牲者2える追悼碑てることになったのです

 

 

第三この追悼碑日本人在日朝鮮人協力てられましたこの追悼碑裏面にはこの追悼碑てた団体明記されていますが、「追悼碑建立会」「宝塚市外国人市民文化交流協会(=以下, 交流協会)」「木蓮会がそれです

 

<交流協会>多民族共生のための宝塚市民団体<木蓮会>大阪市民団体ですらは在日朝鮮人研究朝鮮学校後援積極的です<追悼碑建立会>両団体にはしませんが追悼碑建立参加した々を連合団体でした

 

 

この3団体には日本人会員がもっといです募金参加した後援者名簿には6:4程度割合日本人名前がもっといです追悼碑建立日本人積極的だったという意味です

 

第四在日朝鮮人韓国人には民団総連参加しました後援者名簿には宝塚総連支部民団支部んで登録されています。 「宝塚朝鮮人追悼碑建立するために宝塚在日がイデオロギーや政治性向えて協力したのです

 

 

このような々な意味のためはこの追悼碑建立過程しく調べて記録そうと努力しましたこの追悼碑くのられることをんだからです

 

そのくの々がこの追悼碑れました<交流協会><木蓮会>はもちろん<チームアイ><舞踊靴>会員数回訪れていますこの追悼碑建立ったくの在日同胞々や朝鮮学校生徒たちも犠牲者参拝しました

 

そしてついに514江陵代表団<宝塚朝鮮人追悼碑>参拝することになったんですね(jc, 202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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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재단이 펴낸 자료집 <일본지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2019)>에 따르면 일본에는 약 170기의 조선인 추도비가 건립되어 있습니다. 일본 전역을 누비면서 조선인 추도비를 찾아 기록해 온 안해룡 선생은 이 자료집에 포함되지 않은 추도비가 30기 이상 더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에는 조선인 추도비가 약 200기쯤 세워져 있는 셈입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이 200기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불과 3년 전인 2020326일에 건립되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세워진 이 추도비는 여러모로 특징적입니다.

 

 

우선,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그 연원이 1백년 이상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추도비에 기록된 다섯 분의 조선인 희생자들이 1914년과 1929년 사이에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다카라즈카의 니시타니 촌사무소가 발행한 매장인허증에 따르면 최초의 희생자 김병순씨는 191483일에 매장됐고, 남익삼씨는 1915121, 장장수씨는 1915324일 매장됐습니다. 모두 고베수도 개수공사 중에 사고로 사망하신 분들입니다.

 

 

한편 옛 후쿠치야마선 철도 개수공사에 참가했던 윤길문씨와 오이근씨는 1929326일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사망했습니다. 따라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는 길게는 109, 짧게는 94년 전의 사고로 돌아가신 것이지요.

 

둘째, 사망 후 잊혀졌던 이 희생자들은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발굴되고, 기록되고, 제사되고, 마침내 추도비가 세워졌습니다. 철도공사 희생자 두 분은 1993년 정홍영, 콘도 도미오 조사팀에 의해 발굴되었습니다. 사망 후 64년 만이었습니다. 효고현의 조선관계 연구의 권위자인 호리우치 미노루, 히다 유이치 선생님도 자료와 도움을 제공했습니다.

 

 

반면 수도공사 중에 돌아가신 세 분은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타마세 부인회가 불교사찰 만푸쿠지의 주지스님의 집전으로 매년 위령 제사를 드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08년 동안 계속된 이 위령제사는 타마세의 바깥 세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0202월 추도비 건립 중이던 콘도 도미오 선생께 그 사실이 알려졌고, 수도공사 희생자 세 분을 철도공사 희생자 두 분과 함께 기리는 추도비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셋째, 이 추도비는 일본인과 재일동포의 협력으로 세워졌습니다. 이 추도비의 뒷면에는 이 추도비를 세운 단체가 명시되어 있는데, <추도비 건립회>, <다카라즈카시 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 <목련회>가 그것입니다.

 

<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는 다민족 공생을 위한 다카라즈카의 시민단체이고, <목련회>는 오사카의 시민단체입니다. 이들은 재일조선인 연구와 조선학교 후원에 적극적입니다. <추도비건립회>는 두 단체에 속하지 않지만 추도비 건립에 참여한 분들을 포함한 연합단체였습니다.

 

 

이 세 단체에는 일본인 회원이 더 많습니다. 모금에 참여한 후원자 명단에는 6:4 정도의 비율로 일본인 이름이 더 많습니다. 추도비 건립에 일본인들이 적극적이었다는 뜻입니다.

 

넷째, 재일동포 중에는 민단과 총련이 모두 참여했습니다. 후원자 명단에는 다카라즈카의 총련지부와 민단지부가 나란히 등재되어 있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건립하기 위해 다카라즈카의 동포들이 이데올로기와 정치성향을 초월해 협력했던 것이지요.

 

 

이런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저는 이 추도비가 구상되기 시작해서 건립되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조사해서 기록으로 남기려고 애썼습니다. 이 추도비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많은 분들이 이 추도비를 방문했습니다. <다카라즈카 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목련회>는 물론, <팀아이><무용신> 회원들도 여러차례 방문했습니다. 이 추도비의 건립을 알게 된 많은 재일동포 분들과 조선학교 학생들도 희생자들을 참배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514일 강릉 대표단도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참배하게 된 것이지요. (jc, 202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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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実務訪問団2つのイベントに参加しました切畑朝鮮人追悼碑参拝玉瀬朝鮮人参拝墓にムクゲをえました

 

100年余にこの地域死亡した朝鮮人労働者追悼1韓国訪問団感謝のコンサートをいたことにするいとして用意された行事でした朝鮮人殉難者をめぐって好循環いているのですね

 

 

1月末<舞踊靴>1回目訪問わった直後滿福寺足立泰敎僧侶足立智敎僧侶日本<チームアイ>複数会員協力して参拝墓近くにムクゲをえることを企画され町民同意されたそうです村共同事業主管する丹心会毎年朝鮮人犠牲者のために慰霊祭ってきた婦人会参加しました

 

滿福寺丹心会婦人会行事準備している<チームアイ>会員たちから韓国参加してほしいという要請がありそこで今回実務訪問団構成されました<1江陵フォーラム>3参加することになったことは玉瀬住民にとってきなみとなったようです玉瀬參拜墓られた3のうちの1キム·ビョンスンさんが江陵出身だったからです

 

 

もともと514訪問団日程しいでした午前11には大阪朝鮮学校同胞祭午後1玉瀬のムクゲ植樹行事そして午後3時半には神戸市立中央図書館<青丘文庫研究会>論文発表会がありました

 

東大阪菱江大阪朝高玉瀬滿福寺神戸市市立中央図書館移動してもそれぞれ1時間かかる距離なのでとてもがなければようやくたどりけない日程でした

 

いなのか不幸なのか大阪朝鮮学校行事3日間降室内行事転換されたため訪問団参加されました大阪朝鮮学校10月初めの運動会訪問できるというえで今回訪問しないことが当日朝即席まりました

 

 

午前中余裕ができた訪問団玉瀬のムクゲ植樹行事参加する長尾山麓切畑てられた宝塚朝鮮人追悼碑をまず参拝することをめました

 

この追悼碑1914-15神戸水道改修工事中にトンネル落盤事故死亡した朝鮮人労働者3(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南益三(ナム·イクサム)張長守(チャン·ジャンス))1929福知山線鉄道改修工事中にダイナマイト事故くなった2朝鮮人労働者2(尹吉文(ユン·ギルムン)吳伊根(·イグン))追悼するため2020建設されました

 

一行宿くの十三駅宝塚行きの列車いて福知山線えて武田尾駅りました宝塚から武田尾まではわずか3でしたが都市風景完全深山幽谷展開されていました

 

 

宝塚朝鮮人追悼碑れるという連絡鄭鴻永(チョン·セファ)先生真銅敏之先生えにてくれました武田尾駅から切畑追悼碑まではいても30分以内という距離ですがムクゲ記念植樹行事手伝うために滿福寺到着していたお二人訪問団便宜のために車便提供したんですよね

 

馬蹄形がった武庫川がソ出会うところにそこからはいて追悼碑かいました。 「宝塚朝鮮人追悼碑てられた親水広場までは10もかかりません

 

 

線路撤去され枕木だけがっていてここがかつて福地山線っていた鉄道だったことをしています枕木沿っていていくと2つのトンネルを通過することになりますがこれらのトンネルがまさに朝鮮人労働者発破掘削したトンネルでありそのつが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現場です

 

姜承昊(カン·スンホ)李洪範(·ホンボム)先生1月末訪問以来2度目訪問でしたが追悼碑参拝めてだった金重男(キム·ジュンナム)趙殷慧(チョ·ウネ)先生印象金重男先生追悼碑きなお辞儀をすることもありました(jc, 2023/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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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일 방문단은 두 행사에 참가했습니다. 키리하타(切畑)의 조선인 추도비를 참배하고, 타마세(玉瀨)의 조선인 참배묘에 무궁화를 심었습니다.

 

1백여 년 전에 이 지역에서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들을 추도하고, 지난 1월 한국 방문단이 감사의 콘서트를 열었던 것에 대한 보답으로 마련된 행사였습니다. 조선인 희생자들을 둘러싸고 선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1월말 <무용신>1차 방문이 끝난 직후, 만푸쿠지의 아다치 타이쿄 스님과 아다치 치쿄 스님이 일본 <팀아이>의 여러 회원들과 협력해서 참배묘 인근에 무궁화를 심기로 기획하셨고, 마을 주민들도 동의하셨다고 합니다. 마을 공동사업을 주관하는 단심회(丹心會)와 매년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해 위령 제사를 지내오신 부인회도 참석하셨습니다.

 

만푸쿠지와 단심회와 부인회가 행사를 준비하는 동안, <팀아이> 선생님들로부터 한국 분들도 참석해 주면 좋겠다는 요청이 있었고, 그래서 이번 실무 방문단이 구성되었습니다. 특히 <1강릉포럼>의 세 분이 참가하게 된 것은 타마세 주민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타마세 참배묘에 모셔진 3분 중의 한 분인 김병순씨가 강릉 출신이었기 때문이지요.

 

 

원래 514일은 방문단 일정이 분주한 날이었습니다. 오전 11시에는 오사카 조선학교의 동포 축제, 오후 1시에 타마세의 무궁화 식수 행사, 그리고 오후 3시 반에는 고베시립 중앙도서관에서 <청구문고 연구회>의 논문발표 모임이 있었습니다.

 

히가시오사카 히시에(菱江)의 오사카 조고와 타마세 마을의 만푸쿠지, 고베시의 시립중앙도서관은 자동차로 이동해도 각각 약 1시간씩 걸리는 거리이기 때문에 매우 서둘러야 간신히 소화할 수 있는 일정이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사카 조선학교의 행사가 3일 동안 내리는 비로 실내행사로 전환되는 바람에 방문단의 축제 참여가 취소됐습니다. 오사카 조선학교는 10월초의 운동회 때에 방문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번에는 방문하지 않기로 당일 아침에 즉석 결정되었습니다.

 

 

오전이 여유로워진 방문단은 타마세의 무궁화 식수행사에 참여하기 전에 나가오(長尾)산기슭의 키리하타(切畑)에 세워진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먼저 참배하기로 했습니다.

 

이 추도비는 1914-15년 고베수도 개수공사 중에 터널 낙반사고로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 3(김병순, 남익삼, 장장수)1929년 후쿠치야마선 철도의 개수공사 중에 다이너마이트 사고로 사망한 2명의 조선인 노동자 2(윤길문, 오이근)을 추도하기 위해 2020년에 건립됐습니다.

 

일행은 숙소 인근의 주소(十三)역에서 다카라즈카행 열차를 탔고, 이어 후쿠치야마(福知山)선으로 갈아타고 다케다오(武田尾)역에서 내렸습니다. 다카라즈카에서 다케다오까지는 3정거장에 불과했지만, 도시풍광은 완전히 사라지고 심산유곡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방문한다는 연락을 받고 정세화 선생과 신도 도시유키(真銅敏之) 선생이 차로 마중을 나와 주셨습니다. 다케다오역에서 키리하타의 추도비까지는 걸어서도 30분 이내의 짧은 거리지만, 무궁화 기념식수 행사를 돕기 위해 일찍 만푸쿠지에 도착하셨던 두 분께서 방문단의 편의를 위해 차편을 제공하신 것이지요.

 

말굽모양으로 굽은 무코(武庫)강이 소강과 만나는 곳에 차를 세우고, 거기서부터는 걸어서 추도비로 향했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세워진 신수이(親水)광장까지는 10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지금은 선로가 철거되고 침목들만 남아서 이곳이 한때 후쿠지야마선이 지나가던 철도였음을 보여줍니다. 침목들을 따라 걷다 보면 2개의 터널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 터널들이 바로 조선인 노동자들이 발파와 굴삭으로 파낸 터널이고, 그 중 하나가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의 현장입니다.

 

강승호, 이홍범 선생은 1월말의 방문 이래 두 번째 방문이었지만, 추도비 참배가 처음이었던 김중남, 조은혜 선생은 깊은 인상을 받으셨고, 특히 김중남 선생은 추도비 앞에 큰 절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jc, 2023/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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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陵宝塚々の会談出会自体意味ある会合でしたがめての出会いだからといって儀礼的挨拶だけをわし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今後交流協力重要原則討論されこれをじていにじてれるといういにじることができたものとみられます

 

それは参加者主要なキャリアからすでに推測できました金重男(キム·ジュンナム)先生全国公務員労組委員長歴任江陵市長候補経歴民主党員であり江陵原州大学校国際通商学科在職中姜承昊(カン·スンホ)教授中国沿海州との通商問題しい研究者です

 

 

このお二人共同代表という<1江陵フォーラム>対内的地域社会民主化目指対外的国際通商実質的拡大することに関心団体であることがかります

 

さらにこのお二人江陵出身として韓国社会民主化のためにくしてとした金成洙(キム·ソンス)烈士える人権団体<金成洙烈士記念事業会>理事めていることから普遍的人権伸張関心っているとみられます

 

 

一方今年4選挙当選した兵庫県議員橋本成年さん宝塚市役所勤務経歴とやはり公務員労組委員長経歴、「朝鮮学校無償化排除制度的差別主張これを是正するための市民請願主導しています

 

北野さと子市会議員はかつて20083宝塚市議会日本軍慰安婦問題する日本政府誠実対応請願採択するのに先頭同年7韓国訪問823回水曜デモで日本政府国家的ちをめてこそ慰安婦問題解決できる主張していましたらの活動日本地方議会議員として非常異例です

 

 

今日兵庫県進歩勢力保守勢力いという日本地域共通していますが自民党よりも保守的<維新>勢力巨大でありながらもこれに対抗する無所属政治家多数活躍しているという特異地域です

 

兵庫県議会定員86議席自民党24維新21公明党13保守党32進歩的野党である立憲民主党4共産党2少数です特異点無所属22議席にもなるというですが兵庫県知事斎藤元彦さんも無所属です

 

 

宝塚市議会定員26議席維新4自民党3公明党4などの保守党多数ですが過半数にはかず立憲民主党2)、共産党3)、社民党2)、参政堂1などの野党劣勢なのにして無所属7議席です市長山崎晴恵さんも無所属です

 

ちなみに近隣大阪府議会定員88維新55公明党14自民党7相対的進歩的野党である立憲民主党共産党はそれぞれ1ぎません大阪府知事吉村洋文さんも維新所属しています

 

 

橋本成年県議北野さと子市議する立憲民主党綱領、(1立憲民主主義追求、(2人権多様性保障される差別のない共生社会目指、(3個人幸福尊重される経済体制実現目指、(4持続可能発展5平和国際関係けて努力することに要約されます

 

この日訪問団った両議員朝鮮学校高校無償化含むことをめる街頭署名集会参加したのも人権多様性保障され差別のない共生社会実現するという立憲民主党目標合致するためだとみられます

 

 

この会談では交流協力具体的方策われ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議題事前調整がなかっためての会合だったからでしょう

 

しかし参加者はおいの政治的志向追求する目標ていること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ので今後江陵宝塚江原道兵庫県交流協力けたいパートナーになれるとじられます(jc, 2023/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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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과 다카라즈카 인사들의 회담은 만남 자체가 의미 있는 회동이었지만, 첫 만남이라고 해서 의례적인 인사만 교환한 것은 아닙니다. 향후 교류와 협력에 중요한 원칙이 토론됐고, 이를 통해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점을 서로 느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참가자들의 주요 경력으로 이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김중남 선생은 전국 공무원노조 위원장을 역임한 뒤 강릉 시장 후보 경력을 가진 민주당원이고, 강릉원주대학교 국제통상학과에 재직 중인 강승호 교수는 중국과 연해주와의 통상 문제에 밝은 연구자입니다.

 

 

이 두 분이 공동대표라는 점에서 <1강릉포럼>은 대내적으로 지역사회 민주화를 지향하면서, 대외적으로 국제 통상을 실질적으로 확대하는 데에 관심이 깊은 단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 두 분은, 강릉 출신으로서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가 젊은 나이에 목숨을 읽은 김성수 열사를 기리는 인권단체 <김성수기념사업회>의 이사를 맡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 인권 신장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올해 4월 선거에서 당선된 하시모토 나루토시 효고 현의원은 다카라즈카 시청 근무 경력과 역시 공무원노조 위원장의 경력을 가졌고, “조선학교의 무상화 배제는 제도적 차별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시정하기 위한 시민 청원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키타노 사토코 시의원은 일찍이 20083월 다카라즈카 시의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성실한 대응을 촉구하는 청원을 채택하는 데에 앞장섰고, 그해 7월 한국을 방문, 823차 수요시위에서 일본 정부가 국가적으로 잘못을 인정해야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었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일본 지방의회원으로 매우 이례적입니다.

 

 

오늘날 효고현은 진보세력이 약하고 보수 세력이 강하다는 면에서 일본의 다른 지역들과 공통되지만, 자민당보다 더 보수적인 유신회 세력이 거대하면서도, 이에 대항하는 무소속 정치인들이 다수 활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한 지역입니다.

 

효고현의회(정원 86)는 자민당(24)과 유신회(21)와 공명당(13) 등 보수당이 3분의2를 차지했고, 진보적 야당인 입헌민주당(4)과 공산당(2)은 소수입니다. 특이점은 무소속이 22석이나 된다는 점인데, 효고현의 지사 사이토 모토히코(斎藤元彦)씨도 무소속입니다.

 

 

다카라즈카시의회(정원 26)는 유신회(4)와 자민당(3)과 공명당(4) 등의 보수당이 다수이지만 과반에는 미치지 못했고, 입헌민주당(2), 공산당(3), 사민당(2), 참정당(1) 등의 야당도 약세인 반면, 무소속이 7석입니다. 시장 야마사키 하루에(山崎晴恵)씨도 무소속입니다.

 

참고로 인근 오사카부의 의회(정원 88)는 유신회(55)가 가장 많고, 공명당(14)과 자민당(7)이 상대적으로 약하며, 진보적 야당인 입헌민주당과 공산당은 각각 1석에 불과합니다. 오사카부의 지사 요시무라 히로후미(吉村洋文)씨도 유신회 소속입니다.

 

 

하시모토 나루토시 현의원과 키타노 사토코 시의원이 속한 입헌민주당의 강령은 (1) 입헌민주주의를 추구하고, (2) 인권과 다양성이 보장되는, 차별 없는 공생 사회를 지향하며, (3) 개인의 행복이 존중받는 경제 체제 구현을 목표로 하고, (4) 지속가능한 발전과 (5) 평화로운 국제관계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이날 방문단이 만난 두 의원이 조선학교의 고교무상화 포함을 요구하는 가두서명 집회에 참여한 것도 인권과 다양성이 보장되어 차별 없는 공생 사회를 구현한다는 입헌민주당의 목표에 부합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날 회담에서는 교류와 협력의 구체적인 방안들이 논의된 것은 아닙니다. 의제의 사전 조율이 없었던 첫 만남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참석자들은 서로의 정치적 지향과 추구하는 목표가 비슷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 향후 강릉과 다카라즈카, 강원도와 효고현의 교류와 협력을 위한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jc, 2023/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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宝塚駅高校無償化集会訪問団橋本成年兵庫県議員北野さと子宝塚市議員面談しました513日午後4時半宝塚市内のワシントンホテルロビーででした

 

午前11手軽服装街頭署名集会参加していた両議員訪問団うためスーツに着替えて出席する誠意しました金重男(キム·ジュンナム)姜承昊(カン·スンホ)趙殷慧(チョ·ウネ)先生午後ずっと宝塚市内視察するのにれていたでしょうが期待感って面談様子でした

 

 

東京からんできたキム·ジェホ(김재호)先生面談通訳江陵チームは両議員江陵コーヒーと申師任堂インジョルミをプレゼントし意外両議員印象けたものとみられます

 

この面談長年念願でした江陵宝塚々が直接会って共通関心事懸案についていながら交流協力のきっかけを模索することを間望んできました

 

 

202011日本<チームアイ(当時会長近藤富男先生)>依頼<宝塚朝鮮人追悼碑>犠牲者5韓国内縁故地およそ半年にわたる調査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さんの故郷江陵であることをらかに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姜承昊, 洪眞善(ホン·ジンソン)柳善起(·ソンギ)先生などの案内慶州金氏樹隱公派江陵支会金子正(キム·ジャジョン)金喆旭(キム·チョルウク)先生けで可能なことでした

 

そのから金炳順さんの犠牲媒介江陵宝塚づくことをんでいましたそれが金炳順さんの犠牲くすることだとじたからです

 

 

江陵市<宝塚朝鮮人追悼碑>建設主導者感謝牌贈呈するよう請願したのもそのためでしたこの請願れられ江陵市役所のパク·ジョンシ(박종시)パク·インスン(박인순)係長東京所在江原道本部のカン·ビョンジク(강병직)本部長とムン·ミヒョン(문미현)部長迅速推進20224金漢根(キム·ハングン)江陵市長名義感謝牌6日本人2在日朝鮮人贈呈されました

 

その江陵宝塚への関心げてほしいといながらよく江陵れました人権団体<金成洙(キム·ソンス)烈士記念事業会>人文学会<ロングロード>そして市民運動団体<1江陵フォーラム><バリの>のキム·ヒョンドン(김현동)先生東海江原道議員キム·ヒョンウォン(김형원)先生とも交流することになりましたこの江陵-宝塚交流につながることをっていました

 

 

20228江原大学校学術誌<平和たちPEACES><つの都市物語:江陵宝塚>した論文寄稿江陵宝塚交流がおいにする両地域市民認識変化させてくれることを人的·象徴的交流にとどまらず物的·実質的交流につながることをっていました

 

また両地域交流がり在日朝鮮学校後援にもつながり両国民主化にも役立つことをっていましたサッカーのふるさと江陵在日朝鮮学校のサッカー支援してくれるよう要請もしましたし江陵<チョッカベ(조각배=片舟)コンサート>こうという提案もしました<江陵人権映画祭><舞踊靴>参加するめました

 

 

このような念願努力姜承昊教授(江陵原州大学校国際通商学)127-30<舞踊靴>1次日本訪問団参加してついに今回訪問団<1江陵フォーラム>共同代表金重男先生事務局長趙殷慧先生参加することになりました

 

今回面談実現したのは日本<チームアイ>鄭世和(チョン·セファ)先生木基文先生努力のおかげでした二人最近県議市議選出馬した両議員選挙運動支援することで信頼両議員当選確定した自然<1江陵フォーラム>との面談提案しました

 

 

<1江陵フォーラム>日程両議員動線考慮して面談自然われるようめてさった木基文鄭世和先生から感謝申げます(jc, 2023/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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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역의 고교무상화 집회가 끝난 후 방문단은 하시모토 나루토시(橋本成年) 효고 현의원, 키타노 사토코(北野サト) 다카라즈카 시의원과 면담을 가졌습니다. 513일 오후4시 반, 다카라즈카 시내 워싱턴 호텔 로비에서였습니다.

 

오전 11시 간편한 복장으로 가두서명 집회에 참여했던 두 의원은 방문단을 만나기 위해 정장으로 갈아입고 참석하는 성의를 보였습니다. 김중남, 강승호, 조은혜 선생도 오후 내내 다카라즈카 시내를 시찰하느라 피곤했겠으나, 기대감을 가지고 면담에 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도쿄에서 날아온 김재호 선생이 면담의 통역을 맡았고, 강름팀은 두 의원에게 강릉 커피와 신사임당 인절미를 선물했고, 뜻밖의 선물에 두 의원은 좋은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날의 면담은 저의 오랜 염원이었습니다. 강릉과 다카라즈카의 인사들이 직접 만나서 공통관심사를 찾고 현안을 의논하면서 교류와 협력의 계기를 모색하기를 오랫동안 바랐습니다.

 

 

202011월 일본 <팀아이(당시 회장, 콘도 도미오 선생)>의 의뢰로 저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 5분의 한국 내 연고지를 찾기 시작했고, 약 반년의 조사 끝에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릉임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강승호, 홍진선, 유선기 선생 등의 안내와 경주김씨 수은공파 강릉지회의 김자정, 김철욱 선생의 도움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김병순씨의 희생을 매개로 강릉과 다카라즈카가 가까워지기를 바랐습니다. 그것이 김병순씨의 희생을 값지게 하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강릉시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 주도자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하도록 청원을 낸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이 청원은 받아들여졌고, 강릉시청의 박종시, 박인순 계장, 도쿄 소재 강원도 본부의 강병직 본부장과 문미현 부장의 신속한 추진으로, 20224월 김한근 강릉시장 명의의 감사패가 6명의 일본인과 2명의 재일조선인에게 증정되었습니다.

 

그 뒤로도 저는 강릉 분들이 다카라즈카에 대한 관심을 넓혀가 주시기를 바라면서, 자주 강릉을 방문했습니다. 인권단체 <김성수기념사업회>, 인문학 모임 <롱로드>, 그리고 시민운동단체 <1강릉포럼>을 알게 됐고, <바리의 꿈>의 김현동 선생, 동해의 강원 도의원 김형원 선생과도 교류하게 됐습니다. 이 인연들이 강릉-다카라즈카의 교류로 이어지기를 바랐습니다.

 

 

20228월 강원대 학술지 <평화들 PEACES><두 도시 이야기: 강릉과 다카라즈카>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하면서, 강릉과 다카라즈카의 교류가 서로에 대한 양 지역 시민들의 인식을 변화시켜 주기를 바랐고, 인적, 상징적 교류에 머무르지 말고 물적, 실질적 교류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또 두 지역의 교류의 폭이 넓어지면서 재일 조선학교 후원으로도 이어지고, 양국의 민주화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축구의 고장 강릉이 재일조선학교의 축구부를 지원해 주시도록 요청도 했고, 강릉에서 <조각배 콘서트>를 열자는 제안도 했습니다. <강릉 인권영화제><무용신>이 참여하는 방안도 강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같은 염원과 노력은 강승호 교수(강릉원주대학교 국제통상학)127-30일의 <무용신> 1차 일본방문단에 참가하면서 결실을 맺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번 방문단에 <1강릉포럼>의 공동대표 김중남 선생과 사무국장 조은혜 선생도 참여하게 됐습니다.

 

이번 면담이 성사된 것은 일본 <팀아이>의 정세화 선생과 사사키 모토후미(木基文)선생님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두 분은 최근 현의원과 시의원 선거에 출마한 두 의원의 선거 운동을 지원하면서 신뢰를 쌓았고, 두 의원의 당선이 확정된 후에 자연스럽게 <1강릉포럼>과의 면담을 제안했습니다.

 

 

<1강릉포럼>의 일정과 두 의원의 동선을 고려해 면담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애써주신 사사키 모토후미, 정세화 선생님께 진심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jc, 2023/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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宝塚高校無償化集会もともと訪問団日程まれていませんでしたしかし3日前大阪到着した鄭世和(チョン·セファ)先生相談この宝塚集会参加することにしました

 

前日12夕方大阪到着した<和江文化財團>李洪範(·ホンボム)先生玄洪珍(ヒョン·ホンジン)さんはもちろん当日13未明飛行機関西空港到着した<1江陵フォーラム>のキム·ジュンナム(김중남)カン·スンホ(강승호)チョ·ウネ(조은혜)先生ホテルのチェックインも先送りしてすぐ宝塚直行集会参加しました

 

 

たちはこの集会日本人主導かれていることにきました日本人活動家たちが集会うことに誠意くす姿感動的でした

 

鄭世和先生翌日のムクゲの植樹準備のため12時頃集会現場午後3時頃宝塚駅りましたが日本人活動家たちは集会けていました演説家はかすれていてスローガンを々のにも気味でしたそれにもかかわらずらの街頭デモと署名運動午後5まできました

 

朝鮮学校高校無償化にどうして日本人がこんなに熱心なのかになりました<チームアイ>先生たちの説明簡単でした朝鮮学校問題在日朝鮮人問題である以前日本社会民主化問題だという認識からだそうです

 

 

日本2010から高校無償化実施しました公立学校学費らず私立学校には政府教育補助金支給されめましたこの政策日本民主党政権った時期導入されたにもかかわらず朝鮮学校対象からされました

 

自民党安倍内閣朝鮮学校への補助金支給拒否しましたすでに支給されていた小学校中学校補助金中断しました北韓日本人拉致ミサイル発射天安艦襲撃延坪島砲撃などが状況北韓公民自任する朝鮮学校支援できないと主張しました

 

これにして朝鮮学校財団朝鮮学院抗弁しにくい側面があります朝鮮学校制度まった1953朝鮮学院日本政府教育補助金自発的ったことがあります。 「うちの子供たちの教育たちのおでするから日本政府関与するな要求しました民族教育過程内容する日本政府干渉排除するためでした

 

 

しかし80年代って状況わりました在日朝鮮人どもたちを朝鮮学校かせなくなりました在日同胞北送事業=帰国事業日本人拉致事件などの影響在日同胞社会きな打撃えたと評価されています文部省統計によりますと一時20万人えていた朝鮮学校在学生数2015には5千人以下減少しました

 

朝鮮学院日本中央政府地方自治体交渉北韓距離くいくつかの措置ることで·中級学校補助金確保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が2010高校無償化政策契機朝鮮学校への補助金全面中断されました2019には幼児教育無償化対象から朝鮮学校付設幼稚園まで補助金対象から除外されました

 

 

在日朝鮮人朝鮮学校朝鮮学院日本政府攻勢にまともに対処できない日本人しました日本人活動家はこれまでの紆余曲折はともかく朝鮮学校普遍的無償教育から除外したのは民主社会でありない制度的差別だと主張しています

 

良心的日本人支持にもかかわらず画期的国際情勢変化がない日本政府朝鮮学校無償化教育対象める可能性はなさそうです衰退する朝鮮学校自力回生する可能性希薄えます

 

 

それにもかかわらず相手主張同意しなくてもその主張維持する権利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日本人実践印象けました訪問団宝塚街頭デモや署名運動参加することをめたのもそうした努力感動したからだといます(jc, 2023/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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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고교무상화 집회는 원래 방문단 일정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3일 전에 오사카에 도착한 저는 정세화 선생님과 의논 끝에 이 다카라즈카 집회에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전날(12) 저녁 오사카에 도착한 <화강문화재단>의 이홍범 선생과 현홍진씨는 물론, 당일(13) 새벽 비행기로 간사이 공항에 도착한 <1강릉포럼>의 김중남, 강승호, 조은혜 선생도, 호텔 체크인도 미루고 바로 다카라즈카로 직행, 집회에 참가했습니다.

 

 

우리는 이 집회가 일본인 주도로 열리고 있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일본인 활동가들이 집회를 진행하는 데에 열과 성을 다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정세화 선생과 저는 다음날의 무궁화 식수 준비를 위해 12시쯤 집회 현장을 떠났다가 오후3시쯤 다카라즈카 역으로 되돌아갔는데, 일본인 활동가들은 집회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연설가들의 목은 쉬어있었고, 구호를 외치는 분들의 얼굴에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가두시위와 서명운동은 오후5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조선학교의 고교 무상화에 어째서 일본인들이 이다지 열심인가. 궁금했습니다. <팀아이> 선생님들의 설명은 간단했습니다. 조선학교의 문제는 재일조선인들의 문제이기 이전에, 일본사회의 민주화 문제라는 인식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본은 2010년부터 고교 무상화를 실시했습니다. 공립학교는 학비를 받지 않고, 사립학교에는 정부의 교육보조금이 지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정책은 일본 민주당이 집권했던 짧은 시기에 도입되었는데도 조선학교가 대상에서 제외됐습니다.

 

자민당의 아베 내각도 조선학교 보조금 지급을 거부했습니다. 이미 지급되던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보조금도 중단했습니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미사일 발사,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북한 공민을 자처하는 조선학교를 지원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조선학교 재단인 조선학원도 항변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조선학교 체계가 시작되었던 1953, 조선학원은 일본 정부의 교육 보조금을 자발적으로 거절한 바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교육은 우리 돈으로 할 테니, 일본 정부는 관여하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민족교육의 과정과 내용에 대해서 일본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상황이 변했습니다. 재일동포들이 자녀들을 조선학교에 보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재일동포 북송사업(=귀국사업)과 일본인 납치사건 등의 여파가 재일동포 사회에 큰 타격을 준 것으로 평가됩니다. 문부성 통계에 따르면 한때 20만명을 헤아리던 조선학교 재학생 수는 20155천명 이하로 감소했습니다.

 

조선학원은 일본의 중앙 및 지방정부들과 협상해, 북한과 거리를 두는 몇 가지 조치를 취함으로써 초,중급학교의 보조금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2010년 고교무상화 정책을 계기로 조선학교 보조금은 전면 중단됐습니다. 2019년에는 유아교육 무상화 대상에서 조선학교 부설 유치원까지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됐습니다.

 

 

재일동포가 조선학교를 떠나고, 조선학원이 일본 정부의 공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가운데, 일본인들이 나섰습니다. 일본인 활동가들은 그동안의 우여곡절이야 어떻든 조선학교를 보편적 무상교육에서 제외한 것은 민주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제도적 차별이라고 주장합니다.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획기적인 국제 정세의 변화가 없는 한,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를 무상화 교육 대상으로 포함시킬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쇠퇴하는 조선학교가 자력으로 회생할 가능성도 희박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아도 그 주장을 유지할 권리는 지켜주어야 한다는 일본인들의 실천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방문단이 다카라즈카의 가두시위와 서명운동에 동참하기로 한 것도 그러한 노력에 감동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jc, 2023/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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訪問団参加した最初行事513宝塚駅前かれた朝鮮学校高校無償化含める街頭署名集会でした

 

土曜日午前なのに20人余りの活動家まり、「高校無償化朝鮮学校排除したのは差別市民にビラを同調する市民署名けました

 

 

宝塚にはつあります私鉄阪急宝塚駅JR宝塚駅ですねどちらも電車通行量きなですジェイアール(JR=Japan Railways)はもともと国鉄でしたが19876つにかれて民営化されたのでではJR私鉄です

 

宝塚には温泉1877最初商業化された宝塚温泉開業日本全土からくの観光客めました観光客ぶためにくから鉄道架設されたのはもちろんです

 

JR宝塚線前身である国鉄福知山線尼崎-宝塚-福知山区間架設されたのが1891阪急宝塚本線大阪梅田-宝塚区間架設されたのが1910です

 

 

阪急電鉄会社よりくの観光客をより誘致するため1914少女歌劇団創設ショービジネスを開始しました日本初のガールズグループだったわけですが宝塚少女歌劇団専用大劇場定期的超豪華公演提供したので観光客はさらにくなりました温泉やショービジネスでホテルえました

 

宝塚はまた漫画家手塚治虫活動のおかげで日本漫画漫画映画発祥地としてもられています宝塚日本漫画のメッカとぶこともあります手塚治虫記念館歴史温泉歌劇団大劇場んで宝塚3大名物えられます

 

 

この3大名物のおかげででもくの観光客宝塚せています宝塚人口22ほどの小都市ですが毎年120万人観光客宝塚れます週末休日には宝塚駅人出がさらにえます

 

JR宝塚駅阪急宝塚駅はお20メートルほどれてかいっていて高架橋でつながっているのであるからることができますどちらもきな終着駅電車通行量いので住民観光客わず通行人いです

 

 

街頭署名集会はその高架橋JR駅側かれました日本語からない訪問団をかけ高架橋沿ってっているだけでした日本人活動家たちは一緒をかけ順番拡声器演説したり朝鮮学校える合唱したりしました

 

この街頭集会一番不思議だったのは活動家がほとんど日本人だったというです在日朝鮮人がいなくはありませんでしたが20人余りの参加者のほとんどが日本人活動家でした

 

 

たちの訪問団6たちを案内するためにてこられた<チームアイ>鄭世和(チョン·セファ)具実(クシル)先生もキャンペーンに参加してはいましたがこの集会はもともと日本人活動家主催する恒例行事でした

 

宝塚日本人活動家たちは毎年4高校無償化朝鮮学校めることをめる街頭集会いています朝鮮学校高校無償化政策発表された20104からまり毎年4か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今年事情があってれてかれることになりそのおかげで韓国訪問団参加できたのです

 

 

この街頭署名キャンペーンには宝塚出身日本人政治家参加しました兵庫県会議員橋本成年議員宝塚市会議員北野サト子議員らです

 

 

通行人反応比較的冷淡でした観察では大体201くらいの通行人がチラシをもらいそのうちの一部説明いて連判状署名しましたほとんどの市民活動家えを無視してぎました(jc, 2023/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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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단이 참가한 첫 행사는 513일 다카라즈카 역 앞에서 열린 조선학교의 고교 무상화 포함을 요구하는 가두서명 집회였습니다.

 

토요일 오전인데도 20여명의 활동가들이 모였고, “고교 무상화에 조선학교를 배제한 것은 차별이라고 호소하면서 시민들에게 전단을 나눠주었고, 동조하는 시민들의 서명을 받았습니다.

 

 

다카라즈카에는 역이 두 개입니다. 사철 한큐(阪急)의 다카라즈카 역과 제이알(JR) 다카라즈카 역이지요. 둘 다 기차 통행량이 많은 큰 역입니다. 제이알(JR=Japan Railways)은 원래 국철이었지만 19876개로 쪼개지면서 민영화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제이알도 사철입니다.

 

다카라즈카에는 좋은 온천이 많았고 1877년 최초로 상업화된 다카라즈카 온천이 개업하면서 일본 전역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관광객을 실어 나르기 위해 일찍부터 철도가 가설된 것은 물론입니다.

 

제이알 다카라즈카선의 전신인 국철 후쿠치야마선(아마가사키-다카라즈카-후쿠치야마 구간)이 가설된 것이 1891, 한큐 다카라즈카 본선(우메다-다카라즈카)이 가설된 것이 1910년입니다.

 

 

한큐 전철회사는 더 많은 관광객을 더 오래 유치하기 위해 1914년 소녀가극단을 창설, 쇼 비즈니스를 시작했습니다. 일본 최초의 걸그룹이었던 것인데,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의 전용 대극장을 세우고 정기적으로 초호화 공연을 제공했으므로 관광객은 더욱 많아졌습니다. 온천과 쇼 비즈니스로 호텔업이 번성했습니다.

 

다카라즈카는 또 만화작가 데즈카 오사무의 활동 덕분에 일본 만화와 만화영화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카라즈카를 일본 만화의 메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은 역사가 오랜 온천, 가극단의 대극장과 함께 다카라즈카의 3대 명물로 꼽힙니다.

 

 

3대 명물 덕분에 지금도 많은 관광객이 다카라즈카에 몰려듭니다. 다카라즈카는 인구 22만 정도의 소도시이지만 매년 약 120만명의 관광객이 다카라즈카를 찾습니다. 주말과 휴일이면 다카라즈카 역의 인파가 더욱 불어납니다.

 

JR 다카라즈카 역과 한큐 다카라즈카 역은 서로 20미터쯤 떨어져 마주보고 있고, 고가다리로 연결되어 있어서 한 역에서 다른 역으로 건너갈 수 있습니다. 둘 다 큰 종착역이고 기차 통행량이 많기 때문에 주민과 관광객을 가리지 않고 통행인들이 많습니다.

 

 

가두서명 집회는 그 고가다리의 JR역 쪽에서 열렸습니다. 일본어를 모르는 방문단은 가슴에 구호를 걸고 고가다리를 따라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일본인 활동가들은 함께 구호를 외치고, 돌아가면서 확성기로 연설도 하고, 조선학교를 지지하는 노래를 합창하기도 했습니다.

 

이 가두집회에서 가장 신기했던 것은 활동가들이 대부분 일본인이었다는 점입니다. 재일동포, 즉 재일조선인들이 없지 않았지만, 20여명의 참가자 대부분이 일본인 활동가였습니다.

 

 

우리 방문단 6명과 우리를 안내하기 위해 나오신 <팀아이>의 정세화, 구실 선생님도 캠페인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이 집회는 원래 일본인 활동가들이 주최하는 연례 행사였습니다.

 

다카라즈카의 일본인 활동가들은 매년 4월 고교무상화에 조선학교 포함을 요구하는 가두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조선학교를 제외한 고교 무상화 정책이 발표된 20104월부터 시작되어 매년 4월에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올해는 사정상 조금 늦게 열리게 되었고, 그 덕분에 우리 방문단도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 가두서명 캠페인에는 다카라즈카 출신의 일본인 정치인들도 참가했습니다. 효고 현의원 하시모토 나루토시 의원과 다카라즈카 시의원 키타노 사토코 의원이 그들입니다.

 

 

행인들의 반응은 비교적 냉담했습니다. 제 관찰로는 대략 스무 명에 한 명 정도의 행인이 전단지를 받았고, 그중 일부가 설명을 듣고 연판장에 서명했습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활동가들의 호소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가곤 했습니다. (jc, 2023/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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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踊靴>会員たちが来日えて皆帰ってきましたくは23くは2週間関西れていたのですが参加者わせて6でした

 

<1江陵フォーラム>のキム·ジュンナム(김중남)姜承昊(カン·スンホ)チョ·ウネ(조은혜)先生513-15<和江(ファガン)文化財団>で李洪範(이홍범, イ·ホンボム)先生と玄洪珍(현홍진, ヒョン·ホンジン)さんが512-17<舞踊靴>会員としては510-23大阪兵庫県々なれました

 

 

今回訪問実務訪問です<舞踊靴>定期訪問区別するための名前です<舞踊靴>127-30めて訪日団構成していました30会員(1)大阪朝鮮学校開校70周年記念公演参観(2)宝塚朝鮮人追悼碑参拝(3)玉瀬滿福寺音楽会きました2次定期訪問10月初めに予定されています

 

ところで今回訪問性格います参加者皆共通目的日程遂行したのではなくなる任務のためになる日程動線活動しました

 

 

もちろん6参加したイベントもありました日本人団体主催した<朝鮮学校高校無償化含>のための街頭署名集会玉瀬参拝墓地にムクゲをえる行事がそれでした

 

にはそれぞれやるべきことがいました江陵-宝塚江原道-兵庫県交流協力策模索している<1江陵フォーラム>今回訪問じてその具体的方法見出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その第一歩としてキム·ジュンナムカン·スンホチョ·ウネ先生橋本成年(Hashimoto Narutoshi)兵庫県議員北野さと(Kitano Satoko)宝塚市会議員面談共通関心事懸案について意見交換しました

 

 

<和江文化財団>7月初大学生たちの来日プログラムを企画中です20人前後大学生1週間日本九州関西訪問することになりますがその期間中大学生れる場所参加するイベントを踏査める必要がありましたそれでイ·ホンボム常任理事とヒョン·ホンジンさんが今回訪日同行されたわけです

 

一方仕事4つでした(1) <舞踊靴>7キャンペーンで用意された舞踊靴朝鮮學校舞踊部伝達(2)2次訪問団日程動線もあらかじめ調べ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3) <青丘文庫研究会>月例会論文発表することになっていてそのにも(4)主要地域図書館記録保管所訪問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関西公演する資料調査する計画てました

 

 

今回実務訪問団参加した6はそれぞれなる団体しますが<舞踊靴>後援会員という共通です舞踊靴キャンペーンに参加すればもが<舞踊靴>後援者だからです<舞踊靴>はそれ自体よくまれた組織というよりは在日朝鮮学校舞踊部後援するためにまった個人団体連帯えます

 

キャンペーンがわれたり訪問団活動をする<舞踊靴>体系的活動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が普段各会員した団体友好協力めることに集中したいといます

 

 

<舞踊靴>snsのグループトークを中心朝鮮学校支援することを公示討論計画実行報告します会員数150人余りであるためこのようなコミュニケーションと実践可能です会員数300えると分業必要ですし指導部必要でしょうその非営利団体登録もして指導部選出して活動していくのがいいでしょう

 

のところ<舞踊靴>活動(1)2舞踊靴キャンペーンと沿海州キャンペーン(2)2定期訪問団構成程度にとどまっているのでのような単純体制でもうまくりしていけるといますそれまでは今回実務訪問のようなことがよくわれるといます

 

 

たちのスローガンはにまた一緒です実務訪問定期訪問そして舞踊靴沿海州キャンペーンをじて在外民族学校後援効果的になされるだけでなく<舞踊靴>姉妹団体疎通協力活発になることをっていま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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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신> 회원들이 일본 방문을 마치고 모두 돌아왔습니다. 짧게는 23, 길게는 2주일 동안 간사이 지역을 방문했던 것인데, 참가자는 모두 6명이었습니다.

 

<1강릉포럼>의 김중남, 강승호, 조은혜 선생께서 513-15, <화강문화재단>에서 이홍범 선생과 현홍진씨가 512-17, <무용신> 회원으로는 제가 510-23, 오사카와 효고현의 여러 곳을 방문했습니다.

 

 

이번 방문은 실무 방문입니다. <무용신>정기 방문과 구별하기 위한 이름입니다. <무용신>은 지난 127-30일 첫 번째 일본 방문단을 꾸린 바 있었습니다. 30명의 회원이 (1) 오사카 조선학교 개교70주년 기념공연을 참관했고, (2)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참배했고, (3) 타마세 만푸쿠지에서 음악회도 열었습니다. 2차 정기 방문은 10월초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방문은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참가자들이 모두 공통의 목적으로 같은 일정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임무를 위해 서로 다른 일정과 동선으로 활동했습니다.

 

 

물론 6명이 함께한 행사도 있었습니다. 일본인 단체들이 주최한 <조선학교 고교무상화 포함>을 위한 가두서명 집회와 타마세 참배묘역에 무궁화를 심는 행사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밖에는 각자 할 일이 달랐습니다. 강릉-다카라즈카, 강원도-효고현의 교류와 협력 방안을 모색 중인 <1강릉포럼>은 이번 방문을 통해 그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그 첫 걸음으로 김중남, 강승호, 조은혜 선생은 하시모토 나루토시 효고 현의원과 키타노 사토코 다카라즈카 시의원과 면담을 갖고 공통 관심사와 현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화강문화재단>은 오는 7월초 대학생들의 일본 방문 프로그램을 기획 중입니다. 20명 내외의 대학생들이 약 일주일 동안 일본의 규슈와 간사이 지역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 기간에 대학생들이 방문할 장소와 참가할 행사들을 답사하고 결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홍범 상임이사와 현홍진씨께서 이번 방일에 동행하신 것이지요.

 

한편, 제 일은 네 가지였습니다. (1) <무용신> 7차 캠페인으로 마련된 무용신을 무용부에 전달하고, (2) 2차 방문단의 일정과 동선도 미리 살펴야 했습니다. (3) <청구문고 연구회>의 월례모임에서 논문을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밖에도 짬짬이 (4) 주요 지역 도서관과 기록보관소를 방문해 최승희 선생의 간사이 공연에 대한 자료도 조사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번 실무 방문단에 참가한 여섯 명은 각기 다른 단체에 속하지만, <무용신> 후원회원이라는 점에서 공통입니다. 무용신 캠페인에 참여하면 누구나 <무용신> 후원자이기기 때문이지요. <무용신>은 그 자체가 잘 짜인 조직이라기보다는 재일조선학교 무용부를 후원하기 위해 모인 개인과 단체들의 느슨한 연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캠페인이 진행되거나 방문단 활동을 할 때는 <무용신>도 체계적으로 활동해야겠지만, 평소에는 각 회원이 속한 단체들과 우호와 협력을 다지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무용신>, 단톡방을 중심으로, 우리학교 지원에 관한 일들을 공지하고, 토론하고, 계획하고, 실행하고, 보고합니다. 회원 수가 150명 남짓이기 때문에 이 같은 소통과 실천이 가능합니다. 회원 수가 3백 명이 넘으면 분업도 필요하고 지도부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때는 비영리단체 등록도 하고, 지도부도 선출해서 활동해 나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무용신>의 활동이 (1) 2회의 무용신 캠페인과 연해주 캠페인, (2) 12회의 정기 방문단 구성 정도에 머물고 있으므로, 지금 같은 단순한 체제로도 잘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까지는 이번 실무방문과 같은 일이 자주 진행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슬로건은 따로 또 같이입니다. 실무 방문과 정기 방문, 그리고 무용신과 연해주 캠페인을 통해 해외 민족학교 후원이 효과적으로 이뤄질 뿐 아니라, <무용신>과 자매단체들의 소통과 협력도 활발해 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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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チームアイ>会員3韓国(統営羅州江陵ソウル)訪問してから3韓国<舞踊靴>会員30日本(大阪宝塚)訪問してから1月半ちましたこの2つの訪問じてくの事実らされ感動共有されました

 

また相互訪問じてよりくのことがまりました日本では<神戸青丘文庫>映像会<宝塚朝鮮人追悼碑>についてのドキュメンタリー(鄭世和制作)上映され韓国でも写真映像映像アルバムが制作されており書画報告書などが用意されています

 

韓国日本制作されるこれらの作品これから韓日市民交流協力する大切資料になると期待しながら時間財政そして才能次第一生懸命準備しています

 

 

ところで最近韓日政府っているかなことをながら両国市民共有したいことがあってこのきますそれは市民国家そして市民関係についてのえです

 

<舞踊靴>韓国市民まりで<チームアイ>日本市民団体ですこのつの市民団体協力じて在日朝鮮学校宝塚朝鮮人追悼碑についていろいろなことをしてきましたつまりたちの仕事市民活動であり政府立場方向なることがいのです

 

市民政府立場市民がもっと重要です市民国家主権者であり政府上官だからです国家/政府しい方向市民団体はこれを支援することができった政策展開する批判打倒することができます

 

それがまさに民主主義原則であり共和国性格です韓国日本はどちらも民主共和国標榜していますのでこうした原則られられるべきだとじていますそのについてはもが同意でき疑問余地はないでしょう

 

 

このでもっと強調したいのは韓日両国市民関係です韓国日本市民葛藤して対立するのではなく交流して協力でき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

 

韓日歴史する日本韓国政府歪曲りをすのは市民任務ですがそれは両国市民認識共有交流協力実現してこそ可能だといますこれまでそのような目標達成されなかったとすればそれは市民政府をまともに牽制できなかったからです政府非難することはできますが結局市民責任だということです

 

 

韓国市民には一部日本市民する敵対感もいれば日本市民にも嫌韓感情形成されているのも事実ですしかしそれは政府政策貫徹のために助長維持することであっても市民堅持する立場ではないといます

 

日本市民嫌韓感情在特会活動韓国市民反日感情はその範囲強度々ですがそれにして過剰反応する必要はないといます否定的よりは肯定的焦点わせたがはるかにいです

 

それで日本市民共感できることをして好意感謝そのようなことがおいにくように努力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ます。 「在日朝鮮学校支援宝塚朝鮮人追悼碑建設としてげられるのもそのためです

 

 

くおしましたがらせば市民事案によって政府政策賛成することも反対することもできますが市民では交流協力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どんなでも市民関心葛藤戦争ではなく平和繁栄だからです

 

これにして韓国日本市民共感理解くことができれば市民政府される主客転倒すことができますそして市民いことがくことがあります

 

市民韓日両国政府批判することができはそうすべきですしかし政府市民区別さ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市民同士対立葛藤ではなく交流協力堅持さ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うしてこそ過去ちをさず平和繁栄むことができるといます(2023/3/8,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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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팀아이> 회원 세 분이 한국(통영, 나주, 강릉, 서울)을 방문하신지 세 달이 지났고, 한국의 <무용신>회원 삼십 분이 일본(오사카, 다카라즈카)을 방문한지 한 달 반이 지났습니다. 이 두 방문을 통해서 많은 사실이 알려졌고, 깊은 감동도 공유되었습니다.

 

또 상호방문을 통해 더 많은 일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고베 청구문고>의 영상회에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다큐멘터리(정세화 제작)가 상영되었고, 한국에서도 사진과 영상으로 영상 앨범이 제작되고 있고, 시와 서화와 보고서 등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제작되는 이 작품들은 앞으로 한일 시민이 교류하고 협력하는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시간과 재정, 그리고 재주가 닿는 대로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한일 양국 정부가 벌이는 멍청한 짓을 보면서 공유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이 글을 씁니다. 그것은 시민과 국가, 그리고 시민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생각입니다.

 

<무용신>은 한국의 시민모임이고 <팀아이>도 일본의 시민단체입니다. 이 두 시민단체는 협력을 통해 재일 조선학교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관련된 일을 해 왔습니다. , 우리의 일은 시민 활동이고, 국가나 정부의 입장이나 방향과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시민과 정부의 입장이 다를 때는 시민이 더 중요합니다. 시민이 국가의 주권자이고 정부의 상사이기 때문입니다. 국가/정부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시민단체는 이를 지원할 수 있고, 잘못된 정책을 펼 때 비판하고 타도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의 원칙이고 공화국의 성격입니다. 당연한 말이지요. 한국과 일본은 둘 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하므로 이러한 원칙이 지켜질 수 있고, 지켜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고,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이 글에서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일 양국 시민의 관계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은 갈등하고 대립할 것이 아니라, 교류하고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일 과거사에 대한 일본과 한국 정부의 왜곡과 오류를 바로잡는 것은 시민의 임무이지만, 그것은 양국 시민들이 인식을 공유하고 교류와 협력을 이룰 때에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그런 목표가 달성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시민이 정부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부를 비난할 수는 있지만, 결국은 시민 책임이라는 말이죠.

 

 

한국 시민 중에서는 일부 일본 시민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분들도 있고, 일본 시민들 사이에도 혐한 감정이 형성되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부가 정책 관철을 위해 조장하고 유지하는 것일 수는 있어도, 시민들이 견지할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시민의 혐한 감정이나 재특회 활동과 한국 시민의 반일감정은 그 범위와 강도가 다양하지만, 그에 대해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그래서 일본 시민들의 좋은 점과 공감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호의와 감사를 드리고, 그런 일들이 상호간에 계속될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재일 조선학교> 지원과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이 좋은 예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길게 말씀드렸지만, 짧게 줄이면, 시민들은 사안에 따라 정부 정책에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지만, 시민들 사이에서는 반드시 교류와 협력이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나라든 시민의 관심은 갈등과 전쟁이 아니라 평화와 번영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한국과 일본 시민이 공감하고, 이해하고, 함께 일할 수 있다면, 시민이 정부에게 휘둘리는 주객전도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 사이에 좋은 일들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시민들은 한일 양국 정부를 비판할 수 있고, 지금은 그래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정부와 시민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시민들끼리는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교류와 협력이 견지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평화와 번영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23/3/8,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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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에서 만난 다케바야시 후미코를 실마리로 하여 살펴 본

조정희 (최승희 연구가, 2023210, 낙성대 살롱 발표문)

 

최승희의 유럽 데뷔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1939131일 파리 최대 극장 <살플레옐>24백의 객석은 거의 만석이었다. 관객석에는 화가 살바토레 달리와 패션 디자이너 엘사 스키파렐리도 앉아 있었다. 파리의 비평가들은 10여개의 신문에 공연평을 실었는데, 대부분이 호평이었다. 이 소식은 일본과 조선에도 전해져서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이 모두 자랑스러워했다.

 

프랑스의 다른 도시에서도 공연 요청이 밀려들어서, (2/26)과 마르세이유(3/1), 비아리츠(9/14)의 공연이 예약되었다. 프랑스만이 아니라 벨기에와 네덜란드, 독일과 이탈리아 등에서도 봄 시즌 공연이 기획되었고, 가을 시즌에는 북유럽과 동유럽 순회공연도 계획이 잡히기 시작했다. 유럽 첫 공연의 성공은 그만큼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살 플레옐>에서 성공한 데에 힘입어 최승희는 자신감을 가지고 유럽 순회 두 번째 공연을 준비했다. 유럽에서의 두 번째 공연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렸다. 다음 공연은 일주일 후인 26일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였다. 공연장은 브뤼셀 최대 극장 <팔레 드 보자르(Palais de Beaux Art)>였다. 1929년에 완공된 <팔레 드 보자르>의 주공연장 <앙리 르뵈프 홀(Salle Henry Le Bœuf)>은 수용인원 2,200명의 대형극장이었다. 수용인원 2,400명이었던 파리의 <살 플레옐> 극장 못지않았다.

 

어째서 브뤼셀이 두 번째 공연지로 선택되었는지는 알 수없지만, 아마도 흥행사 <국제 예술 기구>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 흥행사는 유럽 최대 흥행사였고, 아마도 유럽 순회공연을 위해 관행으로 정해진 일정이었을 수 있다. 1930년대나 지금이나 브뤼셀은 파리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이자 예술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화요일(1/31)<살 플레옐> 공연을 마친 최승희는 주말 이전에 벨기에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26, 월요일 저녁에 브뤼셀 공연이 잡혔기 때문이다. 브뤼셀은 파리 북동쪽 약 3백킬로미터 떨어진 도시로 벨기에의 수도이다.

 

최승희 일행은 아마도 기차로 이동했을 것이다. 요즘 파리 북역에서 브뤼셀 중앙역까지 고속철도 탈리스(Thalys)로 약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자동차나 고속버스를 타더라도 3시간 반 정도면 갈 수 있다. 1930년대의 기차들도 최고속도가 시속 160킬로미터였다고 하므로, 대략 2시간 정도면 브뤼셀에 도착했을 것이다.

 

브뤼셀 공연 하루 전인 25일 최승희는 벨기에 제2의 도시 안트워프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벨기에의 겐트 대학에 유학 중이던 고고학자 김재원이 후일 <조선일보(1939314)>에 게재한 기고문에서 최씨가 25일 오후 이곳 안트워프시에 왔을 때도 이 시내 세 신문사의 기자가 인터뷰를를 했다고 전했기 때문이다.

 

한편 193926일자 브뤼셀판 <르 마탱>는 최승희는 안트워프에 간 것은 단지 언론 인터뷰 때문이 아님이었음을 보여준다. 최승희는 토요일(2/5) 저녁 안트워프에 거주하던 일본인 친구 무용가를 방문했다고 전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이번 <최승희 트레일> 취재에서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 기사가 필자의 관심을 끌었다. 거기에는 내가 전혀 몰랐던 일본인 무용가 다케바야시 후미꼬(武林文子, 1888-1966)가 최승희(崔承喜, 1911-1968)의 친구로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브뤼셀 공연을 앞둔 최승희를 초청해 리셉션을 열어 주었던 것일까?

 

우선 이 기사의 원문과 번역문은 다음과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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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Matin> 1939년 2월6일, 월요일, 6면

한국 무용가 최승희 인터뷰

후미꼬 타케바야시(Foumiko Takebayashi)의 일본 무용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녀는 미야타 부인(Mme Miyata)이 되고 난후 무용을 그만 두었고, 적어도 무대에서의 공연은 하지 않고 있다.

그녀(미야타 부인)의 집 내부는 현대적이지 않다. <일본 이야기>의 저자로서 이 무용가는 순수한 동양 전통을 담은 세련된 예의로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 저는 지금 내 친구 최승희씨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녀는 처음으로 벨기에에 옵니다. 최승희씨는 월요일 저녁에 팔레 드 보자르(Palais des Beaux-Arts)에서 무용발표회를 합니다.

- 그렇습니다. 그녀가 왜....

경보기 울리는 소리. 발자국 소리.

최승희와 그녀의 남편이다.

최승희는 그녀의 일본인 친구보다 키가 더 크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첫눈에 보아도 영락없는 한국 사람이다. 부드럽지만 잘 정돈된 느낌을 주는 눈을 가진 그녀는 마치 먼 여행, 예를 들면 몽골 여행에서 막 도착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여우가죽 코트와 모자, 벨벳 치마를 입었다. 벨벳과 금색 장식을 한 보디스 치마는 동양적인 특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손이 곱다. 매우 훌륭하다. 가느다란 손가락들과 피처럼 붉은색으로 굽어진 손톱은 부처의 춤에서 손목을 사용하는 작품을 연상시킨다.

- (그렇다. 최승희씨가 영어를 할 줄 안다.) 불교는 제 작품 해석의 일부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다른 작품들은 모두 고대 민속 무용으로 거슬러 올라가지요. 기교적으로 말입니다. 게다가 마침내 저는 궁전 무용의 한국적인 주제로부터 영감을 받았습니다.

-음악은요?

- 제 무용의 반주에는 레코드판을 씁니다. 조선의 왕궁 음악가들이 취입한 음악들이지요. 거기에는 약 50여 가지의 악기들이 사용되었습니다. 그중에는 고토와 거문고, 피리 등이 포함되지요. 레코드 말고도 두 명의 음악가들이 저와 함께 와서 징과 타악기를 연주할 것입니다.

-무용 예술은 한국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최승희는 그것을 ‘재창조’해 내었습니다. (오늘 모임을 주선한 미야키 부인의 말이다.) 최승희가 어린 시절에 무용를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토쿄에 있는 저명한 이시이 무용학교에서 최승희는 20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을 공부했습니다. 여러분이 보다시피 최승희씨는 몸과 영혼을 무용 예술에 헌신한 것이지요. 그런 열정을 가졌던 겁니다. 그리고 나서 파리로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잘 압니다. 의상은 어떻습니까?

-각각의 작품들에 맞도록 최승희씨가 직접 제작한 것들입니다. 약간 고전적이면서도 절반 정도는 미래주의적인 냄새가 나도록 만들었어요... 무용은...

그때 최승희가 웃으면서 나무 상자에 담아서 제공된 ‘사케’를 집어들기 위해 그녀의 부드러운 손목을 뻗었다.

전축 레코드판의 표지에는 “사케와 사랑”이라고 씌여 있었다.

갑자기 우리를 사로잡은 이 우아한 분위기가 일본식인지 한국식인지를 구별할 수 없었다.

소파에는 일본식 가운이 걸쳐져 있었는데 금색으로 새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수집가들이 탐낼 만한 경이적인 가치를 가진 것이다.

사케는 논의 들판처럼 달콤하다. (Ra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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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바야시 후미코에 대한 궁금증이 일기는 했지만, 이어지는 취재에서 새로운 자료가 자꾸 나오는 바람에 곧 잊혀졌다. 그러나 모나코 취재에서 그의 이름이 다시 등장했다. 모나코 <루이 노타리 도서관(la Bibliothèque Louis Notari)>에서는 최승희 관련 기사를 한 건도 발견하지 못했고, 따라서 최승희의 모나코 공연은 없었던 것으로 결론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일본인무용등의 키워드를 사용해 기사를 다시 검색하자 192618일자 니스판 <르 쁘띠 주날>에서 다음과 같은 단신 기사가 발견됐다.

 

“(제목) 일본 여자 무용수의 출연 거부에 감독이 얼굴에 권총을 발사. (니스, 1월7일) 몬테카를로의 한 댄스홀에서 공연 중이던 일본 무용단의 감독이 여자단원의 얼굴에 권총을 쏘았다. 그 여자 무용수가 출연횟수 채우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총격자는 체포됐고, 피해자의 얼굴 부상은 심각하지 않다.”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무용단장은 왜 권총을 가지고 다녔을까? 무용단원이 어째서 출연을 거부했을까? 출연거부가 총부림을 할 만큼 심각한 사안이었을까? 가해자가 체포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얼굴에 총상을 입었는데도 용태가 심각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더구나 이 기사에는 몬테카를로라는 도시 이름을 제외하고는 밝혀진 이름이 없었다. 사건이 발생한 댄스홀의 이름도 없었고, 일본인이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름도 밝혀져 있지 않았다. 한 문단에 불과한 단신이지만 의문점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당시 파리의 신문들도 이 사건을 흥미롭게 여겼던 모양이다. 후속 기사들이 나왔다. 19일자 <르 주날>110일자 <르에코 드알제(L'Echo d'Alger)>의 기사가 그것이다. <르에코 드알제>일본 언론인의 모험이라는 평범한 제목으로 4면에 배치했지만, <르 주날>일본 여무용가의 소설 같은 이야기라는 다소 극적인 제목으로 1면에 보도했다.

 

 

이 두 기사는 똑같이 ‘18일 니스(Nice)기사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아 같은 통신사의 기사를 받아 쓴 것으로 보였다. 내용도 대동소이하다. 두 신문은 이 총격 사건의 팩트(事實)와 함께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름을 밝혔다.

 

“(1926년) 1월4일 목요일 밤, 일본인 무용가 타케바야시는 옥스퍼드 호텔을 나서던 중, 같은 국적의 무용가가 쏜 권총에 피격되었다. 총탄은 그녀의 입에 맞았다. ... 범인 무용가 카와무라(Kawamura)는 도주했으나, 타케바야시 여사의 남편에게 보상금을 제공하고 난 후에, 체포되었다. 피해자의 부상은 심각하지는 않다.” 기사는 범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이 없었지만 피해자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 자그마한 무용가는 3주전 (파리의) <페미나 극장(Théâtre Femina)>에서 공연한 바 있다. 결혼하고, 이혼하고, 재혼한 그는 도쿄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요시와라(Yoshiwara)의 하녀와 웨이트리스, 무용가 등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바 있다. 기자 시절에는 사회적 의문점들을 파헤쳐 선정적으로 보도하곤 했다.”

 

<페미나 극장> 공연은 파리 일간지를 통해 확인되었다. 19251219일에 열렸던 공연이었다. 하지만 타케바야시 후미코가 주인공은 아니었다. 무용가 코모리 토시(Komori Toshi)의 공연에 타케바야시가 찬조 출연한 것이다. 이 공연의 광고문과 안내문에는 타케바야시 후미코가 일본 무용가로 소개되었으나, 사실 그가 정식으로 무용을 배우거나 전공한 적은 없었다.

 

이어서 기사는 그녀가 5년 전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딸을 낳았는데 그 아이를 소재로 <일본 소녀의 유럽 여행(Le voyage d'un bébé japonais en Europe)>이라는 책을 썼다고 소개했다. 이 책은 일본어로 저술되었지만 후일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그밖에도 다케바야시 후미코는 1933<일본 이야기(Contes japonais racontés)>라는 단행본을 출판한 바 있다.

 

 

뒤이어 두 신문 기사는 (1923) 일본에서 끔찍한 지진이 일어나자 그녀는 중국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정치 요원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서술했다. 중국에서 일본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말로 들렸다. 그랬다면 타케바야시 후미코는 일본판 마타 하리였던 셈이다.

 

또 타케바야시 후미코는 유곽의 하녀와 식당의 웨이트리스로도 일한 바 있다고 서술됐다. 기사에는 요시와라(Yoshiwara)의 하녀로 일했다고 했다. 요시와라(吉原)17세기 이래 에도(江戸), 즉 오늘날의 도쿄에서 영업하던 정부 공인 유곽(遊廓), 즉 집창촌이다. 후미코는 잡지기자 시절인 1915년 이곳에 하녀로 잠입해 취재한 후 르뽀 기사를 쓴 바 있었다.

 

후미코가 웨이트리스로 일했던 것은 자신의 식당에서였다. 작가 타케바야시 무소안(武林無想庵, 1880-1962)과 결혼한 후 프랑스로 건너간 후미코는 192411월 파리의 케플러가 8번지(8 rue Kepler)일본식당 <고게츠(湖月)>를 개업했었다. 런던에 본점을 두고 있는 <고게츠>의 파리 지점이었다.

 

후미코가 춤을 추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정식 무용 교육을 받은 바 없었던 후미코는 기억과 눈썰미로 일본 춤을 추면서 식당을 홍보했다. 식당보다 춤이 호평받자 후미코는 무용가를 자처했고 급기야 192512월에는 샹젤리제 거리의 <페미나 극장>에서 정식 무용 공연에 찬조 출연하기에 이르렀다.

 

 

<르 주날><르에코 드알제>는 총격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몇 가지 제시했으나 의문점이 아주 가신 것은 아니었다. 우선 기사에서 몬테카를로라는 지명이 사라졌다. 그래서 이 기사만 보면 이 사건이 니스에서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위키피디어 백과사전은 이 사건의 발생지를 니스로 명시했다.

 

사건 발생장소도 한 댄스홀에서 ‘<옥스퍼드 호텔>의 현관 계단으로 바뀌었는데 몬테카를로에는 <옥스포드 호텔>의 기록이 없다. 같은 이름의 호텔이 오늘날까지 영업 중인 도시는 칸느뿐이다. 물론 1920년대에 몬테카를로나 니스에도 <옥스포드 호텔>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지난 90년 동안 폐업했거나 상호를 변경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의문은 범인 카와무라였다. 위키 백과사전은 범인이 카와무라 이즈미(川村泉)라고 서술했지만, 그는 무용가가 아니라 사업가였다. 더구나 범인이 체포되기 전에 피해자의 남편에게 보상금을 제공했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을 안은 채, 필자는 유럽 취재를 마치고 귀국한 후, 이 인물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이번에는 일본 자료를 찾아보았다. 짐작대로 이 사건은 일본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아사히신문의 특파원이 파리에 주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모나코 총격 사건은 일본에도 자세히 전해졌다.

 

필자가 접한 자료 중에서는 잡지 <후후세이카츠(夫婦生活)> 19503월호 기사가 이 사건을 가장 포괄적이고 심층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보였다. 기사 제목은 모나코의 요녀 다케바야시 무소안 부인(モナコの妖姫 武林夢想庵夫人)”이었다.

 

사건 발생 후 25년이나 지난 후에 기억과 회상으로 작성된 기사지만, 기고자 스기하라 히로유키(杉原啓之介)는 사건 당사자들과도 가까운 사람이었으므로 소문과 오류를 걸러내고 사실 중심으로 서술한 것으로 보였다. 적어도 이 기고문은 프랑스 신문 기사들이 남겨놓은 공백을 메꾸기에는 충분했다.

 

우선 스기하라 히로유키는 총격 사건이 일어난 곳이 프랑스의 니스가 아니라 모나코의 몬테카를로라고 못 박았. 기사 제목부터 모나코의 요희였다.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의 이름도 카와무라 이즈미(川村泉)가 아니라 카와무라 소레가시(川村某)라고 서술했다. (위키 백과사전이즈미()’는 익명을 가리키는 소레가시()’를 잘못 읽은 것으로 보인다.)

 

이 카와무라는 런던의 일본 식당 <고게츠(湖月)>의 경영자였고 1925년의 파리 박람회에서 일본 요리 부문을 담당했다. 파리 박람회에서 후미코를 만난 카와무라는 후미코의 미색(美色)에 반해 <고게츠>의 파리 지점을 내자고 제안했고. 카와무라의 재력(財力)에 반한 후미코는 이를 수락했다.

 

불륜을 위해 급조된 <고게츠> 식당이 제대로 경영되었을 리 없었다. 두 사람은 이내 언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식당의 경영난과 후미코의 낭비벽 때문이었다. 후미코와 카와무라의 불륜은 남편 무소안의 면전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엽기적이었다. 스기하라 히로유키는 후미코가 무소안과 결혼한 것은 그를 사랑했거나 그의 문학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파리로 오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192512월 프랑스 공연을 위해 파리를 방문한 코모리 토시(小森敏, Toshi Komori) 때문에 후미코의 남성편력은 한층 복잡해졌다. 코모리 토시의 <페미나 극장> 공연에 후미코가 찬조 출연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19261월 코모리가 남부 프랑스로 공연 여행을 떠나자 후미코도 이에 동행했다. 후미코로서는 공연을 빙자한 애정 행각이었던 셈이다.

 

이 무렵 식당 경영과 돈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었다. 파리를 떠나면서 후미코는 <고게츠>식당의 채권자들에게 부도 수표를 발행했다. 화가 난 카와무라는 후미코를 찾으려 몬테카를로 따라갔고, 그를 찾은 후 권총으로 쏘아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총격 사건은 최초의 보도처럼 공연 계약이나 출연 횟수때문이 아니라 질투와 돈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후미코의 총격 상처는 심각해 보였다. 총알이 오른쪽 뺨으로 들어가서 구강을 지나 왼쪽 뺨으로 관통해 나갔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빨이나 혀를 포함해 구강 안팎에 다른 상처가 전혀 없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더구나 치료를 끝낸 후에는 후미코의 뺨에 보조개 같은 자국을 제외하고는 흉터가 없었다고 했다. 이를 두고 스기하라 히로유키는 세계에서 미용 기술이 가장 발달한 나라에서 치료를 받았던 덕분일까?”라고 언급했었다. 그는 또 의문이 드는 독자가 있다면 게이오 근처에서 술집을 경영하는 후미코 부인의 얼굴을 보러가도 좋다고 덧붙였다.

 

한편 기고자 스기하라 히로유키는 범인 카와무라가 무소안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제공한 것은 선처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무소안은 파리에서도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으나 일본으로부터 원고료를 제때에 전달받지 못해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카와무라가 제공한 보상금은 무소안의 경제난을 크게 완화시켜 주었던 것 같다.

 

한편 카와무라는 여러 증인을 동원해 살의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여자에게 배신당한 남자의 질투에 의한 범행이라는 점을 인정받았다고 했다. 파리에서는 카와무라의 친구이자 신문기자인 르 블랑제(LeBoulanger)가 변호사를 물색하는 등 그를 구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정상 참작과 친구의 도움으로 카와무라는 6개월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나 3개월 만에 출옥했다.

 

한편 후미코도 총격 상처를 치료받고 파리로 귀환한 직후 경찰에 체포되었다. 부도수표를 발행한 경제사범으로 수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후미코는 이내 방면되었고 일본 교민 사회뿐 아니라 파리 전체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타케바야시 후미코의 몬테카를로 총격 사건은 프랑스와 일본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이는 후미코의 자유분방한 삶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는 요사스런 여인(妖姬)’을 자처했고 그것을 당당하게 내세웠다. 그는 욕망에 충실했고,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성적 매력을 십분 활용했다. 그의 자유분방은 당대의 상식 수준을 훨씬 뛰어 넘었으므로 오히려 경이의 대상이었다.

 

타케바야시 후미코는 다재다능한 사람이기도 했다. 역량 있는 기자이자 파리 무대에서 공연한 무용가였고, 아동과 여성 의류업에 뛰어든 사업가이자 여러 저서를 출판한 작가였다. 이같이 재능이 아니었더라면 후미코의 자유분방함은 그저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했을 지도 모른다.

 

후미코의 재능을 일별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생을 세 시기로 나눠보는 것이 좋다. 그는 평생을 세 개의 이름으로 살았다. 그의 출생 시 이름은 나카히라 후미꼬(中平文子)였다. 시코쿠의 마쓰야마에서 태어난 그가 교토(京都)의 제일고등여학교(第一高女)를 졸업할 때까지의 기록은 남은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제일고녀를 졸업한 직후부터 후미코의 자유분방함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당시 교토대학교 의대생과 사랑의 도피를 계획했으나 실천에 옮기기 전에 붙잡혀 저지됐다. 집안의 강권으로 18세에 중매결혼을 했는데 이것이 후미코의 첫 번째 결혼이었다. 첫 결혼의 상대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고 후미코는 자신의 성을 바꾸지 않았다. 이 결혼은 약 6년간 지속되었고 그동안 3명의 자녀를 낳았다.

 

미인인데다 머리도 좋다고 자부한 후미코는 24세에 배우가 되려는 욕망을 품었다.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세 자녀를 버리고 남편과 이혼했다. 배우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저널리스트의 길에 들어섰다. 이 분야에서 그는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후미코는 잡지사에서 기자 경력을 시작했는데, 특히 잠입 취재에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1913년에는 카나가와겐(神奈川県) 후지사와시(藤沢市)의 쿠게누마(鵠沼) 소재 불교 산사 지쿄안(慈敎庵)에 잠입해 취재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 사찰에 수행 중이던 미남 청년에 반해 버려 취재를 내버린 채 그를 유혹해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연하의 남편이 질투가 심한 것에 식상한 후미코는 중국 상하이로 도망가 버렸다. 후미코는 이 두 번째 남편의 성도 따르지 않았다.

 

상하이에서도 기자 생활을 계속하면서 현지 언론사 사장과 정치가들에 대한 폭로기사를 잇달아 터뜨려 유명인이 되었다. 상하이에서 얻은 명성에 힘입어 일본으로 귀국한 후에는 1916년부터 정우회의 기관지 <쥬오신분(中央新聞, 1891-1940, 도쿄)>에 정식으로 입사했다.

 

후미코는 <쥬오신분>에서도 잠입 취재를 계속해 르뽀기사 <오메미에 니츠기(目見得日記)>를 연재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의 연재 르뽀 기사는 1916년 말 <여성기자의 잠입취재기(婦人記者 化み お目見得廻)>로 출판됐고, 이 책은 첫 두 달 동안 17판이 인쇄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잠입 취재기>에서 가장 주목을 끈 것은 마지막 장()에 서술된 <요시와라의 꽃(新吉原)>이었다. 이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후미코는 요시와라 유곽에 하녀로 변장해 잠입했다. 이 취재기에서 후미코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요시와라의 어린 창녀들의 생활을 자세히 서술했다.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화려한 모습과 외롭고 쓸쓸한 숨겨진 모습, 그리고 그들의 소소한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 글은 독자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밖에도 그가 나카히로 후미코의 이름으로 출판한 저서로는 <접대부 이야기(やとな物語)><여자인 주제에(のくせに)> 등이 있다. 이 저서들은 당대 화제작이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일본 여성 문학과 페미니즘의 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저작으로 인정된다.

 

1920쿠게누마로 돌아간 후미코는 소설가 나이토 치요코(内藤千代子, 1893-1925)의 소개로 다다이스트 작가 타케바야시 무소안(武林無想庵)을 만났다. 무소안은 후미코에게 반했다. 후미코는 무소안이 프랑스에 갈 계획이라는 말을 듣고 위장결혼을 결심했다. 이는 후미코의 세 번째 결혼이었는데, 이때 후미코는 비로소 자신의 성을 타케바야시로 바꿨다.

 

타케바야시 시절에 후미코는 가장 화려한 남성 편력을 보였다. 앞글에서 본 것처럼 무소안과 살면서도 식당 경영자 카와무라와 무용가 코모리 토시와 동시에 불륜을 자행했다. 후미코는 친구에게 무소안에 대한 성적 불만을 털어놓곤 했다. 무소안은 후미코의 남성 편력을 묵인하면서 저술 작업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

 

무소안은 1925년 잡지 <카이조(改造)><코쿠의 비애(Cocuのなげき)>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아내가 옆방에서 벌이는 불륜 행각을 들어야 하는 남편의 비통한 심정을 묘사한 작품이다. 자신의 고통을 소설로 형상화한 것이다. 하지만 무소안은 후미코의 남성 편력을 제지하지 않았다. 훗날 후미코가 미야타 코우조우와 결혼하겠다며 이혼해 줄 것을 요구했을 때는 거절했다.

 

이 시기에도 후미코는 <일본 소녀의 유럽 여행><일본 이야기> 등의 저서를 출판하고 이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가 하면, <페미나 극장>에서 무용 공연을 하고, 파리에서 일본 식당을 경영하거나, 시세이도사의 아동복과 모자 제조업에 뛰어드는 등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후미코의 남성편력은 네 번째 남편 미야타 코우조우(宮田耕三, 1895-1984)를 만나면서 끝났다. 벨기에 안트베르펜에 거주하면서 무역업을 하던 코우조우를 만난 것은 후미코가 이디오피아 황태자와 결혼하겠다는 황당한 계획을 꾸미다가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디오피아 황태자와 만날 기회를 얻기 위해 벨기에를 방문했다가 미야타 코우조우를 만난 것이었다.

 

미야타의 재력에 혹한 후미코는 이내 그와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후미코보다 여섯살 연하였던 미야타는 후미코가 타케바야시 무소안과 이혼할 것을 전제로 결혼을 수락했는데, 이것이 세간에는 계약 결혼으로 알려졌다. 후미코는 마침내 1934년 타케바야시 무소안의 이혼 허락을 받아내고 미야타와 완전히 결혼하게 되는데, 이것이 후미코의 네 번째 결혼이자 마지막 결혼이었고, 이때 후미코는 자신의 성을 미야타로 변경한다.

 

후미코는 1934년 이후의 미야타 시절에도 사업과 저술을 쉬지 않았다. 유태인 문제를 다룬 <게슈타포: 세기의 짐승과 싸운 유태인의 비화(ゲシュタポ : 世紀野獣った猶太人秘話)><풍뎅이(スカラベ)> <문신과 할례와 식인종의 나라(刺青割礼食人種)>, <73세의 청춘(73青春)>등의 저서와 자사전 <나의 백서: 행복한 요부의 고백>등이 바로 이시기의 저작들이다.

 

후미코가 자유분방하면서도 다재다능했던 여성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세 번째 남편 타케바야시 무소안도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특히 그의 저작능력은 탁월했다. 그는 끊임없이 소설과 평론, 번역물을 집필해 내었다. 특히 양 눈을 실명한 1943년부터 1962년 사망하기까지 자신의 기억력과 만년의 아내 하타 아사코(波多朝子)의 대필에 의지해 44권에 달하는 회원제 개인잡지 <무사우안 이야기(むさうあん物語)>을 집필했다.

 

사고와 행동의 자유분방함에 있어서 무소안도 후미코 못지않았다. 당대 대표적인 다다이스트였던 무소안은 친 여동생과 첫 번째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았을 만큼(재확인 필요) 사회적 관습과 도덕, 윤리와 관행 등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무소안의 친구들도 비슷한 부류였다. 그의 친구 쓰지 준(辻潤, 1884-1944)1909년부터 우에노 고등여학교(上野高等女学校)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중 1912년에 제자 이토 노에(伊藤野枝, 1895-1923)와의 연애로 교직에서 사퇴한 후 평생 다른 직업이 없이 글을 쓰며 살았다.

 

쓰지 준과 이토 노에 부부는 1914년경 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1985-1923)와 친분을 갖기 시작했으나, 1916년에는 이토 노에가 쓰지 준과 결별하고 오스기 사카에와 결합했다. 이때부터 쓰지 준은 한 곳에 정착하기를 그만두고 평생 방랑하며 살았다.

 

이시이 바쿠는 쓰지 준의 평생 친구였다. 오페라 매니아였던 쓰지 준은 이시이 바쿠가 무용을 시작하기도 전, 1911년 데이코쿠극장(帝国劇場) 가극부와 1917년 아사쿠사 오페라(浅草オペラ, 1917-1923)에 출연하던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쓰지 준의 아내 이토 노에가 오스기 사카에에게 달아났을 때 어린 딸 마코토를 이시이 바쿠에게 맡겼다. 1932년 봄에 아예 집을 처분하고 재차 방랑길을 떠날 때에도 작은 고리짝 하나에 불과한 전 재산을 이시이 바쿠에게 맡겼다. 이렇듯 이시이 바쿠는 쓰지가 가장 소중한 것을 맡길 수 있는 상대였다.

 

당시 오스기 사카에는 아내 하리 야스코(堀保子, 1883-1924)와 애인 카미치카 이치코(神近市子, 1888-1981)와 함께 지내고 있었으므로 이토 노에의 합류로 4각 관계를 이루게 된다.

 

이 불편한 4각 관계는 <히카게 차야 사건(日蔭茶屋事件, 1916)>으로 끝났다. 카미치카 이치코가 카나가와켄(神奈川県) 미우라군(三浦郡) 하야마 마을(葉山村) 소재 히카게 차야(日蔭茶屋)에서 오스기 사카에를 칼로 찌른 것이다. 이치코는 살인 미수죄로 기소되어 일심에서 징역4년을 선고 받았으나 항소하여 2년으로 감형되어 복역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오스기 사카에와 이토 노에는 부부로서 활발하게 무정부주의 사회운동과 저작활동을 계속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인 91일 헌병대에 끌려가 구타당한 후 살해되어 우물에 던져지는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다른 친구들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고, 죽음도 편안한 편이 아니었다. 무소안은 1933년에 녹내장으로 오른쪽 눈을 실명하여 외눈이 되고, 1943 년에는 왼쪽 눈마저 실명해 시각장애자로 여생을 살다가 196982세로 사망했다.

 

무소안의 친구 쓰지 준은 평생 방랑 생활로 일본 전역을 떠돌며 살다가 1944년 도쿄로 돌아와 다시 정착하려 했으나 한 달도 되지 않아 집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검시결과 그의 사인은 아사, 즉 굶어죽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쓰지 준의 친구 이시이 바쿠도 1928년부터 시력이 약화되어 상시적인 실명 위기를 겪었다. 이후 평생 실명 위기에 시달렸지만 다행히 죽는 날까지 시력을 잃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병인 만성 갑상선염으로 고생하던 중 196275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하지만 후미코만은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과 화려한 남성 편력에도 불구하고 1934년 이후에는 미야타 코우조우와가 제공한 돈과 사랑에 힘입어 순탄한 만년을 보내다가 77세의 나이로 비교적 편안한 죽음을 맞았다. 일설에는 수세미 건강법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건강 유지 비법이 주효했다는 설명도 있다.

 

후미꼬가 타케바야시에서 미야타로 변신한 것은 남편을 바꾼 것에 불과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황과 일본의 앞날을 바라보는 두 적대적 진영의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건너간 사건이었다. 타케바야시와 그의 친구들은 다다, 사회주의, 무정부주의로 천황제를 폐지하고 일본의 방향을 뒤바꾸려 했다. 그러나 미야타 코오조우는 전쟁 중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고 전후에는 일본의 자본주의적 경제재건을 위해 애쓴 사람이었다.

 

미야타 코우조우는 이차대전 직전에 일본 군부가 전함을 제작할 때 유럽의 고철을 사모아 일본에 공급했다. 이차대전 후에는 한국 전쟁을 이용해 일본의 경제 재건을 돕기 위해 유럽의 아마를 일본에 수입해 한국에 되파는 수완을 발휘했다. 하지만 미야타 코우조우는 후미코에게 많은 돈과 조건 없는 사랑을 쏟아부었고 이를 통해 후미코의 마음과 생활을 안정시켜주었다.

 

후미코와 그의 친구들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살면서 고뇌와 고통을 겪으면서도 후대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정부에 대항하여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 등으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들은 또 일반인들이 생각 없이 지켜오던 전통과 관습과 사회적 통념을 깨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상과 행동을 글로 남겨 오늘날에도 그들의 노력을 재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남겼다.

 

후미코와 친구들은 조선의 문인과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징검다리 역할을 한 사람 중에 고한용(高漢容, 1903-1983)이 있다. 고한용은 고한승의 다른 이름이다. 아동 운동을 할 때에는 고한승으로, 다다이스트로 자처할 때에는 고한용으로 자처했다. 자신의 니혼 대학 인맥과 자신이 심취했던 다다이즘을 바탕으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사상과 작품을 한국에 소개했다.

 

고한용은 19214월부터 니혼 대학 미학과에서 2년간 수학했으나 1923년의 관동 대지진으로 니혼 대학 캠퍼스가 크게 훼손된 데다가 조선인 학대가 시작되자 학업을 중단한 채 귀국했다. 니혼 대학 재학 시절 고한용은 아키야마 기요시 등의 일본인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했을 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같은 대학에 다녔던 마해송과 최승일 등의 한국인들과도 교분을 쌓았다. 특히 귀국 이후 고한용은 최승일과 같은 동네(경성 체부동)에 살았고, 연극운동과 방송극운동을 함께 하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한편 고한용은 1923년 다다이즘에 눈을 뜨고 <개벽> 9월호에 최초로 다다이즘을 소개하는 글을 발표했다. 같은 해 고한용은 쓰지 준과 다카하시 신키치를 경성으로 초대해 한국의 문인들에게 일본 다다이즘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고한용의 다다이즘은 불과 2년밖에 지속되지 못한채 사그러들었지만, 그가 쓰지 준과 다카하시 신키치를 경성에 초대한 것은 조선의 근대 문인과 지식인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일본인으로서 한국 문학을 연구해 온 요시카와 나기(吉川 凪)는 그의 저서 <경성의 다다, 도쿄의 다다(2015)>에서 고한용의 다다이즘은 쓰지 준과 다카하시 신키치, 아키야마 기요시와 가네코 후미코 등의 일본인 다다이스트와 아나키스트들과 마해송과 임화, 최승일과 최승희 등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서술했다.

 

<별건곤> 192611월호에는 최승일(崔承一, 1901-?)이 그해 8월 일본을 방문했던 여행기가 실렸다. 아마도 3월말에 도쿄로 유학간 동생 최승희의 안부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여행에서 최승일은 최승희가 참여한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카마쿠라 공연까지 동행한 바 있고,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7-1962, 무용가)와 밤마다 깊숙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이 여행기에서 최승일은 지인 타케히사 유메지(竹久夢二, 1884-1934, 화가), 쿠메 마사오(久米正雄, 1891-1952, 소설가, 극작가, 하이쿠 시인)를 만났지만, 나카니스 이노스케(中西伊之助, 1887-1958, 작가, 노동운동가, 정치가)와 일본의 인기남아 쓰지 준(辻潤, 1884-1944, 방랑문인, 다다이스트)를 만나고 오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고 서술했다.

 

이들을 자신의 우인(友人)이라고 하기에는 10세 이상의 연상들이지만, 그가 일본대학 미학과에서 유학하던 시절, 당시 젊은이들의 정신세계를 이끌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최승일이 쓰지 준을 만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이미 고한용의 주선으로 경성 체부동에서 쓰지 준을 만나 교분을 시작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에서 만난 다케바야시 후미꼬(武林文子, 1888-1966)에서 시작하여, 그의 교분관계를 따라오다 보니까, 한때 그의 남편이었던 타케바야시 무소안(武林無想庵, 1880-1962)이 다다이스트 쓰지 준(辻潤, 1884-1944, 방랑문인, 다다이스트)과 그의 절친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7-1962)와 연결되었고, 일본대학 유학시절 쓰지 준에 대한 이시이 바쿠의 의리를 알고 있었던 최승일은 안심하고 자신의 막내여동생 최승희를 이시이 바쿠의 문하에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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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9() 오후 630, 서대문의 <연화>에서 [우리학교 무용신] 일본 방문단의 마지막 모임이 열립니다. 이 모임에서는 방문기간 중의 각 행사에 대한 소감을 나누고, 불편했거나 부족했던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면서 다음 방문을 위한 제언을 모아보려고 합니다.

 

우리를 환영해 주신 일본 <팀아이> 선생님들과 조선학교, 타마세 마을과 만푸쿠지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궁금해서, 어젯밤 정세화 선생님과 무려 2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글로 전부 전해 드릴 수는 없지만 요지를 말씀드린다면,

 

(0) 일본에서는 이번 방문을 대단히 만족스럽게 생각하시고, 방문단을 고마워하신다고 합니다. 특히 <팀아이> 선생님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준비를 다 했지만 한국 분들이 어떻게 느끼셨는지 궁금하다고 하십니다. 일본의 준비와 대접은 실제로 특별했고, 최상이었습니다.

 

 

(1) 일본 <팀아이>의 회원들은 한 가지 이상씩 준비를 담당하면서 전원이 참여하셨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콘도 타쿠미 회장님과 정세화 선생님은 물론,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과 히다 유이치 선생님, 만푸쿠지의 아다치 타이쿄와 아다치 치쿄 스님도 마찬가지입니다.

 

(2) 예컨대, 우리 연주회가 만푸쿠지의 경내, 그것도 법당에서 열린 것은 만푸쿠지 역사 이래 처음이라고 합니다. 연주회 장소로 법당을 내어주신 스님들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 타마세 마을은 작고 조용한 마을이지만, 온 마을 주민이 힘을 합쳐 우리를 환영해 주셨습니다. 작은 마을이더라도 의견 차이가 있게 마련이지만, 우리 방문단을 환영하는 일에는 어느 쪽 할 것 없이 모두 협력하여 행사를 지원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4) 아마가사키 조선학교는 방문단에게 제한 없는 수업참관을 허용하셨습니다. 이것도 이 학교의 75년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학교 시찰이나 수업 참관은 보통 교사나 학부모의 안내를 따르게 하고, 학생과 교사의 사진촬영은 자제를 당부하는 것이 관례인데, 우리 방문단에게는 자유로운 수업 참관과 제한 없는 사진/영상 촬영을 전면 허용하신 것입니다.

 

조선학교가 처한 내외의 어려움, 그동안 간간이 발생해온 불미스런 일들을 생각하면, 아마가사키 조선학교가 보여준 이런 조치는 상호 신뢰를 전제로 한 매우 고마운 일입니다.

 

 

(5) 오사카 조선학교도 기념공연에서 우리 방문단에게 특별좌석을 제공하셨습니다. 초청된 오사카부/시의 각급 의원들에게도 일반 객석을 제공했다고 합니다. 우리 방문단에게는 로열박스를 제공했습니다. 건너편의 로열박스에는 오사카 정재계와 교육계의 주요 인사들이 초청되었다고 합니다. 오사카 조선학교가 우리 방문단을 어떻게 배려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6) 우리가 머물렀던 화이브 호텔과 연회를 가졌던 두 식당에서도 정세화 선생님께 감사의 전화를 해 오셨다고 합니다. 아무런 사고 없이 잘 머물다 가시게 되어서 다행이고, 인연을 맺게 되어 고맙다는 말씀과 함께 언제 다시 오시더라도 환영이라는 인사를 전해 오셨습니다.

 

일본 방문 직후에 강릉의 활동가들과는 전화통화로, 나주는 직접 방문해서 이번 방문의 의의와 성과를 설명드렸습니다. 아직 단언할 단계는 아니지만, 그 두 곳에서 각각 10명 내외의 회원들이 다음 번 방문에 동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곧 2차 방문단을 구성하게 될 것 같고, 아마도 오사카 조선학교의 70주년 기념 마지막 행사인 514(일요일)의 동포초청 축제에 참가하게 될 듯합니다. 방문 기간을 512-15(34)로 잠정 결정하고 준비를 미리 시작할 수 있겠습니다.

 

 

2차 방문에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무용신>과 북방 지역에서 활동해 오신 <대륙학교>에 더하여, 미주동포들이 많이 활동하시는 <AOK>도 참여해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세 단체의 공동 주최로 하고, 돌아가면서 주관을 담당하시면 어떨까 싶어요.

 

그렇게 된다면 다른 지역의 해외동포들도 재일동포의 상황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릴 수 있고, 해외동포운동 시민단체들도 교류와 협력을 실질적으로 다지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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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2일 저는 3년 만에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코로나 방역이 완화되었고 한일간 무비자협정이 다시 가동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세화 선생님과 반갑게 만났고,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는 동안에도 함께 이룬 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무용신 캠페인과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이야기가 가장 많았고, 어려움에 처한 조선학교에 대한 걱정도 함께 나눴습니다.

 

 

우리는 콘도 도미오 선생님 댁을 방문했습니다. 다카라즈카시 외곽의 콘도 도미오 선생님 자택에서는 사모님과 자제분들이 정세화 선생과 저를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방에 들어가니 모든 것이 생전에 쓰시던 그대로라고 하셨고, 침대 맡에 놓인 설합장 위에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유해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강릉시가 보낸 감사패가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정세화 선생님과 저는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 큰 절을 올렸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한 번도 콘도 도미오 선생님을 직접 뵌 적이 없었습니다. 사진으로만 뵈었고, 라인으로만 말씀을 나눴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막역한 선배이자 큰 형님처럼 느끼곤 했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장남이신 콘도 타쿠미씨가 아버님의 뒤를 이어 <팀아이>의 회장직을 수행하신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자신이 못다 하신 일을 아드님에게까지 넘기신 것은 지나친 책임감이 아니신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저는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판단이 항상 옳다고 믿습니다. 아마도 거기에는 오래 지나서 증명될 깊은 뜻이 있으실 것입니다.

 

콘도 타쿠미씨는 부친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남기신 유품 중에서 큰 박스에 가득 찬 연구 자료와 원고뭉치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자료들을 제가 사용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콘도 선생님이 사용하시던 데스크탑 컴퓨터에도 수천 개의 파일이 남겨져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 자리에서는 이 자료들을 어찌할 것인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고, 그저 네에, 콘도 선생님의 이름을 위해 잘 사용하겠습니다고 대답했을 뿐입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타계하시고, 감사패 전달이 이뤄진 뒤에도 다카라즈카 추도비를 둘러싼 많은 일들이 생겼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타마세 부녀회와 만푸쿠지에서는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참배묘를 유지할 뿐 아니라, 그곳을 무궁화와 진달래 동산으로 꾸밀 계획을 세우셨다고 합니다.

 

 

정세화 선생님의 노력으로 앞으로 인근 조선학교에서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연례 참배 장소로 정하고 정기적으로 방문하기로 했다는 말씀도 전해 주셨습니다.

 

일본 <팀아이>의 회원들이 많이 늘어나서 활기를 띠고 있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조선학교를 후원하는 일이 조금 더 빈번해 지고 활발해질 것이라는 기대도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정세화 선생님과 함께 부친 정홍영 선생님의 묘에도 가서 참배했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은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가족들보다 더 자주 찾아오시던 묘역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추도비가 건립된 날에도 정홍영 선생님을 찾아오셨다고 하셨습니다. 20205월호 <무쿠게통신>에 쓰신 글에서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늘상 찾아왔지만 발견하지 못했던 묘비의 글을 그날 발견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묘비 옆에 새겨진 글을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습니다. “통일을 바라면서 이곳에 묻음.”

 

 

정홍영 선생님은 마츠에로 가는 하쿠비선 열차 안에서 옆에 앉으신 콘도 도미오 선생님에게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고향에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고 하십니다.

 

정홍영 선생님을 고향 상주에 모시는 일이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숙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뒤에 남은 우리들이 계속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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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23ぶりに日本訪問しましたコロナ防疫緩和され韓日間のノービザ協定稼動したためです

 

鄭世和先生しくいにられないにも一緒げたことをしました舞踊靴キャンペーンと宝塚朝鮮人追悼碑困難直面している朝鮮学校する心配一緒わしました

 

たちは近藤富男先生れました宝塚市郊外近藤富男先生自宅では奥様とおさんたちが鄭世和先生かくえてくれました

 

 

近藤富男先生部屋るとすべてが生前使っていたままだということでベッドサイドにかれたたんすの近藤富男先生遺骸かれていましたそしてそのには江陵市った感謝牌んでかれていました

 

鄭世和先生近藤富男先生にお辞儀をしましたえてみると近藤富男先生直接会ったことがありませんでした写真だけでおいしてラインだけでおをしただけですそれでもまるでしい先輩であり長兄叔父のようにじたりしました

 

 

近藤富男先生長男近藤卓海さんがおさんのいでチームあい会長職担当しているというきました自分わらせないことだからといって息子さんにまでったのは責任感すぎるのではないかとしばらくっていたのですが近藤富雄先生判断がいつもしいとじていますおそらくそこには間経って証明される意味があるでしょう

 

近藤卓海さんは父親近藤富男先生した遺品きなボックスにまれた研究資料原稿せてくれましたそしてこれらの資料使ってもい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近藤先生使っていたデスクトップパソコンにも数千個のファイルがされているとおっしゃいました

 

しかしそのそのではこれらの資料をどうするかえもわからずただはい近藤先生名前のためによく使いますえただけです

 

 

近藤富男先生他界され感謝牌伝達がなされた宝塚朝鮮人追悼碑くのことがこったときました

 

玉瀬婦人会滿福寺では金炳順南益三張長守さんの参拝墓維持するだけでなくそこをムクゲとツツジの計画てたそうです追悼碑てられたともよく似合うといます

 

 

鄭世和先生努力今後近隣朝鮮学校では宝塚朝鮮人追悼碑恒例参拝場所定期的訪問することにしたというおえてくださいました

 

日本<チームあい>会員えて活気づいているというおきました朝鮮学校後援することがもう頻繁になり活発になるだろうという期待まるようになりました

 

 

鄭世和先生一緒父親鄭鴻永先生のおにもって参拝しました鄭世和先生近藤富男先生家族よりも頻繁れていた墓地だとえてくれました

 

近藤富男先生追悼碑建立されたにも鄭鴻永先生ねてきたとおっしゃいました20205月号むくげ通信かれた文章近藤富男先生はいつもねてきましたが発見できなかった墓碑文章をその日発見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

 

墓碑まれた文字でてみました。 「統一いながらここに

 

 

鄭鴻永先生松江行きの伯備線列車った近藤富男先生統一されるまでは故郷にはかないわれたことがあるそうです

 

鄭鴻永先生故郷尚州えることが近藤富男先生宿願だ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そしてそれはったたちがけ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だと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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固城統営系図調査難航している緊迫した状況発生しました202111から近藤富男先生健康悪化めましたってきました

 

宝塚朝鮮人追悼碑犠牲者5のうちゆかりが確認されたのはまだ金炳順さん一人だけでしたしかし近藤富男先生をはじめ追悼碑建立されたそして100年以上無縁故慰霊祭ってきた々にえるいをしたかったのです

 

 

20211119日江陵市請願書提出しました金炳順さんの故郷江陵市宝塚朝鮮人追悼碑建立者感謝牌贈呈してほしいという内容でした請願文にはこの追悼碑建立されるまで宝塚100年間あったことを簡略説明感謝牌贈呈対象8指名この々が感謝牌るにする理由明示しました

 

げた感謝牌対象者日本人6在日同胞2でしたこの々の経歴追悼碑建立寄与事項請願文まれていますが21ページ(証憑資料含)するためここにさず請願文全体をこの最後別途添付しましたただここにはその8名前だけをべることにします

 

鄭弘永1929-2000郷土歴史家)、近藤富男1950-2020教師市民活動家)、金礼坤キム·レゴン事業家)、堀内稔在日朝鮮人史研究家)、飛騨雄一神戸学生青年センター代表)、玉野誠三彫刻家)、足立泰教足立知教万福寺住職)。

 

 

この請願文江陵調査積極的協力してくれた洪眞善柳善起先生江陵市議会され市議会はこれを江陵市長送付しました異例いスピードでこの請願れられ請願内容確認作業着手されましたしかし当時新型コロナウイルス感染症状況非常深刻だったため江陵市公務員宝塚出張請願内容事実有無直接確認することがしかったです

 

江陵市庁でこの請願担当した実務者パク·ジョンシ課長·ジュンハ係長パク·インスン係長3でしたにパク·ジョンシ課長はこの請願調査難航するとこれを東京所在江原道本部送付江原道本部江陵市庁わって実態調査めることを要請しました

 

 

これに江原道本部の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とムン·ミヘ部長東京から宝塚出張断行され関係者との懇談会じて請願内容事実であることを確認したこれを江原道江陵市庁報告しましたこの報告書けて江陵市庁やかに感謝牌贈呈感謝牌伝達もカン·ビョンジク江原道本部長においしました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とムン·ミヘ部長以後2宝塚訪問感謝牌伝達支障がないよう万全しました

 

 

ついに感謝牌伝達式2022415宝塚ホテルの宴会場われました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江陵市長わって8感謝牌したそうですはその出席できませんでしたが伝達式伝達される時間にオフィスにってその時間にしました

 

一方ではこのしい行事くからでも気持ちでしたがもう一方しみにしつぶされていました近藤富男先生がこの感謝牌伝達式出席できなかったからです近藤先生江陵市感謝牌伝達決定らせをきましたが伝達式までつことができず210くなりました

 

 

それでもいなら江陵市積極的協力近藤富男先生感謝牌製作して発送することにするなど最善くしましたが結局感謝牌ることはできずただ完成した感謝牌写真だけをされたときました

 

近藤富雄先生35年間努力べるとあまりにもさなおぎ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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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과 통영의 족보 조사가 난항을 겪고 있는 가운데, 급박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202111월부터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 다섯 분 중에서 연고가 확인된 것은 아직 김병순씨 한 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콘도 도미오 선생님을 비롯해 추도비를 건립하신 분들, 그리고 1백년 이상 무연고 위령 제사를 드려온 분들에게 무언가 가시적인 보답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20211119일 강릉시에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김병순씨의 고향 강릉시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자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청원문에는 이 추도비가 건립되기까지 다카라즈카에서 1백 년 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고, 감사패 증정 대상으로 8분을 지명하면서 이분들이 감사패를 받아 마땅한 이유를 명시했습니다.

 

제가 지목한 감사패 대상자는 일본인 여섯 분과 재일동포 두 분이었습니다. 이분들의 경력과 추도비 건립 기여사항은 청원문에 포함되어 있으나 21(증빙자료 포함)에 달하기 때문에 여기에 옮기지 않고 청원문 전체를 이 글 끝에 별도로 첨부했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그 여덟 분의 이름만 나열하기로 하겠습니다.

 

정홍영(1929-2000, 향토역사가), 콘도 도미오(1950-2020, 교사, 시민활동가), 김례곤(사업가), 호리우치 미노루(재일조선인사 연구가), 히다 유이치(고베학생청년센터 대표), 타마노 세이조(조각가), 아다치 타이쿄와 아다치 치쿄(만푸쿠지 주지).

 

 

이 청원문은 강릉 조사에 적극 협조해 준 홍진선, 유선기 선생의 손으로 강릉 시의회에 전달되었고, 시의회는 이를 강릉시장에게 송부했습니다.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로 이 청원은 받아들여졌고, 청원내용의 확인 작업이 착수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코로나 상황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에 강릉시의 공무원에 다카라즈카에 출장하여 청원 내용의 사실여부를 직접 확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강릉시청에서 이 청원을 담당한 실무자는 박종시 과장, 이준하 계장, 박인순 계장 등 세 분이었습니다. 특히 박종시 과장은 이 청원의 조사가 난항에 처하자 이를 도쿄 소재 전국시도지사협의회의 강원도본부에 송부해, 강원도 본부가 강릉시청을 대신해 실사를 진행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이에 강원도 본부의 강병직 본부장님과 문미혜 부장님이 도쿄에서 다카라즈카로 출장을 단행하셨고, 관계자들과의 간담회를 통해 청원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한 후, 이를 강원도와 강릉시청에 보고하셨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라 강릉시청은 신속하게 감사패 증정을 결정하고, 감사패의 전달도 강병직 강원도본부장에게 부탁했습니다. 강병직 본부장님과 문미혜 부장님은 이후 두 차례나 다카라즈카를 방문하여 감사패 전달에 차질이 없게 만전을 기하셨습니다.

 

 

마침내 감사패 전달식이 2022415일 다카라즈카 호텔 연회장에서 열렸습니다. 강병직 본부장님이 강릉시장을 대신해 여덟 분에게 감사패를 전달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전달식이 전달되는 시간에 사무실에 앉아 그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제 마음 한편은 이 기쁜 행사를 멀리서나마 자축하는 마음이었지만 다른 한편은 슬픔에 밀리기도 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이 전달식에 참석하시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콘도 선생님은 강릉시의 감사패 전달 결정의 소식을 전해 듣기는 하셨지만, 전달식까지 기다리시지 못하고 210일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강릉시의 적극적인 협조로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감사패를 먼저 제작해 발송하기로 하는 등,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 감사패를 손에 만져보시지는 못하셨고, 다만 완성된 감사패의 사진만 전달받으신 것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35년 노력에 비하면 너무도 약소한 답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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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戸水道工事犠牲者金炳順さんの故郷江原道江陵推定され南益三さんの故郷慶尚南道統営そして福知山線鉄道公社犠牲者尹吉文さん吳伊根さんの故郷慶尚南道固城推定されましたらなければならない段階突入しました

 

これは鄭鴻永-近藤富男先生先例ったものでもあります二人糸口つかるやいなや現地踏査したからですいがあるとすれば宝塚-玉瀬1時間距離でしたがソウル-高城/統営4-5時間距離江陵3時間もかかる距離です

 

また鄭鴻永先生近藤富男先生同行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が一人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々でくの々のけをけることができました高城調査では高城郡庁歴史資料研究士キム·サンミン先生高城放送局社長韓昌植(ハン·チャンシク)先生けをました

 

 

江陵調査では出発するから民族問題研究所出身朴漢龍(パク·ハンヨン)先生諮問ることができ江陵到着してからも金性洙(キム·ソンス)記念事業会活動家洪眞善(ホン·ジンソン)柳善起(·ソンギ)先生江陵原州大学国際通商学科姜承昊(カン·スンホ)先生けをけることができました

 

現地活動家たちのけをはしましたが100年前故郷れた々の縁故すことは容易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一番簡単方法官庁住民登録戸籍調べることですが2011制定された個人情報保護法のため他人個人情報閲覧する方法がなくなりました

 

またこの々がいつ朝鮮れたのかかりませんでしたので公的記録閲覧できる場合でもどの時期記録るべきか特定できませんでしたえば高城ではジャーナリストの韓昌植先生けで高城面住民センターのデータベースを制限的検索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が尹吉文吳伊根さんの名前てきませんでした

 

 

これはおそらく尹吉文さんと吳伊根さんが日本による植民地時代以前時期家族全員日本移住したからでしょうそうしていたら今日行政電算網入力さえされなかったでしょう尹吉文さんは死亡当時192921でしたので日本による植民地支配以前まれ父親尹在裕(ユン·ジェユ)さんが同居していたことから1910年以前家族全体日本移住していた可能性いです

 

公的記録閲覧不可能だったため私的記録るしかありませんそこで代案としてじたのが系図記録閲覧です韓国ではでも苗字別家門別系図発刊保存する慣行がありこれを管掌する宗親会活発活動しています

 

系図閲覧方法江陵奏効しました数回試行錯誤洪眞善柳善起姜承昊先生けで金炳順さんの本貫慶州金氏樹隱公派だったことがらかになり慶州金氏樹隱公派江陵支会支会長金子正(キム·ジャジョン)先生支会員金喆旭(キム·チョルウク)先生けで最近系図である慶州金氏樹隱公派世譜(2014年刊行された甲午譜)調べることができました

 

 

この系図21ページをえていますので100年前朝鮮った金炳順さんの記録つけるのは簡単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金子正先生努力により金炳順さんが(1)慶州金氏樹隱公派17世孫であり(2)金東秀(キム·ドンス)さんの三男長男であり(3)生没年代記録されないわりに日本居という記録っていることを確認しました

 

系図によりますと金炳順さんは結婚していませんがにはなくとも4がいることも確認されていますしかし宗親会のあらゆる努力にもかかわらず親族つけ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しかしこの記録だけでも金炳順さんの故郷江陵だという十分確認されています

 

 

しかし固城統営では系図調査がまだ成功していません固城では坡平尹氏系図調べましたが尹吉文氏記録つけることができず呉伊根氏本貫確認されていません南益三氏固城南氏だったと推定されますが本貫確認されていません

 

しかし近藤富男先生のようにめておらず系図調査進行中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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