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영 선생님의 저서와 <무쿠게통신>의 글들과 함께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새겨진 기록이 중요한 자료라는 데에도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추도비를 한번도 직접 본적이 없었습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서 일본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세화 선생님께 추도비의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다양한 방향과 각도에서 찍은 사진이 필요했고, 특히 새겨진 글과 문양들이 자세히 보이도록 근접 촬영도 부탁드렸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은 즉각 추도비의 사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추도비의 전면 하단에는 구국철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 희생자 윤길문(尹吉文)과 오이근(吳伊根), 고베수도도수터널공사 희생자 김병순(金炳順), 남익삼(南益三), 장장수(張長守)씨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추도비를 세운 이유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1914년부터 약 15년간 진행된 <고베시 수도터널공사> 중에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도 3명의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가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이는 센가리 수원지에서 고베시까지 깨끗한 물을 보내기 위한 어려운 공사였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옛 국철 후쿠치야마선 부설 후, 이곳 무코강변에서 자주 일어나는 범람과 토석류로부터 철도를 지키기 위한 개수공사 중, 1929326일에 두 명의 조선반도 출신자가 폭발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역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도와 철도 건설현장에서 희생된 다섯 분을 애도하면서, 사고를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추모비를 건립합니다. 2020326.”

 

이에 따르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희생된 다섯 분을 애도하고 사고를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것은 지역생활에 중요한 기반시설을 건설하는 중에 순직한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고 전하려는 까닭은 그런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어서 이 추도비를 건립한 세 단체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추도비를 건립하는 모임><다카라즈카시 외국인시민 문화교류협회>, 그리고 <목련회>가 그것이었습니다.

 

추도비에는 건립 당시의 다카라즈카 시장 나카가와 도모코씨의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일본 전역에 조선인 위령비나 추도비가 2백개나 되지만, 거기에 현직 시장의 애도의 글씨가 새겨진 것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끝으로 추도비에는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 순직자의 비>는 키리하타 다치아이신덴에 있다는 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니시타니 청년회가 1979년 키리하타에 건립한 이 <순직자의 비>는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1891-1912)에서 희생된 순직자들을 기리는 추도비입니다. 여기에는 20명의 일본인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이 <순직자의 비>를 언급한 까닭은 다카라즈카 근대화를 위해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서로 연계되어 추도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추도비 건립자들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세련된 디자인은 오사카의 조각가 타마노 세이조 선생의 작품입니다. 타마노 세이조 선생님은 추도비 전면의 남녀 2명의 아이의 모습은 비천(飛天)’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으로 비천은 한반도에서 불교 전래와 함께 전해진 모티브이기 때문에 한반도와 일본의 문화 교류의 역사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는 또 “5개의 작은 꽃은 목련꽃봉오리로, 희생된 다섯 분의 영혼을 상징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 이 추도비의 이름을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월조남지비, 위령비, 추모비, 추도비 등을 검토하신 끝에,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추도비>가 적절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로 우리는 이 추도비를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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