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아주 세련된 비석이다.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이 편찬한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2019)>에는 일본 전역에 산재한 170여개의 추도비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이 출판된 이후에 건립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2020)>는 여기에 등재되어 있지 않지만, 다른 어떤 추도비와 비교하더라도 그 현대적 감각과 세련된 디자인이 돋보인다.


추도비는 상하 2개의 장방형의 돌이 겹쳐져 구성되었고, 각각의 가장자리에는 돌을 자르기 위해 구멍을 낸 자국을 그대로 남아 두었다. 앞면에는 <월조남지>의 글씨를 중심으로 윗돌과 아랫돌에 각각 세 개씩의 줄이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그어져 있고, 글씨의 위쪽에는 양쪽에 두 명의 아기 천사 모습이 청동 조각으로 부착되어 있다. 아래쪽 돌에도 꽃을 묘사한 듯한 2개의 작은 청동조각상들이 덧붙여져 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앞면에는 <월조남지>와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것과는 별도로 2명의 어린 천사상과 꽃문양이 청동으로 부조되어 있다. 이 조각은 오사카를 중심으로 활발한 작품활동 중인 타마노 세이조 선생의 작품이다.


돌과 글씨와 장식물들이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배열되어 있는데다가, 음각으로 새겨진 <월조남지>의 행서체 큰 글씨와 역시 음각으로 새기고 짙은 색깔로 채워진 해서체의 희생자 이름이 현대적이지만 가볍지 않고, 단순하지만 우아한 모습이다. 뒷면에도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모두 새겼지만 전체적으로 번잡하지 않고, 위와 이래의 여백이 중앙에 잘 배열된 글씨와 어울려 안정감을 준다. 상당한 수준의 미적 감각을 가진 디자이너의 작품임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이처럼 세련되면서도 우아한 추도비를 디자인한 사람은 누구일까? 사진을 통해 추도비의 앞면과 뒷면을 꼼꼼히 살펴보았으나 디자이너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았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서 곤도 도미오 선생께 질문을 드렸더니 이 추도비의 디자이너가 오사카를 중심으로 작품활동을 해 온 조각가 타마노 세이조(玉野勢三)선생이라고 하셨다. 


추도비의 디자인에 대해 궁금했던 몇 가지에 대해 구체적인 질문을 더 드렸다. 곤도 선생은 즉시 타마노 선생에게 연락을 취하셨고, 그동안 나는 타마노 선생의 웹사이트를 찾아가 그분의 작품세계를 학습했다. 어린아이를 모티브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신 타마노 선생의 홈페이지에는 추도비의 청동 부조를 연상시키는 작품도 여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작품 제작에 열중하고 있는 타마노 세이조 선생 (사진 출처: 타마노 세이조 웹사이트) 


타마노 선생의 답변이 도착했다. 우선 “글씨 상단의 두 어린 천사”에 대해 타마노 선생은 “내 작품 주제는 ‘아이’이며, ‘아이’는 “민족이나 역사도 넘어서는 인류 보편의 테마”라고 하시면서, “추도비 전면에 부착한 남녀 2명의 아이의 모습은 하늘을 나는 ‘비천(飛天)’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비천은 한반도에서 불교 전래와 함께 전해진 모티브이기 때문에 한반도와 일본의 문화 교류의 역사를 암시함과 동시에 추도비가 목적하는 '위령'의 마음과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하신 후, “반드시 불교를 의식할 필요는 없으며 보는 사람들에 따라서는 서양적 '천사'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월조남지> 글씨의 좌우에 형상화된 5개의 꽃은 '목련' 꽃봉오리이며, 이는 희생된 다섯 분들의 '영혼'을 상징”하면서도 “추모비 건립에 앞장선 '목련회'를 가리키도록 했다”고 전했다. 심혈을 기울인 예술 작품답게 추도비의 디테일에까지 적절한 의미가 담겨있었다. 

 

타마노 세이조 선생의 또 다른 비천상 작품들. 그의 작품에는 어린아이들이 모티브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는 "아이는 민족이나 역사도 넘어서는 인류 보편의 테마”라는 인식으로 자신의 작품의 주된 소재와 주제로 삼고 있다고 하셨다.


또 추도비의 상단 왼쪽과 하단의 중간쯤에 그려진 물결 모양의 선들은 “각각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해안선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두 물결 사이의 공간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고향을 떠나 건너온 현해탄이 될 것이며, 그 한 가운데에 새겨진 <월조남지>는 일본 땅에 묻힌 조선인 노동자들의 망향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겠다. 


타마노 선생은 또 이 선들이 “조수의 흐름, 바람의 흐름, 그리고 시간의 흐름까지도 암시하여 한반도와 일본의 항구적인 우호와 유대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디자인과 거기에 담긴 뜻도 감탄스러웠지만, 이같은 자상한 관심과 실력을 가진 조각가에게 추도비의 디자인을 의뢰하게 된 경위도 궁금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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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뒷면에는 또 하나의 이례적인 문구가 새겨져 있다. 후쿠치야마선 공사에서 순직한 다른 노동자들의 추도비가 세워진 위치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 것이다.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 순직자비는 키리하타 다치아이신덴에 있습니다.”

 

후쿠치야마선 철도는 18917월 아마가사키-나가스 사이의 가와나베 철도로 시작되었다. 이 철도는 같은 해 9월에 이타미, 1897년 다카라즈카, 1898년에는 나마제까지 연장되었고, 1912년에는 아마가사키에서 후쿠치야마까지의 전 노선이 개통되었다.

 

다카라즈카의 키리하타 다치아이신덴에는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1891-1912)에서 순직한 일본인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추도비가 세워져 있다.

 

키리하타에 세워진 <순직자의비>1891년부터 1912년까지의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에서 희생된 순직자들을 기리는 추도비이다. <순직자의 비>1979년 니시타니 청년회의 주도로 세워졌는데, 여기에 새겨진 20명의 순직자 명단에는 조선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다.

 

그러다가 1987년 정홍영 선생과 곤도 선생은 후쿠치야마선 제1차 개수공사(1929)에서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 2명의 이름을 확인했고, 그들이 순직한 지점이 무코강 6호터널 앞이라는 점도 밝혀냈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김예곤 선생과 곤도 선생 등은 20203<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세우면서 그 비문에서 니시타니의 <순직자비>를 언급한 것이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니시타니의 <순직자비>를 언급한 까닭은 추도비 설립 목적을 통해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다카라즈카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다가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이라면 서로 연계되어 추도되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희생자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추도되고 기억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뒷면에는 기리하타의 다치아이신덴에 세워진 <순직자의비> 위치를 명시한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는 같은 철도의 건설하고 보수하기 위해 순직한 일본인과 조선인 노동자들의 연대하여 추도한다는 의미를 강조한 문구이다.

 

일본인 노동자를 기리는 <순직자의비>와 조선인 노동자를 기리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시기에 세워지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본인과 조선인이 구별이나 차별로 비쳐지면 안 된다는 것은 추도비 설립자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건립자들은 그 비문에 <순직자의 비>를 언급함으로써 연대감을 표시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어느 사회에서나 현지인과 외래인의 구별과 대립과 갈등은 사회문제가 되어 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출신지와 상관없이 지역사회에 공헌한 점이 공정하게 인정되고 기억되는 것이 또한 정상적인 흐름이다.

 

미국의 보스톤과 샌프란시스코를 연결하는 대륙횡단철도 공사(1863-1869)에서도 중국인 노동자들의 희생은 지대했었다. 공사가 끝난 후 센트럴퍼시픽 철도회사의 스탠포드 사장은 중국인들의 희생을 애도하면서 샌프란시스코에 차이나타운을 기부했다. 또 자신이 설립한 스탠포드 대학에 일정한 수의 중국인이 입학하도록 할당을 두기도 했다. 지금도 대륙횡단철도를 따라 중국인 노동자들의 추도비가 곳곳에 세워져 그들의 희생을 기억한다.

 

미국의 대륙횡단철도 부설공사에 동원된 중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저서와 기념비.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대대적인 철도공사 과정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겪었던 고난과 희생을 기록하고 이를 추도하는 모습은 철도 연변의 주요 도시들에서 자주 발견된다.

 

비슷한 일이 다카라즈카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비록 철도공사 당시에는 가난하고 힘없고 언어까지 서툴었을 조선인들이 고통스럽게 일해야 했을 것이고, 현지인들이 그들을 차별하거나 멸시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다카라즈카의 시민들과 지도자들은 지역사회 근대화를 위해 조선인들이 치른 희생을 기억하기 시작한 것이다.

 

뒤늦게나마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1891-1912)와 개수공사(1929)에 참가한 노동자들의 희생을 기리는 <순직자의비(1979)><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2020)>를 건립한 것도 그 때문이다. 후자의 비문에 전자의 위치를 명시한 것은 국적을 초월한 연대감을 나타낸 것이다.

 

강물은 굽이쳐 흐르지만 결국 바다로 흘러든다.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온갖 상충과 갈등을 겪더라도 결국 인류애의 바다로 귀결된다. 그것은 <순직자의비><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연결하는 한 줄의 문장이 의도한 바이기도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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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는 다른 조선인 추도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 있다. 당시의 다카라즈카 시장 나카가와 도모코(中川智子)씨의 글씨를 함께 새긴 것이 그것이다.

 

추도합니다(). 다카라즈카 시장 나카가와 토모코 씀.”

 

추도비의 뒷면에 새겨진 이 문구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지역사적 의미를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다카라즈카 시정부의 대표가 추도비 건립에 공개적으로 찬성했을 뿐 아니라,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글을 직접 써서 추도비에 새겨지도록 했기 때문이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뒷면에는 나카가와 도모코 당시 시장의 추도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는 이 지역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조선인들의 희생을 다카라즈카 시정부의 수장이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추도의 대열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20세기 초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조선인들이 값싼 노동력으로 활용되었다는 점과 그들이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는 것은 한일 양국의 역사가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바이다. 당시 일본제국의 식민지의 처지에 있던 조선인들은 때로는 자발적인 이민노동력으로, 때로는 비자발적인 강제노동력으로 일본의 탄광과 댐, 철도와 도로, 수도와 전력 등의 사회기반시설을 확충하는 데에 다수 동원되었다.

 

다카라즈카 지역에서도 조선인 노동자들은 고베수도공사, 무코강 개수공사, 사카세강 개수공사, 롯코사방공사, 후쿠치야마 철도공사, 한신국도공사, 현도아마가사키-다카라즈카선 공사 등에 대거 참가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이 다카라즈카의 공식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정계향 선생은 <다카라즈카 시사><다카라즈카 시제 30년사>, <다카라즈카 대사전>과 논문집 <다카라즈카>(10)의 네 문헌을 조사한 후 자신의 논문에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다카라즈카 시사>와 <다카라즈카 시제30년사>를 비롯한 이 지역의 주요 역사 문헌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다카라즈카 시사에는 재일 조선인과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다. 무코가와 개수공사에서 조선인이 일했다는 기록이 아주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고, 전후(戰後)의 다카라즈카를 서술할 때 초급학교에 대해 몇 줄을 서술한 것이 전부이다. 다카라즈카 시제 30년사에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다.

 

다카라즈카 대사전에는 다카라즈카의 외국인을 소개하며 중국인과 재일조선인을 비슷한 양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주의 연원에 대한 언급은 없다. 논문집인 다카라즈카에는 권당 4~5편의 논문이 실려 있는데, 50여 편의 논문 중 재일조선인과 관련된 것은 조선사(朝鮮寺)에 관한 소논문 한 편 뿐이다. 재일조선인이 다카라즈카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에서 발행하는 책에는 재일조선인의 존재가 지워져 있다.”

 

뒤늦게나마 정홍영 선생이 조선인 노동자들의 희생을 밝혀냈고, 결국 그들을 기리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이 추도비 건립 과정에서 나카가와 도모코 시장이 이를 인지하고 애도한다()”는 글씨를 보내어 추도의 행렬에 참여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다카라즈카 지역사회에서 도외시되었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공헌과 희생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중요한 사례일 것이다.

 

정홍영 선생의 <가극의 도시의 또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은 이지역 재일 조선인들의 이주 및 정착의 과정을 정리한 주요한 연구서이다. 

 

나카가와 시장의 추도 글씨가 다카라즈카시의 전체 의견을 대표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카라즈카의 시민사회 전체의 공식 입장이라면 아마도 시의회의 의결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의회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논의를 하거나 의결을 시도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나카가와 도모코 시장은 아마도 시정부나 소속정당을 대표하거나 혹은 개인 자격으로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 추도의 대열에 합류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심지어 그런 경우일지라도 현직 시정부의 대표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건립 과정에 참여한 것은 대단히 중요해 보인다. 오랫동안 공식 기록에 무시되었던 이 지역의 조선인들이 지역 근대화를 위해 일본인 시민들과 함께 노력하고 희생한 점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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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뒷면에는 앞면의 비문 <월조남조>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추도비를 세운 이유가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월조남지, 철새는 고향을 잊지 않고 머나먼 조국의 방향으로 뻗은 가지에 둥지를 만든다고 합니다.

“1914년부터 약 15년간 진행된 <고베시 수도터널공사> 중에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도 3명의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가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이는 센가리 수원지에서 고베시까지 깨끗한 물을 보내기 위한 어려운 공사였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옛 국철 후쿠치야마선 부설 후, 이곳 무코강변에서 자주 일어나는 범람과 토석류로부터 철도를 지키기 위한 개수공사 중, 1929326일에 두 명의 조선반도 출신자가 폭발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뒷면. <월조남지>의 의미가 간략히 설명되고, 추도비를 세운 이유, 건립의 주관 단체들이 명시되어 있다. 그에 더해 당시 다카라즈카의 시장, 나카가와 도모코씨의 "애도한다"는 글씨를 새겼고, 같은 공사에서 순직한 일본인들의 추도비 위치도 명시해 놓았다.

 

지역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도와 철도 건설현장에서 희생된 다섯 분을 애도하면서, 사고를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추모비를 건립합니다. 2020 326.”

 

비문에서 밝힌 <고베시 수도터널공사><옛국철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에 대해서는 정홍영 선생의 저서 <가극의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그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요약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추도비의 건립 목적에 주목해 보자.

 

위의 인용문 마지막 문장에 따르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희생된 다섯 분을 애도하고 사고를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이다. 희생자들이 왜 애도 받는 것일까? 지역생활에 중요한 기반시설을 건설하는 중에 순직한 분들이기 때문이다. 왜 기억하고 전하려는 것일까? 그런 사고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이런 목적으로 추도비를 세웠다면 나는 그것이 성숙한 근대적 시민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위령비>보다는 <추모비>라는 말을 쓰기로 한 데에는, 근대적, 시민사회적인 뜻으로 '기억'하고 '애도'한다는 뜻이 배어 있다고 생각한다. '억울한 넋을 위로'한다거나 '악령을 쫓아낸다'는 중세적, 종교적 용어와는 거리가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때로 <추도비><위령비>는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어원적으로는 그 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위령>이 중세적, 종교적 개념이라면 <추도>는 근대적, 시민사회적 개념이다. 사고나 질병, 전쟁으로 죽은 사람은 모두 억울한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들의 억울한 넋을 위로하는 것은 사실 종교적 영역이다. 굳이 영혼이나 넋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도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애도할 수 있다. 그것이 현대적 시민사회의 추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위령비>라는 말에는 억울한 넋악령이 되어 자행할지도 모를 해악을 방지하려는 의도가 포함된다. 이는 과거 한국에서도 낯익은 개념이다. 서낭당에 색색의 리본을 매는 일이나, 마을 어귀에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세웠던 것이 그런 것이다. 이는 종교적 측면에서 이해할 만한 관습이고, 그렇게 남겨진 비석이나 유물이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인식의 바탕에는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종교적 주술의 관념이 포함된다. 이는 근대적 사고방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주술 개념이나 종교적인 관행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판단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개인들의 그러한 신앙은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근대적 공동체의 차원에서는 좀 더 객관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사회적 의미를 갖는 기념물이라면 중세적, 종교적 의미의 <위령비>보다는 근대적, 시민사회적 의미의 <추도비>가 더 어울리는 말이다.

고베조선학교 학생들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방문해 묵념을 올리고 있다. 이 추도비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노력과 희생이 다카라즈카시와 이곳에 사는 재일 조선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거듭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나는 일찍이 정세화 선생과 곤도 도미오 선생에게 이 추도비의 정식 이름이 무엇인가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월조남지비>, <위령비>, <추모비>, <추도비> 등이 후보로 올랐었다. 그중에서 곤도 선생과 정세화 선생은 <추도비>가 가장 적절하겠다는 대답을 주셨고, 그 후로 우리는 이 추도비를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라는 부르고 있다.

 

우리는 때로 <위령비>라고 쓰고도 <추도비>로 이해한다. 그것은 위령이라는 말을 비유적, 상징적인 뜻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자구적인 해석에 매달릴 필요는 없기는 하다. 하지만 현대의 시민사회에서라면 추도라는 말이 정확하고 의미 있을 뿐 아니라 소모적인 문제의 소지가 적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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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도 도미오 선생은 <무쿠게통신>에 기고한 <정홍영상과의 일>에서 1983년 가을부터 자신은 정홍영 선생의 금붕어 똥이 되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다카라즈카와 효고, 더 나아가 일본 전역의 재일조선인 관계 조사연구 활동의 단짝이 된 것이다.

 

정홍영 선생은 생전에,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에서 사망한 일본인 노동자들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지만, 같은 철도의 개수공사에서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추모비가 없다는 것을 자주 개탄했다. 곤도 선생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에 열과 성을 쏟은 것은 그같은 정홍영 선생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정홍영선생의 저서 <가극의도시의 또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에는 곤도 도미오 선생과 함께했던 연구 업적이 빼곡이 정리되어 있다.

 

한편, 곤도 선생은 김예곤 선생과도 가깝게 활동했다. 2013<다카라즈카시 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에 가입하면서 김예곤 선생과 함께 일했고, 2017년부터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을 위해 결성된 <목련회>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그로부터 3년 후 두 사람은 다른 많은 단체와 개인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면서 결국 추도비를 세웠다.

 

즉 곤도 선생은 정홍영, 김예곤 선생과 각각 협력하면서 재일 조선인 관련 조사연구와 시민단체 활동을 해왔다. 그렇다면 정홍영 선생과 김예곤 선생은 서로 어떤 관계였을까? 이 짧은 글에서 두 사람의 인적사항과 교우관계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는 없다. 하지만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의 문제에 국한한다면, 정홍영 선생의 생전이나 사후에도 두 사람은 매우 긴밀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았다. 우선 나이가 비슷한 연배이다. 정홍영 선생이 1929년생이고, 김예곤 선생은 1933년생이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총련에 몸담아 활동했다. 정홍영 선생은 오랫동안 총련 다카라즈카 지부의 위원장(1965-1976)으로 근무했고, 김예곤 선생은 조선중,,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대학교 동창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재일2세인 김예곤 선생은 청년시절에는 학술활동으로, 중년이후 기업경영과 시민단체활동으로 재일조선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최근에는 정홍영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을 위해 비석의 석재를 마련하고, 글씨를 쓰고, 부지를 마련하는 일에도 열성을 다했다.

 

두 사람은 모두 학술 및 사회운동에 열심이었다. 정홍영 선생은 주로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천착했고, 김예곤 선생은 다카라즈카 지역의 외국인시민 운동을 전개하셨다. 이같은 학술 및 사회운동은 모두 재일 조선인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개선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차이점도 있었다. 정홍영 선생은 경상남도 상주에서 태어나 7세에 일본에 건너온 재일1세였지만, 김예곤 선생은 효고현 카와베군에서 태어난 재일2세였다.

 

정홍영 선생은 어린 시절 다카라즈카의 일본인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16세에 해방을 맞은 후에는 간사이의 명문 간칸도리츠(関関同立)의 하나인 리츠메이칸(立命館大学) 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했다. 김예곤 선생은 13세에 해방을 맞을 때까지 일본 소학교를 다녔으나,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은 때마침 설립된 조선학교의 민족교육을 받았다. 그의 전공은 어문학이었다.

 

두 사람의 활동 영역과 시기도 달랐다. 정홍영 선생은 젊은 시절에는 총련의 다카라즈카 지역 위원장으로 사회 및 정치 활동을 했고, 위원장을 사임한 후에는 역사 분야의 학술운동에 투신했다. 김예곤 선생은 젊은 시절에는 도쿄를 중심으로 학술 운동을 했고, 1970년에 다카라즈카로 돌아온 후에는 기업경영에 전념했으나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시민사회운동을 전개했다.

 

 

곤도 도미오 선생은 정홍영 선생과의 연구조사와 김예곤 선생과의 시민단체활동을 통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세운 주역이자 산증인이다.

 

이 같은 몇 가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세우는 일에 협력한 셈이다. 정홍영 선생은 조사연구를 통해 순직자들의 존재를 드러냈고, 그들의 죽음이 다카라즈카 시민사회와 재일 조선인 공동체에 던지는 의미를 밝혔다. 김예곤 선생은 정홍영 선생의 뜻을 받들어 석재를 마련하고, 글씨를 쓰고, 추도비가 적절한 곳에 세워지도록 부지를 마련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세워진 것은 정홍영 선생의 선구적인 노력뿐 아니라 김예곤 선생의 실질적인 활동, 그리고 이 두 사람과 모두 함께 일하면서 결국 일이 이루어지도록 이끈 곤도 도미오 선생의 오래고 끈질긴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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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월조남지>의 글을 쓴 사람은 김예곤 선생이다. 글쓴이의 이름은 보통 비석의 뒷면이나 옆면에 새기는 법인데, <월조남지>에는 그 바로 옆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본인의 이의제기가 있었다는 데도 그렇게 한 것은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것처럼 느껴진다.

 

<재일2세의 기억(2016)>에 실린 김예곤 선생 인터뷰를 읽으면서 나는 그같은 추도비의 특별한 의미가 그가 어머님과 큰 형님에 대해 가졌던 연민과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18세의 첫아들과 42세의 둘째 아들을 일본 땅에서 잃었고 그때마다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했다.

 

특히 김예곤 선생은 어린 시절 자신의 큰 형님 김지곤씨를 장티푸스로 잃고 어머님이 무코강가에서 그 영혼을 달래던 가슴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었다. 그 기억은 추도비의 5인을 대하는 김계곤 선생의 감성과 맞닿을 수밖에 없었다. “아들을 죽게 한 건 내 탓이라고 통곡하면서 하늘을 보며 조선의 고향을 생각하시던 어머니의 심정으로 쓴 글이 <월조남조>였을 것이다.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 고찬유(高賛侑), 고수미(高秀美) 공동편집의 <재일2세의 기억(2016)>은 이차대전 이후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재일조선인 2세 50명을 인터뷰한 결과를 엮은 책이다. 표지 하단의 사진들 중에서 첫번째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김예곤 선생이다.

 

그러므로 <월조남지>하늘을 보며 조선의 고향을 생각했던 모든 재일1세에게 드리는 헌사이다. 그 헌사가 추도비에 새겨진 5인의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바쳐진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매서운 시대의 채찍에 갈겨 조선의 고향을 떠났다가 결국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 땅에 묻힌 재일1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재일2세가 선택한 가장 적절한 문구일지도 모른다.

김예곤 선생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공헌한 것은 추도비에 쓰인 <월조남지>의 글씨뿐이 아니었다. 두 층으로 이뤄진 이 추도비의 석재를 제공한 것도 그이다.

 

정계향 선생의 <다카라즈카의 조선인 역사(2019: 156쪽과 주462)>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길 비석은 교류협회의 고문이자 목련회의 공동대표였던 김우석이 기증을 하기로 했다고 되어 있다. ‘김우석이라는 가명으로 인터뷰에 응했지만, 당시에 교류협회의 고문이자 목련회의 공동회장을 맡았던 사람은 김예곤 선생이었다.

 

그가 다카라즈카에서 쇄석회사를 경영하면서 확보한 고급 석재를 선뜻 추도비 건립을 위해 희사한 것은 상징적이면서도 뜻 깊은 일이었다. 특히 그가 한반도에서 운송해 온 2개의 돌을 겹쳐 쌓아서 추도비를 구성할 수 있게 한 것은 남북한이 통일되기를 바라는 그의 염원을 담은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커다란 4각형의 석재 2개를 겹쳐 쌓은 형태로 구성되어 있어, 남북한이 하나로 통일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 두개의 양질의 석재는 김예곤 선생이 추도비 제작을 위해 기증한 것이다.

 

김예곤 선생은 또 석재를 기부하고 글씨를 쓰는데 그치지 않고, 추도비 건립을 성사시키기 위해 직접 발 벗고 나섰다. 그는 자신의 회고에서 “40대부터 ... 문화적 계발활동을 했다고 말했는데, 그가 <국제교류협회>의 회원으로서 <이문화(異文化)상호이해사업>을 추진한 일과, <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를 결성해 초대 회장을 역임했던 것, 그리고 이 두 단체의 협력을 이끌면서 <다카라즈카시외국인시민간담회>를 이끌어오고 있는 것 등을 가리킨다.

 

이같은 활발한 문화 및 사회활동을 통해 다카라즈카의 문화계와 시민운동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어온 김예곤 선생은 결국 20175월 조선인 추도비를 건립하기 위한 모임으로 결성된 <목련회(もくれんの)>의 공동대표에 취임했고, 그로부터 3년 후에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세워진 것이다.

 

내가 주목한 것은 김예곤 선생이 <다카라즈카시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의 초대 회장이었고 <목련회>의 공동대표였다는 점이다. 이 두 단체는 곤도 도미오 선생의 활동의 장이기도 했다. 특히 김예곤 선생이 <목련회>의 공동회장일 때 다른 공동회장이 곤도 선생이었다. , 두 사람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건립을 위해 앞장서서 노력한 동료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곤도 선생의 시민운동 파트너인 김례곤 선생은 그의 조사연구 파트너 정홍영 선생과도 잘 아는 사이였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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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자크 뉴턴(Isaac Newton)의 인용구 중에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간 난쟁이라는 비유가 있다. 개개인 연구자들의 능력은 제한되지만, 선배 연구자들의 업적을 배움으로써 거인의 어깨 위에 오르게 되며, 거기서 더 넓은 시야와 더 정확한 방향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들을 찾아 나서면서 가졌던 내 느낌이 바로 뉴턴의 난장이였다. 미지의 세계에 조사의 첫 발을 디디면서도 나는 이 분야의 사전 지식도 전혀 없었고 관련 연구방법론을 터득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뉴턴은 내게 거인의 어깨 위로 올라가라고 권하고 있었다. 선배 연구자들의 업적을 찾아 익히라는 말이다.

 

한편, 패트릭 마이어스(Patrick Meyers)의 희곡 <K2>는 조난당한 등산가들에게 이렇게 권한다. “먼저 현 상황을 파악해라. 조난당한 지형을 조사하고, 몸에 부상이 있는지 알아내고, 남은 장비를 점검해라. 그래야 다음 할 일을 정할 수 있다.” 기억에 의존한 인용이므로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그런 비슷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연구자는 누구나 능력이 제한되지만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처럼 선배들의 업적을 잘 숙지하면 더 멀리, 그리고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 

 

조난당한 등산가가 당황한 나머지 계획 없이 방황만 하게 되면 구조받기는커녕 사망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먼저 지형과 부상과 장비를 점검하라는 말이다. 그래야 최대한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가장 좋은 행동 지침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이어스와 뉴턴의 조언을 따라서 나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라도 관련된 모든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첫째가 추도비 자체였다. 나는 아직 그 추도비를 직접 본적이 없었다. 그동안 사진을 통해서만 보았을 뿐인데, 그 사진들은 해상도가 낮아서 비석 앞뒷면의 작은 글씨들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세화 선생에게 모든 글씨가 똑똑히 보이는 사진을 보내 주십사고 부탁했다.

 

정홍영 선생의 저서 <가극의 도시의 또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도 요청했다. 이 책은 추도비의 주인공들에 대한 최초이자 가장 심도 있는 연구서이므로 교과서이자 필독서였다. 정홍영 선생은 내가 그 어깨에 올라가야할 바로 그 거인이었기 때문이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들을 찾기 위해서는 정홍영, 곤도 도미오 선생의 두 어깨가 꼭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또 다른 거인들은 곤도 도미오, 신도 도시유키, 정세화 선생이 있다. 이들은 내가 정홍영 선생의 어깨 위에 올라갈 수 있도록 무등을 태워줄 동료들이다. 실제로 이 세 사람은 추도비 주인공들의 연고를 찾기 시작한 이래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으셨고, 앞으로도 어떤 궁금한 점이 생기더라도 거리낌 없이 질문을 드릴 수 있는 분들이기도 하다.

 

특히 곤도 선생은 역대 <무쿠게통신(むくげ通信)>에 실린 정홍영 선생 관련 기고문들을 알려주셨고, 나는 그것들을 차례차례 읽어나가기로 했다. 그중 5개는 무쿠게회의 웹사이트에서 당장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 노무나가 마사요시 선생의 <사람사람: 정홍영 인터뷰(115)>, 호리우치 미노루 선생의 <신문기사로 보는 무코강 개수공사와 조선인(153)>, 히다 유이치 선생의 <정홍영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178)><효고의 재일조선인사 연구를 다시 시작하자(256)>, 그리고 곤도 도미오 선생의 <정홍영씨와의 일(300)>이 그것이었다.

 

곤도 선생은 또 <무쿠게회><효고조선관계연구회><효고현재일외국인교육연구협의회>가 공동 편찬한 <효고 속의 조선(2001)>다카라즈카시(寶塚市)가 출판한 <우리고장 다카라즈카> 1(1999)2(2001)도 권하셨다.

 

곤도 도미오 선생께서 추천하신 <우리고장 다카라즈카>의 1권과 2권.  다카라즈카시가 발행한 소책자이다.

 

그밖에도 곤도 선생은 정홍영 선생과의 공동 연구의 기폭제의 하나였던 니시타니촌 사무소 발행의 매장인허장 3장을 사진으로 보내주셨고, 정세화 선생은 이 지역의 조선인 역사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울산대의 정계향 선생의 연구도 참고하면 좋을 것이라고 조언해 주셨다.

 

나는 비로소 안심이 됐다. 이 정도의 자료라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상황파악거인의 어깨에 올라가기에 충분한 사다리가 되어 줄 것이라는 확실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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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존경하는 곤도 도미오 선생과 형님처럼 친근한 정세화 선생의 권유가 계기였다. 하지만 엄두가 잘 나지 않았다. 1백년의 역사 속에 묻히신 분들의 흔적을 어떻게 찾아낼 지 요량이 서지 않았다.

 

문득, 왜 내게 그런 부탁을 하신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최승희 선생의 공연 기록을 찾아내는 것을 보시고 새로운 가능성을 보셨던 것일까? 2018년 여름부터 나는 40개 이상의 일본 도시를 방문하면서 최승희 선생의 공연 기록을 발굴했다. 대개 단신이거나 홍보기사에 불과한 것도 많았지만 새로운 사실을 드러내 주는 중요한 기록들도 꽤 발견되었다.

 

작년(2020년) 3월 고베 취재할때, 정세화 선생(오른쪽)과 함께 신도 도시유키선생(가운데)을 만나뵙고 점심을 함께 하며 인사를 드린 바 있었다. 신도 선생은 아시는 것도 많고 유머감각이 뛰어나신데다가 인터넷 검색과 일본어 고문 해독에서 능하셔서 내 연구에도 큰 도움을 주셨다.

 

나는 그런 자료를 어렵사리 발굴해 놓고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형편없는 일본어 실력 때문이기도 했고, 80년 전의 일본어가 지금과 사뭇 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애를 먹인 것은 불분명한 활자였다.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여 복사해온 자료들 중에는 읽을 수 없을 만큼 글자들이 흐릿하거나 뭉개져 있는 것이 많았다.

 

그런 자료가 나타날 때마다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신도 도시유키(真銅敏之) 선생께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렸다. 신도 선생은 정세화 선생의 절친이자 동료이고, 20203월 내가 고베를 방문했을 때 기카와니시(木川西)의 라멘 전문점 라이라이테이(来来亭)에서 점심을 하며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쾌활하신 성품에 재밌는 농담도 잘하시는데, 놀랍게도 인터넷 검색도 잘하신다. 내가 무언가 궁금한 것을 질문 드리면 순식간에 답을 찾아 링크와 함께 보내주신다.

 

신도 선생은 일본어 고문(古文) 읽기에도 능하셨다. (1920-30년대의 일본어가 고문으로 분류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단어가 오늘날과 다른 것도 많고, 심지어 오늘날 볼 수 없는 철자들이 사용되기도 한다.) 신도 선생은 흐리거나 뭉개진 글자도 앞뒤의 맥락과 단어들 사이의 관련성을 참고해서 금방 판독해 주시곤 하셨다.

 

신도 선생께 부탁하는 일이 잦아지니까 죄송한 마음에 곤도 도미오 선생께도 부탁을 드리기 시작했고, 결국 두 분과 정세화 선생과 내가 참가하는 단체LINE방이 생긴 것을 계기로 두 분이 번갈아가며 내 질문에 대답해 주시곤 했다.

 

일본 각 도시에서 수집한 최승희 선생 공연관련 자료는 때로 읽기 어려운 글자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신도 선생과 곤도 선생은 앞뒤 맥락과 1920-30년대의 상황을 참고하여, 내가 도저히 읽어내지 못한 글자와 뜻을 모르는 단어들을 해독해 주시곤 했다.

 

언어도 서툴고 일본의 역사와 지리 개념도 부족한 내가 80년 전의 최승희 선생 일본 공연 자료를 찾아 해독해 나가는 모습이 엉뚱하게 보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게는 그런 핸디캡을 메우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이 있기는 했지만, 그냥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마치 내가 자료조사에 재능이 있는 것 같은 잘못된 인상을 주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이런 과정 중에 나는 자연스럽게 곤도 선생과 정세화 선생을 통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들의 신원과 연고를 찾아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20209월 말경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난감했다. <강제동원>은 중요한 연구 주제지만 내게는 익숙하지 않은 분야였다. 게다가 추도비의 주인공들은 강제동원이 시작되기 전에 노동이민으로 일본에 오신 분들이고, 당시에는 관공서 기록이나 회사 기록도 매우 부실했던 시기였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새겨진 다섯 이름은 윤길문, 오이근,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였다. 나는 이들의 연고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공사 중의 사고가 지역 신문에 보도되더라도 일회성 기사에 그치는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관련자들의 인적사항을 파악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언론의 주목을 받던 인기예술가 최승희 선생과는 달리 매체나 기록보관소에서 문헌 자료를 찾기가 어려운 분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곤도 선생과 신도 선생, 정세화 선생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분들은 수십 년 동안 희생자분들을 조사하고, 기록하고, 제사해온 분들이었다. 그런 고마운 분들의 소원은 내게 중요하다. 어려울 것 같다는 이유로 노력까지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세화 선생에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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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화 선생한테서 말씀만 전해 들어오던 곤도 도미오 선생과 처음 인사를 나눈 것은 20209월이었다. 라인(LINE)을 통해서 첫인사를 드렸다. 그 뒤로도 지금까지 곤도 선생을 직접 만나뵌 적이 없다. 코로나19 방역이 엄격해진데다 갑자기 발생한 한일 교역마찰의 여파로 한국인의 일본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게 된 까닭이다.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곤도 선생이 재일 조선인의 역사를 연구해 오신 것도 존경할 만한 일이지만, 내게는 그가 신의를 갖춘 인물로 특별히 각인되었다. 그가 스승처럼 따르던 정홍영 선생의 유지를 잊지 않으시고 뜻밖의 연락을 주신 만후쿠지 주지스님의 당부도 받아들여 오랜 준비 끝에 5인의 순직자를 위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세우신 것이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2020)>는 많은 일본인 시민들과 재일동포들의 뜻을 잊지 않은 곤도 도미오 선생의 오랜 노력 끝에 세워졌다.

곤도 선생에게 또 한 가지 감사한 것은 우리가 재일 조선학교에 <무용신 보내기 캠페인>을 벌일 때 가장 먼저 찬성하고 참여해 주신 일본인이셨기 때문이다. 정세화 선생의 친절한 설명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곤도 선생은 아마도 이 일이 당신이 오래 활동해 온 <다카라즈카 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의 취지와도 부합된다고 이해해 주셨던 것 같다.

 

한국에서 <2차 무용신 보내기 캠페인>을 마치고 모아진 후원금으로 무용신이 준비되었을 때, 곤도 선생은 2020116일 직접 오사카에 가서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손수 무용신을 전달해 주셨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격려의 말씀도 해 주셨는데, 그 격려사 원고를 내게도 보내 주셨다. 서두의 위트 있는 말씀도 재미있었고, 그날 관람하신 무용작품들에 대한 감상평도 좋았지만, 내게 감명 깊었던 것은 아래와 같은 말씀이었다.

 

나는 일본인으로서 이분들(=한국의 후원자들)에게 마음이 움직여서 한국과 미국 사람들에게도 호소하면서 힘을 모아 재일 조선학교 학생들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2020년 11월6일, 곤도 도미오 선생은 오사카에서 열린 깅키지역 조선학생 무용경연대회장을 방문해 준비된 무용신을 학생들에게 전달했다.  

 

마음이 움직였다는 표현이 가슴에 박혔다. 재일 동포 학생들을 후원하는 일이야 한국 동포로서 마땅히 할 일이지만, 거기에 마음이 움직이셨다고 한다. 사실 나도 그랬다. 일본인 교육자로서 재일 조선인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들이 겪어온 편견과 차별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온 곤도 도미오 선생의 인품과 활동에 나 역시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그해 11월 중순에 일본에서 재일 조선학교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한 시민단체를 결성한 것도 정세화 선생과 함께 곤도 도미오 선생이 앞장 서 주신 덕분이다. 한국에서 이인형 선생과 내가 <무용신> 후원회원을 모집해가는 동안 일본에서는 <팀아이>가 결성된 것이다. <무용신><팀아이>는 연락을 계속하면서 뜻을 모았고 필요한 사업에 적극 협력하기로 했다.

 

<팀아이>“'아이'들을 '사랑()'하고 '지켜보는(eye)' 이라는 뜻으로, 곤도 선생이 직접 지으신 이름이다. <팀아이> 회원들은 젊은이들이 각자 살아가는 터전에서 편견과 차별 없이, 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드는 일을 추진하기로 했다. 재일 조선학교 후원도 그런 대의에 부합되는 일이라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곤도 도미오 선생의 또 한가지 소원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기록된 5인의 순직자들의 한국내 연고를 찾는 일이다.

 

곤도 선생에게는 또 한 가지 소원이 있으셨다. 그것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기록된 조선인 희생자 다섯 사람의 연고를 찾는 것이었다. 정세화 선생은 곤도 선생이 그분들의 연고를 찾기 위해 한국을 두 차례 방문한 적도 있다는 말씀도 전해 주셨다.

 

곤도 선생의 <무쿠게통신(300)> 기고문을 읽어보면 그가 조선인 순직자들의 연고를 찾으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정홍영 선생의 뜻이기도 했고, 또 타마세의 만후쿠지의 주지스님과 부녀회원들의 소원이기도 했던 것이다.

 

정홍영 선생이 아직 살아계시고 연구를 계속하셨다면 분명히 그 순직자들의 연고를 찾아 나섰을 것이다. 1백년 이상 무연고자 제사를 드려온 스님들과 부녀회원들의 바람도 마찬가지였다.

 

곤도 도미오 선생은 그분들의 소원을 실현해 드리고 싶으셨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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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영 선생은 198711, 고베시 니시노미아(西宮) 고요엔(甲陽園)地下壕에서 조선인 노동자가 쓴 벽서를 발견했다. 이 깊숙한 지하 땅굴 속 암벽에서 조선국 독립초록의 봄()이라고 쓴 문자를 발견한 것이다.

 

일본 전역에 산재한 지하호에서 그것을 건설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벽서가 발견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마츠시로의 대본영 지하 땅굴 속에서 밀양대구’, ‘세배구운몽이라는 조선인 노동자의 벽서가 발견된 것도 그로부터 3년여가 지난 후였다.

 

마츠시로 지하호의 벽서는 그 뜻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이 있다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 할 것같다. ‘밀양대구등은 그곳 출신자들이 고향을 그리며 쓴 문구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세배구운몽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마츠시로 대본영> 지하호에서 발견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벽서.

 

그중 ‘1945년 새해를 맞아 부모님께 세배를 드리지 못하는 슬픔을 표시한 것이라는 설명과 김만중이 자기 어머니를 위해 썼다는 구운몽을 빗대어, 조선인 노동자가 어머니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설명도 나와 있다.

 

하지만 다른 설명도 있었다. 자세한 근거는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일본인 소설가이자 동화작가인 와다 노부로(和田登)씨는 이 벽서의 사진을 설명하면서 너희들도 군대의 파괴도 모두 끝이다(おまえらも軍隊もみんなおわりだ)”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이 벽서가 과연 그렇게까지 해석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니시노미야 고요엔 지하호에서 발견된 조선인 노동자의 벽서에는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다. “조선국 독립(朝鮮國獨立)”이란 일제의 패전과 함께 갑자기 다가온 조선의 독립을 축하하는 뜻임에 틀림없다. “푸른 봄()”이라는 글도 해방과 함께 찾아온 새로운 희망을 비유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마츠시로 대본영> 지하호의 조선인 노동자 벽서의 의미는 아직 완전히 해석되지 않은 상태이다. 소설가 와다 노보루는 이 벽서가 "너희들도 군대의 파괴도 모두 끝이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했으나, 이 해석이 유일한 해석인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벽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기 아직 이르다. 조선인들한테는 조선국보다는 조선이라는 표현에 익숙하고, 녹의춘()’ 보다는 녹춘(綠春)’이라는 표현이 더 자연스럽다. ‘(이나 ()’를 삽입한 것은 일본어 표현에 가깝다. 따라서 이 벽서는 일본인이나 일본어에 능숙한 조선인이 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역사적인 발견의 현장에는 정홍영 선생과 함께 놀라움과 기쁨을 나눈 3명의 동료가 있었다. 그의 동생 정지영(鄭志永), 그의 아들 정세화씨의 친구 신도 도시유키(真銅敏之),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조선인 청년이었다. 정홍영 선생과 정지영 선생은 타계하셨고 조선인 청년은 행방을 알 수 없지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신도 도시유키 선생의 증언을 나는 뒤늦게나마 전해들을 수 있었다.

 

 

고베 니시노미아 고요엔 지하호에서 발견된 <조선국 독립>과 <푸른 봄>의 조선인 노동자 벽서.

그날, 우리 네 사람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 지하호 현장으로 갔습니다. 정홍영 선생님은 종전 후에 공개된 미군 전략폭격 조사보고서를 조사하던 중, 니시노미야가 폭격의 대상이 된 것은 거기에 있던 가와니시 항공기회사의 지하 공장 때문임을 아셨습니다. 그 지하공장의 위치를 파악하신 후에 가까운 분들과 탐색대를 꾸리신 것이지요.

 

처음에는 정홍영 선생의 아들이자 내 친구인 정세화씨도 같이 가기로 했으나 뭔가 사정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고, 조선인 청년 한명이 짐을 운반해 줄 아르바이트로 따라 나섰습니다. 그날 카메라와 전등, 간이 발전기 등을 비롯해서 운반할 짐이 꽤 많았거든요.

 

지하호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갈래 길이 나왔어요. 한쪽은 천장과 벽이 시멘트로 발라진 다듬어진 길이었고, 다른 한쪽은 울퉁불퉁한 암벽이 드러난 거친 길이었지요. 우리는 두 패로 나뉘어 탐색에 나섰는데, 나는 정홍영 선생과 함께 거친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칠흑 같이 깜깜한 굴속에서 손전등으로 벽을 훑어보았을 때 나는 무언가 글씨 같은 것을 본 것 같았어요. 즉시 정홍영 선생님께 알리자 자세히 살펴보시고 조선인 노동자들의 글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급히 다른 두 사람을 불러서 이 대단한 발견을 알렸고, 다들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흥분이 조금 가라앉자 우리는 내가 가져간 카메라의 플래시와 타이머를 이용해서 그 글씨를 배경으로 4명의 사진을 찍어서 기록을 남겼습니다.”

 

고요엔 지하호의 <조선국 독립> 벽서는 다카라즈카의 조선인 관계 연구자 정홍영 선생에 의해 발견됐다. 사진은 노무나가 마사요시 선생아 <무쿠게통신(115호, 1989년 7월30일)>에 기고한 정홍영 선생의 인터뷰 기사.

 

이 발견은 정홍영 선생의 발견으로 발표되었다. <효고조선관계연구회>의 노부나가 마사요시(信長正義) 선생은 <무쿠게통신(1989730, 115)>에 게재한 인터뷰 기사에서 니시노미야시 고요엔 터널 안에서 조선국 독립이라는 글자를 발견한 정홍영씨라는 표현을 썼다.

 

<무쿠게통신(2000130, 178)>에 실린 히다 유이치(飛田雄一) 선생의 글에도 정홍영 선생은 무엇보다도 <조선국 독립>이라는 문자가 남아있는 니시노미야시 코요엔의 지하벙커의 발견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밝혀져 있다.

 

<효고 안의 조선(兵庫のなかの朝鮮, 2001)>에 실린 서원수(徐元洙) 선생의 글에도 “‘조선국 독립’, ‘녹색의 봄이라는 문구가 남아 있는 고요엔 비밀 지하벙커는 지금은 작고한 고 정홍영 씨 등이 198711월에 발견한 것이라고 명시했다.

 

한국의 <세계한민족백과사전>에도 고요엔 지하호 유적은 효고조선관계연구회 회원인 정홍영(鄭鴻永)이 발견하여 세상에 알렸다. ... 특히 198711월에 정홍영이 발견한 4호 터널에는 조선국 독립’, ‘초록의 봄이라는 낙서가 남겨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효고 안의 조선(2001)> 에 실린 기고문에서도 서원수 선생은 고요엔 지하호의 <조선국 독립> 벽서는 정홍영 선생의 발견이라고 밝혔다.

(이 백과사전이 고요엔 지하호 암벽의 문구를 낙서(落書)’라고 표현한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조선인이 조국의 독립을 축하하고, 새로운 희망을 표현한 글을 낙서라고 폄하할 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낙서라는 말보다는 벽서(壁書)’라는 표현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지하호의 벽서는 정홍영 선생이 단독으로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4명의 일행이 있었고, 특히 신도 도시유키씨의 직접적인 도움이 있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신도 선생이 글자를 발견했고 탐색대장이셨던 정홍영 선생께서 즉석에서 그것을 해독하고 그 중요성을 알아보셨기 때문이다. 서원수 선생도 이 벽서의 발견자로 정홍영씨 등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도 역시 당시의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탐색대에 참가하지 못했던 정세화씨도 그 벽서 발견의 날을 회상하면서 지하호에서 돌아온 신도 도시유키씨가 나를 보자마자 조선국 독립이라는 문구를 발견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뒤에도 신도씨는 그 벽서의 발견과정을 몇 번이고 세세하게 설명하곤 했기 때문에 나도 익히 알게 되었다고 전했다.

 

1945년 초에 착공된 고요엔 지하호는 겉으로는 미군의 공습에 대비한 일반시민의 방공호로 위장했지만, 실제로는 가와니시(川西) 항공기제작사의 전투기 시덴카이(紫電改)의 부품을 제작하는 비밀 지하공장이었다.

 

 

<조선국 독립>의 벽서가 발견된 니시노미야 고요엔 지하호 제4호의 끝부분.

땅굴은 1호부터 7호까지 7개를 파기로 계획되었으며, 강제 동원된 조선인 젊은이 5-6백명이 최악의 노동조건 속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가 강행됐다. 그러나 카와니시사가 이 비밀공장에서 비행기 부품 생산을 시작하기도 전에 일본은 패망했다.

 

조선국 독립푸른 봄이라는 벽서는 아마도 일본제국 패망의 날, , 1945815, 일본 천황의 항복문 낭독이 방송된 직후에 광복의 기쁨과 귀향의 희망에 찬 조선인들이 지하호를 떠날 채비를 갖추면서 썼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정홍영 선생은 곤도 도미오, 신도 도시유키 선생 등과 협력하면서 니시노미아의 고요엔에서 나가노의 마츠시로에 이르기까지, 조선인 노동자들의 고난이 있었던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연구주제로 삼았고, 조사한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하지만 이들이 연구의 심혈을 기울인 곳은 역시 그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효고현 다카라즈카였다. 그것은 정홍영 선생의 저서 <가극의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과 곤도 도미오 선생의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2020)>가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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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도 도미오 선생의 <무쿠게통신(300)> 기고문에는 그가 정홍영 선생과 함께 답사했던 사적지가 나열돼 있었다. 두 사람의 협력과 공동연구의 성격을 짐작해 보기 위해 그 사적지들을 조사해 보았다. 특히 마츠시로(松代) 대본영과 고요엔(甲陽園)의 지하호가 내 주목을 끌었다.

 

마츠시로 대본영은 나가노현 산간지역에 설치된 대규모 지하 벙커이다. 패색이 짙어진 일제 군부가 본토결전을 위해 일왕가족과 군 지휘부(죠잔象山), 정부 기관과 NHK 방송국(마이즈루산舞鶴山), 그리고 이들을 먹일 식량 창고(미나가미산皆神山)를 수용하려고 만든 땅굴이었다.

 

19441111일부터 산간 암반지역의 지하를 파들어 간 이 지하호는 폭 4미터, 높이 2.7미터, 총 연장 13킬로미터로 계획되었다. 대형 덤프트럭 2대가 마주 달릴 수 있는 크기였으며, 일본 패전으로 중단될 때까지 9개월간 거의 10킬로미터가 완공되어 75%의 진척율을 보였다.

 

태평양 전쟁 전 7.8킬로미터의 단나(丹那)터널 공사에 16(1918-1934)이 걸렸고, 전쟁 이후 약 14킬로미터의 호쿠리쿠(北陸)터널을 완공하는 데에 4년 반(1957-1962)이 걸렸던 것에 비교하면, 마츠시로의 지하호 공사가 얼마나 상식 밖의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다.

 

지하호의 규모와 공사 속도를 생각하면 이를 건설한 노동자들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 짐작하기도 어렵지 않다. 기록과 증언에 따르면 마츠시로 지하호 공사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는 6-7천여 명, 그중 2천명은 조선에서 강제 동원되었다. 공사에 동원된 일본인 노동자가 15-3천 명이었다고 하니, 마츠시로 지하호는 조선인에 의해 건설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위험도가 높은 암반 굴착공사는 거의 조선인이 담당했으므로 사상자가 자주 발생했는데, 증언에 따르면 조선인 사망자는 적어도 3백 명, 많게는 1천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되었다.

 

피해는 지하호 건설 중의 사망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마츠시로 지하호 완공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 군부는 오키나와 결사항전을 명령했고, 수백차례의 미군 공습을 감내했고, 결국 2발의 원자폭탄을 맞아야 했다.

 

 

194539일 자정부터 5시간동안 계속된 도쿄대공습의 민간인 사망자는 최소 10만명(최대 19만명)으로 추산되었는데, 그중 적어도 1만 명이 조선인이었다. 194541일부터 83일간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일본군 11만명, 민간인 12만명이 사망했고, 강제 동원된 조선인 군인, 군속, 노무자, 정신대원 중에서도 1만 명이 사망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사망자는 각각 166천명과 8만명으로 추산되었는데, 이중 조선인 사망자가 1만 명 이상이었다.

 

요컨대 마츠시로 지하호를 건설하느라 강제동원한 조선인 노동자 중에서 1천명의 사망자가 나온 것도 끔찍한 일이지만, 그 대본영 완공의 시간을 벌기 위해 3만여 명의 재일 조선인을 포함해 40만 이상의 일본인 민간인이 희생되었던 것이다.

희생은 사망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증언에 따르면 조선인 노동자들은 상시적인 과로와 영양실조에 시달렸다고 한다. 하루 12시간의 장시간 노동과 배고픔을 못 이겨 도망하다가 사살되거나 잡혀서 고문당한 사례도 보고되었다. 동굴 벽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고향을 그리며 쓴 대구밀양,” 부모님을 생각하며 쓴 구운몽세배라는 문구들이 발견되었다.

 

패전과 함께 일제 군부가 기록을 소각하고 입구를 폐쇄했기 때문에 마츠시로 대본영의 존재는 오랫동안 잊혔다가, 이 지하호가 보호하려던 쇼와 천황(1901-1989)이 사망한 직후인 1990년에야 부분 개방되었다. 일제 군부와 정부가 천황제 존속과 그의 체면 유지를 위해 쏟는 노력은 일반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지금도 노동자의 희생을 축소하거나 부정한다. 나가노시가 지하호 입구에 세운 안내문은 이 땅굴이 강제 동원된 일본인과 조선인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서술하면서도 모두 강제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등 여러 견해가 있다는 변명을 덧붙여 놓았다.

 

곤도 도미오 선생은 기고문에서 마츠시로 대본영에 대해서도 정홍영 선생에게서 배웠고, 그곳에는 중학교의 수학여행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2번이나 함께 갔다.”고 서술했다. 곤도 선생께 수학여행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를 요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첫 번째 수학여행은 19895월이었습니다. 당시 다카라즈카 시립중학교 3학년생들의 수학여행이었지요. 518일부터 5일간의 일정이었는데, 그중에서 마츠시로 대본영 지하호 방문은 520일이었습니다. 참가 학생은 3학년 6개 반이었으니까 약 2-240명이었을 것입니다.

 

곤도 도미오 선생과 함께 <마츠시로 대본영 지하호>에 수학여행을 갔던 학생들이, 이 전쟁 사적지의 '보존운동'에 적극 잠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수학여행의 사전답사를 위해 서너 명의 동료 교원들과 함께 한 달쯤 전인 44일에 마츠시로 대본영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그 지하호에 들어가 본 것입니다. 터널 안에서는 눈을 뜨고 있어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습니다. 그래서 손전등을 들고도 서로 길을 잃기 않기 위해서 기다란 줄을 잡고 다녀야 했습니다.

 

두 번째 수학여행은 19925월이었는데, 이때는 나가노시가 지하호를 정비하고 관리하기 시작한 직후였습니다. 지하호의 내부에 전등이 가설되어 관람하기는 편리해졌지만 제한구역이 설치되어서 관람할 수 있는 범위가 극히 한정되었습니다. 손전등을 준비하거나 줄을 잡고 다닐 필요는 없었지만 지하호를 방문한 의미나 감회가 줄어들었던 것 같습니다.”

 

곤도 선생이 대본영 지하호 건설과정에서 벌어진 노동자들의 참혹상을 제대로 인식한 것은 1994년 정홍영 선생과 함께 마츠시로에서 열린 <5회 조선인 중국인 강제연행 강제노동을 생각하는 전국교류집회>에 참가했을 때였을 것이다.

 

곤도 도미오 선생이 사진으로 보내주신 <제5회 조선인 중국인의 강제연행 강제노동을 생각하는 전국교류집회(1994년 7월)>의 안내 브로셔.

 

이 전국교류집회는 이미 1990년 아이치현의 나고야(1, 825-26), 1991년 효고현의 니시노미야와 고베(727-28), 1992년 히로시마현의 구레(725-26), 1993년 나라현의 시기산 교쿠조인(信貴山玉蔵院, 731-81) 등에서 열린 바 있었다. 이는 일본 전역의 뜻있는 역사연구자들이 모여서 일제 식민지 시절과 태평양 전쟁 시기에 재일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겪어야 했던 강제연행과 강제노동에 관한 조사연구를 발표하는 연례행사였다.

 

이 전국교류집회는 전쟁범죄와 반인권행위를 부정하거나 은폐하려는 일본 정부를 반박하는 데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예컨대 1993년의 제3회 나라현 집회에서는 이른바 <후생성 명부>를 공개해 일본정부로서도 강제연행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일본 역사 교과서에 강제연행과 위안부에 관한 기술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마츠시로에서 열렸던 제5회 집회에서도 다수의 조선인 노동자를 혹사하고 본토결전의 최후의 보루로 만들어진 마츠시로 대본영은 실로 일본이 감행한 강제연행, 강제노동의 상징적 존재라고 규정하고, “사실을 부정하여온 일본 정부도 시민들에 의하여 밝혀진 사실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선언했다.

 

 

마츠시로 대본영 지하호 입구에는 이 터널 공사에 강제 동원되었다가 작업 혹은 수용생활 중에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마츠시로의 전국교류집회 이후에도 오사카부 다카츠키(高槻), 기후현 기후(岐阜), 시마네현 마츠에(松江), 이시카와현 카나자와(金沢) 등지에서 연례모임이 계속되었으나, 1999년 큐슈의 구마모토(熊本)에서 열린 제10회 집회를 마지막으로 연례집회는 종료되었다. 이후에는 각 지역 연구자들이 다른 연구자들을 초청해 그 지역의 연구를 보고하는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효고현 조선사연구회>의 히다 유이치(飛田雄一) 선생은 <무쿠게통신(178)>에 실은 기고문에서 정홍영 선생이 <조선인, 중국인 강제연행, 강제노동을 생각하는 전국교류집회>의 제안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밝혔다.

 

전국교류집회의 주창자 정홍영 선생과 함께 모든 집회에 빠짐없이 참가했던 곤도 선생은 조선인 강제연행과 강제노동의 실상을 가장 사실적으로 인식한 일본 지식인의 한사람이었다. 그같은 인식은 결국 자신의 고장 다카라즈카와 효고현에서 벌어졌던 유사한 일에 대해 자세히 연구하고 기록하는 일에 매진하게 했을 것이다.

 

곤도 선생이 주도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건립도 정홍영 선생과 함께 다듬은 역사 인식과 시민단체 활동의 구체적인 결과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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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곤도 도미오 선생이 2020년 5월31일자 <무쿠게통신(300호)>에 게재하신 기고문을 번역한 것이다. <무쿠게통신>은 한국/조선을 연구하는 일본인 중심의 모임인 <무궁화회>의 월간 기관지이다.)


정홍영 씨와의 일

곤도 도미오

 

1983년 가을의 어느 날 방과 후에 A중학교 직원연수회가 열렸다. 강사는 정홍영 선생으로 같은 교육구 내에 사시는 재일 코리안 지역사 연구가이다. 그해 여름, 무코 강이 범람해 정홍영 선생이 살던 지역이 거의 전역, 1층의 천장 근처까지 물에 잠겼다. 이 지역은 재일 코리안들이 밀집해 사는 곳이었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1961년 여름, 무코강 하천 부지에는 공습 이재민이나 생활 곤궁자 등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곳에는 다른 거주지를 찾기 어려운 코리아인들도 많았다. 현에서는 1958년부터 퇴거 권고를 반복하다가 19614월에는 아마가사키(尼崎), 니시노미야(西宮), 이타미(伊丹), 다카라즈카(宝塚)시 등에 걸쳐 무코강 하천 부지 거주자에게 퇴거 및 건물제거 명령을 내렸다. 불법 점거, 홍수의 위험성, 도쿄 올림픽을 위한 미관 정비가 이유였다. 이타미와 다카라즈카 시에서는 집단 이주지를 알선한 뒤에 철거를 진행했지만 아마가사키 시에서는 1961728일 한나절 만에 판자촌 철거를 강제 집행했다. 주민들에게 약간의 위로금이 지급되었을 뿐이었다.

 

2020년 5월31일자 <무쿠게통신(300호)에 실린 곤도 도미오 선생의 기고문 <정홍영 선생과의 일>.

 

이 때 다카라즈카시가 알선한 곳이 위의 땅이었다. 조사 결과 이 지역은 무코 강바닥보다 낮았다. 무코 강이 넘치면 반드시 물에 잠기는 곳이었던 것이다. 직원 연수회에서 정홍영씨가 인재라고 비난한 것도 당연했다. 다만 그의 말투는 지나칠 만큼 온화했고 확실한 사실을 조용히 제기했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졌다. 나는 그의 말투에 한 눈에 끌렸고, 모임이 끝나고 나서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 이후 나는 정홍영 선생의 금붕어 똥(金魚)”이 되었다.^^

 

정홍영 선생도 어디든 갈 때면 꼭 내게 연락을 주었다. 효고 조선관계 연구회의 일원으로 다카라즈카를 중심으로 지역 코리아인의 발자취도 조사해 왔지만, 특히 전국에 남겨진 일본 패전 시기의 공장 소개용 지하벙커에 대해서는 끈질기다고 할 만큼 자세히 조사했다. 이른바 마츠시로(松代) 대본영에 대해서도 정홍영 선생에게서 배웠고, 그곳에는 중학교의 수학여행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2번이나 함께 갔다. 코요엔(甲陽園)의 지하호, 아이노(相野)의 지하호, 야마나카(山中) 온천의 지하호, 쿠쿠리()의 지하호에도 함께 갔다.

 

 

그러던 중 1993326일 아침, 무쿠게회의 호리우치 미노루(堀内稔) 선생이 전해주신 신문 기사 사본을 들고 정홍영 선생과 함께 차를 타고 타케다오(武田尾)로 향했다. 도중에 차를 세우고 근처의 찻집 겸 식당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면서 기사 내용을 확인했다. 신문은 1929328일자 기사로, 옛 국철 후쿠치야마선 개량공사 중에 얼어붙은 다이너마이트를 모닥불에 말리다가 실수로 폭발시켜 주위에서 불을 쬐던 조선반도 출신 인부가 죽고 다쳤다는 사건을 전하고 있다.

 

그 순간 알게 된 것이지만, 우연히도 사고가 있던 날이 64년 전 326일 바로 그날이었다. 기사는 윤길문(尹吉文, 21)이 즉사하고, 오이근(呉伊根, 25)이 병원에 실려 가던 중 사망했으며, 윤일선(尹日善, 25)과 그의 부인 여시선(余時善, 19) 등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장소는 카와베군 니시타니무라 키리하타 나가오산 제6호 터널 입구라고 되어 있었다.

뜻밖에도 제삿날에 현장을 방문하게 된 우리는 아무 제물도 준비하지 못한 채 마음뿐인 제사를 지냈다. 지금의 타케다오역에서 제6호 터널까지는 걸어서 약 20, 맑은 날이면 무코 강의 졸졸졸 흐르는 소리에 섞여 꾀꼬리 울음소리가 들리는, 걷기에 아주 기분 좋은 길이다.

 

짧은 터널을 두 개 빠져나가면 다카라즈카 시가 정비한 <벚꽃동산()> 입구이다. 이곳은 미즈카미 츠토무(水上勉)<사쿠라모리(櫻守)>로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오른쪽에는 <신수이히로바(親水広場)>라고 이름 붙은 광장이 있는데, 이곳에 당시의 노무자 합숙소(飯場) 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무코 강이 크게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는 곳에 이르면 6호 터널이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는 무코 강을 건너는 녹색 철관도 보인다. 이 철관은 고베 시까지 식수를 운반하는 <고베 수도>가 지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상류에 만들어진 센가리 수원지에서 멀리 고베 시까지 대체로 어른 혼자 서서 걸을 수 있을 정도의 터널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 도수관은 1910년대부터 끊임없이 물을 나르고 있는데, 사실 이 터널 굴착공사 중에도 김병순(金炳順, 30), 남익삼(南益三, 37), 장장수(張長守, 27) 등 세 명의 조선반도 출신의 인부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구 니시타니무라 사무소의 매장 인허증을 통해 밝혀졌다.

 

매년 326일에는 거르지 않고 이곳을 찾아와서 6호 터널 근처에서 간단한 제사를 지내왔다. 처음에는 둘이서만 왔지만 때로는 많은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오기도 했다. 2000118일 정선생이 숨진 뒤에는 나 혼자서 간 적도 여러 번 있다. 정홍영 선생은 이 사실을 후세에 남기는 비석을 세우고 싶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하셨다.

 

 

정홍영 선생의 작품의 압권은 그의 저서 <가극의 거리의 또 다른 역사-다카라즈카와 조선인(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宝塚朝鮮人, 1997)>이다. 다카라즈카 지역에 찍힌 코리아인의 발자국은 거의 다 이 책에 망라되어 있다.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에 어떻게든 좀 '대단한 곳'에서 출판기념회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화려한 곳은 좀...”이라며 주저하는 본인을 제쳐두고, 망설임 없이 <다카라즈카 호텔>을 기념회장으로 정했다. 지금도 당일의 참가자 명단을 보면 1백명의 이름을 읽을 수 있다.

 

올해 2020223일 아침, 정홍영 선생의 책에도 서술되지 않은 중대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니시타니의 타마세(玉瀬)에 있는 만후쿠지(萬福寺)에서 온 소식이다. 100년 이상 사찰과 지역 부인회에서 조선인들을 위령하고 있는데, 부인회도 고령화되고 인원수도 줄어들어 이제 그만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는 말씀이었다. 다만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전화로 대략 방문 약속을 하고 26일에 절에 찾아가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만후쿠지(萬福寺)에서는 매년 824일 아침 무연고 참배를 계속해 왔다. 주지 스님과 부녀회원이 무연불(無縁仏)씨와 삼계만령(三界萬霊)에게 꽃을 바치고 쟁반 과자를 바치고 각각 향을 피우며 영혼을 위로해 왔다. 아마도 100년 정도 계승되어 오는 동안에 그 의미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선대 주지 스님이 옛날 타케다오의 터널 폭파 공사로 사망한 조선인들을 추도하고 있다는 말씀이 계셨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나눈 후에 현장을 안내해 주시고, 꽃과 과자를 갖추어 불경을 외워 주셨다. 금년 326일에 다카라즈카의 조선인을 추도하는 비를 건립한다고 전하자, 지금까지 자신들이 계속해 온 위령의 마음을 이어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면서 몹시 기뻐해 주셨다. 그리고 놀랍게도 추도비가 완성되는 날 아침 만후쿠지의 주지 내외분이 우리보다 일찍 현지를 찾아 추도비 앞에서 법요(法要)를 지내 주셨다.

 

그날, 완성된 비석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정홍영 선생의 묘에 가서 비석이 완성된 것을 보고했다. 대체로 항상 326일 타케다오에 갔다 오는 길에 묘소에 들르기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벌써 20회 정도는 참배를 했지만, 이날에야 비로소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늘 무덤의 앞에서 참배할 뿐이어서 몰랐는데 이날은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묘 주위를 둘러보다가 묘석 옆에 무언가 글씨가 쓰였는데 무슨 말인지 못 읽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가서 읽어보니 한글로 통일을 바라면서 이곳에 묻음이라고 되어 있다.

<중국인과 조선인의 강제연행 강제노동을 생각하는 전국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마쓰에(松江)에 가는 길에 하쿠비(伯備)선 특급열차 박스석에서 정홍영씨가 통일되기 전까지는 고향인 한국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던 일이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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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326,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제막됐다. 나는 제막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가고 싶기는 했으나, 코로나19의 국제 방역이 까다로워지면서 여행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즈음 한일 양국 사이에 발생한 무역 분쟁의 후폭풍이 겹쳐서 자유로웠던 한국인의 일본 여행에도 비자가 필요해졌다. 서울의 일본대사관이 정한 방문비자 발급 조건이 엄격했기 때문에 당분간 일본 여행은 불가능해졌다.

 

그 때문에 <최승희 후속 조사>가 중단되었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1년 반 동안 수집해온 자료가 방대하기 때문에 그것을 읽고 정리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오히려 쉬는 시간이 생긴 셈이어서 속도조절을 할 수가 있어서 좋았다.

 

2020년 3우얼26일 제막된 <다카라즈카조선인추도비>. 앞면에는 5사람의 희생자 이름과 함께, 고향을 그린다는 뜻으로 <월조남지(越鳥南枝)>가 크게 새겨져 있다. "월나라 새가 남쪽가지에 둥지를 튼다"는 뜻이다. 뒷면에는 이 추도비를 건립하게된 경위와 주관단체가 기록되어 있다. 

 

<무용신 프로젝트>에도 지장은 없었다. 정세화 선생께서 일본에서 모든 일을 잘 관장해 주셨기 때문이다. 고베와 시코쿠의 조선학교에 무용신이 전달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정세화 선생에게 우리 학교에도 무용신이 전달되는가하는 문의가 자주 들어온다고 하셨다.

 

이런 긍정적인 반응에 고무된 이인형 선생과 나는 <무용신 선물>을 확대하기로 했다. 맹렬해 지는 코로나19 때문에 2020년의 재일조선학생 예술경연대회가 3개 지역으로 나뉘어 진행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우선 깅키 지역의 조선학교에 <2차 무용신 선물>을 보내기로 했다.

 

다만 <1차 무용신>2개 학교의 초,,고급학생들에게 모두 전달했지만, <2차 무용신>은 중,고급학생들에게만 보내기로 했다. 초급학생들을 제외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단기간에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 우리의 능력에도 제한이 있었다.

 

다시 한 번 정세화 선생의 도움으로 각 학교의 무용부 학생 수와 각 학생들의 신발 치수를 조사했다. 지역이 넓어지고 학교 수와 학생 수가 많아졌기 때문에 이 조사도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세화 선생은 무슨 수를 쓰셨는지 필요한 정보를 신속하게 전해 주셨다.

 

 

제2차 무용신 선물 프로젝트는 11월6일에 열리는 깅키지역 재일조선학생 예술경연대회에 맞추어, 6개 조선중고급학교의 170명의 무용부 학생과 교원들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두번째 무용신 모금 캠페인은 한국동포들의 관심도 높고 참여도 많아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정세화 선생의 조사에 따르면 깅키 지역 6개 조선학교의 중,고급 무용부학생의 수는 160명이었다. 교원 분을 포함시킨다면 약 170켤레의 무용신을 준비하면 되었다. 필요한 예산은 약 430만원(=40만엔)으로 추산되었다. <1>때보다 5배가량 늘어난 셈이었다.

 

이인형 선생과 나는 20206월과 9월에 두 번으로 나누어 모금하기로 했다. 한국에서도 재일조선학교 후원에 대한 호응이 높아지고 참여가 늘어났기 때문에 모금운동은 어렵지 않았다.

 

<2차 무용신>을 위한 첫 번째 모금을 마치고 잠시 쉬던 6월말경, 나는 다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무쿠게통신(無窮花通信, 2020531일자, 통권300)>에 실린 곤도 도미오(近藤富男)선생의 글을 읽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2020년 5월31일 발행된 <무궁화모임>의 기관지 <무쿠게통신> 300호. 나는 <무궁화모임>의 홈페이지에 올려진 곤도 도미오 선생의 기고문을 읽으면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사진은 <무궁화모임> Facebook에서 전재.)

 

<무쿠게통신><무쿠게회(むくげの)>의 기관지이다. 최초의 최승희 평전인 다카시마 유사부로(高嶋雄三郎)<최승희>의 초판(1959)은 도쿄의 <학풍서원(學風書院)>에서 출판되었지만, 1981년에 개정판을 낼 때에는 <무쿠게사(むくげ)>가 출판했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19711월에 결성된 <무쿠게회>의 홈페이지에는 조선의 문화와 역사, 풍속과 언어를 연구하는 일본인들 중심의 동아리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기관지 <무쿠게통신>이 벌써 300호가 발행되었다는 것은 놀라웠다.

 

웹사이트에는 잡지의 모든 글이 포스팅되지는 않았지만 곤도 도미오 선생의 기고문은 읽을 수 있었다. 아마도 곤도 도미오 선생은 326일의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제막식을 마치신 후, 이 글을 <무쿠게통신>에 기고하신 것 같다. 이글에는 오랜 숙원을 이룬 사람의 조용한 자부심과 함께 명을 달리하신 선배에 대한 회상이 잔잔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글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나의 관심을 폭발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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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하고 나는 조선학교 무용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무용부를 운영하는 조선학교가 얼마나 되는지, 무용부 학생들은 몇 명이나 되는지, 어떻게 연습하고 훈련받는지, 작품은 어떻게 창작되고 공연되는지, 등등이 모두 궁금했다.

 

오사카에 머물렀던 5일 동안 정세화 선생은 내 의문의 상당부분을 풀어주셨다. 정세화 선생도 내 최승희 연구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으셨는데, 그동안의 국내 조사와 유럽 조사, 그리고 그때까지의 일본 조사에서 드러난 사실을 성심껏 말씀드렸다.

 

그러다가 우리는 의기투합했고 약속을 하나 했다. 서로 돕자는 약속이었다. 정세화 선생은 나의 최승희 조사연구를 돕겠다고 하셨고, 나는 재일 조선학교를 도울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2020년 3월1일은 고베조고의 졸업식이었고, 이인형 선생과 나는 고베조고를 방문해 무용부 학생들에게 성금으로 마련된 무용신을 선물했다.

이듬해(2020) 1월초, 내가 다시 고베를 방문했을 때부터 정세화 선생은 당장 약속을 지키기 시작하셨다. 재일 조선무용가들을 소개해 주셨고, 내가 그분들을 만나 인터뷰할 수 있게 주선해 주셨다. 덕분에 내 조사에는 80년 전의 최승희 공연 발굴뿐 아니라 현역 조선무용가들의 생생한 말씀도 들을 수 있게 됐다. 진짜 고마운 일이었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내 약속을 지킬 것인가, 였다. 내가 조선학교를 도울 방법은 거의 없어보였다. 거액의 재산가거나 잘나가는 사업가는 아니므로 내가 재력으로 도울 수는 없었다. 그저 은퇴한 연구자에 불과하므로 연구주제와 관련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정세화 선생과 의논을 거듭하던 중 한 가지 방안을 생각해 냈다. 고베조고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선물하자는 것이었다. 대단한 선물은 아니라 해도 의미있는 선물은 될 것 같았다. 마침 31일이 고베조고의 졸업식이라고 하니, 그 시기에 맞춰 학생들에게 연습과 공연에 필요한 무용신을 한 켤레씩 선물하기로 했다.

 

당연히 정세화 선생의 도움이 필요했다. 무용부 학생 수와 각 학생의 무용신 치수를 알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정세화 선생은 고베조고에 연락해서 내 뜻을 전해 주셨고 승낙을 받으셨다. 교장선생님과 무용부 교사의 협조아래 학생들의 이름과 신발치수가 파악되었다. 지도교사 2분을 포함해서 필요한 무용신의 수는 28켤레였다.

 

 

정세화 선생과 의논 끝에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연습과 공연에 쓸 무용신을 선물하기로 했다. 이인형 선생과 함께 모금 캠페인을 벌인 끝에 57분의 후원자들이 모아주신 성금으로 고베조고와 시코쿠초중급학교의 무용부 학생들과 교원들에게 무용신을 전달할 수 있었다.

서울에 돌아온 나는 <무용신 모금> 캠페인을 시작했다. 한국 돈으로 70만원쯤 모금하면 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부러 11만원의 후원을 요청했다. 액수를 채우는데 급급하기보다는 후원자 수가 더 중요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57명의 후원자가 94만원의 성금을 모아주셨다. 예산이 넉넉해졌으므로 마침 연락이 된 시코쿠조선초중급학교에도 무용신을 보낼 수 있었다.

 

무용신 모금 캠페인에 이인형 선생이 적극 참여했고, 결국 우리 두 사람은 무용신을 전달하러 227일에 마츠야마, 31일에 고베를 방문했다. 무용신을 받아든 학생들은 뜻밖의 선물에 기뻐했고, 지나치게 좋아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우리는 약소한 선물에 쑥스러우면서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무용신 전달을 끝내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정세화 선생은 다시 한번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말씀을 하셨다. 두 번째 말씀을 꺼내시는 것을 보니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나는 주의를 기울여 경청했다.

 

1백 년 전 다카라즈카 인근 토목공사에서 사고로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 5분이 계신데, 그분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326일에 새로 추모비를 제막한다는 말씀이셨다. 다카라즈카의 시민단체와 재일동포들이 함께 추진하는 행사라고도 하셨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다.

 

 

이 지역 시민들이 조선인 희생자 세 분을 위해 1백 년 동안 제사를 지내오셨습니다. 다른 두 분도 일본시민들과 재일동포들이 20년 이상 연례 추도제로 모셔오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1백년 동안 제사를 받으신 분들과 1백년 동안 제사를 지내신 분들이 동시에 궁금해졌다. 1백년전에 무연고자로 분류되신 이 조선인 희생자들은 과연 누구였던가? 일면식도 없는 그들을 그토록 오랫동안 제사 지내온 일본인들은 대체 어떤 분들이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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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본 효고현 다카라즈카(寶塚)에 묻힌 다섯 명의 조선인 노동자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201911월초 오사카에서였다. 효고현 이타미(伊丹) 시에 거주하시는 재일동포 사진가 정세화 선생으로부터였다. 1910년대와 20년대에 있었던 이 지역 토목공사 중에 사고로 사망한 조선인들을 추도하는 비석이 세워진다는 말씀을 처음 들은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내가 추도비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마음 상태가 아니었다. 재일 조선인 위령비나 추도비에 대한 선지식도 별로 없었을 때였고, 무엇보다 당시 나는 무용가 최승희 선생에게 푹 빠져서 그가 1930년대 일본 각지에서 가졌던 조선무용 공연을 조사하고 다니는 중이었다.

 

일본 효고현 다카라즈카시에서 북쪽으로 5킬로미터쯤 떨어진 키리하타의 나가오산 기슭에 세워진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추도비의 전면 하단에는 5인 희생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윤길문(尹吉文)과 오이근(吳伊根), 김병순(金炳順)과 남익삼(南益三)과 장장수(張長守)가 그들이다. 

 

그보다 2년쯤 전인 20175월 나는 최승희 선생의 유럽 공연을 조사해 취재기를 쓴 바 있었고, 연재가 끝나자 바로 일본 공연 조사를 시작했었다. 그뒤로 1년 반 동안 나는 홋카이도의 구시로에서 오키나와의 나하에 이르기까지 최승희 선생의 공연이 있었던 곳이면 어디든 쫓아갔다. 정세화 선생을 만났던 2019년 말에는 이미 일본 내 42개 도시를 조사한 뒤였다.

 

각 지역 조사에서는 공연 날짜와 극장을 확인하고, 발표된 작품들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정리했다. 신문이나 잡지에 난 공연 광고나 홍보 기사, 그리고 평론가들의 비평과 기자들의 후기, 혹은 일반인들의 감상문도 빠짐없이 스크랩했다.

 

조사 초기에는 무용 작품에 대한 관심보다는 최승희라는 인물에게 더 끌려 있었다. 엄혹한 일제강점기에 어떻게 조선무용을 창작하고 공연할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그 시기에 국제무대에서 그다지 활발하게 공연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 또 어떻게 가는 곳마다 환영받고, 감탄을 자아내고, 최상의 평가를 받을 수 있었는지, 그런 것이 궁금했다.

2019년 10월30일부터 11월1일까지 3일간, 오사카조선고급학교 문화회관에서는 <제52회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가 열렸다.

 

자료가 쌓이고 유럽과 일본의 평론가들의 비평을 정리하면서 최승희 조선무용의 미학에도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평론가들의 비평과 최승희 자신의 작품 묘사를 읽으면서 최승희가 공연했던 조선무용의 특징적인 동작과 정조가 어떤 것이었는지 조금씩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나는 조선무용에 대한 또 한 번의 전기를 맞았다. 20191031일부터 112일까지 오사카에서 재일 조선학교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하게 된 것이다. 4개 부문으로 나뉘어 열렸던 이 경연대회에서 나는 오사카조고 문화회관에서 진행된 무용경연대회를 처음부터 끝까지 참관했다. 내가 재일 조선학생들의 조선무용을 직접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각국 비평가들의 평론과 최승희 자신의 단편적인 작품 설명을 통해 불완전하게나마 머릿속에 그려지던 조선무용의 실체가 눈앞에서 완벽한 형태로 펼쳐지고 있었다. 학생들의 작품이 주는 느낌과 감동은 내가 상상으로 구축해오던 바로 그 무용이었던 것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내가 최승희 조선무용에 대한 전문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직관은 재일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이야말로 최승희 선생의 직계 제자들이라고 말해 주었다.

 

오사카에서 열린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에서 만난 정세화 선생. 그는 나의 최승희 조선무용 조사연구에도 큰 도움을 주셨을뿐 아니라 재일조선학교 무용부를 후원하거나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들의 연고를 찾는 프로젝트를 시작하도록 이끌어 주신 분이다.

 

오사카 예술경연대회에서 만난 또 하나의 행운은 정세화 선생을 만난 것이었다. 그는 이 경연대회의 사진 및 영상 촬영책임자로 각 학생들의 공연 작품들을 일일이 사진과 영상에 담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학생들에게 기념품으로 전달되고 각 학교에 기록으로 보관된다고 했다.

 

경연대회 첫날 점심 겸 휴식 시간에 대회장 바깥으로 나와 흥분을 가라앉히다가 정세화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붙임성 좋은 정세화 선생께서 먼저 말을 걸어오셨다. “한국에서 오셨지요?” 그리고는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그 뒤로 정세화 선생은 내 최승희 조사연구를 적극 도와주셨고, 재일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선물하는 프로젝트를 인도해 주셨다. 효고현의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와 함께 이 지역 조선인 정착의 아픈 역사를 소개해 주셨고, 마침내 우리는 추도비의 주인공 다섯 분의 한국내 연고를 찾는 일에 함께 나서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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