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살플레옐 공연 프로그램은 2017년에 재발굴되어 일반에 공개되었고, 이 프로그램의 발굴과정과 내용을 소개한 필자의 취재기가 후아이엠(2017829) 사이트에 연재되었고, 그중 일부는 일간지 세계일보(201797)중앙일보(201798), 통신사 뉴시스(201798) 등에 보도된 바 있다.

 

이 프로그램이 공개된 후에도 그 내용이 자세히 분석된 적은 없었고, 최승희의 살플레옐 공연의 레퍼토리가 가지는 예술적 혹은 사회적 의미가 밝혀진 적이 없었다.

 

살플레옐 프로그램은 4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1) 공연 일시와 장소, 주관사 등의 공연정보는 표지에 나타나 있고, (2) 최승희 소개는 2, (3) 작품의 순서와 간략한 해설은 4면과 5면에 서술되어 있다. (4) 이 팜플렛에 실린 사진은 모두 7장으로, 옥적곡(1면 앞표지)과 보살춤(3), 천하대장군(4)과 검무(5), 한량춤(6)과 무당춤(7), 초립동(8면 뒷표지)의 사진이다. 사진들은 대부분 조명이 잘된 스튜디오에서 전문 사진가들이 촬영한 흑백 작품들이었다.

 

프로그램의 텍스트는 최승희와 발표작품을 소개하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는데, 우선 프랑스어로 쓰인 최승희 소개글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1939년 1월31일에 열렸던 파리 <살플레옐> 극장 공연의 팜플렛에 실린 무용가 최승희 소개의 글. 파리의 시민들에게 처음으로 소개되는 내용이었던 만큼 최승희의 극적인 무용입문 과정과 그동안 조선과 일본에서 해온 공연활동에 대해 약간의 과장도 섞여 있었다.

 

극동의 저명한 무용가 최승희는 고색창연한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행복하고 명랑한 가정에서 자랐고, 14세에 숙명여학교를 졸업했다.

 

그 당시 그녀의 꿈은 음악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숙명여학교의 교사들은 최승희의 성악 재능을 알았기 때문에 학교의 비용으로 그녀를 도쿄 음악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입학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서울에서 일 년 동안 기다려야했다.

 

그때 저명한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가 서울에서 발표회를 열었다. 최승희는 그의 무용 예술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자신도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 새로운 예술이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드러내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부모는 반대했고 친척과 지인들도 반대했다. 당시 무용은 하층계급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승희는 꺾이지 않고 도쿄의 이시이 바쿠 무용학교에 입학했다. 4년 동안 최승희는 현대 발레의 원리와 기술을 익혔고 이시이 무용단의 스타가 되었다.

 

“1930년 고국으로 돌아온 최승희는 한국 무용 공연에 관심을 가졌다. 2천년 전통의 한국 무용 예술이 거의 사라진 것을 발견한 최승희는 이를 되살려야 함을 깨달았다. 다행히 궁정 무용의 전통이 일부 남아 있었기에 그녀는 그 춤들을 연구했고, 과거의 민속 무용을 찾기 위해 시골 마을을 찾아다녔다.

 

당시에는 한국의 고전 음악도 잊혀져 있었다. 최승희는 몇 명의 젊은 작곡가들과 함께 이 음악을 되살렸고, 그와 함께 한국의 무용 예술도 부활시켰다. 그녀가 새로운 작품들을 발표할 때마다 관객들은 열광했다. 그동안 누구도 한국 고대의 신성한 춤들을 재현하는데 성공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유럽과 미국에 한국의 예술을 소개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19349월 도쿄에서 무용발표회를 열었다. 일본의 수도에서 가진 그의 데뷔 공연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무용 비평가뿐 아니라 작가와 배우, 화가와 정치가들까지도 언론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1934년부터 1937년까지 최승희는 극동의 여러 도시에서 2백만 명 이상의 관객을 위해 6백회 이상의 공연을 열었다.

 

“19379월 최승희는 첫 번째 세계 순회공연을 결정했다. 미국은 고국에서와 똑같은 열광으로 최승희를 맞아 주었고, 이제 파리에서 그녀의 첫 번째 유럽 투어를 시작한다.”

 

이 소개문 내용은 대부분 이미 조선과 일본의 언론과 두 권의 자서전을 통해 잘 알려진 것이지만, 악의적인 것은 아니라고 해도 약간의 오류와 과장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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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유럽순회공연은 예술 공연 기획사 <국제예술기구>에 의해 기획되었고, 그 실무의 주관은 파리의 대행사 <발말레트>가 맡았다.

 

기획사와 주관사는 이 순회공연의 일정을 적어도 6개월 전에 확정했고 극장들을 예약했다. 이 예약을 앞당기기는 불가능했고 미룰 수는 있었으나 무거운 벌금을 내야했다. 최승희가 미국공연이 중단된 후에도 바로 유럽으로 가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국제예술기구>가 공연 일정을 마련했지만 최승희는 기획과정에서 자신의 요구를 주장할 수 있었다. 최승희는 공연 극장에 대해 2가지 확고한 선호사항이 있었다. 어느 나라든지 첫 공연은 그 나라 수도의 최대 극장이어야 하며, 극장의 조명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시이무용단에서 독립해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했을 때도 첫 공연은 경성공회당에서 열었다. 두 번째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도 그의 제1회 발표회는 예약 사정 때문에 불가피하게 일본청년관에서 열었지만 제2회 발표회는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렸다. 최승희의 이같은 극장 선호 원칙은 훗날 남미 제국과 중국, 러시아와 동유럽 제국의 순회공연 때도 지켜졌다.

 

최승희의 유럽 첫공연은 파리의 최대극장 <살플레옐>에서 열렸다. 1939년 1월현재 살플레옐은 객석 2천4백석으로 파리 최대의 극장이었다. 그러나 최승희가 첫 공연을 가진 후 40일만에 '파리 최대극장' 타이틀은 그해 3월10일 개관된 객석수 2천7백석의 <팔레데 샤이오> 극장으로 넘겨졌다.

 

<국제예술기구>는 최승희의 요구를 최대한 충족시켰다. 프랑스 첫 공연을 파리의 살플레옐 극장으로 예약했고, 벨기에 첫 공연은 브뤼셀의 팔레데 보자르 극장, 네덜란드 공연은 암스텔담의 위성도시 할렘의 슈타트 쇼우부르크와 헤이그의 프린세스 극장으로 정했다.

 

살플레옐 극장은 19391월말 기준으로 파리 최대 극장이었다. 183912월에 개관할 때는 3백석의 소극장이었기 때문에 살(salle, )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1927년의 재건축 때 3천석으로 대폭 늘었다. 1928년의 화재로 내부가 재건축되었 때 좌석수는 24백석으로 조정됐지만, 최승희 공연 당시에도 살플레옐은 객석 수 기준으로 여전히 파리 최대 극장이었다.

 

그러나 최승희 공연 이후 40일 만에 파리 최대극장이라는 타이틀은 팔레드 샤이오 극장에게로 넘어갔다. 1939310일에 개관한 샤이오 극장의 객석수가 27백석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최승희의 두 번째 파리공연은 그해 615일 샤이오 극장에서 열렸다.

 

살플레옐 공연은 최승희가 파리에 도착한지 한 달 후에 열렸고, 국제예술기구와 발말레트사는 홍보에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다만 홍보 전략에는 혼선이 있었다. 이해관계가 다른 세 주체의 요구가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최승희은 당연히 자신을 조선인으로, 자신의 작품들을 조선무용으로 홍보하고 싶었다. 반면 일본공관은 일본 무용가의 일본 무용으로 홍보하면서 최승희가 자국 평화사절 역할을 해주기 바랬다. 기획사와 주관사도 일본 무용가로 홍보되기를 바랬는데 이는 흥행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최승희의 파리 첫공연은 신문의 연주 일정표와 같은 형식으로 거리에 세워진 광고탑에 연일 홍보되었다. 이 홍보난에 어떤 표현을 쓰느냐를 두고 최승희와 일본 대사관, 그리고 흥행사/주관사 사이에 치열한 밀고 당기기가 이뤄졌다. 결국 최승희는 <일본무용가>로 표기되었지만 그의 무용작품은 <조선 무용>으로 명기되도록 타협이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세 주체의 상이한 요구와 현지 언론인들의 무지가 뒤섞이는 바람에 결국 일본인 무용가의 조선무용으로 타협이 이뤄졌다. 물론 이 타협은 세 당사자가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통해 결정한 것은 아니며, 언론보도를 통한 밀고 당기기가 계속된 끝에 자동적으로 조정된 결과였다.

 

일본공관과 기획사/관사는, 서로 다른 이유 때문이기는 했으나,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홍보하게 된 것에 만족했고, 이후 기획사와 주관사는 언론을 통해 활발한 홍보를 벌였고, 일본 대사관은 파리뿐 아니라 온 유럽의 일본교민들에게 최승희 공연에 참석하도록 독려했다.

 

1939214일 파리주재 일본대사관이 본국 외무성에 발송한 보고서에는 본관이 초대한 이탈리아와 벨기에 양국 대사, 프랑스 외무성 관리, 기타 일본 관계자 등을 포함하여 관객 천육백을 넘어 예상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신문비평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내용이 담겼다.

 

최승희는 살플레옐 공연 홍보 과정에서 조선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일단 양보하는 대신 자신의 발표작품에 조선무용이라는 말을 쓸 수 있게 된 데에 만족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었다. 살플레옐 공연의 레퍼토리는 1백퍼센트 조선무용이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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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217일 프랑스의 호화여객선 파리호에 승선해 뉴욕을 출발한 최승희는 일주일동안 대서양을 건너 그달 24일 오후에 프랑스의 대서양 최대항구 르아브르의 조안네스 쿠베르(Joannès Couvert) 선창에 도착했다. 바로 기차로 갈아탄 최승희는 그날 밤 파리의 상라자레(Saint-Lazare)역에 도착했다. 죠르쥬 생크(George V) 호텔에 숙소를 마련한 최승희는 샹젤리제에 스튜디오를 빌고 공연 준비에 들어갔다.

 

파리의 언론은 최승희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12(확인)의 일간지가 최승희의 파리 도착을 사진과 함께 1면에 보도했다. 미디어는 최승희의 출신배경과 무용입문, 조선과 일본에서의 성공, 미국을 거쳐 유럽무대 데뷔하게 된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다.

 

프랑스 최대항구 르아브르에 입항하는 호화여객선 <파리>호. 최승희는 <파리>호로 뉴욕을 떠나 대서양을 건넌 후 르아브르에 도착했다.

 

유럽 첫 공연이 시작되기 전인 1939112일 파리주재 일본대사관은 최승희 환영리셉션을 열었다. 파리 주재 각국 외교관들과 문화부문의 주요 인사들, 그리고 파리의 기자와 평론가들을 대거 초청되었다. 명시적으로는 일본 여권을 가지고 공연 여행 중인 최승희를 지원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전운이 감도는 유럽과 이미 전쟁 중인 아시아의 북새통 속에서 일본의 평화적 제스처를 선전하는 방편이기도 했음에 틀림없다.

 

최승희도 일본 외무성과 외교공관의 이중적 태도를 잘 알고 있었다. 당초 최승희는 남편 안막과 딸 안승자와 함께 세계 순회공연을 치를 예정이었고, 외무성에 3명의 여권을 신청했다. 외무성은 딸 안승자의 여권만 발급을 거부했다.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을 하는 동안 딸을 도쿄에 잡아둔다는 것이었다. 조선 출신의 정상급 예술가 최승희가 반일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가족과 함께 망명이라도 하게 되는 곤란한 사태를 사전에 방지하려던 것이었다.

 

최승희와 안막은 이같이 족쇄가 채워진 상태에서도 줄 것은 주지만 받을 것은 받는다는 생각이었다. , 일본정부의 평화 제스처의 역할을 담당해 주지만,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이 순회공연을 통해 조선무용을 세계무용계의 한 장르로 부각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최승희의 이같은 줄타기 전략은 그 자체가 상당히 위험한 것이었지만 피식민지 예술가로서는 독립운동을 제외하고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차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최승희가 이러한 위험한 전략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국제정세와 문화운동에 대한 식견이 뚜렷했던 남편 안막 덕분이었을 것이다.

 

1938년 12월24일 르아브르를 거쳐 파리의 상라자레역에 도착한 최승희(왼쪽)와 그가 파리에서 촬영한 <한량무> 모습(오른쪽).

 

이를 위해 최승희는 두 가지 전략을 사용했다. 하나는 자신과 자신의 무용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었다. ‘자신은 조선인이며 자신의 무용은 조선무용임을 최승희는 강조했다. 자신과 자기 예술의 정체성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일제 공관의 방해와 유럽 언론의 무지 때문에 이같은 시도가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9개월의 유럽 체류를 마치고 마르세이유를 떠날 즈음에는 적어도 그가 공연했던 서유럽에서는 최승희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공연의 레퍼토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하는 것이었다. , 개개의 작품들뿐 아니라 그 작품들을 구성과 상호연관성을 통해서도 최승희는 유럽인들에게 조선의 실상을 알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의 발표작품들은 한국 예술사의 주요한 작품이나 사건들을 소재로 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이를 시기별, 계층별, 연령별, 성별로 골고루 제시하기 위해 애썼다.

 

이글에서 최승희의 살플레옐 공연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분석하는 것은 이 두 번째 전략이 어떻게 수립, 실행에 옮겨졌고, 그에 대한 관객과 비평가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살펴보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2017년 여름, 80년 만에 발굴된 살플레옐 공연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그 내용을 번역해 제시한 다음, 각 작품들의 내용과 배경을 소개하게 될 것이다.

 

살플레옐 프로그램을 그 이전 미국 공연의 프로그램들과 유럽의 다른 공연 프로그램들과 비교하면 최승희의 유럽공연 의도가 더욱 뚜렷해 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많은 지면을 요구하는 작업이 될 것이므로, 이번 글에서는 최승희 유럽순회공연 중의 첫 공연인 1939131일의 <살플레옐> 공연 프로그램의 분석에 한정하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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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는 1939년 유럽 순회공연을 단행했다. 이 순회공연은 한국예술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아마도 1964년 비틀즈의 미국 침공(British Invasion)에 비견할 문화적 사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문화와 예술의 차원과 방향을 질적으로 도약시킬 계기였기 때문이다.

 

이차대전과 냉전이 아니었다면 최승희의 조선무용은 비틀즈의 팝과 록에 비견할 문화 현상을 이뤘을 것이다. 19세기 러시아 제실 무용이 한동안 유럽 발레를 이끌었던 것처럼 20세기 조선무용이 유럽이나 동양에서 그런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한국 예술 전반이 일찌감치 세계화를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한편, 1930년대 최승희의 조선무용은, ‘한류의 이름으로, 2010년대의 비티에스에 비견되기도 한다. 현상의 규모와 내용의 면에서 그 둘이 비교될 수 있는 대목이 분명히 있다. 특히 둘 다 민족문화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해 나갔다는 점에서 그렇다.

 

최승희의 유럽공연은 조선의 민족무용이 어떻게 처음으로 유럽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에 대해 유럽 관객과 비평가와 언론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알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1939131일 살플레옐 극장에서의 공연은 그 서막이었다. 그 레퍼토리를 찬찬히 살펴보면 이 공연이 최승희와 조선무용에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1939년 유럽순회공연 중의 최승희.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서 포즈를 취했다.

 

살플레옐 공연의 레퍼토리는 1936년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을 처음 구상할 때부터 구성되기 시작했고, 1937년 무용영화 <대금강산보>를 촬영하면서 구체화되었고, 1938년 미국 무대에서 일차 테스트를 거친 후, 파리에 도착한 후에도 심사숙고 끝에 보완되어서 발표되었다.

 

유럽의 관객과 평론가들이 최승희 공연의 내용과 의미를 속속들이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 유럽에는 조선이라는 나라와 민족을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으니, 그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이해를 갖춘 사람은 더더욱 드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승희와 안막도 자기들의 의도를 말로나 글로 설명하지 않았다. 안막은 글을 잘쓰기로 유명해서 이미 20세에 경성의 주요 일간신문에 두루 문학평론을 연재했다. 최승희도 25세의 나이에 자서전을 출판한 저술가이고, 단편소설까지 발표했을 뿐 아니라 여러 잡지에 자전적인 회고록을 기고하던 작가이기도 했다.

 

그런 안막과 최승희가 공연에 대해서 말을 아꼈다. 이들이 말이나 글로 작품을 설명하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선 말/글로 설명해야 의미가 전달되는 작품이라면 예술적 감동의 효과는 반감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작품이라면 예술성에 의심의 여지가 생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이유는, 공연 의도와 의미를 말이나 글로 공개할 경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조국 조선의 피식민 상황 때문이었다. 외국에서도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일본공관에 의해 본국에 보고되고 있었고, 잘못된 말 한마디나 글 한 줄이 향후의 공연 활동뿐 아니라 이들의 생활과 생존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말과 글이 없었더라도 최승희 공연과 그 발표작품들의 의미를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최승희의 조선과 일본 공연을 감상한 숱한 조선인들과 재일동포들이 생생하게 증언했던 점이다.

 

80년이나 지난 지금도 나는 살플레옐 공연의 발표작품 리스트를 보는 순간 최승희와 안막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불과 수년전만 해도 조선무용의 문외한이었던 내가 그랬을 정도이니, 오늘날의 한국 무용인들과 평론가들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글에서는 최승희의 살플레옐 공연 레퍼토리를 다시 한 번 공개하고 그에 대한 해설과 기초 분석을 제공해 보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최승희의 유럽공연의 의도가 조금 더 뚜렷해 지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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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최승희의 결혼기념일이다. 90년 전인 193159일 오전11, 안막과 최승희는 동대문 밖의 전문요리점 <청량관>에서 가족과 친척들만 모인 가운데 서정화 선생의 주례로 조촐한 결혼식을 가졌다. 결혼식에 걸린 시간은 불과 10분이었다.

 

최승희의 결혼식장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다. 평전들은 대부분 <청량원>이라는 식당을 결혼식장이라고 서술했지만 그런 이름의 식당은 없었다. 그밖에도 문헌에 따라 <영도사><청량사>라는 사찰이 결혼식장으로 언급되기도 했다.

 

최승희의 결혼과정에 대한 거의 모든 문헌을 섭렵한 끝에 나는 안막-최승희의 결혼식장이 <청량원><영도사><청량사>도 아닌, 전문요리점 <청량관>임을 밝힐 수 있었다. 그것을 조사하는 과정은 원고지 80매 가량이 들어간 지루한 작업이었지만, 거두절미하면 결론이 <청량관>이었다.

 

그런데, 최승희의 결혼식장으로 <영도사><청량사> 등이 언급되면서 혼란이 생겼던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결혼식 전까지의 매체 보도에 혼란이 생긴 것은 안막과 최승희의 결혼식이 촉급하게 결정되었고, 그에 따라 결혼식장을 예약하는 것 자체가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 결정은 그해 417일 이후에 내려졌고, 최승희 부모의 승낙이 떨어진 것이 4월말이었다. 따라서 결혼 일시를 정하고 식장을 예약할 시간이 약 일주일뿐이었다.

 

특히 결혼식에 임박한 55일의 <조선일보>7일의 <동아일보>가 결혼장소를 보도하지 못한 것은 이례적인데, 이는 그때까지도 결혼식장이 정해지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혹은 이 결혼식을 가족만의 조촐한 모임으로 진행하기 위해 가족들이 일부러 함구했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날짜는 발표하면서 장소만 함구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매일신보>56일 보도에서 결혼장소를 <청량사>라고 한 것은 실수에 따른 오보였을 것이다. 혹은 5일까지의 취재를 통해 당사자나 가족으로부터 식장으로 <청량사>를 고려 중이라는 정도의 언질을 받고 그대로 기사화한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 정확한 보도를 한 것은 58일까지의 취재를 통해 결혼식장이 <청량관>이라고 서술한 59일의 <경성일보> 뿐이었다.

 

매체들의 혼란보다 조금 더 이례적인 것은 최승희의 부정확한 기억이다. 그는 두 권의 자서전(1936, 1937)에서 자신의 결혼 일시를 잘못 기록했고 결혼식장은 언급도 하지 않았다.

 

<조선중앙일보(193431)>와의 인터뷰에서는 자신의 결혼이 재재작년(=1931) 5<청량관>”이었다고 옳게 대답했지만, <삼천리(19357월호)> 기고문에서는 소화7(=1932) 봄 청량리 영도사(永導寺)”라고 서술했고, <조광(19409월호)>과의 인터뷰에서는 그 이듬해(?) <청량사>”라고 답변했다. 시간이 갈수록 최승희의 회상이 사실과 멀어짐을 알 수 있다.

 

결혼한 지 4-5년만에 자신의 결혼식 일시와 장소에 대한 기억이 이렇게 모호해질 수 있는 것일까? 더구나 결혼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여성에게 훨씬 더 중요했던 시대였던 것을 고려하면 최승희의 망각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그러나, 그동안 최승희의 삶과 춤을 조사하고 연구해 오던 지난 3년여 동안의 경험과 느낌으로 말한다면, 최승희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최승희의 삶은 일생을 통해서뿐 아니라 하루하루의 생활도 무용에 파묻힌 외골수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앞에 든 인터뷰나 기고문을 작성하던 시기는 1933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새롭게 조선무용 분야를 개척하던 시기이다. 그의 최초의 조선무용 작품 <에헤야 노아라(1933)>가 이 시기에 발표되었고, 잇달아 <검무(1934)>, <승무(1934)>, <봉산탈춤(1935)>, <코리안 듀엣(1936)>, <초립동(1937)>, <보살춤(1937)> 등의 걸작을 창작하는 데에 매진하고 있을 때였다.

 

특히 19355월부터는 이시이 바쿠 무용단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무용연구소를 세웠으므로 이를 꾸려나가는 데에도 혼신의 힘을 쏟고 있었다. 온 신경이 신작품 창작과 무용연구소 운영에 집중되어 있을 때였다. 다행히 이런 노력은 결실을 거두었고 1936년부터 최승희는 조선은 물론 일본 제일의 무용가로 꼽히면서 1938년부터의 세계순회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정을 고려할 때 당시 최승희에게는 자신의 결혼식에 대한 기억마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무용 활동에 대해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계획하고 실행해 나가면서도, 그 밖의 일상사에 대해서는 너무도 명백한 오류를 범하곤 했던 것이다.

 

그렇다. 최승희는 자신의 결혼식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던 무용가였다. 자기 결혼식의 날짜나 장소를 잊거나 혼동하는 것은 쉽게 나타나는 실수가 아니다. 자기 인생의 중대사를 잊어버리는 맹한 실수일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맹한 실수는 정신을 온통 무용 한 군데에 집중하던 시기에 최승희에게 일어났던 일시적 건망증, 혹은 기억착오였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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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래의 각종 매체의 보도와 최승희 자신의 회상에서는 그의 결혼식장으로 불교사찰 <영도사><청량사>, 그리고 고급전문요리점 <청량관>이 언급되었음이 확인됐다. 이제 이 세 곳 중에서 어느 곳이 실제로 안막-최승희의 결혼식이 열린 곳인지를 추론할 단계이다.

 

안막과 최승희의 당시 시계열 동선을 파악한 결과 두 사람이 맞선을 통해 처음 만난 것은 193138-31일 사이였고, 아마도 이 3주일 동안 2-3회의 데이트를 더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최승희가 북선 지역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417일 직후에 결혼 결정이 내려졌고, 4월말까지는 최승희 부모의 승낙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안막과 최승희가 결혼식을 준비할 시간은 대략 10일밖에 없었고, 날짜를 9일로 정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겠지만 결혼식장을 섭외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불과 일주일을 앞두고 결혼식장 예약을 한다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쉬웠을 리 없기 때문이다.

 

55일의 <조선일보> 보도나 57일의 <동아일보> 보도에도 결혼식의 장소는 밝혀지지 않았고, 56일의 <매일신보> 보도에서 비로소 결혼식장을 <청량사>, 결혼당일인 59일의 <경성신문><청량관>이라고 밝힌 바 있다.

 

1931년 5월9일의 <경성일보>는 최승희의 결혼소식을 전하면서 예식장이 <청량관>이라고 정확히 보도했다.

 

매체 보도를 중심으로 그 세 장소의 간략한 역사와 1920-30년대의 상황을 검토해 본 결과, 세 곳 모두 교통이 편하고 경성 시민들에게 인기 있는 소풍지였던 데다가, 모두 식사를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식이나 피로연을 열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자료를 살피던 중 한 가지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났다. 1900년부터 1930년대까지의 30년 동안 <영도사><청량관>에서는 다수의 결혼식이 있었던 기록이 나타났지만, <청량사>에서는 단 한 건의 결혼식도 보도된 것이 없었다. 결혼식 보도가 없다는 것이 곧 <청량사>가 결혼식장으로 사용된 바 없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량사>가 결혼식장으로 적당하지 않다는 인식이 공유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은 <청량사>가 비구니 도량이라는 점 때문이다. 여승들만 기거하는 <청량사>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이 당시는 물론 지금도 그리 일반적인 관행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일반 시민들의 인식뿐 아니라 <청량사>의 승려들의 인식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청량사>가 많은 단체행사들과 문화행사, 그리고 장례식과 각종 제례들이 열리면서도 유독 결혼식에 대해서만은 기록이 없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렇다면 안막-최승희의 결혼식장 후보는 <영도사><청량관>으로 좁혀지게 되는데, 그중 <청량관>이 결혼식장이었을 것이라고 믿을 만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영도사>에서 결혼했다는 기록은 19357월호 <삼천리>에 서술된 최승희의 회상 한 건 뿐이었다. 다른 문헌에는 <영도사>가 결혼식장으로 언급된 바 없었다. 게다가 이 회상에서는 결혼 시기도 잘못되어 있었다. 193159일이었던 결혼식을 ‘1932년 봄이라고 기억한 것이다. <영도사>가 결혼식장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는 신빙성이 낮은 회상 1건 뿐이다.

 

반면에 <청량관>이 결혼식장이었다는 결정적인 언급은 <경성일보>59일 보도이다. 이 보도는 결혼식이 열리는 당일 배포되었지만 기사는 전날인 58일 작성되었을 것이다. 결혼식장이 뒤늦게 정해졌다면 이 보도야말로 취재를 통해 가장 사실대로 보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매일신보>56일 보도에서 <청량사>라고 한 것은 <청량관>을 오해했거나, 혹은 결혼식장으로 <청량사>가 고려되고 있다는 언질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둘째, 최승희의 회상에 바탕을 둔 193431일의 <조선중앙일보> 인터뷰 기사에서는 두 사람이 재재작년 5<청량관>에서 화촉의 성전을 거행했다고 서술한 반면, 1940년의 <조광>에서는 최승희가 “<청량사>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고 서술했다. 최승희의 상충되는 두 회상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면, 결혼식에 더 가까운 1934년의 회상에 더 신빙성을 두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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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최승희양은 9일 경성부 바깥 청량리의 <청량관>에서 서정희씨의 주례 아래 안막군과 결혼식을 거행한다고 보도했었다. 193431일의 <조선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최승희는 재재작년(=1931) 5월 청량관에서 화촉의 성전을 거행했다고 회상했다.

 

<청량관>은 어떤 요리점이었던 것일까? 언론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보도된 것은 190036일의 <제국신문> 4면에 실린 광고였다. 이후 46일까지 총 30회의 동일한 광고를 통해 홍릉 정거장 좌우 요리집에서 외국 요리 잘하는 곡상을 두고 정결이 하오며, 동편채 뒤로 정쇄한 별당을 지어 내외하시는 부인을 위하여 여인을 시켜 대접할 터이오며, 혹 소창하라 하시는 이는 미리 통기하오면 포진 범백을 정결이 하여 드릴터오니 모든 손님은 찾아오시라고 했다. 이 광고문에는 <청량관(淸凉館)>의 주인이 조원규씨임도 밝혔다.

 

<제국신문>은 같은해 96일자 3면에 또다시 <청량관> 광고를 실었다. 그런데 광고 내용이 특이하다. “홍릉앞 정거장 요리집에서 외상이 심하와 철시하였다가 다시 개시하였사오니 내림하시옵. 청량리 청량관 고백.” 이 광고도 925일까지 모두 15회 게재되었는데, “외상 때문에 철시해야 했다는 사정 설명이 영업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고, 주인 이름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 혹시 주인이 바뀌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다카시마 유사부로와 정병호 공편저의 사진집 <세기의 미인 무용가 최승희(1994)> 60쪽에 실린 최승희-안막의 결혼식 장면. 사진설명 중의 <청량원>이라는 장소 이름은 <청량관>의 잘못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영자가 바뀌었어도 영업이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1908731일의 <황성신문(3)>근일 동문 외 홍릉 부근지에 있는 바 청량관 연희는 관람인이 매우 적어서 경비를 불능 담당인고로 일전부터 폐지하였다고 보도했다. 아마도 이 두 번째 청량관은 무대를 갖춘 극장식 식당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업이 되지 않아 폐관했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 이후에는 요리점 청량관이 다시 영업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1381일의 <매일신보(3)>이 김모, 한모, 홍모씨 등 3명이 지난달 28(중복날) 다동조합 기생 부용과 광교조합 기생 산옥, 란홍 3명을 대동하고 청량관 요리점에서 질탕히놀다가 폭력 사고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연회식의 음식점이 운영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세 번째 <청량관>은 나름대로 고정고객을 만들었던 것 같다. 1916513일과 62일의 윤치호의 영문 일기에도 가족과 지인들과 함께 <청량관>에서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식사비가 160전이었음을 밝혀 놓았다. 인근 청량사의 식사비가 1인에 40-80전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청량관>은 두 배 이상 비싼 고급 음식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청량관>은 또다시 주인이 바뀌었다. 192144일의 <동아일보>는 새로운 <청량관> 광고가 실렸다. “고급 조선식/일식/양식요리를 제공하는 청량관 개시광고였다. 광고문 내용은 날은 따뜻하고 바람도 시원한 가절에 청량리 늘어진 버들에 새로운 봄향기를 맛보시며 버들피리의 자연의 음악을 벗삼아 일상의 노고를 유감없이 위로하실 곳은 청량관이오니 반드시 일차 왕림하심을빈다는 것이었다. 이 광고문 하단에는 대소 연회주문에 응함이라고 덧붙여져 있었고, 주인 이름을 유형호(柳瀅鎬)라고 밝혀져 있었다.

 

그런데 이 광고문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410일의 <동아일보>에 새로운 광고문을 게재하면서 이번에 본인이 당관을 인수 영업하옵는 바 제반 설비를 일신 개량하옵고 전화 기타 만반 기구를 구비하온 중 가절을 점하여 43일부터 개업했다는 점을 명시하고 당분간 정가에 2할인을 제공하겠다고 덧붙였다. 이 광고문에는 <청량관>의 주소가 청량리 199번지,” 전화번호도 2782번이라고 밝혀져 있었다.

 

192043일 네 번째로 신장개업한 <청량관>은 비로소 성업을 구가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까지도 영업을 계속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968724일의 <동아일보>725일의 <조선일보>가 공무원이 출입해서는 안 되는 387개의 유흥업소 목록을 발표하면서 동대문구의 <청량관>을 이 목록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주인과 소재지가 동일한 업소였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청량관>이 요리와 함께 술을 판매했지만 <청량사><영도사>처럼 풍기문란으로 경찰당국의 제재를 받은 적은 없었다. 다만 밥과 술을 먹고 돈을 내지 않는 무전취식이나 술에 취해 난동을 벌이는 폭행사건, 혹은 <청량관>과 관련된 교통사고 등이 더러 발생하곤 했다.

 

예컨대 1915815일의 <매일신보>는 무전취식 미수 사건을 보도했고, 1925617일에는 2명의 취한의 난동으로 손님과 기생이 폭행당한 사건을 전했다. 1929326<매일신보>에는 <청량관>으로 가던 자동차가 전복되어 동행하던 기생 2명이 전치 3주의 중상을 입었다는 기사도 실렸다.

 

하지만 <청량관>은 당시 경성의 주요 사회단체의 모임이 열리는 곳으로 명성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회장을 구비한 한//양식 고급 음식점이었으므로 상류층이나 인텔리층 고객이 많았고, 각종 사회단체들의 회의나 회식도 자주 열렸다. 윤치호가 그의 영문 일기에서 1934531일과 1935610일 조선체육회 총회를 주재하기 위해 <청량관>을 방문했던 사실을 기록한 것을 보면 <청량관>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밖에도 경성의 각종 경제단체나 이익단체, 종교단체나 주요 학교의 동창회 등이 <청량관>에서 모임을 가졌다. 1914617일자 <매일신보>경성남부동현 이발조합원 일행이 17일 낮 12시에 청량관에서 제3회 기념식을 가졌다고 보도했고, 1916513일에는 윤치호가 이상재 등과 함께 청량관에서 점심식사, 1920328일에는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우회가 청량관에서 총회를 열었다.

 

사장이 유형호로 바뀐 뒤로도 1920614일에는 경성종로조선인여관주인 간친회, 1921426일 조선인 정동총대연합회 초대회, 19211012일에는 야소교신학교 목사승진축하연, 19221029일에는 선린상업학교 동창회, 1925524일에는 법학전문학교 동창회, 1928630일에는 한성사범학교 동창회, 1930614일에는 재경성 니혼대학 교우회 등이 청량관에서 모임을 가졌다.

 

최승희의 결혼식 이후에도 193159일에 조선체육회 이사회, 62일에는 조선주류제조업자 59명의 주류가격협정 회의, 817일에는 와세다대학 동창회, 1933721일 용우회 친목총회, 193645일에는 조선 가구수선직공조합 총회 등이 계속되었다.

 

체육행사와 기타 환영회 등도 자주 열렸다. 192574일부터 3일간 <청량관> 앞에서 제1회 추천(그네타기) 대회가 열렸고, 1928723일 조선체육회 정기총회가 열린 것도 <청량관>이었다. 또한 이곳에서는 1940723일에는 함귀봉 귀국환영회가 열리기도 했다.

 

끝으로 <청량관>은 결혼식장으로도 이용되었다. 1923827일에는 전응열군과 김갑순양의 결혼식, 192669일에는 정창운군과 리정희양의 결혼식, 1933430일에는 중앙일보기자 최문우의 결혼식 등이 그것이었다. 결혼식을 다른 곳에서 한 후에 <청량관>에서는 피로연만 열기도 했다. 192579일의 박용대군과 김희순양의 결혼 피로연이 그런 경우였다.

 

따라서 최승희의 결혼식이 <청량관>에서 열렸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최승희와 안막은 이미 예술계와 문학계의 촉망받는 젊은이였고, 두 사람의 집안도 모두 양반 가문의 지체 있는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일부 평전이 <청량관>을 염두에 두고 자그마한 식당”(강이향, 1993:85; 정병호, 1995:65)이라고 서술했다면 이는 잘못이다. <청량관>은 경성 시내의 <명월관>이나 <장춘관>에 비견되는 대형 요리점이었기 때문이다.

 

또 최승희의 결혼식이 <청량원/청량관>이라는 식당에서 열렸다고 서술한 평전들 중 일부는 이 식당이 <청량사>의 부속 식당이었다고 서술한 것도 있다. (강준식, 2012:88).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달랐다. 적어도 1900년부터 1968년까지의 문헌으로 확인되는 <청량관>4차례나 소유주가 바뀌기는 했으나 사장의 이름이 남성인 사기업이었으므로, 비구니 도량인 <청량사>의 부속식당이었을 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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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사는 <매일신보>가 최승희의 결혼식장으로 보도한 사찰이다. 최승희 자신도 <조광(19409월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청량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회상했다.

 

청량사(淸凉寺)는 천장산(天藏山)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비구니 도량이다. 예부터 탑골 승방 보문사, 두뭇개 승방 미타사, 새절 승방 청룡사와 함께 한양 인근의 4대 비구니 도량으로 유명한 돌꽂이 승방도 이 곳이다. 지금은 돌꽂이 승방과 청량사가 같은 절이지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청량사는 홍릉 자리, 돌꽂이 승방은 임업시험장 자리에 따로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원래는 별개의 사찰이었다.

 

청량사의 창건연대와 창건자에 대한 자료가 없지만 <고려사절요> 3권 예종12(1117)의 기록에 그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려 예종(1105-1122년 재위) 이전에 창건된 역사 깊은 절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본인들에게 살해된 명성왕후의 묘(=홍릉)가 그곳에 조성되면서 청량사는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돌꽂이 승방과 합사된 것도 이즈음일 것이다.

 

일제강점기 경성 시민들의 대표적인 소풍 유원지는 성 안의 동물원과 성 바깥의 청량사가 있었다고 한다. 191257일의 <매일신보>에 실린 여행기 <경성일장10>에도 영도사(8)와 함께 청량사가 9감으로 선정되었고, 1915316일의 <매일신보>초춘의 일요일이라는 기사의 부제가 천지 가득한 봄의 동물원과 청량리였다.

 

요즘 지도에서 찾아본 <영도사>와 <청량사>, 그리고 <청량관>의 위치. (네이버 지도)

 

1915420일의 <매일신보>요새 놀러 가는 손이 제일 많기로는 동대문 밖 청량사라면서 그 이유는 한가하고 고요한 절의 취미는 도무지 구경할 수 없고 속되고 번요하기는 시내의 요리집보다 심하지만 교통도 편하고 연도의 녹음도 좋은 까닭에 찾는 사람이 많고, 찾는 사람이 많은 까닭에 음식도 다른 곳보다는 구비한 즉 절간에 밥을 사먹으러 가려면 경성 근처에서는 ... 역시 청량사나 탑골승방의 두 곳이 가장 낫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영도사와 마찬가지로 청량사도 풍기문란과 일탈범죄의 온상으로 지목되었고, 이에 1917424일의 <매일신보>요새 경성 내 방화수류객들이 청량사에 모여들어 주식(酒食)이 난만하여 더욱 갈수록 도량이 오손(汚損)되므로 5,6일 전부터 청량리 헌병 출장소로부터 밥팔고 술파는 것을 일절 엄금했다고 보도했고, 그로부터 약 2년 뒤인 1919422<매일신보>주식(酒食)판매 금지되어 청량사가 쓸쓸하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그러나 1920년대 들어 활기가 되살아났다. 192347일의 <조선일보>에 실린 <청량사에 하루>라는 기행기사는 청량리의 울창한 송림 사이를 지나서 청량사 문턱에 발을 멈추었더니 이 초막, 저 초막 할 것 없이 벌써 유산객들은 방방칸칸이 꽉 들어차서 만금을 주더라도 한 칸의 초막을 차지하여 보기가 어려울 만치 풍성풍성하게 보인다. 어떠한 대자대비한 여승에게 좌청우알을 하여 간신히 얼음장보다도 찬 마루 한 칸을 빌어가지고 일행 3인이 다리를 쉬이고 절밥을 맛보았다고 썼다. 다시 단속 이전의 성황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기사는 또 청량사 내방객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 절에 온 사람들은 법관도 있으며 관리도 있으며 변호사도 있으며 학교의 교사도 있으며 사상가도 있으며 과격자도 있으며 문학가도 있으며 미술가도 있으며 신문사의 기자도 있으며 회사의 사무원도 있으며 거만한 사회주의자도 있으며 심술 많은 공산주의자도 있으며 신사 같은 고등 부랑자도 있으며 아비어미 속 썩이는 보통 부랑자도 있으며 찬찬의복으로 몸을 감고 애교를 부리고 돌아다니는 기생과 또는 무명한 미인도 있고 서양머리를 틀어 얹고 굽 높은 양화를 맵시 있게 신은 여학생같은 비여학생도 있다.” 남녀노소와 신분고하를 막론한 사람들이 청량사를 찾았다는 말이다.

 

영도사와 마찬가지로 청량사에도 관광객이 끊이지 않았고, 조선체육회와 언론인단체 무명회를 비롯한 각종 단체의 총회와 회식, 그리고 각종 추도회와 출판기념회 등도 자주 개최되었다. 심지어 우국지사들의 회동이 청량사에서 열리고 독립군 밀사가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하기도 해 일본 관헌의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최승희의 결혼식이 청량사에서 열렸을 가능성도 아직은 배제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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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와 최승희의 회상에 따르면 그가 결혼식을 올렸던 곳은 불교 사찰 영도사와 청량사, 그리고 요리점 청량관으로 좁혀졌다. 이 세 장소는 모두 청량리에 있지만 같은 곳은 아니다.

 

영도사(永導寺)는 최승희가 19357월호 <삼천리>에서 자신이 결혼한 곳이라고 주장한 불교 사찰이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6년 이성계의 국사 무학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창건 당시의 이름이 영도사인데, 1799년 정조의 후궁 홍빈(洪嬪)의 묘인 명인원(明仁院)이 들어서면서 영도사는 동쪽으로 2마장쯤 이전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절터를 옮기면서 당시 주지였던 인파화상(仁波和尙)은 절 이름을 개운사(開運寺)라고 고쳤지만, 1930년대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 절을 원래 이름대로 영도사라고 불렀다. (돈암동 고려대학교 캠퍼스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 절은 지금은 <개운사>라고 불리고 있다. 오늘날의 주소는 서울 성북구 개운사길 73’ 혹은 안암동 5가 산4-11번지이다.)

 

1925617<동아일보>는 영도사를 소개하면서 어둠 속에 헤매는 삼계중생을 깨우치는 종소리가 한번 때-하고 울리매 울울창창한 솔밭사이로 그 소리가 멀리멀리 퍼지어 인근 산촌의 농사짓는 백성들은 물론 십리를 격한 문안 사람들까지 불덕을 사모하여 찾아오는 선남선녀가 문턱에 닿았그때야말로 극락세계였다고 했다.

 

그러나 1921년 영도사가 18천원의 거금을 들여 대대적으로 새 단장을 한 후 하루 관광객이 5-6백명에 이르면서 시속이 변했다. 영도사 승려들은 20여 호의 밥집을 만들어 밥과 술과 요리를 팔면서 방문객들은 음주가무와 음담패설로 절터를 어지럽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1925년 6월17일의 <동아일보>에 게재된 <영도사>의 전경 사진.

 

1922118일의 <매일신보><영도사 유기(遊記)>라는 기고문에서 원래 사원은 진인(眞人)의 지경()이요 신성의 영역()”이지만 근년에는 진인속객(塵人俗客)의 술 마시고 노래 부르는 장소로 변하였으며 청년탕아(靑年蕩兒)의 유희오락의 장소로 되었다면서 이것은 사원이 주사(酒肆)와 요정(料亭)으로 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청년탕아의 유희오락의 장소라고 한 것은 영도사가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전무길의 소설 <과도기(1932)>춘자가 영도사에 놀러 갔다가 영식이에게 몸을 허락한 것도 벌써 두 달이나 되었다는 대목이 나오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영도사의 풍기가 문란해지고 폭력이 빈발하고 심지어 범죄의 온상이 되자 일본 경찰까지 단속에 나섰다. 192767일의 <중외일보>최근 동대문 밖 각 승방 사찰에는 탕자와 음녀가 가위 진을 벌이고 주야로 떠나지 아니하여 신성타는 불경이 자못 노류장화의 음분한 지경을 이룬 까닭에 ... 소관 동대문서는 5일 새벽 4시를 기하여 ... 영도사를 급습 수색한 결과 ... 여덟 명의 기생을 발견하여 고발했다고 전했다.

 

이 같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영도사는 여전히 경성시민들이 즐겨 찾는 소풍지였고, 단체들이 총회를 열고 청년들이 결혼하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매일신보>192037일 하루에 6천여 명이 영도사를 찾아 본년 처음 가는 성황을 이루었다고 전했고, 19261017일에 문인 도향 나빈씨의 추도식, 1927425일에 언론인 권익단체 무명회의 제7회 총회, 같은 해 814일에 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의 동창회 등이 영도사에서 열렸다고 보도했다.

 

영도사는 당연히 결혼식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1939411일의 <동아일보>는 청년 서화연구가인 김태수군(26)과 신부 성순애양(22)의 결혼식이 9일 오전10시에 열리기로 되어 있었으나 신부가 나타나지 않아 파혼된 경위를 보도하기도 했다.

 

최승희가 실제로 영도사에서 결혼을 했는지는 그 자신의 일회 증언 외에는 다른 문헌 증거가 없다. 그러나 영도사가 경성 상층 시민들의 모임과 관혼상제 의례가 자주 열렸던 곳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안막-최승희가 이곳에서 결혼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신혼여행지가 함경남도 안변군의 석왕사였던 것을 보면 영도사가 결혼식장이었던 것으로 믿고 싶기도 한다. 두 사찰이 모두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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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면, 1931년의 언론보도와 이후 최승희의 회상에 따르면 그가 결혼했을 지도 모르는 예식장 후보는 3군데였다. 불교사찰인 <영도사><청량사>, 그리고 요리점 <청량관>이었다.

 

이제 그 각각의 기관이 소장한 기록을 조사하는 것이 순서이고 정도이겠으나, 나는 이 기관들이 기록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레 결론을 내렸다. 당시는 기록이 화를 부를 수 있었던 일제 강점기였으므로 사찰이든 식당기업이 기록을 충실히 남겼을 리 없었다. 설사 그런 기록이 있었다 해도 이후 90년의 일제강점기, 해방정국, 한국전쟁, 매카시즘과 무차별 근대화의 시기에 그런 기록이 남아있을 리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내가 최승희와 안막이라면어떤 곳을 결혼식 장소로 선택했을 지를 추론하기 위해 상황을 파악하고 감정이입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일본 여성지 <부인공론> 1935년 6월호에 실린 최승희와 안막의 결혼 사진. 아마도 <청량관>의 뒷산을 배경으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추론에 활용할 근거 상황을 파악할 때는 3가지 축에 주목해야 한다. ‘시간공간인간이 그것이다. , 당시 최승희와 안막이 어떤 시간틀(time frame) 속에서 어떤 활동 맥락(work context)에 처해 있었는지를 파악하면 그들의 공간적 위상(locational position)도 추론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셋은 항상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오빠 최승일과 그의 배재고보 동창 박영희의 주선으로 안막을 처음 만난 것이 언제였는지 서술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최승희와 안막이 각각 어떤 시간틀과 공간 위상 속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었는지를 파악하면 이들이 언제 처음 만났는지 추론해 볼 수 있다.

 

최승희는 193127일 경성공회당에서 <2회 신작발표 무용공연회>를 가졌고, 곧 지방순회공연에 나섰다. 부산(2/17-18), 춘천(2/21), 대구(2/24-25), 마산(2/26-27), 이리(3/1), 전주(3/2-3), 군산(3/4-5), 김제(3/6), 예산(3/8) 등의 남선 지방에서 공연을 가졌고, 경성으로 돌아와 약 3주간 휴식을 취한 다음, 평양(3/31-4/1), 정주(4/3), 신의주(4/5-6), 의주(4/9), 사리원(4/12), 개성(4/14) 등의 북선 지방에서도 공연했다. 그로부터 2주 후인 51일부터 3일까지는 단성사에서 <3회 신작발표 무용회>도 열었다. 그렇게 분주한 공연활동이 일단 마무리되고 나자마자 일주일 만에 최승희는 59일 안막과 결혼한 것이다.

 

한편 와세다 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안막은 방학을 이용해 경성에 돌아왔다고 했다. 일본의 학기제에 따르면 8월초부터 9월말까지 여름방학, 12월말부터 1월 중순까지 겨울방학, 그리고 2월 중순부터 3월말까지가 봄방학이다. 안막은 1931년의 봄방학을 맞아 경성에 돌아왔다가 방학이 끝나고도 도쿄의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경성에 머물러 있다가 최승희와 결혼한 것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시간과 공간이 겹치는 부분은 (1) 안막이 경성에 돌아온 210일경부터 최승희가 남선 순회공연을 떠난 217일 사이의 일주일과 (2) 최승희가 남선 순회공연에서 돌아와 북선 순회공연을 떠나기 전인 38일부터 331일 사이의 약 3주일의 기간이다. (3) 안막이 4월초에 시작되는 신학기에 복학하지 않았으므로 최승희가 북선 순회공연에서 돌아온 414일 이후도 시공간이 겹치기는 하지만, <별건곤> 4월호가 이미 최승희의 약혼설을 보도한 것을 보면 최승희와 안막이 처음 만난 것이 414일 이후였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안막과 최승희가 박영희의 서재에서 처음 만난 것은 (1) 210일부터 17일 사이이거나 (2) 38일부터 31일 사이였음에 틀림없다. 최승희의 자서전에 따르면 두 사람의 결혼이 첫 맞선 후 2-3회의 데이트 후에 비교적 빠르게 결정되었고 결혼 준비도 바쁘게 진행되었다고 했으므로, 두 사람이 맞선을 보고 두세 번의 데이트를 한 것은 (2)38-31일 사이였고, 결혼 준비는 최승희가 북선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3) 417일 이후였을 것이다.

 

맞선을 본지 2달 만에 결혼한 것은 그리 빠른 것이 아닐 수는 있다. 하지만 당시 최승희의 공연 스케줄을 고려하면 결혼 결정과 준비에 시간이 넉넉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안막의 결혼 전력 때문에 최승희가 부모의 허락을 얻는 데에 난항까지 겹쳤던 사정을 고려하면 실제로 결혼날짜와 식장을 결정하는 일에 시간이 더더욱 모자랐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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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장이 모호해 진 데에는 최승희 자신의 책임도 있었다. 그는 <나의 자서전(1936)>에서도 결혼식장을 언급하지 않았고, 큰오빠 최승일이 편집해 출판한 <최승희 자서전(1937)>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는 결혼연도를 ‘1932년 봄이라고 잘못 서술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결혼식 일시와 장소에 대해 이렇게까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 것이 의아할 정도이다.

 

최승희-안막의 결혼 뒤에도 결혼식장에 대한 기억에는 혼란이 계속되었다. 193431일의 <조선중앙일보>에 보도된 연재기사 예원에 피는 꽃들-최승희 편은 두 사람이 재재작년 5월 청량관에서 화촉의 성전을 거행했다고 서술했다. 이 기사는 최승희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므로 결혼식장이 <청량관>’이었다는 주장은 최승희의 기억일 것이다.

한편, 19357월호 <삼천리>에는 <신록의 신혼여행>이라는 큰 제목 아래 최승희의 신혼여행기가 실렸다. 이 기고문에서 최승희는 결혼식장이 <영도사>라고 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만 3년 전인 소화7(1932) 봄 한양의 옛 성에는 봄풀이 푸르렀고 청량리 영도사(永導寺)에는 녹음이 바야흐로 무르녹으려던 때 내 나이 바로 20의 봄을 맞이하게 되는 해에 서울의 교외의 어느 한 조그마한 절간에서 청춘으로서의 가장 거룩하고 행복스러운 향연인 결혼의 예식을 끝마쳤습니다.”

 

<영도사>는 당시 서울의 교외청량리에 위치한 것은 맞지만 조그마한 절간은 아니었다. 1396년 조선 개국과 함께 국사 무학대사가 창건한 영도사는 역사가 오래고 규모가 상당했다. 자리를 이전한 1799년 이래 1930년대까지도 영도사는 한양사람들의 최애 유람지의 하나였다.

 

다른 한편, 19409월호 <조광>에는 최승희의 <무용 15년기>가 실렸는데, 그중에 그 이듬해 우리는 <청량사>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본인에 의해 또 다른 사찰이 결혼식장으로 거론된 것이다. <청량사>도 역시 청량리 홍릉 인근의 불교 사찰이며 많은 사람들의 예불과 소풍의 목적지였다.

 

최승희의 회상에 따르더라도 결혼식장은 3군데나 거론되었다. <청량관><영도사><청량사>는 모두 청량리에 소재했지만 위치는 모두 달랐다. 어디가 진짜 결혼식장이었을까?

 

그런데 진짜 결혼식장을 찾기 전에 먼저 바로잡을 오류가 있다. 많은 문헌이 최승희의 결혼식장으로 <청량원>을 들었는데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당시 문헌에 <청량원>이라는 장소는 나오지 않는다. 경성의 매체들이 자주 언급한 장소로 <청량관>이 있을 뿐이다.

 

단행본으로 출판된 최초의 평전인 다카시마 유사부로의 <최승희(1959)>에는 식과 피로연도 간단하게 청량원이라는 식당에서했다고 서술되었다. <청량관><청량원>으로 바뀐 것인데, 여기에 주의할 부분이 있다. 다카시마 유사부로는 최승희의 결혼을 서술하면서 유아사 가츠에(湯浅克衛, 1910-1982)<무희기(舞姫記, 1947)>를 인용한 것이다.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으로 조선어에도 능했고, 또 안막-최승희 부부와 친구사이였던 유아사 가츠에는 훗날 최승희의 전기영화 <반도의 무희(1936)>의 대본을 썼다. 이 대본은 <주간아사히(週刊アサヒ)>에 연재한 <노도의 외침(怒濤, 1935)>을 훗날 단행본으로 출판하면서 제목을 <무희기: 최승희의 반생(1947)>이라고 바꾼 것이었다.

 

<반도의 무희>처럼 <무희기>도 픽션이었으므로 주인공의 이름도 안막-최승희가 아니라 나계(羅桂)-백성희(聖姫)로 바뀌었다. 저자는 최승희와 안막의 반생을 서술하면서도 소설 형식을 택하는 바람에 가명을 써야했던 것인데, <청량관><청량원>으로 바뀐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카시마 유사부로가 논픽션인 평전을 쓰면서 픽션인 <무희기>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이후의 평전들은 줄줄이 다카시마 유사부로의 예를 따랐다. 강이향(1993:85), 정병호(1995:64-65), 김찬정(2002:86), 강수웅(2004:76), 강준식(2012:88-89) , 한국에서 출판된 모든 평전이 최승희의 결혼식장을 청량원이라고 서술했다. 북한에서 출판된 서만일(1957:73-74)과 배윤희(2011)의 평전에는 결혼식이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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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무용가 최승희의 결혼 소식은 경성 장안을 강타했다. 예술가와 연예인의 구별이 모호하던 시절, 근대 예술무용의 개척자이면서도 아름다운 용모와 시원시원한 몸매로 만인의 애인 대접을 받던 최승희가 아직 학교도 마치지 않은 백면서생안막과의 결혼을 발표하자 인텔리 계층은 물론, 화류계의 단골 한량들과 일반 대중까지도 충격을 받았다.

 

최승희의 결혼 소식은 속속 언론에 보도되었다. 최초의 보도는 뜻밖에도 일간지가 아니라 종합월간지 <별건곤>이었다. 19314월호에 최승희양이 약혼했다...고 한다는 추측기사를 내보냈다. 호기심을 잔뜩 유발하는 이 기사에는 최승희의 짧은 인터뷰도 삽입되었는데, 최승희는 언젠가 결혼은 하겠지만 정해진 것은 없고, 약혼했다는 풍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그런데도 기자는 이 대답을 묵살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최승희양이 약혼을 하였다는 것은 전연 사실도 아니요, 전연 거짓말도 아니다. 그런데 당사자는 앞으로 결혼할 것을 부인은 아니 한다. 그러니까 아직까지 약혼까지는 아니 하였더라도 인제 오래지 않아 약혼을 할 전야(前夜)에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 추측이 빗나간다면 최양을 비롯하여 만천하의 최양 패트론에게 백배 사죄 하겠다.”

 

기자에게는 다행하게도 이 추측보도는 맞아 들어갔다. <별건곤>의 추측기사가 나간 지 한 달이 지난 59일 오전11시 흰색 투피스 양장 차림의 최승희와 밝은 색 세비로를 입은 안막은 서정화 선생의 주례로 결혼식을 마치고, 청량리 역에서 경원선 기차를 타고 함경남도 석봉산의 고찰 석왕사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최승희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4월호 잡지에 내려면 취재는 3월 중에 이뤄졌을 것인데, 그때는 최승희와 안막의 결혼 결정이 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언론의 최승희 결혼식 보도는 혼란스러웠다. <별건곤>5월호에서 최승희 양이 정말 결혼을 한다고 보도했지만 결혼일시와 결혼식장을 밝히지 못했다. 55일의 <조선일보>결혼식은 9일 오전11라고 전했지만 장소는 <공회당> 사정으로 아직 미정이라고 했다. 아마도 경성 공회당을 결혼식장으로 섭외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성사되지 않았고, 결혼식이 4일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식장은 발표되지 않았다.

 

결혼식 3일 전인 56일에야 <매일신보>그들의 결혼은 오는 9일 낮에 시외 <청량사>에서라고 전했다. <동아일보>57일 최승희 결혼 소식을 단신으로 전하면서도 결혼식장은 언급하지 않았다. 마침내 <경성일보>가 결혼식 당일(5/9)에야 최승희양은 9일 경성부 바깥 청량리의 <청량관>에서 서정희씨의 주례 아래 안막군과 결혼식을 거행한다고 보도했다.

 

<청량관>은 동대문 밖 청량리에 연회장을 갖춘 요리집이었다. 그 지역은 지금의 홍릉 근처로 경치 좋은 유원지였다. 젊은 커플들은 <청량관>에서 결혼식을 했고, 학교들은 운동회를 열었고, 동문회나 사회단체들은 총회를 개최했다. 윤치호도 가족이나 요인들과 함께 식사하러 이곳에 올 정도였다. 1920년대면 청량리까지 가는 전차도 개통되었기 때문에 교통도 편했다.

 

결혼 당일까지의 보도를 종합하면 안막과 최승희의 결혼은 급하게 결정되었거나 결혼 소식을 공표하지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결혼식장 섭외가 늦었거나 발표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최승희는 소공동의 경성공회당을 예식장으로 확보하려 했던 것 같으나 실패했고, 결국 청량리의 사찰 청량사(매일신보) 혹은 요리점 청량관(경성일보) 중에서 한 곳을 결혼식장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두 신문 보도를 상충되지 않게 종합한다면, <청량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청량관>에서 피로연을 열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최승희-안막 부부의 결혼식 장소를 아직 단정할 수 없다. 이후의 문헌에서 당시 언론 보도와 상충되는 기록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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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 예술가의 눈에 띤 최승희양." 1926326일자 <매일신보> 2면에 실린 기사 제목입니다. 이 기사가 이른바 "최승희 현상"의 출발점이라고 알려져 왔습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20년 동안 '최승희'라는 이름은 조선과 일본 전역에 퍼졌습니다. 중국과 타이완과 오키나와는 물론 남북 미주와 유럽 언론의 주목도 받았습니다해방 후 남한 매체에서는 그의 이름이 지워졌지만 북한에서는 더 대대적으로 퍼졌을 것입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소련과 동유럽 각국에서도 그 이름에 열광했습니다.

 

사진1: 최승희의 무용유학을 보도한 1926년 3월26일의 <매일신보> 기사. 그동안 이 기사가 최승희를 보도한 최초의 신문기사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조정희PD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이보다 하루 전인 3월25일, 일본어신문 <경성일보>가 최승희의 무용유학을 단독 보도한 것이 확인되었다.


대부분의 평전들은
<매일신보>의 이 기사가 최승희의 이름이 신문에 보도된 첫 기사라고 서술해왔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매일신보>보다 하루 전인 325일에 최승희를 보도한 신문이 있었습니다. <매일신보>의 자매지이자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입니다. 일본어로 발행되었던 이 신문의 3면에 최승희 기사가 사진과 함께 보도되었습니다.

 

<경성일보>의 기사는 최승희(16)경성부내 체부동 137번지 최준현씨의 영양이며 금년 3월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일뿐 아니라 학교시절부터 성악을 잘해서 학우들부터 <카나리아 누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고 서술했습니다.

 

또 이 기사는 최승희가 음악학교를 꿈꾸었으나 입학허가를 받지 못하자 여자사범학교를 지망하여 4월부터 다니게 되었지만, “마침 이시이 남매가 경성에 온다는 말을 듣고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 오늘 아침10시에 일행과 함께 도쿄로 향하게 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경성일보>는 또 승희씨는 두 오빠를 가진 사랑스런 외동딸로 ...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숙명여학교에서도 최연소 졸업생으로 부러움을 받아왔으며, 이제 조선이 낳은 한 사람의 무용가로서 밝은 희망을 가슴에 품고 떠나게 되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사진2: 최승희의 일본 무용유학을 최초로 보도한 1926년 3월25일의 <경성일보>. 최승희의 가족관계와 학창생활에 대한 몇가지 '오보'가 개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 일행을 따라 무용유학을 가게된 동기와 경위가 비교적 상세히 보도되어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기사에는 몇 가지 오보가 끼어 있습니다. 첫째, 최승희는 숙명여고보를 수석으로 졸업한 것은 아닙니다. 78명의 졸업생 중에서 7등이었고, 졸업반 성적이 90점 이상으로 우등상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숙명여고보 17회의 수석 졸업자는 이미 작가로 활약하고 있던 박화성입니다.

 

둘째 오보는 가족사항입니다. 최승희가 외동딸이라고 했지만 그에게는 최영희(崔英喜)라는 이름의 언니가 있었습니다. 최영희도 진명여고보 출신의 재원이었고, 졸업후 일찍 결혼했지만, 최승희가 숙명여고보를 졸업할 무렵에는 이혼하고 친정에 돌아와서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셋째는 그의 진로에 대한 오보입니다. 기사는 승희씨는 음악학교를 꿈꾸고 있었으나 입학허가를 받지 못하자 여자사범학교를 지망하여 4월부터 다니게 되었다고 서술했지만, 최승희는 음악학교에 응시한 적은 없습니다. <경성사범학교>에도 필기시험에 합격했으나 면접에서 낙방했으므로 “4월부터 다니게 되었다고 한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이런 몇 가지 오보에도 불구하고 <경성일보>의 기사는 최승희의 부친과 큰오빠의 이름을 확인해 주었고, 그의 무용 유학을 도와준 데라다(寺田)와 기무라(木村)씨 등의 일본인들의 이름도 밝혀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최승희가 무용유학을 떠나게 된 과정과 그 정확한 날짜와 시간까지 알려주고 있으니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경성일보>가 최승희의 무용유학을 가장 먼저 보도할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일까요? 첫째, 이시이 바쿠의 경성공연 후원사가 <경성일보>였습니다. 둘째, 최승희-최승일 남매가 이시이 바쿠를 만날 수 있도록 소개장을 써준 사람이 <경성일보>의 학예부장 데라다 도시오(寺田壽夫)였습니다. 그는 이시이 바쿠를 대신해서 최승희를 면접까지 했었기 때문에 최승희의 가정과 학력에 대해서는 물론, 최승희의 무용유학이 결정된 것도 가장 먼저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매일신보><경성일보>325일자 단독기사를 보고 몇 가지 오보를 바로잡은 후, 다음날인 326, 조선어 신문으로는 처음으로 최승희의 무용유학을 보도할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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