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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喜舞踊春川2回公演された最初公演19312春川公会堂われ19387には春川邑愛館崔承喜舞踊映画大金剛山上演された

 

一方19422には崔承喜師匠である石井漠春川公演われた1942石井漠公演日中戦争(1937-1945)太平洋戦争(1941-1945)われたもので日帝国民総動員令官邊団体である朝鮮軍事普及会主催われた公演であったそのためこの公演芸術公演というよりは宣伝公演かったとわれる

 

石井漠公演関連記録くなく公演場所がどこだったのかもらかになっていないがおそらく春川公会堂であったと推測される当時春川には劇場公会堂邑愛館しかなくそのうち公会堂きく公権力動員しやすかったからだ

 

今日の春川の全景

 

1938<大金剛山>上映崔承喜直接春川れて公演したわけではなかったがこの映画には崔承喜舞踊作品8作品収録されていたこれらの作品崔承喜世界巡業公演披露した主要朝鮮舞踊のレパートリーであったため春川市民崔承喜朝鮮舞踊のハイライトを映像してでも鑑賞することができた

 

1931公演崔承喜直接春川れて出演した芸術公演だったこののレパートリーは崔承喜初期作品現代舞踊であったしたがって春川市民崔承喜現代舞踊(1931)朝鮮舞踊(1938)なくとも一度鑑賞できたことになる

 

春川京城から近距離位置し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崔承喜春川公演しかった当時春川江原道道庁所在地であった釜山大邱など慶尚南北道道庁所在地での公演67平壌開城新義州鎭南浦などの北鮮地域主要都市での公演45えた

崔承喜は1931年2月21日、春川公会堂で舞踊公演を行った。

 

しかし春川公演2にとどまりそのうち1映画上映だったので実質的芸術公演1ぎなかった春川崔承喜舞踊公演をはじめとする主要公演芸術イベントから疎外されたのにはいくつかの理由があった

 

まず日帝強占期初期には春川都市化れていた春川人口1930めて1万人えた時期京城人口40万人釜山(14.6万人)平壌(14.1万人)大邱(9.3万人)がおよそ10万人以上人口えていたのに春川人口はその101ぎなかった江原道でも1930春川人口(1.0万人)江陵鉄原(1.5万人)よりもなかった人口十分でない都市では芸術公演定着するのはしい観客確保しいからだ

 

しかし春川場合人口だけが問題だったわけではない日本統治時代後期つまり1930年代1940年代には春川都市化急速んだ1935春川人口(1.6万人)江陵(1.7万人)鉄原(1.5万人)匹敵1940には春川(3万人)江陵(2.1万人)鉄原(2.3万人)三陟(2.1万人)人口上回江原道最大都市となった

 

それにもかかわらず春川公演芸術はあまり発達しなかった崔承喜舞踊公演1931一度だけわれただけだ崔承喜舞踊公演だけでなく公演芸術同様だったようだ

 

崔承喜の春川公演は、彼女が安漠と結婚する2ヵ月前に断行した公演で、この頃、2人はすでにデート中だった。

 

なぜそうしたのか? 公演上演したり映画上映する劇場がなかったからだ1929まで春川には劇場がなかった公共行事芸術公演野外仮設舞台われていた

 

春川最初劇場192912落成した春川公会堂でありすぐに春川劇場(1930)設立されましたしかし日本統治わる1945までこの2つの劇場がすべてでした2つの劇場とも500規模劇団舞踊団公演収支わせるのはしかったでしょう

 

春川がこのように人口成長停滞文化施設不足していたのは日本統治初期から春川近代産業文化恩恵から疎外されたからである日本統治期半ばである1930まで春川には近代的交通さえも十分発達していなかった(jc2021/8/18草稿;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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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무용은 춘천에서 두 번 공연되었다. 첫 공연은 19312월 춘천공회당에서였고, 19387월 춘천 읍애관(邑愛館)에서는 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가 상연되었다.

 

한편 19422월에는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의 춘천 공연도 열린 바 있었다. 1942년의 이시이 바쿠 공연은 중일전쟁(1937-1945)과 태평양 전쟁(1941-1945) 중에 열렸던 것으로, 일제의 국민총동원령 아래 관변단체인 조선군사보급회 주최로 개최된 공연이었다. 따라서 이 공연은 예술 공연이라기보다는 선전 공연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시이 바쿠 공연은 관련 기록이 전혀 없어서 공연 장소가 어디였는지도 밝혀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춘천공회당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춘천에는 극장이 공회당과 읍애관 뿐이었고, 그중 공회당이 조금 더 크고, 공권력이 동원하기 수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춘천 전경

 

1938년의 <대금강산보> 상영은 최승희가 직접 춘천을 방문해 공연한 것이 아니었지만, 이 영화에는 최승희의 무용작품 8개가 수록되어 있었다. 이 작품들은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에서 선보인 주요한 조선무용 레퍼토리였기 때문에, 춘천시민들도 최승희의 조선무용 하이라이트를 영상을 통해서나마 감상할 수 있었다.

 

1931년의 공연은 최승희가 직접 춘천을 방문해 출연한 예술 공연이었다. 이때의 레퍼토리는 최승희의 초기작품으로 주로 현대무용이었다. 따라서 춘천 시민들은 최승희의 현대무용(1931)과 조선무용(1938)을 적어도 한 번씩은 감상할 수 있었던 셈이다.

 

춘천이 경성에서 근거리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승희의 춘천 공연은 드물었다. 당시에도 춘천은 강원도의 도청소재지였다. 부산과 대구 등 경상남북도의 도청소재지 공연은 6-7회였고, 평양과 개성, 신의주와 진남포 등의 북선 지역 주요도시 공연도 4-5회를 헤아렸다.

 

그러나 춘천 공연은 2회에 그쳤고, 그중 1회는 영화 상영이었으므로 실질적인 예술 공연은 1회에 불과했다. 춘천이 최승희 무용공연을 비롯한 주요 공연예술 행사에서 소외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최승희는 1931년 2월21일 춘천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가졌다.

 

우선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춘천의 도시화가 더뎠다. 춘천 인구는 1930년에야 1만 명을 넘어섰다. 같은 시기 경성의 인구가 우선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춘천의 도시화가 더뎠다. 춘천 인구는 1930년에야 1만 명을 넘어섰다. 같은 시기 경성의 인구가 약 40만 명이었고, 부산(14.6), 평양(14.1), 대구(9.3)가 대략 1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졌던 것에 비해서 춘천의 인구는 그 10분의1에 불과했다. 강원도에서도 1930년의 춘천 인구(1.0)는 강릉과 철원(1.5)보다 적었다. 인구가 충분하지 않은 도시에서는 예술 공연이 자리 잡기 어렵다. 관객 확보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춘천의 경우에는 인구만 문제였던 것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후기,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춘천의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1935년의 춘천 인구(1.6)는 강릉(1.7) 및 철원(1.5)과 비슷해졌고, 1940년에는 춘천(3)이 강릉(2.1) 철원(2.3) 삼척(2.1)의 인구를 능가해 강원도 최대 도시가 되었다.

 

그런데도 춘천의 공연예술은 별로 발달하지 않았다. 최승희 무용공연도 1942년에 관변행사로 한번 이뤄졌을 뿐이다. 최승희 무용공연뿐 아니라 다른 공연예술도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의 춘천공연은 그녀가 안막과 결혼하기 2달쯤 전에 단행한 공연으로 이때쯤 두 사람은 이미 데이트 중이었다.

 

왜 그랬을까? 공연을 올리거나 영화를 상영할 극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1929년까지 춘천에는 극장이 없었다. 공공행사나 예술 공연들은 야외 가설무대에서 이뤄지곤 했다.

 

춘천 최초의 극장은 192912월에 낙성된 <춘천공회당>이었고, 곧이어 <춘천극장(1930)>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이 끝난 1945년까지 이 두 극장이 전부였다. 그나마 두 극장 모두 약 5백석 규모여서 극단이나 무용단들이 공연을 통해 수지를 맞추기 어려웠을 것이다.

 

춘천이 이렇게 인구 성장이 정체되고, 문화시설이 결여되었던 것은 일제강점 초기부터 춘천이 근대산업과 근대문화의 혜택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중반인 1930년까지도 춘천에는 근대적 교통조차 제대로 발달되지 못했다. (jc, 2021/08/17 초고, 2024/2/1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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