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에 발간된 대구 소개 책자 <대구안내(1934)>에 따르면 당시 대구에는 22개의 신문과 잡지가 발행되고 있었다, 1939년에는 그 수가 25개로 늘어났다. 인구 10만 명(1935)의 대구에 이렇게 많은 언론사들이 활동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대구 인구 중 일본인의 비율이 30%이상이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일본인들은 언론사를 설립할 재력이 있었고, 신문과 잡지를 읽을 여유가 있었고, 그 필요성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는 대구에 극장이 많았던 이유와도 통한다. 극장을 세울 재력 있는 일본인이 많았고, 연극과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여유 있는 인구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신문들 중에는 경성과 일본의 주요 신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신문 중에는 <오사카아사히신문><오사카마이니치신문>이 지국을 통해 취재활동과 신문보급 활동을 벌였다. 또 경성의 <조선신문><경성일보> 등 일본어 신문뿐 아니라 <조선일보><동아일보>, <시사신문><시대일보><중외일보> 등의 조선어 발행의 민족지들도 지국을 설치했다.

 

 

대구에 본사를 둔 매체도 있었다. 대구에서 최초로 등장한 근대 신문은 대구일본인회가 19016월에 창간한 주간지 <달성주보(達成週報)>였다. <달성주보>는 대구부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는 신문으로 일본어판으로 발행되었으며, 등사판으로 제작되던 <달성주보>는 제4호까지 발간되다가 폐간되었다.

 

이후 19061월 대구 일본거류민단 유지 30명이 민영신문인 <대구일보>를 창간했지만, 2호 신문에 반신불수의 한일협약이라는 사설을 실었다가 당국에 의해 곧바로 폐간됐다.

 

19063월 일본인과 지역의 조선인 유지들이 합력해 격일간 신문 <대구실업신보>를 창간했했으나 경영난으로 다음해(1907) 1월 일본인에게 경영권이 넘어갔고, 이때 발간 주기를 일간으로 바꾸고 신문 이름도 <대구신보>를 거쳐 <대구일일신문>으로 바뀌었다. <대구신보>는 조선어판과 일본어판이 함께 발행되었는데 일본인 독자들의 항의로 3개월만에 이중언어 발행을 포기했고, <대구일일신문>으로 제목을 바꾼 후에는 일본어판만 발행했다.

 

 

<대구일일신문>은 총독부 시책의 선전에 치중했을 뿐 아니라 조선인을 멸시하는 보도를 일삼아 민족감정을 격발시켰다. 이에 대항하여 일본거류민단이 19089<대구시보>를 창간했다가, 당시 경상관찰사 박중양의 중재로 <대구일일신문><대구시보>가 합병해 같은 해(1908) 10월 제호를 <대구신문>으로 바꿨고 1912년에는 <조선민보>로 개칭됐다.

 

한편 192410월에 경제신문인 <대구상보>가 창간되어 192610<남선경제일보>로 개칭되었고, 192810월에는 <대구일보>가 창간됐다. 이후 <대구일일신문><조선민보><대구일보>가 대구에 본사를 둔 지역신문으로 발행되다가 1941년 전쟁을 확대해온 일제가 물자부족을 이유로 강요한 일도일지(一道一紙)의 언론정책에 따라 <조선민보><대구일보><대구일일신문>으로 통합되어 해방을 맞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시이무용단이 첫 대구공연을 가졌던 19263월 현재 대구의 지역 언론으로는 <대구일일신문><조선민보><대구상보>가 발행되고 있었다. 이 세 신문은 본격 지역신문이었으므로 이시이무용단의 대구 공연을 더욱 자세히 취재해 상세하게 보도했을 것으로 짐작되었고, 필자가 계획한 대구 취재도 이 세 신문을 열람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에 더해 대구에서 지방판을 덧붙여 발행되었던 <경성일보><조선신문>, <매일신보><부산일보>, 그리고 <동아>, <조선>, <중외>, <시사신문> 등의 민족지도 조사할 계획이었다.

 

1926년 당시 대구에서 발행되었던 11개 신문을 조사할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해 2021720-21일 대구를 방문했지만,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신문을 열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구의 고신문들을 소장한 <대구근대역사관>의 학예사에게 문의한 결과 필자가 언급한 신문들이 일부 소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전자 아카이브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데다가, 종이 신문들은 손상될 것이 염려되어 일반열람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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