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89일 손기정과 남승룡이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에서 승리했다. 일본에게는 금메달과 동메달을 추가해 메달집계에서 종합 8위에 오르게 한 유쾌한 사건이었고, 일본에 합병되었던 조선에게는 민족의 기개를 과시하고 자주 독립의 희망을 다시 일깨워준 쾌거였다.

 

손기정의 우승 소식을 최승희는 어떻게 맞았을까? 한 평전은 810일 새벽 129분경 최승희가 남편 안막과 함께 도쿄 에이후쿠초(永樂町) 자택에서 라디오 중계를 통해 손기정이 1, 남승룡이 3이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다른 평전은 라디오를 들으며 부엌일을 하던 최승희가 손기정과 남승룡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하던 일을 멈추고 냄비 뚜껑을 들고 꽹과리를 치듯 두드리며 춤을 추었다고 했다. 며칠 후 최승희는 도쿄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일본이 이겨서 기쁘다. 그러나 조선 사람이 이겨주어서 더욱 즐겁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1936년 8월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1위와 3위에 입상한 손기정(오른쪽)과 남승룡(왼쪽)

 

안막-최승희 부부가 그날 밤에 실시간 중계방송을 들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을까? 최승희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조선 사람이 이겨주어서 더욱 즐겁다라는, 당시로서는 위험할 수도 있었을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던 것은 사실이었을까?

 

이 의문들을 풀어주는 문헌이 발견되었다. 일본 여성잡지 <후진구라부(婦人俱樂部)> 193610월호였다. 이 잡지에는 만화가 와다 쿠니보(和田邦坊, 1899-1992)가 최승희를 인터뷰해 작성한 기사가 실렸다. 일본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릴 만큼 잘 알려진 졸부 풍자만화의 작가 와다 쿠니보는 길고 강한 최승희의 다리를 가리키며 이런 다리라면 달리기도 빠르겠네요.”하고 물었고 최승희는 빠르지요, 손기정 선수하고 라면 어떨까요?”하며 뽐냈다고 했다.

 

이어서 와다 쿠니보는 손기정 선수는 최승희의 절친임을 밝히고 손 선수의 쾌거 덕분에 그녀의 기세가 등등하다면서 최승희의 말을 이렇게 전했다. “내지(=일본) 사람이 승리한 것보다 저는 몇 배나 기뻐요. 조선에서 태어난 사람이 전일본을 위해서 그런 일을 하다니, 이렇게 유쾌한 일은 없습니다.”

 

1936년 10월호의 <후진구라부(婦人俱樂部)>에는 최승희를 인터뷰한 와다쿠니보(和田邦坊)의 기사가 실려있다.

 

최승희의 <부인구락부> 발언은 평전이 인용한 <도쿄라디오> 발언과는 어감이 많이 다르다. “조선인이 아니라 조선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고, “일본이나 일본제국이 아니라 ()일본을 위해서라는 말도 들어가 있었다.

 

, 최승희는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면서도 논란을 피할 준비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비슷한 내용의 발언이 라디오 방송과 잡지 인터뷰에 반복적으로 사용된 것을 보면 사전에 이 질문을 예상하고 답변을 준비해 두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몇 번이고 예행연습을 했을 지도 모른다.

 

<후진구라부> 기사에는 최승희가 새벽 1시 반에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는 주장에 의문을 가질만한 내용도 나와 있다. 다음은 최승희와 와다 쿠니보의 대화이다.

 

나는 그날 아침, 손 선수가 이겼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다 말고 나도 모르게 아기를 붙잡아 으스러뜨려 버렸지요.”/ "! 아기를요?"/ "닭의 아기."/ "닭이요?"/ "그래요, 계란을 으스러뜨렸어요."/ , 안심했다. 아기를 으스러뜨렸다니, 나는 또 그녀의 외동딸을 으스러뜨린 줄 알았다. 과연, 계란이 닭의 아기인 것임에 틀림없다.”

 

<세기의미인무용가최승희(1994)>에 실린 손기정과 최승희의 사진

 

와다 쿠니보는 해학을 시도한 것이지만, 그와는 별도로 이 기사는 최승희가 손기정 선수의 승리 소식을 들은 것이 그날 아침이었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아침식사를 준비하면서 뉴스를 듣고 있었던 것이리라. 당시에는 중계기술도 부족한데다, 12시 이후에는 방송이 없었기 때문에 지구 반대편의 마라톤 중계를 실시간으로 들을 수 없었다.

 

와다 쿠니보가 손기정은 최승희의 절친이라고 선언했던 것도 의외였다. 두 사람이 실력 있고 인기 있는 조선인이라는 공통점만으로 절친이라고 선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도쿄 시절 실제로 교류를 가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사진집 <세기의미인무용가 최승희>에는 손기정과 최승희가 나란히 찍은 사진이 실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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