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가 순회공연의 일정과 동선을 수정하는 희생적 양보를 감수하면서 춘천공연을 단행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일반적으로 그런 일은 영향력으로 일어난다. 공연 수익을 충분히 보전 받았다면 기꺼이 그런 희생을 감수했을 것이다. 또 초빙에 응하지 않았을 경우 모종의 불이익을 겪게 되면 양보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강원도민일보>의 함광복 기자가 영향력 가설을 제시한 바 있었다. 최승희의 평전 8권 중에서 최승희의 춘천공연에 대해 한 문단 이상 서술한 책은 없지만, 함광복 기자는 최승희와 강원도의 인연에 대해 원고지로 130매를 썼다. 20069월경 한 인터넷 사이트에 포스팅한 우린 왜 최승희의 홍천을 찾아야 하는가라는 글이다.

 

 

이 글의 목적은 최승희의 출생지가 강원도 홍천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간단한 명제를 입증하려고 130매를 써야했다는 것 자체가 그 입증이 쉽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최승희의 출생지는 경성(=서울)이다. 이는 호적과 학적부와 여권 기록, 토지대장과 지적원도의 기록, 언론 인터뷰, 그리고 유럽과 미주의 여러 나라들에서 작성한 입국서류들이 증명하고 있다.

 

반면 함광복 기자가 이같은 문헌 기록을 반박하기 위해 제시한 자료는, 다른 방법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신한민보>의 기사 1개와 최승희 출생 후 7-80년이 지나서 발행된 잡지 기사, 그리고 3세대가 지난 후에 나온 먼 친척이나 마을 사람의 증언들이었다. 따라서 자료의 신빙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평전 저자들은 홍천 출생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1938년 2월3일의 <신한민보>의 최승희 미주공연 관련 기사. 여기에 최승희가 "그는 강원도 홍천군의 최준현씨의 영애"라는 서술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최준현씨가 홍천 출신임을 가리키는 것이지 최승희의 출생지가 홍천임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함광복 기자의 공헌도 있다. 그가 홍천 출생설을 입증하려고 제시한 부수적 서술들 중에는 최승희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주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춘천공연과 춘천 이영일>이라는 소제목 아래 함광복 기자는 최승희의 춘천 공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가 전국 순회의 첫 공연지를 춘천으로 택한 이유가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대장정의 첫 걸음을 춘천에서 시작했다면 최승희는 새로운 무용예술운동의 시발지를 고향 땅으로 잡고 싶었던 것일까.

 

지금도 그렇지만 엔터테인먼트와 강원도는 밀접하지 않다. 모든 순회공연에서 강원도는 마지못해 끼워주는 것처럼 늘 뒷전이었다. 더구나 당시 춘천은 무용공연을 소화할 만한 여건도 변변히 되어있지 않았다. 8년 전 개설된 경춘 도로에는 8인승 승합차 10대가 서울과 춘천을 오가고 있었고, 경춘선은 아직 개통되기 전이다.

 

최승희가 무용예술운동의 시발지를 춘천으로 택했다면, 춘천에는 무언가 강력한 흡인력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매일신보>는 춘천 공연에서 '수백 명 군중들이 공연장 문을 밀치고 난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현 문화극장 자리 뒤편에 있었던 춘천공회당은 150평 남짓한 크기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춘천 사람들이 강원도 출신 무용가였기 때문에 열광했던 것은 아닌지를 짐작하게 하고 있다.”

 

 

함광복 기자는 최승희가 전국 순회공연의 이라는 대장정의 첫걸음을 춘천에서 시작한 것은 강원도가 최승희의 고향이라는 강력한 흡인력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 춘천은 전국 순회의 첫 공연지가 아니었고, 홍천이 최승희의 출생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원적을 강원도 홍천이라고 한다면 옳을 수 있다. 최승희의 아버지 최준현씨의 고향이 홍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준현씨는 1902년에서 1905년 사이에 경성으로 이주했고, 호적상의 본적까지 경성으로 변경했다. 1902년에 태어난 그의 큰아들 최승일은 홍천 태생이었지만, 1912년생인 최승희는 경성 이주 후 수창동 198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광복 기자의 서술은 두 가지 점에서 춘천공연의 궁금증을 풀기 위한 열쇠를 제공했다. 첫째는, 1931년 당시 춘천은 무용공연을 위한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해 주었고, 둘째, 거기에는 뭔가 중요한 다른 이유, 예컨대 춘천시민들의 강력한 권유나 초대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 것이다. (jc, 2021/8/24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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