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콘도 도미오 선생을 만난 것은 그분의 생애 마지막 2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가 콘도 선생을 속속들이 잘 안다고 할 수는 없겠다. 내가 독서와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은 그가 정홍영 선생의 단짝 연구자이셨고,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세우시는데 앞장서셨다는 것이다.

 

정홍영 선생의 저서 <가극의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는 정홍영 선생의 이름으로 출판되었지만, 그 내용의 많은 부분은 콘도 선생과의 공동 연구의 결과일 것이다. 실제로 정홍영 선생은 콘도 선생과 함께 조사하고 답사했던 사실을 자주 언급했다.

 

두 사람은 역사학을 전공하거나 직업으로 삼지 않았지만 그들의 조사와 연구의 실증적 밀도는 매우 높은 편이어서 전문가들도 그대로 인용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는 아마도 두 사람이 각각 리츠메이칸과 신다이라는 명문대학에서 연마한 연구능력 덕분일 것이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 직후인 2020531일자 <무쿠게통신(300)>에는 정홍영 선생과의 일이라는 콘도 선생의 글이 실렸다. 이 글에서 콘도 선생은 자신이 정홍영 선생의 금붕어 똥이 되었다고 썼다. “금붕어 똥이란 항상 따라다니는 단짝을 가리키는 일본어 표현으로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존중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누가 누구에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이 말뜻은 달라질 수 있다. 2003년 일본 민주당 간 나오토(菅直人)대표는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를 향해 일본의 이라크 정책은 미국의 금붕어 똥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줏대 없이 졸졸 따라다니기만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콘도 선생처럼 스스로 금붕어 똥으로 자처했다면 이는 상대방과 동행하고 싶다는 욕망이자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존중하는 겸양의 표현이다.

 

 

콘도 선생이 스스로를 금붕어 똥으로 여겼음직한 분이 또 한 분 계신다. 그의 아내 콘도 사치코(近藤幸子) 선생이다. 나는 두 분이 어떻게 결혼하셨는지, 두 분의 결혼생활이 행복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글이 <무쿠게통신>에 실린 적이 있다.

 

히다 유이치(飛田雄一) 선생에 따르면 곤도 도미오 선생의 원래 이름은 타니구치 도미오(谷口富男)였다. 결혼 직후 두 분은 누가 누구의 성()을 따를지 결정해야 했는데, 일본에서는 서양처럼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라야할 필요가 없고, 남편이 아내의 성을 따르는 것도 가능하며, 또 한국처럼 각자의 성을 유지해도 무방하다.

 

이 결정을 위해 콘도 부부는 가위바위보를 했고, 콘도 도미오 선생이 졌기 때문에 아내의 성을 채택해 그때부터 콘도 도미오(近藤富男)가 되셨다고 한다. 성을 정하는 방법으로 가위바위보를 했다는 것도 은근히 통쾌한 일인데, 아내의 성으로 자신의 성을 삼은 콘도 선생이라면, 스스로를 사치코 선생의 금붕어 똥으로 여기면서 평생 사랑하셨을 것으로 믿게 된다.

 

내가 최근 2년간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교류하던 콘도 선생님은 단정하지만 온화하고, 과묵하지만 정확하고 간결하신 분이었다. 아마도 정홍영 선생께서 돌아가신 이후 금붕어 똥에서 금붕어로 진화하신 결과가 아닐까 짐작되었다.

 

 

나는 정세화 선생께 자주 콘도 선생님의 금붕어 똥이 되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곤 했다. 콘도 선생님과 함께 조사하고, 함께 의논하고, 함께 글을 쓰고, 함께 조사여행을 다니는 단짝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는 몰라도, 일본 조사를 재개하면 내가 콘도 선생님 댁에서 지내도 좋다는 말씀을 전해오셨다. 코로나가 길어져서 그럴 기회는 오지 않았지만, 그 말씀을 전해들은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넉넉해졌다. 내가 콘도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은 만큼, 콘도 선생님도 나를 제자나 동료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셨다는 말씀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돌아가신지 반년이 되어간다. 내가 금붕어 똥이 될 뻔했던 콘도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요즘도 나 자신을 돌아보는 질문을 자주 던진다. “누군가 나를 보면 금붕어 똥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만큼, 나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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