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 연구의 권위자이자 최초의 본격 평전 <춤추는 최승희(1997)>의 저자이신 정병호(鄭昞浩, 1927-2011) 선생님이 나주 출신이심을 나는 나주에 와서야 알았다. 다시 찾아보니 약력에 분명히 나주 출생이라고 되어 있는데도 전에는 보지 못했었다. 사람의 인지과정은 선택적이고 상황구속적임에 틀림없다. 취재할 때 반드시 현장에 가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주 문화원장을 역임하신 박경중 선생님은 정병호 선생의 절친이셨다고 한다. 박경중 선생님도 1927년생이라고 하셨으니까 갑장이셨던 셈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의 증언이나 공식 기록에 나오지 일화를 많이 이야기해 주셨다. 그런 일화들은 대개 최승희 연구와 직접 관련되지는 않지만 정병호 선생의 삶과 그의 최승희 연구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박경중 선생의 말씀 중에 사실 관계에 의문을 불러일으킨 점도 있었다. 박경중 선생님은 정병호 선생이 중학 시절에 최승희 선생의 무용공연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자신도 무용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공연이 경성(=서울) 공연이었다고 하셨다.

 

나는 혹시 정병호 선생이 중학교 시절에 보셨던 최승희 공연이 나주공연이었을까, 하는 의문으로 조사연구를 시작한 것인데, 박경중 선생님은 그것이 서울공연이라고 단정하셨다. 그러나 그 다음날 인터뷰에 응했던 나주문화원 전 사무국장 김준혁 선생은 그것이 광주공연이었다고 하셨다. 따라서 이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정병호 선생이 평전 <춤추는 최승희>의 머리말에 쓰신 내용을 다시 찾아보았다. 다소 길지만 인용해 보자.

 

일제 시대에 우리 학생들은 이침 조회 때에 동쪽을 향해 서서 천황에게 경례를 하고 자기들이 황국 신민이라고 맹세하고 살았다. 그러니 이승만, 김구도 몰랐고 뒷소문으로 김일성과 박헌영이 들먹여질 정도였다. 그런 시대에도 손기정과 함께 최승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그 둘은 그 시대에 우리 민족의 마음속 깊이 자리를 차지했던 인물이었다.

 

나도 중학생의 몸으로 몰래 극장에서 최승희 무용 공연을 보았다. 그때에 본 최승희의 춤은 <보살춤>, <초립동>, <에헤야 노아라> 들이었다. <보살춤>은 광채가 나는 보석과 구슬을 꿴 줄을 몇 가닥 몸에 걸쳤을 뿐일 정도의 반나체의 모습을 하고 높은 무대에 올라가 손만 가지고 춘 것이었다. 조명이 처음에는 배꼽 부분을 비추다가 차차 온몸으로 퍼졌는데, 사춘기에 보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겠지만 하도 요염해서 어쩌면 사람이 저렇게 아름다울까! 저렇게 아름다운 예술이 있을까!’ 하고 느꼈다. 소문에 그이가 세계적인 무희라는 말이 들렸다. 나는 그때에 그 흥분과 감격을 간직하려고 최승희의 사진 몇 장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손기정이 조선인들의 영웅으로 떠오른 것은 19368월의 베를린 올림픽 이후이므로 정병호 선생의 무용공연 관람도 그 이후임을 알 수 있다.

 

 

또 정병호 선생이 최승희 공연에서 보셨다는 작품들의 창작연대를 조사해 보았더니, <에헤야노아라>1933520,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영녀계주최의 근대여류무용대회에서 초연되었고, <초립동><보살춤>193724, 오사카 아사히칸(朝日館) 공연에서 초연되었다. 따라서 공연작품을 기준으로 해도 정병호 선생의 최승희 무용 첫 관람은 19372월 이후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제가 황국신민 서사를 지어낸 것은 1937년이다. 그해 102일 미나미 지로 총독이 최종 결재한 후 황국신민 서사는 전 조선의 학생들에게 암송하도록 강제됐다. 따라서 정병호 선생의 기억 내용은 193710월 이후로 다시 미루어지게 된다.

 

 

또 정병호 선생은 중학생이었을 때 최승희 무용 공연을 보셨다고 했다. 당시는 제3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취학연령이 만8세였다. 학제는 6년제 심상소학교를 졸업하고 5년제 중학교에 진학하도록 되었다. 정병호 선생은 19404월부터 19453월까지 중학교에 다니셨을 것이다.

 

따라서 정병호 선생께서 최승희 무용공연을 보신 것은 1940년 이후의 일이게 된다. 다만 영민한 학생들은 7세 혹은 심지어 6세에 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는데, 최승희 선생도 만6세에 숙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했었다. 정병호 선생도 그와 비슷한 전례를 따랐다면 그의 중학교 시절은 19394월이나 19384월로까지 앞당겨질 수는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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