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마지막 날인 지난 수요일, 고암(古巖) 정병례(鄭昺例, 1947-) 선생님의 새김아트 전시회에 갔다. 약 한 달을 벼르던 일이다. 발단은 올해(2022) 720일 나주를 방문, 금성관 근처에서 본 <나주 수세거부운동 기념비>였다. 나주성당에서 <째깐한 박물관>에 가려고 금성관로를 따라 걷는데 갑자기 나타난 이 기념비가 너무너무 인상적이었다.

 

길거리에 기념비를 세우는 건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 기념비는 첫인상이 달랐다. 기념비라기보다는 미술관에 전시되어야 어울릴 예술품 같은 느낌이었다. 설명문을 읽어보니 비석의 취지는 길거리에 세울 기념비로 어울렸다. 그러니까 설치 자리는 맞는데, 기념비를 너무 예술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기념비의 자리 뿐 아니라 기념비 자체도 독특했다. 직육면체 돌덩이에 이리저리 글씨를 써서 가로나 세로로 세워놓은 평범한 비석이 아니었다. 직육면체의 돌덩이 두 개를 마주 세워놓은 것도 이례적이었고, 두 돌의 꼭대기 한쪽면만 곡선으로 처리한 것도 특이했다.

 

그러나 가장 독특했던 것은 표면에 새긴 그림을 색깔 처리한 것이었다. 빨간색과 녹색, 파란색이 사용됐고, 이것이 검은 바탕과 테두리, 그리고 판화 바탕처럼 그어진 다양한 흰색 줄무늬와 잘 어울렸다. 두 비석의 바깥쪽 측면에 쓰인 흰 글씨도 멋졌고 검은 바탕과 대비와 조화가 아주 좋았다.

 

두 비석 전면의 그림도 인상적이었다. 두 비석의 아래쪽 3분의1 부분에는 검은 바탕에 녹색 벼나 보리의 어린 줄기가 3단으로 형상화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논밭의 모습(오른쪽 비석)과 쟁기질을 하는 사람의 모습(왼쪽 비석)이 새겨져 있었다. 사람은 붉은색으로, 논밭은 녹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는데 검은색으로 테두리와 여백이 채워진 색채 대비가 강렬했다.

 

 

쟁기질 하는 농부의 머리 위에는 달이 떠 있었는데, 달의 색깔을 연한 파란색으로 처리한 것이 신선했다. 또 오른쪽 비석에 새겨진 초록의 논밭의 위로 태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둥근 태양을 빙 두른 불꽃과 내부의 곡선이 이글거리는 태양의 뜨거움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관찰자의 착각 혹은 과잉 해석일수도 있으나, 달 아래의 쟁기질 농부의 모습은 한자로 달 월()’자처럼 보였고, 태양 아래 형상화된 논밭과 초목의 모습은 해 일()’자처럼 보였다. 밤낮없이 일하는 농부와 쉼없이 자라는 논밭의 작물을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오른쪽과 왼쪽 비석의 바탕 무늬도 대조를 보였다. 태양 아래 논밭이 형상화된 오른쪽 비석의 바탕은 검은 바탕의 돌에 여러 방향으로 그어진 선들도 역동적인 분위기였고, 달 아래 쟁기질 농부의 모습을 형상화한 왼쪽 비석의 바탕은 주로 가로로 길게 새겨진 선들 때문에 대체로 차분하고 안정적인 모습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뒷면 바탕은 반대였다. 태양의 비석 뒷면에는 초록색 산봉우리 3개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바탕은 차분하고 긴 가로선들이었고, 파란색으로 새겨진 강물의 흐름이 그려진 왼쪽 비석의 뒷면 바탕은 짧은 선들이 여러 방향으로 뻗어져 있어서 동적이었다.

 

나는 산처럼 움직이고 물처럼 생각해라(Move like Mountains, Think like Rivers.)’는 교훈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는데, 이 기념비의 뒷면에 새겨진 산과 물을 보자 작가에 대한 친밀감이 일었다. 내 생각을 경제적이고, 효과적이고, 성공적으로 대신 형상화해 주셨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독특하고, 멋지고, 철학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기념비를 언제 누가 제작했는지 설명문에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왼쪽 비석 측면에, 읽기가 그리 쉽지 않은 글씨체로, “20071212일 나주지역 수세거부운동 2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일동이 기념비를 세웠고, ‘고암 정병례 새김이라고 제작자가 밝혀져 있었다. 고암 정병례라는 호와 이름을 기억해 두기로 했다.

 

서울에 돌아와 이 기념비에 감탄한 이야기를 정철훈 선생한테 했더니, 정병례 선생님이 나주 동강 출신의 새김 아티스트이며, 자신의 집안 형님뻘이시라고 했다. 나는 고암 선생님을 뵐 기회를 부탁했고, 그로부터 약 한 달 만에 전시회에 가게 된 것이다. (2022/9/3,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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