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영-콘도 도미오 연구팀이 고베 수도공사의 조선인 순난자 3인의 매장묘터를 찾아낸 것은 1986년 초가을이었다. 1914-1915년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가 터널 낙반 사고로 희생된 지 약 70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조사는 거기서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 더 진행되지 못했다.

 

참배묘가 따로 마련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두 사람은 지역 사찰의 과거 기록을 뒤지고 묘지를 돌아보면서 묘비나 무연고 묘소를 찾아보았지만 세 사람의 참배묘는 찾을 수 없었다.

 

 

이들의 참배묘가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2020223일이었다. 1929년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에서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를 기리는 추도비 건립 준비가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타마세의 불교사찰 만푸쿠지(満福寺)에서 연락이 왔다. 이에 대해 콘도 도미오 선생은 <무쿠게 통신(300, 2020531)>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해 2020223일 아침, 정홍영 선생의 책에도 서술되지 않은 중대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니시타니의 타마세(玉瀬)에 있는 만푸쿠지(満福寺)에서 온 소식이다. 100년 이상 사찰과 지역 부인회에서 조선인들을 위령하고 있는데, 부인회도 고령화되고 인원수도 줄어들어 이제 그만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는 말씀이었다. 다만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전화로 대략 방문 약속을 하고 26일에 절에 찾아가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만푸쿠지에서는 매년 824일 아침 무연고 참배를 계속해 왔다. 주지 스님과 부녀회원이 무연불(無縁仏)씨와 삼계만령(三界萬霊)에게 꽃과 쟁반 과자를 바치고 각각 향을 피우며 영혼을 위로해 왔다. 아마도 100년 정도 계승되어 오는 동안에 그 의미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선대 주지 스님이 옛날 타케다오의 터널 폭파 공사로 사망한 조선인들을 추도하고 있다는 말씀이 계셨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나눈 후에 (주지 스님이) 현장을 안내해 주시고, 꽃과 과자를 갖추어 불경을 외워 주셨다. 금년 326일에 다카라즈카의 조선인을 추도하는 비를 건립한다고 전하자, 지금까지 자신들이 계속해 온 위령의 마음도 이어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면서 몹시 기뻐해 주셨다. 그리고 놀랍게도 추도비가 완성되는 날 아침 만푸쿠지의 주지 내외분이 우리보다 일찍 현지를 찾아 추도비 앞에서 법요(法要)를 지내 주셨다.”

 

 

콘도 도미오 선생은 만푸쿠지에서 온 중대한 소식이라고 하셨을 뿐, 누가 어떤 방법으로 연락해 왔는지는 서술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는 다이꼬꾸 스미애(大黑澄枝) 선생을 통해서였음이 최근에 밝혀졌다.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은 내게 보내신 카톡 문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0202월 제 제자인 만푸쿠지의 아다치 유리(足立有里)씨로부터 저에게 타마세 부인회에서 100년이 넘는 기간을 제사했는데 이제 중단그만하고 싶다는 제의가 있습니다. 누구에게 상담하면 좋습니까?’라는 전화가 와서 콘도 도미오 선생님에게 연락했습니다. 326일 건립 예정이었던 추도비에 고베 수도공사에서 희생된 3명의 이름을 더해 새기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극적이고 기념할만한 일이었습니다.”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은 콘도 도미오 선생과 함께 다카라즈카 시립중학교의 교사로 근무하셨고, 만푸쿠지의 아다치 유리씨는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의 제자였다. 졸업 후 승려가 되신 아다치 유리씨는 승명(僧名)을 아다치 치쿄(足立智教)로 정하셨고, 아다치 다이쿄(足立泰教)와 결혼해 만푸쿠지의 3대 주지부부로 재직 중이셨다.

 

 

세 조선인의 참배묘를 1백년 이상 유지하며 제사해 오던 만푸쿠지의 사정이 어려워지자 아다치 치쿄씨는 스승인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께 상의해 왔고,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은 이 소식을 다카라즈카의 동료 활동가 콘도 도미오 선생님에게 알려주셨던 것이다.

 

1986년 가을 정홍영 선생님과 함께 세 조선인의 매장묘터를 찾아내셨던 콘도 도미오 선생은 마침내 아다치 치쿄씨와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의 도움으로 그들의 참배묘도 재발견하신 것이다. 매장묘터가 발견된 지 35년 만의 재발견이었다. (2022/9/12,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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