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12일 저는 3년 만에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코로나 방역이 완화되었고 한일간 무비자협정이 다시 가동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세화 선생님과 반갑게 만났고,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는 동안에도 함께 이룬 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무용신 캠페인과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이야기가 가장 많았고, 어려움에 처한 조선학교에 대한 걱정도 함께 나눴습니다.

 

 

우리는 콘도 도미오 선생님 댁을 방문했습니다. 다카라즈카시 외곽의 콘도 도미오 선생님 자택에서는 사모님과 자제분들이 정세화 선생과 저를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방에 들어가니 모든 것이 생전에 쓰시던 그대로라고 하셨고, 침대 맡에 놓인 설합장 위에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유해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강릉시가 보낸 감사패가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정세화 선생님과 저는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 큰 절을 올렸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한 번도 콘도 도미오 선생님을 직접 뵌 적이 없었습니다. 사진으로만 뵈었고, 라인으로만 말씀을 나눴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막역한 선배이자 큰 형님처럼 느끼곤 했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장남이신 콘도 타쿠미씨가 아버님의 뒤를 이어 <팀아이>의 회장직을 수행하신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자신이 못다 하신 일을 아드님에게까지 넘기신 것은 지나친 책임감이 아니신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저는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판단이 항상 옳다고 믿습니다. 아마도 거기에는 오래 지나서 증명될 깊은 뜻이 있으실 것입니다.

 

콘도 타쿠미씨는 부친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남기신 유품 중에서 큰 박스에 가득 찬 연구 자료와 원고뭉치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자료들을 제가 사용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콘도 선생님이 사용하시던 데스크탑 컴퓨터에도 수천 개의 파일이 남겨져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 자리에서는 이 자료들을 어찌할 것인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고, 그저 네에, 콘도 선생님의 이름을 위해 잘 사용하겠습니다고 대답했을 뿐입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타계하시고, 감사패 전달이 이뤄진 뒤에도 다카라즈카 추도비를 둘러싼 많은 일들이 생겼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타마세 부녀회와 만푸쿠지에서는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참배묘를 유지할 뿐 아니라, 그곳을 무궁화와 진달래 동산으로 꾸밀 계획을 세우셨다고 합니다.

 

 

정세화 선생님의 노력으로 앞으로 인근 조선학교에서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연례 참배 장소로 정하고 정기적으로 방문하기로 했다는 말씀도 전해 주셨습니다.

 

일본 <팀아이>의 회원들이 많이 늘어나서 활기를 띠고 있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조선학교를 후원하는 일이 조금 더 빈번해 지고 활발해질 것이라는 기대도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정세화 선생님과 함께 부친 정홍영 선생님의 묘에도 가서 참배했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은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가족들보다 더 자주 찾아오시던 묘역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추도비가 건립된 날에도 정홍영 선생님을 찾아오셨다고 하셨습니다. 20205월호 <무쿠게통신>에 쓰신 글에서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늘상 찾아왔지만 발견하지 못했던 묘비의 글을 그날 발견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묘비 옆에 새겨진 글을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습니다. “통일을 바라면서 이곳에 묻음.”

 

 

정홍영 선생님은 마츠에로 가는 하쿠비선 열차 안에서 옆에 앉으신 콘도 도미오 선생님에게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고향에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고 하십니다.

 

정홍영 선생님을 고향 상주에 모시는 일이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숙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뒤에 남은 우리들이 계속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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