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라즈카 고교무상화 집회는 원래 방문단 일정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3일 전에 오사카에 도착한 저는 정세화 선생님과 의논 끝에 이 다카라즈카 집회에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전날(12) 저녁 오사카에 도착한 <화강문화재단>의 이홍범 선생과 현홍진씨는 물론, 당일(13) 새벽 비행기로 간사이 공항에 도착한 <1강릉포럼>의 김중남, 강승호, 조은혜 선생도, 호텔 체크인도 미루고 바로 다카라즈카로 직행, 집회에 참가했습니다.

 

 

우리는 이 집회가 일본인 주도로 열리고 있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일본인 활동가들이 집회를 진행하는 데에 열과 성을 다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정세화 선생과 저는 다음날의 무궁화 식수 준비를 위해 12시쯤 집회 현장을 떠났다가 오후3시쯤 다카라즈카 역으로 되돌아갔는데, 일본인 활동가들은 집회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연설가들의 목은 쉬어있었고, 구호를 외치는 분들의 얼굴에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가두시위와 서명운동은 오후5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조선학교의 고교 무상화에 어째서 일본인들이 이다지 열심인가. 궁금했습니다. <팀아이> 선생님들의 설명은 간단했습니다. 조선학교의 문제는 재일조선인들의 문제이기 이전에, 일본사회의 민주화 문제라는 인식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본은 2010년부터 고교 무상화를 실시했습니다. 공립학교는 학비를 받지 않고, 사립학교에는 정부의 교육보조금이 지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정책은 일본 민주당이 집권했던 짧은 시기에 도입되었는데도 조선학교가 대상에서 제외됐습니다.

 

자민당의 아베 내각도 조선학교 보조금 지급을 거부했습니다. 이미 지급되던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보조금도 중단했습니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미사일 발사,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북한 공민을 자처하는 조선학교를 지원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조선학교 재단인 조선학원도 항변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조선학교 체계가 시작되었던 1953, 조선학원은 일본 정부의 교육 보조금을 자발적으로 거절한 바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교육은 우리 돈으로 할 테니, 일본 정부는 관여하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민족교육의 과정과 내용에 대해서 일본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상황이 변했습니다. 재일동포들이 자녀들을 조선학교에 보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재일동포 북송사업(=귀국사업)과 일본인 납치사건 등의 여파가 재일동포 사회에 큰 타격을 준 것으로 평가됩니다. 문부성 통계에 따르면 한때 20만명을 헤아리던 조선학교 재학생 수는 20155천명 이하로 감소했습니다.

 

조선학원은 일본의 중앙 및 지방정부들과 협상해, 북한과 거리를 두는 몇 가지 조치를 취함으로써 초,중급학교의 보조금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2010년 고교무상화 정책을 계기로 조선학교 보조금은 전면 중단됐습니다. 2019년에는 유아교육 무상화 대상에서 조선학교 부설 유치원까지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됐습니다.

 

 

재일동포가 조선학교를 떠나고, 조선학원이 일본 정부의 공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가운데, 일본인들이 나섰습니다. 일본인 활동가들은 그동안의 우여곡절이야 어떻든 조선학교를 보편적 무상교육에서 제외한 것은 민주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제도적 차별이라고 주장합니다.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획기적인 국제 정세의 변화가 없는 한,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를 무상화 교육 대상으로 포함시킬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쇠퇴하는 조선학교가 자력으로 회생할 가능성도 희박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아도 그 주장을 유지할 권리는 지켜주어야 한다는 일본인들의 실천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방문단이 다카라즈카의 가두시위와 서명운동에 동참하기로 한 것도 그러한 노력에 감동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jc, 2023/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