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이래 최승희가 진행해 온 15회의 지방공연을 보면 공연지 선택에 몇 가지 경향성이 보였다. 첫째 간선철도 선상이나 그에 가까운 도시들이었다. 부산(14.6)과 대구(9.3), 대전(2.2)과 청주(1.7)와 수원(1.3)은 경부선 상의 도시였고, 개성(4.9)과 사리원(2.4)과 평양(14.1)은 경의선, 인천(6.8)은 경인선의 도시들이다.

 

둘째, 목포(3.5)와 진남포(3.8)는 새로 번성하기 시작한 항구도시들이었다. 셋째, 해주(2.4)와 재령(1.9, 1940), 인천(6.8)과 수원(1.3)은 경성에 가까운 도시들이었다. 괄호 안의 숫자가 보이듯이 아마도 공연 도시 결정은 인구 1만 명을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가 춘천 공연을 결정한 것은 아마도 세 번째의 기준, 즉 경성 인근 도시라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1930년의 춘천 인구는 1만 명으로 기준을 넘기기는 했지만, 해주나 재령, 수원이나 인천 등의 경성 인접 도시들과는 두 가지 면에서 달랐다. (1) 철도가 없고 자동차 교통 사정마저 좋지 않았으며, (2) 극장 규모가 작아서 수익을 올릴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최승희는 춘천 공연을 단행했을까?

 

1931년 1월11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최승희무용발표회>의 한 작품, <그들의 행진곡>

 

이를 살피기 위해서는 우선 1920년대 후반의 춘천 분위기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 한일합병 이후 조선의 주요 도시들은 일정한 근대화를 경험했다. 비록 그같은 근대화가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을 위한 준비였지만, 철도와 항만, 토지소유와 농업개량, 공업과 금융, 그리고 문학과 예술 등의 분야에서 근대화가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춘천은 그같은 근대화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 도청소재지이면서도 농업과 축산, 양잠과 벌목 등의 1차 산업 외에는 이렇다 할 산업이 없었고, 도시화가 진행되지도 못했다. 철도도 없었고, 자동차도로도 정비되지 못했다. 이에 춘천 시민들은 1920년대 중반부터 절대적 불편함과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문제해결 노력을 경주하기 시작했다.

 

우선 교통수단 개선 요구가 제기됐다. 경춘간 자동차 운행이 시작된 것은 1910년대 중반이었는데, 191586일의 <매일신보>에 따르면 <내선(內鮮)자동차사>가 경춘간 자동차 운행사업권을 허가받아 영업을 시작했지만 자동차는 1대뿐이었다. 10년이 지나서도 자동차를 3-4대로 증편했을 뿐, <내선자동차사>는 경춘간 편도 1인당 운임을 6원으로 책정해 폭리를 취했다.

 

1922년 12월5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내선자동차운수주식회사>의 광고문

 

1926710일의 <매일신보>춘천의 번영책을 강구하기 위해 조직된 삼오회(三五會)”가 자동차 운임을 “5으로 결의해 강원도 당국과 내선자동차사에 교섭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운임을 인하하려면 도로 개선이 필요하다<내선자동차사> 지배인의 주장도 실렸다. <내선자동차사>의 독점적 지위와 이를 비호하는 강원도 당국도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삼오회의 문제제기가 1928527일의 <부산일보>에 재차 보도된 것을 보면, <내선자동차사>의 독점과 도당국의 비호, 그리고 도로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춘천군민들은 1928113일 총독부의 정무총감에게 진정서를 제출해 철도12년 계획에 경춘선이 제외된 것은 유감이며, 경춘 자동차도로라도 개수해 달라고 요구했다.

 

춘천시민들의 끈질긴 요구와 노력 끝에 <내선자동차사>1929415인승 승합차를 경춘선에 배치했고, 9월에는 자동차 운임도 5원으로 인하하는 등 개선의 제스처를 취했다.

 

최승희가 1929년 12월5일 조선극장에서 열린 <무용연극영화의밤>에서 무용을 발표하고 있다.

 

한편, 1930년 춘천의 변호사 최백순이 <춘천자동차운수주식회사>를 설립해 경춘 자동차사업 허가권을 따냄으로써 <내선자동차사>의 독점적 지위가 무너졌다. 이후 경춘선 자동차 요금은 450전과 4원을 거쳐 340전으로 더욱 인하되었다.

 

193139일의 <매일신보>는 춘천 시민들은 <춘천번영회>를 결성해 경춘간 철도국영 자동차운수 실현방안을 촉진할 것과 이를 구체적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고 보도했다.

 

, 춘천시민들은 적어도 1926년부터 불편한 교통 문제를 직접 나서 해결하기 시작했고, 결국 경춘선 철도 가설은 관철하지 못했지만 자동차 교통의 문제점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갔던 것이다.  (jc, 2021/8/18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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