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공연은 어째서 2월21일에 열렸던 것일까? 춘천공연에 대한 의문은 거의 풀렸지만 아직 2가지가 남아 있었다. ‘언제였다. 사실상 이 두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었다.

 

최승희의 1931년 상반기 지방공연은 경상-전라-충청지역이었다. 그런데 부산(217-18)과 대구(224-25)공연 사이에 춘천 공연(221)이 낌으로써 일정과 동선에 이상이 생겼다.

 

춘천 공연이 춘천 언론사와 유지들의 초빙과 최승희무용단의 희생적 양보로 성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춘천의 초빙자들이 공연일로 지정해서 공연을 요청했을 것이다. 최승희는 그 일정에 맞추기 위해 다른 일정을 조정해야 했다. 221일이었을까?

 

제1회 춘천 세계 불꽃놀이(2018). 1931년 2월21일도 춘천에서 불꽃놀이가 있었다. 당시는 일본의 <기원절> 축하를 위해서였다.

 

춘천공연 관련 7개의 신문기사를 살펴도 공연 날짜가 221일이어야 했던 이유는 나타나지 않았다. 221일의 <동아일보>신춘사업으로 최승희양을 초빙했다고 보도했지만, 강원도의 2월을 봄이라고 하기에는 이르다. 아직 눈이 쌓이고 기온도 영하이기 때문이다.

 

217일의 <조선신문>“(최승희) 일행의 희생적 양보에 의해 겨우 공연할 수 있었다고 보도했지만, 희생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219일의 <매일신보>220일의 <경성일보>는 독자 위안을 위해 최승희 공연을 유치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매일신보>살인적 불경기로 사람들의 감정이 거칠어졌고 영()이 북어깍두기같이 시들어 진 것을 위안하며 약간이나마 활기를 부어 주고자최승희 공연이 마련되었다고 보도했고, <경성일보> 기사도 같은 내용이었지만 북어깍두기대신 수세미 조각이라는 표현을 썼다.

 

공연당일인 1931년 2월21일의 <조선신문>은 최승희 무용공연에 앞서 1시간동안 불꽃놀이가 이루어졌다고 보도했다.

 

이 두 기사가 말한 불경기는 1929년 뉴욕증시 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를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대공황은 이미 1년 반 이상 전 세계에 맹위를 떨치고 있었으므로, 시민 위안 행사가 꼭 그날(221) 열려야했던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공연 당일(221) 아침에 발행된 <조선신문>공연은 7시 반에 시작되지만 한 시간 전부터 불꽃놀이(煙火)가 시작된다고 보도했다. 왠 불꽃놀이였을까? 실내행사인 무용공연의 사전행사로 불꽃놀이를 하는 경우는 없으므로 무언가 다른 행사를 위해 마련된 것임에 틀림없다.

 

문득 211일이 일본의 건국기념일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1873기원절(紀元節)’로 제정되었다가 1948년에 폐지되었지만 이후 이름을 바꿔 지금도 지키는 일본 명절이다. 춘천의 초빙자들은 신설된 춘천공회당에서 기원절을 축하하려고 최승희무용단을 초청했던 것이 아닐까?

 

1931년 2월21일의 춘천공연은 춘천의 일본인들과 친일 조선인 인사들이 <기원절> 축하를 위해 최승희무용단을 초빙하여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날의 레퍼토리는 일제의 압제에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내용이 대부분이어서, 내용과 형식이 상반되는 이상한 공연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최승희는 27-8일의 경성공회당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고, 217-18일에는 한국의 설 연휴에 맞추어 부산공연이 계획되어 있었다. 그 후에도 대구를 비롯한 삼남지방의 주요도시 공연 일정이 줄줄이 세워져 있었다.

 

최승희의 일정을 알게 된 춘천인들은 차선책으로 그 주말인 214-15일에 공연을 갖고 싶었겠지만, 조선인 예술가가 기원절 공연을 하고 싶었을 리 없다. 아마도 경성공회당 공연 3일 만에 춘천공연을 강행하는 것은 일정도 빠듯하고 무용수들에게 무리라는 핑계를 대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주말에 춘천 공연을 하게되면 설 공연에 맞춰 부산에 도착하기도 불가능했다.

 

최승희는 결국 부산공연 날짜(17-18)는 그대로 유지하되, 춘천 유력인사들의 로비로 거부할 수 없었던 춘천공연은 그 다음 주말인 21일에 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그에 따라 부산공연은 계획대로 할 수 있었지만 대구공연과 그 이후의 지방 공연들은 3-4일씩 일정이 조정되거나 순서가 바뀌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이 1931217일의 <조선신문>가 보도했던 최승희 일행의 희생적 양보였던 것이다.

 

춘천의 기원절 축하 무용공연이 211일에서 21일로 열흘 미뤄짐에 따라 기원절 축하의 의미는 퇴색했고, 신문들도 기원절 공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춘천의 초빙자들은 불꽃놀이로 기원절 축하분위기를 살리려 했을 것이다. 공연일이 211일에서 멀어짐으로써 최승희도 춘천공연을 하면서도 기원절 축하공연은 피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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