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형 선생과 함께 <무용신 캠페인>을 시작한 것은 20202월이지만, 연원은 넉 달 전, 20199월 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저는 최승희 선생의 일본공연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20185월부터 시작한 일본 조사는 1년 반 계속되었고 홋카이도 쿠시로(釧路)에서 오키나와 나하(那覇)까지 일본 내 42개 도시를 방문했습니다. 물론 모두 최승희 선생의 공연이 열렸던 곳입니다. 가는 도시마다 부립, 현립, 시립 도서관과 기록보관소, 신문사와 박물관을 조사했고, 공연이 열렸던 극장과 공회당들을 답사했습니다.

 

일본 조사 중에 조선학교를 처음 접한 곳이 교토(京都)에서였습니다. 20199월 교토시립도서관을 조사하던 중, 친구 한 명이 교토에 멋진 사찰이 하나 있으니까 꼭 구경하고 와라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긴카쿠지(銀閣寺)였습니다. 고즈넉하고 차분해서 좋더군요.

 

 

교토 히가시야마 인근 은각사 옆에 위치한 교토조선중고급학교 정문

긴카쿠지 주변에 개울 따라 만들어진 산책길에 철학의 길(哲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약간 생뚱맞지만 산책로 자체는 아름답습니다. 9월말이었으므로 산책길을 따라 심어진 벚나무 잎은 아직 푸르렀지만, 가을 단풍이 들거나 봄에 벚꽃이 만발하면 장관이겠더군요.

 

실제로 <철학의길> 안내판에는 이 길이 봄의 사쿠라, 여름 반딧불, 가을 단풍, 겨울 설경으로 아름답다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안내판에 일본어, 영어, 중국어와 함께 한국어 설명이 곁들여진 것은 좋은데, 다만, 번역에 잘못된 것이 있더군요. 이 길이 1986년에 <일본의 길 100>에 뽑혔다는 설명인데, 한국어 설명에는 <일본의 다리 100>으로 잘못 번역되어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당국에 연락해 수정하도록 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명성답게 긴카쿠지는 깨끗하고 차분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습니다. 매니큐어가 잘 된 손처럼 정갈한 느낌이었지요. 하지만 아침 일찍 입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체관람 학생들이 많아서 전각이나 정원보다 뒷산 산책로만 구경하고 나와야 했습니다.

 

은각사 근처 천변에 마련된 산책로 <철학의길>,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산책로는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긴카쿠지 입구 근처에서 들어갈 때 보지 못했던 <교토조선중고급학교 진입로>라는 표지판을 발견했습니다. 호기심에 이끌려 긴카쿠지 왼쪽으로 난 오르막길을 따라 갔습니다. 좌우의 울창한 숲 사이로 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올라가니까 학교 정문이 나왔습니다.

 

정문 양쪽 기둥에는 <교토조선중고급학교>라고 한글과 한문으로 쓰여져 있었습니다. 일본 조사기간 한자와 가나만 보다가 모처럼 한글을 보니 반갑더군요. 더구나 양쪽으로 열리는 철문 중앙에는 삼펜(サンペン이라고 불리는 교표가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펜과 망치가 짝을 이루어 삼각형 모양으로 배열된 삼펜 마크는 1948년 도쿄조선학교의 교표로 채택된 이후 일본 전역의 조선학교로 퍼져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펜과 망치가 한데 묶인 것은 일하며 공부하자는 뜻이고 세 쌍을 배열한 것은 남한과 북한과 재일동포를 위해 세 배씩 일하며 공부하자는 뜻이라는 설명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교토조선중고급학교 정문에 부착된 삼펜 교표. 펜과 망치가 세개씩 배열되어 있는 것은 "일하면서 공부"하되 남북한과 재일동포를 위해 3배나 열심히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정문은 열려 있었고 널찍한 운동장은 비어 있었습니다. 수업시간이었습니다. 어떡하나, 잠시 생각하다가 누군가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교정과 교사 구경을 했습니다. 그냥 발길을 돌리기는 아쉬웠기 때문입니다. 운동장 가로질러 본관과 부속 건물로 나란히 세워진 교사는 세월의 흔적이 있기는 했지만 정갈하게 청소되고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부속 건물 입구의 게시판에 <2018427일 판문점선언>을 알리는 사진이 게시되어 있어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악수하는 장면과 손을 맞잡고 치켜든 장면이었습니다. 티비 화면으로 보았을 때의 감격이 떠오르면서 친숙함이 밀려왔습니다.

 

한글로 게시된 다른 게시물들을 읽으면서 교사 내부를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그건 예의가 아니지?’하는 생각에 다시 운동장으로 나왔습니다. 운동장에는 학교 이름이 쓰인 차일이 세워져 있었는데, 마침 연장 상자를 들고 지나가는 분을 붙잡고 한국에서 왔는데 무용부 지도교사를 만나 뵐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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