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중 선생님의 증언을 통해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던 최승희 공연이 언제 어디서 열렸던 것인지를 찾아가는 중인데, 시기는 19414월 혹은 19422월이었던 것으로 범위를 좁힐 수 있었다. 장소도 경성공연과 광주공연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최종 결론은 아직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최승희의 무용공연과 작품에 변화가 있었다. 1941년과 1942년 사이에 최승희 무용작품과 공연의 경향성에 큰 변화가 생겼음을 알 수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일제가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시작한 태평양 전쟁의 여파 때문인 것으로 짐작되었다.

 

최승희는 세계 순회공연(19371219-1940125)을 마치고 요코하마에 귀항한 직후, 1941221-25일까지 5일간 도쿄 가부키자(歌舞技座)에서 귀조(歸朝) 첫 공연을 가졌다. 1941215일자 <미야코신문(都新聞, 6)>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 최승희는 세계순회공연 이후의 무용활동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 기사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제목) 민족무용은 민족음악으로, (부제) 피아노 없이 춤추는 최승희, (본문) 외유 3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무용수 최승희는 21일부터 가부키자(歌舞技座)에서 귀조공연을 열게 되었는데, 이 발표회에 앞서 그녀는 선항성명을 한 끝에 어디까지나 동양 향토무용의 독자성을 발표하고 싶다는 염원에서 종래 사용해 온 반주악기에 피아노 사용을 금지하게 되었다. 이는 그녀가 민족무용은 역시 민족음악과 분리해서는 성립될 수 없다는 생각에 응한 것으로, 이를 위해 작년 말 경성에서 일류 악사 4명을 불러 목하 그 반주를 바탕으로 최승희는 민족무용으로의 재출발을 꾀하고 있다.

 

이번 공연은 가부키자에서 5일간 혼자서 춤을 추겠다는 것이지만, 이러한 독무발표회는 앞으로도 지속해 나갈 것이며, 그녀는 제자도 가능한 한 취하지 않을 방침이며, 현재는 그녀의 외유 중에도 그녀의 연습장을 지키고 있는 몇 명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나의 창작발표회는 그것대로 개최하고, 만약 제자들의 모이게 된다면 그것은 별개의 것으로서 할 생각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그녀는 종래 무용계에 이쪽저쪽에서 일석을 던지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공연은 유럽과 미주 순회공연 중에 발표한 것만을 선정해서 춤추게 되어 있다. (사진은 춤추는 최승희)

 

이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세계 순회공연 이후 최승희 무용의 방향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1) 민족무용을 계속하되 피아노 대신 민족 악기로 반주하겠다는 것과 (2) 중무와 군무보다 독무 중심으로 공연활동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최승희는 조선의 악사들을 채용했고 제자들을 더 모집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는 세계 순회공연에서 얻어진 경험의 결과였을 것이다. 매니저역을 맡은 남편 안막과 단 둘이서 별도의 악단이 없이 축음기로 반주를 대신하면서 독무 중심의 조선무용 작품으로 세계 순회공연을 완수하면서도 상당한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성공에 힘입어 최승희는 가부키자 귀조공연에서도 유럽과 미주 순회공연 중에 발표한 것만을 선정해서 춤추겠다고 기획한 것인데, 실제로 그의 세계 순회공연 작품들은 모두 조선무용 작품들이었다. 가부키자 공연의 팜플렛에 따르면 19412월의 도쿄공연 발표작품도 다음과 같이 모두 조선무용 독무 작품들이었다.

 

 

1(1) 두개의속무(속곡), (2) 검무(타악기), (3) 옥적조(고곡), (4) 화랑무(속곡), (5) 신노심불로(고곡), (6) 보현보살(고곡), (7) 두개의전통적리듬(고곡), 2(1) 긴소매의형식(고곡), (2) 꼬마신랑(속곡), (3) 관음보살(고곡), (4) 가면무(속곡), (5) 동양적선율(속곡), (6) 즉흥무(고곡).”

 

도쿄 가부키자 공연 레퍼토리에는 구미 공연 팜플렛에 등장하지 않았던 제목도 눈에 띈다. “두개의 속무긴 소매의 형식,” “동양선 선율즉흥무가 그것이다. 그러나 두개의 속무가 독일 뒤스브르크 공연에서 초연됐던 두 개의 기생춤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아마도 다른 작품들도 구미공연 작품들의 제목을 조금씩 바꾼 것으로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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