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헤야 노아라>의 초연이 1931년 경성에서 이뤄졌던 것은 사실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최승희 선생의 1931년 공연을 모두 찾아 봤다. 1931년에 이뤄진 공연은 모두 6회였는데, 그 각 공연에서 초연된 신작 무용작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10-12일 단성사에서 열렸던 <3회 발표회>의 신작: <그들의 로맨스>, <향토무용, 농촌소녀>, <광상곡>, <그들의 행진> 4개 작품.

(2) 27일 경성공회당에서 개최된 <2회 무용 발표회>의 신작: <방랑인의 설움>.

(3) 193138일 예산극장에서 신명유치원 후원을 위한 예산공연의 신작: <가비(歌悲)>, <어린 용자(勇者)>, <유희>, <흙을 그리워하는 무리들> 4개 작품.

(4) 51-3일 단성사에서 열렸던 <3회 신작무용 발표회>의 신작: <어린이무용, 나는?>, <우리의 캐리커처>, <찌고이넬와이젠>, <남양의 밤>, <비가(悲歌)>, <봄을 타고 가는 시악씨들>, <, 약동>, <황야에 서서>, <어린이무용, 앞으로 앞으로>, <겁내지 말자> 10개 작품.

(5) 91-3일 단성사에서 열린 <신작무용 발표회>의 신작: <세계의 노래>, <자유인의 춤>, <토인 애사>, <미래는 청년의 것이다>, <인조인간>, <영혼의 절규>, <철과같은 사랑>, <고난의 길>, <이국의 밤>, <폭풍우>, <십자가>, <건설자> 12개 작품.

(6) 1023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렸던 양현여학교 후원공연의 신작: <번외, 향토무용>.

 

이상과 같이 1931년 최승희 선생이 새로 창작한 무용작품은 32개였다. 여기에 <에헤야 노아라>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에헤야 노아라>를 다른 제목으로 발표했다는 뜻이다. 위의 32개 작품 중 어떤 것이 <에헤야 노아라>였을까?

 

 

<에헤야 노아라>조선무용이자 독무였으므로, ‘현대무용중무군무를 제외하면 단 1개의 작품이 남는다. 그것은 193151-3일 단성사 공연에서 최승희의 독무로 초연되었던 <우리의 캐리커처>이다. 이 작품은 어떤 작품이었을까?

 

최승일은 <최승희 자서전(1937, 56-57)>에 실린 누이에게 주는 편지에서 최승희가 <우리의 캐리커처>라는 작품을 창작할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 언제인가 나와 너는 석정막씨의 <캐리커처>라는 제목으로 조선 옷을 입고 추는 춤을 보고서 대단히 불유쾌하게 생각하여, 곧 이기세(李基世)씨와 의논하야 가야금 산조 진양 중모리에다가 안무하야 <우리들의 캐리커처>라는 제목으로 너로서는 처음으로 <조선리듬>에 춤을 추지 아니하였느냐. 그때 일반의 평판도 좋았지마는 나는 그때 너는 조선의 딸이다하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이시이 바쿠는 19263월 첫 조선공연을 위해 경성을 방문했을 때 경성역에서 보았던 조선 노인의 모습을 소재로 <캐리커처>라는 작품을 안무했다. 이 작품에서 이시이 바쿠는 한복 두루마기 의상으로 춤을 추었는데, 최승일과 최승희는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할 만큼 조선인의 정서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최승희는 조선 남성의 의상은 유지하되 음악을 진양중모리 리듬의 가야금산조로 바꾸고, 무용 동작을 모두 새롭게 안무해서 제목을 <우리의 캐리커처>라고 한 것이다. 이는 <(이시이 바쿠가 본 조선의> 캐리커처>가 아니라 <우리의 캐리커처>라는 뜻이다.

 

갓을 쓴 두루마기 의상의 중년 남성의 춤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캐리커처><에헤야 노아라>와 같다. 다만 <에헤야 노아라>의 반주가 굿거리장단이었지만, <우리의 캐리커처>의 음악은 진양중모리 장단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의 캐리커처><에헤야 노아라>로 개명하면서 장단을 더 흥겨운 굿거리장단으로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다.

 

, 193151일 서울 단성사에 초연된 <우리의 캐리커처><에헤야 노아라>의 원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2022/8/27,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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