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캐리커처(1931)>는 이시이 바쿠의 <캐리커처(カリカチュア, 1926)>에 불쾌감을 느꼈던 최승희가 이를 수정하고 보완하려는 의도로 창작한 작품이었고, 이것이 후일 <에헤야 노아라(1933)>로 개칭되었던 것이라고 필자는 추론했다.

 

이 추론은 <신여성(19345월호)>과 최승일의 <최승희 자서전(1937)>, 그리고 다카시마 유자부로의 평전 <최승희(1981[1959])> 등의 문헌으로 뒷받침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시이 바쿠의 <캐리커처>가 공연에서 발표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1926년 이래 1940년대에 이르는 이시이 무용단의 숱한 공연 프로그램을 조사했으나, 그 모든 프로그램에 이시이 바쿠의 독무 <캐리커처>는 실려 있지 않았다. 이는 <캐리커처>가 창작은 되었으나 발표되지 않았거나, 혹은 다른 이름으로 발표되었다는 뜻이다.

 

 

<이시이바쿠 팜플렛(1, 1927)>에 실린 이시이 바쿠의 무용작품 목록에도 <캐리커처>라는 작품은 없었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내용으로 창작된 <실념(失念)>이 있을 뿐이다.

 

<캐리커처>19263월 이시이 바쿠가 처음 경성을 방문했을 때 창작되었다. 이 경성 공연을 위해 이시이 바쿠는 그의 처제 이시이 코나미와 함께 경성역(=지금의 서울역)에 도착, 여관과 요정이 즐비하던 수정 2번지(=지금의 중구 필동)의 하라카네(原金) 여관에 숙소를 정했고, 경성일보 사옥(=지금의 태평로1가의 프레스센터)에서 인터뷰를 하고, 하세카와초(=지금의 소공동)의 경성공회당에서 321일부터 23일까지 공연을 열었다.

 

 

이때 이시이 바쿠는 경성역 앞을 배회하는 한 조선 노인의 모습과 그의 넋이 나간 듯한 표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공연을 마치고 도쿄의 무사시사카이(武藏境)로 돌아가, 이 조선 노인을 희화화한 작품을 안무했다. 강이향(1993, 52)은 당시 상황을 이같이 서술했다.

 

(=이시이 바쿠)가 서울에서 맨 처음 본 것은 흰옷의 조선인들이 밧줄에 묶인 채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는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수인들의 무리였다. 그는 그곳에서 빼앗는 것들의 뿌리는 하나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어두운 인상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 속에서도 활기찬 사람의 모습, 흰옷을 입은 노인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거리의 그늘 밑에 앉아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한가함을 즐기는 모습. 그는 그 모습 속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했다.

 

그는 동경으로 돌아가자마자 그곳에서 본 노인의 인상을 테마로 하여 <실념(失念)>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푸근한 사랑과 잔잔한 웃음이 흐르는 가운데 조선 남자의 백의를 상징하는 의상으로 춤추고 있는 그의 무대 사진은 지금도 남아있다.”

 

강이향의 서술과는 달리 이 작품이 노인의 푸근한 사랑과 잔잔한 웃음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흰옷 입은 조선 노인의 정신 나간 듯한 멍한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 이시이 바쿠는 조선 노인을 풍자적으로 희화화한 것인데, 그래서 그 제목을 <캐리커처(=희화, 풍자)>라고 붙였다가 나중에 <실념(失念=망각, 멍함)>으로 바꿨다. 최승일과 최승희가 이 작품을 불쾌하게 여겼던 것도 바로 이런 희화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시이 바쿠의 <실념>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코믹한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공연에서 그다지 많은 인기를 누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일부 남겨진 공연 사진을 보면 일본에서 <실념>을 공연할 때에는 조선 의상이 아니라 일본식 의상이 사용되기도 했었다.

 

예컨대 이시이 무용단이 19401215일 도쿄의 칸다(神田) 소재 공립강당에서 개최한 보호아동의 밤공연의 프로그램에, <실념>10개 작품 중 4번째 작품으로 실려 있었다.

 

프로그램의 작품 설명 난에는 자기 자신의 생활의 캐리커처라고만 간단히 서술되어 있어, <실념>이 조선에서 만난 조선인을 소재로 창작되었다는 연원도 밝히지 않았는데, 이로 보아 이 작품의 공연 의상도 조선식 한복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022/8/27,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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