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이 바쿠의 <캐리커처>1926년에 창작된 직후 제목을 <실념>으로 바꾸었고, 적어도 1940년까지는 계속 공연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스승의 작품 <캐리커처>에 불만을 가졌던 최승희는 19315<우리의 캐리커처>를 창작해 경성에서 발표했는데, 오빠 최승일의 서술에 따르면 조선 공연에서 이 작품에 대한 호응이 높았다고 한다.

 

19333, 최승희는 다시 도쿄로 건너가 이시이 바쿠 문하에 들어갔고, 불과 2달 만에 무대 출연의 기회가 왔다. 520일의 <근대여류무용가대회>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원래 이시이무용단을 대표해 이시이 미도리가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그가 급성 늑막염 진단을 받는 바람에, 이시이 바쿠는 최승희를 대타로 지명해 대회에 참가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발표할 작품이었다. 대회를 불과 수 일 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새 작품을 안무할 시간은 없었다. 최승희는 이미 창작한 작품 중에서 한 곡을 선정해야 했고, 이때는 이시이 바쿠 문하생 신분이었으므로 스승과 작품 선정을 의논해야 했을 것이다.

 

이시이 바쿠는 최승희의 <우리의 캐리커처>의 작품성이 뛰어남을 알아보았고, 이를 출품작품으로 선정하면서, 다만 그 제목을 변경하도록 권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자전적 에세이집 <나의 얼굴(1940, 33)>에서 이시이 바쿠는 이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 후 3년이 지나 나의 권고로 도쿄에서 제1회 발표를 하게 되었다. 승희의 무용에 특징을 주자는 의미에서, 그 때 빅터(=레코드사)의 용건으로 도쿄에 와 있던 조선무용의 대가 한(성준)씨 밑에서 조선무용의 수법을 속성으로 연습시켰고, 본인이 싫다는 것을 내가 억지로 정리해서, 제목도 <에헤야 노아라>로 명명해 상연한 것인데 예상치 못한 큰 평판이 났고, 그 후 스스로도 자주 조선풍의 무용을 상연하게 되었다. 정말로 본인에게도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시이 바쿠의 이 회상에는 몇 가지 착오가 있다. <에헤야 노아라>를 발표한 <근대여류무용가대회>1933520일에 열렸으므로, 이는 최승희가 한성준 선생에게서 조선무용을 배우기(19346) 1년쯤 전이고, 최승희의 제1회 발표회(19349)보다도 1년반 전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캐리커처>의 제목을 <에헤야 노아라>로 바꾸도록 권고한 것은 이시이 바쿠였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최승희의 작품 제목이 자신의 <캐리커처(1926)>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스승 이시이 바쿠와 제자 최승희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을 것이다.

 

<캐리커처>는 이미 제목을 <실념>으로 바꿨지만, 기억하는 관객이나 평론가도 있을지 모르니, 모작 시비를 피하기 위해서 네 <우리의 캐리커처>의 제목을 바꾸는 것이 어떠냐?”

그럼 조선에서 흥을 돋우는 감탄사로 쓰이는 <에헤야 노아라>라고 할까요?”

그게 좋겠다. 앞으로 이 조선무용 제목은 <에헤야 노아라>로 하도록 해라.”

 

 

일본인 이시이 바쿠가 에헤야 노아라라는 조선식 감탄사를 알고 있었을 리 없다. 따라서 이 제목은 최승희가 제안했던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엄격한 도제식의 스승-제자 사이에서 최종 결정은 스승이 내린 것으로 기록되는 법이다. 이시이 바쿠가 <에헤야 노아라>의 제목을 자신이 결정한 것이라고 서술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시이 바쿠의 <캐리커처(1926)>와 최승희의 <우리의 캐리커처(1931)>은 둘 다 제목이 바뀌었다. <캐리커처><실념(1926)>으로, <우리의 캐리커처><에헤야 노아라(1933)>로 바뀐 것이다.

 

이후 이시이 바쿠의 <실념>은 조선 의상 대신 일본식 의상을 사용하면서도 노인의 모습을 희화화한 작품으로 계속 상연되었다. 최승희의 <에헤야 노아라>도 조선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되, 반주 장단을 중모리에서 굿거리로 바꾸어 더 흥겹고 유쾌한 작품으로 바꾸었는데, 덕분에 조선과 일본, 유럽과 미주에서 공연되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2022/8/28,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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