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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조선학교 무용부에 무용신을 선물해 온 한국의 <팀아이(회장 조성무)><무용신모임> 회원 30명이 2023127-30일 일본 오사카와 다카라즈카를 방문합니다. 이 방문은 일본의 <팀아이(회장 콘도 타쿠미, 사무국장 정세화)>가 주관합니다.

 

일본 <팀아이>의 한국방문(2022123-8)에 대한 답방으로 마련된 이번 방일에서는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의 개교 70주년 기념공연 관람(129, 창조관)과 다카라즈카 타마세에서 작은 음악회 개최(128, 만푸쿠지)가 주요 일정입니다.

 

 

타마세 만푸쿠지 음악회는 20세기 전반 한일 양국 사이의 불행했던 과거에도 불구하고 1백년 이상의 우호와 선린을 이어온 양국 시민들에게 감사하기 위해서 마련되었습니다.

 

20세기초 조선인 노동자 5명이 다카라즈카 타마세 인근의 토목공사 중에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김병순(1914314일 사망), 남익삼(1915121일 사망), 장장수(1915324일 사망)씨는 고베수도 개수공사 중에 터널 내 낙반 사고로 사망했고, 윤길문, 오이근씨는 1929326일 구국철 후쿠치야마선 철도개수공사에서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타마세 부녀회와 만푸쿠지의 주지스님은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시신을 거두어 마을 공동묘지에 매장하고 만푸쿠지 건너편 언덕에 참배묘를 마련했습니다. 만푸쿠지와 부녀회는 1914년부터 3세대가 흐르는 108년 동안 매년 824일 무연고 조선인 노동자들을 위한 위령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이 소식은 2020년 2, 윤길문, 오이근씨의 추도비 건립을 준비 중이던 콘도 도미오(1950-2022) 선생에게 알려졌고, 두 사람을 위해 준비되던 추도비는 다섯 조선인 노동자를 위한 추도비로 확대되어, 2020326일 다케다오 인근 기리하타 소재 나가오산 기슭의 사쿠라공원 입구 신수이광장에 건립되었습니다.

 

 

한국 <팀아이><무용신모임>은 콘도 도미오 선생의 요청으로 조선인 희생자들의 한국내 연고를 조사했습니다. 5명의 희생자 중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원도 강릉임이 확인된 후, 추도비 건립자들과 위령제사를 지내온 분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해 줄 것을 강릉시청에 청원했습니다.

 

이 청원은 승인되어 강릉시장 명의로 준비된 감사패가 도쿄 소재 강원도 본부(강병직 본부장)의 도움을 얻어, 추도비 건립 2주년을 맞은 2022326, 2명의 재일조선인과 6명의 일본인 활동가들에게 전달됐습니다. 강릉시의 감사패를 받게 되신 분들은 다음의 8분입니다.

 

 

정홍영(1929-2000, 향토역사가), 콘도 도미오(1950-2020, 교사, 시민활동가), 김례곤(사업가), 호리우치 미노루(재일조선인사 연구가), 히다 유이치(고베학생청년센터 대표), 타마노 세이조(조각가), 아다치 타이쿄와 아다치 치쿄(만푸쿠지 주지).

 

타마세 만푸쿠지 음악회는 한국의 전통악기 연주로 구성되는데, 이수철(아쟁, 생황), 김현숙(대금), 강혜성(가야금), 박인호(대금) 4명의 연주자들이 출연하게 됩니다. 그밖에도 박정환 선생님은 가창으로, 서향숙 선생님도 오카리나 연주로 참여하실 예정입니다.

 

위령제사와 추도비 건립, 감사패 증정과 한일 양국 시민들의 방문과 답방 등으로 다카라즈카와 강릉, 효고현과 강원도 사이의 교류가 빈번해지고, 구체적인 협력 방안도 강구되고 있는 한편, 다른 조선인 희생자들의 연고도 추가로 조사 중에 있습니다.

 

 

윤길문, 오이근씨의 고향은 경상남도 고성, 남익삼씨의 고향은 경상남도 통영으로 조사되었고, 문헌 확인 작업이 진행 중이지만, 90년이 지난 일이어서 조사와 확인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한편, 한일 <팀아이><무용신모임>20203월부터 재일조선학교의 무용부에 무용신을 전달해 왔는데, 20228월까지 6차례에 걸쳐 재일조선학교의 모든 무용부 학생 약 1,100명에게 무용신을 전달한 바 있습니다. <팀아이><무용신모임>은 앞으로도 매년 5월 무용부 신입생들에게 무용신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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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阪丸福三和神戸上島西村コーヒーをおすすめしたらそれが日本初期のカフェなのかとかれたがいらっしゃいましたがいます上島1933丸福1934開業したそうなのでそんながしたようですが検索してみるとわかるように日本のコーヒー延元いです

 

記録されている日本最古のコーヒー専門店鄭永慶(ていえいけい, 1858-1894)1888423東京·上野西黒門町開業した可否茶館というのが定説です鄭永慶中国びるとけて日本げた鄭成功(ていせいこう, 1624-1662)子孫アメリカのイェール教育けた通訳士英語教師事業家として活動した人物です

 

 

コーヒー(coffee)またはカフェ(cafe)漢字可否茶きましたが、「かいさんだりカツヒとも発音したという記録もあります意味めるかどうか曖昧なおであったことをると西洋新聞物んでその成功自信がなかったことが推察できそのような商品名前をつけるために苦心した形跡もうかがえます

 

<可否茶館>開業5年後1895経営難廃業創業主鄭永慶自殺ったのをますと当時はコーヒーがめそうにない評価されていたようです。 「可否茶館開業した場所つまり今日東京都台東区上野一丁目可否茶館跡地という名札てられています

 

 

1910にはベルギー公使館のシェフだった奥田駒蔵1882-1925数年間のヨーロッパ生活えた東京·日本橋小網町にコーヒー専門店メイゾン鴻之巣開業しましたメイゾン(maison)(House)というフランス、「ガンノスという意味ですが文学家芸術家まるコーヒー専門店でした

 

191112日本1世代ブラジル移民だった水野龍(1859-1951)東京銀座6丁目にオープンしたカフェパウリスタ上島丸福より20年以上進んだコーヒーです。 「パウリスタとはポルトガルサンパウロという意味ですが水野龍がブラジルにんでいたところがサンパウロだったことからけられた名前でした

 

 

1909ブラジルのコーヒー価格暴落すると水野龍はブラジル政府から年間コーヒー1千俵=500トン無償提供され日本普及、「カフェパウリスタ開業しました<カフェパウリスタ>名古屋神戸横須賀などと中国上海にも支店した日本初のフランチャイズコーヒーショップとして盛業中でしたが1923関東大震災破壊されコーヒー無償提供中断されるとカフェは廃業事業をコーヒーの輸入やコーヒーのローストに縮小しました

 

1970銀座8カフェパウリスタ開店しましたが1978にジョン·レノンと小野洋子がここをれたため世界的名前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

 

 

1910年以前にも東京カフェがありました旧制一高(東京大学前身)本郷カツフエがあり早稲田大学にも<早稲田カツフエ>がありましたしかしこれらのカフェはコーヒーではなく洋食屋だったそうです

 

そして1911にはパウリスタ以外にもカフェプランタン(3)カフェライオン(8)開業しましたがパウリスタはコーヒー専門店でしたがプランタンとライオンは美人女級接待けながらおむところでしたこのからカフェとキッサテンが区別されめましたがカフェは女給酒場キッサテンはコーヒー専門店でした

 

 

その大正民主主義時代(1912~1926)蔓延したエログロナンセンスの風潮とともに少女歌劇団各種雑誌全盛時代まりそれとともにカフェという享楽産業やキッサテンというのコーヒー産業成長し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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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의 마루후쿠와 산와, 고베의 우에시마와 니시무라 커피점을 추천 드렸더니, 그게 일본의 초기 카페들인가고 물어오신 분이 계셨습니다만, 아닙니다. 우에시마가 1933, 마루후쿠가 1934년에 개업했다고 하니 그런 생각이 드셨던 것 같은데, 조금만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본 커피점은 연원이 더 오랩니다.

 

기록에 나타난 일본 최고(最古)의 커피 전문점은 테이 에이케이(鄭永慶, 1858-1894)1888423일 도쿄 우에노 니시쿠로몬초(西黒門町)에 개업한 <가히사칸(可否茶館)>이라는 게 정설입니다. 테이 에이케이는 중국 명나라가 망하자 청나라를 피해 일본으로 도망한 테이 세이코(鄭成功, 1624-1662)의 후손으로, 미국 예일 교육을 받은 후 통역사와 영어교사, 사업가로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커피(coffee) 혹은 카페(cafe)를 간지(漢字)가히차(可否茶)’라고 썼는데, ‘가히사(かいさ)’라고 읽거나 가츠히(カツヒ)’라고도 발음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뜻도 먹을 만한지() 그렇지 않은지() 애매한 차()”이었던 것을 보면, 서양 신문물을 들여오면서 그 성공 여부에 자신을 갖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고, 그런 상품의 이름을 짓기 위해 고심한 흔적도 엿보입니다.

 

<가히사칸>은 개업 5년만인 1895년에 경영난으로 폐업했고, 창업주 테이 에이케이도 자살을 기도했던 것을 보면 당시에는 커피가 먹을 만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모양입니다. <가히사칸>이 개업했던 자리, 즉 오늘날의 도쿄 다이토구 우에노 1초메에 <가히사칸 유적지>라는 명패가 세워져 있습니다.

 

 

1910년에는 벨기에 공사관의 요리사였던 오쿠다 고마조(奥田駒蔵, 1882-1925)가 수년간의 유럽 생활을 마친 후, 도쿄 니혼바시(日本橋) 고아미쵸(小網町)에 커피전문점 <메이종 간노스(メイゾン鴻之巣)>를 개업했습니다. 메이종(maison)(House)’이라는 프랑스 말이고 간노스기러기 둥지라는 뜻인데, 젊은 문학가와 예술인들이 모이는 커피전문점이었습니다.

 

191112월 일본 1세대 브라질 이민자였던 미즈노 류(水野龍, 1859-1951)가 도쿄 긴자6가에 문을 연 <카페 파울리스타(カフェーパウリスタ)>도 우에시마나 마루후쿠보다 20년 이상 앞선 커피점입니다. ‘파울리스타란 포루투갈 말로 상파울로 사람이라는 뜻인데, 미즈노 류가 브라질에서 살았던 곳이 상파울로였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었습니다.

 

 

1909년 브라질의 커피가격이 폭락하자 미즈노 류는 브라질 정부로부터 커피원두 1천섬(=5백톤)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일본에 보급하면서 <카페 파울리스타>를 개업했습니다. <카페 파울리스타>는 나고야와 고베, 요코스카 등과 중국 상하이에도 지점을 내었던 일본 최초의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성업 중이었으나,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업소들이 파괴되고 커피 무상 제공이 중단되자 카페는 폐업하고 사업을 커피 수입과 원두 로스팅으로 축소했습니다.

 

1970년 긴자8가에 <카페 파울리스타>가 다시 개점되었는데, 1978년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이곳을 방문하는 바람에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1910년 이전에도 도쿄에 다른 카페가 있었습니다. 구제일고(旧制一高, 도쿄대학교 전신) 앞에 <혼고 카츠후에(本郷カツフエ>가 있었고, 와세다대학교 앞에도 <와세다 카츠후에(早稲田カツフ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카페들은 커피점이 아니라 양식당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11년에는 파울리스타 말고도 <카페 플란탄(カフェー・プランタン, 3)><카페 라이온(カフェー・ライオン, 8)>이 개업했는데, 파울리스타는 커피전문점이었으나 플란탄과 라이온은 미인 여급의 시중을 받으며 술 마시는 곳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카페와 깃사텐(喫茶店)이 구별되기 시작했는데, 카페는 여급 주점이었고, 깃사텐은 커피 전문점이었습니다.

 

 

이후 다이쇼 민주주의 시대(1912~1926)에 만연한 에로그로난센스의 풍조와 함께 소녀가극단과 각종 잡지의 전성시대가 시작되었고, 그와 함께 카페라는 이름의 향락산업과 깃사텐이라는 이름의 커피산업도 덩달아 성장했던 것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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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7, 화요일, <무용신 포럼>으로 예정된 날입니다. 박인호 선생의 발표와 이성섭 선생의 토론이 있게 됩니다. 주제는 사법 개혁인데, 현 정부의 구성과 행정 방향을 볼 때 그 어느 때보다 사법개혁의 필요성이 절실히 느껴지는 시점입니다.

 

이같은 시기에 한국과 일본, 유럽과 미국의 형사사법 제도를 열심히 비교 검토해 오신 박인호 선생은 사법개혁의 필요성 뿐 아니라 그 타당성과 방법론까지 천착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인호 선생이 뿌리는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가 맺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첫 번째 <무용신 포럼>에서는 제가 한달 반의 일본 취재 결과를 보고 드렸습니다. 3년 만에 둘러본 조선학교, 특히 무용부의 현황과 무용경연대회를 참관한 소감을 말씀드렸습니다.

 

그에 더해 <다카라즈카 조선인추도비>가 건립되고, 강원도와 강릉시가 건립에 수고하신 분들에게 감사패를 전하게 된 과정, 그리고 이후 현지 상황도 간략히나마 보고를 드렸습니다.

 

<무용신 포럼>은 그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무용신> 회원이시라면 무슨 주제이든 자신의 생각과 조사한 결과를 정리해서 발표할 수 있는 장을 만든 것이지요. 그래서 2회 포럼에서는 박인호 선생의 사법개혁이 포럼 주제로 선택된 것이지요.

 

2월에 있을 세 번째 포럼에서는 이원영 선생께서 자연치유에 대한 발표와 토론을 이끌어 주실 예정입니다. 한국과 미주에서 오랜 기자생활을 하셨고, 그 바쁜 와중에 한의학에 조예를 가지시게 된 것은 우리의 웰빙과 웰다잉을 위해 건강한 생활습관과 질병에 대한 자연치유 접근이 필요하다고 느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밖에도 <무용신> 회원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간과 장소, 발표 방식과 매체 등을 잘 준비해서, 메시지가 잘 전달되는 노력하겠습니다.

 

포럼이라고 해서 항상 딱딱하고 재미없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우리가 다같이 알면 좋을 주제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떤 주제와 어떤 방법이라도 구사해 볼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많은 신청과 참여를 부탁드려요.

 

오늘(1/17) 포럼 후에는 방문단 예비모임이 이어집니다만, 사실 준비는 이미 거의 다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실무를 맡아주신 준비위원들께서 워낙 꼼꼼하고 깔끔하게 자기 맡은 일을 잘 준비해 주시는 바람에, 우리의 출발 준비는 거의 완벽에 가깝습니다.

 

특히 일본 <팀아이>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한국의 준비사항이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이제 저희는 가기만 하면 될 정도로 잘 예비된 방문이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따라서 오늘의 예비모임은 서로 만나 인사를 나누고, 궁금한 점을 의논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은 또 이번 방문단에 적극 참여해 주실뿐 아니라 준비 실무에도 진짜 애써 주신 <대륙학교> 회원 분들도 참여하시게 되며, <무용신> 회원들에게 <대륙학교>의 연혁과 활동,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 등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부탁했습니다. 이 순서는 <희망래일>의 상임이사이시자 <대륙학교>의 교감선생님이신 황광석 선생께서 담당해 주실 것입니다.

 

끝으로, <무용신>의 올해 목표와 계획에 대해서도 발표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은 제가 말씀드리게 되는데,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올해(2023) <무용신>(1) 재일조선학교의 무용부 신입생 약 1백명에게 무용신 선물을 보내고, (2) 연해주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민족학교를 지원하는 후원행사도 계속 하고, (3) 상반기의 일본방문에 이어 하반기에는 연해주 방문단을 조직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4) 이 모든 행사를 통해 <무용신> 후원회원이 3백명에 이르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고 합니다.

 

이런 활동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1) 국내 유관단체 및 해외동포와 연대하면서 (2) 각지의 민족학교와 민족교육을 지원하고, 특히 (3) 민족문화와 예술 활동을 후원하면서, (4) 한민족 교류와 협력, 그리고 궁극적으로 통일운동에 기여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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はコーヒーがきですコーヒーにする繊細味覚つマニアではありませんただその一般的りとそしてコーヒーを時間きなだけです一人でも何人でもインスタントコーヒーでもグアメイドリップコーヒーでもどれもきです

 

そのためあちこちりながらいという食堂さなくてもカフェはたまにんでったりします雰囲気ですからずしも専門店でなくてもいいですし古典的でも現代的でもコーヒーさんの室内ったらはただのいいコーヒーショップだといます

 

日本にもよくったので当然いくつかのコーヒーショップをしてみましたったことはかなりありますが日本訪問団大阪宿りましたので古典的雰囲気のコーヒーショップ2はぜひご紹介したいといます

 

 

つはたちの宿からもとても<丸福珈琲店>です珈琲店はコーヒーショップを昔風日本語ですそれよりも喫茶店ばれていましたとは1930年代もっととは19世紀末から1920年代までです

 

丸福珈琲店日本全土29あるそうですが大阪中央区千日前にあるのが1934めて開業した本店です大阪ファイブホテルからは2.5キロれていて電車でわずか2鶴橋-谷町9丁目-日本橋だけくとB26出口のすぐにあります(リトルプリンスの小惑星B612間違えないでください^^)

 

 

千日前丸福本店ですがファイブホテルからもっと上本町にも丸福珈琲店がもうつありますホテルからはいても10分以内距離ですここはまだったことがないので今回行ってみたいです

 

丸福コーヒーががいいかはからげにくいですネイバーやグーグルで検索してみるとレビューがいといますので参考にしてみてくださいはコーヒーの素晴らしさはよくわかりませんが昔風雰囲気かった記憶ですコーヒー以外にも各種ペストリーやデザートもいいときましたがはコーヒー以外のものをべたことはありませんそしてかなりいです^^

 

丸福珈琲店薔薇(2010)という小説登場してもっと有名になったそうです田辺聖子短編つで年下男性5年間恋愛している女性れを準備する過程をとてもよくいた作品だそうです日本語ではバラノアメとびます

 

 

きなのコーヒーショップは上島珈琲店です上島コーヒー本店神戸市西宮市南越木岩町にありますよく上島珈琲店苦楽園本店ばれています

 

上島丸福より1年前1933開店した珈琲店です支店やフランチャイズすのに非常しい丸福とはなり上島珈琲店はいたるところにあります

 

本店とフランチャイズのコーヒーのうかどうかはよく区別できませんでしたですからまあぜひ西宮までかれる必要はありませんし大阪市内のいろいろなところに点在する上島珈琲店れてみてください焙煎したいたコーヒーをったりします

 

 

そのったことのある現代的なコーヒーショップには神戸西村(にしむら)コーヒーと大阪三和(サンワ)コーヒーワークスがあります

 

これらのお丸福上島のように歴史くはありませんがコーヒーのいことでかなり評判場所です三和コーヒーワークスはさなおですが西村コーヒー7ほどの建物全体がコーヒーショップの大型店です

 

 

西村コーヒーくなら2をおめしますコーヒーのですが写真るのに最適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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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커피를 좋아합니다. 커피에 대한 섬세한 미각을 가진 매니아는 아닙니다. 그저 그 일반적인 향과 맛, 그리고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좋을 뿐입니다. 혼자건 여럿이서건, 봉지커피이건 구어메이 드립커피이건 다 좋아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여기저기 다니면서 식당은 찾아다니지 않아도 카페는 더러 골라 다니곤 합니다. 분위기를 타는 편이니까 꼭 전문점이 아니어도 좋고, 고전적이든 현대적이든 커피집 실내가 마음에 들면 저는 그냥 좋은 커피숍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도 자주 갔으므로 당연히 몇몇 커피가게를 시도해 봤습니다. 다녀본 데는 꽤 많지만, 이번 우리 방문단이 오사카에 숙소를 잡았으므로, 고전적인 분위기의 커피가게 두 군데는 꼭 소개드려 볼까 합니다.

 

 

하나는 우리 숙소에서도 아주 가까운 <마루후쿠(丸福) 고히텐>입니다. 고히텐(珈琲店)은 커피가게를 옛날식으로 부르는 일본말입니다. 그보다 더 옛날에는 기사텐(喫茶店)이라고 부르기도 했었습니다. 옛날이란 1930년대를 가리키고, 더 옛날이란 19세기말에서 1920년대까지입니다.

 

마루후쿠 커피점은 일본 전역에 29개가 있다고 합니다만, 오사카 주오구(中央区)의 센니치마에(千日前)에 있는 것이 1934년에 처음 개업한 본점입니다. 오사카 파이브 호텔에서는 2.5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전철역으로 불과 2(쓰루하시-다니마치9초메-니폰바시)만 가면 B26 출구 바로 앞에 있습니다. (어린왕자의 소행성 B612와 헷갈리지 마시기 바래요.^^)

 

 

센니치마에의 마루후쿠가 본점이지만, 파이브 호텔에서 더 가까운 우에혼마치(上本町)에도 마루후쿠 커피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호텔에서는 걸어가도 10분 이내의 거리입니다. 여기는 제가 아직 가보지 못했고, 이번에 가보고 싶습니다.

 

마루후쿠 커피가 뭐가 좋은 지는 제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네이버나 구글에서 검색해 보시면 후기들이 많을테니까 참고해 보시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커피맛의 탁월함은 잘 모르겠는데, 옛날식 분위기가 좋았던 기억입니다. 커피 말고도 각종 패스트리와 디저트도 좋다고들 하던데, 저는 커피 외에 다른 걸 먹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비쌉니다.^^

 

그리고 이 마루후쿠 커피점은 <장미의 비(薔薇. 2010)>라는 소설에 등장해서 더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타나베 세이코(田辺聖子)의 대표단편 중의 하나인데, 연하남과 5년째 연애 중인 여성이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을 아주 잘 그린 작품이라고 합니다. 일본말로는 <바라노아메(バラノアメ)>라고 부릅니다.

 

 

제가 나름 좋아하는 커피가게는 <우에시마(上島) 고히텐>입니다. 우에시마 커피점의 본점은 고베시에 가까운 니시노미아(西宮)시의 미나미고시키이와초(南越木岩町)에 있습니다. 흔히 <우에시마 고히텐, 쿠라쿠엔 본점(苦楽園本店)>이라고 불립니다.

 

우에시마 커피점은 마루후쿠보다 1933년에 개점한 커피가게입니다. 그러나 지점이나 프랜차이즈점을 내는 데에 매우 엄격한 마루후쿠와는 달리 우에시마 커피점은 도처에 있습니다.

 

저는 본점의 커피와 프랜차이점의 커피 맛이 다른 지는 잘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뭐, 꼭 니시노미아까지 가보실 필요는 없고, 오사카 시내 여러 곳에 산재한 우에시마 고히텐을 방문해 보시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볶은 콩이나 갈은 커피를 팔기도 합니다.

 

 

그밖에 제가 가본 적이 있는 현대적인 커피가게로는 고베의 <니시무라(にしむら) 커피>와 오사카의 <산와 커피웍스(サンワコーヒーワークス)>가 있습니다.

 

이 가게들은 마루후쿠나 우에시마처럼 연원이 오래지는 않지만, 커피 맛이 좋기로 꽤 소문이 난 곳입니다. 산와 커피웍스는 작은 가게지만, 니시무라 커피점은 7층쯤 되는 건물 전체가 커피가게인 대형가게입니다.

 

 

니시무라 커피점에 가신다면 2층을 권합니다. 커피 맛도 맛이지만 사진 찍기 아주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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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リ學校舞踊靴]1次日本訪問団(127-30)大阪朝鮮中高級学校70周年記念公演観覧尼崎朝鮮初中級学校訪問することになります

 

在日朝鮮学校名前しずつくなっていますがこれは初級/中級/高級単独学校初中級中高級あるいは初中高級えるからです学校がどんどん統廃合されるからです6-70年代統廃合学校経営効率性のためだったとすれば90年代以降統廃合生徒数減少財政難のためだといいます

 

えば1946設立された尼崎朝連初等學院大島朝鮮初級1967)、尼崎朝鮮中級1975)、立花朝鮮初級1976)、阪神朝鮮初級2001)、尼崎東朝鮮初級2008學校統合今日尼崎朝鮮初級学校となりましたことし2023には境界えて伊丹朝鮮初級学校まで統合する計画だということです

 

 

大阪朝鮮高級学校2018東大阪朝鮮中級学校併合現在大阪朝鮮中高級学校となりました東大阪中級学校19619西金里中学校過密化解消のために創立されましたが1994西大阪初中級学校中級部1999奈良朝鮮初中級学校中級部統合した今回彼自身大阪朝高併合されたものです

 

朝鮮学校設立統廃合日本行政単位都道府県わせて設立された学校法人朝鮮学園めるようですそこで大阪朝鮮中高級学校統合学校法人大阪朝鮮学園伊丹朝鮮初級学校尼崎朝鮮中高級学校併合学校法人兵庫朝鮮学園決定しました

 

学校法人大阪朝鮮学園2022年現在大阪朝鮮中高級学校9つの朝鮮学校管掌兵庫朝鮮学園神戸朝鮮高級学校6つの朝鮮学校管掌しますこれらの朝鮮学院学校敷地建物管理しているようですこれと関連して大阪兵庫朝鮮学院日本のメディアで報道されたことがあります

 

 

201588日付産経新聞には大阪市朝鮮学校市有地5千平方メートルを売却したという記事掲載されました大阪市大阪地裁仲裁のもと中大阪朝鮮初級学校敷地大阪朝鮮学院売却することで合意したという内容です

 

この記事はまた中大阪朝鮮初級学校学校敷地半世紀にわたり無償占有してきており大阪市がこれを返還するため訴訟こしたが大阪地裁朝鮮学院市有地売却するよう仲裁したと説明売却額相場半分だと推定しました

 

また2016525日付産経新聞市有地賃貸している尼崎朝鮮学校賃貸料年間28万円だったが尼崎市兵庫朝鮮学院賃貸料280万円げるというたな賃貸借契約締結したとじましたこの記事はまたこの市有地標準賃貸料年間約2600万円だが今後10年間その101水準維持される見通えました

 

 

中大阪朝鮮初級学校市有地50年間無償使用相場半額れたことや尼崎朝鮮学校敷地賃貸料相場1001から101げられたというのは異例のことです日本右翼はこれを在日特権非難しています

 

日本各地方自治体朝鮮学校譲歩惠澤提供してきたのは事実のようでそれにはさまざまな理由があるでしょう尼崎市政府突然標準賃貸料要求すれば学校経営しいので協議結果今回金額まったとしました市政部公務員在日朝鮮人日本経験した歴史的苦難考慮するという意味理解されますそしてこうした惠澤たのには学校法人朝鮮学園交渉力きな役割たしたはずです

 

しかしこれらの譲歩惠澤終息していきます10年後尼崎朝鮮中高級学校賃貸料きくがるでしょうし高校無償化対象から朝鮮高級学校日本中央政府政策撤回されるのはしいものとみられます朝鮮学校危機四方から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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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무용신]의 제1차 일본방문단(127-30)은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의 70주년 기념공연을 관람하고, 아마가사키조선초중급학교도 방문하게 됩니다.

 

재일조선학교의 이름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는데, 이는 초급/중급/고급의 단독 학교가 줄고, 초중급, 중고급, 혹은 초중고급학교가 늘기 때문입니다. 학교들이 자꾸 통폐합되기 때문입니다. 6-70년대의 통폐합이 학교 경영의 효율성을 위해서였다면, 90년대 이후의 통폐합은 학생 수 감소와 재정난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1946년에 설립된 아마가사키 조련초등학원은 오지마조선초급(1967), 아마가사키조선중급(1975), 다치바나조선초급(1976), 한신조선초급(2001), 아마가사키히가시조선초급(2008)을 차례로 통합하여 오늘날의 아마가사키 조선초중급학교가 되었습니다. 올해(2023)에는 시의 경계를 넘어 이타미 조선초급학교까지 통합하게 될 계획이라고 합니다.

 

 

오사카조선고급학교도 2018년 히가시오사카 조선중급학교를 병합해 지금의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가 되었습니다. 히가시오사카 중급학교는 19619월 서금리중학교의 과밀화 해소를 위해 창립되었는데, 1994년 니시오사카 초중급학교의 중급부, 1999년 나라조선초중급학교의 중급부를 통합한 다음, 이번에는 그 자신이 오사카조고에 병합된 것입니다.

 

조선학교의 설립과 통폐합은 일본의 행정단위(도도부현)에 맞춰 설립된 학교법인 조선학원이 결정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의 통합은 학교법인 오사카조선학원, 이타미조선초급학교의 아마가사키조선중고급학교 병합은 학교법인 효고조선학원이 결정했습니다.

 

학교법인 오사카조선학원은 2022년 현재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를 포함해 9개 조선학교를 관장하며, 효고조선학원은 고베조선고급학교를 포함 6개 조선학교를 관장합니다. 이 조선학원들은 학교 부지와 건물도 관리하는 듯합니다. 이와 관련 오사카와 효고의 조선학원이 일본 언론에 보도된 일이 있습니다.

 

 

201588일자 산케이신문에는 오사카시가 조선학교에 시유지 5천평방미터를 매각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오사카 시가 오사카 지방법원의 중재 아래 나카오사카 조선초급학교의 부지를 오사카 조선학원에 매각하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기사는 또, 나카오사카 조선초급학교가 학교 부지를 반세기동안 무상 점유해 왔으며, 오사카시가 이를 반환받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으나, 오사카 지방법원이 시가 조선학원에 시유지를 매각하도록 중재했다고 설명하고, 매각액은 시세의 절반이라고 추정했습니다.

 

2016525일자 산케이신문은 시유지를 임대하고 있는 아마가사키 조선학교의 임대료는 연간 28만엔이었으나 아마가사키 시와 효고 조선학원은 임대료를 “280만엔으로 인상하는 새로운 임대차 계약을 체결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기사는 또 이 시유지의 표준임대료는 연간 약 2600만엔이지만 향후 10년간 그 10분의1 수준으로 유지될 전망이라고 전했습니다.

 

 

나카오사카 조선초급학교가 시유지를 50년 동안 무상으로 사용하다가 시세의 절반 값으로 매입한 일이나 아마가사키 조선학교의 부지 임대료가 시세의 100분의1에서 10분의1로 인상됐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일본의 우익은 이를 자이니치특권(在日特權)”이라고 비난합니다.

 

일본의 각 지방정부가 조선학교에게 양보와 혜택을 제공해 온 것은 사실인 듯하고, 거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아마가사키 시정부는 "갑자기 표준임대료를 요구하면 학교 경영이 어렵기 때문에 협의 결과 이번 금액으로 결정됐다"고 했습니다. 시정부의 공무원들도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에서 겪은 역사적 경험을 고려한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혜택을 얻어낸 데에는 학교법인 조선학원의 협상력도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혜택은 종식되어 갑니다. 10년 후 아마가사키 조선중고급학교의 임대료는 다시 크게 오를 것이고, 고교무상화 대상에서 조선고급학교를 제외한 일본 중앙정부의 정책도 철회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학교의 위기는 사방에서 닥쳐오는 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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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解放された直後兵庫県尼崎でも国語講習所かれました在日朝鮮人雑誌イオ(201511月号)によると1946大庄浜田大島武庫常松立花園田長州8地域3年制初等學院朝連によって設立されました統廃合過程初等學院8だったことからなくともその倍数以上国語講習所があったことが推察できます

 

 

1946424生徒350教員14開校した大庄初等學院今日尼崎朝鮮初中級学校前身です194885改編されましたが大庄初等學院本校守部園田立花大島初等學院分校統合されました

 

朝連大庄初等學院日本植民地時代末期強制連行されてきた朝鮮人宿舎として使用していた古河電気工業会社校舎として使用しました

 

 

194910連合軍最高司令部GHQ:General Headquarters日本政府<朝鮮人学校措置方針>発表朝鮮人義務教育日本公立学校実施すべきであり無認可朝鮮人学校めないことを決定兵庫県内朝鮮人学校40閉鎖命令しました

 

学校閉鎖とともに朝鮮人生徒たちは各日本人小学校強制的てられましたが朝鮮人たちはこれにしく抗議しましたらは既存学校寝食にしながら当局学校強制受付一方既存朝鮮人学校日本公立学校分校指定するよう要求しました

 

 

市当局のガイドラインに違反しないために教員たちは授業中止しましたが高学年生徒たちが低学年生徒たちをえるやり授業けながら学校座みをけました

 

日本人学校武庫小学校仮収容された283朝鮮人学生素直授業け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教室りなくて2部制授業を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がえた学生たちで日本人教師たちも困難経験しました

 

 

1949122問題爆発しました日本人教員から日本語授業けていた朝鮮人学生たちは運動場けつけ、「日本語からない朝鮮語えろ」「日本語はもうわった」「たちの先生をなぜいたのか」「日本式教育けないなどのびながらスクラムをんで運動場独立歌のような提唱したりもしました

 

2日後124市当局朝鮮人保護者代表会談かれ朝鮮人側要求大幅れられ(1)市長責任守部朝鮮人学校分校開設(2)分校では朝鮮人教員採用することで合意しました

 

 

4.24阪神教育闘争-民族教育った々の記録(1988)によりますと朝鮮学校日本公立学校分校認可たのはめてでその後尼崎先例東京神奈川大阪愛知などでも朝鮮学校日本学校分校として設立するえました

 

 

1950年代後半帰国事業=北送事業活発になり、「朝鮮語んで祖国ろうという標語生徒数急速えると大庄分校には<尼崎朝鮮中級学校>併設されました中級学校初年度生徒48教員6でした尼崎朝鮮中級学校1958新校舎工事開始195932階建木造建物新校舎完成しました

 

 

一方分校形態朝鮮初等學校1965から自主学校移転しようという運動めました日本市民保守層支持1965718大庄大島守部各分校統合され西立花町所在市有地新校舎建設196641から大島朝鮮初級学校発足させました

 

その19674には幼稚班(教員2園児50)新設され同年10には尼崎朝鮮中級学校統合今日尼崎朝鮮初中級学校と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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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해방된 직후,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尼崎)에서도 <국어강습소>가 열렸습니다. 재일조선인 잡지 <이어(201511월호)>에 따르면 1946년 오쇼(大庄)와 하마다(浜田), 오시마(大島)와 무코(武庫), 쓰네마츠(常松)와 다치바나(立花), 소노다(園田)와 나가슈(長州) 등의 8개 지역에 3년제 초등학원이 조련에 의해 설립됐습니다. 통폐합 과정을 겪은 초등학원이 8개였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 배수 이상의 국어강습소가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46424일 학생 350명과 교원 14명으로 개교한 오쇼초등학원은 오늘날의 아마가사키 조선초중급학교의 전신입니다. 19488개교가 다시 5개교로 개편되었는데, 오쇼초등학원을 본교로, 모리베와 소노타, 다치바나와 오시마의 초등학원은 분교로 통합되었습니다.

 

조련 오쇼초등학원은 일제강점 말기에 강제연행되어 온 조선인들이 숙소로 사용했던 후루카와 전기공업회사의 기숙사를 사들여 교사로 사용했습니다.

 

 

194910월 연합군최고사령부(GHQ: General Headquarters)와 일본정부는 <조선인학교 조치방침>을 발표하고 조선인의 의무교육은 일본의 공립학교에서 실시해야 하며, 무인가 조선인학교는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효고현 내의 조선인학교 40개교에 폐쇄명령을 내렸습니다.

 

학교 폐쇄와 함께 조선인 학생들은 각 일본인 소학교에 강제 배정되었는데, 조선인들은 이에 격렬히 항의했습니다. 이들은 기존 학교에서 숙식을 같이하면서 당국의 학교 강제 접수를 막아내는 한편, 기존의 조선인 학교를 일본 공립학교의 분교로 지정해 주도록 요구했습니다.

 

 

시당국의 가이드라인을 지키기 위해 교원들은 수업을 중지했지만 고학년 학생들이 저학년 학생들을 가르치는 식으로 수업을 계속하면서 학교 농성을 이어갔습니다.

 

일본인 학교인 무코 소학교로 가수용된 283명의 조선인 학생들도 순순히 수업을 받지 못했습니다. 교실이 부족해 2부제 수업을 해야 했는데, 갑자기 늘어난 학생들로 일본인 교사들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49122일 문제가 폭발했습니다. 일본인 교원으로부터 일본어로 수업을 받던 조선인 학생들은 운동장으로 몰려 나가서 일본어는 모른다, 조선말로 가르쳐라,” “일본어는 이제 끝났다,” “우리 선생님을 왜 따돌렸나,” “일본식 교육은 받지 않겠다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달렸고, 독립가와 같은 노래를 제창하기도 했습니다.

 

이틀 후인 124일 시당국과 조선인학부모대표 사이에 회담이 열렸고, 조선인 측의 요구가 대폭 수용되어 (1) 시장 책임아래 모리베(守部) 조선인학교에 분교를 개설하며, (2) 분교에서는 조선인 교원을 채용하기로 합의했습니다.

 

 

<4.24 한신교육투쟁-민족교육을 지킨 사람들의 기록(1988)>에 따르면 조선학교가 일본 공립학교의 분교 인가를 얻어낸 것은 처음이었고, 이후 아마가사키의 선례를 따라 도쿄와 카나자와, 오사카와 아이치 등에서도 조선학교를 일본학교의 분교로 설립하는 예가 늘어났습니다.

 

 

1950년대 후반 귀국사업(=북송사업)이 활발해지면서 조선말 배워서 조국으로 돌아가자는 표어 아래 학생 수가 급속이 늘자, 오쇼 분교에는 <아마가사키 조선중급학교>가 병설되었습니다. 중급학교의 첫해 학생은 48명 교원은 6명이었습니다. 아마가사키 조선중급학교는 1958년 신교사 공사를 시작, 19593월에 2층 목조건물의 신교사를 완공했습니다.

 

 

한편 분교 형태의 조선초등학교는 1965년부터 자주학교로 이전하려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일본 시민과 보수층의 지지까지 얻어가며, 1965718, 오쇼와 오시마, 모리베의 각 분교가 통합되어 니시다치바나초 소재 시유지에 신교사를 건립하고, 196641일부터 <오시마 조선초급학교>를 발족시켰습니다.

 

이후 19674월에는 유치반(교원 2, 원아 50)이 신설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아마가사키 조선중급학교와 통합하여, 오늘날의 아마가사키 조선초중급학교가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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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学校舞踊神] 1次日本訪問団127~30日大阪宝塚訪問します昨年11日本市民団体<チームアイ>先生たちの韓国訪問する答礼訪問性格ですが29(日曜日)には<大阪朝鮮中高級学校開校70周年記念公演>観覧することになります

 

大阪朝高朝鮮学校廃止令克服朝鮮学校再建していた時期大阪市生野区田島開校しました田島にはもともと19451017国語講習所てられ19464には<朝連但馬造船小学校>設立された場所です

 

 

これと1947410には生野区東桃谷町生野ウリ中等学院開校610には北生野町移転<大阪朝鮮中学校>となりました大阪朝鮮中学校開校当時生徒数はすでに220だったということです

 

また1948120には東成区西今里町東成朝鮮学園小学校中学校設立されました194810朝鮮学校閉鎖令田島小学校大阪朝鮮中学校東成小学校中学校がすべて閉鎖されました

 

朝鮮学校強制閉鎖された朝鮮人生徒學父母そして朝連ない抵抗要求された大阪市195071大阪市立本庄中学校分校設立朝鮮人中学校とすることにしましたこれがよく<ソグムリ中学校>ばれていた<公立西今里中学校>です<西今里中学校>東成学園校舎をそのまま使用しました

 

 

一方廃校令により校舎われた大阪朝鮮中学校19491八尾市萱振移転大阪東大阪朝鮮人中学生卒業して進学する場所けるため1952410田島朝鮮小学校校舎臨時使用大阪朝鮮高等学校開校しました開校当時生徒新入生39教員講師16だったということです

 

その大阪朝高1957810河内市(=現在東大阪市玉串元町)1961西今里中学校閉鎖され生徒たちが大阪中学校中大阪中学校転校その卒業生たちは大阪朝鮮高級学校進学しました大阪朝高1973現在地東大阪市菱江校舎新築移転しました

 

 

このように大阪朝鮮高等学校大阪市生野区八尾市東大阪市などに散在していた朝鮮人国語講習所小学校および中学校設立廃校再設立渦中関西中心高等学校つに進化していったのです

 

今日日本てられている朝鮮高等学校全部10あります1948東京朝鮮中高級学校1946年中級部1948年高級部最初にオープンし1952410大阪朝鮮中高級学校それとほぼ時期神戸朝鮮中高級学校1949年中級部1952年兵庫朝鮮高等学校併設1955年神戸朝鮮中高級学校改称きました

 

 

195341には名古屋愛知朝鮮中高級学校(19484月中部朝鮮学校19534月中部朝鮮中高級学校1956年現在名前変更)1954には神奈川朝鮮中高級学校(1951年神奈川朝鮮中学校開校1954年高級部併設後現名改称)1955には京都朝鮮中高級学校(1946年七条朝連国民学院1947年京都西津初中等学校1953年京都朝鮮中高級学校改称)茨木朝鮮初中高級学校(1953年中学校開校55年高級部併設現在名前改称)設立されました

 

 

いて19564には九州朝鮮中高級学校1960には広島朝中高級学校(1945年大竹国語講習所1946年朝連大竹初等學院195399日広島朝鮮中学校創立1960年高級部新設して現在名前改称)開設されくは1982北海道朝鮮初中級学校1961410日北海道朝鮮初中級学校1982年高級部併設高等学校課程新設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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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무용신] 1차 일본 방문단은 127-30일 오사카와 다카라즈카를 방문합니다. 작년 11월 일본시민단체 <팀아이> 선생님들의 한국 방문에 대한 답방의 성격입니다만, 29(일요일)에는 <오사카조선학교의 개교 70주년 기념공연>도 관람하게 됩니다.

 

오사카조고는 조선학교 폐지령을 극복하고 조선학교를 재건하던 시기, 오사카시 이쿠노(生野)구 타지마(田島)에서 개교했습니다. 타지마에는 원래 19451017일 국어강습소가 세워졌고, 19464월에는 <조련 타지마 조선소학교>가 설립되었던 곳입니다.

 

 

이와 함께 1947410일에는 이쿠노구 히가시모모타니초에 이쿠노 우리중등학원이 개교되었고, 610일 기타이쿠노초로 이전, <오사카 조선중학교>가 되었습니다. 오사카 조선중학교 개교 당시 학생수는 이미 220명이었다고 합니다.

 

1948120일에는 히가시나리구 니시이마자토(西今里)초에 <히가시나리 조선학원 초등학교와 중학교>도 설립되었습니다. 194810월 조선학교 폐쇄령으로 타지마 소학교와 오사카 조선중학교, 히가시나리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모두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조선학교가 강제 폐쇄된 동안, 조선인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조련의 줄기찬 저항과 요구에 밀린 오사카시는 195071일 오사카 시립 혼죠중학교의 분교를 설립해 조선인 중학교로 삼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흔히 <서금리중학교>라고 불리던 <공립 니시이마자토 중학교>입니다. <서금리중학교>는 히가시나리학원의 교사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한편 폐교령에 교사를 빼앗긴 오사카 조선중학교는 19491월 야오(八尾)시 카야후리(萱振)로 이전했고, 오사카와 히가시오사카의 조선인 중학생들이 졸업해 진학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 1952410일 타지마 조선소학교의 빈 교사를 임시로 사용하면서 오사카조선고등학교가 문을 열었습니다. 개교 당시 학생은 신입생이 39, 교원과 강사는 16명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오사카조고는 1957810일 카와치(河内)(=현재의 히가시오사카(東大阪)시 타마쿠시모토마치(玉串元町)로 옮겼고, 1961<서금리 중학교>가 폐쇄되면서 학생들이 오사카중학교와 나카오사카중학교로 전학했고 그 졸업생들은 오사카조선고급학교로 진학했습니다. 오사카고등학교는 1973년 현재 위치인 히가시오사카시 히시에(菱江)에 교사를 신축해 이전했습니다.

 

 

이렇게 오사카조선고등학교는 오사카시 이쿠노구와 야오시, 히가시오사카시 등에 산재했던 조선인 국어강습소와 초등학교 및 중학교들의 설립과 폐교와 재설립의 와중에서 간사이의 중심 고등학교의 하나로 진화해 나갔던 것입니다.

 

오늘날 일본에 세워져 있는 조선고등학교는 모두 10개입니다. 1948도쿄(東京)조선중고급학교(1946년 중급부, 1948년 고급부)가 가장 먼저 문을 열었고, 1952410일에 오사카(大阪)조선중고급학교, 그와 비슷한 시기에 고베(神戶)조선중고급학교(1949년 중급부, 1952년 효고조선고등학교 병설, 1955년 고베조선중고급학교로 개칭)가 뒤를 이었습니다.

 

 

195341일에는 나고야에 아이치(愛知)조선중고급학교(19484월 중부조선학교, 19534월 중부조선중고급학교, 1956년 현재 이름으로 변경), 1954년에는 카나가와(神奈川)조선중고급학교(1951년 카나가와조선중학교 개교, 1954년 고급부 병설후 현 이름으로 개칭), 1955년에는 교토(京都)조선중고급학교(1946년 칠조조련국민학원, 1947년 교토서진 초중등학교, 1953년 교토조선중급학교, 1955년 고등학교 신설하여 현 이름으로 개칭)이바라기(茨城)조선초중고급학교(1953년 중학교 개교, 55년 고급부 병설해 현재이름으로 개칭)가 설립됐습니다.

 

 

뒤이어 19564월에는 큐슈(九州)조선중고급학교, 1960년에 히로시마(廣島)조충고급학교(1945년 오오다케 국어강습소, 1946년 조련오오다케초등학원, 195399일 히로시마조선중학교 창립, 1960년 고급부를 신설하여 현재 이름으로 개칭)가 문을 열었고, 가장 늦게는 1982홋카이도(北海道)조선초중고급학교(1961410일 홋카이도조선초중급학교, 1982년 고급부 병설)가 고등학교 과정을 신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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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放後日本各地国語講習所小学校てられた猪飼野にもくの国語講習所設立され朝連はこれを10小学校統廃合しました猪飼野西部北部朝練生野第1910ウリ學校設立されこのうち10今日大阪第4朝鮮初級学校につながってきた前文でまとめました

 

それとほぼ時期猪飼野東部南部地域でも国語講習所小学校設立されました19451017猪飼野東9丁目現在田島1丁目付近てられた国語講習所後日東大阪朝鮮第5初級学校となりました113には中河内郡(1955大阪市生野区編入巽町巽町國民学校国語講習所敷設されましたがこれは東大阪朝鮮第3初級学校前身です

 

 

1946には朝連東中川朝鮮小学校設立されこれは東大阪第一初級学校につながりましたこれらの学校1948朝鮮学校閉校令ですべて一時閉鎖され19521953にすべて再建されました

 

1953には舎利寺朝鮮初級学校1957には田島朝鮮初級学校再建されました1956年舎利寺朝鮮初級学校校舎火災焼失すると1957年舎利寺初新設田島初統合され1962721には生野区巽西校舎新築移転東大阪朝鮮第五初級学校となりました

 

 

1991東大阪第135初級学校統合され生野朝鮮初級学校となり1992831現在位置移転しました生野朝鮮初級学校前文から大阪朝鮮第4初級学校から南東2キロれていていても30距離です

 

一方解放後大阪市東成地域にも4つの朝鮮小学校誕生しました19481204つの朝鮮小学校統廃合され朝連東成学園初級部中学部となりました校舎市有地坂東小学校敷地新設されましたがこの校舎西今里中学校(1950-1961)中大阪朝鮮初級学校(1961-2021)校舎として活用されました

 

19484.24教育闘争194931大阪府新設された財団法人大阪朝連学院承認大阪府傘下朝鮮学校24私立学校として認可しました当時朝連東成学園には850生徒在学していましたが98朝鮮学校閉鎖令閉校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

 

 

1年後19503閉鎖令抵抗していた朝鮮人未就学学生のために大阪市市立中学校新設することを朝鮮学校再建機会けられました同年71大阪市立本庄中学校分校として西今里中学校開設されましたが同校朝連東成学園敷地校舎をそのまま使用教育内容民族教育でしたこの学校漢字看板とともに韓国式発音ソグムリジュンハクギョ(=서금리중학교, 西金里中学校)という扁額げました

 

1950年代後半在日朝鮮人送還事業まると西金里中学校生徒数きく増加19591千人(1,163)1961には2千人えました(2,059)教室りず運動場教室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ほどでした

 

 

当時西金里中学校日本教育制度教育内容わなかったため市立学校資格められませんでしたそこで在日本朝鮮人總聯合会(=總聯)196181財団法人大阪朝鮮学院設立831市立西今里中学校廃校生徒たちは東大阪朝鮮中級学校現在大阪朝鮮中高級学校前身196191新設された中大阪朝鮮初中級学校転校しました

 

中大阪朝鮮初級学校1961910日初級部中級部分離して40年以上運営されていましたが1980年代末以降生徒数2006年中級部廃止された中大阪朝鮮初級学校改称され2021には生野朝鮮初級学校統合され廃校と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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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일본 각지에 국어강습소와 초등학원이 세워질 때 이카이노에도 많은 국어강습소가 설립됐고, 조련은 이를 10개의 초등학원으로 통폐합했습니다. 이카이노의 서부와 북부에 조련이쿠노제1, 9, 10우리학교가 설립되어, 이중 제10우리학교가 오늘날의 오사카 제4조선초급학교로 이어져 온 이야기는 지난 글에서 정리했습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이카이노의 동부와 남부지역에서도 국어강습소와 초등학원들이 설립됐습니다. 19451017일 이카이노히가시9초메(猪飼野東9丁目, 지금의 타지마1초메 부근)에 세워진 국어강습소는 후일 히가시오사카 조선제5초급학교가 되었습니다. 113일에는 나카가와치군(中河内郡, 1955년에 오사카시 이쿠노구에 편입) 다츠미마치(巽町)의 다츠미국민학교 안에 국어강습소가 부설됐는데, 이는 히가시오사카 조선제3초급학교의 전신입니다.

 

 

1946년에는 조련 히가시나카가와 조선소학교가 설립되었고, 이는 후일 히가시오사카제1초급학교로 이어졌습니다. 이 학교들은 1948년의 조선학교 폐교령으로 모두 일시 문을 닫았다가 1952년과 1953년에 모두 재건됐습니다.

 

1953년에는 샤리지(舎利寺)조선초급학교, 1957년에는 타지마조선초급학교가 재건되었습니다. 1956년 샤리지 조선초급학교의 교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1957년 샤리지초는 신설 타지마초와 통합되었고, 1962721일에는 이쿠노구 다츠미니시(巽西)에 신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면서 히가시오사카 조선제5초급학교가 되었습니다.

 

 

1991년 히가시오사카 제1, 3, 5초급학교가 통합되어 이쿠노조선초급학교가 되었고, 1992831일 오늘날의 위치로 이전했습니다. 이쿠노조선초급학교는 앞글에서 본 오사카조선제4초급학교에서 남동쪽으로 약 2킬로미터 떨어져 있어서 걸어서도 30분 거리입니다.

 

한편, 해방 후 오사카시 히가시나리(東成) 지역에도 4개의 조선소학교가 탄생했습니다. 19481204개의 조선소학교가 통폐합되어, 조련히가시나리학원의 초급부와 중학부가 되었습니다. 교사는 시유지인 반도우(阪東)초등학교 부지에 신설됐는데, 이 교사는 후일 니시이마자토중학교(1950-1961)와 나카오사카조선초급학교(1961-2021)의 교사로 활용됐습니다.

 

1948년의 4.24교육투쟁을 거쳐, 194931일 오사카부는 신설된 재단법인 오사카 조련학원을 승인하고 오사카부 산하 조선학교 24개교를 사립학교로 인가했습니다. 당시 히가시나리학원에는 850명의 학생들이 재학했으나, 98일 조선학교 폐쇄령으로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1년만인 19503, 폐쇄령에 저항하던 조선인 미취학학생들을 위해 오사카시가 시립중학교를 신설하기로 결정하면서 조선학교 재건의 기회가 마련되었습니다. 그해 71일 오사카시립 혼조(本庄)중학교의 분교로서 니시이마자토(西今里)중학교가 개설됐는데, 이 학교는 조련히가시나리학원의 부지와 교사를 그대로 사용했고, 교육내용도 민족교육이었습니다. 이 학교는 한자 간판과 함께 한국식 발음으로 <서금리중학교>라는 현판도 걸었습니다.

 

1950년대 후반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이 시작되자 <서금리중학교>의 학생수는 크게 증가해 19591천명이 넘어섰고(1,163), 1961년에는 2천명이 넘었습니다(2,059). 교실이 부족해 운동장에 조립식 교실을 만들어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서금리중학교는 일본 교육제도와 교육내용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시립학교 자격을 인정받기 어려웠습니다. 이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196181일 재단법인 오사카조선학원을 설립하고 831일 시립니시이마자토중학교를 폐교, 학생들은 히가시오사카조선중급학교(오늘날 오사카조선초중급학교의 전신)196191일 신설된 나카오사카조선초중급학교로 전학했습니다.

 

나카오사카조선초중급학교는 1961910일 초급부와 중급부를 분리해 40년 이상 운영되었으나, 1980년대말 이후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2006년 중급부가 폐지된 후, 나카오사카조선초급학교로 개칭되었다가, 2021년에는 이쿠노조선초급학교와 통합되면서 폐교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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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リ學校舞踊靴]日本訪問団宿泊する生野<ファイブホテル>はコリアタウンのにあります生野という名前1973年以降行政洞名改編以降にできたものでそれ以前猪飼野ばれていたところですね

 

猪飼野在日朝鮮人密集居住地域だったので当然解放直後国語講習所ができいて朝連初等學院設立されました現在運営されている<大阪朝鮮第4初級学校>訪問団宿舎から直線距離でわずか300メートルれたところにあります

 

 

イオ20158月号によりますと大阪朝鮮4初級学校前身1946611設立された<生野第10ウリ學校>だそうですしかし当時用語通りだと<朝連猪飼野第10初等學院>だったとわれます設立当時校舍になく在日同胞ヒョン·ボンジョ工場授業めました猪飼野第十初等學院開校当時生徒120教員8だったそうです

 

生徒数増加すると創立1周年えた1947611大阪朝鮮4現在地646敷地木造建物校舎新築しましたこの生徒数150教員9でした校舎新築とともに学校名御幸森朝鮮小学校えました

 

御幸森仁徳天皇(257?-399)がここに頻繁行幸していたことに由来する地名です現在のコリアタウンとすぐ隣接する場所ですがそれでコリアタウンの<御幸通中央門>てられていて<百済門>にもその言葉かれています

 

 

当時天皇王宮難波にあり御幸森までは3キロメートルりでした今日電車駅からもわずか3難波-日本橋-谷町9丁目-鶴橋です

 

伝承によると仁徳天皇がよく御幸森行幸した理由渡来人うためだったそうです当時渡来人=百済人日本とはなる韓半島んで飼育成功日本人食生活改善貢献しました

 

そのにも猪飼野韓半島との航路交流新聞物豊富だった場所だったので天皇らに頻繁おうとしたものとえられますそのためこの地域名前百済野または猪飼野んだのです当時渡来人たちは天皇直接頻繁交流するほどいに尊重されだったのです

 

 

解放後ここにてられた最初小学校御幸森朝鮮小学校1993年以降ここがコリアタウンとして開発されると、「御幸通中央門てることに躊躇しなかったのもおそらくそのような古代史反映しようとしたからだとわれます

 

国語講習所朝連初等學院々と改編された1946年頃鶴橋桃谷勝山中川西などをむこの学区には、「朝連猪飼野第10にも朝連猪飼野第1鶴橋)」朝連猪飼野第9勝山)」がありましたこのうち191947統合され、「鶴橋朝鮮初等學院となりましたが、「御幸森朝鮮小学校はそのまま存続しました

 

 

御幸森朝鮮小学校19484からまった日本当局朝鮮学校廃止令一時閉鎖されましたが19544生徒数200まり同名学校再建され1961には東大阪朝鮮第四初級学校改称されましたが1991現在名称大阪朝鮮第四初級学校改称されました

 

しかし<朝連猪飼野第101946>からまり<大阪朝鮮第4初級学校1991>るまで歴史的命脈いできた同校2016611創立70周年えましたが2022學年度最後閉校近隣<生野朝鮮初級学校>合併することになるというニュースです廃校原因生徒数減少とそれに財政難によるものといわれ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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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무용신] 일본방문단이 숙박하는 이쿠노의 <파이브 호텔>은 코리아타운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쿠노라는 이름은 1973년 이후 행정동명 개편 이후에 생긴 것이고 그 이전에는 이카이노라고 불렸던 곳이지요.

 

이카이노가 재일조선인 밀집 거주지역이었으므로 당연히 해방 직후 국어강습소가 생겼고, 이어서 조련초등학원이 설립되었습니다.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오사카조선제4초급학교>는 방문단 숙소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3백미터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이어> 20158월호에 따르면 오사카조선4초급학교의 전신은 1946611일에 설립된 <이쿠노 제10우리학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용어대로 한다면 <조련 이카이노 제10초등학원>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설립당시 교사가 따로 없이 재일동포 현봉조씨의 공장에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이카이노 제10초등학원의 개교 당시 학생은 120, 교원이 8명이었다고 합니다.

 

학생 수가 증가하자 창립 1주년을 맞은 1947611, 오사카조선4초의 현재 자리에 646평의 부지에 목조건물 교사를 신축했습니다. 이때 학생 수는 150, 교원이 9명이었습니다. 교사 신축과 함께 학교 이름을 <미유키모리 조선소학교>로 바꿨습니다.

 

미유키모리(御幸森)는 닌토쿠(仁德, 257?-399)천황이 이곳에 자주 행차했던 것에서 유래한 지명입니다. 지금의 코리아타운과 바로 인접한 곳인데, 그래서 코리아타운 한 가운데에 미유키도리주오(御行通中央)문이 세워져 있고, 백제문(百濟門)에도 그 말이 쓰여 있습니다.

 

 

당시 천황의 왕궁은 난바(難波)에 있었고, 미유키모리까지는 동쪽으로 3킬로미터 남짓이었습니다. 오늘날 전철역으로도 겨우 3정거장(난바-니뽄바시-타니마치9초메-쓰루하시)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닌토쿠 천황이 자주 미유키모리에 행차를 했던 까닭은 도래인들을 만나보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당시 도래인(=백제인)들은 일본 돼지()와는 다른 한반도 돼지()를 들여와서 사육에 성공함으로써 일본인들의 식생활 개선에 기여했습니다.

 

그밖에도 이카이노는 한반도와 뱃길 교류가 계속되면서 신문물이 풍성했던 곳이었기에 천황도 이들을 자주 만나보려고 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래서 이 지역의 이름도 쿠다라노(百濟野) 혹은 이카이노(猪飼野)라고 불렀던 것이지요. 당시만 해도 도래인들은 천황과 직접 자주 교류할 만큼 서로 존중받는 사이였던 것입니다.

 

 

해방후 이곳에 세워진 최초의 초등학원을 <미유키모리 조선소학교>라고 부르고, 1993년 이후 이곳이 코리아타운으로 개발되자 <미유키도리주오>문을 세우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던 것도, 아마도 그같은 고대사를 반영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국어강습소가 조련초등학원으로 속속 개편되었던 1946년경, 츠루하시와 모모타니, 카츠야마와 나카가와니시 등을 포함했던 이 학구에는 <조련이카이노제10> 말고도 <조련이카이노제1(츠루하시)><조련이카이노제9(카츠야마)>가 더 있었습니다. 이중 1초와 9초는 1947년에 통합되어 <츠루하시조선초등학원>이 되었지만 <미유키모리 조선소학교>는 그대로 존속되었습니다.

 

 

<미유키모리 조선소학교>19484월부터 시작된 일본 당국의 조선학교 폐지령으로 일시 폐쇄되었다가 19544월 학생 수 2백명이 모여 같은 이름의 학교가 재건되었고, 1961년에는 <히가시오사카조선제4초급학교>로 개칭되었다가, 1991년에 지금의 명칭인 <오사카조선제4초급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조련이카이노제10(1946)>에서 시작되어 <오사카조선제4초급학교(1991)>에 이르도록 역사적 명맥을 이어온 이 학교는 2016611일 창립 70주년을 맞았으나, 2022학년도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인근 <이쿠노조선초급학교>와 합병하게 된다는 소식입니다. 폐교의 원인은 학생수 감소과 그에 동반된 재정난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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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れまで東京都兵庫県愛知県山口県福岡県てられた在日朝鮮人初期国語講習所をざっとてきましたが限界があることはらかです在日朝鮮人月刊誌イオ掲載されたまりのウリハッキョシリーズにほぼ全面的依存していたからです

 

イオ連載物20151月号から67いていて日本全土朝鮮学校について幅広しい内容まれているいちいち文献根拠提示していて正確性れていますしかし一時500校余りにした朝鮮学校をすべて叙述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はずなので依然としてをつけて参考にしてはいます

 

 

一方たような性格朝鮮学校ある風景という雑誌在日朝鮮学校への寄稿文せたりしますがくなく過去文章転載したり個人回顧談くて客観的朝鮮学校状況再構成するには無理があるとじましたそれにもかかわらず大切資料であることは間違いないでしょう

 

20173発行された朝鮮学校のある風景には、「4.24教育闘争から69:初期民族教育あゆみという掲載されました。(この文章、『統一評論という月刊雑誌19782-4月号連載されたものをほぼそのまま転載したものだという編集者注がついています。)

 

 

日本では一般的4·24教育闘争関西在日朝鮮人阪神教育闘争韓国では阪神教育事件多様ばれるこの事件発生したのが19484ですのでこのはすでに朝連指揮朝鮮人初級學院体制えて地域拡張めていたですそれで朝鮮学校のある風景在日本朝鮮人連合(=朝連)結成民族教育まりとます

 

帰国同胞たちがにぎわう九州港また東京芝浦吉木西新井三河島神奈川横浜番町川崎あるいは大阪猪飼野など同胞居住地さらに九州北海道炭鉱日本各地朝鮮人艦場祖国言葉文字びたいというこったこのような切実いは19451015在日韓国人意思権益団体すなわち在日本朝鮮人連合朝鮮人連合結成によってなされたこれがまさに在日韓国人民主主義的民族教育まりだったのだ」。

 

朝鮮学校のある風景国語講習所設置さえ朝連主導したとべていますが姫路国語講習所東京神田朝鮮YMCA国語講習会など初期国語講習所るとずしもそうではないようですおそら民間自発的努力調教組織的後援協力した結果だといといます

 

 

しかし朝連1946年以降在日同胞教育事業体系的めてきたのはらかな事実です原則めて実態把握乱立国語講習所調整したり統廃合して朝連初等學院体系にし教材って教員養成したのが朝連だったからです

 

朝連結成されたのは19451015ですから解放直後非常素早組織されたわけですおそらく日本による植民地時代民族運動労働運動をしてきた々の組織力量発揮されたためでしょう

 

朝連194622回全国大会朝鮮学校設置決議この決議はその4から実践されましたそのため解放直後から19464までは自発的国語講習所主種となっていましたが19464月以降朝連學院体系骨組みとなったことがかります

 

 

朝連194610統計によりますと当時日本には朝連初等學院525中学校4青年学校1設立され生徒数42千人余教員数1100人余りだったということです

 

解放後たった1行政指導支援資金なしにこのような規模体系えた学校制度成立したというのは本当にすごいことです解放えた在日朝鮮人自発的努力朝連組織的主導がシナジーをこした結果だっ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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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도쿄도와 효고현, 아이치현과 야마구치현과 후쿠오카현에 세워졌던 재일조선인들의 초기 국어강습소를 대략 살펴봤는데,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재일조선인 월간잡지 <이어>에 실린 초창기의 우리학교시리즈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의 연재물은 20151월호부터 67회나 계속되고 있어서 일본 전역의 조선학교에 대한 폭넓고 자세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데다가, 일일이 문헌근거를 제시하고 있어 정확성도 뛰어난 편입니다. 하지만 한때 5백여개에 달했던 조선학교를 모두 서술할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여전히 조심해서 참고하고 있기는 합니다.

 

 

한편, 비슷한 성격의 <조선학교풍경(朝鮮學校のある風景)>이라는 잡지도 재일조선학교에 대한 기고문을 싣곤 합니다만, 양이 많지 않고, 과거의 글을 전재하거나, 개인 회고담이 많아서 객관적인 조선학교 상황을 재구성하는 데에는 무리가 좀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없지요.

 

20173월에 발행된 <우리학교풍경>에는 “4.24교육투쟁부터 69: 초창기의 민족교육의 발자취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이 글은 <통일평론>이라는 월간잡지의 19782-4월호에 연재된 것을 거의 그대로 전재한 것이라는 편집자주가 달려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4.24교육투쟁, 간사이 재일조선인들은 한신교육투쟁, 한국에서는 한신교육사건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이 사건이 발생한 것이 19484월이니까, 이때는 이미 조련의 지휘아래 조선인 초등학원들이 체제를 갖추고 지역 확장을 추진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학교풍경>의 글은 재일본조선인연합(=조련)의 결성을 민족교육의 시작으로 봅니다.

 

귀국 동포들이 북적이는 규슈 항구에서, 또 도쿄의 시바우라, 요시키, 니시아라이, 미카와시마에서, 가나가와의 요코하마 반마치, 가와사키에서, 혹은 오사카의 이카이노 등 동포 거주지에서, 나아가 규슈, 홋카이도의 탄광과 일본 각지의 조선인 함바에서 조국의 말과 문자를 배우고 싶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러한 간절한 바람은 19451015일 재일교포의 의사와 권익을 지키는 단체-즉 재일본조선인연합(조련)의 결성으로 이루어졌다. ... 이것이 바로 재일교포의 민주주의적 민족교육의 시초였던 것이다.”

 

<우리학교풍경>은 국어강습소의 설치조차 재일조선인연맹(=조련)이 주도한 것으로 서술했는데, 히메지의 국어강습소나 도쿄 칸다의 조선YMCA 국어강습회 등 초기 국어강습소의 예를 보면 반드시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민간의 자발적인 노력과 조련의 조직적인 후원이 협력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더군요.

 

 

그러나 조련이 1946년 이후 재일동포 교육사업을 체계적으로 이끌어나갔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원칙을 정하고 실태를 파악하고, 난립한 국어강습소를 조정하거나 통폐합해서 조련 초등학원 체계로 만들고, 교재를 만들고 교원을 양성한 것이 조련이었기 때문입니다.

 

조련 중앙이 결성된 것은 19451015일이니까 해방 직후 굉장히 발 빠르게 조직된 셈입니다.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민족운동과 노동운동을 해오던 분들의 조직역량이 발휘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련은 19462월 제2회 전국대회를 열고 조선인 학교 설치를 결의했고, 이 결의는 그해 4월부터 실천에 옮겨졌습니다. 따라서 해방직후부터 19464월까지는 자발적 국어강습소가 주종을 이루었지만, 4월 이후에는 조련의 학원체계가 뼈대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련의 194610월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일본에는 조선인 초등학원 525, 중학교 4, 청년학교 1개가 설립되었고, 학생 수 42천여 명, 교원 수는 1100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해방 이후 단 1년 만에 관의 행정지도와 지원자금 없이 이같은 규모와 체계를 갖춘 학교제도가 성립되었다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일입니다. 해방을 맞은 재일조선인들의 자발적 노력과 조련의 조직적 주도가 시너지를 일으킨 결과였던 것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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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文解放直後兵庫県姫路市英賀宮東京市足立国語朝鮮語講習所非常時期にオープンしたという記録調東京市神田朝鮮YMCA朝鮮講習会新宿戸塚ハングル初期国語講習所として紹介しました

 

ところで名古屋市をはじめ愛知地域にも国語講習所設立活発時期的にも非常時期だったとアドバイスしてくださったがいらっしゃいましたそこでまた調べてみました

 

 

イオ201611月号愛知県では解放後から1947までに32国語講習所初等教育ができ児童·生徒数4800したとしました愛知県だけで学生数4800だったということでものすごい規模です2020年現在日本全土朝鮮学校生徒数5千人台という統計があるのをますと当時愛知県国語講習所小学校規模熱気推察できます

 

しかしこの物語には曖昧があります19451015朝連結成され朝連指導のもと19464から国語講習所統廃合して小学校設立していきましたのでこの統計には国語講習所小学校統計ざっているわけですそれにもかかわらず愛知県でもくの国語講習所設立されたことはかに確認できます

 

一方、『愛知朝鮮中高級学校60歴史2006年発行)』によると愛知朝高第1期生金宗鎮キム·ジョンジン当時80さんは9解放えたからです9めてウリ學校=朝鮮学校った回想しました

 

 

1945ウリ學校ったということですがこれはおそらく国語講習所だったといます当時ウリ學校という言葉ができるだったからですまた韓半島よりかい日本でもだったら9月中旬までだったはずです9月中旬以降だったらだったはずですから

 

それなら愛知県でも解放1945815直後915日頃にすでに国語講習所設立されていたことが推察できますつまり愛知でも姫路東京じような初期にすでに国語講習所設立され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

 

一方関門地域福岡にも国語講習所設立されました関門地域とは本州最西端山口県下関から九州福岡県門司海峡地域します日本から大韓海峡って朝鮮くために場所なので解放直後朝鮮人帰国のためにれのようにまってきた場所です

 

 

また直方久留米飯塚田川筑豊嘉穂郡などを福岡県には250以上炭鉱があった地域です1939年以来朝鮮人大規模強制連行された場所筑豊炭鉱地域だけで15万人朝鮮人んでいました

 

解放後当然関門地域福岡県にも国語講習所られました。『イオ201610月号1947まで若松門司八幡戸畑福岡をはじめ10支部内小学園てられた20211月号筑豊地域では田川直鞍地域内13民族教育実施されたべています

 

小学園とは朝連国語講習所統廃合しててた小学校筑豊地域設置されたという民族教育13とは国語講習所していた証言理解できます

 

 

このように解放直後東京をはじめとする関東地域そして大阪兵庫県関西地域だけでなく名古屋愛知県関門地域山口県福岡県炭鉱地帯るまで無数国語講習所てられたことがかります

 

これらの国語講習所解放直後19458月末から9にかけて雨上がりののようにあちこちで設立され帰国準備する朝鮮人れられていた朝鮮語えてい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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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글에서 해방 직후 효고현 히메지시 아가미야와 도쿄시 아다치에서 국어(조선어)강습소가 매우 이른 시기에 문을 열었다는 기록을 살펴보았고, 도쿄시 칸다의 조선YMCA 조선강습회와 신주쿠의 도츠카 한글학원도 초기의 국어강습소로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나고야시를 비롯한 아이치 지역에도 국어강습소 설립이 활발했고, 시기적으로도 매우 이른 시기였다고 조언을 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또 조사해 봤습니다.

 

 

<이어> 201611월호는 아이찌현에서는 해방 후부터 1947년까지 32개의 국어강습소와 초등교육의 장이 생겨났고, 아동·학생 수는 약 4,800명에 달했다고 했습니다. 아이치현에서만 학생 수가 4,800명이었다고 하니 엄청난 규모입니다. 2020년 현재 일본 전역의 조선학교 학생수가 5천명 이하라는 통계가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아이치현의 국어강습소와 초등학원의 규모와 열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술에는 모호한 점이 있습니다. 19451015일 조련이 결성되었고, 조련의 지도 아래 19464월부터 국어강습소를 통폐합하여 초등학원들을 설립해 나갔으니까, 이 통계에는 국어강습소와 초등학원의 통계가 섞여 있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치현에서도 많은 국어강습소가 설립되었다는 점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편 <아이치 조선중고급학교 60년의 역사(2006년 발행)>에 따르면 아이치 조고 제1기생인 김종진(金宗鎭, 당시 80)씨는 “9살 때에 해방을 맞았으니까요. 9살 여름, 처음으로 우리학교(조선학교)를 다녔다고 회상했습니다.

 

 

1945년 여름에 우리학교를 다녔다고 하셨으나 이는 아마도 국어강습소였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우리학교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반도보다 따뜻한 일본에서도 여름이었다면 9월 중순까지였을 것입니다. 9월 중순 이후였다면 가을이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아이치현에서도 해방(1945815) 직후 915일경 사이에 이미 국어강습소가 설립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아이치에서도 히메지와 도쿄에서와 비슷한 초기에 이미 국어 강습소가 설립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한편, 칸몬(関門)지역과 후쿠오카(福岡)에도 국어강습소가 많이 설립됐습니다. 칸몬지역이란 혼슈 최서단의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下關)에서 큐슈 후쿠오카현 모지(門司)에 이르는 좁은 해협 지역을 가리킵니다. 일본에서 대한해협을 건너 조선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곳이므로 해방 직후 조선인들이 귀국을 위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던 곳입니다.

 

 

또 노가타(直方)와 구루메(久留米), 이이즈카(飯塚)와 타가와(田川), 치쿠호(筑豊)와 카호군(嘉穂郡) 등을 포함한 후쿠오카현에는 250개 이상의 탄광이 있던 지역입니다. 1939년 이래 조선인들이 대규모로 강제 연행되었던 곳으로, 치쿠호 탄광지역에만 15만명의 조선인이 살았습니다.

 

해방 후 칸몬지역과 후쿠오카 현에도 국어강습소가 만들어졌습니다. <이어> 201610월호는 “1947년까지 와카마츠(若松), 모지(門司), 야하타(八幡), 토바타(戸畑), 후쿠오카(福岡)를 비롯해 10개 지부 내에 초등학원(소학교)이 세워졌다고 서술했고, 20211월호는 치쿠호 지역에서는 타가와, 쵸쿠안(直鞍) 지역 내 13개소에서 민족교육이 실시되었다고 서술했습니다.

 

초등학원이란 조련이 국어강습소를 통페합하여 세운 초등학교를 가리키며, 치쿠호 지역에 설치되었다는 민족교육 13개소란 국어강습소를 가리켰던 증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해방 직후 도쿄를 비롯한 간토지역, 그리고 오사카와 효고현을 포함하는 간사이 지역뿐 아니라 나고야를 포함한 아이치현, 칸몬지역의 야마구치현과 후쿠오카현의 탄광지대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국어강습소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국어강습소들은 해방 직후인 19458월 말부터 9월까지 비온 뒤의 대나무 순처럼 설립되어서 귀국을 준비하는 조선인들에게 오래 잊혔던 조선어를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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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文解放後日本めてオープンした国語朝鮮語講習所兵庫県姫路英賀宮国語講習所だといましたところがこの内容する反論提起されました最初国語講習所東京にあったといているという内容でした

 

そこで調査をしてみることにしましたまず在日朝鮮人雑誌イオ連載物発生期朝鮮学校記述再確認しました。 『イオ20151月号には東京足立国語講習所1945913開設されたとされていました

 

 

東京有数同胞集団居住地域である足立では解放直後19459現在朝鮮学校原型となった国語講習所誕生した。 『足立してみた在日コリアン形成史』(鋼鉄雄山閣によると梅田町現在西新井栄町にあった東亜工業株式会社工場一部りてどもたちを対象とした教育まった... 東京第4小中級学校沿革史には国語講習所開設された913創立記念日としている。」

 

ところがイオ20169月号には東京·足立国語講習所より1週間早194596兵庫県姫路市阿賀宮国語講習所授業開始したとべているこの日付出所総連姫路西支部同胞沿革史<成邦(201311月発行)>だった

 

総連姫路西支部同胞沿革史西房』(201311月発行によると194596英賀宮前んでいたある同胞自宅児童16めて国語講習所開設したこれがこの地域における民族教育まりだという。」

 

 

では最初国語講習所東京まったという反論根拠だろうか反論者文献根拠提示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がそのがでたらめをではなかったのでその根拠直接探すことにしました、「大阪経済法科大学論集(11420193)掲載された論文在日同胞民族教育変遷現状(2019朴永炅竹中優子4)にその内容ていることが確認できました

 

19459には東京神田朝鮮YMCA国語講習会同年10には戸塚ハングルをはじめとする国語講習所当時国語朝鮮語。)日本全国設立された。」

 

著者らは東京·神田朝鮮YMCA国語講習会19459新宿戸塚ハングル在日国語講習所嚆矢だとべていますが文献出典提示していませんそのため調査けて類似叙述んだ文献をもうすことができました。 『アジア地域文化研究(20153)掲載された在日朝鮮人作家金達壽(キム·ダルス)解放された論文でした

 

朝鮮語在日朝鮮人活動敗戦直後からわれた19459には神田朝鮮YMCA国語講習会がはじめられ10戸塚ハングル学院などがつくられた37)。」

 

 

この叙述によるには小沢有作在日朝鮮人教育論歴史編(1973)根拠として提示されていましためて小沢裕策著書してみたところそこにも神田朝鮮YMCA国語講習会開設日"19459"とだけなっています

 

この程度記述では朝鮮YMCA国語講習会19459姫路英賀宮国語講習所194596東京·足立国語講習所913よりんでいるとはいです

 

実際数日先んだりれたからといって各国語講習所がさらにいたりむわけではないただどの国語講習所一番先開設されたのかにする知的好奇心ぎない

 

姫路英賀宮国語講習所東京足立国語講習所神田朝鮮YMCA国語講習会新宿戸塚ハングルほとんどが今日在日朝鮮学校前身であり当時在日朝鮮人朝鮮語えた貴重初期教育機関だったにい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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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글에서 해방후 일본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국어(조선어)강습소가 효고현 히메지의 아가미야 국어강습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최초의 국어강습소가 도쿄에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사를 해 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재일조선인 잡지 <이어(イオ)>의 연재물 초창기의 우리학교(まりのウリハッキョ)”의 서술을 재확인했습니다. <이어> 20151월호에는 도쿄의 아다치 국어강습소가 1945913일에 개설되었다고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도쿄 유수의 동포 집단거주 지역인 아다치(足立)에서는 해방 직후인 19459월에 현재의 조선학교의 원형이 된 <국어강습소>가 탄생했다. <아다치(足立)를 통해 본 재일코리안 형성사> (강철, 웅산각) 에 의하면, 우메다쵸(梅田町), 현재의 니시아라이사카에쵸(西新井栄町)에 있던 동아공업주식회사의 공장 일부를 빌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시작되었다. ... 도쿄제4초중급학교의 연혁사에는 국어강습소가 개설된 913일을 창립기념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어> 20169월호에는 도쿄 아다치 국어강습소보다 일주일 앞선 194596, 효고현 히메지시 아가미야(英賀宮) 국어강습소가 수업을 시작했다고 서술했다. 이 날짜의 출처는 총련 히메지 서지부 동포연혁사 <세이방편(201311월 발행)>”이었습니다.

 

총련 히메지 서지부 동포연혁사 세이방(西播)(201311월 발행)에 따르면 194596, 아가미야(英賀宮) 앞에 살고 있던 어느 동포가 자택에서 아동 16명을 모아 국어강습소를 개설했다. 이것이 이 지역에 있어 민족교육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최초의 국어강습소가 도쿄에서 시작되었다는 반론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반론자가 문헌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허튼 말씀을 하시는 분은 아니었기에, 그 근거를 내가 직접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오사카경제법과대학논집(114, 20193)>에 실린 논문 재일동포의 민족교육의 변천과 현상(在日同胞民族教育変遷現状, 2019, 朴永炅竹中優子, 4)”에 그 내용이 나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9459월에는 도쿄 칸다(神田)에 조선YMCA 국어강습회, 같은 해 10월에는 도츠카(戶塚) 한글학원(ハングル)을 시작으로 하여 국어강습소(당시의 국어는 조선어를 가리킨다.)가 일본 전국에 설립되었다.”

 

저자들은 도쿄 칸다의 조선YMCA 국어강습회(19459)과 신주쿠(新宿)의 도츠카 한글학원이 재일 국어강습소의 효시라고 서술했지만, 문헌출처를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사한 서술을 담은 문헌을 하나 더 찾았습니다. 학술지 <아시아지역문화연구(20153)>에 실린 논문 재일조선인작가 김달수와 해방이라는 제목의 논문이었습니다.

 

조선어를 되찾는 재일교포의 활동은 패전 직후부터 이루어졌다. 19459월에는 간다 조선YMCA에서 국어 강습회가 시작되어, 10월에 도즈카 한글 학원등이 만들어졌다(37).”

 

 

이 서술에 달린 주37에는 오자와 유사쿠(小沢有作, 1932-2001)<재일조선인교육론역사편, 1973)>이 근거로 제시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오자와 유사쿠의 저서를 찾아보니 거기에도 칸다 조선YMCA 국어강습회 개설 일자가 “19459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의 서술로는 조선YMCA 국어강습회(19459)가 히메지의 아가미야 국어강습소(194596)나 도쿄 아다치 국어강습소(913)보다 더 앞섰다고 주장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몇 달이나 며칠 앞섰거나 뒤쳐졌다고 해서 각 국어강습소가 더 빛이 나거나 바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어떤 국어강습소가 가장 먼저 개설되었는지에 대한 지적 호기심일 뿐이지요.

 

히메지 아가미야 국어강습소와 도쿄 아다치 국어강습소, 칸다의 조선YMCA 국어강습회와 신주쿠의 도츠카 한글학원은 대개 오늘날의 재일조선학교의 전신으로, 재일 조선인에게 조선어를 가르쳤던 소중한 초기 교육기관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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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日朝鮮人雑誌イオ連載物草創期朝鮮学校によりますと記録されている最初在日国語講習所194596兵庫県姫路市英賀宮国語講習所でした名前らかになっていないこの地域のある朝鮮人同胞自分16児童めて国語講習めたのが嚆矢でした

 

一週間後1945913東京·足立国語講習所もオープンしました解放されてから1たないうちに関西関東にそれぞれ朝鮮語える学校ができめたのです

 

朝鮮講習所拡張多大努力けていた在日本朝鮮人連盟=朝連)』飾磨支部結成されたのが103地域まって朝連中央連盟結成されたのが19451015でしたので飾磨足立国語講習所朝連よりまったことになります

 

 

朝連飾磨支部結成されたときこの地域にはすでに3つの国語講習所いていましたそこで飾磨支部この地域3国語講習所統合1030英賀東町飾磨朝連初等學院開校しました

 

この初等學院開校当時児童数130教員4でしたがわずか半年後19464飾磨初等學院児童数200えました朝鮮学校成長いがどれほどだったかがかりますこの地域には新日鉄広畑製鉄所姫路港がありここで労働従事していた朝鮮人同胞かったのでらの子供たちもかったのです

 

朝鮮中学校最初開校した地域姫路でした1946626姫路市飾磨区栄町2階建木造建物りて朝連飾磨学園中等部創立されましたこの学校日本全域最初開校した朝鮮中学校記録され、「日本中学校中退した小学校卒業者学歴該当者55登録朝鮮人中学生として登校しました

 

 

1946103新日鉄広畑製鉄所運動場1回運動会かれましたがこの行事には朝鮮学生教職員學父母地域同胞がおよそ2千人集まったことからこの地域在日同胞がどれだけんでいたかがかります

 

19474には朝連飾磨学園中等部独立して朝連飾磨中学校となり19484には西張朝鮮中学校改名1228には学校設置認可ました同校には北播州地域神戸三宮などでも通学生がいたという

 

西張朝鮮中学校には1948地元朝鮮人商工人出資兵庫県唯一吹奏楽部結成されましたが部員数12でした吹奏楽部員兵庫県各種同胞集会出演していましたが学校運営しくなると1948年末解散したと記録されています

 

 

一方朝鮮高等學校最初てられたのは東京でした当時東京にも数十国語講習所てられると19466朝連中央総本部第2回全国文化部長会議東京都内朝鮮中学校夜間中学校設置することが提案されこの提案れられ1946105東京朝鮮中学校開校しました姫路飾磨学園中等部開設されてからわずか3ぶりでした

 

板橋区役所から日本軍兵器倉庫げられ校舎けた東京朝鮮中学校最初入学生329教員11初代校長朝連尹槿委員長兼任しました東京朝鮮中学校1946118日東京都知事から各種学校認可けました

 

 

2年後19486東京朝鮮中学校1期生卒業高等学校併設決議した東京都知事東京朝鮮高等学校設置認可申請書提出しましたこの申請書2日後受理されこれに1948104東京朝鮮高等学校開校しました

 

東京朝鮮中学校高等学校生徒数急速増加1948には880だったのが19499には全校生徒1千人1136だったと記録され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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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조선인 잡지 <이오(イオ)>의 연재물 발생기의 조선학교에 따르면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재일조선인 국어강습소는 194596일 효고(兵庫)현 히메지(姫路)시 시카마(飾磨)구 아가미야(英賀宮)의 국어강습소였습니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이 지역의 한 동포가 자기 집에 16명의 아동을 모아놓고 국어강습을 시작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일주일 후인 1945913일 도쿄 아다치(足立)의 국어강습소도 문을 열었습니다. 해방 한 달도 되지 않아서 간사이(關西)와 간토(關東)에 조선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생긴 것입니다.

 

조선강습소 확장에 큰 노력을 기울였던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의 시카마(飾磨) 지부가 결성된 것이 103, 지역의 힘이 모여 조련 중앙연맹이 결성된 것이 19451015일이었으니, 아가미야와 아다치의 국어강습소는 조련보다 먼저 시작된 셈입니다.

 

 

특히 조련의 시카마 지부가 결성되었을 때 이 지역에는 이미 3개의 국어강습소가 문을 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련 시카마 지부는 이 지역 3개 국어강습소를 통합해 1030일 아가히가시초(英賀東町)에 조련시카마초등학원을 개교했습니다.

 

이 학원의 개교 당시 아동 수는 130, 교원이 4명이었는데, 불과 반년이 지난 19464월 시카마 초등학원의 아동수는 200명을 넘었습니다. 조선학교의 성장세가 얼마나 가팔랐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역에는 신닛테츠 히로하타(日鉄広畑) 제철소와 히메지 항구가 있어서, 이곳에서 노동에 종사하던 동포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들도 많았던 것입니다.

 

조선중학교가 가장 먼저 개교한 지역도 히메지였습니다. 1946626일 히메지시 시카마구(飾磨区) 사카에쵸(栄町)2층 목조건물을 빌어 조련 시카마학원 중등부가 창립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일본 전역에서 최초로 개교한 조선중학교라고 기록되었고, ‘일본 중학교를 중퇴한 자, 소학교 졸업자, 학력 해당자 55이 등록해 첫 조선인 중학생으로 등교했습니다.

 

 

1946103일 신닛테츠 히로하타 제철소 운동장에서 제1회 운동회가 열렸는데, 이 행사에는 조선학생, 교직원, 보호자, 지역 동포들이 약 2천명이 모였던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 재일동포가 얼마나 많이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19474월에는 조련 시카마학원 중등부가 독립해 조련 시카마중학교가 되었고, 19484월에는 세이방(西播)조선중학교로 개명. 1228일에는 학교설치 인가를 얻었습니다. 이 학교에는 기타반슈(北播州) 지역과 고베의 산노미야() 등에서도 통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세이방조선중학교에는 1948년 지역 조선인 상공인들의 출자로 효고현 유일의 취주악부가 결성되었는데, 부원수는 12명이었습니다. 취주악 부원들은 효고현의 각종 동포집회에 출연하곤 했는데, 학교 운영이 어려워지자 1948년 말 해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조선고등학교가 처음 세워진 곳은 도쿄였습니다. 당시 도쿄에도 수십 개의 국어강습소가 세워지자, 19466월 조련 중앙총본부 제2차 전국문화부장회의에서 도쿄도 안에 조선중학교와 야간중학교를 설치할 것이 제안되었고,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1946105일 도쿄에 조선중학교가 개교했습니다. 히메지에 시카마학원 중등부가 개설된 지 불과 3개월만이었습니다.

 

이타바시(板橋) 구청으로부터 일본군 병기창고 자리를 불하받아 교사를 마련한 도쿄조선중학교의 첫 입학생은 329, 교원은 11명이었고, 초대 교장은 조련의 윤근(尹槿) 위원장이 겸임했습니다. 도쿄조선중학교는 1946118일 도쿄도지사로부터 각종학교 인가를 받았습니다.

 

 

2년 후인 19486월 도쿄조선중학교는 1기생의 졸업을 앞두고 고등학교 병설을 결의한 후 도쿄 도지사에게 도쿄조선고등학교 설치 인가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이 신청서는 이틀 만에 수리되었고, 이에 따라 1948104일 도쿄조선고등학교가 개교했습니다.

 

도쿄조선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학생 수는 빠르게 증가해, 1948년에는 880명이었던 것이 19499월에는 전교생이 1천명이 넘어 1,136명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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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天皇無条件降伏により1945815朝鮮解放されると200した在日朝鮮人はジレンマに直面しました朝鮮人なのに朝鮮語せなかったりきができなかったからです在日1朝鮮語すことができましたが教育けることができず文盲率かったです日本まれた2朝鮮語せない大多数でした

 

しかしそれは理解できることです朝鮮本土でも日帝19383次朝鮮教育令じて各級学校朝鮮語授業禁止させました1942には朝鮮語研究えたという理由逮捕された朝鮮人反国家師範として処罰しました

 

 

在日朝鮮人状況本土朝鮮人よりも劣悪でしたでは在日1疏通をとるために基礎朝鮮語理解したりせたといますが学校生活社会生活はどちらも日本語使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からね

 

そうするうちに解放されるともう故郷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に朝鮮語ができないから生活しにくく学校でも職場でもう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えで皆焦りましたそれでいでられたのが国語講習所でしたこの国語日本語ではなく朝鮮語でした

 

国語講習所という名前朝鮮語教育機関めて登場したのは1907年夏京城でしたハングル先駆者周時經(チュ·シギョン, 1876-1914))先生京城尙洞教会内付設された夜学尙洞青年学院一般人対象<夏季国語講習所>開設1914まで毎年夏休みに京城地方朝鮮語講習開催しましたこの講習所では周時經先生直接作成した教材朝鮮語原理文法えました

 

 

周時經先生1908年夏季国語講習所卒業した弟子たちと国語研究学会組織190911にはその付設機構として国語講習所設置国語研究教授けましたこの国語講習所教授科目音学字分学格分學図解学變體學実用演習などなどでした

 

1910日本植民地支配後朝鮮語国語ぶことができなくなると講習所名称朝鮮語講習所えましたが純粋なハングルでハングルペゴッ한글배곧=ハングルを場所)」ぶこともありました1911<朝鮮語講習所><朝鮮語講習院>発展初等科中等科高等科研究科かなり密度国語学校発展しました

 

周時經先生191439くなった朝鮮語講習院出身弟子李奎榮(·ギュヨン)權悳奎(クォン·ドクギュ)金枓奉(キム·ドゥボン)などが講師として授業けましたが初等科1中等科6高等科5卒業生輩出した1917中断されました

 

 

1907から1917まで周時經先生主導いた夏季国語講習所国語講習所朝鮮語講習院修了した講習生550人余りに後日朝鮮語学会活動した崔鉉培(チェ·ヒョンベ)申明均(シン·ミョンギュン)金枓奉(キム·ドゥボン)權悳奎(クォン·ドクギュ)鄭烈模(チョン·ヨルモ)李奎榮(·ギュヨン)張志暎(チャン·ジヨン)鄭國采(チョン·グクチェ)金元祐(キム·ウォンウ)安東洙(アン·ドンス)など国語講習所出身です

 

解放後南北初期言語政策樹立決定的役割たした崔鉉培金枓奉いずれも周時經先生弟子であり朝鮮語講習所同期同窓でした今日南北使われているハングルが一部語彙いて文法的にほぼ原則つようになったのはこのためですつまり南北ともハングル専用横書そして文法的かした表記などを国語使用原則としてつようになったのは周時經先生国語講習所じて一貫して教育してこられたおかげです

 

 

解放後在日朝鮮人朝鮮語場所これを国語講習所んだのは偶然一致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日本による植民地時代 日本活動していた周時經先生弟子後学主導そのいだ可能性もあるとみられ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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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으로 1945815일 조선이 해방되자 2백만에 달했던 재일 조선인들은 딜레마에 부딪혔습니다. 조선인인데 조선어를 말하지 못하거나 읽고 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재일1세들은 조선어를 말할 수 있었지만 교육을 받지 못해 문맹율이 높았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난 2세들은 조선어를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습니다.

 

그런데 그건 이해할만한 일입니다. 조선 본토에서도 일제는 1938년의 제3차 교육령을 통해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 수업을 금지시켰습니다. 1942년에는 조선어를 연구하고 가르쳤다는 이유로 체포된 조선인들을 반국가사범으로 처벌했습니다.

 

 

재일조선인들의 상황은 본토 조선인들보다 더욱 열악했습니다. 집에서는 재일1세 부모와 소통하기 위해 기초 조선어를 이해하거나 말할 수 있었겠지만,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은 모두 일본어를 사용해야했으니까요.

 

그러다 해방이 되자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서도 조선말을 못하니 조선인 구실을 하기 힘들고, 학교든 직장이든 다닐 수가 없겠다는 생각에 모두 다급해졌습니다. 그래서 급히 만들어진 것이 국어강습소였습니다. 이때의 국어는 일본어가 아니라 조선어였습니다.

 

국어강습소라는 이름의 조선어 교육기관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07년 여름 경성이었습니다. 한글학의 선구자 주시경(周時經, 1876-1914))선생은 경성 상동교회 안에 부설된 야학 상동청년학원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계국어강습소>를 개설, 1914년까지 매년 여름방학 때 경성과 지방에서 조선어 강습을 개최했습니다. 이 강습소에서는 주시경 선생이 직접 작성한 교재로 조선어의 원리와 문법을 가르쳤습니다.

 

 

주시경 선생은 1908년 하계국어강습소를 졸업한 제자들과 함께 국어연구학회를 조직했고, 190911월에는 그 부설기구로 국어강습소를 설치, 국어연구와 교수를 계속했습니다. 이 국어강습소의 교수 과목은 음학(音學) 자분학(字分學) 격분학(格分學) 도해학(圖解學) 변체학(變體學) 실용연습(實用演習) 등으로 전문적인 강의였습니다.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이후 조선어를 국어라고 부르지 못하게 되자, 강습소의 명칭을 <조선어강습소>로 바꾸었지만, 아예 순 한글로 <한글배곧(=한글을 배우는 곳)>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1911<조선어강습소><조선어강습원>으로 발전되어 초등과, 중등과, 고등과, 연구과를 두었고, 상당히 밀도 있는 국어학교로 발전시켜 이를 효율적으로 보급하고 연구했습니다.

 

주시경 선생이 191439세의 나이로 사망하신 뒤에는 조선어강습원 출신의 제자 이규영, 권덕규, 김두봉 등이 강사로 나서 수업을 이어나갔지만, 1917년 초등과 1, 중등과 6, 고등과 5회의 졸업생을 배출한 후 1917년에 중단되었습니다.

 

 

1907년부터 1917년까지 주시경 선생의 주도로 계속된 하계국어강습소, 국어강습소, 조선어강습원을 수료한 강습생은 550여명에 달했고, 후일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최현배(崔鉉培신명균(申明均김두봉(金枓奉권덕규(權悳奎정열모(鄭烈模이규영(李奎榮장지영(張志暎정국채(鄭國采김원우(金元祐안동수(安東洙) 등도 바로 이 국어강습소 출신입니다.

 

특히 해방 이후 남북한의 초기 언어정책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최현배와 김두봉은 모두 주시경 선생의 제자이자 조선어강습소의 동기동창이었습니다. 오늘날 남북한에서 사용되는 한글이 일부 어휘를 제외하고는 문법적으로 거의 동일한 원칙을 가지게 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 남북한이 모두 한글전용과 가로쓰기, 문법적 형태를 살린 표기 등을 국어사용의 원칙으로 갖게 된 것은 주시경 선생이 국어강습소를 통해 일관되게 교육해 오신 덕분입니다.

 

 

해방 이후 재일조선인들이 조선어를 배우는 곳을 마련하고 이를 <국어강습소>라고 불렀던 것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활동하던 주시경 선생의 제자나 후학이 주도하여 그 이름을 이어받았을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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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15ソウル江南駅交差点のミジンプラザスペース22では在日写真作家曺智鉉(1938~2016)先生写真展かれました展示会のタイトルは猪飼野」、副題日本さな済州でした

 

 

百濟野4~8世紀まり猪飼野1920年代~1973生野1973~今日につながるこの地域朝鮮人史2番目時期最後姿した写真です

 

 

展示会観覧客最初にとらえたのは朝鮮市場つまりのコリアタウン商店街地域にかかっていた横断幕だったようです総連側民団側広報戦しかったことがれたからですこの展示会企画者安海龍(アン·ヘリョン)先生YTNとのインタビューで当時朝鮮市場分断線のない分断だったと説明しました

 

 

イデオロギー対決様子いても曺智鉉先生写真1960年代後半猪飼野朝鮮人村朝鮮市場様子そしてその生活していた在日朝鮮人辛酸だったらしを々しくせてくれます前文くの猪飼野朝鮮人作家言語叙述した内容曺智鉉先生視覚的強調していました

 

 

小舟って平野川をあさりながら古鉄をすくう男性たちの姿川辺欄干んで洗濯物女性姿いたドラムにしたり路地少年たちの姿韓服盛裝して外出する女性たちの姿荷物をいっぱいんだ手押をかろうじてっている老人姿、……, 

 

 

…… バイクにってぎる海産物えと座板おばあさんの姿日本式制服てバスに男学生たちとチマチョゴリ制服闊歩する女子学生たちの姿などは1960年代猪飼野朝鮮人たちがどのようにらしたのかを々しくえます

 

 

猪飼野でも曺智鉉先生写真展かれたことがありました20161122から6日間生野区御幸森小学校ででした曺智鉉先生長女曺智恵さんが父親遺品整理していたところ4,000白黒写真発見そのから50んでパネルで展示その他数十枚写真をフィルムして映像展示えました

 

 

127日付<民団新聞>はこの展示会写真民族衣装路地裏をゆうぜんと女性たちにんにくやらやら白菜ががうずまれた朝鮮市場」、満面みで力強きているハルモニの横顔などいずれも在日同胞歴史をいまにえるもの、「会場れた市民あの写真かしいなづけて感激する姿られたえた

 

 

父親作品展示会開催した曺智恵さんもインタビューで、「あのしかった時代苦労しながらもたくましくきてきた同胞写真から当時歴史息吹じるとし、「在日同胞不条理差別のなかで懸命きたしとしててもらいたいったということです

 

 

この展示会のタイトルは追悼-曺智鉉猪飼野写真展でしたがこれは曺智鉉先生2016年春77他界されたためでした1938済州島まれ10父親んでいた猪飼野移住した曺智鉉先生27から半世紀自分第二故郷猪飼野姿撮影しましたった猪飼野写真5千枚余りにるそうです

 

 

曺智鉉先生生前自分作品めて写真集猪飼野-追憶1960年代2003東京新幹社)』出版しています猪飼野朝鮮人たちと一緒らしていたある日本人住民生野図書館でこの写真集せられた曺智鉉先生平野川辺写真40年余自分姿発見ブログに当時るポスティングをしていました

 

 

大変しかった猪飼野時代えてきた在日朝鮮人同胞たちも尊敬していますがこのような姿写真後世した々の努力には本当感謝せざるをません(*)

 

YTN報道映像: https://www.youtube.com/watch?v=88hjCJ8EyqA&t=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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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15일 서울 강남역 사거리의 미진프라자 스페이스22에서는 재일 사진작가 조지현(曺智鉉, 1938~2016) 선생의 사진전이 열렸습니다. 전시회 제목은 <이카이노(猪飼野)>, 부제는 일본 속 작은 제주였습니다.

 

 

쿠다라노 시기(4-8세기)에 시작되어 이카이노 시기(1920년대-1973)를 거쳐 이쿠노(1973-오늘날) 시기로 이어지는 이 지역 조선인사에서 두 번째 시기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사진들입니다.

 

 

전시회에서 관람객의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것은 조선시장, 즉 지금의 코리아타운 상가지역에 걸렸던 현수막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총련 측과 민단 측의 홍보전이 치열했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전시회의 기획자 안해룡 선생도 YTN과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조선시장을 분단선 없는 분단의 거리였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데올로기 대결의 모습을 제쳐놓더라도 조지현 선생의 사진들은 1960년대 후반 이카이노 조선인 마을과 조선시장의 모습, 그리고 그 안에서 생활했던 재일조선인들의 신산했던 삶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앞글에서 보았던 여러 이카이노 조선인 작가들이 언어로 서술했던 내용을 조지현 선생은 시각적으로 강조해 주고 있었습니다.

 

 

조각배를 타고 히라노카와 강바닥을 뒤지며 고철을 건지는 남성들의 모습, 천변 난간에 줄을 매고 빨래를 너는 여인의 모습, 빈 드럼통을 놀이터 삼거나 골목에서 구슬을 치는 소년들의 모습, 한복으로 성장하고 나들이 하는 아낙네들의 모습, 짐을 잔뜩 실은 손수레를 힘겹게 끌고 있는 노인의 모습, ....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남자에게 해물을 사라고 외치는 좌판 할머니의 모습, 일본식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타는 남학생들과 치마저고리 교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학생들의 모습 등은 1960년대 이카이노의 조선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전합니다.

 

 

이카이노에서도 조지현 선생의 사진전이 열린 적이 있었습니다. 20161122일부터 6일간 이쿠노구의 미유키모리 초등학교에서였습니다. 조지현 선생의 장녀 조지혜(曺智恵)씨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약 4,000장의 흑백사진을 발견, 그중에서 50점을 선택해 패널로 전시했고, 그밖에 수십 장의 사진을 필름으로 만들어 영상전시도 곁들였습니다.

 

 

127일자 <민단신문>은 이 전시회의 사진들을 민족의상을 입고 골목을 유유히 걷는 여성들, 마늘과 건어와 배추가 수북이 쌓인 조선시장, 함박웃음으로 힘차게 살아가는 할머니의 옆모습 등 모두 재일동포의 역사를 고스란히 전하는 것들이라고 전하면서 전시회장을 찾은 시민들은 저 사진 그립다며 눈을 가까이 대고 감격해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덧붙였습니다.

 

 

아버지의 작품 전시회를 개최한 조지혜씨도 인터뷰를 통해 그 어려웠던 시절, 고생하면서도 씩씩하게 살아온 동포들의 사진을 보면 당시의 역사, 숨결을 느낄 수 있다면서 재일동포들이 부조리와 차별 속에서도 열심히 산 증거로 보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전시회의 제목은 <추모-조지현 이카이노사진전>이었는데 이는 조지현 선생이 2016년 봄 77세를 일기로 타계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1938년 제주도에서 태어나 10세에 아버지가 살고 있던 이카이노로 이주한 조지현씨는 27세부터 반세기동안 자신의 2의 고향이카이노의 모습을 촬영했습니다. 그가 찍은 이카이노 사진은 5천여장에 이른다고 합니다.

 

 

조지현 선생은 생전에 자신의 작품을 모아 <사진집 이카이노-추억의1960년대(2003, 도쿄, 신칸샤)>를 출판한 바 있습니다. 이카이노의 한 일본인 주민은 이쿠노 도서관에서 이 사진집에 실린 조지현 선생의 하리노카와 천변 사진에서 40여년 전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블로그에 당시를 회고하는 포스팅을 했더군요.

 

 

힘들고 어려웠던 이카이노 시절을 견뎌낸 재일조선인 동포들도 존경스럽습니다만, 이같은 모습을 글과 사진으로 후세에 남긴 분들의 노력에는 진짜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

 

YTN의 보도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88hjCJ8EyqA&t=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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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リ學校舞踊靴>1次来日団兵庫県宝塚大阪府生野訪問することになりますがこのつの地域くて在日朝鮮人して微妙対比されます兵庫県では朝鮮関連社会科学んだ反面大阪猪飼野在日朝鮮文学産室です個人的観察ぎませんがこのようないがじられるのが不思議です

 

えば在日朝鮮人歴史政治経済学研究、「兵庫朝鮮関係研究会むくげの中心活発ですそしてこのつの神戸市にある神戸学生青年センターっています宝塚朝鮮人歴史書<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1997)>著者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先生研究パートナー近藤富男先生兵庫県宝塚出身です

 

 

この地域った芸術家写真映像部門活動する々がほとんどです鄭世和(チョン·セファ)先生写真家この20年間朝鮮人関連行事かさず撮影してこられたドキュメンタリー監督金稔万(キム·イムマン)先生もこの地域活動しています

 

一方大阪猪飼野在日朝鮮文学産室です説明不要秀作大河小説火山島(1965-1997)済州島猪飼野背景ですが著者金石範(キム·ソクボム, 1925-)先生自身猪飼野出身です慶尚南道馬山まれ10東京作品活動った金達洙キム·ダルス1917~2014先生とともに在日朝鮮文学先駆者といえるです

 

金泰生キム·テセン1924~1986先生済州島生まれで1930猪飼野移住叔母工員としてきました肺結核静岡山中療養しながらめましたが短編コップ1955)」皮切りに小説集骨片1977)」猪飼野背景にした日本地図1978)」「人間地図1985)」「旅人伝説(1985)などを発表、「苦痛きた無名々をめておく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いう創作動機らかにしました

 

 

金時鐘(キム·シジョン, 1929-)先生元山まれ済州島小学校いましたが1948猪飼野渡日1953創刊されたつつじ同人として作品活動めました地平線1955)』、『和風土器1957)』、『新潟1970)』、『猪飼野詩集1978)』、『光州詩篇1983)』、『化石1998)』などなくとも6詩集出版しています

 

梁石一(ヤン·ソクイル, 1936-)先生猪飼野生まれで両親済州島出身でした貧困暴力不倫まった猪飼野生活描写しましたが<(1998)>代表作です作品運河1981)」猪飼野平野川にまつわる物語いた作品ですね

 

宗秋月(ジョン·チュワル)先生佐賀県生まれですが16仕事めて大阪猪飼野移住しました洋服縫製外販きの露天商靴工場ハリコボンドチル)、簡易食堂経営など々な職業々としながら直接経験した猪飼野生活きました彼女られている詩集には、「猪飼野---うた(1984)」があります

 

 

元秀一(ウォン·スイル,1950-)先生猪飼野出身最初創作集のタイトルから猪飼野物語ですこの副題済州島からたちというからもかるように済州島からってきた在日朝鮮人1たちのむちゃくちゃで生命力あふれるらしがかれています

 

金蒼生(キム·チャンセン, 1951-)先生作品集<>とエッセイ<猪飼野><猪飼野発韓国語カード>などがあります代表短編である<><三姉妹>女性であり独立した主体としての人間生活回復しようとする意志作品です

 

かった朝鮮人人口12万人ぎなかった猪飼野からこれほどくのトップクラスの文学者輩出されたのは偶然でしょうかもしかしたら猪飼野凄絶人生鍛冶屋のふいごや槌打ちのように朝鮮人レベルの文学作品形象化するようにしてくれ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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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무용신> 1차 일본방문단은 효고현 다카라즈카와 오사카부 이쿠노를 방문하게 됩니다만, 이 두 지역은 가까우면서도 재일조선인과 관련해 미묘하게 대비됩니다. 효고현에서는 조선관련 사회과학이 진전된 반면, 오사카 이카이노는 재일조선문학의 산실입니다. 개인적인 관찰에 불과하겠지만, 이같은 차이가 느껴지는 게 신기합니다.

 

예컨대 재일조선인 역사와 정치경제학 연구는 <효고조선관계연구회(兵庫朝鮮関係研究会)><무쿠게회(むくげの)>를 중심으로 활발합니다. 그리고 이 두 모임은 고베시에 자리잡은 <고베학생청년센터(神戸学生青年センタ)>에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다카라즈카의 조선인 역사서 <가극의 거리의 또 다른 역사(1997)>의 저자 정홍영 선생과 그의 연구 파트너 콘도 도미오 선생도 효고현 다카라즈카 출신입니다.

 

 

이 지역에서 제가 만난 예술가도 사진와 영상 부문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정세화 선생님도 사진가이시고, 지난 20여년간 조선인 관련 행사를 촬영해 오신 다큐멘터리 감독 김임만 선생님도 이 지역에서 활동하십니다.

 

한편 오사카 이카이노는 재일조선문학의 산실입니다. 설명이 따로 필요 없는 수작 대하소설 <화산도(1965-1997)>는 제주도와 이카이노가 배경인데, 저자 김석범(金石範, 1925-) 선생 자신이 이카이노 출신입니다. 경남 마산 출생으로 10세에 도쿄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하신 김달수(金達洙, 1917-2014)선생과 함께 재일조선문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분입니다.

 

김태생(金泰生, 1924-1986) 선생은 제주도 출생으로 1930년 이카이노로 이주, 숙모 밑에서 자라며 공원으로 일했습니다. 폐결핵으로 시즈오카 산중에서 요양하면서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단편 가래컵(1955)을 시작으로, 첫 소설집 골편(骨片, 1977)에 이어 이카이노를 배경으로 한 나의 일본지도(日本地図, 1979), 나의 인간지도(人間地図, 1985), 나그네 전설[旅人伝説, 1985)등을 발표하면서, “고통스럽게 살아간 무명의 사람들을 어둠 속에 묻어 둘 수 없었다는 창작동기를 밝혔습니다.

 

 

김시종(金時鐘, 1929-) 선생은 원산에서 태어나 제주도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으나, 1948년 이카이노로 도일, 1953년에 창간된 <진달래>의 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지평선(1955)>, <일본풍의 토기(1957)>, <니가타(新瀉, 1970)>, <이카이노 시집(1978)>, <광주시편(1983)>, <화석의 여름(1998)> 등 적어도 6권의 시집을 출판한 바 있습니다.

 

양석일(梁石日, 1936-) 선생도 이카이노(猪飼野) 태생으로, 부모는 제주도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가난과 폭력과 불륜으로 얼룩진 이카이노의 생활을 묘사했는데 <피와 뼈(1998)>이 대표작입니다. 그의 작품 <운하(1981)>는 이카이노의 히라노카와에 얽힌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지요.

 

종추월(宗秋月, 1944-) 선생은 사가(佐賀)현 출생이지만 16세에 일자리를 찾아 오사카 이카이노로 이주했습니다. 양복 봉제와 외판, 오코노미야키 노점상, 신발공장 하리코(본드칠), 간이식당 경영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직접 경험한 이카이노 생활을 시로 썼습니다.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시집으로는 <이카이노-여자-사랑-노래(猪飼野···うた, 1984)>이 있습니다.

 

 

원수일(元秀一, 1950-) 선생도 이카이노 출신으로 그의 첫 창작집 제목부터 <이카이노 이야기>입니다. 이 책의 부제가 제주도에서 온 여자들이라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제주도에서 건너온 재일조선인 1세 어머니들의 억척스럽고 생명력 넘치는 삶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김창생(金蒼生, 1951-) 선생은 작품집 <빨간 열매>와 에세이집 <나의 이카이노>, <이카이노발 한국어 카드> 등이 있습니다. 그의 대표 단편인 <빨간 열매><세 자매>는 여성이자 독립된 주체로서의 인간의 삶을 회복하려는 의지가 돋보이는 작품들입니다.

 

가장 많을 때의 조선인 인구가 12만명에 불과했던 이카이노에서 이처럼 많은 정상급 문학가들이 배출된 것은 우연일까요? 어쩌면 이카이노의 처절한 삶이 대장간의 풀무와 망치질처럼 조선인들을 단련시켜, 수준 높은 문학작품으로 형상화하도록 주었던 것은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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