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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初舞踊靴キャンペーンがわった20203鄭世和先生宝塚朝鮮人追悼碑をまたされました3月末追悼碑がついに建設されるということでした。 「ついにとおっしゃったのが不思議でしたこの追慕碑がどれほど準備されどれほどくの困難経験したになってようやくてられるにったのかをらなかったには当然そのような疑問がありました

 

そしてめて日本にある朝鮮人追悼碑について真剣めました専門家にも追悼碑慰霊碑についてわせました間専攻社会学犯罪学だったので歴史学韓日間近代史についてよくりませんでしたし追悼碑についてはなおさらりませんでした

 

 

ある図録から日本全土170朝鮮人追悼碑てられていることがかりましたまた20年間日本取材をしてきた写真家安海龍(アン·ヘリョン)先生から自分たにれた追悼碑30るので日本には朝鮮人追悼碑200ほどあることもかりました。 『宝塚朝鮮人追悼碑201回目追悼碑になるわけだないながら熱心調査しました

 

日本でもけは答志しました鄭世和先生だけでなく近藤富男先生真銅敏之先生積極的手伝ってくれました鄭世和先生鄭鴻永先生息子さんであることをったのもこのでしたこの々は舞踊靴キャンペーンにも積極的参加してくださり崔承喜研究にもきなになってくださったのでその々にいつも感謝気持ちをっていました

 

2回目舞踊靴キャンペーンの日本チームあい結成されました近藤富男先生鄭世和先生そして真銅敏之先生主軸になり在日朝鮮学校学生青年たちを後援することを目標にしました

 

 

近藤富男先生チームあいという名前子供(아이)たちを見守(eye)主体(I)たちのまりという意味めたとえてくれましたこのような趣旨同調する々が<チームあい>々と参加されました

 

日本<チームあい>結成刺激韓国でも在日朝鮮学校後援するためのられました名前日本<チームあい>わせるために韓国<チームあい>めました李仁珩先生めて9在日朝鮮学校後援者がこのまりをめました

 

日本韓国<チームあい>2020102回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じて160舞踊靴用意しましたこれらの舞踊靴2020近畿地域朝鮮学生芸術競演大會学生たちにされましたが近藤富男先生直接競演会場学生たちに舞踊靴えました

 

 

この近藤富男先生鄭世和先生一緒競演大會をすべて参観されたそうですそして準備した挨拶をする自分直接観覧した舞踊作品する感想えたそうですまた近藤富男先生挨拶にこんな言葉がありました

 

日本人としてこの=韓国後援者たちかされ韓国とアメリカの々にもえながらわせて在日朝鮮学校生徒たちにする支援めることにしました

 

この言葉いたという表現さりましたけばくことができます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めたのも90年前崔承喜先生朝鮮舞踊朝鮮学校生徒たちがいでいるという事実感動したからでした

 

 

感動したまれば意味深いことができます近藤富男先生1983鄭鴻永先生めてったいたようです。 「一目ぼれしたということですそのように一度動いた35年後宝塚朝鮮人追悼碑舞踊靴キャンペーンというんだのです

 

鄭鴻永先生近藤富男先生友情感動しましたあんな友情同志愛一生大事にしていた々ならんでいながら一緒仕事ができるとい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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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무용신 캠페인이 끝난 20203월 정세화 선생님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이야기를 또 하셨습니다. 3월말에 추도비가 마침내 건립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마침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의아했습니다. 이 추도비가 얼마나 오래 준비되었고,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은 후에 비로소 건립되기에 이르렀는지 몰랐던 저로서는 당연히 그런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일본에 있는 조선인 추도비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전문가들에게도 추도비와 위령비에 대해 문의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전공이 사회학, 범죄학이었기 때문에 역사학, 특히 한일간 근대사에 대해서 잘 몰랐고, 추도비에 대해서는 더더욱 몰랐습니다.

 

 

한 도록을 통해 일본 전역에 170개의 조선인 추도비가 세워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0년 동안 일본 취재를 해온 사진작가 안해룡 선생으로부터 자신이 새로 찾은 추도비도 30개에 달하기 때문에, 일본에는 조선인 추도비가 2백개쯤 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201번째 추도비가 되는 셈이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조사했습니다.

 

일본에서도 도움은 답지했습니다. 정세화 선생님뿐 아니라 콘도 도미오 선생님과 신도 도시유키 선생님께서 적극적으로 도와 주셨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이 정홍영 선생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안 것도 이때였습니다. 이분들은 무용신 캠페인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셨고, 최승희 연구에도 큰 힘이 되어 주셨기 때문에, 그분들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2차 무용신 캠페인 즈음에 일본에서 <팀아이>가 결성되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과 정세화 선생님, 그리고 신도 도시유키 선생님께서 주축이 되셨고, 재일 조선학교를 포함해 젊은 학생청년들을 후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셨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팀아이>라는 이름도 “‘아이들을 사랑()으로 지켜보는(eye) 주체(I)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정하셨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이같은 취지에 동조하는 분들이 <팀아이>에 잇달아 참여하셨습니다.

 

일본 <팀아이>의 결성에 자극을 받아 한국에서도 재일조선학교를 후원하기 위한 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모임의 이름도 일본 <팀아이>에 맞추기 위해 한국 <팀아이>로 정했습니다. 이인형 선생과 저를 포함해 9명의 재일조선학교 후원자들이 이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팀아이>202010월 제2차 무용신 캠페인을 통해 170켤레의 무용신을 마련했습니다. 이 무용신들은 2020년 깅키지역 조선학생 예술경연대회에서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는데,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직접 경연대회장에 가셔서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전하셨습니다.

 

 

이날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정세화 선생님과 함께 경연대회를 모두 참관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준비하신 인사말을 하시기 전에 자신이 직접 관람한 무용작품들에 대한 감상도 전하셨다고 했습니다. 또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인사말 중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나는 일본인으로서 이분들(=한국의 후원자들)에게 마음이 움직여서 한국과 미국 사람들에게도 호소하면서 힘을 모아 재일 조선학교 학생들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이 말씀 중 마음이 움직였다는 표현이 제 마음에 꽂혔습니다. 마음이 움직이면 일할 수 있습니다. 제가 무용신 캠페인을 시작한 것도, 90년 전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을 조선학교 학생들이 지금도 이어받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움직이고, 감동한 마음들이 모아지면 뜻 깊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1983년 정홍영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도 마음이 움직이셨던 것 같습니다. “나는 그의 말투에 한 눈에 끌렸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번 움직인 마음이 35년 후에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무용신 캠페인>이라는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저는 특히 정홍영 선생님과 콘도 도미오 선생님 사이의 우정에 감동했습니다. 저런 우정과 동지애를 평생 간직하셨던 분들이라면 기꺼이 따르면서 함께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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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世和先生がその昼食宝塚朝鮮人追悼碑をおっしゃっていましたがはあまりけませんでしたそれだけ朝鮮舞踊でいっぱいでした

 

舞踊競演大會わり韓国ってきましたが鄭世和先生202015神戸朝鮮高級学校吹奏楽部年例演奏会るよう招待されましたおそらくがあまりにも舞踊だけに執着していることをそうとしたのでしょうそれではまた大阪きました神戸朝高吹奏楽部年次演奏会素晴らしかったです

 

 

その朝鮮学校部活のレベルがいことがわかりました吹奏楽部演奏非常素晴らしくプロフェッショナル ミュージシャンの演奏りませんでしたどうやって高校生たちが部活練習したことがあんなに素晴らしい演奏につながるのだろうかきました朝鮮学校舞踊部学生たちの公演もとても素晴らしかったというえがよみがえりました

 

韓国でもアメリカの生活でも音楽公演芸術展示会によくっていましたメトロポリタン美術館やニューヨークフィルハーモニー管弦楽団演奏会年間会員権更新しながら定期的参加ニューヨークバレエやオペラもよくましたそうだったので芸術作品公演水準だと自負しています

 

しかし朝鮮学校生徒たちの舞踊公演吹奏楽演奏会にまったくくも邪魔でもありませんでしたそれだけレベルがかったです放課後しずつ練習して學父母々をしませる学芸会のレベル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国際舞台しても遜色ないほど素晴らしかったです

 

 

神戸朝高吹奏楽演奏会でも舞踊部生徒たちが賛助出演をしましたはもう一度朝鮮舞踊ながら2月前競演大會作品感興ることができました

 

そうするうちにふと崔承喜先生朝鮮舞踊をこんなにも立派伝授してきている生徒たちにかしてあげたいといましたそしてそんなえをチョン·セファ先生えました

 

ということで<舞踊靴キャンペーン>まりました20201韓国ってすぐに"朝鮮学校舞踊部学生たちに舞踊靴ろう"というキャンペーンをめました最初目標として神戸朝高舞踊部学生たちの練習公演のために舞踊靴ることにしました

 

 

募金額予想よりくなり神戸朝高生徒たちだけでなく四国朝鮮学校にも舞踊靴えることができました最初舞踊靴キャンペーンに積極的参加してくださった李仁珩(·インヒョン)先生31神戸朝高卒業式参観卒業式舞踊部学生たちがまった舞踊靴しました四国朝鮮学校直接訪舞踊靴手渡しました

 

この舞踊靴意外事件だったのか朝鮮学生がったそうですにはなぜ神戸朝高だけなのか?」というがあったということでたちはさっそく二次武勇靴キャンペーンをめました近畿地域朝鮮高級学校舞踊部生徒たちに舞踊靴されましたところで東京広島学生たちと中級および初級学生たちにもこのらせがえられたことをりました

 

鄭世和先生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けましたそれで2年半にわたって日本全土朝鮮学校舞踊部生徒たちにみんな舞踊靴えることができましたこのキャンペーンに参加してくださった々は韓国日本400この々が寄付した2700ウォンの基金1100舞踊靴えることができました

 

 

後日がある朝鮮学校訪問した、「先生舞踊靴2けました中級学校にももらって高級学校進学したにまたもらいましたという生徒がいました

 

その学生言葉舞踊部学生たちが練習をとても熱心にするそうですそれで舞踊靴月行けず舞踊靴2ずつれたりするそうです

 

それをいてからどうしてもたちが舞踊化キャンペーンをもっと頑張らないといけないうように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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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화 선생님이 그날 점식식사 자리에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말씀하셨지만 저는 그리 귀담아 듣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제 머리 속은 조선무용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무용경연대회가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정세화 선생님은 202015일의 고베조선고급학교 취주악부 연주회에 오라고 초대하셨습니다. 아마도 제가 너무 무용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을 바로잡아 주시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또 오사카에 갔습니다. 고베조고 취주악부의 연례 연주회는 훌륭했습니다.

 

 

그때 저는 조선학교의 동아리활동 수준이 높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취주악단의 연주는 매우 훌륭했고 프로페셔널 음악가들의 연주에 못지않았습니다. 어떻게 고등학생들이 동아리 활동으로 연습한 것이 저렇게 훌륭한 연주로 이어지는 것일까? 놀라웠습니다.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의 공연도 매우 훌륭했었다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저는 한국에서나 미국 생활 중에도 음악 공연이나 예술 전시회를 자주 다녔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는 연간 회원권을 갱신해 가면서 정기적으로 참석했고, 뉴욕 발레와 오페라도 자주 보았습니다. 그 때문에라도 저는 예술 작품이나 공연을 보는 수준이 높은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학교 학생들의 무용공연이나 취주악콘서트는 제 눈이나 귀에 전혀 거슬리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수준이 높았습니다. 방과 후에 조금씩 연습해서 학부모님들을 즐겁게 하는 학예회 수준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국제무대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했습니다.

 

 

고베조고 취주악 연주회에서도 무용부 학생들이 찬조출연을 했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조선무용을 보면서, 두 달 전에 보았던 경연대회의 작품들의 감흥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을 이렇게도 훌륭히 전수해 오고 있는 학생들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정세화 선생님께 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용신 캠페인>이 시작되었습니다. 20201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저는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보내자는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첫 목표로 고베조고 무용부 학생들의 연습과 공연을 위해 무용신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모금액이 예상보다 많아져서 고베조고 학생들에게뿐 아니라 시코쿠조선학교에도 무용신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무용신 캠페인에 적극 동참해 주신 이인형 선생과 함께 저는 31일의 고베조고 졸업식을 참관했고, 졸업식 후에 무용부 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무용신을 전달했습니다. 시코쿠조선학교도 직접 방문해서 무용신을 전달했습니다.

 

이 무용신 선물이 뜻밖의 사건이었는지 조선학생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다고 합니다. 소문 중에는 왜 고베조고뿐인가?”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해서, 우리는 바로 2차 무용신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깅키지역 고급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이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쿄와 히로시마의 학생들과 중급 및 초급학생들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진 것을 알았습니다.

 

정세화 선생님과 저는 무용신 캠페인을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약 2년 반에 걸쳐서 일본 전역의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모두 무용신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캠페인에 참여해 주신 분들은 한국과 일본에서 4백명에 이르렀고, 이분들이 기부하신 약 27백만원의 기금으로 11백 켤레의 무용신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후일 제가 어떤 조선학교를 방문했을 때, “선생님, 저는 무용신을 두 번이나 받았어요. 중급학교 때에도 받았고, 고급학교 진학한 뒤에 또 받았어요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의 말이 무용부 학생들이 연습을 아주 열심히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헝겊 무용신은 몇 달 가지 못하고, 가죽 무용신도 일 년에 두어 켤레씩 망가지곤 한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무용신 캠페인을 더 열심히 벌여야 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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はソウル国立大学社会学ニューヨーク州立大学院犯罪学勉強した研究者です20年間アメリカの大学勤務した韓国2017から独立研究者として朝鮮舞踊家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研究めました研究分野犯罪から芸術えてせでした

 

2017年夏崔承喜先生のヨーロッパ公演調査しながらそののダンスと人生魅了されましたヨーロッパの取材記執筆すぐにアメリカと日本公演調べましたアメリカ公演くなかったのですぐわらせることができましたが崔承喜先生日本公演調査にはくの時間がかかりました日本崔承喜先生舞台活動期間一番長かったからです

 

 

日本調査2018年夏からまりました北海道名寄から沖縄那覇まで日本42都市崔承喜先生公演調べました3年間収集された新聞雑誌記事数百件撮影された都市劇場写真数千枚しました

 

くの資料収集しましたが依然として崔承喜先生りを推測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ほとんどの舞踊資料写真であり映像資料一件もなかったからです朝鮮解放された北韓った崔承喜先生映像資料はたまにありましたが1930年代風靡した彼女代表作品映像としてっていませんでした

 

崔承喜朝鮮舞踊特徴ともいえるきときをしくせる映像はほとんどありませんでした日本とヨーロッパとアメリカの公演評論記事みながらてくるダンス動作する叙述じて崔承喜先生舞踊姿想像してみるだけでした

 

 

201910京都大阪神戸岡山いながら崔承喜先生関西公演調べていました京都調査中偶然朝鮮学校そこでチョ·ミョンホ校長先生とユン·ギョンスク舞踊教員うことができましたらは1031から112まで大阪在日朝鮮学生中央芸術競演大會かれそのコンテストの舞踊コンテストもまれるとえてくれました

 

月後大阪大阪朝鮮高級学校講堂かれた舞踊競演大會3日間ずっと参観しましたそれは研究起爆剤になりました文章写真だけで朝鮮武勇りを実際たからです生徒たちのダンスの動作これまで研究してきた崔承喜先生のダンスにいないとはっきりとじることができました

 

 

自分研究目的のために写真映像撮影しましたが今振ってみるとそのほとんどはちませんっているほどえてえるだけじられるものですが当時朝鮮舞踊実際をよくりませんでした写真映像す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が生徒たちの競演大會じて崔承喜先生のダンスにする貴重糸口たことはらかでした

 

この舞踊競演大會はもうつの運命的出会いました鄭世和先生ったのです競演大會初日20191031でしたまれつき社交性鄭世和先生をかけてきてはなぜこの競演大會参観しているのかをおしましたそうして二人対話まりたちの出会いは共助協力につながりました

 

在日同胞社会しい鄭世和先生から朝鮮学校朝鮮舞踊についておその情報はこれまでばらばらにまれていた資料秩序生命力みました崔承喜朝鮮舞踊研究にもみがつきれないように熱心いていきました

 

 

その鄭世和先生昼食をとりながらめて宝塚朝鮮人追悼碑建立されるときましたそのはそれがどういうことなのかもからず朝鮮舞踊夢中になったになぜそんなことをおっしゃったのかも理解できませんでした

 

ところでそのおっしゃったその言葉4ぎた今日宝塚朝鮮人追悼碑についてこのかせるきっかけに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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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서울국립대학교에서 사회학,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범죄학을 공부한 연구자입니다. 20년간 미국 대학에서 근무한 후에 한국에 돌아와, 2017년부터 독립연구자로 조선무용가 최승희 선생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연구 분야를 범죄에서 예술로 바꾸니 행복했습니다.

 

2017년 여름, 최승희 선생의 유럽공연들을 조사하면서 그분의 춤과 삶에 매료되었습니다. 유럽 취재기 집필을 마치고, 곧바로 미국과 일본 공연을 조사했습니다. 미국 공연은 많지 않았으므로 금방 끝낼 수 있었지만, 최승희 선생의 일본 공연 조사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일본은 최승희 선생의 주요 무대였고 활동 기간도 가장 길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조사는 2018년 여름부터 시작됐습니다. 저는 홋카이도 나요로에서 오키나와의 나하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42개 도시를 방문해 최승희 선생의 공연을 조사했습니다. 3년 동안 수집된 신문잡지의 기사가 수백 건, 촬영된 도시와 극장의 사진들이 수천 장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자료를 수집했지만 저는 여전히 최승희 선생의 춤사위를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무용 자료는 글과 사진이었고 영상 자료는 한 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이 해방된 후 북한으로 간 최승희 선생의 영상 자료는 더러 있었지만, 1930년대에 풍미했던 그의 대표작품들은 영상으로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특히 최승희 조선무용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발동작과 어깨동작을 자세히 보여주는 영상이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일본과 유럽과 미국 공연의 평론기사들을 읽으면서 이따금씩 나오는 춤 동작에 대한 서술을 통해 최승희 선생의 무용 자태를 상상해 볼 뿐이었습니다.

 

 

201910, 저는 교토와 오사카, 고베와 오카야마를 다니면서 최승희 선생의 간사이 공연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교토 조사 중에 우연히 조선학교를 방문했고, 거기에서 조명호 교장선생님과 윤경숙 무용교원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1031일부터 112일까지 오사카에서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가 열리며, 그 경연대회 중에 무용경연대회도 포함된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한 달 후에 저는 다시 오사카에 갔고, 오사카조선고급학교 강당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를 3일 동안 내내 참관했습니다. 그것은 제 연구에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글과 사진으로만 보던 조선무용의 춤사위를 실제로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의 춤동작이 그동안 내가 연구해 오던 최승희 선생의 춤사위임에 틀림없다고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제 연구목적을 위해서 사진과 영상을 촬영했습니다만, 지금 돌아보면 그 대부분은 유용하지 않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낄 수 있는 법인데, 당시에 저는 조선무용의 실제를 잘 몰랐습니다. 쓸모 있는 사진이나 영상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학생들의 경연대회를 통해서 최승희 선생의 춤에 대한 귀중한 실마리를 얻은 것은 분명했습니다.

 

이 무용경연대회에서 저는 또 하나의 운명적인 인연을 만났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을 만난 것입니다. 경연대회의 첫날인 20191031일이었습니다. 천성적으로 사교성이 좋으신 정세화 선생님이 말씀을 걸어오셨고, 저는 왜 이 경연대회를 참관하고 있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었고, 우리의 만남은 공조와 협력으로 이어졌습니다.

 

재일동포 사회를 잘 아시는 정세화 선생님으로부터 조선학교와 조선무용에 대한 말씀을 들었고, 그 정보는 그동안 중구난방으로 쌓여있기만 했던 나의 자료에 질서와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최승희의 조선무용 연구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고, 저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부지런히 글을 써 나갔습니다.

 

 

그날 정세화 선생님과 점심을 먹으면서 저는 처음으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건립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씀인지도 몰랐고, 조선무용에 푹 빠진 저에게 그런 말씀을 왜 하셨는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신 그 말씀이 4년 뒤인 오늘 제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이 글을 쓰게 만드는 계기가 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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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8ウリ學校舞踊靴日本訪問団宝塚訪問しますこの宝塚訪問われたのにはいお便りがあります100年以上時間われることでもありくの々の配慮友愛努力んだ結果だからです

 

これは20世紀前半韓日間不幸歴史橫絲貫通しているでも両国市民いにせてくれた尊重感謝人間愛縱絲でしっかりとまれてられた物語でもあります

 

 

この1914朝鮮人労働者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さんが宝塚くなったことからまります金炳順さんは故郷江陵宝塚移住神戸水道工事参加したところトンネル落盤事故くなりました1915南益三(ナム·イクサム)張長守(チャン·ジャンス)さんも同様事故くなり19293には福知山線改修工事中に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尹吉文(ユン·ギルムン)吳伊根(·イグン)さんがくなりました

 

この々のはすぐにられました類似事故日本人朝鮮人わず死者かったからです鉄道工事くなったお二人遺体火葬されらないところにかれました水道公社くなった3遺体事故現場から玉瀬村められて葬儀われ参拝墓けられましたがこうした事情玉瀬世界にはられていませんでした

 

5世間られたのは半世紀ぎたでした宝塚郷土歴史家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先生近藤富男先生1983からこの地域朝鮮人痕跡めました新聞記事調べて尹吉文,吳伊根さんの死亡ニュースをつけられ宝塚踏査しながら金炳順南益三張長守さんの死亡事実らかにしました

 

 

それは簡単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当時はキーワードで検索できるデータベースもなかったのでいちいち新聞をめくりながら調べるか記事のスクラップに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県立アーカイブがなかったときなので各地域官庁保管されている記録すために公務員にお世話にな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さな糸口でもてきたら現地訪問して調住民たちに探問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

 

苦労してめられた資料証言鄭鴻永先生著書歌劇のもうつの歴史:宝塚朝鮮人1997)』にまとめられましたこのには3くなった神戸水道工事2くなった旧国鉄福知山線改修工事しくされています

 

神戸水道工事犠牲者については死亡後事情つけられませんでしたが福知山線鉄道工事死亡者記録事故現場確認することができ二人はそのから毎年尹吉文吳伊根ンさんの命日326わせて慰霊祭ってきました時間つにつれこの慰霊祭にはますますくの日本人活動家在日朝鮮人参加しました

 

20001鄭鴻永先生他界された近藤富男先生慰霊祭ける一方、「犠牲者のための追悼碑ててほしいという鄭鴻永先生遺志地域々のけをりて宝塚朝鮮人追悼碑建設するために努力しました

 

 

追悼碑建設2月後えた2020223近藤富男先生教師時代同僚であり宝塚地域社会活動家として一緒いていた大黑澄枝先生じてくべきニュースをりました神戸水道工事くなった3朝鮮人位牌玉瀬滿福寺られていて毎年824地元婦人会とともに無縁故者参拝をしてきたというニュースでした

 

そこで近藤富男先生大黑澄枝先生滿福寺足立泰敎足立智敎僧侶5朝鮮人犠牲者一緒える追悼碑てることになりついに2020326切畑園前親水広場追悼碑建立されました鄭鴻永-近藤富男研究チームが調査めて35鄭鴻永先生他界されてから20ぶりのことでした

 

宝塚朝鮮人追悼碑について特別関心つようになったのはこの追悼碑建立するためにくの々がどれほど努力したかにづき感動した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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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8[우리학교 무용신] 일본 방문단은 다카라즈카를 방문합니다. 이 다카라즈카 방문이 이루어지게 된 데에는 긴 사연이 있습니다. 1백년이 넘는 시간 끝에 이루어지는 일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의 배려와 우애의 노력이 낳은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20세기 전반 한일간의 불행했던 역사가 씨줄로 관통하는 중에도, 양국 시민들이 서로에게 보여준 존중과 감사의 인간애가 날줄로 단단하게 짜여서 만들어진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1914년 조선인 노동자 김병순씨가 다카라즈카에서 사망하신 것으로 시작됩니다. 김병순씨는 고향 강릉을 떠나 다카라즈카로 이주, 고베수도공사에 참가했다가 터널 낙반사고로 사망하셨습니다. 1915년 남익삼, 장장수씨도 비슷한 사고로 사망하셨고, 19293월에는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 중에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윤길문, 오이근씨가 사망하셨습니다.

 

이분들의 죽음은 이내 잊혀졌습니다. 유사한 사고는 많았고, 일본인과 조선인을 가리지 않고 사망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철도공사에서 사망하신 두 분의 주검은 화장되었고 유해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뿌려졌습니다. 수도공사에서 사망하신 세 분의 유해는 사고 현장에서 가까운 타마세 마을에 거두어져서 장례도 치러지고 참배묘도 마련되었지만, 이런 사정은 타마세의 바깥 세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섯 분의 죽음이 다시 세상에 알려진 것은 반세기가 지난 후였습니다. 다카라즈카의 향토역사가 정홍영 선생님과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1983년부터 이 지역의 조선인들의 흔적을 찾기 시작하셨습니다. 신문기사를 뒤져서 윤길문, 오이근씨의 사망 소식을 찾아내셨고, 다카라즈카를 방방곡곡 답사하시면서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사망 사실도 밝혀내셨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키워드로 검색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도 없었으니 일일이 종이신문을 넘겨가며 조사하시거나 기사 스크랩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현립 아카이브가 없었을 때이므로 각 지역 관청에 보관된 기록을 찾기 위해 공무원들에게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조그만 실마리라도 나오면 현지를 방문해서 살펴보고, 주민들에게 탐문해야 했습니다.

 

어렵게 모아진 자료와 증언들은 정홍영 선생님의 저서 <가극의 거리의 또 하나의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에 정리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세 분이 사망하신 고베수도공사와 두 분이 사망하신 구국철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고베수도공사 희생자에 대해서는 사망 이후의 사정을 찾아내지 못하셨지만,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 사망자에 대한 기록과 사고현장을 확인하실 수 있었고, 두 분은 그때부터 매년 윤길문, 오이근씨의 기일(326)에 맞춰 위령 제사를 드려오셨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이 위령제사에는 점점 더 많은 일본인 활동가들과 재일동포들이 참여하셨습니다.

 

20001월 정홍영 선생님께서 타계하신 후에도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위령 제사를 계속하시는 한편, “이 두 분을 위한 추도비를 세웠으면 좋겠다는 정홍영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지역 인사들의 도움을 얻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건립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추도비 건립을 두 달 앞둔 2020223일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교사 시절 동료이자 다카라즈카지역 사회활동가로 함께 일하시던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을 통해 놀라운 소식을 전해 받았습니다. 고베수도공사에서 사망한 세 조선인의 위패가 타마세 만푸쿠지에 모셔져 있고, 매년 824일 지역 부녀회와 함께 무연고자 참배를 드려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에 콘도 도미오 선생님과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 만푸쿠지의 아다치 타이쿄-아다치 치쿄 스님은 다섯 명의 조선인 희생자를 함께 기리는 추도비를 세우기로 하셨고, 마침내 2020326일 키리하타 사쿠라공원 앞, 신수이광장에 추도비를 건립하셨습니다. 정홍영-콘도 도미오 연구팀이 조사를 시작한 지 35, 정홍영 선생님이 타계하신지 20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제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추도비를 건립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분들이 끈질긴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깨닫고 감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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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初のコーヒー1555年頃オスマン帝国首都コンスタンティノープル現在のテュルキイェイスタンブール開業したカフベハネkahvehane=cofee houseだったそうですヨーロッパ初期のコーヒー1645にイタリア1652のイギリスのオックスフォードコーヒーハウスでアメリカ最初のコーヒー1676にボストンに開業したロンドンコーヒーハウス(London Coffee House)だそうです

 

 

日本初のコーヒー可否茶館(1888-1892)あるいは放香堂(1874-?)であることはこれまでてきたようですが自然韓国初のコーヒーいつどこでオープンしたのか疑問うようになりますもう一度リサーチをみました

 

しばらく1923京城本町3丁目(=ソウル忠武路3)開店した二見京城茶房元祖われていましたがこれは雑誌青色紙(19385月号)掲載された京城茶房盛衰記著者老茶客(筆名)がそのようにべているからです

 

しかし最近調査によりますと<二見>開業1923ではなく1926822それより9年前1917京城本町2丁目90番地<ダリヤ>という喫茶店開業していました

 

 

また1909113皇城新聞によりますと1909111南大門停車場喫茶店開業しました<南大門停車場喫茶店(1909-1922)>はその<京城駅グリルおよび喫茶店(1925-1945)>わっていましたが解放後<ソウルグリル>という名前営業けます

 

南大門停車場喫茶店191992姜宇奎カン·ウギュ1855~1920義士新任朝鮮総督斎藤実1858~1936暗殺するために待機していた場所ですところが19091026安重根(1879-1910)義士伊藤博文暗殺しようとハルビン待期していたのも駅内喫茶店でした姜宇奎義士京城駅でコーヒーをんだという記録はありませんが安重根義士挙死直前にコーヒーをんでいたと裁判記録ていましたね

 

 

ところが1899831独立新聞英文版)』には1899洪陵料理店喫茶部開業したという記事掲載されています宿泊食事とともにコーヒーを販売していたところで<ソンタクホテル(1902)もありすでに15年前済物浦開業した<大仏ホテル(1887)>喫茶店ねたホテルでした

 

宿泊食堂兼業していない純喫茶店だけをえると<二見(1926)>京城茶房嚆矢青色紙記事しい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二見>日本人開店したものです

 

明洞伯爵李鳳九(·ボング, 1916-1983)雑誌世代(19644月号)寄稿したカカデュからエリーゼまでというたちのたちがんでいるところにめてオープンした喫茶店1927年春ソウル鍾路区寛勲洞3のレンガ階下映画監督李慶孫(·ギョンソン, 1905-1977)さんがハワイから妙齢女性経営していた<カカデュ>べています

 

 

しかし<カカデュー>開業1927ではなく192891でしたその95<東亜日報(3)"市内寛勲洞しくできた喫茶店<カカデュ>"という記事たからです

 

もう調べたところ総合文芸誌開闢(19265月号)掲載された京城雑貨という寄稿文のような内容まれていました

 

 

李星鎔(·ソンヨン)李灌鎔(·グァンヨン)両博士とキリスト教青年学館のドイツ語教師浪承翼(ナン·スンイク)南大門通小広橋付近京城初伯林館というドイツ式茶店をオープンし営業開始したという

 

京城初のドイツ式茶店白林館(19265)李慶孫開業したカカデュー(19289)より2日本人吉川二見(19268)より3月先開業した朝鮮初純喫茶店で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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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커피점은 1555년경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오늘날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개업한 카흐베하네(kahvehane=cofee house)이었다고 합니다. 유럽 초기 커피점은 1645년에 이탈리아, 1652년의 영국의 옥스퍼드 커피하우스였고, 미국 최초의 커피점은 1676년 보스턴에 개업한 런던 커피하우스(London Coffee House)라고 합니다.

 

 

일본 최초의 커피점은 가히사칸(可否茶館, 1888-1892) 혹은 호코도(放香堂, 1874-?)인 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지만, 자연스럽게 한국 최초의 커피점은 무엇이었으며, 언제 어디에서 문을 열었는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리서치를 시도했습니다.

 

한동안 1923년 경성 본정 3정목(=서울 충무로3)에 개점한 <후타미(二見)>경성 다방의 원조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는 잡지 <청색지> 19385월호에 실린 경성다방 성쇠기의 저자 노다객이 그렇게 서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근 조사에 따르면 <후타미>의 개업은 1923년이 아니라 1926822이었고, 그보다 9년 전인 1917년 경성 본정 2정목 90번지에 <다리야>라는 끽다점도 개업된 바 있었습니다.

 

 

1909113일의 <황성신문>에 따르면 1909111<남대문 정거장 끽다점>이 개업했습니다. <남대문 정거장 끽다점(1909-1922)>은 이후 <경성역 그릴 및 끽다점(1925-1945)>으로 바뀌었다가, 해방 후에는 <서울역 그릴>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영업을 계속합니다.

 

<남대문 정거장 끽다점>191992일 강우규姜宇奎, 1855-1920) 의사가 신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858-1936)를 암살하기 위해 대기하던 곳입니다. 그런데 19091026일 안중근 의사가 히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려고 하얼빈역에서 대기하던 곳도 역내 끽다점이었습니다. 그때 강우큐 의사가 경성역에서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안중근 의사는 거사 직전에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고 재판기록에 나와 있더군요.

 

 

그런데 1899831일의 <독립신문(영문판)>에는 1899<홍릉 요리점 끽다부>가 개업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숙박 및 식사와 함께 커피를 판매하던 곳으로 <손탁호텔(1902)도 있었고, 이미 15년 전 제물포에 개업한 <대불호텔(1887)>도 끽다점을 겸한 호텔이었습니다.

 

숙박이나 식당을 겸업하지 않은 순끽다점만 따진다면 <후타미(1926)>을 경성 다방의 효시로 본 <청색지> 기사가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후타미>는 일본인이 개점한 것입니다.

 

명동백작 이봉구는 잡지 <세대(19644월호)>에 기고한 카카듀에서 엘리제까지라는 글에서 우리사람 손으로 우리들이 사는 곳에 처음으로 문을 연 다방은 1927년 봄 서울 종로구 관훈동 초입 3층 벽돌집 아래층에 영화감독 이경손씨가 하와이에선가 온 묘령여인과 더불어 경영하던 <카카듀>”라고 서술했습니다.

 

 

그러나 <카카듀>의 개업은 1927년이 아니라 192891일이었습니다. 그해 95일의 <동아일보(3)시내 관훈동에 새로난 끽다점 <카카듀>”라는 기사가 났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조사해 보니 종합 문예지 <개벽> 19265월호에 실린 경성잡화(京城雜話)”라는 기고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성용(李星鎔), 이관용(李灌鎔) 양 박사와 기독교 청년학관의 독일어 교사 낭승익(浪承翼)군은 남대문통 소광교 부근에 경성 초유의 <백림관(伯林館)>이라는 독일식 다점을 열고 영업을 개시하였다 한다.”

 

경성 초유의 독일식 다점 <백림관(19265)>은 영화감독 이경손이 개업했던 <카카듀(19289)>보다 2, 일본인 요시카와(吉川)<후타미(19268)>보다 석 달 앞서 개업한 조선 최초의 순끽다점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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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最古のコーヒー東京可否茶館であったというのが定説ですが神戸放香堂最初のキッサテンだったという主張もあります

 

日本にコーヒーが最初紹介されたのは1700 年頃長崎出島でしたここに出入許可貿易従事していたオランダの商人たちがコーヒーをんだという記録っています

 

 

また大田南畝(1749-1823)随筆集瓊浦又綴(1804)(コーヒーが)くしてふるにえず言及されていましたしかしこれは日本人ではなくオランダ風習紹介したものですので日本のコーヒー歴史というよりは前史るべきでしょう

 

日本開港1853以後横浜居留地にもコーヒーハウスが営業中でした1864開業した<ビクトリア·コーヒーハウス(Victoria Coffee House)><カフェ·デュ·ジャポン(Cafe du Japon)><アリエカフェ(Allier Cafe)>1870開店した<カフェ·デュ·コメックス(Cafe du Commerce)>がそれですしかし外国名前からこれらのカフェも外国人アメリカイギリスフランス出入であり日本人コーヒーとはえにくいです

 

 

しかし1874神戸元町開店した放香堂」、1876東京浅草観音堂境内開業した御安見所コーヒー茶店」、1886東京·日本橋にオープンした洗愁亭その場所名前から日本人のコーヒーでした

 

この一番早時期開店した放香堂記録った最初日本コーヒーとしてめられています。 「放香堂存在証明する文献全部3つあります

 

放香堂歴史です。 「芳香堂天正年間1573~1591)、京都相楽郡和束町宇治茶農場天保年間1830~1843)、東源兵衛宇治茶江戸販売めたといいます1858松平家茶菓子商人指定され、「放香堂という商号授与されました

 

 

1868神戸港開港、「放香堂神戸市栄町通宇治茶輸出商館=貿易会社開業インドと東南アジアに設置された日本人茶貿易1874には神戸市元町京都から生産した宇治茶とインドから輸入したコーヒーを販売する小売店放香堂開店しました当時、「放香堂宇治茶やコーヒーの販売だけでなく九谷焼という陶器おそらく茶器っており郵便物っている店舗だったそうです

 

218781226読売新聞掲載された放香堂営業広告ですこの広告文では、「焦製飲料コフィ―:弊店にて御飲用或にて御求共御自由というフレーズがあります。「焦製飲料とは、「めてったということですのでつまりコーヒーのことです。 「放香堂コーヒーを販売しただけでなく店内でコーヒーを注文してむこともできたコーヒーだったのです

 

 

3当時神戸主要商店版画としていた豪商神兵湊(1882)というですでも神戸市立博物館所蔵されているこの店舗風景画版画集には、「放香堂かれていますが、「宇治製銘茶という看板印度産加琲という看板んでげられており、「兵庫県下神戸元町通3丁目という住所かれています

 

神戸放香堂1880からは貿易業務中断宇治茶やコーヒー紅茶販売専念していたということでなくとも6年以上開業しているので東京可否茶館1888-1892)」より開業期間いです。 「放香堂廃業時期られていませんが2015神戸元町同名のコーヒー専門店開業歷史いでいます

 

 

一方今日まで開業している最古のコーヒー専門店19198開業105年間営業している東京人形町喫茶去快生軒であることがられ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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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의 커피점이 도쿄의 가히사칸(可否茶館)이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고베의 호코도(放香堂)가 첫 깃사텐(喫茶店=커피점)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일본에 커피가 처음 소개된 것은 1700년경 나가사키(長崎)의 테지마(出島)였습니다. 이곳에 출입 허가를 받고 무역에 종사하던 네덜란드 상인들이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또 오다 난파(大田南畝, 1749-1823)의 수필집 <케이호유데츠(瓊浦又綴, 1804)>“(커피가) 탄내가 나서 맛을 참을 수 없다(くしてふるにえず)”고 언급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인이 아닌 네덜란드인들의 풍습을 소개한 것이므로, 일본 커피점의 역사라기보다는 전사(前史)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일본 개항(1853) 이후 요코하마 거류지에도 커피하우스가 영업 중이었습니다. 1864년에 개업한 빅토리아 <커피하우스(Victoria Coffee House)><카페 뒤 자폰(Cafe du Japon)><알리예 카페(Allier Cafe)>, 1870년에 개점한 <카페 뒤 코멕스(Cafe du Commerce)>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외국 이름으로 보아 이 카페들도 외국인(미국인, 영국인, 프랑스인)의 출입처였고 일본인 커피점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1874년 고베 모토마치(元町)에 개점한 <호코도(放香堂)>, 1876년 도쿄 아사쿠사 관음당 경내에 개업한 <오야스미도코로 커피차점(御安見所コーヒー茶館)>, 1886년 도쿄 니혼바시에 문을 연 <세수정(洗愁亭)>은 그 장소와 이름으로 보아 일본인들의 커피점이었습니다.

 

이중 가장 이른 시기에 개점한 <호코도>는 기록에 남은 최초의 일본 커피점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호코도>의 존재를 증명하는 문헌증거는 모두 3개입니다.

 

첫째는 <호코도>의 역사입니다. <호코도>는 덴쇼 연간(天正, 1573-1591) 교토 사가라(相楽)군 와츠카초(和束町)에 우지차(宇治茶) 농장을 시작했고, 덴포 연간(天保, 1830~1843) 히가시 겐베(東源兵衛)가 우지차를 에도(=도쿄)에 판매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858년 마츠다이라(松平) 가문의 다과 상인으로 지정되면서 <호코도(放香堂)>라는 상호를 하사받았습니다.

 

 

1868년 고베항이 개항되면서 <호코도>는 고베시의 에이마치도리(栄町通)에 우지차 수출상관(=무역회사)를 개업해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설치된 일본인 마을과 차 무역을 시작했고, 1874년에는 고베시 모토마치에 교토에서 생산한 우지차와 인도에서 수입한 커피를 판매하는 소매상점 <호코도>를 개점했습니다. 당시 <호코도>는 우지차와 커피 판매 뿐 아니라 쿠타니야키(九谷焼)라는 사기그릇(아마도 다기)도 팔았고, 우편물도 취급하는 점포였다고 합니다.

 

둘째는 18781226일의 요미우리(讀賣)신문에 게재된 <호코도>의 영업 광고입니다. 이 광고문에서는 초제음료 커피: 본점에서 음용하거나 가루로 구입하는 것은 자유(焦製飲料コフィ―:弊店にて御飲用或にて御求共御自由)”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초제음료볶아서 만든 음료라는 말이니, 곧 커피를 가리킵니다. <호코도>는 가루커피를 판매했을 뿐 아니라 점포 안에서 커피를 주문해 마실 수도 있었던 커피점이었던 것입니다.

셋째는 당시 고베의 주요 상점들을 판화로 묘사한 <고쇼신페이 미나도노사키가케(豪商神兵湊, 1882)>라는 책입니다. 지금도 고베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점포 풍경화 판화집에는 <호코도>도 묘사되어 있는데, “宇治製銘茶라는 간판과 印度産加琲라는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고, “효고현 고베 모토마치도리 3라는 주소도 적혀 있습니다.

 

고베의 <호코도>1880년부터는 무역업무를 중단, 우지차와 커피, 홍차 판매에 전담했다고 하니, 적어도 6년 이상 개업했으므로, 도쿄의 <가이사칸(1888-1892)>보다 개업기간이 깁니다. <호코도>의 폐업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2015년 고베 모토마치에 같은 이름의 커피전문집이 다시 개업해 역사를 잇고 있습니다.

 

 

한편, 오늘날까지 개업해 있는 가장 오랜 커피전문점은 19198월 개업해 105년째 영업 중인 도쿄 닌교초(人形町)의 커피점 케이세켄(喫茶去 快生軒)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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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日朝鮮学校舞踊部舞踊神をプレゼントしてきた韓国<チームあい(会長趙誠武)><舞踊靴>会員302023127-30日本大阪宝塚訪問しますこの訪問日本<チームあい(会長近藤卓海事務局長鄭世和)>主管します

 

日本<チームあい>韓国訪問(2022123-8)する答礼訪問としてけられた今回訪日では大阪朝鮮中高級学校開校70周年記念公演観覧(129東大阪市文化創造館)宝塚玉瀬さな音楽会開催(128滿福寺)日程です

 

 

玉瀬滿福寺音楽会20世紀前半韓日両国間不幸過去にもかかわらず100年以上友好善隣けてきた両国市民感謝するためにけられました

 

20世紀初頭朝鮮人労働者5宝塚玉瀬近くの土木工事中事故死亡しました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 1914314日死亡)南益三(ナム·イクサム, 1915121日死亡)張長守(チャン·ジャンス, 1915324日死亡)さんは神戸水道改修工事中にトンネル内落盤事故死亡尹吉文(ユン·ギルムン)吳伊根(·イグン)さんは1929326日旧国鉄福知山線鉄道改修工事で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くなりました

 

 

玉瀬婦人会滿福寺住職金炳順, 南益三, 張長守さんの遺体めて共同墓地埋葬滿福寺こう参拝墓けました滿福寺婦人会1914から3世代れる108年間毎年824無縁故朝鮮人労働者のための慰霊祭ってきました

 

このニュースは2020年2尹吉文吳伊根さんの追悼碑建立準備中だった近藤富男先生わり二人のために準備されていた追悼碑5朝鮮人労働者のための追悼碑拡大2020326武田尾近くの切畑所在長尾山麓園入口親水広場建設されました

 

 

韓国<チームあい><舞踊靴>近藤富男先生要請朝鮮人犠牲者韓国内縁故調査しました5犠牲者のうち金炳順さんの故郷江原道江陵であることが確認された追悼碑建設者慰霊祭事ってきた々に感謝牌贈呈することを江陵市庁請願しました

 

この請願承認され江陵市長名義用意された感謝牌東京所在江原道本部(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けを追悼碑建設2周年えた20223262在日朝鮮人6日本人活動家されました江陵市感謝牌をもらった8です

 

 

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1929-2000、寶塚郷土歴史家)、近藤富男(1950-2020、教師、市民活動家)、金礼坤(キム·レゴン、事業家)、堀内稔(在日朝鮮人史研究家)、飛田雄一(神戸学生青年センター代表)、玉野勢三(彫刻家)、足立泰教と足立智教(万福寺住職)。

 

玉瀬滿福寺音楽会韓国伝統楽器演奏構成されますが李壽哲(·スチョル, 牙箏アジェン)、金賢淑(キム·ヒョンスク, 大笒テグム)、姜惠晟(カン·ヘソン, 伽倻琴カヤグム)、朴寅浩(パク·インホ, 大笒などの演奏者出演しますそのにも, 朴正煥(パク·ジョンファン)先生歌唱徐香淑(·ヒャンスク)さんもオカリナ演奏(ピアノ伴奏尾崎友里音響境 雅彦)として参加する予定です

 

慰霊祭事追悼碑建立感謝牌贈呈韓日両国市民訪問答礼訪問などで宝塚江陵兵庫県江原道交流頻繁になり具体的協力策じられている一方朝鮮人犠牲者のゆかりもさらに調査中です

 

 

尹吉文吳伊根さんの故郷慶尚南道高城南益三さんの故郷慶尚南道統営調査され文献確認作業められていますが90ぎたことなので調査確認困難があります

 

一方韓日<チームあい><舞踊靴>20203から在日朝鮮学校舞踊部舞踊靴えてきましたが20228までに6にわたって在日朝鮮学校ての舞踊部生徒約1100舞踊靴手渡しました<チームあい><舞踊靴>今後毎年5舞踊部新入生舞踊靴える予定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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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조선학교 무용부에 무용신을 선물해 온 한국의 <팀아이(회장 조성무)><무용신모임> 회원 30명이 2023127-30일 일본 오사카와 다카라즈카를 방문합니다. 이 방문은 일본의 <팀아이(회장 콘도 타쿠미, 사무국장 정세화)>가 주관합니다.

 

일본 <팀아이>의 한국방문(2022123-8)에 대한 답방으로 마련된 이번 방일에서는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의 개교 70주년 기념공연 관람(129, 창조관)과 다카라즈카 타마세에서 작은 음악회 개최(128, 만푸쿠지)가 주요 일정입니다.

 

 

타마세 만푸쿠지 음악회는 20세기 전반 한일 양국 사이의 불행했던 과거에도 불구하고 1백년 이상의 우호와 선린을 이어온 양국 시민들에게 감사하기 위해서 마련되었습니다.

 

20세기초 조선인 노동자 5명이 다카라즈카 타마세 인근의 토목공사 중에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김병순(1914314일 사망), 남익삼(1915121일 사망), 장장수(1915324일 사망)씨는 고베수도 개수공사 중에 터널 내 낙반 사고로 사망했고, 윤길문, 오이근씨는 1929326일 구국철 후쿠치야마선 철도개수공사에서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타마세 부녀회와 만푸쿠지의 주지스님은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시신을 거두어 마을 공동묘지에 매장하고 만푸쿠지 건너편 언덕에 참배묘를 마련했습니다. 만푸쿠지와 부녀회는 1914년부터 3세대가 흐르는 108년 동안 매년 824일 무연고 조선인 노동자들을 위한 위령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이 소식은 2020년 2, 윤길문, 오이근씨의 추도비 건립을 준비 중이던 콘도 도미오(1950-2022) 선생에게 알려졌고, 두 사람을 위해 준비되던 추도비는 다섯 조선인 노동자를 위한 추도비로 확대되어, 2020326일 다케다오 인근 기리하타 소재 나가오산 기슭의 사쿠라공원 입구 신수이광장에 건립되었습니다.

 

 

한국 <팀아이><무용신모임>은 콘도 도미오 선생의 요청으로 조선인 희생자들의 한국내 연고를 조사했습니다. 5명의 희생자 중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원도 강릉임이 확인된 후, 추도비 건립자들과 위령제사를 지내온 분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해 줄 것을 강릉시청에 청원했습니다.

 

이 청원은 승인되어 강릉시장 명의로 준비된 감사패가 도쿄 소재 강원도 본부(강병직 본부장)의 도움을 얻어, 추도비 건립 2주년을 맞은 2022326, 2명의 재일조선인과 6명의 일본인 활동가들에게 전달됐습니다. 강릉시의 감사패를 받게 되신 분들은 다음의 8분입니다.

 

 

정홍영(1929-2000, 향토역사가), 콘도 도미오(1950-2020, 교사, 시민활동가), 김례곤(사업가), 호리우치 미노루(재일조선인사 연구가), 히다 유이치(고베학생청년센터 대표), 타마노 세이조(조각가), 아다치 타이쿄와 아다치 치쿄(만푸쿠지 주지).

 

타마세 만푸쿠지 음악회는 한국의 전통악기 연주로 구성되는데, 이수철(아쟁, 생황), 김현숙(대금), 강혜성(가야금), 박인호(대금) 4명의 연주자들이 출연하게 됩니다. 그밖에도 박정환 선생님은 가창으로, 서향숙 선생님도 오카리나 연주로 참여하실 예정입니다.

 

위령제사와 추도비 건립, 감사패 증정과 한일 양국 시민들의 방문과 답방 등으로 다카라즈카와 강릉, 효고현과 강원도 사이의 교류가 빈번해지고, 구체적인 협력 방안도 강구되고 있는 한편, 다른 조선인 희생자들의 연고도 추가로 조사 중에 있습니다.

 

 

윤길문, 오이근씨의 고향은 경상남도 고성, 남익삼씨의 고향은 경상남도 통영으로 조사되었고, 문헌 확인 작업이 진행 중이지만, 90년이 지난 일이어서 조사와 확인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한편, 한일 <팀아이><무용신모임>20203월부터 재일조선학교의 무용부에 무용신을 전달해 왔는데, 20228월까지 6차례에 걸쳐 재일조선학교의 모든 무용부 학생 약 1,100명에게 무용신을 전달한 바 있습니다. <팀아이><무용신모임>은 앞으로도 매년 5월 무용부 신입생들에게 무용신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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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阪丸福三和神戸上島西村コーヒーをおすすめしたらそれが日本初期のカフェなのかとかれたがいらっしゃいましたがいます上島1933丸福1934開業したそうなのでそんながしたようですが検索してみるとわかるように日本のコーヒー延元いです

 

記録されている日本最古のコーヒー専門店鄭永慶(ていえいけい, 1858-1894)1888423東京·上野西黒門町開業した可否茶館というのが定説です鄭永慶中国びるとけて日本げた鄭成功(ていせいこう, 1624-1662)子孫アメリカのイェール教育けた通訳士英語教師事業家として活動した人物です

 

 

コーヒー(coffee)またはカフェ(cafe)漢字可否茶きましたが、「かいさんだりカツヒとも発音したという記録もあります意味めるかどうか曖昧なおであったことをると西洋新聞物んでその成功自信がなかったことが推察できそのような商品名前をつけるために苦心した形跡もうかがえます

 

<可否茶館>開業5年後1895経営難廃業創業主鄭永慶自殺ったのをますと当時はコーヒーがめそうにない評価されていたようです。 「可否茶館開業した場所つまり今日東京都台東区上野一丁目可否茶館跡地という名札てられています

 

 

1910にはベルギー公使館のシェフだった奥田駒蔵1882-1925数年間のヨーロッパ生活えた東京·日本橋小網町にコーヒー専門店メイゾン鴻之巣開業しましたメイゾン(maison)(House)というフランス、「ガンノスという意味ですが文学家芸術家まるコーヒー専門店でした

 

191112日本1世代ブラジル移民だった水野龍(1859-1951)東京銀座6丁目にオープンしたカフェパウリスタ上島丸福より20年以上進んだコーヒーです。 「パウリスタとはポルトガルサンパウロという意味ですが水野龍がブラジルにんでいたところがサンパウロだったことからけられた名前でした

 

 

1909ブラジルのコーヒー価格暴落すると水野龍はブラジル政府から年間コーヒー1千俵=500トン無償提供され日本普及、「カフェパウリスタ開業しました<カフェパウリスタ>名古屋神戸横須賀などと中国上海にも支店した日本初のフランチャイズコーヒーショップとして盛業中でしたが1923関東大震災破壊されコーヒー無償提供中断されるとカフェは廃業事業をコーヒーの輸入やコーヒーのローストに縮小しました

 

1970銀座8カフェパウリスタ開店しましたが1978にジョン·レノンと小野洋子がここをれたため世界的名前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

 

 

1910年以前にも東京カフェがありました旧制一高(東京大学前身)本郷カツフエがあり早稲田大学にも<早稲田カツフエ>がありましたしかしこれらのカフェはコーヒーではなく洋食屋だったそうです

 

そして1911にはパウリスタ以外にもカフェプランタン(3)カフェライオン(8)開業しましたがパウリスタはコーヒー専門店でしたがプランタンとライオンは美人女級接待けながらおむところでしたこのからカフェとキッサテンが区別されめましたがカフェは女給酒場キッサテンはコーヒー専門店でした

 

 

その大正民主主義時代(1912~1926)蔓延したエログロナンセンスの風潮とともに少女歌劇団各種雑誌全盛時代まりそれとともにカフェという享楽産業やキッサテンというのコーヒー産業成長し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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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의 마루후쿠와 산와, 고베의 우에시마와 니시무라 커피점을 추천 드렸더니, 그게 일본의 초기 카페들인가고 물어오신 분이 계셨습니다만, 아닙니다. 우에시마가 1933, 마루후쿠가 1934년에 개업했다고 하니 그런 생각이 드셨던 것 같은데, 조금만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본 커피점은 연원이 더 오랩니다.

 

기록에 나타난 일본 최고(最古)의 커피 전문점은 테이 에이케이(鄭永慶, 1858-1894)1888423일 도쿄 우에노 니시쿠로몬초(西黒門町)에 개업한 <가히사칸(可否茶館)>이라는 게 정설입니다. 테이 에이케이는 중국 명나라가 망하자 청나라를 피해 일본으로 도망한 테이 세이코(鄭成功, 1624-1662)의 후손으로, 미국 예일 교육을 받은 후 통역사와 영어교사, 사업가로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커피(coffee) 혹은 카페(cafe)를 간지(漢字)가히차(可否茶)’라고 썼는데, ‘가히사(かいさ)’라고 읽거나 가츠히(カツヒ)’라고도 발음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뜻도 먹을 만한지() 그렇지 않은지() 애매한 차()”이었던 것을 보면, 서양 신문물을 들여오면서 그 성공 여부에 자신을 갖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고, 그런 상품의 이름을 짓기 위해 고심한 흔적도 엿보입니다.

 

<가히사칸>은 개업 5년만인 1895년에 경영난으로 폐업했고, 창업주 테이 에이케이도 자살을 기도했던 것을 보면 당시에는 커피가 먹을 만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모양입니다. <가히사칸>이 개업했던 자리, 즉 오늘날의 도쿄 다이토구 우에노 1초메에 <가히사칸 유적지>라는 명패가 세워져 있습니다.

 

 

1910년에는 벨기에 공사관의 요리사였던 오쿠다 고마조(奥田駒蔵, 1882-1925)가 수년간의 유럽 생활을 마친 후, 도쿄 니혼바시(日本橋) 고아미쵸(小網町)에 커피전문점 <메이종 간노스(メイゾン鴻之巣)>를 개업했습니다. 메이종(maison)(House)’이라는 프랑스 말이고 간노스기러기 둥지라는 뜻인데, 젊은 문학가와 예술인들이 모이는 커피전문점이었습니다.

 

191112월 일본 1세대 브라질 이민자였던 미즈노 류(水野龍, 1859-1951)가 도쿄 긴자6가에 문을 연 <카페 파울리스타(カフェーパウリスタ)>도 우에시마나 마루후쿠보다 20년 이상 앞선 커피점입니다. ‘파울리스타란 포루투갈 말로 상파울로 사람이라는 뜻인데, 미즈노 류가 브라질에서 살았던 곳이 상파울로였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었습니다.

 

 

1909년 브라질의 커피가격이 폭락하자 미즈노 류는 브라질 정부로부터 커피원두 1천섬(=5백톤)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일본에 보급하면서 <카페 파울리스타>를 개업했습니다. <카페 파울리스타>는 나고야와 고베, 요코스카 등과 중국 상하이에도 지점을 내었던 일본 최초의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성업 중이었으나,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업소들이 파괴되고 커피 무상 제공이 중단되자 카페는 폐업하고 사업을 커피 수입과 원두 로스팅으로 축소했습니다.

 

1970년 긴자8가에 <카페 파울리스타>가 다시 개점되었는데, 1978년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이곳을 방문하는 바람에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1910년 이전에도 도쿄에 다른 카페가 있었습니다. 구제일고(旧制一高, 도쿄대학교 전신) 앞에 <혼고 카츠후에(本郷カツフエ>가 있었고, 와세다대학교 앞에도 <와세다 카츠후에(早稲田カツフ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카페들은 커피점이 아니라 양식당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11년에는 파울리스타 말고도 <카페 플란탄(カフェー・プランタン, 3)><카페 라이온(カフェー・ライオン, 8)>이 개업했는데, 파울리스타는 커피전문점이었으나 플란탄과 라이온은 미인 여급의 시중을 받으며 술 마시는 곳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카페와 깃사텐(喫茶店)이 구별되기 시작했는데, 카페는 여급 주점이었고, 깃사텐은 커피 전문점이었습니다.

 

 

이후 다이쇼 민주주의 시대(1912~1926)에 만연한 에로그로난센스의 풍조와 함께 소녀가극단과 각종 잡지의 전성시대가 시작되었고, 그와 함께 카페라는 이름의 향락산업과 깃사텐이라는 이름의 커피산업도 덩달아 성장했던 것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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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7, 화요일, <무용신 포럼>으로 예정된 날입니다. 박인호 선생의 발표와 이성섭 선생의 토론이 있게 됩니다. 주제는 사법 개혁인데, 현 정부의 구성과 행정 방향을 볼 때 그 어느 때보다 사법개혁의 필요성이 절실히 느껴지는 시점입니다.

 

이같은 시기에 한국과 일본, 유럽과 미국의 형사사법 제도를 열심히 비교 검토해 오신 박인호 선생은 사법개혁의 필요성 뿐 아니라 그 타당성과 방법론까지 천착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인호 선생이 뿌리는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가 맺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첫 번째 <무용신 포럼>에서는 제가 한달 반의 일본 취재 결과를 보고 드렸습니다. 3년 만에 둘러본 조선학교, 특히 무용부의 현황과 무용경연대회를 참관한 소감을 말씀드렸습니다.

 

그에 더해 <다카라즈카 조선인추도비>가 건립되고, 강원도와 강릉시가 건립에 수고하신 분들에게 감사패를 전하게 된 과정, 그리고 이후 현지 상황도 간략히나마 보고를 드렸습니다.

 

<무용신 포럼>은 그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무용신> 회원이시라면 무슨 주제이든 자신의 생각과 조사한 결과를 정리해서 발표할 수 있는 장을 만든 것이지요. 그래서 2회 포럼에서는 박인호 선생의 사법개혁이 포럼 주제로 선택된 것이지요.

 

2월에 있을 세 번째 포럼에서는 이원영 선생께서 자연치유에 대한 발표와 토론을 이끌어 주실 예정입니다. 한국과 미주에서 오랜 기자생활을 하셨고, 그 바쁜 와중에 한의학에 조예를 가지시게 된 것은 우리의 웰빙과 웰다잉을 위해 건강한 생활습관과 질병에 대한 자연치유 접근이 필요하다고 느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밖에도 <무용신> 회원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간과 장소, 발표 방식과 매체 등을 잘 준비해서, 메시지가 잘 전달되는 노력하겠습니다.

 

포럼이라고 해서 항상 딱딱하고 재미없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우리가 다같이 알면 좋을 주제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떤 주제와 어떤 방법이라도 구사해 볼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많은 신청과 참여를 부탁드려요.

 

오늘(1/17) 포럼 후에는 방문단 예비모임이 이어집니다만, 사실 준비는 이미 거의 다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실무를 맡아주신 준비위원들께서 워낙 꼼꼼하고 깔끔하게 자기 맡은 일을 잘 준비해 주시는 바람에, 우리의 출발 준비는 거의 완벽에 가깝습니다.

 

특히 일본 <팀아이>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한국의 준비사항이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이제 저희는 가기만 하면 될 정도로 잘 예비된 방문이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따라서 오늘의 예비모임은 서로 만나 인사를 나누고, 궁금한 점을 의논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은 또 이번 방문단에 적극 참여해 주실뿐 아니라 준비 실무에도 진짜 애써 주신 <대륙학교> 회원 분들도 참여하시게 되며, <무용신> 회원들에게 <대륙학교>의 연혁과 활동,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 등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부탁했습니다. 이 순서는 <희망래일>의 상임이사이시자 <대륙학교>의 교감선생님이신 황광석 선생께서 담당해 주실 것입니다.

 

끝으로, <무용신>의 올해 목표와 계획에 대해서도 발표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은 제가 말씀드리게 되는데,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올해(2023) <무용신>(1) 재일조선학교의 무용부 신입생 약 1백명에게 무용신 선물을 보내고, (2) 연해주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민족학교를 지원하는 후원행사도 계속 하고, (3) 상반기의 일본방문에 이어 하반기에는 연해주 방문단을 조직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4) 이 모든 행사를 통해 <무용신> 후원회원이 3백명에 이르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고 합니다.

 

이런 활동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1) 국내 유관단체 및 해외동포와 연대하면서 (2) 각지의 민족학교와 민족교육을 지원하고, 특히 (3) 민족문화와 예술 활동을 후원하면서, (4) 한민족 교류와 협력, 그리고 궁극적으로 통일운동에 기여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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はコーヒーがきですコーヒーにする繊細味覚つマニアではありませんただその一般的りとそしてコーヒーを時間きなだけです一人でも何人でもインスタントコーヒーでもグアメイドリップコーヒーでもどれもきです

 

そのためあちこちりながらいという食堂さなくてもカフェはたまにんでったりします雰囲気ですからずしも専門店でなくてもいいですし古典的でも現代的でもコーヒーさんの室内ったらはただのいいコーヒーショップだといます

 

日本にもよくったので当然いくつかのコーヒーショップをしてみましたったことはかなりありますが日本訪問団大阪宿りましたので古典的雰囲気のコーヒーショップ2はぜひご紹介したいといます

 

 

つはたちの宿からもとても<丸福珈琲店>です珈琲店はコーヒーショップを昔風日本語ですそれよりも喫茶店ばれていましたとは1930年代もっととは19世紀末から1920年代までです

 

丸福珈琲店日本全土29あるそうですが大阪中央区千日前にあるのが1934めて開業した本店です大阪ファイブホテルからは2.5キロれていて電車でわずか2鶴橋-谷町9丁目-日本橋だけくとB26出口のすぐにあります(リトルプリンスの小惑星B612間違えないでください^^)

 

 

千日前丸福本店ですがファイブホテルからもっと上本町にも丸福珈琲店がもうつありますホテルからはいても10分以内距離ですここはまだったことがないので今回行ってみたいです

 

丸福コーヒーががいいかはからげにくいですネイバーやグーグルで検索してみるとレビューがいといますので参考にしてみてくださいはコーヒーの素晴らしさはよくわかりませんが昔風雰囲気かった記憶ですコーヒー以外にも各種ペストリーやデザートもいいときましたがはコーヒー以外のものをべたことはありませんそしてかなりいです^^

 

丸福珈琲店薔薇(2010)という小説登場してもっと有名になったそうです田辺聖子短編つで年下男性5年間恋愛している女性れを準備する過程をとてもよくいた作品だそうです日本語ではバラノアメとびます

 

 

きなのコーヒーショップは上島珈琲店です上島コーヒー本店神戸市西宮市南越木岩町にありますよく上島珈琲店苦楽園本店ばれています

 

上島丸福より1年前1933開店した珈琲店です支店やフランチャイズすのに非常しい丸福とはなり上島珈琲店はいたるところにあります

 

本店とフランチャイズのコーヒーのうかどうかはよく区別できませんでしたですからまあぜひ西宮までかれる必要はありませんし大阪市内のいろいろなところに点在する上島珈琲店れてみてください焙煎したいたコーヒーをったりします

 

 

そのったことのある現代的なコーヒーショップには神戸西村(にしむら)コーヒーと大阪三和(サンワ)コーヒーワークスがあります

 

これらのお丸福上島のように歴史くはありませんがコーヒーのいことでかなり評判場所です三和コーヒーワークスはさなおですが西村コーヒー7ほどの建物全体がコーヒーショップの大型店です

 

 

西村コーヒーくなら2をおめしますコーヒーのですが写真るのに最適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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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커피를 좋아합니다. 커피에 대한 섬세한 미각을 가진 매니아는 아닙니다. 그저 그 일반적인 향과 맛, 그리고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좋을 뿐입니다. 혼자건 여럿이서건, 봉지커피이건 구어메이 드립커피이건 다 좋아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여기저기 다니면서 식당은 찾아다니지 않아도 카페는 더러 골라 다니곤 합니다. 분위기를 타는 편이니까 꼭 전문점이 아니어도 좋고, 고전적이든 현대적이든 커피집 실내가 마음에 들면 저는 그냥 좋은 커피숍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도 자주 갔으므로 당연히 몇몇 커피가게를 시도해 봤습니다. 다녀본 데는 꽤 많지만, 이번 우리 방문단이 오사카에 숙소를 잡았으므로, 고전적인 분위기의 커피가게 두 군데는 꼭 소개드려 볼까 합니다.

 

 

하나는 우리 숙소에서도 아주 가까운 <마루후쿠(丸福) 고히텐>입니다. 고히텐(珈琲店)은 커피가게를 옛날식으로 부르는 일본말입니다. 그보다 더 옛날에는 기사텐(喫茶店)이라고 부르기도 했었습니다. 옛날이란 1930년대를 가리키고, 더 옛날이란 19세기말에서 1920년대까지입니다.

 

마루후쿠 커피점은 일본 전역에 29개가 있다고 합니다만, 오사카 주오구(中央区)의 센니치마에(千日前)에 있는 것이 1934년에 처음 개업한 본점입니다. 오사카 파이브 호텔에서는 2.5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전철역으로 불과 2(쓰루하시-다니마치9초메-니폰바시)만 가면 B26 출구 바로 앞에 있습니다. (어린왕자의 소행성 B612와 헷갈리지 마시기 바래요.^^)

 

 

센니치마에의 마루후쿠가 본점이지만, 파이브 호텔에서 더 가까운 우에혼마치(上本町)에도 마루후쿠 커피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호텔에서는 걸어가도 10분 이내의 거리입니다. 여기는 제가 아직 가보지 못했고, 이번에 가보고 싶습니다.

 

마루후쿠 커피가 뭐가 좋은 지는 제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네이버나 구글에서 검색해 보시면 후기들이 많을테니까 참고해 보시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커피맛의 탁월함은 잘 모르겠는데, 옛날식 분위기가 좋았던 기억입니다. 커피 말고도 각종 패스트리와 디저트도 좋다고들 하던데, 저는 커피 외에 다른 걸 먹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비쌉니다.^^

 

그리고 이 마루후쿠 커피점은 <장미의 비(薔薇. 2010)>라는 소설에 등장해서 더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타나베 세이코(田辺聖子)의 대표단편 중의 하나인데, 연하남과 5년째 연애 중인 여성이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을 아주 잘 그린 작품이라고 합니다. 일본말로는 <바라노아메(バラノアメ)>라고 부릅니다.

 

 

제가 나름 좋아하는 커피가게는 <우에시마(上島) 고히텐>입니다. 우에시마 커피점의 본점은 고베시에 가까운 니시노미아(西宮)시의 미나미고시키이와초(南越木岩町)에 있습니다. 흔히 <우에시마 고히텐, 쿠라쿠엔 본점(苦楽園本店)>이라고 불립니다.

 

우에시마 커피점은 마루후쿠보다 1933년에 개점한 커피가게입니다. 그러나 지점이나 프랜차이즈점을 내는 데에 매우 엄격한 마루후쿠와는 달리 우에시마 커피점은 도처에 있습니다.

 

저는 본점의 커피와 프랜차이점의 커피 맛이 다른 지는 잘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뭐, 꼭 니시노미아까지 가보실 필요는 없고, 오사카 시내 여러 곳에 산재한 우에시마 고히텐을 방문해 보시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볶은 콩이나 갈은 커피를 팔기도 합니다.

 

 

그밖에 제가 가본 적이 있는 현대적인 커피가게로는 고베의 <니시무라(にしむら) 커피>와 오사카의 <산와 커피웍스(サンワコーヒーワークス)>가 있습니다.

 

이 가게들은 마루후쿠나 우에시마처럼 연원이 오래지는 않지만, 커피 맛이 좋기로 꽤 소문이 난 곳입니다. 산와 커피웍스는 작은 가게지만, 니시무라 커피점은 7층쯤 되는 건물 전체가 커피가게인 대형가게입니다.

 

 

니시무라 커피점에 가신다면 2층을 권합니다. 커피 맛도 맛이지만 사진 찍기 아주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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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リ學校舞踊靴]1次日本訪問団(127-30)大阪朝鮮中高級学校70周年記念公演観覧尼崎朝鮮初中級学校訪問することになります

 

在日朝鮮学校名前しずつくなっていますがこれは初級/中級/高級単独学校初中級中高級あるいは初中高級えるからです学校がどんどん統廃合されるからです6-70年代統廃合学校経営効率性のためだったとすれば90年代以降統廃合生徒数減少財政難のためだといいます

 

えば1946設立された尼崎朝連初等學院大島朝鮮初級1967)、尼崎朝鮮中級1975)、立花朝鮮初級1976)、阪神朝鮮初級2001)、尼崎東朝鮮初級2008學校統合今日尼崎朝鮮初級学校となりましたことし2023には境界えて伊丹朝鮮初級学校まで統合する計画だということです

 

 

大阪朝鮮高級学校2018東大阪朝鮮中級学校併合現在大阪朝鮮中高級学校となりました東大阪中級学校19619西金里中学校過密化解消のために創立されましたが1994西大阪初中級学校中級部1999奈良朝鮮初中級学校中級部統合した今回彼自身大阪朝高併合されたものです

 

朝鮮学校設立統廃合日本行政単位都道府県わせて設立された学校法人朝鮮学園めるようですそこで大阪朝鮮中高級学校統合学校法人大阪朝鮮学園伊丹朝鮮初級学校尼崎朝鮮中高級学校併合学校法人兵庫朝鮮学園決定しました

 

学校法人大阪朝鮮学園2022年現在大阪朝鮮中高級学校9つの朝鮮学校管掌兵庫朝鮮学園神戸朝鮮高級学校6つの朝鮮学校管掌しますこれらの朝鮮学院学校敷地建物管理しているようですこれと関連して大阪兵庫朝鮮学院日本のメディアで報道されたことがあります

 

 

201588日付産経新聞には大阪市朝鮮学校市有地5千平方メートルを売却したという記事掲載されました大阪市大阪地裁仲裁のもと中大阪朝鮮初級学校敷地大阪朝鮮学院売却することで合意したという内容です

 

この記事はまた中大阪朝鮮初級学校学校敷地半世紀にわたり無償占有してきており大阪市がこれを返還するため訴訟こしたが大阪地裁朝鮮学院市有地売却するよう仲裁したと説明売却額相場半分だと推定しました

 

また2016525日付産経新聞市有地賃貸している尼崎朝鮮学校賃貸料年間28万円だったが尼崎市兵庫朝鮮学院賃貸料280万円げるというたな賃貸借契約締結したとじましたこの記事はまたこの市有地標準賃貸料年間約2600万円だが今後10年間その101水準維持される見通えました

 

 

中大阪朝鮮初級学校市有地50年間無償使用相場半額れたことや尼崎朝鮮学校敷地賃貸料相場1001から101げられたというのは異例のことです日本右翼はこれを在日特権非難しています

 

日本各地方自治体朝鮮学校譲歩惠澤提供してきたのは事実のようでそれにはさまざまな理由があるでしょう尼崎市政府突然標準賃貸料要求すれば学校経営しいので協議結果今回金額まったとしました市政部公務員在日朝鮮人日本経験した歴史的苦難考慮するという意味理解されますそしてこうした惠澤たのには学校法人朝鮮学園交渉力きな役割たしたはずです

 

しかしこれらの譲歩惠澤終息していきます10年後尼崎朝鮮中高級学校賃貸料きくがるでしょうし高校無償化対象から朝鮮高級学校日本中央政府政策撤回されるのはしいものとみられます朝鮮学校危機四方から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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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무용신]의 제1차 일본방문단(127-30)은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의 70주년 기념공연을 관람하고, 아마가사키조선초중급학교도 방문하게 됩니다.

 

재일조선학교의 이름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는데, 이는 초급/중급/고급의 단독 학교가 줄고, 초중급, 중고급, 혹은 초중고급학교가 늘기 때문입니다. 학교들이 자꾸 통폐합되기 때문입니다. 6-70년대의 통폐합이 학교 경영의 효율성을 위해서였다면, 90년대 이후의 통폐합은 학생 수 감소와 재정난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1946년에 설립된 아마가사키 조련초등학원은 오지마조선초급(1967), 아마가사키조선중급(1975), 다치바나조선초급(1976), 한신조선초급(2001), 아마가사키히가시조선초급(2008)을 차례로 통합하여 오늘날의 아마가사키 조선초중급학교가 되었습니다. 올해(2023)에는 시의 경계를 넘어 이타미 조선초급학교까지 통합하게 될 계획이라고 합니다.

 

 

오사카조선고급학교도 2018년 히가시오사카 조선중급학교를 병합해 지금의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가 되었습니다. 히가시오사카 중급학교는 19619월 서금리중학교의 과밀화 해소를 위해 창립되었는데, 1994년 니시오사카 초중급학교의 중급부, 1999년 나라조선초중급학교의 중급부를 통합한 다음, 이번에는 그 자신이 오사카조고에 병합된 것입니다.

 

조선학교의 설립과 통폐합은 일본의 행정단위(도도부현)에 맞춰 설립된 학교법인 조선학원이 결정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의 통합은 학교법인 오사카조선학원, 이타미조선초급학교의 아마가사키조선중고급학교 병합은 학교법인 효고조선학원이 결정했습니다.

 

학교법인 오사카조선학원은 2022년 현재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를 포함해 9개 조선학교를 관장하며, 효고조선학원은 고베조선고급학교를 포함 6개 조선학교를 관장합니다. 이 조선학원들은 학교 부지와 건물도 관리하는 듯합니다. 이와 관련 오사카와 효고의 조선학원이 일본 언론에 보도된 일이 있습니다.

 

 

201588일자 산케이신문에는 오사카시가 조선학교에 시유지 5천평방미터를 매각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오사카 시가 오사카 지방법원의 중재 아래 나카오사카 조선초급학교의 부지를 오사카 조선학원에 매각하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기사는 또, 나카오사카 조선초급학교가 학교 부지를 반세기동안 무상 점유해 왔으며, 오사카시가 이를 반환받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으나, 오사카 지방법원이 시가 조선학원에 시유지를 매각하도록 중재했다고 설명하고, 매각액은 시세의 절반이라고 추정했습니다.

 

2016525일자 산케이신문은 시유지를 임대하고 있는 아마가사키 조선학교의 임대료는 연간 28만엔이었으나 아마가사키 시와 효고 조선학원은 임대료를 “280만엔으로 인상하는 새로운 임대차 계약을 체결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기사는 또 이 시유지의 표준임대료는 연간 약 2600만엔이지만 향후 10년간 그 10분의1 수준으로 유지될 전망이라고 전했습니다.

 

 

나카오사카 조선초급학교가 시유지를 50년 동안 무상으로 사용하다가 시세의 절반 값으로 매입한 일이나 아마가사키 조선학교의 부지 임대료가 시세의 100분의1에서 10분의1로 인상됐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일본의 우익은 이를 자이니치특권(在日特權)”이라고 비난합니다.

 

일본의 각 지방정부가 조선학교에게 양보와 혜택을 제공해 온 것은 사실인 듯하고, 거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아마가사키 시정부는 "갑자기 표준임대료를 요구하면 학교 경영이 어렵기 때문에 협의 결과 이번 금액으로 결정됐다"고 했습니다. 시정부의 공무원들도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에서 겪은 역사적 경험을 고려한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혜택을 얻어낸 데에는 학교법인 조선학원의 협상력도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혜택은 종식되어 갑니다. 10년 후 아마가사키 조선중고급학교의 임대료는 다시 크게 오를 것이고, 고교무상화 대상에서 조선고급학교를 제외한 일본 중앙정부의 정책도 철회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학교의 위기는 사방에서 닥쳐오는 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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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解放された直後兵庫県尼崎でも国語講習所かれました在日朝鮮人雑誌イオ(201511月号)によると1946大庄浜田大島武庫常松立花園田長州8地域3年制初等學院朝連によって設立されました統廃合過程初等學院8だったことからなくともその倍数以上国語講習所があったことが推察できます

 

 

1946424生徒350教員14開校した大庄初等學院今日尼崎朝鮮初中級学校前身です194885改編されましたが大庄初等學院本校守部園田立花大島初等學院分校統合されました

 

朝連大庄初等學院日本植民地時代末期強制連行されてきた朝鮮人宿舎として使用していた古河電気工業会社校舎として使用しました

 

 

194910連合軍最高司令部GHQ:General Headquarters日本政府<朝鮮人学校措置方針>発表朝鮮人義務教育日本公立学校実施すべきであり無認可朝鮮人学校めないことを決定兵庫県内朝鮮人学校40閉鎖命令しました

 

学校閉鎖とともに朝鮮人生徒たちは各日本人小学校強制的てられましたが朝鮮人たちはこれにしく抗議しましたらは既存学校寝食にしながら当局学校強制受付一方既存朝鮮人学校日本公立学校分校指定するよう要求しました

 

 

市当局のガイドラインに違反しないために教員たちは授業中止しましたが高学年生徒たちが低学年生徒たちをえるやり授業けながら学校座みをけました

 

日本人学校武庫小学校仮収容された283朝鮮人学生素直授業け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教室りなくて2部制授業を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がえた学生たちで日本人教師たちも困難経験しました

 

 

1949122問題爆発しました日本人教員から日本語授業けていた朝鮮人学生たちは運動場けつけ、「日本語からない朝鮮語えろ」「日本語はもうわった」「たちの先生をなぜいたのか」「日本式教育けないなどのびながらスクラムをんで運動場独立歌のような提唱したりもしました

 

2日後124市当局朝鮮人保護者代表会談かれ朝鮮人側要求大幅れられ(1)市長責任守部朝鮮人学校分校開設(2)分校では朝鮮人教員採用することで合意しました

 

 

4.24阪神教育闘争-民族教育った々の記録(1988)によりますと朝鮮学校日本公立学校分校認可たのはめてでその後尼崎先例東京神奈川大阪愛知などでも朝鮮学校日本学校分校として設立するえました

 

 

1950年代後半帰国事業=北送事業活発になり、「朝鮮語んで祖国ろうという標語生徒数急速えると大庄分校には<尼崎朝鮮中級学校>併設されました中級学校初年度生徒48教員6でした尼崎朝鮮中級学校1958新校舎工事開始195932階建木造建物新校舎完成しました

 

 

一方分校形態朝鮮初等學校1965から自主学校移転しようという運動めました日本市民保守層支持1965718大庄大島守部各分校統合され西立花町所在市有地新校舎建設196641から大島朝鮮初級学校発足させました

 

その19674には幼稚班(教員2園児50)新設され同年10には尼崎朝鮮中級学校統合今日尼崎朝鮮初中級学校と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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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해방된 직후,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尼崎)에서도 <국어강습소>가 열렸습니다. 재일조선인 잡지 <이어(201511월호)>에 따르면 1946년 오쇼(大庄)와 하마다(浜田), 오시마(大島)와 무코(武庫), 쓰네마츠(常松)와 다치바나(立花), 소노다(園田)와 나가슈(長州) 등의 8개 지역에 3년제 초등학원이 조련에 의해 설립됐습니다. 통폐합 과정을 겪은 초등학원이 8개였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 배수 이상의 국어강습소가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46424일 학생 350명과 교원 14명으로 개교한 오쇼초등학원은 오늘날의 아마가사키 조선초중급학교의 전신입니다. 19488개교가 다시 5개교로 개편되었는데, 오쇼초등학원을 본교로, 모리베와 소노타, 다치바나와 오시마의 초등학원은 분교로 통합되었습니다.

 

조련 오쇼초등학원은 일제강점 말기에 강제연행되어 온 조선인들이 숙소로 사용했던 후루카와 전기공업회사의 기숙사를 사들여 교사로 사용했습니다.

 

 

194910월 연합군최고사령부(GHQ: General Headquarters)와 일본정부는 <조선인학교 조치방침>을 발표하고 조선인의 의무교육은 일본의 공립학교에서 실시해야 하며, 무인가 조선인학교는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효고현 내의 조선인학교 40개교에 폐쇄명령을 내렸습니다.

 

학교 폐쇄와 함께 조선인 학생들은 각 일본인 소학교에 강제 배정되었는데, 조선인들은 이에 격렬히 항의했습니다. 이들은 기존 학교에서 숙식을 같이하면서 당국의 학교 강제 접수를 막아내는 한편, 기존의 조선인 학교를 일본 공립학교의 분교로 지정해 주도록 요구했습니다.

 

 

시당국의 가이드라인을 지키기 위해 교원들은 수업을 중지했지만 고학년 학생들이 저학년 학생들을 가르치는 식으로 수업을 계속하면서 학교 농성을 이어갔습니다.

 

일본인 학교인 무코 소학교로 가수용된 283명의 조선인 학생들도 순순히 수업을 받지 못했습니다. 교실이 부족해 2부제 수업을 해야 했는데, 갑자기 늘어난 학생들로 일본인 교사들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49122일 문제가 폭발했습니다. 일본인 교원으로부터 일본어로 수업을 받던 조선인 학생들은 운동장으로 몰려 나가서 일본어는 모른다, 조선말로 가르쳐라,” “일본어는 이제 끝났다,” “우리 선생님을 왜 따돌렸나,” “일본식 교육은 받지 않겠다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달렸고, 독립가와 같은 노래를 제창하기도 했습니다.

 

이틀 후인 124일 시당국과 조선인학부모대표 사이에 회담이 열렸고, 조선인 측의 요구가 대폭 수용되어 (1) 시장 책임아래 모리베(守部) 조선인학교에 분교를 개설하며, (2) 분교에서는 조선인 교원을 채용하기로 합의했습니다.

 

 

<4.24 한신교육투쟁-민족교육을 지킨 사람들의 기록(1988)>에 따르면 조선학교가 일본 공립학교의 분교 인가를 얻어낸 것은 처음이었고, 이후 아마가사키의 선례를 따라 도쿄와 카나자와, 오사카와 아이치 등에서도 조선학교를 일본학교의 분교로 설립하는 예가 늘어났습니다.

 

 

1950년대 후반 귀국사업(=북송사업)이 활발해지면서 조선말 배워서 조국으로 돌아가자는 표어 아래 학생 수가 급속이 늘자, 오쇼 분교에는 <아마가사키 조선중급학교>가 병설되었습니다. 중급학교의 첫해 학생은 48명 교원은 6명이었습니다. 아마가사키 조선중급학교는 1958년 신교사 공사를 시작, 19593월에 2층 목조건물의 신교사를 완공했습니다.

 

 

한편 분교 형태의 조선초등학교는 1965년부터 자주학교로 이전하려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일본 시민과 보수층의 지지까지 얻어가며, 1965718, 오쇼와 오시마, 모리베의 각 분교가 통합되어 니시다치바나초 소재 시유지에 신교사를 건립하고, 196641일부터 <오시마 조선초급학교>를 발족시켰습니다.

 

이후 19674월에는 유치반(교원 2, 원아 50)이 신설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아마가사키 조선중급학교와 통합하여, 오늘날의 아마가사키 조선초중급학교가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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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学校舞踊神] 1次日本訪問団127~30日大阪宝塚訪問します昨年11日本市民団体<チームアイ>先生たちの韓国訪問する答礼訪問性格ですが29(日曜日)には<大阪朝鮮中高級学校開校70周年記念公演>観覧することになります

 

大阪朝高朝鮮学校廃止令克服朝鮮学校再建していた時期大阪市生野区田島開校しました田島にはもともと19451017国語講習所てられ19464には<朝連但馬造船小学校>設立された場所です

 

 

これと1947410には生野区東桃谷町生野ウリ中等学院開校610には北生野町移転<大阪朝鮮中学校>となりました大阪朝鮮中学校開校当時生徒数はすでに220だったということです

 

また1948120には東成区西今里町東成朝鮮学園小学校中学校設立されました194810朝鮮学校閉鎖令田島小学校大阪朝鮮中学校東成小学校中学校がすべて閉鎖されました

 

朝鮮学校強制閉鎖された朝鮮人生徒學父母そして朝連ない抵抗要求された大阪市195071大阪市立本庄中学校分校設立朝鮮人中学校とすることにしましたこれがよく<ソグムリ中学校>ばれていた<公立西今里中学校>です<西今里中学校>東成学園校舎をそのまま使用しました

 

 

一方廃校令により校舎われた大阪朝鮮中学校19491八尾市萱振移転大阪東大阪朝鮮人中学生卒業して進学する場所けるため1952410田島朝鮮小学校校舎臨時使用大阪朝鮮高等学校開校しました開校当時生徒新入生39教員講師16だったということです

 

その大阪朝高1957810河内市(=現在東大阪市玉串元町)1961西今里中学校閉鎖され生徒たちが大阪中学校中大阪中学校転校その卒業生たちは大阪朝鮮高級学校進学しました大阪朝高1973現在地東大阪市菱江校舎新築移転しました

 

 

このように大阪朝鮮高等学校大阪市生野区八尾市東大阪市などに散在していた朝鮮人国語講習所小学校および中学校設立廃校再設立渦中関西中心高等学校つに進化していったのです

 

今日日本てられている朝鮮高等学校全部10あります1948東京朝鮮中高級学校1946年中級部1948年高級部最初にオープンし1952410大阪朝鮮中高級学校それとほぼ時期神戸朝鮮中高級学校1949年中級部1952年兵庫朝鮮高等学校併設1955年神戸朝鮮中高級学校改称きました

 

 

195341には名古屋愛知朝鮮中高級学校(19484月中部朝鮮学校19534月中部朝鮮中高級学校1956年現在名前変更)1954には神奈川朝鮮中高級学校(1951年神奈川朝鮮中学校開校1954年高級部併設後現名改称)1955には京都朝鮮中高級学校(1946年七条朝連国民学院1947年京都西津初中等学校1953年京都朝鮮中高級学校改称)茨木朝鮮初中高級学校(1953年中学校開校55年高級部併設現在名前改称)設立されました

 

 

いて19564には九州朝鮮中高級学校1960には広島朝中高級学校(1945年大竹国語講習所1946年朝連大竹初等學院195399日広島朝鮮中学校創立1960年高級部新設して現在名前改称)開設されくは1982北海道朝鮮初中級学校1961410日北海道朝鮮初中級学校1982年高級部併設高等学校課程新設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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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무용신] 1차 일본 방문단은 127-30일 오사카와 다카라즈카를 방문합니다. 작년 11월 일본시민단체 <팀아이> 선생님들의 한국 방문에 대한 답방의 성격입니다만, 29(일요일)에는 <오사카조선학교의 개교 70주년 기념공연>도 관람하게 됩니다.

 

오사카조고는 조선학교 폐지령을 극복하고 조선학교를 재건하던 시기, 오사카시 이쿠노(生野)구 타지마(田島)에서 개교했습니다. 타지마에는 원래 19451017일 국어강습소가 세워졌고, 19464월에는 <조련 타지마 조선소학교>가 설립되었던 곳입니다.

 

 

이와 함께 1947410일에는 이쿠노구 히가시모모타니초에 이쿠노 우리중등학원이 개교되었고, 610일 기타이쿠노초로 이전, <오사카 조선중학교>가 되었습니다. 오사카 조선중학교 개교 당시 학생수는 이미 220명이었다고 합니다.

 

1948120일에는 히가시나리구 니시이마자토(西今里)초에 <히가시나리 조선학원 초등학교와 중학교>도 설립되었습니다. 194810월 조선학교 폐쇄령으로 타지마 소학교와 오사카 조선중학교, 히가시나리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모두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조선학교가 강제 폐쇄된 동안, 조선인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조련의 줄기찬 저항과 요구에 밀린 오사카시는 195071일 오사카 시립 혼죠중학교의 분교를 설립해 조선인 중학교로 삼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흔히 <서금리중학교>라고 불리던 <공립 니시이마자토 중학교>입니다. <서금리중학교>는 히가시나리학원의 교사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한편 폐교령에 교사를 빼앗긴 오사카 조선중학교는 19491월 야오(八尾)시 카야후리(萱振)로 이전했고, 오사카와 히가시오사카의 조선인 중학생들이 졸업해 진학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 1952410일 타지마 조선소학교의 빈 교사를 임시로 사용하면서 오사카조선고등학교가 문을 열었습니다. 개교 당시 학생은 신입생이 39, 교원과 강사는 16명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오사카조고는 1957810일 카와치(河内)(=현재의 히가시오사카(東大阪)시 타마쿠시모토마치(玉串元町)로 옮겼고, 1961<서금리 중학교>가 폐쇄되면서 학생들이 오사카중학교와 나카오사카중학교로 전학했고 그 졸업생들은 오사카조선고급학교로 진학했습니다. 오사카고등학교는 1973년 현재 위치인 히가시오사카시 히시에(菱江)에 교사를 신축해 이전했습니다.

 

 

이렇게 오사카조선고등학교는 오사카시 이쿠노구와 야오시, 히가시오사카시 등에 산재했던 조선인 국어강습소와 초등학교 및 중학교들의 설립과 폐교와 재설립의 와중에서 간사이의 중심 고등학교의 하나로 진화해 나갔던 것입니다.

 

오늘날 일본에 세워져 있는 조선고등학교는 모두 10개입니다. 1948도쿄(東京)조선중고급학교(1946년 중급부, 1948년 고급부)가 가장 먼저 문을 열었고, 1952410일에 오사카(大阪)조선중고급학교, 그와 비슷한 시기에 고베(神戶)조선중고급학교(1949년 중급부, 1952년 효고조선고등학교 병설, 1955년 고베조선중고급학교로 개칭)가 뒤를 이었습니다.

 

 

195341일에는 나고야에 아이치(愛知)조선중고급학교(19484월 중부조선학교, 19534월 중부조선중고급학교, 1956년 현재 이름으로 변경), 1954년에는 카나가와(神奈川)조선중고급학교(1951년 카나가와조선중학교 개교, 1954년 고급부 병설후 현 이름으로 개칭), 1955년에는 교토(京都)조선중고급학교(1946년 칠조조련국민학원, 1947년 교토서진 초중등학교, 1953년 교토조선중급학교, 1955년 고등학교 신설하여 현 이름으로 개칭)이바라기(茨城)조선초중고급학교(1953년 중학교 개교, 55년 고급부 병설해 현재이름으로 개칭)가 설립됐습니다.

 

 

뒤이어 19564월에는 큐슈(九州)조선중고급학교, 1960년에 히로시마(廣島)조충고급학교(1945년 오오다케 국어강습소, 1946년 조련오오다케초등학원, 195399일 히로시마조선중학교 창립, 1960년 고급부를 신설하여 현재 이름으로 개칭)가 문을 열었고, 가장 늦게는 1982홋카이도(北海道)조선초중고급학교(1961410일 홋카이도조선초중급학교, 1982년 고급부 병설)가 고등학교 과정을 신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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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放後日本各地国語講習所小学校てられた猪飼野にもくの国語講習所設立され朝連はこれを10小学校統廃合しました猪飼野西部北部朝練生野第1910ウリ學校設立されこのうち10今日大阪第4朝鮮初級学校につながってきた前文でまとめました

 

それとほぼ時期猪飼野東部南部地域でも国語講習所小学校設立されました19451017猪飼野東9丁目現在田島1丁目付近てられた国語講習所後日東大阪朝鮮第5初級学校となりました113には中河内郡(1955大阪市生野区編入巽町巽町國民学校国語講習所敷設されましたがこれは東大阪朝鮮第3初級学校前身です

 

 

1946には朝連東中川朝鮮小学校設立されこれは東大阪第一初級学校につながりましたこれらの学校1948朝鮮学校閉校令ですべて一時閉鎖され19521953にすべて再建されました

 

1953には舎利寺朝鮮初級学校1957には田島朝鮮初級学校再建されました1956年舎利寺朝鮮初級学校校舎火災焼失すると1957年舎利寺初新設田島初統合され1962721には生野区巽西校舎新築移転東大阪朝鮮第五初級学校となりました

 

 

1991東大阪第135初級学校統合され生野朝鮮初級学校となり1992831現在位置移転しました生野朝鮮初級学校前文から大阪朝鮮第4初級学校から南東2キロれていていても30距離です

 

一方解放後大阪市東成地域にも4つの朝鮮小学校誕生しました19481204つの朝鮮小学校統廃合され朝連東成学園初級部中学部となりました校舎市有地坂東小学校敷地新設されましたがこの校舎西今里中学校(1950-1961)中大阪朝鮮初級学校(1961-2021)校舎として活用されました

 

19484.24教育闘争194931大阪府新設された財団法人大阪朝連学院承認大阪府傘下朝鮮学校24私立学校として認可しました当時朝連東成学園には850生徒在学していましたが98朝鮮学校閉鎖令閉校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

 

 

1年後19503閉鎖令抵抗していた朝鮮人未就学学生のために大阪市市立中学校新設することを朝鮮学校再建機会けられました同年71大阪市立本庄中学校分校として西今里中学校開設されましたが同校朝連東成学園敷地校舎をそのまま使用教育内容民族教育でしたこの学校漢字看板とともに韓国式発音ソグムリジュンハクギョ(=서금리중학교, 西金里中学校)という扁額げました

 

1950年代後半在日朝鮮人送還事業まると西金里中学校生徒数きく増加19591千人(1,163)1961には2千人えました(2,059)教室りず運動場教室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ほどでした

 

 

当時西金里中学校日本教育制度教育内容わなかったため市立学校資格められませんでしたそこで在日本朝鮮人總聯合会(=總聯)196181財団法人大阪朝鮮学院設立831市立西今里中学校廃校生徒たちは東大阪朝鮮中級学校現在大阪朝鮮中高級学校前身196191新設された中大阪朝鮮初中級学校転校しました

 

中大阪朝鮮初級学校1961910日初級部中級部分離して40年以上運営されていましたが1980年代末以降生徒数2006年中級部廃止された中大阪朝鮮初級学校改称され2021には生野朝鮮初級学校統合され廃校と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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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일본 각지에 국어강습소와 초등학원이 세워질 때 이카이노에도 많은 국어강습소가 설립됐고, 조련은 이를 10개의 초등학원으로 통폐합했습니다. 이카이노의 서부와 북부에 조련이쿠노제1, 9, 10우리학교가 설립되어, 이중 제10우리학교가 오늘날의 오사카 제4조선초급학교로 이어져 온 이야기는 지난 글에서 정리했습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이카이노의 동부와 남부지역에서도 국어강습소와 초등학원들이 설립됐습니다. 19451017일 이카이노히가시9초메(猪飼野東9丁目, 지금의 타지마1초메 부근)에 세워진 국어강습소는 후일 히가시오사카 조선제5초급학교가 되었습니다. 113일에는 나카가와치군(中河内郡, 1955년에 오사카시 이쿠노구에 편입) 다츠미마치(巽町)의 다츠미국민학교 안에 국어강습소가 부설됐는데, 이는 히가시오사카 조선제3초급학교의 전신입니다.

 

 

1946년에는 조련 히가시나카가와 조선소학교가 설립되었고, 이는 후일 히가시오사카제1초급학교로 이어졌습니다. 이 학교들은 1948년의 조선학교 폐교령으로 모두 일시 문을 닫았다가 1952년과 1953년에 모두 재건됐습니다.

 

1953년에는 샤리지(舎利寺)조선초급학교, 1957년에는 타지마조선초급학교가 재건되었습니다. 1956년 샤리지 조선초급학교의 교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1957년 샤리지초는 신설 타지마초와 통합되었고, 1962721일에는 이쿠노구 다츠미니시(巽西)에 신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면서 히가시오사카 조선제5초급학교가 되었습니다.

 

 

1991년 히가시오사카 제1, 3, 5초급학교가 통합되어 이쿠노조선초급학교가 되었고, 1992831일 오늘날의 위치로 이전했습니다. 이쿠노조선초급학교는 앞글에서 본 오사카조선제4초급학교에서 남동쪽으로 약 2킬로미터 떨어져 있어서 걸어서도 30분 거리입니다.

 

한편, 해방 후 오사카시 히가시나리(東成) 지역에도 4개의 조선소학교가 탄생했습니다. 19481204개의 조선소학교가 통폐합되어, 조련히가시나리학원의 초급부와 중학부가 되었습니다. 교사는 시유지인 반도우(阪東)초등학교 부지에 신설됐는데, 이 교사는 후일 니시이마자토중학교(1950-1961)와 나카오사카조선초급학교(1961-2021)의 교사로 활용됐습니다.

 

1948년의 4.24교육투쟁을 거쳐, 194931일 오사카부는 신설된 재단법인 오사카 조련학원을 승인하고 오사카부 산하 조선학교 24개교를 사립학교로 인가했습니다. 당시 히가시나리학원에는 850명의 학생들이 재학했으나, 98일 조선학교 폐쇄령으로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1년만인 19503, 폐쇄령에 저항하던 조선인 미취학학생들을 위해 오사카시가 시립중학교를 신설하기로 결정하면서 조선학교 재건의 기회가 마련되었습니다. 그해 71일 오사카시립 혼조(本庄)중학교의 분교로서 니시이마자토(西今里)중학교가 개설됐는데, 이 학교는 조련히가시나리학원의 부지와 교사를 그대로 사용했고, 교육내용도 민족교육이었습니다. 이 학교는 한자 간판과 함께 한국식 발음으로 <서금리중학교>라는 현판도 걸었습니다.

 

1950년대 후반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이 시작되자 <서금리중학교>의 학생수는 크게 증가해 19591천명이 넘어섰고(1,163), 1961년에는 2천명이 넘었습니다(2,059). 교실이 부족해 운동장에 조립식 교실을 만들어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서금리중학교는 일본 교육제도와 교육내용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시립학교 자격을 인정받기 어려웠습니다. 이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196181일 재단법인 오사카조선학원을 설립하고 831일 시립니시이마자토중학교를 폐교, 학생들은 히가시오사카조선중급학교(오늘날 오사카조선초중급학교의 전신)196191일 신설된 나카오사카조선초중급학교로 전학했습니다.

 

나카오사카조선초중급학교는 1961910일 초급부와 중급부를 분리해 40년 이상 운영되었으나, 1980년대말 이후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2006년 중급부가 폐지된 후, 나카오사카조선초급학교로 개칭되었다가, 2021년에는 이쿠노조선초급학교와 통합되면서 폐교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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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リ學校舞踊靴]日本訪問団宿泊する生野<ファイブホテル>はコリアタウンのにあります生野という名前1973年以降行政洞名改編以降にできたものでそれ以前猪飼野ばれていたところですね

 

猪飼野在日朝鮮人密集居住地域だったので当然解放直後国語講習所ができいて朝連初等學院設立されました現在運営されている<大阪朝鮮第4初級学校>訪問団宿舎から直線距離でわずか300メートルれたところにあります

 

 

イオ20158月号によりますと大阪朝鮮4初級学校前身1946611設立された<生野第10ウリ學校>だそうですしかし当時用語通りだと<朝連猪飼野第10初等學院>だったとわれます設立当時校舍になく在日同胞ヒョン·ボンジョ工場授業めました猪飼野第十初等學院開校当時生徒120教員8だったそうです

 

生徒数増加すると創立1周年えた1947611大阪朝鮮4現在地646敷地木造建物校舎新築しましたこの生徒数150教員9でした校舎新築とともに学校名御幸森朝鮮小学校えました

 

御幸森仁徳天皇(257?-399)がここに頻繁行幸していたことに由来する地名です現在のコリアタウンとすぐ隣接する場所ですがそれでコリアタウンの<御幸通中央門>てられていて<百済門>にもその言葉かれています

 

 

当時天皇王宮難波にあり御幸森までは3キロメートルりでした今日電車駅からもわずか3難波-日本橋-谷町9丁目-鶴橋です

 

伝承によると仁徳天皇がよく御幸森行幸した理由渡来人うためだったそうです当時渡来人=百済人日本とはなる韓半島んで飼育成功日本人食生活改善貢献しました

 

そのにも猪飼野韓半島との航路交流新聞物豊富だった場所だったので天皇らに頻繁おうとしたものとえられますそのためこの地域名前百済野または猪飼野んだのです当時渡来人たちは天皇直接頻繁交流するほどいに尊重されだったのです

 

 

解放後ここにてられた最初小学校御幸森朝鮮小学校1993年以降ここがコリアタウンとして開発されると、「御幸通中央門てることに躊躇しなかったのもおそらくそのような古代史反映しようとしたからだとわれます

 

国語講習所朝連初等學院々と改編された1946年頃鶴橋桃谷勝山中川西などをむこの学区には、「朝連猪飼野第10にも朝連猪飼野第1鶴橋)」朝連猪飼野第9勝山)」がありましたこのうち191947統合され、「鶴橋朝鮮初等學院となりましたが、「御幸森朝鮮小学校はそのまま存続しました

 

 

御幸森朝鮮小学校19484からまった日本当局朝鮮学校廃止令一時閉鎖されましたが19544生徒数200まり同名学校再建され1961には東大阪朝鮮第四初級学校改称されましたが1991現在名称大阪朝鮮第四初級学校改称されました

 

しかし<朝連猪飼野第101946>からまり<大阪朝鮮第4初級学校1991>るまで歴史的命脈いできた同校2016611創立70周年えましたが2022學年度最後閉校近隣<生野朝鮮初級学校>合併することになるというニュースです廃校原因生徒数減少とそれに財政難によるものといわれ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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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무용신] 일본방문단이 숙박하는 이쿠노의 <파이브 호텔>은 코리아타운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쿠노라는 이름은 1973년 이후 행정동명 개편 이후에 생긴 것이고 그 이전에는 이카이노라고 불렸던 곳이지요.

 

이카이노가 재일조선인 밀집 거주지역이었으므로 당연히 해방 직후 국어강습소가 생겼고, 이어서 조련초등학원이 설립되었습니다.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오사카조선제4초급학교>는 방문단 숙소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3백미터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이어> 20158월호에 따르면 오사카조선4초급학교의 전신은 1946611일에 설립된 <이쿠노 제10우리학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용어대로 한다면 <조련 이카이노 제10초등학원>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설립당시 교사가 따로 없이 재일동포 현봉조씨의 공장에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이카이노 제10초등학원의 개교 당시 학생은 120, 교원이 8명이었다고 합니다.

 

학생 수가 증가하자 창립 1주년을 맞은 1947611, 오사카조선4초의 현재 자리에 646평의 부지에 목조건물 교사를 신축했습니다. 이때 학생 수는 150, 교원이 9명이었습니다. 교사 신축과 함께 학교 이름을 <미유키모리 조선소학교>로 바꿨습니다.

 

미유키모리(御幸森)는 닌토쿠(仁德, 257?-399)천황이 이곳에 자주 행차했던 것에서 유래한 지명입니다. 지금의 코리아타운과 바로 인접한 곳인데, 그래서 코리아타운 한 가운데에 미유키도리주오(御行通中央)문이 세워져 있고, 백제문(百濟門)에도 그 말이 쓰여 있습니다.

 

 

당시 천황의 왕궁은 난바(難波)에 있었고, 미유키모리까지는 동쪽으로 3킬로미터 남짓이었습니다. 오늘날 전철역으로도 겨우 3정거장(난바-니뽄바시-타니마치9초메-쓰루하시)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닌토쿠 천황이 자주 미유키모리에 행차를 했던 까닭은 도래인들을 만나보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당시 도래인(=백제인)들은 일본 돼지()와는 다른 한반도 돼지()를 들여와서 사육에 성공함으로써 일본인들의 식생활 개선에 기여했습니다.

 

그밖에도 이카이노는 한반도와 뱃길 교류가 계속되면서 신문물이 풍성했던 곳이었기에 천황도 이들을 자주 만나보려고 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래서 이 지역의 이름도 쿠다라노(百濟野) 혹은 이카이노(猪飼野)라고 불렀던 것이지요. 당시만 해도 도래인들은 천황과 직접 자주 교류할 만큼 서로 존중받는 사이였던 것입니다.

 

 

해방후 이곳에 세워진 최초의 초등학원을 <미유키모리 조선소학교>라고 부르고, 1993년 이후 이곳이 코리아타운으로 개발되자 <미유키도리주오>문을 세우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던 것도, 아마도 그같은 고대사를 반영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국어강습소가 조련초등학원으로 속속 개편되었던 1946년경, 츠루하시와 모모타니, 카츠야마와 나카가와니시 등을 포함했던 이 학구에는 <조련이카이노제10> 말고도 <조련이카이노제1(츠루하시)><조련이카이노제9(카츠야마)>가 더 있었습니다. 이중 1초와 9초는 1947년에 통합되어 <츠루하시조선초등학원>이 되었지만 <미유키모리 조선소학교>는 그대로 존속되었습니다.

 

 

<미유키모리 조선소학교>19484월부터 시작된 일본 당국의 조선학교 폐지령으로 일시 폐쇄되었다가 19544월 학생 수 2백명이 모여 같은 이름의 학교가 재건되었고, 1961년에는 <히가시오사카조선제4초급학교>로 개칭되었다가, 1991년에 지금의 명칭인 <오사카조선제4초급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조련이카이노제10(1946)>에서 시작되어 <오사카조선제4초급학교(1991)>에 이르도록 역사적 명맥을 이어온 이 학교는 2016611일 창립 70주년을 맞았으나, 2022학년도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인근 <이쿠노조선초급학교>와 합병하게 된다는 소식입니다. 폐교의 원인은 학생수 감소과 그에 동반된 재정난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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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れまで東京都兵庫県愛知県山口県福岡県てられた在日朝鮮人初期国語講習所をざっとてきましたが限界があることはらかです在日朝鮮人月刊誌イオ掲載されたまりのウリハッキョシリーズにほぼ全面的依存していたからです

 

イオ連載物20151月号から67いていて日本全土朝鮮学校について幅広しい内容まれているいちいち文献根拠提示していて正確性れていますしかし一時500校余りにした朝鮮学校をすべて叙述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はずなので依然としてをつけて参考にしてはいます

 

 

一方たような性格朝鮮学校ある風景という雑誌在日朝鮮学校への寄稿文せたりしますがくなく過去文章転載したり個人回顧談くて客観的朝鮮学校状況再構成するには無理があるとじましたそれにもかかわらず大切資料であることは間違いないでしょう

 

20173発行された朝鮮学校のある風景には、「4.24教育闘争から69:初期民族教育あゆみという掲載されました。(この文章、『統一評論という月刊雑誌19782-4月号連載されたものをほぼそのまま転載したものだという編集者注がついています。)

 

 

日本では一般的4·24教育闘争関西在日朝鮮人阪神教育闘争韓国では阪神教育事件多様ばれるこの事件発生したのが19484ですのでこのはすでに朝連指揮朝鮮人初級學院体制えて地域拡張めていたですそれで朝鮮学校のある風景在日本朝鮮人連合(=朝連)結成民族教育まりとます

 

帰国同胞たちがにぎわう九州港また東京芝浦吉木西新井三河島神奈川横浜番町川崎あるいは大阪猪飼野など同胞居住地さらに九州北海道炭鉱日本各地朝鮮人艦場祖国言葉文字びたいというこったこのような切実いは19451015在日韓国人意思権益団体すなわち在日本朝鮮人連合朝鮮人連合結成によってなされたこれがまさに在日韓国人民主主義的民族教育まりだったのだ」。

 

朝鮮学校のある風景国語講習所設置さえ朝連主導したとべていますが姫路国語講習所東京神田朝鮮YMCA国語講習会など初期国語講習所るとずしもそうではないようですおそら民間自発的努力調教組織的後援協力した結果だといといます

 

 

しかし朝連1946年以降在日同胞教育事業体系的めてきたのはらかな事実です原則めて実態把握乱立国語講習所調整したり統廃合して朝連初等學院体系にし教材って教員養成したのが朝連だったからです

 

朝連結成されたのは19451015ですから解放直後非常素早組織されたわけですおそらく日本による植民地時代民族運動労働運動をしてきた々の組織力量発揮されたためでしょう

 

朝連194622回全国大会朝鮮学校設置決議この決議はその4から実践されましたそのため解放直後から19464までは自発的国語講習所主種となっていましたが19464月以降朝連學院体系骨組みとなったことがかります

 

 

朝連194610統計によりますと当時日本には朝連初等學院525中学校4青年学校1設立され生徒数42千人余教員数1100人余りだったということです

 

解放後たった1行政指導支援資金なしにこのような規模体系えた学校制度成立したというのは本当にすごいことです解放えた在日朝鮮人自発的努力朝連組織的主導がシナジーをこした結果だっ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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