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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119일 최승희 선생의 다카라즈카 대극장 공연은 여러모로 이례적인 행사였습니다.

 

우선 주변의 대도시 오사카(1025)와 고베(26), 교토(118)에서 모두 공연이 열렸는데도 소도시 다카라즈카에서 또 다시 공연을 열었습니다. 다카라즈카에서 오사카와 고베까지는 전차로 30분밖에 걸리지 않고, 교토까지도 1시간 이내이기 때문에 다카라즈카에서 별도의 공연을 연다는 것은 흥행의 측면에서 그리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둘째, 주요 신문의 다카라즈카 공연 예고기사도 이례적입니다. 오사카 공연(1025)의 홍보는 예술잡지 <회관예술> 10월호에 실린 대대적인 특집기사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의 잡지발행 관행으로 10월호라면 이미 9월 중순부터 편집되기 때문에 한 달 이상 전부터 공연이 예고되고 홍보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베 공연(1026)1011일자 <고베신문>무희 최승희가 온다는 기사가 홍보를 시작했고, 이후 두 주일 동안 주요 신문에 최승희 소개 기사와 광고문이 계속 실렸습니다. 교토 공연(118)의 홍보 광고는 일주일 전인 111일부터 <교토신문>에 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카라즈카 공연(119)의 광고는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이 하루 전인 118, <오사카아사히신문><고베신문><교토신문>은 공연 당일의 조간신문에 실었을 뿐입니다.

 

 

셋째, 간사이 공연의 동선이 이례적입니다. 최승희 선생은 오사카(25)에서 시작해서 고베(26), 오카야마(27), 구레(29), 히로시마(30)로 서진하다가, 다시 돌아와서 119일에 다카라즈카 공연을 가집니다. 그리고나서 다시 1113일부터 노가타(直方)를 시작으로 큐슈 순회공연을 단행했습니다.

 

다시 말해 다카라즈카 공연은 동선 상으로 간사이공연의 첫 공연, 혹은 오사카에 이은 두 번째나 고베에 이은 세 번째 공연이 되어야 하지만, 간사이의 마지막 공연으로 열렸습니다. 이는 다카라즈카 공연이 오사카 공연처럼 1달 전부터 준비된 것이 아니라 간사이 공연 도중에 급작스럽게 마련된 것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넷째, 최승희 선생의 공연일지를 보면 다카라즈카 공연이 2회 오사카 공연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다카라즈카는 오사카와 가깝지만 고베와 함께 효고현에 속합니다. 다카라즈카를 오사카로 착각한 것은 최승희 선생측이 다카라즈카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끝으로, 앞글에서도 지적된 것처럼, 다카라즈카 대극장은 소녀가극단 전용 극장으로 사용되며, 외부의 예술가나 연예인들에게 대여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다는 점, 그러나 그 규칙을 깨고 최승희 선생의 공연을 위해 대관되었다는 점도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례성이 중첩되었다는 것은 의도가 개입했다는 뜻이겠습니다. , 다카라즈카 공연은 처음부터 계획된 공연이 아니라, 뒤늦게 끼워 넣어진 공연일 가능성이 높으며, 아마도 간사이 공연이 진행되는 도중에 기획되고, 제안되고, 수락되어,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도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한큐전철)이 최승희 선생의 오사카와 고베의 공연이 성황을 이루는 것을 보고 다카라즈카 추가 공연을 제안했고, 최승희 선생 측은 이를 받아들여 이미 일정이 짜인 히로시마 공연과 큐슈 공연의 사이에 다카라즈카 공연을 끼워 넣었을 것입니다.

 

 

다카라즈카 대극장은 어째서 최승희의 공연을 유치하려고 했을까요? 막 떠오르는 스타 최승희의 흥행성과 상품성을 알아보았기 때문이겠지만,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의 권고나 중개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시이 바쿠는 1922년 세계 순회공연을 떠나기 직전에 다카라즈카 음악학교의 교사로 일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승희는 왜 이 제안을 받아들였을까요? 2천석 극장의 공연과 12백명을 유치하는 촬영대회가 보장하는 수익은 당연히 좋은 조건이었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다카라즈카에 공연을 보러와 줄 조선인 동포들이 많았다는 점도 수락의 이유 중의 하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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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선생의 다카라즈카 대극장 공연은 1935119일 저녁7시에 개연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간사이 지역의 거의 모든 주요 신문들이 보도했고, 공연을 홍보하는 광고도 실었습니다.

 

<오사카마이니치신문(118, 14)>이 공연일보다 하루 먼저 보도했고, 뒤이어 <고베신문(119, 2)><오사카아사히신문(119, 7)>, <교토신문(119, 2)>의 조간신문이 공연 기사와 홍보 광고를 실었습니다.

 

 

정작 다카라즈카의 지역신문 기사는 찾지 못했는데, 다카라즈카 중앙도서관에 고신문이 소장되어 있지 않았고, 아카시의 효고현립도서관에도 해당 날짜의 다카라즈카 신문이 보관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카라즈카 신문은 조금 더 열심히 찾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각 공연 기사와 광고 기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9일의 공연을 알리는 내용과 10일 오전10시와 오후1시에 시작되는 최승희 야외무용 촬영대회를 알리는 내용입니다.

 

최승희 촬영대회란 무용의상 차림의 최승희가 한두 가지 무용작품을 시연하는 동안 입장을 승인받은 신청자들이 자신의 카메라를 가지고 최승희의 무용 모습을 촬영하는 경연대회였습니다. 대회장은 대체로 야외였기 때문에 야외무용 촬영대회라고 불렀습니다.

 

야외무용 촬영대회는 대개 컨테스트였습니다. 촬영대회가 끝나면 참가자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현상, 인화하여 사진 작품을 완성하고, 이를 우편이나 직접 주최 측에 보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주최측은 작품들을 심사하고 선별하여 입선자를 선정하고, 시상을 하곤 했습니다.

 

최승희 야외무용 촬영대회는 193481일 가마쿠라 유이가하마 해변에서도 열렸고, 1935106일에는 도쿄도의 서단의 유원지인 오쿠타마 계곡에서도 열린 바 있었습니다유이가하마의 촬영대회는 동양사진공업사가 주최한 경연대회로, 이 대회에서 2등으로 입선한 쿠와바라 키네오(桑原甲子雄, 1913-2007)의 최승희 사진이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오쿠타마의 촬영대회는 한 가지 제한을 걸었습니다. 라이카 카메라 소지자만 신청자격이 있었습니다. 신청자가 쇄도하자 주최 측은 신청자를 약 280명으로 제한했고, 이날 찍은 사진은 1인당 3장씩만 출품할 수 있었습니다. 촬영대회 후원사인 사진잡지사 <사진신보>는 자사 사진 기자가 촬영한 최승희 사진 10장을 193511월호에 게재했습니다.

 

 

그런데 다카라즈카의 촬영대회는 유이가하마나 오쿠타마의 촬영대회보다 규모가 컸습니다. 참가자의 수를 제한하기는 했는데, 그 수가 12백 명이었습니다. 다카라즈카 대극장 주변의 넓은 공간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촬영대회는 오전과 오후에 두 번으로 나누어 진행했기 때문에 각각 12백명이 참가한 것인지, 혹은 각각 6백명으로 모두 합쳐서 12백명이 참가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후자의 경우라도 이는 최승희 촬영대회 중에서 최대 규모입니다.

 

다카라즈카 대극장이 2천석이었고 9일 공연 입장료가 50(특석 3백석은 1)이었던 반면, 촬영대회 참가비는 일률적으로 1엔이었기 때문에 공연수입보다 촬영대회 수입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날 촬영대회에서 촬영된 최승희 사진이 공개된 적은 없었습니다. 제가 다카라즈카 지역신문을 찾아내지 못했지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 대회에서는 촬영만 허용하고 콘테스트를 진행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19351110, 다카라즈카 대극장 야외무용 촬영대회에서 촬영된 수천 장, 아니 수만 장의 최승희 사진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요?

 

촬영대회 참가자들의 다락방이나 창고에서 잠자고 있을 지도 모르고, 혹은 현상이나 인화조차 되지도 않은 채 버려졌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떤 경우이든 다카라즈카 촬영대회로부터 9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 사진들을 되찾아낼 방법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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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年代在日朝鮮人には宝塚つのつヤヌスでしたやかなショービジネスのメッカでありながら朝鮮人苦難現場だったからです宝塚表面的華やかさには地域近代化過程低賃金過労働しめられた朝鮮人がにじむわけです

 

ところが1930年代後半つまり1935年末から1937までの期間宝塚やかな歴史出会事件発生しました朝鮮舞踊家崔承喜登場です

 

崔承喜先生1926-1929東京石井舞踊団舞踊留学えた朝鮮って公演活動いましたがきな成果られませんでした朝鮮舞踊賤視風潮近代舞踊する無理解のためでした19315安漠(アンマク)先生結婚19328長女安勝子(アン·スンジャ)出産した崔承喜19333とともに2番目東京石井舞踊団首席舞踊家として朝鮮舞踊しいきました

 

 

1933520女性誌令女界主催した近代女流舞踊大会朝鮮舞踊作品エヘヤノアラ』(1931発表きな反響ました。 『エヘヤ·ノアラ成功えられ崔承喜朝鮮伝統から素材近代的再構成した僧舞(1934)剣舞(1934)などの朝鮮舞踊相次いで発表しました19355石井舞踊団から独立して<崔承喜舞踊団>げたその1020東京2回舞踊発表会いたすぐに日本巡回公演ました

 

大阪1025神戸1026)、岡山10271029広島1030公演した崔承喜はしばらくった京都118宝塚119舞踊公演いました

 

1935になると宝塚少女歌劇団創立1913されてから20年以上少女歌劇団ブームが日本全土がったです全国各地類似少女歌劇団られ広島羽田少女歌劇団1918)、大阪琵琶少女歌劇団1919浪華少女歌劇団1921)、東京松竹少女楽劇部1922がそれでした1932には松竹少女楽劇部名前松竹少女歌劇部改称そのから宝塚松竹少女歌劇団はライバルとなりダンスとわせたレビュー公演団先頭走者いでいきました

 

宝塚少女歌劇団1932東京進出浅草松竹座劇場拠点いた松竹少女歌劇部1933新宿第一劇場本拠した両歌劇団全国的巡回公演少女歌劇団全盛時代っていました

 

 

これといたるところに宝塚という劇場設立されました1932東京宝塚劇場開館して以来1935には横浜名古屋京都宝塚劇場がオープンしました朝鮮でも京城乙支路にあった黄金芸能館(1913)京城宝塚劇場(19251940))改称され大邱大邱キネマ倶楽部(1938)大邱宝塚劇場(1940)改称されました宝塚少女歌劇団人気映画界にもがり宝塚劇場盛業につながったのです

 

少女歌劇団ブームで日本伝統舞踊近代舞踊など芸術舞踊きく萎縮しましたが崔承喜朝鮮舞踊だけは人気まりました崔承喜朝鮮舞踊扇情性強調しなかった芸術舞踊でしたが崔承喜自身美貌作品異国性観客にアピールっていたからでしょう

 

 

それとともに崔承喜公演観覧えてくれた朝鮮人同胞声援きな役割たしました崔承喜公演朝鮮同胞居住していた地域かれたりしましたから

 

宝塚大劇場少女歌劇団公演以外芸術家/芸能人貸館しないことで有名だった劇場ですしかし1935119崔承喜公演はそこでわれました崔承喜例外提供したのです

 

そんな特恵のおかげで宝塚んでいた朝鮮人たちはやかな大劇場舞台朝鮮衣装朝鮮音楽伴奏げられる崔承喜朝鮮舞踊鑑賞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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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의 재일 조선인에게는 다카라즈카가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였습니다. 화려한 쇼비지니스의 메카이면서도 조선인 고난의 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카라즈카의 표면적 화려함에는 지역 근대화 과정에서 저임금과 과노동에 시달렸던 조선인의 피와 땀이 배인 셈입니다.

 

그런데 1930년대 후반, 1935년 말부터 1937년까지의 짧은 기간, 다카라즈카의 화려한 얼굴과 어두운 역사가 서로 만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조선무용가 최승희의 등장입니다.

 

최승희 선생은 1926-1929년 도쿄의 이시이무용단에서 무용 유학을 마친 후, 조선으로 돌아가 공연활동을 펼쳤으나 큰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무용 천시 풍조와 근대무용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었습니다. 19315월 안막 선생과 결혼하고 19328월 장녀 안승자를 출산한 최승희는 19333월 남편과 딸과 함께 두 번째로 도쿄에 건너갔고, 이시이무용단의 수석 무용가로서 조선무용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1933520일 여성잡지 <영녀계>가 주최한 <근대여류무용대회>에서 조선무용 작품 <에헤야노아라(1931)>를 발표해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에헤야 노아라>의 성공에 힘입은 최승희는 조선 전통에서 소재를 취해 근대적으로 재구성한 <승무><검무> 등의 조선무용을 잇달아 발표했습니다. 19355월 이시이무용단에서 독립해 <최승희무용단>을 꾸린 그는, 그해 1020일 도쿄에서 제2회 무용발표회를 가진 후 바로 일본 순회공연에 나섰습니다.

 

오사카(1025)와 고베(1026), 오카야마(1027)와 구레(1029)와 히로시마(1030)에서 공연한 최승희는 잠시 숨을 고른 후, 교토(118)와 다카라즈카(119)에서 무용공연을 가졌습니다.

 

 

1935년이면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이 창립(1913)된 지 20년이 넘었고, 소녀가극단 열풍이 일본 전역에 퍼졌을 때입니다. 전국 각지에 유사 소녀가극단이 만들어졌는데, 히로시마의 하네다소녀가극단(1918), 오사카의 비와소녀가극단(1919)과 나니와소녀가극단(1921), 도쿄의 쇼치쿠소녀악극부(1922)가 그것이었습니다. 1932년에는 쇼치쿠소녀악극부가 이름을 쇼치쿠소녀가극부로 개칭했고, 이때부터 다카라즈카와 쇼치쿠의 소녀가극단은 라이벌을 이루면서 춤과 노래를 아우르는 레뷰공연단의 선두주자 자리를 이어갔습니다.

 

특히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이 1932년 도쿄에 진출하고, 아사쿠사 쇼치쿠좌 극장에 근거를 두었던 쇼치쿠소녀가극부가 1933년 신주쿠 제일극장으로 본거지를 옮긴 후에는, 두 가극단이 전국적인 순회공연을 단행하기 시작하면서 소녀가극단 전성시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도처에 다카라즈카라는 이름을 가진 극장이 설립되었습니다. 1932년 도쿄다카라즈카극장이 개관한 이래, 1935년에는 요코하마와 나고야, 교토에 다카라즈카극장이 문을 열었습니다. 조선에서도 경성의 을지로에 있던 황금연예관(1913)이 경성보총극장(1925, 1940))으로 개칭됐고, 대구의 대구키네마구락부(1938)도 대구보총극장(1940)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의 인기가 영화계에도 번져서 다카라즈카극장의 성업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소녀가극단 열풍으로 일본 전통무용과 근대무용 등 예술무용이 크게 위축됐으나, 최승희의 조선무용만은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최승희의 조선무용은 선정성을 강조하지 않은 예술무용이었지만 최승희 자신의 미모와 작품의 이국성이 관객들에게 호소력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와함께 최승희의 공연을 관람으로 뒷받침해 준 조선인 동포들의 성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최승희의 공연은 주로 조선 동포들이 많이 거주했던 지역에서 열리곤 했으니까요.

 

다카라즈카 대극장은 소녀가극단의 공연 이외에 다른 예술가/연예인에게 대관하지 않기로 유명했던 극장입니다. 그러나 1935119일의 최승희 공연은 그곳에서 열렸습니다. 최승희 선생에게 예외를 제공한 것이지요.

 

그런 특혜 덕분에 다카라즈카의 어두운 그늘 속에 살던 조선인들은, 화려한 대극장 무대에서 조선의상을 입고 조선음악을 반주로 펼쳐지는 최승희의 조선무용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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宝塚朝鮮人追悼碑宝塚市切畑てられました宝塚市立公園である入口けられた親水広場片隅位置しています

 

ここはかつて舊福知山線鉄道っていたところですが路線わってから線路撤去しただけで枕木がほとんどそのままっていますそしてその線路沿って景色きやすい遊歩道造成されたため週末ごとに登山客わう場所でもあります

 

 

ところで、「宝塚朝鮮人追悼碑がなぜ玉瀬参拝墓ではなく切畑親水広場てられたのでしょうかそれは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近藤富男調査チームの研究過程のためです1985から研究チームはこの地域われていた水道工事鉄道工事調査めましたその土木工事朝鮮人労働者大挙参加したという心証ったためです

 

宝塚鉄道工事水道工事1880年代まり1910-1920年代までわれたのでこの工事参加した朝鮮人強制動員労働者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日本帝国朝鮮人強制動員1930年代まりましたからねらは朝鮮での窮乏した生活打開するために日本きかけた々でした用語では労働移民者だったのです

 

しかし各種土木工事結果報告書には朝鮮人参加したという記録はほとんどありませんでした国策工事受注した土木工事および人材管理会社朝鮮人雇用記録していません

 

 

それにもかかわらず鄭鴻永-近藤富男研究チームはこの工事朝鮮人労働者大規模参加したという事実をよくっていましたなぜなら1980年代にもこの地域には朝鮮人多数居住していてらのほとんどは先代家族がその土木工事参加するために宝塚工事わったもそのまま定着することになった家族史っていたからです

 

そこで鄭鴻永-近藤富男研究チームは宝塚全域りながら高齢在日朝鮮人たちにインタビューしました198535にインタビューした徐巳用·サヨン85から1996721にインタビューした禹南喜·ナムヒ79るまで15のインタビュー記録鄭鴻永先生著書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1997)』2収録されています

 

 

鄭鴻永-近藤富男研究チームは文献記録調査並行しましたが1985年春宝塚市史編纂室若林泰氏から3埋葬認許證入手しましたこれは西谷村役場発行した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南益三(ナム·イクサム)張長守(チャン·ジャンス)埋葬認許證でしたこれをまえ研究チームは朝鮮人合宿所川辺郡西谷村玉瀬イズリハ1-45番地にあったことをめましたが3朝鮮人埋葬墓参拝墓つけ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

 

一方1993325研究チームは兵庫朝鮮関係研究会むくげの会員である堀内稔先生から1929の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朝鮮人2死亡3重傷ったとじた新聞記事のコピーを入手しました翌日鄭鴻永-近藤富男調査チームは武田尾から切畑事故現場踏査事故発生地域長尾山麓6トンネルの入口から50メートル前方左側さなであることを確認しました

 

 

8年間調査期間中鄭鴻永-近藤富男研究チームは5朝鮮人犠牲者文献確認しましたが事故場所埋葬地確認されたのは切畑だけでしたそれで鄭鴻永先生死去後近藤富男先生追悼碑てたのが切畑新水広場だったのです

 

ところが近藤富男先生真心感動したのか追悼碑建立2月前玉瀬滿福寺住職3朝鮮人無縁故三界万霊供養祭祀ってきた事実らせてきましたこのはすでに切畑親水広場追悼碑設立場所選定されすべての準備った状態だったため追悼碑玉瀬犠牲者3名前追加することにまとめられました

 

これが玉瀬3人犠牲者切畑2人分犠牲者追悼碑切畑てられることになったお便り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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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다카라즈카 시의 기리히타에 세워졌습니다. 다카라즈카 시립공원인 벚꽃동산()의 입구에 마련된 신스이광장(親水広場)> 한편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곳은 과거 후쿠치야마선 철도가 지나가던 곳인데 노선이 바뀐 이후 선로만 철거했을 뿐 침목들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옛 철로를 따라서 경치 좋고 걷기 좋은 산책길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주말마다 등산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왜 타마세의 참배묘가 아니라 기리하타의 신스이광장에 세워졌을까요? 그것은 정홍영-콘도 도미오 조사팀의 연구과정 때문입니다. 1985년부터 연구팀은 이 지역에서 진행되었던 수도공사와 철도공사를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토목공사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심증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다카라즈카의 철도공사와 수도공사는 1880년대에 시작되어 1910-1920년대까지 이뤄졌기 때문에 이 공사에 참여한 조선인들은 강제 동원 노동자들은 아니었습니다. 일제의 조선인 강제동원은 1930년대에 시작되었으니까요. 이들은 조선에서의 궁핍한 생활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으로 일자리를 찾아온 분들이었습니다. 지금 용어로 노동이민자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각종 국책 토목공사의 결과 보고서에는 조선인들이 참여했다는 기록이 거의 없었습니다. 국책공사를 수주한 토목공사 및 인력관리 회사들도 조선인 고용기록을 남기지 않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홍영-콘도 도미오 연구팀은 이 공사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참가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1980년대에도 이 지역에는 조선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고, 그들은 대부분 선대 가족이 그 토목공사에 참가하기 위해 다카라즈카에 왔다가, 공사가 끝난 후에도 그대로 정착하게 되었던 가족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홍영-콘도도미오 연구팀은 다카라즈카 전 지역을 다니면서 고령의 재일 조선인들을 인터뷰했습니다. 198535일 인터뷰한 서사용씨(徐巳用, , 85)로부터 1996721일 인터뷰한 우남희씨(禹南喜, , 79)에 이르기까지 15명의 인터뷰 기록이 정홍영 선생의 저서 <가극의 거리의 또 다른 역사-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의 제2부에 수록되었습니다.

 

정홍영-콘도도미오 연구팀은 문헌기록 조사도 병행했는데, 1985년 봄, 다카라즈카 시사(市史) 편찬실의 와카바야시 야스시(若林泰)씨로부터 3장의 매장인허증을 입수했습니다. 이는 니시타니(西谷) 촌사무소가 발행한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매장허가서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연구팀은 조선인 합숙소가 카와베군 니시타니촌 타마세마을 이즈리하 1-45번지에 있었음을 알아냈지만, 세 조선인의 매장묘와 참배묘를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한편 1993325일 연구팀은 <효고조선관계연구회><무쿠게회>의 회원인 호리우치 미노루(堀内稔)선생으로부터 1929년의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조선인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보도한 신문기사 사본을 입수했습니다. 이튿날 정홍영-곤도 도미오 조사팀은 타케다오(武田尾)에서 기리하타에 이르는 사고 현장을 답사했고, 사고 발생지역이 나가오산 자락의 신6호 터널의 입구에서 약 50미터 전방 왼쪽에 작은 공터임을 확인했습니다.

 

8년의 조사기간 동안 정홍영-콘도 도미오 연구팀은 5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을 문헌으로 확인했지만 사고 장소나 매장지가 확인된 것은 기리하타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정홍영 선생의 타계 이후 콘도 도미오 선생이 추도비를 세운 곳이 기리하타의 신스이광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콘도 도미오 선생의 정성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추도비 건립 2달 전에 타마세 만푸쿠지의 주지스님께서 세 조선인의 무연고 만계삼령공양 제사를 해 온 사실을 알려오셨습니다. 이때는 이미 기리하타의 신스이 광장이 추도비 설립 장소로 선정되어 모든 준비가 갖춰진 상태였기 때문에, 추도비에 타마세의 희생자 세 분의 이름을 추가하는 것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이것이 타마세의 3분 희생자와 기리하타의 2분 희생자의 추도비가 기리하타에 세워지게 된 사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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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リ學校舞踊靴>訪問団宝塚訪問することにしたのは意味深いことですそれは宝塚日本国民休養地歌劇都市漫画アニメの誕生地だからではなく20世紀初頭から朝鮮人痕跡っている都市だからです

 

その在日朝鮮人郷土史学者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先生のタイトルによくれています1997出版されたこののタイトルは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副題宝塚朝鮮人です。 「歌劇とは少女歌劇団舞台である宝塚しますがこの地域にはこれまであまりられていなかったもうつの歴史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それは20世紀初この地域きた々な土木工事参加した朝鮮人苦難歴史します

 

 

宝塚中央図書館<宝塚市史>各種郷土歴史書写真集調査しましたが19世紀末明治時代からまったこの地域近代化過程朝鮮人労働者大挙参加した事実記録されていませんでした鄭鴻永先生ったもうひとつの歴史完全排除されているのですね

 

鄭鴻永先生1983から相棒調査研究パートナーである日本語教師出身社会活動家近藤富男(1950-2022)先生とともに宝塚朝鮮人痕跡々まで調査記録しましたその結果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宝塚朝鮮人1997)』です

 

この調査研究主導した鄭鴻永先生名前出版されましたがこのるまで文献調査踏査原稿執筆校正のすべての段階近藤富男先生助力絶対的だったことがかりました10近藤富男先生自宅訪問したさんと息子さんが近藤富男先生生前めて作業した資料せてくれました

 

 

引越きな2つにぎっしりまった資料には<歌劇都市のもうひとつの歴史>校正原稿もありその執筆するのに必要だった資料がすべてまれていましたそれに近藤富男先生使っていたパソコンにはまだ数千ものファイルがっているとおっしゃいました

 

近藤富男先生家族にその資料とファイルを調その結果近藤富男先生名前のために出版してもいとしてくれました前回訪問にはその仕事着手する準備ができていませんでしたが今回<ウリ學校舞踊靴>訪問期間にその資料をもう一度調べて整理調査する計画てることができることをっています

 

<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表紙のすぐには地図一枚描かれています地図のタイトルはたからづか朝鮮人のあしあとまつぷですそこには宝塚駅中心四方朝鮮人参加した各種工事現場居住していた住居地域そして朝鮮人犠牲になった各種事件事故にぎっしりとかれていますけられた番号ると全部35する内容がこの地図1縮約されています

 

 

宝塚朝鮮人関連事件事故玉瀬朝鮮人犠牲者まれています番号5けられた朝鮮人埋葬地がまさにそこです今回<ウリ學校舞踊靴>訪問団はここを訪問して犠牲になった朝鮮人たちを追悼らのために100年以上祭祀ってきた玉瀬婦女会員たちとさな音楽会くことになります

 

たちがれるもうつは<たからづか朝鮮人のあしあとまつぷ>10ダイナマイト事故朝鮮人2即死した場所83トンネル9水道保線工事参加した朝鮮人飯場地域です

 

ここでダイナマイト事故即死した朝鮮人2とは1929舊福知山線鉄道工事くなった尹吉文(ユン·ギルムン)吳伊根(·イグン)さんですこの2玉瀬犠牲者3一緒える宝塚朝鮮人追悼碑もこの地域てられています<ウリ學校舞踊靴>訪問団はこちらも訪問する予定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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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 무용신> 방문단이 다카라즈카를 방문하기로 한 것은 뜻 깊은 일입니다. 그것은 다카라즈카가 일본의 국민 휴양지, 가극의 도시, 만화-애니메이션의 탄생지이기 때문이 아니라, 20세기 초부터 조선인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는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은 재일조선인 향토사학자 정홍영(鄭鴻永, 1929-2000) 선생의 책 제목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997년에 출판된 이 책의 제목은 <가극의 거리의 또 다른 역사>이고 부제는 <다카라즈카와 조선인>입니다. ‘가극의 거리란 소녀가극단의 무대인 다카라즈카를 가리키지만 이 지역에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20세기 초반 이 지역에서 벌어졌던 갖가지 토목공사에 참여했던 조선인의 고난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제가 다카라즈카 중앙도서관을 방문해 <다카라즈카 시사>와 각종 향토역사서와 화보사진집을 조사했지만, 19세기말 메이지 시대부터 시작된 이 지역의 근대화 과정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했던 사실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정홍영 선생이 말한 또 다른 역사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것이지요.

 

정홍영 선생은 1983년부터 단짝 조사연구 파트너인 교사 출신의 사회활동가 콘도 도미오(近藤富男, 1950-2022) 선생과 함께 다카라즈카의 조선인의 흔적을 샅샅이 조사해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 결과가 <가극의 거리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입니다.

 

이 책은 조사연구를 주도한 정홍영 선생의 이름으로 출판되었지만, 이 책이 나오기까지 문헌조사와 답사, 원고 집필과 교정의 모든 단계에서 콘도 도미오 선생의 조력이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난 10월 콘도 도미오 선생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 사모님과 아드님께서 콘도 도미오 선생이 생전에 모으시고 작업하셨던 자료들을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삿짐용 큰 상자 2개에 가득 담긴 자료 중에는 <가극의 도시의 또 다른 역사>의 교정 원고도 있었고, 그 책을 집필하는 데에 필요했던 자료들이 모두 담겨있었습니다. 게다가 콘도 도미오 선생께서 사용하셨던 컴퓨터에는 아직도 수천 개의 파일들이 남아 있다고 하셨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가족들은 제게 그 자료와 파일들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이름을 위해 출판해도 좋다고 허락해 주셨습니다. 지난 방문 때에는 그 일에 착수할 준비를 갖추지 못했었지만, 이번 <우리학교무용신> 방문 기간에 그 자료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정리하고 조사할 계획을 세울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가극의 거리의 또 다른 역사>의 앞표지 바로 안쪽에는 지도가 한 장 그려져 있습니다. 지도의 제목은 다카라즈카의 조선인 흔적 지도입니다. 거기에는 다카라즈카 역을 중심으로 사방에 조선인들이 참여했던 각종 공사 현장과 거주했던 주거지역, 그리고 조선인들이 희생당했던 각종 사건과 사고들이 그림과 함께 빼곡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붙여진 번호를 보면 모두 35건에 달하는 내용이 이 지도 한 장에 축약되어 있습니다.

 

 

다카라즈카의 조선인 관련 사건과 사고 중에 타마세의 조선인 희생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번호가 5번으로 매겨진 조선인매장지가 바로 그곳입니다. 금번 <우리학교무용신> 방문단은 이곳을 방문해서 희생된 조선인들을 추도하고, 이들을 위해 1백년 이상 제사를 지내오신 타마세 부녀회원들과 함께 작은 음악회를 열게 됩니다.

 

우리가 찾아갈 또 한 곳은 <다카라즈카의 조선인 흔적 지도>10다이너마이트 사고로 조선인 2명이 즉사한 장소83호터널9번의 수도 보선공사에 참여한 조선인 함바지역입니다.

 

이 곳에서 다이너마이트 사고로 즉사한 조선인 2이란, 1929년에 후쿠치야마선 철도 공사에서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입니다. 이 두 사람과 타마세의 희생자 세 사람을 함께 기리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도 바로 이 지역에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학교무용신> 방문단은 이곳도 방문할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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宝塚市中部山間部位置する玉瀬宝塚中心部観光娯楽りの雰囲気とはうところです山奥がる盆地かに位置する農村だからですここで栽培されるお日本でも品質一番良いことで有名なブランドです

 

玉瀬仏教寺院滿福寺くには宝塚市からがりくねってれる武庫川沿いの武田尾駅からバスにって6停留所だけですこの1914-15神戸水道工事中にトンネル岩壁崩壊事故死亡した朝鮮人労働者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南益三(ナム·イクサム)張長守(チャン·ジャンス)位牌られた寺院です

 

三名様参拝墓滿福寺こうけられています10鄭世和先生滿福寺住職足立智教先生案内参拝墓ねましたが日当たりのけられたこぢんまりとした場所でした3実際埋葬墓玉瀬村共同墓地なのですがにあるうえ途絶れ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

 

 

3朝鮮人がここに埋葬された理由武庫川沿いの神戸水道第1次拡張工事1911~1921この地域われた工事現場でトンネル岩壁落盤事故死亡したからです金炳順さんは1914314南益三さんは1915121張長守さんは1915324くなりましたが玉瀬婦女会1914から毎年824滿福寺住職3朝鮮人のための祭祀めたそうです

 

3朝鮮人死亡事実1985在日朝鮮人郷土史学者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1929-2000先生宝塚市立中学校日本語教師近藤富男1950-2022先生文献調査現地踏査確認されましたが当時3遺骨玉瀬共同墓地埋葬されていた事実位牌滿福寺られていたことまで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

 

20001鄭鴻永先生他界した近藤富男先生20年間努力この地域くの活動家在日朝鮮人けをりて2020326朝鮮人犠牲者のための追悼碑てました追悼碑てられるという西谷玉瀬村にもがりこれに滿福寺住職自分たちが三人祭祀ってきたことをえてきました近藤富男先生1929福知山線鉄道改修工事くなった尹吉文(ユン·ギルムン)吳伊根(·イグン)さんとともに神戸水道改修工事くなった3追悼する追悼碑てることができました

 

 

玉瀬婦女会滿福寺住職100年以上3朝鮮人のために祭祀ってきたことは1914から2020まで住民いてはりませんでした善行右手のすることを左手らないようにしろ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がそんなことを108年間続けてこられた々がいらっしゃったのです

 

3朝鮮人犠牲者のための三界万霊供養墓参拝した研究者好奇心えることができず住職僧侶いてみました。 「このたちが玉瀬共同墓地られた記録はありますか?」滿福寺った住職埋葬記録せてくださりそこにはかに3名前埋葬日とともにはっきりとされていました

 

 

はまたねました。 「玉瀬住民たちが縁故もない々をこのように丁寧祭祀してこられた理由ですか?」3朝鮮人祭祀めてった住職以来3ぎた住職就任された足立智教先生えはこうでした

 

ここはつためにられたもいます武庫川上流からりた々がされてたちの発見された々もいますどんな理由であれたちのってきた々をたちはくして埋葬しますしかし恒例祭祀までってきたのは異例のことですおそらくこの々が故郷異域しいをされたからだといますその残念った住民たちが毎年祭祀ってきたよう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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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시의 중부 산간지역에 위치한 타마세는 다카라즈카 중심부의 관광, 오락, 축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곳입니다. 깊은 산중에 펼쳐진 분지에 호젓하게 자리 잡은 농촌마을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경작되는 쌀은 일본에서도 품질이 가장 좋기로 이름이 난 명품입니다.

 

타마세의 불교사찰 만푸쿠지에 가려면, 다카라즈카시를 북에서 남으로 꾸불꾸불 누비며 흐르는 무코강변의 기차역 다케다오에서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6정류장만 가면 됩니다. 이 절이 1914-15년 고베수도공사 중에 터널 암벽붕괴 사고로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위패가 모셔진 사찰입니다.

 

세 분의 참배묘는 만푸쿠지의 길 건너편 산기슭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저는 지난 10월 정세화 선생님과 만푸쿠지의 주지스님 아다치 치쿄 선생님의 안내로 참배묘를 찾았는데, 양지바른 비탈에 마련된 아담한 처소였습니다. 세 분의 실제 매장묘는 타마세 마을의 공동묘지인데, 깊은 산 속인데다가 지금은 길도 끊어져서 찾아가 볼 수 없었습니다.

 

 

세 조선인이 이 곳에 묻힌 까닭은, 무코강을 따라 진행되었던 고베수도 제1차 확장공사(1911-1921) , 이 지역에서 진행되었던 공사 현장에서 터널암벽의 낙반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병순씨는 1914314, 남익삼씨는 1915121, 장장수씨는 1915324일에 사망했는데, 타마세의 부녀회는 1914년부터 매년 824일 만푸쿠지 주지스님의 집전으로 세 조선인을 위한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세 조선인의 사망 사실은 1985년 재일조선인 향토사학자 정홍영(鄭鴻永, 1929-2000) 선생과 다카라즈카 시립중학교의 일본어 교사 콘도 도미오(近藤富男, 1950-2022) 선생의 문헌조사와 현지답사로 확인되었으나, 당시에는 세 분의 유해가 타마세 공동묘지에 묻힌 사실과 위패가 만푸쿠지에 모셔진 사실까지 알아내지는 못했습니다.

 

20001월 정홍영 선생이 타계하신 후 콘도 도미오 선생은 20년의 노력 끝에 이 지역의 많은 활동가와 재일조선인들의 도움을 얻어 2020326일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한 추도비를 세우셨습니다. 추도비가 세워진다는 소문은 니시타니의 타마세 마을에도 퍼졌고, 이에 만푸쿠지의 주지스님은 자신들이 세 분의 제사를 지내왔다는 사실을 전해왔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은 1929년 후쿠치야마선 철도개수공사에서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와 함께 고베수도 개수공사에서 사망한 세 분을 함께 기리는 추도비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타마세 부녀회가 만푸쿠지 주지스님의 집전으로 1백년이 넘도록 세 조선인을 위해 제사를 지내왔던 사실은 1914년부터 2020년까지 마을 주민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선행을 베풀 때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지만, 그런 일을 108년 동안 계속해 오신 분들이 계셨던 것입니다.

 

제가 세 조선인 희생자를 위한 삼계만령공양묘를 참배한 후에 연구자의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주지 스님께 여쭤봤습니다. “이분들이 타마세 공동묘지에 묻히신 기록이 있습니까?” 만푸쿠지로 돌아왔을 때 주지스님은 매장기록을 보여주셨고, 거기에는 분명히 세 사람의 이름이 매장 일자와 함께 또렷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또 물었습니다. “타마세의 주민들께서 아무 연고 없는 분들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제사해 오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세 조선인의 제사를 처음 집전하신 주지스님 이후로 3대가 지난 뒤에 주지에 취임하신 아다치 스님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이곳은 산이 깊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러 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무코강 상류에서 투신하신 분들이 떠 내려와 우리 마을에서 발견된 분들도 있고요. 어떤 이유로든 우리 마을에 들어오신 분들을 우리는 예를 갖춰 매장합니다. 그러나 연례 제사까지 지내온 것은 이례적입니다. 아마도 이분들이 고향을 떠나 이역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점을 특별히 애석하게 여기신 마을 주민들이 매년 제사를 드려온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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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喜研究舞踊靴キャンペーンのきっかけになったとすれば玉瀬婦女会滿福寺無縁故祭祀宝塚朝鮮人追悼碑調査するきっかけになりました1914-15神戸水道工事中事故死亡した3朝鮮人労働者位牌玉瀬仏教寺院万福寺られ玉瀬婦女会らを100年以上祭祀してきたことがかったからです

 

宝塚日本中西部つまり関西位置する特例市です関西関東首都圏いで日本第2人口産業密集地域ですが大阪京都神戸などの大都市がこれにしますこの地域3都市名前1文字ずつとって京阪神ばれることもあります

 

 

大阪難波宮4世紀以降奈良遷都710まで日本首都人口280東京23925日本第2大都市京都人口140万人奈良時代から明治維新まで1000年以上日本首都794~1869でした

 

中国遣唐使派遣港であり1868開港日本五大貿易港長崎神戸横浜新潟函館つに指定され外来文物流入通路となった神戸人口15011805月間日本首都役割たしたことがありますこのため関西または京阪神地域近畿地域ぶこともあります

 

 

大阪神戸自然地形では境界区分しいほど対立しているためこの地域をまとめて阪神地域びます神戸市大阪市には南海岸地域西宮市尼崎市北山間地域豊中市宝塚市があります西宮北宝塚神戸大阪とともに正三角形をしています日本では人口20万人以上であれば特例市申請可能ですが宝塚市人口22万人2003特例市指定されました

 

一般的宝塚といえば宝塚駅くをすのが普通ですが宝塚市はそれよりずっといです南北20キロほど分布した地域南部都心部中部北部山間部区分されます全体面積102平方キロメートルで韓国江原道束草市カンウォンド·ソクチョシきさがています

 

 

宝塚3つの名物のおかげで有名場所です温泉歌劇団そして手塚治虫です宝塚温泉はかつて1223小林という名前られ1887商業温泉開業して観光客殺到めました温泉宝塚開発基礎となりました温泉観光客交通利便性提供しようと1910阪急電鉄架設され観光客餘興提供するため1914にガールズグループショービジネスがまりました

 

19137阪急電鉄社長小林一三1873-1957宝塚少女歌劇団創立翌年41初公演いました今日のガールズグループの原型パリムーランルージュのカンカン歌舞団とアメリカのブロードウェイミュージカルを模倣した歌劇団です初公演出演者16でしたが6演技者だけで400人余プロデューサーと脚本演出音楽衣装舞台美術とオーケストラギターのステップまでめると規模900人余りにのぼります

 

 

手塚治虫1928-1989日本敗戦とともにった日本漫画界らせたです大阪府豊中市生まれの手塚治虫51933宝塚1951東京移住するまでそこに大阪大学医師授業けている漫画家としてのキャリアをスタートさせました1940-50年代漫画60年代のアニメで日本熱狂させた人物<鉄腕アトム(1963)><ジャングル大帝レオ(1965)><リボンの騎士: サファイア王子(1967)>などの漫画映画韓国でもきな人気めました1994宝塚手塚治虫える漫画博物館てられました

 

温泉やガールズグループ歌劇団そして漫画映画誕生地である宝塚日本のディズニーランドとばれかつて国民休養地として定着していたところ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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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연구가 무용신 캠페인의 계기가 되었다면, 타마세 부녀회와 만푸쿠지의 무연고 제사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조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14-15년 고베수도공사 중에 사고로 사망한 3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위패가 타마세의 불교사찰 만푸쿠지에 모셔졌고 타마세 부녀회가 이들을 1백년 넘게 제사해 오셨던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다카라즈카는 일본의 중서부, 즉 간사이에 위치한 특례시입니다. 간사이는 간토 수도권에 이어 일본 제2의 인구와 산업의 밀집지역인데, 오사카와 교토, 고베 등의 대도시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 지역은 세 도시 이름의 한 글자씩 따서 케이한신(京阪神)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사카는 나니와(4세기)궁 이후 나라 천도(710)까지 일본의 수도였고 지금은 인구 280만으로 도쿄(23구의 925)에 이은 일본 제2의 대도시이고, 교토(인구 140만명)는 나라시대 이후 메이지유신 전까지 1천년 넘게 일본의 수도(794-1869)였습니다.

 

중국 견당사 파견 항구이자 1868년 개항 때에 일본의 5대 무역항(나가사키, 고베, 요코하마, 니키타, 하코다테)의 하나로 지정되어 외래문물 유입의 통로가 되었던 고베(인구 150)1180년 약 5개월동안 일본의 수도역할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간사이 혹은 케이한신 지역을 깅키(近畿)지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사카와 고베는 자연 지형으로는 경계 구분이 어려울 만큼 맞붙어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을 묶어서 한신(阪神)지역이라고 부릅니다. 고베시와 오사카시 사이에는 남쪽 해안지역에 니시노미아시와 아마가사키시, 북쪽 산간지역에 토요나카시와 다카라즈카시가 있습니다. 니시노미야 북쪽의 다카라즈카는 고베와 오사카와 더불어 정삼각형을 이룹니다. 일본에서는 인구가 20만명 이상이면 특례시 신청이 가능한데, 다카라즈카시는 인구 22만명으로 2003년에 특례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다카라즈카라고 하면 다카라즈카역 근처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지만 다카라즈카시는 그보다 훨씬 넓습니다. 남북으로 약 20킬로미터쯤 길게 분포한 지역으로, 남부의 도심지역과 중부와 북부의 산간지역으로 구분됩니다. 전체 면적이 102제곱킬로미터로 한국의 강원도 속초시(106제곱킬로미터)와 크기가 비슷합니다.

 

 

다카라즈카는 세 가지 명물 덕분에 유명한 곳입니다. 온천과 가극단, 그리고 데즈카 오사무입니다. 다카라즈카 온천은 일찍이 1223년에 <고바야시노유(小林)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1887년 상업 온천이 개업해 관광객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온천은 다카라즈카 개발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온천 관광객에게 교통편의를 제공하려고 1910년 한큐전철이 가설됐고, 관광객들에게 여흥을 제공하기 위해 1914년 걸그룹 쇼비지니스가 시작됐습니다.

 

19137월 한큐 전철의 사장 코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 1873-1957)가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을 창립, 이듬해 41일 첫 공연을 열었습니다. 오늘날의 걸그룹의 원형으로 파리 물랭루즈의 캉캉 가무단과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모방한 가극단입니다. 첫 공연 출연자는 16명이었지만, 지금은 6개 조의 연기자만 4백여명, 프로듀서와 각본, 연출, 음악과 의상, 무대미술과 오케스트라, 기타 스텝까지 포함하면 규모가 9백여명에 이릅니다.

 

 

데즈카 오사무(手塚 治虫, 1928-1989)는 일본의 패전과 함께 맥이 끊긴 일본 만화계를 되살린 사람입니다. 오사카부 토요나카시에서 출생한 데즈카 오사무는 5(1933)에 다카라즈카로 이사, 1951년 도쿄로 이주할 때까지 그곳에 살면서 오사카대학에서 의사 수업을 받는 동안 만화가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4-50년대의 만화, 60년대의 애니메이션으로 일본을 열광시킨 인물로, <우주소년 아톰><흰 사자 레오>, <사파이어 왕자> 등은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1994년 다카라즈카에 데즈카 오사무를 기리는 만화 박물관이 세워졌습니다.

 

온천과 걸그룹 가극단, 그리고 만화영화의 탄생지인 다카라즈카는 일본의 디즈니랜드로 불리면서 일찍이 국민 휴양지로 자리 잡았던 곳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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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リ學校舞踊神>訪問団構成することは順調んでいます航空券購入され宿泊施設予約されたので必須準備いました1221日現在参加人数23さらにえています目標30ですが達成される可能性いです課題訪問日程具体化することですがそのために日本<チームアイ>会員たちがしくいています

 

<ウリ學校舞踊靴>訪問団準備がよくうには<希望来日><大陸学校>協力きな役割たしています<大陸学校>卒業生たちが訪問団参加準備委員会会計業務担当される<希望来日>常任理事ファン·グァンソク(황광석)先生のリーダーシップも際立っています

 

 

2010128創立された<希望来日>目的すでにそのによくれています。 "鉄道と共に希望に満ちた明日(hopeful tomorrow with railways)"という意味ですから。 釜山木浦から出発する列車がソウルと平壌あるいは江陵元山中央アジアとシベリアを横切ってモスクワとベルリンとパリとロンドンまでける鉄道開通するよう努力する団体です

 

<希望来日>活動家名刺前面にはソウルからヨーロッパの都市かう汽車切符印刷されていますがもらったファン·グァンソク先生名刺<ソウル-パリ>汽車チケットです^^ <ソウル-ベルリン><釜山-ロンドン>汽車票印刷されているはずです

 

<希望来日>理事長李哲(·チョル)先生国会議員韓国鉄道公社社長歴任されたです国際鉄道連盟のアジア地域議長めました<民族助運動>代表である李一榮(·イルヨン)先生先生<希望来日>共同代表めています理事長共同代表前歷だけをても<希望来日>究極的目的分断克服であることがかります

 

 

実際ユーラシア横断鉄道はすでにほぼいています<希望来日>目的達成されるには都羅山駅から開城駅そして猪津駅から鑑湖駅かう鉄道くだけですそこで<希望来日>活動はまもなく南北鉄道連結められます

 

南北鉄道をつなぐには難関いです200020072018南北首脳会談南北鉄道をつなぐ努力きましたしかし韓国保守政府発足すればすべての努力失敗わることもありますこのような難関克服するには民主政府必要専門的識見った必要ですそれで<希望来日>自主教育プログラムで<大陸学校>きました

 

20221212期卒業生輩出した<大陸学校>毎年30大陸リーダーを養成しています<希望来日>南北鉄道ぶための団体だとすれば<大陸学校>はなぜそうすべきかを説明実践するプログラムです。 「たちの歴史蓄積されてきた大陸的価値再発見専門的素養えた大陸リーダーを養成しようということですそのために<大陸学校>校長である元統一部長官丁世鉉(チョン·セヒョン)先生教頭である黃光石(ファン·グァンソク)常任理事奔走しています

 

 

「希望来日」の掛け声はもともと「南北を結び、大陸を抱く!」です。 ところで1123<希望来日>創立12周年後援参加してみたらしいスローガンが登場しましたね。 「海洋いて大陸がそれです保守政権との戦争<希望来日-大陸学校>通常活動がかなり制限されていましたので当分海外同胞統一力量めることにめることにしたのです

 

<希望来日><大陸学校>海洋とは米州日本居住する在外同胞々をします国内政治葛藤国際紛争によってこされた難関打開するためには中国とロシアの同胞々だけでなく米州同胞在日同胞力量つにめる必要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

 

それは<舞踊靴>目的ともじです在日朝鮮学校舞踊靴沿海州舞踊衣装海洋いて大陸こうとするたちの努力もすでにまっています

 

その共同目的達成するためなら<舞踊靴><希望来日-大陸学校>くことに躊躇はないで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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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 무용신> 방문단을 꾸리는 일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항공권이 구매되고 숙소가 예약되었으니 필수 준비는 갖춰진 셈입니다. 1221일 현재 참가인원이 23명에 이르렀고,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목표는 30명인데 달성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제 다음 과제는 방문 일정을 구체화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일본의 <팀아이> 회원들께서 바삐 움직이고 계십니다.

 

<우리학교 무용신> 방문단의 준비가 잘 갖춰지는 데에는 <희망래일><대륙학교>의 협력이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대륙학교> 졸업생들이 다수 방문단에 참여하셨고, 준비위원회에 회계업무를 담당해 주시는 <희망래일>의 상임이사 황광석 선생님의 리더십도 두드러집니다.

 

 

2010128일 창립된 <희망래일>의 목적은 이미 그 이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철도와 함께 희망찬 내일(hopeful tomorrow with railways)"라는 뜻이니까요. 부산과 목포에서 출발하는 열차가 서울과 평양, 혹은 강릉과 원산을 거쳐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모스크바와 베를린과 파리와 런던까지 갈 수 있는 철도가 개통되도록 노력하는 단체입니다.

 

<희망래일> 일꾼들의 명함 앞면에는 서울에서 유럽 주요도시로 가는 기차표가 인쇄되어 있습니다. 제가 받은 황광석 선생님의 명함은 <서울-파리> 기차표입니다.^^ 다른 분들은 <서울-베를린>, 혹은 <부산-런던>의 기차표가 인쇄되어 있을 것입니다.

 

<희망래일>의 이사장 이철 선생님은 국회의원과 한국철도공사 사장을 역임하신 분입니다. 국제철도연맹의 아시아지역 의장을 담당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대표이신 이일영 선생님도 <희망래일>의 공동대표를 맡고 계십니다. 이사장과 공동대표의 전력만 보더라도 <희망래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분단의 극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유라시아횡단철도는 이미 거의 이어져 있습니다. <희망래일>의 목적이 달성되려면 남쪽의 도라산역에서 북쪽의 개성역, 그리고 남쪽의 제진역에서 북쪽의 감호역으로 가는 철도가 이어지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희망래일>의 활동은 곧 남북철도 잇기로 모아집니다.

 

남북철도 잇기에는 난관이 많습니다. 2000년과 2007, 2018년의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철도를 잇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보수정부가 들어서면 모든 노력이 무산되곤 합니다.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려면 민주정부가 필요하고, 특히 전문적 식견을 가진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희망래일>은 자체 교육프로그램으로 <대륙학교>를 열었습니다.

 

202212월 제12기 졸업생을 배출한 <대륙학교>는 매년 30명의 대륙 리더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희망래일>이 남북철도를 잇기 위한 단체라면 <대륙학교>는 왜 그래야하는지를 설명하고 실천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우리 역사 속에 축적되어온 대륙적 가치를 재발견하고 전문적 소양을 갖춘 대륙리더를 양성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대륙학교>의 교장이신 전통일부장관 정세현 선생님과, 교감이신 황광석 상임이사님이 동분서주하고 계십니다.

 

 

<희망래일>의 구호는 원래 남북을 잇고, 대륙을 품다!”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난 1123<희망래일> 창립 12주년 후원의 밤에 참석해 보니 새로운 구호가 등장했더군요. “해양을 품고, 대륙으로가 그것입니다. 보수정부와 전쟁 때문에 <희망래일-대륙학교>의 통상적 활동이 상당히 제한되었기 때문에, 당분간 해외동포들의 통일 역량을 모으는 데에 힘쓰기로 한 것입니다.

 

<희망래일><대륙학교>가 말하는 해양이란 미주와 일본에 거주하는 재외동포 분들을 가리킵니다. 국내 정치 갈등과 국제 분쟁으로 야기된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러시아의 동포 분들뿐 아니라 미주동포와 재일동포의 역량도 한데 모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무용신>의 목적도 똑같습니다. 재일조선학교에 무용신을 보내고, 연해주에 무용의상을 보내기 시작하면서 해양을 품고 대륙으로 가려는 우리의 노력도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무용신><희망래일-대륙학교>와 함께 일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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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回目舞踊靴キャンペーンがわった202112韓国<チームアイ>今後進路について若干議論こりました日本全土朝鮮学校舞踊部員全員舞踊靴わり目標達成されたので活動中止しようという意見ました

 

また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けてもいつまでも一般募金って後援活動ができないので収益事業めようという意見てきました一方一旦始まった運動なので今後新たに舞踊部員になる小学生たちにも舞踊靴えようという意見ました

 

 

なくない会員<チームアイ>解体提案しましたが当時韓国<チームアイ>会長だった趙誠武(チョ·ソンム)先生反対でした結局韓國<チームアイ>解体されませんでしたがこのような論難のために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継続するための動力顕著低下しました

 

それでしくったまりが<舞踊靴>です<チームアイ>のように少数多数個人団体後援舞踊靴支援するのではなく後援者皆直接参加する一般まりをめたのです

 

2020210<舞踊靴2022>という名前しいグループトークをいたのですが最初はただ2022にも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けるための対話部屋としてまりました韓国<チームアイ>会員<舞踊靴2022>参加したので<チームアイ-舞踊靴>連続性維持されました

 

 

<舞踊靴2022>6回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じて2022しく舞踊部加入した100人余りの小学生たちにも舞踊靴しましたこれで韓国<チームアイ><舞踊靴>388個人後援17団体後援2700ウォンを募金1100人余りのウリ學校舞踊家たちに舞踊靴現在ウリ學校舞踊部員ならば一人かさ韓国<舞踊靴>日本<チームアイ>した舞踊靴ったことになります

 

それと<舞踊靴>沿海州事業めました江陵東海頻繁しながら<沿海州フォーラム>参加したのですがそこの会員々からロシア同胞民族芸術けるのに苦労しているというきましたにウスリスクの<アリラン歌舞団>団長であり<崔在亨(チェ·ジェヒョン)高麗人民族学校>校長であるキム·バレリア先生直接助けを要請してきましたロシア同胞には韓服韓国式舞踊衣装りないことがかりました

 

韓国<舞踊靴>日本<チームアイ>とのいのロシア同胞民族芸術活動支援することにしました韓国同胞在日同胞わせて同胞支援することは意義深かったですまたこのことが起爆剤となりこれまで出会いがくなかった在日同胞同胞交流えることを期待しました

 

 

韓国保守政権発足したことで関係悪化ロシア·ウクライナ戦争物流はもちろん移動不可能になった劣悪状況でしたが韓国<舞踊靴>はおよそ3百万圓義援金日本<チームアイ>20しい舞踊衣装製作40韓服舞踊衣装収集して沿海州ることができました

 

<舞踊靴>のグループトークの会員1100えましたしかし1~6回目舞踊靴キャンペーンに参加した々が388沿海州キャンペーンに参加してくださった々が84だったことをえると<舞踊靴>にまだ招待されていない々が300にもなります最初からグループトークや後援会構成考慮できなかった執行部のミスですしかし間違いはせばいいといます今後後援者々の連絡先一人ずつ<武勇靴>にご招待する計画です

 

今年目標つが100会員その目標達成されたわけですがここで満足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来年(2023)には<武勇靴>会員300えることをっていますしい目標ですそうしてこそ来年舞踊靴キャンペーンと沿海州キャンペーンを無理なくけていけるとじている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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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무용신 캠페인이 끝난 202112월 한국 <팀아이>는 향후 진로에 대해 약간의 논란이 일었습니다. 일본 전역의 조선학교 무용부원들에게 모두 무용신이 전달되었고, 목표가 달성되었으니 활동을 멈추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또 무용신 캠페인을 계속하더라도 언제까지나 일반 모금에 의존해서 후원활동을 할 수 없으니까 무언가 수익사업을 시작하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다른 한편 일단 시작한 운동이니 앞으로 새로 무용부원이 될 초등학생들에게도 계속 무용신을 전달하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적지 않은 회원들이 <팀아이> 해체를 제안했지만, 당시 <팀아이> 회장이었던 조성무 선생은 반대였습니다. 결국 <팀아이>는 해체되지 않았지만 이러한 논란 때문에 무용신 캠페인을 계속하기 위한 동력이 현저히 저하됐습니다.

 

그래서 새로 만든 모임이 <무용신>입니다. <팀아이> 때처럼 소수의 일꾼이 다수 개인과 단체의 후원을 이끌어내어 무용신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후원자들이 모두 직접 참여하는 일반 모임을 시작한 것입니다.

 

2020210<무용신2022>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단톡방을 열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2022년에도 무용신 캠페인을 계속하기 위한 대화의 방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다행히 한국 <팀아이>의 회원들이 모두 <무용신2022>에 참여했으므로 <팀아이-무용신>의 연속성은 유지됐습니다.

 

 

<무용신2022>는 조성무 <팀아이> 회장의 주도로 제6차 무용신 캠페인을 통해 2022년에 새로 무용부에 가입한 1백여명의 초등학생들에게도 무용신을 전달했습니다. 이로써 한국 <팀아이><무용신>388명의 개인 후원과 17개의 단체 후원으로 약 27백만원을 모금해 1,100여명의 우리학교 어린 무용수들에게 무용신을 전달했고, 현재 우리학교의 무용부원이라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한국 <무용신>과 일본 <팀아이>가 전달한 무용신 선물을 받은 셈이 됐습니다.

 

그와 함께 <무용신>은 연해주 사업도 시작했습니다. 제가 강릉과 동해를 자주 왕래하면서 <연해주 포럼>에 참여했는데, 그곳의 회원 분들로부터 재러시아 동포들도 민족예술을 이어가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특히 우수리스크 <아리랑 가무단>의 단장이시자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의 교장이신 김발레리아 선생님은 직접 도움을 요청해 오셨습니다. 러시아 동포들에게는 한복과 한식 무용의상이 모자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국의 <무용신>은 일본의 <팀아이>와 의논 끝에 러시아 동포들의 민족예술 활동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한국 동포와 재일 동포가 힘을 합쳐 재러 동포를 지원하는 일은 아주 뜻 깊어 보였습니다. 또 이 일이 기폭제가 되어 무용신이나 무용의상 지원에 그치지 않고, 그동안 만남이 많지 않았던 재일동포와 재러동포들의 교류도 늘어나기를 기대했습니다.

 

 

한국에 보수정부가 들어서는 바람에 한러 관계가 악화되었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계속되어 물류는 물론 인적 이동도 불가능해진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한국 <무용신>은 약 3백만원의 성금을 모았고, 일본 <팀아이>20벌의 새로운 무용의상을 제작하고 40벌의 한복과 무용의상을 수집해서 연해주에 보낼 수 있었습니다.

 

<무용신>의 단톡방 회원은 1년 만에 1백명이 넘어섰습니다. 그러나 1-6차 무용신 캠페인에 참여하신 분들이 388,, 연해주 캠페인에 참여해 주신 분들이 84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무용신>에 아직 초대되지 못한 분들이 3백분이나 됩니다. 처음부터 단톡방이나 후원회 구성을 고려하지 못했던 집행부의 실수입니다. 그러나 실수는 바로 잡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후원자분들의 연락처를 알아내어 한 분 또 한 분씩 <무용신>에 초대드릴 계획입니다.

 

올해 목표 중의 하나가 1백명 회원이었고, 그 목표는 달성된 셈이지만, 여기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내년(2023)에는 <무용신> 회원이 3백명이 넘어서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새로운 목표입니다. 그래야 내년에도 무용신 캠페인과 연해주 캠페인을 무리없이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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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チームアイ>けがなかったら韓国<チームアイ><舞踊靴>もできなかったでしょう韓国では舞踊靴費用うために募金運動をしたのがてですが実際舞踊靴制作して学生たちにしたのは全面的日本チームアイだったからです

 

舞踊靴製作することはそれほど簡単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まず舞踊靴生徒把握しなければならず各生徒寸法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この準備忠実かつ正確遂行してくださったのがまさに日本チームアイです

 

製作された舞踊靴学生たちにえるのも面倒です学生たちがまる一括的伝達できれば一番良いですが仕事がそんなに容易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地域あるいは中央競演大会まで時間がたくさんっていたりあるいはすでにぎたそして競演大会があっても参加できない学校があれば各学校ねて舞踊部学生たちにいちいち舞踊靴伝達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の仕事担当してくださったのがチームアイ会員々です

 

 

1回舞踊靴キャンペーンは20201月末募金228日四国朝鮮学校31日神戸朝鮮学校舞踊部生徒たちに舞踊靴しましたこのまりや団体がなく李仁珩先生個人的進行したそうです

 

その116京畿地域朝鮮学校舞踊部生徒教師170舞踊靴えることにした2回舞踊靴神キャンペーンがみました1回目舞踊靴35用意するのとは比較にならないほど仕事きくなったのでくの人手必要でした

 

そこで韓国では9まって<ウリ學校朝鮮舞踊後援会>という臨時名前めましたチョン·フェソン(정회선)黃雄吉(ファン·ウンギル)クォン·ホンウ(권홍우)カン·チュンホ(강충호)李仁珩(·インヒョン)李元榮(·ウォニョン)趙誠武(チョ·ソンム)鄭澈勳(チョン·チョルフン)趙正熙(チョ·ジョンヒ)創立メンバーです。 (鄭澈勳先生創立会かれたので最初から苦労してくださったチョ·ウンジュ(조은주)先生創立メンバーとるべきでしょう^^)

 

 

この日本でも朝鮮学校支援するための結成されました正確日付えていませんがおそらく202010月中だったといます日本語教師出身日本人活動家近藤富男先生在日同胞写真鄭世和(チョン·セファ)先生先頭ってくださいました

 

名前近藤富男先生がつけましたこのにつけた名前チームアイでしたこの名前んだられたにいありませんでしたってくださったラインメールで近藤富男先生はこういました

 

『「アイにはいろいろな意味があります韓国語アイ子供青少年します日本語中国語アイです英語アイ)(I)(eye)しますそれで<チームアイ>子供たちの成長見守目覚めている個人まりです。』

 

 

その日本<チームアイ>会員30人余りが活動しているといています日本人活動家在日同胞々で構成されているそうですこの々は2回舞踊靴キャンペーンのから日本われるべきことを担当してくださいました完成した舞踊靴せて各学校訪問して生徒たちに舞踊靴えながら激励言葉をしてさることは<チームアイ>会員たちがけて担当しました

 

日本韓国<チームアイ>2020112回目のキャンペーン近畿地域170202133回目日本全域, 200)、2021104回目漏落した中級部学生, 89)、202215回目初級部学生, 438キャンペーンを継続しました

 

5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じて334個人後援10団体後援25百万圓募金されこれを伝達された日本<チームアイ>1千足舞踊靴製作日本全域のウリ學校舞踊部伝達しました

 

2年前まではおいの存在らなかった々ですが<チームアイ>わせて数百人後援者わせてげた根後援運動結果で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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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回構成される韓日訪問団日韓訪問団答礼訪問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123から8まで大黒澄枝真銅敏之鄭世和先生韓国訪問しました3とも日本<チームアイ>会員これまで舞踊靴追悼碑沿海州キャンペーンに参加してくださった々です

 

日韓訪問団々で韓国<チームアイ><舞踊靴>会員々とこれまで一緒仕事ができたことに感謝しながら今後交流協力げていこうとおっしゃっていましたこの々をえた韓国同胞えだったことがよくわかりました

 

 

統営江陵ソウルでも愉快まりがありましたが羅州まりは印象的でしたチェ·ヒョンサム先生<ケアファームもっと>のブドウ農場ハウスでかれた夕食会には林東聖(イム·ドンソン)金順熙(キム·スンヒ)鄭在春(チョン·ジェチュン)先生などの羅州々だけでなく帰農画家パク·ホンギュ画伯版画作品のプレゼントをって参加シンガーソングライターインディアンスニ先生参加して数曲雰囲気和氣靄靄とさせてくださいました

 

にインディアンのスニ先生<臨津江>って座中粛然とさせましたがおそらくチョン·セファ先生音楽会のアイデアをかべたのがこのではないかと推察しますインディアンのスニ先生韓日訪問団参加して宝塚日程でもう一度<臨津江>ってほしいとおっしゃっていましたから

 

インディアンスニ先生訪問団参加申請をしませんでしたがそのわり朴寅浩パク·インホ)先生をはじめとする国楽演奏団<風流会>会員たちが音楽会参加することになったのはきな進展です朴仁浩(大笒, テグム先生とともに李秀哲·スチョル牙箏, アジェン)、金賢淑(キム·ヒョンスク, 大笒)、カン·ヘソン伽倻琴, カヤグム先生韓国側演奏担当してくれることを期待しています

 

 

一方日本でも国楽器演奏準備されているといています二人在日同胞玉瀬音楽会のために演奏準備しているところでにも在日同胞声楽準備しているもいるそうです

 

このように羅州いで比較的偶然提示された音楽会のアイデアは既成事実化され具体的準備われています訪問団では朴寅浩先生演奏団長委嘱して音楽会準備万全してくださるようおいしています

 

玉瀬音楽会国楽中心音楽会用意されるのはとても意味深いことだといます100年余故国異域苦労してくなった5朝鮮人労働者める音楽会になるからです

 

 

それだけでなく演奏曲目<臨津江>とともに<アリランのえて>まれそうです。 「臨津江北韓芸術家韓国ったりまた韓国歌手もたくさんって有名ですよねパッチギという映画じてこのめてきましたがにまつわるげさなようですが歌自体歌詞だけでなく音楽までも素晴らしいだったとえています

 

アリランえてはそれほどられているではありません鄭世和先生父親鄭鴻永先生調査内容個人経験をもとに日本人音楽教師(神戸公立学校)ポンシロー先生歌詞いた作品ですにダイナマイトのれるのは1929の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くなった尹吉文吳伊根さんをえるためだとわれます

 

そのにもどんな演奏会まれるかは朴寅浩先生をはじめとする演奏団によってまるといますが慰労感謝やかで意味深音楽会になるよう準備万全していただきたいですまた日本準備されている々も演奏会場めていただき出演者たちも交渉して々なプログラムの演奏会ができれば錦上添花だと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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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구성되는 한일 방문단은 일한 방문단의 답방인 셈입니다. 다이꼬꾸 스미애(大黑澄枝), 신도 도시유키(真銅敏之), 정세화(鄭世和) 선생님께서 지난 123일부터 8일까지 한국을 방문하셨습니다. 세 분 모두 일본 <팀아이>의 회원들이시고, 그동안 무용신과 추도비, 연해주 캠페인에 함께 해 주신 분들입니다.

 

일한 방문단은 가는 곳마다 한국 <팀아이><무용신> 회원 분들과 만나 그동안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하시면서 앞으로도 교류와 협력을 넓혀가자고 하셨습니다. 이분들을 맞으신 한국동포들도 같은 생각이었던 것임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통영과 강릉, 서울에서도 유쾌한 모임이 있었지만, 나주 모임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최현삼 선생의 <케어팜 더욱>의 포도농장 하우스에서 열린 저녁식사 모임에는 임동성, 김순희, 정재춘 선생 등의 나주 분들만 아니라, 귀농 화가 박홍규 화백이 판화 작품 선물을 가지고 참석하셨고, 싱어송라이터 인디언 수니 선생도 참석하셔서 여러 곡의 노래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특히 인디언 수니 선생은 <임진강>을 노래해서 좌중을 숙연하게 하셨는데, 아마도 정세화 선생께서 음악회아이디어를 떠올리셨던 것이 이 때가 아닌가 짐작합니다. 인디언 수니 선생도 한일 방문단에 참여하셔서 다카라즈카 일정 중에 다시 한 번 <임진강>을 불러 주시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으니까요.

 

인디언 수니 선생은 방문단에 참가신청을 하지 않으셨지만, 그 대신 박인호 선생을 비롯한 국악연주단 <풍류회> 회원들께서 음악회에 참가하시기로 하신 것은 큰 진전입니다. 박인호(대금) 선생과 함께 이수철(아쟁), 김현숙(대금), 강혜성(가야금) 선생들께서 한국쪽 연주를 담당해 주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편 일본에서도 국악기 연주가 준비되고 있다고 전해 듣고 있습니다. 두 분의 재일동포께서 타마세 음악회를 위해 연주를 준비하시는 중이고, 그밖에도 재일동포 중에 성악으로 노래를 준비하고 계신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나주 모임에서 비교적 우연하게 제시된 음악회 아이디어는 빠르게 기정사실화되어서 구체적인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방문단에서는 박인호 선생을 연주단장으로 위촉드려서 음악회 준비에 만전을 기울여 주시도록 부탁해 놓고 있습니다.

 

타마세 음악회에서 국악 중심의 음악회가 준비되는 것은 아주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백여년전 고국을 떠나 이역에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신 다섯 분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음악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연주곡목에 <임진강>과 함께 <아리랑의 고개를 넘어서>가 포함될 것 같습니다. <임진강>은 북한 예술가들이 한국에 왔을 때 부르기도 했고, 또 국내 가수들도 많이 불러서 유명한 곡이지요? 저는 <박치기>라는 영화를 통해서 이 노래를 처음 들었는데, 노래에 얽힌 이야기는 약간 과장인 듯 싶지만 노래 자체는 가사뿐 아니라 음악까지도 훌륭한 노래였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는 그리 많이 알려진 노래는 아닙니다. 정세화 선생의 부친 정홍영 선생님의 조사 내용과 개인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인 음악교사(고베공립학교) 퐁시로(ポン史郎) 선생이 곡과 노랫말을 쓰신 작품입니다. 노래에 다이너마이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1929년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사망하신 윤길문, 오이근씨를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밖에도 어떤 곡들이 연주회에 포함될 것인지는 박인호 선생을 비롯한 연주단에 의해 결정되겠지만, 위로와 감사의 잔잔하고 뜻 깊은 음악회가 될 수 있도록 준비에 만전을 기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네요. 또 일본에서 준비하시는 분들도 연주회장을 잘 정해 주시고 다른 출연자들도 교섭하셔서 다양한 프로그램의 연주회가 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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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リ學校舞踊靴訪問団大阪朝鮮中高級学校<創立70周年記念公演>観覧だけでなく兵庫県宝塚市朝鮮人追悼碑参拝その地域住民たちとさな音楽会くことにしました宝塚行事日程まれたのはくはこの2年間この地域きたことのためですがくはこの108年間歴史たに発見されたからです

 

2020326宝塚市武田尾園入口親水広場5朝鮮人労働者える追悼碑てられました前面には越鳥南枝漢字かれておりその5犠牲者名前まれています神戸水道工事中死亡した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南益三(ナム·イクサム)張長守(チャン·ジャンス)福知山線鉄道工事事故くなった尹吉文(ユン·ギルムン)吳伊根(·イグン)さんがらです

 

 

日本全域には170りの朝鮮人追悼碑/慰霊碑てられており写真家安海龍先生にも30りの追悼碑つけました<宝塚朝鮮人追悼碑>日本国内200朝鮮人追悼碑最近建てられたものであるだけでなく韓日両国市民在日朝鮮人同胞長年努力結果としててられたものだという特徴的です

 

追悼碑裏面説明によりますと金炳順南益三張長守さんは1914~1915神戸水道改修工事中くなりましたが玉瀬住民はその遺骸共同墓地埋葬仏教寺院滿福寺位牌った108年間無縁故者祭祀ってきました

 

一方在日朝鮮人地域史家鄭鴻永先生日本人教師近藤富男先生1929鉄道工事くなった尹吉文吳伊根さんの死亡経緯結果発掘鄭鴻永先生著書歌劇のもうつの歴史:宝塚朝鮮人1997)』記録しました

 

 

鄭鴻永先生死去後近藤富男先生はこの々のための追悼碑てるために20年間努力した大阪神戸そして阪神地域日本人活動家在日朝鮮人協力<宝塚朝鮮人追悼碑>建設しました

 

このことをった韓国<チームアイ><舞踊靴>会員たちは殉難者たちの韓国内縁故地調査した金炳順さんの故郷江原道江陵であることを確認江陵市追悼碑建立者たちに感謝牌贈呈してほしいという請願書しましたこの請願れられ2022326追悼碑てられて2ぶりに江陵市わって東京所在江原道本部の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宝塚訪問8追悼碑建立貢献者感謝牌しました

 

江陵市江原道感謝表示鼓舞された玉瀬住民今後殉難者祭祀けることにする一方らの参拝墓りにムクゲやツツジをえて追悼公園にすることをめましたこの公園来年326わせて造成され開場するとされています

 

 

殉難者死後100年余鄭鴻永-近藤富男先生調査発掘および記録から20年余そして追悼碑建立されてから2年間<宝塚朝鮮人追悼碑>はこの地域くの注目韓国でも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

 

今回<ウリ學校舞踊靴>訪問団宝塚朝鮮人追悼碑訪問参拝することにしたのもこの一連事件結果結果ですまた追悼碑参拝にとどまらずさいながらも音楽会くことにしたのは朝鮮人殉難者面倒てくださった日本人住民在日同胞感謝するためです

 

20世紀前半韓国日本不幸歴史きてきましたが両国市民冷酷外交政治でも人類愛れませんでしたそしておいにする人之常情表現配慮してきました

 

訪問団宝塚訪問じて韓日両国不幸過去れずにそれを両国市民友好善隣昇華させるきっかけになることを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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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 무용신 방문단은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의 <창립70주년 기념공연> 관람 뿐 아니라, 효고현 다카라즈카시의 조선인 추도비를 참배하고, 그 지역 주민들과 작은 음악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다카라즈카 행사가 일정에 포함된 것은 짧게는 지난 2년 동안 이 지역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지만, 길게는 지난 18년 동안의 역사가 새롭게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2020326일 다카라즈카(寶塚)시 다케다오(武田尾)에서 가까운 사쿠라공원() 입구의 신스이광장(親水広場)5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을 기리는 추도비가 세워졌습니다. 앞면에는 월조남지(越鳥南枝)’라고 한자로 씌여 있고, 그 아래 다섯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고베수도공사 중에 사망한 김병순(金炳順), 남익삼(南益三), 장장수(張長守)씨와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에서 사고로 숨진 윤길문(尹吉文), 오이근(吳伊根)씨가 바로 그들입니다.

 

 

일본 전역에는 약 170여개의 조선인 추도비/위령비가 세워져 있고, 사진작가 안해룡 선생은 그밖에도 30여개의 추도비를 더 찾아냈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일본내 약 2백여개의 조선인 추도비 중에서 가장 최근에 건립된 것일 뿐 아니라, 한일 양국 시민들과 재일조선인 동포들의 오랜 노력의 결과로 세워진 것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입니다.

 

추도비 뒷면의 설명에 따르면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는 1914-1915년의 고베수도 개수공사 중에 사망했는데, 타마세 주민들은 그 유해를 마을 공동묘지에 안장하고, 불교사찰 만푸쿠지(滿福寺)에 위패를 모신 후 108년 동안 무연고자 제사를 드려 왔습니다.

 

한편, 재일조선인 지역사가 정홍영(鄭鴻永) 선생과 일본인 교사 콘도 도미오(近藤富男) 선생은 1929년 철도공사에서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의 사망 경위와 결과를 발굴해 <가극의 거리의 또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에 기록했습니다.

 

 

정홍영 선생의 타계 후 콘도 도미오 선생은 이분들을 위한 추도비를 세우기 위해 약 20여년간 노력한 끝에 오사카와 고베, 그리고 한신 지역의 일본인 활동가와 재일조선인들의 협력을 얻어 20여년만에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건립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국의 <팀아이><무용신> 회원들은 순난자들의 한국내 연고지를 조사한 끝에,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원도 강릉임을 확인하고, 강릉시에 추도비 건립자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해 달라는 청원서를 냈습니다. 이 청원은 받아들여졌고, 2022326, 추도비가 세워진 지 2년 만에 강릉시를 대신해 도쿄 소재 강원도본부의 강병직 본부장이 다카라즈카를 방문해 8분의 추도비 건립 공헌자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했습니다.

 

강릉시와 강원도의 감사표시에 고무된 타마세 마을 주민들은 향후에도 순난자들의 제사를 계속하기로 하는 한편, 이들의 참배묘 주위에 무궁화와 진달래를 심어 추도공원으로 꾸미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공원은 내년 326일에 맞춰 조성되고 개장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순난자들의 사망 이후 1백여년, 정홍영-콘도 도미오 선생의 조사와 발굴 및 기록 이후 20여년, 그리고 추도비가 건립된 후 2년 동안,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이 지역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고, 한국에도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이번 <우리학교 무용신> 방문단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방문하고 참배하기로 한 것도 이 일련의 사건들이 좋은 결과를 맺은 결과입니다. 또 추도비 참배에 그치지 않고 작으나마 음악회를 열기로 한 것은 조선인 순난자들을 잘 보살펴주신 일본인 주민들과 재일동포들에게 감사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20세기 한국과 일본은 불행한 역사 속에 살았지만, 양국의 시민들은 냉혹한 외교와 정치 속에서도 인류애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인지상정을 표현하고 배려해 왔습니다.

 

방문단의 다카라즈카 방문을 통해, ,일 양국의 불행한 과거를 잊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두 나라 시민들 사이의 우호와 선린으로 승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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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訪問団来年128土曜日には宝塚市朝鮮人参拝墓新水公園内朝鮮人追悼碑訪問して参拝地域住民いてさな音楽会開催します翌日129(日曜日)には大阪朝鮮中高級学校開校70周年記念公演観覧することになります

 

大阪朝鮮中高級学校2018年大阪朝鮮高級学校(=大阪朝高)東大阪朝鮮中級学校統合日本全体じて最大規模朝鮮学校となりましたが統合以前大阪朝高開校日大阪朝鮮中高級学校開校日としています

 

 

大阪朝高1952410日大阪市生野区田島開校1957810日河内市(=現在東大阪市)玉串本町1973年現在東大阪市菱江校舎新築して移転しました

 

日本高等学校にあたる朝鮮学校高級学校ぶのは朝鮮学校日本正規教育機関としてめられない各種学校分類されるからです朝鮮学校日本政府規定した教科一部いませんえば朝鮮学校国語国史朝鮮語朝鮮史であり日本語1外国語日本史世界史一部としてえます

 

 

大阪朝高朝鮮学校同様学生たちの活発小組(=サークル)活動をおめします公演芸術部としては舞踊部声楽部民族器楽部吹奏楽部代表的美術部活動活発です体育部では鬪球(=ラグビー)とサッカー成績しておりそのにもボクシングとバスケットボール卓球部などが活動しています

 

今回訪問団観覧することになる大阪朝高創立70周年記念公演希望のナレたちのという主題公演芸術部学生たちが総出演して大阪朝鮮中高級学校過去現在そして今後繰げられる未来紹介することになります公演大阪から南西4キロれた東大阪市文化創造館われ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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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번지는 느낌입니다. 최승희 선생의 삶과 춤을 연구하다가 우리학교(=재일조선학교)의 무용을 알게 됐고, 학생들의 무용 작품들을 접하고 보니까 너무 이쁘고 고마워서 무용신 캠페인을 시작했었습니다.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지요.

 

캠페인의 규모가 커지니까 버거워서 여러 분들에게 동참을 부탁드렸는데, 다행히도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무용신> 후원모임이 조선학교의 공연을 보러 가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조선학교를 처음 만난 것은 201910월초 교토에서였습니다. 최승희 선생의 1935년 교토 공연을 조사하느라 도서관에서 자료를 뒤지다가, 쉬는 시간에 인근 긴가쿠지(銀閣寺)에 갔습니다. 원래는 경내가 조용한 곳이지만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로 번잡했기 때문에, 관람을 포기하고 나오다가 옆길 입구에 세워진 조선학교 안내판을 보게 된 겁니다.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니 교토조선중고급학교가 있었습니다. 숲속에 자리 잡은 학교의 정문을 들어섰더니 학생들이 체육대회 연습을 하고 있더군요. 차일 밑에서 진행을 담당하시던 교사 분의 도움으로 조명호 교장 선생님과 무용부 지도교사 윤경숙 교원을 만났습니다. 두 분은 조선무용을 직접 보려면 11월초 오사카에서 열리는 중앙예술경연대회에 오라고 권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달 후에 다시 오사카에 갔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85년 전 최승희 선생이 시작했던 조선무용이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글을 통해서만 상상했던 최승희 선생의 춤 동작들이 학생들의 춤을 보면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최승희 선생의 해방 이전 작품을 담은 영상이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의 공연은 내 연구를 돕기 위해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처럼 느껴졌습니다.

 

 

경연대회장에서 사진가 정세화 선생을 만난 것도 큰 행운이었습니다. 이후 우리는 조선무용 연구와 우리학교 후원을 위해 협력하면서 성과를 내어왔습니다. 무용신과 추도비, 연해주 캠페인 등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번에 일본 방문단을 꾸리기에 이른 것이지요.

 

일본 방문단은 내년 128(토요일) 다카라즈카시의 조선인 참배묘와 신수이광장의 조선인 추도비를 방문해 참배하고, 지역 주민들을 초청해 작은 음악회를 개최합니다. 다음날인 129(일요일)에는 히가시오사카시 문화창조관(東大阪市文化創造館)에서 열리는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의 개교 70주년 기념공연을 관람하게 됩니다.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는 2018년 오사카조선고급학교(=오사카조고)와 히가시오사카조선중급학교와 통합하여 일본 전체를 통해 가장 규모가 큰 조선학교가 되었는데, 통합 이전의 오사카조고의 개교일을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의 개교일로 삼고 있습니다.

 

 

오사카조고는 1952410일 오사카시 이쿠노(生野)구 타지마(田島)에서 개교, 1957810일 카와치(河内)(=현재의 히가시오사카(東大阪)) 타마쿠시모토마치(玉串元町)로 옮겼다가, 1973년 현재의 위치인 히가시오사카시 히시에(菱江)에 교사를 신축해 이전했습니다.

 

일본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조선학교를 고급학교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학교가 일본의 정규교육기관으로 인정되지 않는 각종학교로 분류되기 때문입니다. 조선학교는 일본 정부가 규정한 교과목의 일부를 따르지 않습니다. 예컨대 조선학교의 국어국사는 조선어와 조선사이며, 일본어는 제1외국어, 일본사는 세계사의 일부로 가르칩니다.

 

 

오사카조고는 다른 조선학교들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의 활발한 소조(=동아리) 활동을 권장합니다. 공연예술부로는 무용부와 성악부, 민족기악부와 취주악부가 대표적이며, 미술부의 활동도 활발합니다. 오사카조고의 체육부로는 투구부(=럭비부)와 축구부가 좋은 성적을 내고 있고, 그밖에도 권투부와 농구부, 탁구부 등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번 방문단이 관람하게 될 <오사카조고 창립70주년 기념공연>희망의 나래, 우리의 노래라는 주제아래, 공연예술부 학생들이 총출연해서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소개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공연장인 히가시오사카시 문화창조관은 오사카조고에서 서남쪽으로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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