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광복 기자는 최승희가 희생적 양보를 무릅쓰고 춘천 공연을 단행한 것은 한 사람의 후원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암시했다. 그 후원자는 (=최승희)에게 잊을 수 없는 은사 ... 당시 숙명여고 훈육주임교사이자 화가 춘천(春泉) 이영일(李英一)”이라고 했다. 이는 일찍이 <월간 태백> 19894월호가 밝혀 놓은 사실이라고 주석도 달았다.

 

<월간 태백>의 기사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서울의 주요도서관(국립중앙, 국회)에는 그 잡지가 없었고, 춘천의 시립도서관도 이를 소장하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 기사의 내용과 근거는 물론 제목과 글쓴이조차 확인하지 못한 상태이다.

 

함광복 기자의 말대로 이영일(李英一, 1903-194)초대 강원도장관을 지낸 이규완(李圭完)3이었고, 앞서 서술한 춘천의 강원도 경찰국 소속의 유도선수 이선길의 동생이었다. 이영일은 화가였고 숙명여학교의 교원으로 재직한 바 있었지만 훈육주임이었다는 서술은 생소하다. 다른 기록에는 이영일이 숙명여학교의 도화(=미술)담당 교원이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1928년 조선미술전시회에 입선한 이영일의 작품 <시골소녀>

 

이영일이 최승희에게 그림을 지도한 적은 없었다. 그가 숙명여학교 교원으로 재직한 것은 1934년부터 1943년까지고, 최승희는 이영일이 교원으로 부임하기 8년 전인 19263월에 숙명여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이다. 특히 최승희가 춘천 공연을 단행했던 19312월에는 이영일이 아직 숙명여학교에 부임하기 전이었다.

 

따라서 최승희가 여학교 은사이영일의 후원을 받아 춘천 공연을 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더구나 이영일은 춘천이 아니라 경성에 살았다. 1930년경 이영일은 종로5가에 화실을 내고 선전 출품 작품을 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영일은 최승희의 춘천 공연을 성사시키는 데에 다른 방식으로 기여했을 수는 있다. 그것은 이영일과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과의 인연 때문이다.

 

1928년 5월10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이영일의 선전 특선작품 <꿩을 쫓는 매>

 

1928510일의 <동아일보>이케가미 슈호(池上秀畝, 1874-1944) 화백 문하에서 5개년 동안을 연구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영일이 도쿄 유학을 했지만 미술학교를 다니지는 않았다. 이케가미 슈호는 당대 일본화의 대가였다. 이영일은 1924년에 귀국했으므로 유학기간은 1919-1924년이었다. 니혼대학 미학과에 재학했던 최승일의 유학기간(1919-1923)과 겹친다.

 

당시에는 도쿄 유학생이 많던 시절이 아니었다. 1926년의 도쿄유학 졸업자수가 전문학교 졸업생 포함 130, 1928년의 졸업자수가 1백명이었으므로 1924년이나 그 이전에는 더 적었을 것이다. 최승일과 이영일은 도쿄시절 서로 안면식이나 통성명쯤은 했을 사이였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최승일은 미학과 재학 중 소설수업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림 공부 중이던 이영일과는 각별한 교감이 있었을 수 있다. 다만 최승일이 사회주의 성향이었다면 이영일은 일제하 초대 강원도장관을 아버지로 둔 친일성향의 집안이었으므로 관심분야나 활동영역은 달랐을 것이다.

 

1930년 5월7일의 <매일신보>에 실린 이영일 인터뷰 기사. 기자가 이영일의 종로5가 화실에서 나눈 대담을 사진과 함께 기사화했다.

 

이영일이 귀국해 선전(鮮展)에 첫 입상한 것은 1925년이었다. 동양화 부문 출품작 <매화와 비둘기>3등으로 입선한 것이다. 이때 최승희는 숙명여학교 4학년이었다. 이영일은 이듬해인 1926년의 선전에서도 <춘광>으로 입선했지만, 최승희는 이미 일본 무용유학을 떠난 뒤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최승희와 이영일이 서로 알고 지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영일이 교분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최승희가 아니라 그의 오빠 최승일이었을 것이다.

 

만일 이영일이 1931년초 최승희의 무용공연을 춘천에 유치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이는 최승일과의 연락을 통해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최승일이 최승희 공연활동의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영일이 춘천의 유지들과 지인들의 부탁으로 최승희 무용공연을 춘천에 유치하자는 제안을 받았다면, 형 이선길보다는 동생인 이영일이 최승일을 통해 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적임자였을 것이다.(jc, 2021/8/25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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