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민일보>의 고 함광복 기자는 이선길과 이영일의 부친이자 일제하 초대 강원도장관이었던 이규완(李圭完, 1862-1946)이 최승희의 춘천공연을 주선했을 가능성을 주장했다. 입증자료가 제시되지 없으므로 아직은 가설이다. 하지만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함광복 기자의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해 볼 필요는 있다.

 

우선 이규완이 최승희의 춘천공연을 주선했더라도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춘천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을 통틀어 이규완 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원도장관(1908-1918)과 함경남도장관(1918-1924)을 역임한 후 62세의 나이로 춘천에 은퇴했지만 여전히 전국적 유명 인사였다.

 

퇴임 후 이규완은 중추원 참의직 등의 정무직은 거절했지만, 경제와 산업, 사회 활동은 계속했다. 그는 동양척식회사 고문(1924-1933), 조선산림협회 이사(1925-1937), 물산장려회 이사(1927-), 조선농업회 고문(1927-), 경성상공협회 상담(1930-), 한성시탄주식회사 설립(1936), 조선신문사 취체역(1936-1941)으로 근무했고, 신간회(1927-1931)에도 참여했다.

 

일제강점기 강원도와 함경남도 도장관을 역임한 이규완(오른쪽)과 그의 부인 나카무라 우메코(한국 이름 이매자). 나카무라 우메코는 일본인 외교관과 스페인 귀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으로, 이규완과의 사이에 5남4녀를 두었다. 둘째아들이 이선길, 세째아들이 이영일이다.

 

퇴임 후에도 유지되었던 이규완의 영향력은 두 일화로 확인된다. 첫째, 19397월 경춘선 개통식에 참석한 미즈시마 겐(水島謙)이 춘천 여행기를 여행잡지 <조선관광> 19398월호에 실었다. 저자는 특별히 이규완씨를 찾아가 인터뷰한 내용을 기사에 포함시켰다. 그는 일본과 조선의 언론계에 잘 알려진 내선일체의 선구적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1942년 이규완이 80세를 맞자 일제의 강원도청 산업부는 그의 일생을 정리한 책 <이규완옹 일화집>을 출판했다. 이 책은 1956년 대한민국의 강원도청 내무국에 의해 <이규완옹 일사>라는 제목으로 재간행했고, 1994년에는 춘천문화원이 그 재판을 냈다. 일제강점기에 도장관을 역임한 이규완는 당연히 친일파 명단에 올랐지만, 일제와 대한민국의 관리들은 공통적으로 그의 비범하고 청렴한 삶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할 만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일화들은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초의 일이니, 최승희의 춘천공연이 있었던 1931년에는 그의 영향력이 더욱 생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규완은 최승희 공연 유치에 관심이 있었을까?

 

1939년 8월호 <조선관광>에는 이규완의 인터뷰 기사가 실려있다.

 

이규완은 일생을 무예와 군대, 행정과 정무, 그리고 만년에는 농사일에 묻혀 지냈으므로 예술 분야에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주위의 인사들로부터 춘천에 최승희 공연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거나 공연 성사에 힘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더구나 도청의 관료 혹은 지역 유지들로부터 새로 지은 공회당에서 최승희 무용이 공연되면 춘천의 발전상을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면, 강원도와 춘천에 애착이 강했던 이규완로서도 흥미를 가졌을 법하다.

 

그런 요청이나 설명은 당시 춘천 발전을 위해 노력하던 <삼오회><춘천번영회>의 임원들로부터 들었을 수도 있고, <춘천자동차사>를 설립한 최백순이나 춘천공회당 건립에 앞장섰던 최양호, 혹은 그의 아들 이영일이나 이선길로부터 들었을 수 있다. 혹은 당시 춘천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이들이 모두 최승희 무용공연을 초청하는 일에 함께 힘을 모았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춘천 정관재계의 최고 유력인사 이규완의 영향력을 빌고 싶었을 것이다.

 

이규완(왼쪽)은 갑신정변 거사일(1884년 12월4일) 박영효의 행동대원으로 우정국에 출동 민영익(오른쪽)의 오른쪽 귀를 베었지만 목숨을 건졌다.

 

물론 이는 추정이다. ‘최승희 춘천공연은 이규완이 주선했을 수도 있다는 함광복 기자의 가설을 조금 더 극단으로 몰아가면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기도 하다. 함광복 기자와 나의 이 가설이을 증명할 수 있는 문헌 증거는 아직 없으며, 한국에서는 앞으로도 발견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동안의 문헌 기록만으로도, 1930년대 초 춘천시민들이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별 없이 유력인사들과 일반 시민들이 일치단결해 춘천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고, 그 덕분에 교통이 개선되고 공회당이 신설되는 등의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같은 성과를 대내외에 홍보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전국적 명성의 최승희의 무용 공연을 개최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일은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jc, 2021/8/25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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