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군국주의 하에서도 최승희 선생은 조선무용공연을 멈추지 않았고, 이를 계속 공연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국방헌금을 내고 신사참배를 할지언정, 자신의 무용만은 조선음악 반주의 조선무용 독무 공연으로 이어간 것이다. 이른바 살을 내주되 뼈는 지키는 전략인 셈이다.

 

최승희 선생의 이러한 결단과 고집은 조선에서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한동안 계속됐다. 19417월의 요코하마(橫浜) 공연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1941717일자 일본의 영자신문 <재팬타임스(Japan Times)>의 보도에 따르면 요코하마 공연이 “721-22일 오후 7시 요코하마 타카라즈카 극장에서 특별 공연으로 열렸다. 이 공연의 프로그램에는 10개의 무용이 포함되었고, 그 대부분은 동양무용(Oriental Dance), 동양의 리듬(Oriental Rhythm), 그리고 초립동 무용(Dance of Grass Helm)”이 포함되어 있다고 전했다. , 최승희의 요코하마 공연 레퍼토리도 2월의 도쿄공연에서처럼 조선무용 독무작품으로 이뤄졌던 셈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두 가지 면에서 이전과 달라진 면을 보였다. 첫째는 19412월의 도쿄 공연에서 발표됐던 13작품 중에서 10개 작품만이 요코하마에서 공연되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조선무용이라는 말이 동양무용이라는 말로 대체되었다는 점이다.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 작품을 동양무용동양의 리듬이라고 소개한 것은, “조선음악으로 조선무용을 공연하려는 최승희 선생의 의도와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기사는 최승희 선생을 조선인(Chosunese)’으로 소개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4개월 후 1128-30일의 도쿄 다카라즈카극장 공연은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발표작품 12개 중에서 6개가 일본무용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공연 팜플렛은 <신전무(神前)>일본 의식무용의 장중한 형식미를 드러낸 작품이라고 소개했고, <천하대장군>일본 무악의 수법에서 받는 느낌을 주로 하여 창작한 것이라고 했다. <칠석의 밤>일본의 가장 아름다운 전설의 하나인 견우직녀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이며, <무혼(武魂)>일본 능악(能樂)의 무용적 수법을 도입해 ... 옛 무사의 영혼을 드러내고자 한 작품이라고 소개됐다. <보살도(菩薩圖)>라는 제목 아래 <가무보살>카마쿠라(鎌倉)시대의 그림 ‘25보살래영도가 소재이며, <보현보살>은 일본 헤이안(平安)시대의 그림 보현보살을 소재로 창작된 작품이라고 소개되었다.

 

이중 <신전무><칠석의밤><무혼>은 이 공연을 위해 새로 창작한 작품이다. 즉 명시적으로 일본적 소재를 무용화한 첫 번째 시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천하대장군>은 한국의 장승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지만 도쿄 공연에서는 이를 일본 무악(舞樂)’의 수법을 바탕으로 창작한 것이라고 설명을 바꿨다.

 

또 최승희의 대표작인 <보살춤>은 동양 공통의 불교적 소재로 창작된 동양무용이었지만, 이름을 <보현보살>로 바꾸고 일본 헤이안시대의 그림을 소재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고, 이를 카마쿠라시대의 불화를 소재로 창작되었다는 <가무보살>과 짝을 이루게 했다.

 

 

 

또 명백하게 조선무용 작품인 <화랑의 춤><옥적곡>, <즉흥무><초립동>, 그리고 <옥중춘향>에 대한 설명에서는 조선무용이라는 언급이 완전히 배제되었고, <세 개의 전통리듬>은 유일하게 조선 고전무용의 세 가지 기본 리듬(염불과 타령, 굿거리)”을 소재로 한 것이라고 밝히면서도 결국 이를 동양 무용이라고 소개했다.

 

요컨대, 194111월의 도쿄 공연 작품은 일본무용이거나(신전무, 칠석의밤, 무혼) 조선무용을 일본무용(천하대장군, 보현보살, 가무보살) 혹은 동양무용(세 개의 전통리듬)으로 둔갑시킨 것이거나, 혹은 조선 국적을 배제(화랑의춤, 옥적곡, 즉흥무, 초립동, 옥중춘향)한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이는 최승희 선생이 추구하겠다고 밝혔던 것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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