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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126일 무용가 최승희는 전남 벌교에서 공연했다. 극장은 <벌교구락부>였다. 124일의 목포, 125일의 광주 공연에 이은 남도 순회공연의 일환이었다.

 

최승희의 벌교 공연이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목포와 광주의 공연을 조사하는 중에 벌교 공연이 언급된 신문 기사가 발견된 것이다. 19311124일자 <동아일보(3)>가 지역 모임을 소개하는 <회합> 난에 최승희 여사 무용회 126일 벌교구락부에서 개최한다고 짤막하게 보도했는데, 이 단신은 125일의 광주 <제국관> 공연 보도와 나란히 실려 있었다.

 

그러나 공연 당일(126)이나 그 직후의 신문에는 후속 보도가 없었고, 그밖에도 최승희의 벌교 공연을 언급한 문헌은 더 이상 발견된 것이 없다. 최승희는 실제로 벌교에서 공연을 했을까? 혹시 기획되고 공고되었지만 연기되거나 취소된 것은 아니었을까?

 

 

무용 공연이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일은 자주 있었다. 1930825일로 예정되었던 최승희의 청주 공연은 악사의 준비에 미비해서 912일로 연기되었고, 19301030일로 기획된 대전 공연은 주최 측의 부득이한 사정으로 1111일로 연기됐다. 1932520일로 공고되었던 인천 공연도 회장(會場) 관계로 무기 연기되었다가 결국 취소되었다.

 

신문에 공지된 공연이 취소 혹은 연기되었다면 이는 즉각 재공지되어야 한다. 그래야 관객의 돈과 시간 손실을 막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1931126일의 벌교 공연은 연기되거나 취소되었다는 보도가 없는 것으로 보아 예정대로 이뤄졌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벌교 공연의 실현 여부에 의구심이 드는 것은 벌교가 소도시였기 때문이다. 벌교읍의 1930년 인구가 23천명이었고 일본인이 집중 거주했던 벌교포의 인구도 5천명 남짓이었던 벌교읍이 조선의 신무용 톱스타 최승희의 공연을 유치했다는 것이 믿어지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의 최승희는 유학에서 막 돌아온 젊은 무용가였고, 신진답게 최승희의 공연 행보는 공격적이었다. 193021일 제1회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래 벌교 공연 직전까지 그는 네 차례의 신작발표회를 경성에서 열었고, 각 발표회 후에는 지방 순회공연을 단행했다.

 

1931년에만도 최승희는 부산(217-18), 춘천(21), 대구(24-25)에서 지방 공연을 가졌고, 호남지역에서도 이리(31), 전주(2-3), 군산(4-5), 김제(6) 등에서 공연했다. 최승희가 전라도 공연을 가진 것은 1930119-10일의 목포 <평화관>공연 이후 두 번째였다.

 

이후 최승희는 정주(43), 신의주(5-6), 의주(9), 선천(11), 사리원(12), 개성(14) 등의 북선 지역에서 공연한 뒤 경성으로 돌아갔는데, 안막과의 결혼식(59)이 예정되어 있었고, 곧바로 네 번째 신작무용 발표회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193191일 경성 단성사에서 제4회 신작무용공연을 가진 후 최승희는 다시 지방공연에 나섰다. 수원(913), 김천(16), 대구(17), 밀양(21), 마산(22), 진주(23), 통영(25) 등의 경상도 공연에 이어 해주(1013), 신천(14), 개성(30)의 북선 공연을 가졌고, 뒤이어 조치원(11월24일), 청주(25), 대전(26일), 전주(29), 군산(30), 목포(124일, 목포극장), 광주(5일, 제국관), 그리고 벌교(6일, 벌교구락부)에서 공연을 열었던 것이다.

 

 

벌교는 빠르게 성장하는 신흥 소도시였다. 1930년의 벌교읍 인구는 23천명, 1940년에는 25천명으로 늘어나 광주(65천명)와 목포(64천명), 여수(37천명)와 순천(28천명)에 이어 전남에서 5번째로 큰 도시였다. 인구로 본 벌교는 전남에서는 나주와 강진보다 컸고, 전북의 이리와 김제보다 큰 도시였던 것이다.

 

최승희는 공주와 천안, 이리와 김제 등 인구가 벌교보다 작은 도시에서 공연한 바 있었고, 특히 신천과 재령, 의주와 정주와 선천 등 벌교 인구의 절반에 못 미치는 훨씬 더 작은 도시들에서도 무용 공연을 했었다.

 

이 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최승희가 빠르게 성장하던 신흥 소도시 벌교에서 공연을 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2022/5/22,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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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1922529, 4)>에 따르면 숙명여학생들은 (5)26일 상오1135분 도착 열차로 래인(來仁=인천에 오다)”했다가 하오615분 인천역발() 열차로 귀교했다. 인천역에 도착해 대열을 정비할 시간을 30분씩으로 잡는다면, 실제 수학여행은 12시에 시작되어 545분경에 끝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6시간이 채 못되는 수학여행이었던 것이다.

 

인천 도착이 1135분이었으니 인원점검하고 나면 바로 점심시간이었을 것이다. 식사시간을 45분으로 잡았다면 여행지 방문시간은 오후1시부터 6시까지 약 5시간뿐이었다. 숙명여학생들은 인천에서 어떤 곳을 방문하고 견학했던 것일까?

<동아일보(1922529, 4)>는 숙명여학생들이 시가(市街)와 동,서공원, 그리고 관측소와 축항(築港) 및 기타 여러 곳을 순람(巡覽=차례로 관람)”했다고 보도했다. 당시에도 인천역을 나서면 바로 중심가였고 인천신사가 있던 동공원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시가 방문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5시간 동안 동공원과 서공원, 관측소와 축항을 돌아보고, 그밖에도 기타 여러 곳을 차례로 관람했다니 일정이 빡빡한 수학여행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동공원(東公園, 현재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자리, 중구 인중로 146)>은 일제강점기에 인천신사가 있던 공원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일본조계지의 동편 끝에 마련되었고 그때는 <일본공원>이라고 불렸고, 궁정(宮町)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궁정공원>이라고도 했다. 바닷가 절벽 위의 높은 곳에 마련된 신사 인근이 공원으로 꾸며져 식물원과 놀이시설이 있었다.

 

<서공원(西公園)>은 지금의 <자유공원>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청국과 일본 조계지 북쪽 응봉산(鷹峰山) 기슭에 조성된 공원이다. <각국공원> 혹은 <만국공원>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그 지역이 청국과 일본을 제외한 기타 각국의 조계지였기 때문이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고 1914년 조계지를 철폐하면서 <일본공원><동공원>으로 <각국공원><서공원>으로 개칭됐다.

 

관측소(현재, 중구 전동 25-1)기후를 관찰하고 측정하는 기상대를 말한다. 19044월 일제는 인천에 관측소를 신설해 러일전쟁을 필두로 한반도와 중국을 침략하는 데에 필요한 기후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응봉산 정상에 69평 규모의 목조 2층 건물로 지어진 관측소의 주변에는 기후를 관찰하고 측정하기 위한 각종 기기를 구비했고, 그 결과를 매일 발표했다.

 

 

축항(築港, 중구 내항로 67)은 축조된 항구라는 뜻이다. 1883년 개항 시기 인천에는 항구시설이 없었다. 일제는 1914년 갑문과 잔교를 만들어 대규모 선박들이 접안할 수 있게 했다. 관측소와 함께 인천 축항은 일제가 건설한 신식문물로서 학생들의 견학거리로 추천됐을 것이다.

 

<동아일보>가 언급하지 않았지만, <조선일보(1924426)>가 보도한 이화학당의 인천 수학여행에는 검역소(중구 항동71-17)”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으로 반출되던 한국소를 검사하던 이출우검역소를 가리킨다. 통감부 시기부터 패망까지 일제는 약 150만 마리의 한우와 6백만 마리분의 소가죽을 반출했는데, 검역소는 그 한우와 가죽을 검사하던 곳이다.

 

 

그런데 5시간의 도보 일정으로 동공원과 서공원, 관측소와 축항과 검역소 방문이 가능했을지가 의문이었다. 현주소 기준으로 동선을 측정해 보니, 인천역에서 자유공원 입구까지 5백미터(도보로 10), 자유공원 입구에서 관측소까지 5백미터(오르막길 15), 관측소에서 검역소까지 3.3킬로미터(54), 검역소에서 축항까지 1.7킬로미터(27), 축항에서 동공원까지 3.2킬로미터(51)였고, 모든 방문을 마치고 인천역으로 돌아가는데 1.5킬로미터(26)였다. 10.7킬로미터였고 도보로 178, 즉 걷는 데에만 약 3시간이 걸렸을 거리이다.

 

5군데의 방문지를 돌아보는 시간은 2시간밖에 할당되지 않았을 테니 한 방문지에 25분 이상 머물 수 없었을 것이다. 인천 시가지와 서공원의 양식 건물들은 걸어지나가면서 구경할 수 있었겠지만, 관측소나 검역소, 축항의 갑문이나 신사에서는 현장 관계자로부터 충분한 설명이나마 제대로 듣기 어려웠을 시간이다. 따라서 숙명여학교의 인천 수학여행은 3시간 걸으면서 2시간 구경해야 했던 분주하고 빡빡한 여행이었던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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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1922529, 4)>는 숙명여학생들이 인천 수학여행을 위해 (5)26일 상오1135분 도착 열차로 래인(來仁=인천에 도착함)”했다가 당일 하오615분 인천역발() 열차로 귀교했다고 보도했다. 그래서 당시의 열차시간표를 찾아 확인해 보기로 했다.

 

경인선이 개통되었던 18999월의 열차 운행은 하루 2왕복에 불과했으나, 그 해(=1899) 121일부터는 하루 세 번 왕복, 이듬해인 1900316일부터는 하루 네 번 왕복으로 증편됐다. 6개월만에 2배로 늘어난 것이다.

 

증가세는 계속되어서 19203월에는 9, 19254월에 이르면 하루 13편에 이르렀다. 경인선 운행 20년 만에 열차 편수가 3, 25년 만에 4배로 증가한데다가, 운행 객차와 화물차의 수가 1899년의 3량에서 1925년에는 7량으로 늘어났으니 경인선을 이용한 인적, 물적 수송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1920년의 열차시각표를 보면 남대문에서 기차가 출발하는 시간은 오전 645, 9, 1042, 1210, 210, 515, 610, 750, 1010분이었다. 그런데 이 1920년 열차시각표에는 1922526일의 <동아일보>가 보도한 오전1135분에 인천에 도착하는 기차편이 없다. 오전1135분에 도착하려면 그보다 1시간40분 전인 오전955분에 출발하는 기차가 있어야 하지만, 9시발과 1042분발 기차가 있을 뿐이다. 1920년과 1922년 사이에 열차시간표가 더 증편되었다는 뜻이다.

 

한편 19253월의 열차시각표를 보면 남대문역 출발 열차가 하루 13편으로 늘었고, 출발 시각은 오전635, 740, 830, 915, 1015, 1110, 오후1240, 1445, 1620, 1740, 1835, 2035, 2230분이었다. 이중 오전830분과 오후540분 기차는 급행이었다. 급행의 운행시간은 50분으로 오전830분에 경성역을 출발하면 오전920분에 인천에 도착했다.

 

1920년과 1925년의 열차시간표를 비교해 보면 증편된 4개 열차 중에서 3개가 오전 기차라는 점이다. 첫차가 645분에서 635분으로 10분 당겨졌고, 9시 기차는 915분으로 15분 미뤄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 740, 830분발 열차가 2편 증편됐다. 1110분발 기차도 새로 생겼는데, 이는 오전에 인천으로 가는 경성의 여행객이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1920년대 들어서는 경인선 덕분에 인천이 경성의 1일 생활권에 완전히 포함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시간표에도 숙명여학생들이 탔던 955분발 기차는 없었다. 915분발과 1015분발 열차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1920년 이후에 955분발 열차가 생겼지만 1925년에는 그것이 감편되어 1135분발 기차가 1110분으로 당겨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19254월에 발표된 열차시각표가 하나 더 있었다. 일본 제1함대가 인천항에 입항하자 일본군의 경성행 왕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마련된 열차시간표였다. 여기에는 경성->인천 열차가 14, 인천->경성 열차가 14편으로 되어 있었다. 인천행 열차 중에서는 오후330분과 오후435분 기차가 추가되었는데 이는 일본군의 함대 귀환 편의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830분발 급행열차의 번호가 205호이고 그 다음으로 출발하는 915분발 보통열차 번호가 207호인데 그 다음 1110분에 출발하는 보통열차 번호가 211호인 것을 보면 그 사이에 1015분발 209호 보통열차가 있었으나 감편되었다는 뜻이다. 209호가 누락된 것은 그 시간 여행자가 적어서 감편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253월 시행의 인천발 경성행 기차시간표는 6, 75, 85, 910, 1110, 오후1255, 255, 45, 515, 615, 720, 845, 1040분 등이었다. 19254월의 특별시간표에는 오후720분발 경성행 열차가 감편되었고, 그 대신 일본군의 편의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오전720분과 840분 기차가 증편되었다. 숙명여학생들이 타고 경성으로 돌아왔다고 <동아일보>가 보도한 615분발 열차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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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1922529, 4)>의 숙명여학교 수학여행 기사를 통해 또 한 가지 확인된 것은 경인선의 시간표였다. 이 기사는 (5)26일 상오1135분 도착 열차로 래인(來仁=인천에 도착함)”했다가 당일 하오615분 인천역발() 열차로 귀교했다고 보도했는데, 이를 통해 경인선의 기차들의 발착 시간과 속도를 알 수 있다.

 

우선 당시의 열차시간표를 찾았는데, 1899918일에 개통되었던 경인선의 첫 시간표는 간단했다. 노량진->인천이 하루에 2, 인천->노량진이 2편뿐이었다. 노량진행 기차는 인천에서 오전7시와 오후1시에 출발했고, 인천행 기차는 노량진에서 오전9시와 오후3시에 출발했다.

 

오전7시에 인천을 출발한 기차는 오전840분에 노량진에 도착했고, 20분 쉬었다가 9시에 다시 노량진을 출발해 1040분에 인천에 도착했다. 오후에는 1시에 인천을 출발한 기차가 240분에 노량진에 도착했고, 이 기차는 20분 휴식한 후 3시에 다시 출발해 440분에 인천에 도착함으로써 하루 운행을 마쳤다.

 

 

주목할 것은 경인선이 줄여놓은 거리이다. 이 기차는 도보로 12시간 걸리던 여행길을 1시간40분으로 줄였다. 이 속도가 지금 기준으로는 그리 빠른 것은 아니다. 최초의 경인선 거리가 33.2킬로미터였고, 이를 1시간40분에 달렸으니 그 속도는 약 시속 20킬로미터에 불과했다. 누구든 1백미터를 15초에 달린다면 그 속도가 시속 24킬로미터이다. 즉 당시의 기차는 1백미터를 15초에 달리는 사람보다 느렸다는 뜻이다.

 

그래서 기차 통학을 하던 학생들이 달리는 기차를 뛰어서 올라탔다거나, 만주의 열차강도 마적단이 말을 타고 기차와 나란히 달리다가 뛰어 오르는 일도 당연히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정도의 속도를 가지고도 경인선은 두 도시와 그 시민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우선 인천의 여관과 호텔들이 폐업했다. 인천항에 도착한 선객들이 바로 기차편으로 경성으로 향했으므로 인천에서 숙박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호텔이라는 <대불호텔>이 문을 닫은 것도 경인선이 개통된 직후였다.

 

그 대신 경성 시민들은 점심을 먹으러 인천에 가는 일이 많아지면서 인천의 식당들은 호황을 맞았다. 중국집 <중화루>가 유명해 진 것도 경인선 덕분이다. 경인선은 또 월미도 유원지를 경성시민의 소풍지로 만들어 주었다.

 

 

경인선의 속도가 조선인들을 놀라게 했다면 기차와 함께 도입된 시간 개념이 조선인들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노량진이나 인천에서 오전 열차를 놓치면 오후까지 기다려야 했고, 오후 기차를 놓치면 다음날까지 기다려야 했다. 심지어 경인선의 개통식에서 기차를 놓친 사람이 있었다. 조선 정부의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 1851-1909)이었다.

 

1899918일 제물포역에서 열린 경인선 개통식에는 대한제국의 고관대작들이 총출동했고, 학부대신 신기선도 당연히 참석했다. 신기선은 구한말의 어지러운 조정에서 그나마 괜찮았던 신하였다. 벼슬 팔아 돈벌이하던 고종에게 뇌물을 근절하지 못하실 경우, 나라의 명맥이 끊길 것이라고 호소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경인선 개통식의 귀빈 신기선이 기차의 발차를 코앞에 두고 사라졌다. 기차는 경적을 울렸고 출발 직전에야 비서가 화장실에서 신기선을 찾아냈다. “대감마님, 어서 나오십시오.” 그러자 신기선이 호통을 쳤다. “내가 아직 다 일을 안 보았으니 기다리라고 일러라.” 비서가 호소했다. “대감마님. 화통(=기차)이란 시간을 늦출 수가 없다고 합니다.” “잔말 말고 기다리라고 해라.” 기차는 떠났고 대한제국의 학부대신은 이 역사적 경험을 놓치고 말았다.

 

이 에피소드는 기차와 함께 시간개념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12간지를 사용하던 시간제가 24시간제로 바뀌었고, 한 시간도 분 단위로 세분화되었다. 그리고 그 세밀한 시간을 모두 잘 지켜야 했다. 새로 도입된 이 시간엄수의 관행은 반상천의 신분을 가리지 않았고, 고관대작이나 미관말직의 지위를 구별하지 않았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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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526일의 숙명여학교 인천 수학여행에는 516명의 학생이 참가했다. <동아일보(1922529, 4)>경성사립숙명여학교 고등과 학생 183명과 초등과 생도 333명은 직원15인의 인솔 하에 지난 26... 래인(來仁, 인천을 방문)”했다고 보도했다.

 

기사 중의 초등과란 보통학교를 가리키며 오늘날 초등학교 과정이다. 1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만8세 이상의 여아가 입학하는 4년제 과정이었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숙명 초등과의 입학정원은 90명이었고, 최승희도 19184월 이 학교에 입학해 19223월에 졸업했다.

 

 

19224월부터 제2차 조선교육령이 시행되면서 보통학교는 6년제로 바뀌었지만, 숙명여학교는 이 해부터 보통과를 폐지해 신입생을 받지 않았다. 고등과 교육에 충실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따라서 19225월 현재 숙명여학교 초등과 정원은 1학년 없이 2,3,4학년 각 90명으로 총 270명이었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숙명여학교 초등과 생도 수가 333명이었다고 했으니 재학생 수가 정원을 초과한 상태였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짐작된다.

 

첫째는 법정 정원보다 많은 학생을 선발했을 가능성이다. <조선일보(1920616, 3)>1920년 숙명여학교 고등과의 모집정원이 40명이었으나 58명이 지원했고 이중 48명이 선발됐다고 보도했다. 모집정원보다 8(20%)을 초과 입학시킨 것이다. 입학 후 4년 동안 여러 사정으로 퇴학할 학생 수를 예상해 학생을 미리 더 선발했던 것이다. 초등과의 법정 정원이 90명이었다면 그 20%인 최대 18명까지 더 선발할 수 있었고, 따라서 초등과의 각 학년 재학생 수는 최대 108명이었을 것이다. 둘째는 보결(補缺) 학생, 즉 편입생의 선발이다. 숙명여학교의 입시요강을 보면 매년 신입생과 함께 약간 명2,3,4학년 보결학생을 추가로 선발했다.

 

 

따라서 초과 입학생과 보결 학생을 합치면 재학생 수가 법정 정원보다 많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 시기에는 학교가 적어서 입학 경쟁률이 251에 달하기도 했고, 학생들은 많은데 입학할 학교가 없어 비상대책이 강구되었던 시기였으므로, 법적, 혹은 관행적으

로 용인되던 초과입학 비율 20%를 넘기더라도 총독부로서도 눈감아 주었을 것이다.

 

한편, 이 수학여행에 참가한 고등과 학생은 183명이었다. 1차 조선교육령이 적용되었던 1921학년도까지 숙명여학교는 3년제였고, 입학 정원은 40명이었지만 실제 입학생은 48명이었다. 1922년의 정원은 80명으로 늘었지만, 실제로 몇 명이 입학했는지는 기록을 찾지 못했다. 아마도 80(정원)1백명(20%추가)의 사이였을 것이다. 따라서 19225월 현재 숙명 고등과 재학생은 최저 176, 최대 196명이었을 것인데, <동아일보>가 보도한 183명은 이 범위 안에 들어가므로 정확한 숫자로 보인다.

 

 

따라서 초등과 333명과 고등과 183명이 참가했다는 것은 곧 숙명여학교의 전교생이 이 수학여행에 참가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숙명여학교의 인천 수학여행단 516명은 1920년대 수학여행 규모 순위에서 5위로 꼽혔다.

 

1위는 192359일 관촉사로 수학여행을 갔던 강경공립보통학교(동아, 516, 800)였고, 2위는 192354일 성남사로 원족을 갔던 안성공립보통학교(조선 59, 700)였다. 3위는 1923522일 담양으로 수학여행을 갔던 광주보통학교(조선, 529, 667)이었고, 4위는 1923522일 묘향산 수학여행을 갔던 평양 광성학교(동아, 519, 528)였다.

 

한편 <조선일보(1924426)>에 따르면 숙명여학교에 뒤이어 대규모 수학여행단 6위를 차지한 것은 이화학당(5백명)으로, 이들도 426일 인천 수학여행을 단행했는데, 방문한 곳이 축항과 관측소, 검역소와 공원들이어서 2년 전의 숙명여학교와 완전히 같았다.

 

불행히도 숙명여학교의 이 수학여행을 담은 사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인구 6(1925년 기준)에 불과했던 도시 인천에 같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 5백 명이 줄지어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숙명여학생들이 인천을 구경했다기보다는 인천 시민들이 숙명여학생들을 구경하게 되었던 수학여행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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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학교의 19225월 인천 수학여행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히 최승희가 이 수학여행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1918년에 입학해 19223월에 숙명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한 최승희는 그해 4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숙명여고보)에 진학했다.

 

당시 조선의 학교들 사이에는 수학여행 붐이 일었다. 1910년대까지는 조선총독부가 수학여행을 금지하거나 억제했지만, 1919년 삼일만세운동 이후에는 수학여행을 장려하되 방법과 내용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수학여행을 장려한 것은 문화정치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식민지 조선의 예산자립을 위해 관광산업을 일으키는 정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수학여행은 메이지 시대 일본 학교들의 관행을 모방한 것이지만, 대한제국 시기에 시작된 초기의 수학여행은 위국충군(爲國忠君), 즉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황제에 대한 충성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강점 후 일제가 수학여행을 억제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1919년 이후 총독부는 철도와 숙박업을 바탕으로 관광산업을 일으키려고 노력했다. 자생적 산업기반이 없던 조선에서 조세 수입을 창출할 방법이 관광업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금강산을 관광지로 개발하고, 평양과 경주와 부여를 고적지로 개발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이러한 관광정책의 흐름 속에서 학생들의 수학여행도 장려되었지만, 총독부는 각 학교의 1박 이상의 수학여행은 도장관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한편, 여행의 경유지와 내용을 보고하도록 했다. 수학여행 프로그램을 친일적 내용으로 채우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제약과 통제에도 불구하고 조선 학교들은 수학여행을 적극 활용했다. 1920년대에 이뤄진 수학여행은 <동아일보>254, <조선일보>171건이 보도되었는데, 중복을 제외하면 10년간 보도된 수학여행 건수는 273건에 달했다. 여기에는 보통학교(=초등학교)와 고등보통학교(=중학교), 전문학교와 실업학교 등 모든 종류의 학교들이 수학여행을 추진했다.

 

 

이 시기에 수학여행지로 자주 선택되었던 곳은 경성, 평양, 인천, 진남포, 수원, 신의주, 원산, 경주, 부여, 강화도, 만주, 일본 등이었다. 진남포와 신의주, 원산 등은 근대 문물을 견학하기 위한 곳이었고, 경주와 부여, 강화도 등은 전통문화유적을 견학하기 위한 곳이었다.

 

경성과 평양, 개성과 수원과 인천 등은 일제의 근대시설/신문물과 조선의 역사유적/전통미가 공존하는 곳이었으므로 선호되었다. 1920년대에 실시된 273건의 수학여행 목적지 중에서 경성(46)과 평양(45)이 가장 많았고, 그 뒤로 인천(36), 개성(28), 진남포(17), 수원(15), 신의주(13), 강화(12)의 순서로 나타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총독부가 학무국과 각 도장관을 통해 수학여행을 통제할 때 일제가 건설한 근대문물을 강조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낙후된 조선을 일제가 근대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면서 체제 우월성과 침략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전통문화 유적지가 수학여행지로 선정된 경우에는 통제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일제는 삼국시대 이래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영향이 계속되어 왔다는, 이른바 식민사관을 주입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이를 유적지의 해설 형태로 학생들에게 주입했던 것이다.

 

일제의 수학여행 내용통제는 효과가 있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특히 어린 학생들은 조선의 역사보다는 일제의 문물에 감탄하기 쉬웠을 것이고, 일제의 식민사관에 더 쉽게 물들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일부 학생들은 수학여행 후에 민족의식이나 반일의식이 강화되기도 했다.

 

1920년 개성 수학여행을 다녀온 보성학교 황학동(黃鶴東)은 개성의 인삼실업기관을 견학한 후 일제의 식민지 경제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는가 하면, 1921년 강화도 수학여행을 갔던 보성학교의 박달성(朴達成)은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상황을 언급하면서 금일의 경우를 직접 초래한 것이 강화에 있음을 절실히 기억할 때 우리의 가슴이 얼마나 아프겠는가고 개탄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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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인천 무용공연을 살피기에 앞서 19225월에 있었던 숙명여학교의 인천 수학여행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당시 숙명여고보 1학년생이었던 최승희가 이 수학여행에 참가했기 때문이지만, 이를 통해 1920-30년대의 인천의 모습, 경성 시민들이 주변 도시들을 여행하던 유형에 대해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이 수학여행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경성사립숙명여학교 고등과 학생 183명과 초등과 생도 333명은 직원15인의 인솔 하에 지난 26일 상오1135분 도착 열차로 래인(來仁, 인천을 방문)하여 시가(市街)와 동,서공원, 그리고 관측소와 축항(築港) 및 기타 여러 곳을 순람(巡覽=차례로 관람)하고 당일 하오615분 인천역발() 열차로 귀교하였다더라. (인천)”(<동아일보>, 1922529, 4)

 

사진도 없는 단신이지만 압축적이고 밀도 높은 기사이다. 이 보도 내용을 잘 살피면 당시의 숙명여학교, 경인선 기차 운행, 인천의 관광명소와 산업시설 등에 대해 소상히 알 수 있다.

 

 

우선 이 기사에서는 수학여행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런 식의 학생 여행은 1910년대부터 수학여행이라고 불렸다. 교동(校洞)보통학교는 오늘(=19101016) 인천으로 수학여행 한다더라(<매일신보>, 19101016, 27)는 신문 보도가 있었고, 숙명여학교에서는 직원과 생도 일동 89명이 수학여행하기 위하여 지난 (19141)10일에 수원으로 내려갔더라(<매일신보>, 1914111, 3)>는 기사도 발견된다.

 

1920년대에 들어서도 <매일신보>경성여고보 고등과 학생들이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갔(19201013, 3)고 보도했고, <동아일보>경성전수학교 직원과 생도 150명이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갔다(1921429, 4)는 기사를 냈다. 1932<부산일보>경성의 숙명여학교 생도 1,2,3학년 3백여명은 수학여행을 위해 512일 개성에 가서 전매국 출장소의 인삼 상황 등 여러 명소와 구적(舊蹟)을 견학했다(1932514, 6)고 보도했다.

 

이 기사들로 미루어 볼 때 1910년대부터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다른 도시로 견학을 가는 여행은 당일에 돌아오는 경우에라도 수학여행이라고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1920년대에는 3학년 학생들을 일본이나 만주로 일주일씩 수학여행을 보냈던 적도 있는 것을 보면 숙명여학교가 각 학년 혹은 전학년 학생들을 적어도 연1회 이상 다양한 형태의 수학여행에 참여하도록 주선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위의 기사들을 통해 우리는 숙명여학교가 수원(1914)과 인천(1922)과 개성(1932) 등을 자주 수학여행의 대상지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도시들은 모두 경성에서 가깝고, 철도로 접근 가능할 뿐 아니라, 역사적 유적이나 근대적 산업시설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같은 도시 안에서 소풍을 가는 것은 원족(遠足)’이라고 불렸다. <매일신보(19101016, 2)>사범학교 직원과 학생 일동은 어제(=1015) 창의문(彰義門) 밖으로 평야원족회(平野遠足會)를 행하였다고 보도했는데, 이처럼 경성의 학생들이 경성 내 혹은 교외지역으로 가는 짧은 여행을 원족이라고 불렀다. ‘원족이란 일본에서 유래한 용어로 먼 발걸음이라는 뜻이므로 주로 도보여행을 가리켰지만, 학생들은 전차나 버스를 타기도 했다.

 

 

숙명여학생들이 자주 갔던 원족 대상지는 우이동과 효창원 등이었다. 숙명여학교의 우이동 원족은 <매일신보(1913429, 5)>경성 중부 박동 사립숙명고등여학교 생도 136명은 교사가 거느리고 어제(1913428) 오전 830분 남대문을 떠나는 기차로 운동 겸 사쿠라 구경을 위하여 동소문밖 우이동으로 향하여 갔다더라고 보도한바 있었다.

 

효창원 원족에 대해서도 <매일신보(192154, 3)>오늘 4일 오전9시에 시내 사립숙명여학교에서 고등과와 보통과 학생 전부를 교원들이 영솔하고 원족을 가기로 되었다고 전하고, 보통과 1,2학급 생도들은 아직 유치하여 너무 먼 길은 가기 어려움으로 과히 멀지 않은 동물원으로 가게하고, 그 외 보통과 3학년에서부터 고등과 3년급 생도들은 효창원으로 가서 하루 동안 유쾌히 놀고 오후4시 가량 각각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더라고 보도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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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는 그의 40년 무용 경력 동안 인천에서는 단 하루 공연했다. 인천 유일의 최승희 공연은 193012177시반, 인천의 <가무기좌(歌舞伎座, 가부키자)>에서 열렸다.

 

조선의 무용의 화형(花形=스타) 최승희 일행이 금월 20일 인천 가무기좌에서 무용회를 개최하게 되었는데 당일 오후5시부터는 인천시내 학생견학을 위하여 15, 10전에 공개하고 오후7시반부터는 일반에 6040전에 공개하는데, 동아일보 독자에 한해서 60전을 40전에, 40전을 30전에 공개하게 되었다. 최승희 일행의 무용은 보고자 하는 인사도 많은 터이므로 당일에는 상당히 성황을 이루리라 한다.”(동아일보, 19301217:7)

 

 

첫 공연 후 2년쯤 뒤에 최승희는 또 한 번의 인천 공연을 기획했다. 1932520일 오후7시반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제5회 신작발표회가 <인천공회당>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인천] 본보 인천지국 주최로 오는 20일밤 7시반부터 인천공회당에서 최승희무용연구소의 제5회 신작발표회가 개최될 터인데 회원권은 대인50전 학생30전의 2종이다.”(<매일신보>, 1932512, 7)

 

그러나 이 두 번째 공연은 기한 없이 연기되었고, 이후 다시 일정이 잡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취소된 것으로 보인다. 공연이 연기된 이유가 회장(會場) 관계라고 보도됐다.

 

“[인천] 기보=본보 인천지국 주최로 최승희무용연구소의 신작발표회를 오는 20일밤 인천공회당에서 개최하려하였으나 회장(會場) 관계로 무기연기하기로 되었다.”(<매일신보>, 1932514, 7).

 

 

1932년의 공연이 취소된 후 최승희의 공연이 다시 인천에서 열린 적은 없었다. 따라서 193012월의 공연이 최승희의 유일한 인천 공연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최승희의 춤추는 모습이 인천에서 영화로 선보인 적은 있었다. 최승희의 두 번째 극영화이자 무용영화 <대금강산보>193829일 애관에서 상영되었던 것이다.

 

“[인천] 본보 인천지국에서는 구정의 선물로 1만 독자에게 바치고자 반도무희 최승희 여사가 나온 <대금강산보>라는 일활(日活)작품의 영화와 대조(大朝)<뉴쓰>를 무료로 제공하여 하루의 위안을 삼고자 금29일 오전2시반부터 외리 애관(愛館)에서 개최하기로 되었다는데 독자는 무료입장권을 지참하고 정각에 오기를 바란다고 한다.”(<매일신보>, 193829, 6.)

 

해방이 되자 중국 베이징에 머물고 있던 최승희는 인천을 통해 귀국했다. 1946531일의 <동아일보(석간26)>화북에서 출발한 최종 귀환선 2척이 29일 인천에 입항했으나 검역관계로 상륙하지 못하고 정박 중이며 이번에 귀환한 동포 15백여명 중에는 조선이 자랑하는 세계적 무용가 최승희 여사가 승선했다고 전했다. 최승희가 실제로 귀환선에서 하선해 인천에 발을 디딘 것은 그해 63일이었다.(<독립신보>, 194665, 2)

 

 

그밖에도 최승희의 무용 스승 이시이 바쿠는 인천에서 세 차례 공연했다. 공연일은 1926324, 193269, 1937430일이었고, 극장은 모두 <인천공회당>이었다.

 

한편, 최승희는 1922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 재학 중에 인천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해 526일 실시되었던 숙명여학교의 수학여행 때였다. 숙명여학교의 고등과 학생 183명과 초등과 생도 333명이 직원 15명의 인솔아래 26일 상오 1135분 도착 열차로 인천에 도착하여 시가와 동,서공원, 그리고 관측소와 축항, 기타 여러 곳을 순람하고 당일 하오615분 인천역을 출발하는 열차로 귀교했던 것이다.(<동아일보>, 1922529, 4).

 

이상이 언론에 보도된 최승희와 인천의 인연이다. 그가 인천에서 다른 소규모 무용 활동이나 여가 시간을 보냈을 수는 있겠지만, 신문과 잡지에 보도된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이글에서는 최승희의 인천 공연을 중심으로 1920년대와 30년대의 인천 상황, 공연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 공연에서 발표된 작품들과 그에 대한 관객의 반응 등을 살펴보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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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공식 생일은 19111124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조선 호적과 일본 외무성 여권발급기록 등의 공문서에는 이 날짜가 생일로 기록되어 있다. 한국 숙명여학교의 학적부와 북한 애국열사릉에 세워진 묘비에도 생년월일은 이 날짜이다.

 

그러나 이 생일이 최승희의 진짜 생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의문이 일었다. 이 생일을 기준으로 했을 때 최승희 자신이 직접 밝힌 나이가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나의 자서전(1936)><최승희 자서전(1937)>에서 19263월 자신이 무용을 시작했을 때의 나이가 (조선식 세는 나이로) 15세였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생일이 양력 19111124일이었다면 19263월의 세는 나이는 16세여야 했다. 또 최승희는 두 자서전에서 결혼 당시 자신의 나이는 (세는 나이로) 20세라고 밝혔지만, 공식 생일을 기준으로 하면 그의 세는 나이는 21세가 되어야 했다.

 

 

최승희의 생일과 나이의 불일치는 외국에서도 자주 발생했다. 1938111일 샌프란시스코 항구에서 작성한 미국 입국서류에 최승희는 자신의 나이를 25세로 기록했지만, 공식 생일을 기준으로 하면 그의 나이는 만26세여야 했다. 19401010일 최승희가 멕시코에 입국하면서 제출한 입국신고서에도 최승희의 나이가 28세라고 적혀 있었지만, 공식 생일인 19111124일을 기준으로 하면 그의 만 나이는 29세여야 했다.

 

심지어 최승희 자신이 생년을 1911년이 아니라 1912년이라고 직접 밝힌 기록도 있다. 최승희가 1939510일자로 발급받은 벨기에 노동허가서와 19401010일자로 제출한 멕시코 입국기록에도 그의 생년이 1912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러한 공식 생일과 나이의 불일치가 해소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19111124일이라는 생일을 음력날짜로 고려하고, 이를 양력날짜인 1912112일로 변환하면 생일과 나이가 완전히 일치하게 된다.

 

당시 조선인들은 생일을 음력날짜로 기억하고 실제 생일은 양력 날짜로 환산해 축하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런 관행은 1960년대나 그 이후에도 꽤 남아서 한국인들 중에는 주민등록상의 생일이 진짜 생일이 아닌 경우가 적지 않다. 최승희도 바로 그런 경우였던 것이다.

 

최승희의 생일이 음력 19111124, 즉 양력으로 1912112일이었다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던 1938111일의 최승희 나이는 만25세가 맞다. 이날은 생일 바로 전날이었으므로 만일 미국 입국이 하루만 늦었다면 최승희는 입국기록의 나이를 26세라고 썼을 것이다.

 

19401010일 최승희가 멕시코에 입국했을 때의 나이도 1912112일을 기준으로 하면 만 28세인 것이 맞다. 이와 함께 멕시코 입국신고서에는 생년을 1912년으로 기록한 것과 브뤼셀에서 발급받은 노동허가증에 생년을 1912년으로 기입한 것도 정확한 기록이다. 다만 브뤼셀 노동허가증에 생월을 ‘5이라고 기록한 것은 1월의 잘못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최승희의 생일로 알려져 온 19111124일이 잘못된 날짜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이 공식문서에 기록된 생일이었고 최승희와 그의 가족들도 이를 의식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승희는 공식기록, 즉 호적과 학적부, 도항증이나 여권, 이사할 때마다 이전해야 했던 주민등록에는 모두 이 공식 생일을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111124일이 공식 생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진짜 생일이 아니었고, 이 음력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한 1912112일이 진짜 생일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최승희의 생일 파티는 이 날짜에 맞춰 이뤄졌을 것이고, 특히 가족들의 생일상도 이 날짜에 맞춰졌을 것이다.

 

최승희의 진짜 생일이 공식 생일과 다르다고 해서 그의 삶을 연구하거나, 그의 춤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일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탄생 기념일을 지키는 데에는 영향을 줄 수 있다. 예컨대 최승희 탄생 1백주년 기념행사가 2011년에 이뤄졌으나, 그의 진짜 생일을 기준으로 한다면 2012년이어야 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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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16세의 일기><이즈의 무희>가 최승희의 도쿄 공연 활동과 맞물려 <16세 최승희> 신화를 영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면, 프랑스에서는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의 조각 작품 <14세의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 1881)>는 최승희의 파리 공연에 즈음해 <14세 최승희> 신화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는 19381월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시작으로 세계 순회공연을 시작했으나 그의 국적과 민족정체성 문제로 미국 공연은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당시 일제가 중국 침략 전쟁을 시작했고 난징 대학살 소식이 미국과 유럽에 알려졌고, 특히 미국에서는 전국적인 일본상품 배척운동이 벌어져 일본 국적으로 순회공연을 시작한 최승희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미국에서의 실패를 뒤로하고 유럽으로 건너간 최승희는 파리에 도착한 직후부터 국적이나 민족정체성보다는 개인사를 홍보했다. 양반 출신인 그는 유럽에서 귀족 가문으로 홍보되었고, 기생을 천시하던 관행을 무시하고 무용가의 길에 들어선 것으로 인해 최승희는 아시아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칭송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최승희는 파리에서 <14세 무용가>로 소개되었다. 그의 유럽 첫 공연이었던 1939131일의 <살플레옐> 공연의 팜플렛을 보면 2면을 전부 할애해 최승희를 길게 소개한 글이 게재되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극동 최고의 무용가 최승희는 고색창연한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태어나 행복하고 열정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14세에 숙명여고보를 졸업했다. 당시 그는 음악을 공부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교장은 그가 가수가 될 재능이 있음을 알아보고 학교의 장학금으로 도쿄 음악대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지만 나이가 어려 서울에서 1년을 기다려야 했다.”

 

이 소개문은 조선이나 일본, 만주와 중국, 미국에서도 사용되었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최승희가 숙명여고보를 졸업하고 무용을 시작한 나이를 14세라고 명시한 것이다. 불과 3-4년전 일본어판 <나의 자서전(1936)>과 조선어판 <최승희 자서전(1937)>에서 최승희는 당시 자신의 나이가 15세였다고 밝힌 바 있었다. 어째서 프랑스에서는 14세라고 했던 것일까?

 

 

유럽식 만 나이를 계산했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생일이 19111124일이었다면 19263월의 나이는 만14(+4개월)이다. 이 생일이 음력날짜였다고 하더라도 실제 생일은 1912112일이 되므로 여학교 졸업 당시의 나이는 여전히 만14(+2개월반)이었다. 따라서 파리 공연 팜플렛에 그의 나이를 14세라고 쓴 것은 유럽식으로 정확한 나이 기술이었던 셈이다.

 

16세 여성과 14세 여성은 어감이 대단히 다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16세의 여성은 과년(瓜年) 혹은 과년(過年)이라며 성인 대접을 했지만, 14세라면 누구나 소녀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왜 파리에서 <14세 무용가>라는 표현을 두드러지게 사용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당시 파리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었던 드가의 소조작품 <14세의 어린 무용수>와 연관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무희를 작품 소재로 삼았던 드가는 유화와 드로잉 작품을 다수 남겼지만, 생전에 조각 작품을 전시회에 출품했던 것은 <14세의 어린 무용수> 하나뿐이었다.

 

 

이 작품이 1881년 파리에서 열린 제6회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되었을 때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았다. 이 조각품의 모습은 그리 아름답지도 않았고, 이 작품의 모델이었던 14세 소녀 마리 반 구뎀(Marie van Goethem)도 벨기에 출신의 하류계층 무용수였기 때문이다. 당시 파리에서도 무용수는 창녀와 별반 다름없이 취급되는 천한 직업이었다. 비평가들은 예술의 전당에 아즈텍 인디언을 들여놓았다며 인종차별적 비평도 서슴지 않았다.

 

실망하고 분노한 드가는 전시회가 끝난 후 <14세의 어린 무용수>를 작업실에 옮겨와 처박아 두고, 두 번 다시 전시회에 내놓지 않았다. 1917년 드가가 사망한 후 <14세의 어린 무용수>는 다시 빛을 보았고, 1931년에는 오르세 미술관에 영구 전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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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16세 최승희> 신화가 지속되었던 것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가 집필한 세 개의 글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그가 <문예(193411월호)>에 기고한 무희 최승희론(舞姬崔承喜論),” 둘째는 1925년에 발표한 실록 단편 <16세의 일기(十六歳日記)>, 셋째는 1926년에 발표한 그의 초기 대표작 <이즈의 무희(伊豆踊子)>.

 

<무희 최승희론(1934)>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최승희를 일본일(日本一) 무용가라고 선언했다. 일본 최고라는 말이다. 최승희는 3(1929-1933)의 경성 활동을 접고 스승 이시이 바쿠에게 돌아와 1934920일 도쿄에서 첫 공연을 가졌는데, 이 공연을 관람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곧바로 <무희 최승희론>을 집필해 <문예>지에 기고하면서 최승희를 극찬한 것이다.

 

 

<무희 최승희론>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6세 최승희>3번 언급했다. 같은 글에서 같은 표현을 여러 번 서술한 것은 강조의 뜻임에 틀림없지만, 3번이나 서술한 것은 지나쳐 보인다. 그가 무리해 가면서 최승희의 ‘16세 신화를 강조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대답의 일부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단편소설 <16세의 일기(1925)>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자신이 16세 시절 그의 할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는 과정을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형상화된 소설이다. 이 작품은 19258-9월호 <문예춘추><17세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2회로 나뉘어 발표되었지만, 1927년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당시 자신의 나이가 16세였음을 밝히면서 작품의 제목도 <16세의 일기>로 바꾸었다.

 

<16세의 일기>의 저술 배경을 생각하면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최승희를 만났을 때, 인생의 비슷한 시기에 최승희가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아버지가 의사였던 부유한 집에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부모와 조부모, 여동생을 차례로 잃고 16세에 천애 고아가 되었지만 글쓰기에 매달려 험한 세상을 헤쳐 왔다.

 

최승희도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몰락한 채 빈곤 속에서 여학교를 졸업했으나 진로를 찾지 못하던 중, 16세의 나이에 발견한 무용에 매달려 낯선 일본 땅으로 건너와 인생을 개척 중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즈의 무희(1926)>는 그 내용과 발표 시기의 양면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최승희의 삶과 춤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는 계기를 주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시즈오카현의 오지 이즈(伊豆) 지방에서 유랑하던 천민 무희에게 사랑을 느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되었다. 무희에 대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우호적 정서는 일본 제국의 변방 조선에서 온 <반도의 무희> 최승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즈의 무희>가 발표된 것은 <문예시대(文藝時代)> 19261월호와 2월호였다. 이 작품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초기 대표작으로 평론가와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고, 1년만인 1927320일 단행본으로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작품집에는 <16세의 일기>도 수록되었다.

 

따라서 최승희가 처음 일본에 도착했던 19264월은 혜성처럼 등장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16세의 일기>가 일본 독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시기였던 것이다. 이는 마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이 최승희의 등장을 예고하는 듯이 보였다.

 

 

또 최승희가 19333월 두 번째로 일본에 건너가 공연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보다 한 달 전인 19332, 쇼치쿠 영화사가 <이즈의 무희>를 영화화하여 개봉했다. 소설 <이즈의 무희>와 영화 <이즈의 무희>는 두 번에 걸친 최승희의 일본 활동 시작 시기와 일치했던 것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최승희가 어린 시절에 비슷한 경험을 했고, 최승희의 공연 활동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 발표가 시기적으로 일치했던 것은 아마도 우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중첩된 우연을 통해서나마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최승희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특별한 관심과 작품들이 <16세 최승희> 신화를 이어받아 영속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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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16세 최승희신화를 일으키고 유지시킨 최대 공헌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였다. 훗날 <설국(雪國유키구니, 1937)> 등의 작품으로 일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1968)한 문호이자, 지금도 일본인들이 애호하는 10대 작가의 한 사람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30년대에도 이미 다수의 화제작을 발표한 주목받는 작가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1934년 일본 종합문예지 <문예(文藝)> 11월호에 실린 무희 최승희론(舞姬崔承喜論)”이라는 기고문에서 최승희는 ... 여류 신진무용가 중에 일본일(日本一)”이라고 선언했다. 글 중에서 자신은 작가이지 무용 전문가는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일찍부터 무용에 관심이 많았고, <이즈의 무희><무희> 등의 무용과 관련된 작품을 다수 발표해 주목을 받은 바 있었다.

 

일본일 작가에 의해 일본일의 무용가로 지목되었으니 일본 문화계가 최승희에게 주목했던 것은 당연했다. 최승희의 1930년대 중반 인기 급부상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일본일평가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승희의 성공 신화와 함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명성도 함께 올라갔을 테니 두 사람의 서로 칭찬하기는 대단히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예>무희 최승희론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일본일 무용가선언으로 유명해진 글이지만 그 글이 ‘16세 최승희신화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은 그동안 지적되지 않았다. 4쪽 분량의 이 기고문에는 최승희가 무용을 시작했을 당시의 나이가 16세였음을 지적하는 내용이 무려 세 번이나 등장한다.

 

경성의 여학생인 최승희는 성악가로서 출세하고자 하였고,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4년제 여학교를 졸업하고도 16세였던 까닭에 나이가 어려서 음악학교의 시험을 치를 수 없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무희최승희론,” <문예>, 193411월호, 155)

 

최승희가 오빠에게 이끌려서 입문하겠다고 이시이씨를 찾아왔을 때는 여학교 졸업 후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흑백의 조선 여학생복을 입은’ 16세의 그는 곧 이시이씨와 함께 출발하게 되었는데 기차의 창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마주 하며 얼굴을 창에 내놓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무희최승희론,” <문예>, 193411월호, 155)

 

걸작 <에헤야노아라>와 같은 것은 일본의 <갓보레>와 같은 춤인데 술자리의 여흥으로 추는 춤에서 아버지의 그 춤을 보고 창작한 것이라고 한다. 8년 전에 16세라면 그는 아직도 너무 젊다. 천부의 체구와 재분을 충분히 펼 수 있는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무희최승희론,” <문예>, 193411월호, 157)

 

 

무희 최승희론은 문예 193411월호 153-158쪽의 6쪽이 걸친 기고문이지만 첫 쪽과 마지막 쪽은 1-2행의 짜투리에 불과하므로 실제로는 4쪽짜리 글이다. 그 짧은 글에서 최승희는 16라는 표현이 3번이나 사용된 것이다. 이는, 의식적 결과이든 무의식적인 실수이든, 작가에게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가 16세라는 나이에 집착했던 데에는 까닭이 있었던 것일까?

 

거기에는 고개를 끄덕일만한 사연이 있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어린 시절에 모든 가족을 잃었다. 1899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1901년에 아버지, 1902년에 어머니를 잃었다. 1906년에는 할머니를 잃었고 1909년에는 누나가 죽었다. 1912년 이바라키 중학교에 수석 입학했으나 1914년 할아버지마저 사망했다. 천애 고아가 되었을 때 그의 나이가 16세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바라키 중학교 시절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를 잃었던 상황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했고, 이를 <17세의 일기>라는 단편소설로 만들어 <문예춘추> 19258월호와 9월호에 나누어 발표했다.

 

그러나 할아버지 사망 당시 자신의 나이가 만으로 14, 세는 나이가 16세였다는 점을 깨달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27년 단행본 <이즈의 무희(伊豆踊子, 1927)>에 이 작품을 포함시키면서 제목을 <16세의 일기>로 바꾸었고, 지금까지 그 제목으로 전해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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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가 16세에 무용을 시작했다는 이른바 ‘16세 최승희신화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이내 중단되었지만 일본에서는 80년 이상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최승희와 가깝고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네 사람의 역할을 컸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첫째는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이다. 192615세였던 최승희의 나이를 16세라고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이 그였다. <경성일보>의 테라다 토시오 학예부장에게 소개장을 부탁하면서 여동생의 나이를 한 살 올려 말한 것이 발단이었다. 최승희는 <나의 자서전(1936)><최승희 자서전(1937)>에서야 당시 자신의 나이는 세는 나이로 15세였음을 밝혔다.

 

최승일이 여동생의 나이를 16세라고 말한 이유는 밝혀진 바 없다. 특히 이시이 바쿠가 <경성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2-15세의 조선인 여성을 제자로 데려가고 싶다고 발표한 터여서, 최승일이 이시이 바쿠의 연령 제한을 어겨 가면서, 세는 나이로 15, 만나이로 14세였던 최승희의 나이를 일부로 한두 살 높인 것은 더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필자는 작가 최승일이 조선 여성의 가장 꽃다운 나이로 알려진 16세를 동생의 나이로 제시했던 것이며, 이는 춘향의 나이 16세와도 관련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보았다. 그러나 문학적 상상력을 제외하고는 그에 대한 객관적 증거는 전혀 없는 셈이다.

 

둘째는 <경성일보>의 학예부장 테라다 토시오(寺田壽夫, 1892-?)였다. 그는 ‘16세 최승희신화를 최초로 신문에 보도했고, 그것이 적어도 10년 이상 지속되도록 했던 장본인이었다. 그는 1926325일자 <경성일보>‘16세 최승희신화를 처음 보도했고,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1937년 총독부의 행정잡지 <조선행정(朝鮮行政)> 4월호에 기고한 무희 최승희론(舞姬崔承喜論)”에서 다음과 같이 ‘16세 최승희신화를 반복했다.

 

최승희는 올해 26세이다. 그러니까 벌써 11년이나 전의 이야기다. 그녀가 16세의 젊은 나이에 숙명여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 봄, 이시이 바쿠가 경성에서 첫 번째 공연을 가졌다. 당시 나는 경성일보에 있으면서 연예계 일을 맡고 있었고, 또 이시이 바쿠의 매니저와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기 때문에 이시이 바쿠의 공연에도 후원자의 마음으로 구경을 갔다.”

 

 

이 인용문은 자연스럽게 읽힐지 모르지만 그 안에 산술적 오산이 포함돼 있다. 19374월 현재 최승희가 26세였다면, 11년 전인 1926년의 나이는 15세가 되어야 맞다. 그런데 테라다 토시오는 최승희가 “11년이나 전 ... 16세의 젊은 나이였다고 했다. 잘못된 계산이었지만 버젓이 활자화되었고, 그 뒤로도 바로잡히지 않은 채 ‘16세 최승희신화가 계속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셋째는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였다. 그는 자전적 에세이집 <나의 얼굴(1940:31)>에 실린 최승희와 조택원이라는 글에서 최승희와 처음 만났던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경성의 공회당 공연은 분명 그 이듬해 4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당시 경성일보 학예부장을 지내셨던 테라다 히데오(寺田壽夫)씨의 소개장을 가지고, 나의 공연 대기실을 방문한 두 남매가 있었다. 오빠 승일군은 자기 여동생을 어떻게든 무용수로 만들고 싶다면서. 제발 거두어 주기를 청했다. 그 여동생은 말할 것도 없이 지금의 최승희이지만, 그 무렵의 최승희는 숙명여학교를 졸업했다고는 하나 아직 열여섯 살의 작은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이시이 바쿠의 자서전 <춤추는 바보(1955:116)>에도 전재되어 있다. 따라서 이시이 바쿠는 ‘16세 최승희신화를 1950년대까지 연장시킨 장본인이었던 셈이다.

 

한편 이시이 바쿠의 아내 이시이 야예코(石井八重子)<최승희 팜플렛 제1>에 실은 기고문 생각날 때마다 보고 싶은 최승희에서 최승희씨는 서울의 명문 여학교인 숙명을 그 해에 졸업한 착하고 귀여운 열다섯 살의 소녀였다고 서술한 바 있다.

 

아내 야예코가 제대로 알고 있던 최승희의 나이를 이시이 바쿠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도 이상하지만, 그가 최승희의 잘못된 나이를 계속해서 밀고 나갔던 것도 신기한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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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일의 제보와 테라다 토시오의 보도로 <경성일보>에서 시작된 ‘16세 최승희신화는, ‘16세 춘향이의 후광에 편승해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리 큰 영향력도 없었고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조선의 민족지들은 최승희의 초기 무용 활동에 침묵했었고, 최승희가 자서전을 통해 당시 나이를 ‘15로 바로잡은 후 ‘16세 최승희신화는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16세 최승희신화는 조선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내 일본으로 옮겨졌고 오래 지속되었다. ‘16세 최승희신화를 가장 먼저 보도한 것이 조선의 일본어 신문 <경성일보>였지만, 같은 해 615일자 일본의 일간지 <도쿄니치니치(東京日日)신문>730일자 <야마토(やまと신문>에 의해 반복되었다.

 

192999일자 <도쿄니치니치신문>‘16세 최승희신화를 바탕으로 당시 최승희의 나이를 19세로 보도했고, 이는 일본의 대표적 문예지 <문예(文藝)> 193411월호에서도 반복되었다. 1935년에는 잡지 <실업의 세계(實業世界, 10월호)><부인구락부(婦人俱樂部, 3월호)‘16세 최승희신화를 이어갔고, 1937년에는 일본과 조선에서 널리 읽혔던 잡지 <조선행정(朝鮮行政, 4월호)>에서도 최승희가 16세에 무용을 시작했다는 서술이 계속되었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일본의 여성잡지 <부인공론(婦人公論)> 19358월호가 무용 시작 당시 최승희의 나이가 14세였다고 서술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기사 제목은 나의 자서전(自敍傳)”으로 최승희가 직접 집필해 기고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최승희는 당시 나는 (만으로) 14세였다고 밝혔는데도 일본 매체들은 “16세 최승희의 신화를 이어간 것이다.

 

또 다른 예외는 있었다면 최승희의 일본어 단행본 자서전 <나의 자서전(1936)>이었다. 도쿄에서 출판된 이 자서전에서 최승희는 무용 시작 당시 자신의 나이가 15세였다고 서술했다. <부인구락부>나의 자서전과 단행본 <나의 자서전>에서 같은 시기의 나이를 다르게 서술한 것은 만 나이(14)’연 나이(15)’의 차이였을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다른 문헌, 예컨대 경성에서 조선어로 출판된 <최승희 자서전(1937)>에 따르면 최승희는 자신이 19263월에 15세였다고 서술하면서, 이 나이가 조선식 세는 나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따라서, 최승희 자신의 기록에 착오가 없다면, 최승희의 생일은 이미 알려진 것과는 다른 날짜였을 가능성도 제기될 수 있다. 이 점은 후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만 나이가 표준이었던 일본에서 사실과 다른 ‘16세 최승희신화가 이렇게 오래 계속된 것은 이상한 일이다. 최승희가 19264월 이시이 바쿠 무용단에 입단하면서 그의 생년월일을 제대로 보고했다면, 그것이 음력 19111124일이든 양력 1912112일이었든, 그의 나이는 ‘14로 수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16세 최승희신화가 계속되었다.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는 1940년에 발행한 그의 자전적 에세이집에서 그 무렵의 최승희는 숙명여학교를 졸업했다고는 하나 아직 열여섯 살의 작은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고 기술했고 (<나의 얼굴>, 1940:30), 이는 1955년에 출판된 다른 자서전 <춤추는 바보(1955:116)>에서도 반복되었다.

 

다카시마 유자부로는 1959년에 최초의 최승희 단행본 평전을 발간하면서 이시이 바쿠의 회상을 그대로 인용했고(다카시마 유자부로, <최승희>, 1981(1959):19), 이는 재일동포 평전자 김찬정의 평전 <춤꾼 최승희(2003:34)>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최근에는 미도리카와 준의 평전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생애(2006:74)>에서도 서울공회당에서 공연할 때 최승희라는 여학교를 갓 졸업한 16세의 조선소녀가 입문했다고 서술했고, 이현준의 저서 <동양을 춤추는 최승희(2019:407)><경성일보>와 이시이 바쿠의 회상을 인용해,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를 처음 만났을 때의 나이가 16세였다고 서술했다.

 

일본에서는 최승희 본인이 자서전과 기고문을 통해 당시 나는 16세가 아니었다고 거듭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16세 최승희의 신화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왜 그랬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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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일의 제보와 테라다 토시오의 보도로 시작된 ‘16세 최승희신화는 효과가 있었을까? 아마도 그러한 효과는 없었던 것 같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지속 기간은 길지 않았던 것 같다.

 

우선 <동아일보><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시대일보> 등의 민족 일간지들에는 최승희에 대한 초기 보도가 없었다. 그의 무용유학을 보도한 것은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매일신보>뿐이었다. 일본어 신문 <조선신문><부산일보>에도 최승희 기사는 없었다.

 

 

민족지 <동아일보>가 처음 최승희의 무용 공연을 보도한 것은 지난 19271026일이었는데, 이는 최승희가 19263월말 일본 무용유학을 떠난 이후 1년 반만이었다. 그동안 <동아일보>는 최승희에 관한 기사를 단 1건도 보도하지 않았다. <조선일보>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일보>가 최승희를 처음 보도한 것은 19271027일이었다.

 

특히 <조선일보>는 그보다 2달 전인 1927814일 이시이 바쿠의 제자였던 강홍식(姜弘植)과 한병룡(韓炳龍)을 언급한 기사를 냈지만, 그 당시에 이시이 바쿠의 제자로 연수 중이던 최승희를 언급하지 않았다. 1027일의 기사도 최승희 관련 기사가 아니라 숙명-진명-양정학교의 연합 동창회인 양명회 간친회 행사의 공짖 기사였다. 최승희가 그 행사에 출연한다는 내용이 단 한 줄이 맨 끝에 덧붙여져 있을 뿐이었다.

 

, 최승희의 초기 무용 유학에 대해 민족지들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경성일보><매일신보>19266월의 최승희 초무대, 19269월의 가을 공연과 이후 홋카이도 순회공연, 1927년의 봄 공연과 규슈 및 오키나와 지방공연 등을 보도했을 때에도 조선어 민족지들은 이를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조선어 민족지들이 192710월에 이시이 바쿠 경성 공연을 보도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최승희의 나이를 보도한 적이 없었다. 이는 총독부 기관지들과 다른 일본어 신문들 때문에 최승희가 이미 경성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 <경성일보><매일신보>, 라디오 방송인 <경성방송>, 그리고 <조선신문><부산일보>의 보도로 최승희는 이미 조선에서는 일정한 유명세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최승희의 나이가 처음 보도된 것은 192999일자 <중외일보>였다. 귀국 직후 옥천동 소재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 기사 말미에 그의 당시 나이가 19세라고 덧붙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에도 무용 유학 시작 당시 ‘16세 최승희신화는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19299월의 나이가 19세였다면, 19263월의 나이가 16세였을 것으로 추론할 수는 있게 했다.

 

최승희가 두 번째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을 때 조선의 매체들도 덩달아 최승희에 대한 전기적 기사들을 내기 시작했다. 그 첫 기사는 조선의 여성잡지 <여성>19343월호(24)에 실린 인터뷰 기사였는데, 그 첫머리에 “16세 최승희가 언급됐다.

 

 

열여섯 살에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오빠가 동경 가서 무용을 공부하라고 하시길래, 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 불안과 공포에 떠는 가슴을 안고 현해탄을 건너던 일이 어제 같은데 벌써 12년이 되었습니다.” (<여성>, 19343월호, 75)

 

하지만, 같은 시기에 발행된 종합잡지 <조선중앙(19343월호)>는 무용 시작 당시 최승희의 나이는 15세였다고 보도했다.

 

“1926년 이른 봄 최양의 나이 겨우 열다섯이 되어서 숙명여고를 마치던 해이다.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그는 좁은 가슴을 태워가며 졸업 후의 일을 걱정하였다.” (<조선중앙> 19343월호, 101)

 

<조선중앙>은 최승희의 여학교 졸업 및 무용 시작 시기의 나이가 16세가 아니라 15세였음을 밝혔는데, 이는 최승희로부터 직접 취재한 결과였음에 틀림없다. 이 같은 사정으로 보아 조선에서는 최승일의 의도와는 달리 ‘16세 최승희의 신화가 그다지 작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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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큰 오빠 최승일이 여동생의 나이를 1살 올려서 <경성일보> 취재에 응한 것은 고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세는 나이로 15세였던 최승희를 16세라고 전했던 것은 실수나 착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01년에 태어난 최승일은 최승희가 태어났을 때 이미 10세 내외의 나이로 보통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그 나이면 막내 동생이 태어난 시기를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최승일은 남동생 최승오나 다른 여동생 최영희보다 막내 최승희와 가장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승희도 큰 오빠 최승일을 마치 제2의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했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에 생일이나 나이를 잘못 기억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최승일은 최승희를 이시이 바쿠에게 소개하기 위해 <경성일보> 학예부장 테라다 토시오와 처음 만났을 때 무용가로 나서려는 여동생의 나이를 ‘16라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문학적 패러디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최승일은 문인이었다. 19246월호 <신여성>에 단편 아내떠나가는 날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고, “김첨지의 죽음”(<매일신보>, 1924127일자), “바둑이”(<개벽>, 19262월호), “봉희(鳳姬)”(<개벽>, 19264월호) 등의 작가였고, 사회주의 계열의 문학예술인 단체에서 활동했다. 당시 조선의 문화예술인 써클에서는 여성의 가장 꽃다운 나이16세로 정형화되어 있었다. 16세 여성에게 그런 수식어가 붙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전통적으로 여성의 16세는 성년으로 인식되었다. 남성은 15세에 상투를 틀고 갓을 쓰는 관례(冠禮)를 치렀고, 여성도 땋은 머리를 쪽지고 비녀를 꽂는 계례(筓禮)를 행했다. 그래서 16세의 여성은 소녀티를 벗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고전 국문학과 한문학에서도 여성의 16세를 과년(瓜年)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여성이 혼기에 이르렀다는 말이었다. ‘오이 과()’자를 쓴 데에는 해학과 퍼즐이 담겨 있다. 오이 과()자를 파자(破字)하면 여덟 팔()자가 2개 나오는데, 이를 합치면 16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의 16세를 파과지년(破瓜之年)이라고 불렀다. (한편 파과지년은 64세의 남성에게도 쓰이곤 했는데, 이는 팔을 두 번 곱하면 64세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 조선 민중문학의 대표작의 하나였던 판소리 <열녀춘향수절가>의 주인공 춘향의 작중 나이가 16세였다. 조선 문학에서 가장 아름답고, 재주가 출중하고, 정절이 높은 최고의 여성상으로서 그려진 춘향이 이몽룡을 만났을 때의 나이가 16세였던 것이다. 완판본 <열녀춘향수절가>에 따르면 춘향과 몽룡은 합방 첫날밤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도령 하는 말이, ‘성현(聖賢)도 불취동성(不取同姓)이라 일렀으니 네 성은 무엇이며 나이는 몇 살이뇨?’ ‘성은 성()가옵고 연세(年歲)는 십육 세로소이다.’ 이도령 거동 보소. ‘허허 그 말 반갑도다. 네 연세 들어보니 나와 동갑 이팔이라.’”

 

춘향이 나이가 16세라고 대답하자 몽룡은 나와 동갑 이팔(二八)”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이팔이란 두()개의 팔(), 16세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이팔청춘(二八靑春)이다. 두 사람 모두 파과지년이자 이팔청춘이었던 것이다.

 

이몽룡이 16세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만, 춘향이 16세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날 밤 두 사람이 벌인 춘사는 요즘의 포르노 영화에 못지않은데, 조선 시대의 16세 여성은 그런 성적 자세와 입담이 가능하도록 무르익은 나이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때마침 <춘향전>은 이광수에 의해 현대소설로 개작되어 <일설춘향전(一說春香傳)>이라는 제목으로 1925930일부터 192613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고, 이내 단행본으로도 출판되었다. 최승희가 숙명여학교를 졸업할 무렵 이광수의 <일설춘향전>이 경성에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최승일이 여동생 최승희의 나이를 묻는 테라다 토시오에게 ‘16라고 대답했던 것은 아마도 문사 최승일의 뇌리에 박혀있던, 춘향을 전형으로 하는 16세 여성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이는 또 무엇을 해도 충분한 성숙한 나이라는 뜻이기도 해서 무용을 시작하는 최승희의 나이로 묘사되기에 적합하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이렇게 보도된 ‘16세 최승희‘16세 춘향이의 이미지와 함께 조선 사회에 손쉽고 빠르게 퍼질 수 있었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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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을 시작했을 당시의 최승희 나이가 세는 나이15세였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오빠 최승일은 어째서 16세였다고 말했던 것일까? 최승희의 나이가 최초로 언론에 공개된 것은 1926325일의 <경성일보>였다.

 

조선 예찬자 이시이 바쿠씨가 이번 조선 방문을 기회로 조선 소녀를 제자로 얻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 일행이 경성 제3회 공연을 끝낸 23일 밤10시경 공회당의 이시이씨 일행의 대기실을 찾아와 제자가 되고 싶다고 부탁한 아름다운 조선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경성)부내 체부동 137번지 최준현씨의 영양(令孃) 최승희(崔承喜, 16)였다.”

 

<경성일보>는 최승희의 나이가 16세였던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 취재원은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이었다. 최승일은 1926321일 경성도서관에서 막 배달된 <경성일보>를 읽으면서 3면에 실린 이시이 인터뷰를 읽었다. 이 기사에는 이시이 바쿠가 “12-15세 사이의 조선인 여성 제자를 찾아내고 싶다고 말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의 여동생을 무용가로 키워야겠다고 마음먹은 최승일은 다음날 (아마도) 오전에 <경성일보>를 찾아가 학예부장 테라다 토시오를 만났다. 당시 최승일은 <경성방송국>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성일보를 방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당시 <경성일보><경성방송국>은 같은 건물에 자리잡고 있었다.

 

최승일이 테라다 토시오를 찾아가 만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같은 언론계 종사자일 뿐 아니라 당시 최승일은 일본대학 유학을 다녀온 인텔리로서 소설 작품도 여러 편 발표한 청년 문사였기 때문이다. 문인과 학자와 예술가들을 잘 알고 있어야 했던 학예부장으로서 테라다 토시오는 이미 최승일과 아는 사이였을 가능성도 높다.

 

이 만남의 자리에서 최승일은 자신의 여동생이 이시이 바쿠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고 부탁했을 것이고, 테라다 토시오에게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이미 이시이 바쿠를 아는 사이였고, 이시이 바쿠의 첫 경성공연을 후원한 것이 바로 <경성일보> 학예부였기 때문이다. 최승일은 최승희를 이시이 바쿠에게 소개하기 위한 최적임자를 찾아갔던 것이다. 최승일의 요청에 따라 테라다 토시오는 이시이 바쿠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써주었다.

 

 

최승일이 최승희를 대동하고 이시이 바쿠를 찾아갔던 323일 밤, 테라다 토시오는 이시이 바쿠의 부탁으로 최승희를 직접 면접하기도 했다. 경성공회당 지하층에 마련된 식당에서 두 남매와 자리를 마주한 테라다 토시오는 최승희의 가족과 성장배경에서 여학교를 졸업한 사정, 그리고 무용을 시작하려는 이유와 포부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면접을 했었고, 이시이 바쿠에게 긍정적인 보고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시이 바쿠가 최승희를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한 결정을 가장 먼저 안 것도 테라다 토시오였다. 그는 이시이 바쿠와 최승희의 소개자였을 뿐 아니라 <경성일보>의 학예부장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시이 바쿠가 조선인 제자를 받아들였다는 새로운 뉴스를 보도하기로 결정했고, 결국 그 기사가 325일자 <경성일보>에 실린 것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당시 최승희가 16세였다는 점을 처음 보도한 사람은 테라다 토시오였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최초의 정보를 제공한 사람은 오빠 최승일이었음에도 틀림없다. 그리고 ‘16세 최승희의 정보가 최승일로부터 테라다 토시오에게로 건너간 것은 소개장이 전달된 322일이거나 혹은 테라다 토시오가 이시이 바쿠를 대신해 최승희를 면접했던 323일 밤이었을 것이다.

 

최승희가 당시 조선식 세는 나이15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승일이 테라다 토시오에게 16세라고 전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 점은 아직도 의문이다. 특히 321일자 <경성일보>의 인터뷰 기사에 이시이 바쿠가 “12-15세 사이의 조선인 여성 제자를 찾아내고 싶다고 한 나이 조건을 읽고도 최승일이 최승희의 나이를 16세로 한 살 올린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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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는 자서전에서 여학교 졸업 당시 자신의 나이가 15세였다고 말했다. 그는 두 권의 자서전에서 5회 이상 일관적으로 자신의 나이가 15세였다고 서술했으므로 그것은 사실일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때의 15세가 만 나이연 나이세는 나이중에서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는지는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결혼 당시 최승희와 안막의 나이가 동시에 언급된 같은 자서전의 서술을 검토하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나의 자서전(1936)>의 해당 기록은 다음과 같다.

 

번잡하지 않게 세비루를 입은 신랑과 간단한 스포츠복을 입은 신부는 트렁크를 하나씩 든 간단한 차림으로 석왕사로 밀월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 그것이 쇼와7(=1932), 내가 스무 살, 안막이 스물두 살 되던 봄의 일이었습니다.” (<나의 자서전>, 1936:99-100).

 

 

우선 1932년은 1931년의 잘못이라는 점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 기록에는 결혼 당시 최승희가 20, 안막이 22세였다고 되어 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193159일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생일이 언제였는지에 따라 각 나이는 다음의 6가지로 계산될 수 있다.

 

우선 안막의 경우, 그의 공식 생일(1910418)이 양력 날짜였을 경우 그의 만 나이21(+20), ‘연 나이21, ‘세는 나이22세이다. 그러나 만일 안막의 공식 생일 날짜가 음력이어서 양력날짜로 환산해야 했다면 실제 생일은 1910526일이 되어, 그의 만 나이20(+11개월), ‘연 나이21, ‘세는 나이22세가 된다.

 

최승희의 나이도 비슷한 방법으로 6가지로 정리된다. 최승희의 생일 19111124일이 양력 날짜일 경우 결혼 당시의 만 나이19(+5개월반), ‘연 나이20, ‘세는 나이21세이다. 만일 최승희의 생일 날짜가 음력 날짜였다면 이를 양력 날짜로 환산하면 1912112일이 되고, 최승희의 만 나이19(+4개월), ‘연 나이19, ‘세는 나이20세이다.

 

이상의 각각의 경우에 따른 안막과 최승희의 나이는 다음과 같이 간단한 표로 정리될 수 있다. 이 표에 따르면 최승희의 나이가 20세였던 경우는 19111124일이라는 생일날짜가 양력으로 연 나이이었을 때와 음력으로 세는 나이였을 때였고, 안막의 나이가 22세였던 경우는 191048일이라는 생일날짜가 양력이든 음력이든 세는 나이였을 때였다.

 


공식생일 생일 날짜가 양력인 경우 생일 날짜가 음력인 경우
만 나이 연 나이 세는나이 만 나이 연 나이 세는나이
최승희 1911/11/24 19 20 21 19 19 20
안막 1910/4/18 21 21 22 20 21 22

 

따라서 최승희가 20세인 경우가 두 경우이고 안막의 나이가 22세인 경우가 두 경우이므로, “최승희 20세와 안막 22의 조합은 4가지로 정리된다. (1) 두 사람의 생일이 모두 음력이고 모두 세는 나이를 계산했을 때, (2) 최승희와 안막의 생일 날짜가 모두 양력이지만 최승희는 연 나이,’ 안막은 세는 나이를 계산했을 때, (3) 최승희의 생일은 양력으로 연 나이를 계산하고, 안막의 생일은 음력으로 세는 나이를 계산했을 때, 그리고 (4) 최승희의 생일은 음력으로 세는 나이를 계산하고 안막의 생일은 양력으로 세는 나이를 계산했을 때이다.

 

4가지 경우 중에서 첫 번째(1)의 경우가 가장 사실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인들은 일상생활에서 음력’, 실제로는 태음태양력을 사용했고, 나이계산에는 세는 나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최승희와 안막이 그같은 관습을 따른 것이라면 공식 기록에 나타나는 그들의 실제 생일은 각각 191212(최승희)1910526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승희가 같은 자서전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무용유학을 떠났던 시기의 나이 15세였도 역시 세는 나이였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19263월말에 세는 나이로 15세였다면 그의 생년은 1911년이 아니라 1912년이었을 것임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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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두 자서전은 각각 150쪽 안팎의 분량이지만 거기에는 최승희의 나이가 10회 이상 언급되었다. 더구나 그중에는 상충되는 서술도 등장한다.

 

최승희가 여학교를 졸업하고 무용 유학을 시작했던 당시의 나이에 대한 서술이 특히 그렇다. <나의 자서전(1936)>에서는 당시 나이를 15세로 일관되게 서술했지만, <최승희 자서전(1937)>에는 당시 15세였다는 서술과 함께 16세였다는 기술도 여러 군데 등장했다.

 

그렇지, 그래, 올해 들어가서 2년 후 을종 교원으로 임명이 된다하더라도 나이가 열여덟 살이니 열여덟 먹은 처녀가 어떻게 남의 집 아이들을 가르치니? 다 그만두어라, 승희야.” (<최승희 자서전>, 1937:34)

 

 

이는 오빠 최승일의 말이었다. 최승희가 1926319일 경성사범학교의 면접시험에서 낙방하고 귀가하자 최승일이 여동생을 위로하려고 한 말이다. “2년 후에 18가 된다는 것은 지금 16세라는 뜻이다. 같은 책에서 최승희가 자신은 15세의 어린 소녀였다는 서술과는 다르다. 여학교 졸업 당시 최승희가 15세가 아니라 16세였다는 기술은 같은 책에 2번 더 나온다.

 

경성의 여학생인 최승희는 성악가로서 출세코자 하였었다. 동경음악학교에 입학코자 하였다. 그러나 4년제의 여학교를 졸업하면 16세인 까닭에 음악학교의 수험에는 연령이 어렸던 까닭도 있었다. 그때에 공교롭게 석정막씨의 일행이 경성에서 공연하였다.” (<최승희 자서전>, 1937:78-79).

 

“‘흑백의 조선 여학생복을 입은’ 16세의 그는, 곧 석정씨와 한가지로 출발하게 되었는데기차의 창에서 어머니와 서로 붙들고 얼굴을 창에 내놓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최승희 자서전>, 1937:79-80).

 

최승희가 직접 자신이 15세였다고 서술한 자서전에 당시 나이가 16세였다는 내용이 3번이나 더 실렸다는 것은 일견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16세 언급의 화자들을 살펴보면 그 의문이 어느 정도 풀릴 수 있다.

 

 

‘2년 후에 18세가 된다는 말한 것은 오빠 최승일이고, ‘16세인 까닭에 음악학교 수험에 연령이 어렸으며 ‘16세의 그녀가 이시이 바쿠씨와 함께 경성을 출발하게 되었다고 한 것은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였다. , ‘16세 발언을 한 것은 최승희 본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중 최승일의 발언이 특히 주목을 끈다. 그는 본인과 부모와 함께 자기 여동생의 나이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런데 어째서 여동생의 나이를 16세로 언급했던 것일까? 어째서 본인이 언급한 나이와 오빠가 언급한 나이에 차이가 생겼던 것일까?

 

<경성일보><매일신보>에 보도된 최승희의 나이도 16세였다. 그런데 이 두 신문 기사의 취재원은 최승일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최승일이 동생 최승희를 이시이 바쿠에게 소개하기 위한 소개장을 받은 것이 <경성일보>의 당시 학예부장 테라다 토시오(사전)였기 때문이다. 조선어로 발행되던 <매일신보>는 일본어로 발행되던 <경성일보>와 같은 사옥을 사용하는 자매지였으므로, <경성일보>의 취재 내용은 손쉽게 <매일신보>에도 보도되곤 했었다.

 

 

따라서 숙명여학교를 졸업한 16세의 최승희라는 최초의 신상정보는 맨 처음 최승일로부터 테라다 토시오에게 전해졌고, 그 내용이 <경성일보><매일신보>에 보도된 이후, 모든 일본어권 미디어에서는 최승희의 여학교 졸업 당시의 나이가 16세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그것이 결국 일본에서 활동하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까지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최승희는 왜 자신의 나이가 15세였다고 한 것일까? 그리고 최승일은 어째서 동생의 나이가 16세였다고 한 것일까? 두 사람은 가족이므로 서로의 생일이나 나이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이같은 차이가 나타난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고 어째서 나중에라도 바로잡히지 않았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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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서전(1936)><최승희 자서전(1937)>에서 최승희는 19263월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무용유학을 시작했을 때 나이가 15, 유학을 마치고 경성에 돌아와 192911월 무용연구소를 개설했을 때의 나이가 18세였다고 서술했다. 이 나이들은 각 자서전에 한 군데 이상에서 일관적으로 서술되었다.

 

같은 방법으로 두 자서전에 나타난 결혼 시기의 나이 서술을 찾아보았다. 결혼 당시의 나이에 대해서는 <나의 자서전><최승희 자서전>에 각 1번씩 명시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우선 <나의 자서전>의 기록을 보자.

 

번잡하지 않게 세비루를 입은 신랑과 간단한 스포츠복을 입은 신부는 트렁크를 하나씩 든 간단한 차림으로 석왕사로 밀월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 그것이 쇼와7(=1932), 내가 스무 살, 안막이 스물두 살 되던 봄의 일이었습니다.” (<나의 자서전>, 1936:99-100).

 

 

우선 바로잡을 것은 최승희의 결혼연도는 1932년이 아니라 1931(쇼와6)이다. 안막과 최승희의 결혼식을 보도한 당시 신문들을 조사하면, 결혼일시는 193159일 오전11시였고 장소는 동대문밖 흥릉 옆의 청량관이라는 연회장이었다.

 

따라서 최승희의 생일 19111124일이 양력 날짜가 맞다면 결혼 당시 최승희의 만 나이19(+5개월반), ‘연 나이20, ‘세는 나이21세였다. 그러나 만일 최승희의 공식 생일 날짜가 실제로는 음력 날짜였다면, 이를 양력 날짜로 환산하면 1912112일이 되고, 그랬을 경우 최승희의 결혼 당시 나이는 만 나이19(+4개월), ‘연 나이19, ‘세는 나이20세가 된다.

 

생일이 1910418일로 알려져 있는 안막의 만 나이21(+20), ‘연 나이21, ‘세는 나이22세였다. 그러나 만일 안막의 생일날짜가 음력이어서 양력날짜(1910526)로 환산해서 나이를 다시 계산하면, ‘만 나이20(+11개월), ‘연 나이21, ‘세는 나이22세가 된다.

 

 

따라서 안막의 나이가 22, 최승희의 나이가 20세였다는 것은 나이 계산방식이 세는 나이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나이 서술은 <최승희 자서전>에도 똑같이 나타났다.

 

내가 결혼을 하면 인기가 줄어질 것이라고 걱정하고, 나의 결혼을 반대한 사람들도 많았으나, 나는 가령 인기가 떨어지더라도 여자로서, 아내로서, 또는 무용가로서, 어디까지든지 참되게 살아갈 생각을 하고 소화7(=1932) 봄 나는 스무 살 때에 결혼하였다.” (<최승희 자서전>, 1937:26).

 

여기에서도 최승희는 결혼연도가 1932년으로 기술됐다. 여성이 자신의 결혼시기를 잘못 기억하는 것은 드문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나중에 보겠지만 최승희의 회상에는 자주 오류나 착오가 발견되곤 한다. 그의 나이에 대한 서술을 이렇게 자세히 살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나의 자서전>에는 최승희가 결혼 즈음에 19세였다고 서술한 부분도 등장한다. 나이 서술에 일관성이 결여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기에 조금 자세히 살펴봤다.

 

 

그러는 동안에 나도 열아홉의 봄을 맞이했습니다. 경제적인 고통, 예술상의 번민, 인력 부족, 금전에 의한 유혹, 더러운 유혹의 마수……어느덧 옳고 진지한 결혼으로 기울어졌던 것이 그 무렵의 나의 심정이었습니다.” (<나의 자서전>, 1936:89-90).

 

이 서술이 무용연구소를 개설한 192911월부터 1930년 대부분의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맞는 기술이다. 그러나 결혼 직전인 1931년 초를 포함하는 기술이라면 최승희의 나이를 19세라고 한 것은 착오를 일으킨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최승희가 결혼식을 가졌던 193159일 기준으로 그의 세는 나이20세였다면, 그보다 5년 전 여학교 졸업당시인 19263월의 세는 나이15세였음에 틀림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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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자서전에는 졸업 당시 혹은 무용 유학을 떠나던 시기 외에도 군데군데 자신의 나이를 밝힌 부분이 있다. <나의 자서전(1936)>에는 최승희가 도쿄에 도착해 이시이무용단에서 배우고 연습하던 초기 상황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아무리 강철 같은 결의를 가지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한사람 몫을 하는 어엿한 무용가가 되겠다며 필사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라고 해도, 결국은 열대여섯 살의 소녀가 아닌가요?” (<나의 자서전>, 1936:57)

 

 

최승희가 경성을 떠나 도쿄에 처음 도착한 것이 19264월초였으므로, 위의 서술은 그 직후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 당시에 자신이 열대여섯 살의 소녀라고 했으므로 여학교 졸업과 무용 유학 시작 시점의 나이는 15세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 최승희가 무용 유학을 끝내고 19297월 경성으로 귀국했을 당시에도 최승희의 나이가 등장한다.

 

마침내 경성에 자신의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는 18, 마침 경성 하늘에는 흰 구름이 반짝이는 한여름의 일이었습니다.” (<나의 자서전>, 1936:78-79)

 

최승희가 경성의 고시정 19번지에 자신의 무용연구소를 처음 설립했던 것은 1929111일이었다. 최승희의 생일이 양력 19111124일이라면 경성 무용연구소 설립 당시의 최승희의 만 나이17(+11개월), ‘연 나이18, ‘세는 나이19세였다. 최승희는 이때 자신이 18세라고 했으므로 이는 연 나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만일 공공기록의 생일 19111124일이 음력 날짜였다면, 이를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는 1912112일이므로, 최승희의 무용연구소 설립 당시의 만 나이는 여전히 17(+9개월), ‘연 나이17, ‘세는 나이로는 18세가 된다. 이 경우 최승희가 자신의 나이가 18살이라고 했던 것은 세는 나이였던 셈이 된다.

 

 

따라서 19111124일이 원래 양력 날짜인지 혹은 음력 생일을 양력 날짜로 기록한 것인지에 따라 이 18세는 연 나이일 수도 있고 세는 나이가 될 수도 있었다. 어느 경우에나 19263월의 나이는 15세였던 것으로 역산할 수 있다.

 

<나의 자서전>에 나타난 이 서술은 <최승희 자서전(1937)>과 비교해 보아도 일치된다. 이 조선어 자서전에도 무용연구소 설립 당시 상황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계획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나는 하는 수없이 경성에 조그마한 연구소를 설립하고새로운 예술분야에 있어 향토 개척의 첫 번째 발걸음을 떼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인 고난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돌아보건대 내 나이 열여덟 살 되는 해였다.” (<최승희 자서전>, 1937:23)

 

, 최승일이 편집한 자서전에도 경성 고시정 무용연구소 설립 시절의 최승희 나이는 18세로 되어 있었다. 더 나아가 <최승희 자서전>에 첨가된 최승일 자신의 회상에도 비슷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이리하여 몇 달이 못 되어 너는 집으로 돌아와서 열여덟 살 된 몸으로 러시아에 가려고 러시아 영사관에 있던 김온 군을 통하여 러시아행을 실현하려고 운동을 하였었지. 그러나 그것도 뜻과 같지 아니하여 고시정(古市町) 언덕에 연구소 문패를 붙이고 대담하게 안무를 하여 보았었지.” (<최승희 자서전>, 1937:53)

 

최승희가 무용 유학을 마치고 경성에 돌아와 1929111일 무용연구소를 개설했을 때의 나이는 18세였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27개월 전이었던 19263월의 나이는 15세라고 보아야 한다. 192911월의 나이가 세는 나이이든, 연 나이이든, 19263월의 나이는 역시 세는 나이이든, 연 나이이든 15세였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문헌들을 볼 때 최승희나 그 오빠 최승일이 만 나이를 단 한 번도 쓰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냥 관습적으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일제 강점에 동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심지어 나이 계산에까지 반영되었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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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최승희는 자신의 생일과 나이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 지금까지는 신문이나 잡지의 보도, 학적부와 출입국 기록 등의 문헌을 중심으로 최승희의 생일과 나이를 정리해 왔지만, 정작 본인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나이에 대해서 뭐라고 서술했는지 살펴봤다.

 

최승희의 자서전에도 두 권이 있다. 하나는 도쿄에서 일본어로 발행된 <나의 자서전(自敍傳, 1936)>이고, 다른 하나는 경성에서 조선어로 출판된 <최승희 자서전(1937)>이다. <나의 자서전>의 저자는 최승희이고, <최승희 자서전>의 저자는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로 되어 있다.

 

17장으로 구성된 <나의 자서전>은 전부 최승희가 직접 서술한 것이지만, <최승희 자서전>150쪽 중 약 70쪽은 최승희의 글이고 나머지 80여 쪽은 오빠 최승일을 비롯 조선과 일본의 저명 문화예술인들의 평론이다. 두 자서전의 최승희 글에 겹치는 내용이 전혀 없고, 한 책이 다른 책을 번역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두 권의 자서전은 별개의 책이다.

 

 

<최승희 자서전>2006년 한국에서 <세기의 춤꾼 최승희 자서전: 불꽃>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된 바 있지만, 일본어 <나의 자서전>은 한국어로 번역된 적이 없고, 조선어판 <최승희 자서전>도 일본어를 비롯한 외국어로 번역 소개된 바 없다.

 

<최승희 자서전>에는 최승희가 자신의 나이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9번쯤 나오는데, 그중 첫 번째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때는. 1926, 꽂이 흐드러지게 피던 시절이었는데, 그해에 서울에 있는 숙명여학교를 막 졸업했으니, 내가 열다섯 살 되던 해 봄이었다.” (<최승희 자서전>, 1937:6)

 

최승희는 자신이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이 15세라고 명시적으로 말했다. 이때의 15세라는 나이가 어떤 나이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양력 19111124일이 그의 생일이었다면 이때의 15세는 연 나이가 되지만, 19111124일이 음력 날짜였고 이를 양력으로 환산한 1912112일이 실제의 생일이었다면, 졸업 당시의 15세는 세는 나이가 된다. 어느 경우에나 만 나이로는 14(+4개월, 혹은 +2개월반)이었던 셈이다. 같은 책에는 숙명여학교 졸업 즈음의 나이에 대한 서술이 한 번 더 나온다.

 

 

그 사범학교의 입학시험에 나는 쉽게 합격이 되었다. 이만하면 좋다, 하고 모두 나의 손을 잡고 즐거워했다. 그러나 나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다. 문득 어두워지는 나의 운명! 추운 삼한사온의 계절이 지나가고 북한산에 덮였던 눈이 녹아 흐르며 벚꽃과 살구꽃이 웃는 듯이 피는 봄이 우리들을 찾아왔으나, 암담한 가정에 불행한 나는 다만 고요한 침묵 속에서 오빠가 빌려준 소설과 시를 읽기에 그날그날을 보냈다. 그중에도 석천탁목 선생님의 시와 노래는 내 안의 피가 끓어오를 만큼 나에게 생생한 감동을 전해 주었다. 겨우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계집애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인생에 관한 문제에 푹 빠져 있었다. (<최승희 자서전>, 1937:13-14)

 

최승희가 치렀던 경성사범 입학시험은 192636일부터 3일간이었고, 면접시험은 마지막날인 38일이었을 것이므로, 숙명여학교 졸업 직전이었고, 최승희는 이때의 자신은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계집애라고 서술했던 것이다. 당시 최승희의 나이가 15세였다는 점은 일본어판 <나의 자서전>에도 서술되어 있다.

 

모교의 교원회의 결과, 나를 학교 급비생(=장학생)으로 동경음악학교에 입학시키기로 하였다. 그런데 나이가 어린 까닭에 하는 수 없이 열여섯 살이 되는 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집에서 일 년 동안 있다가 동경에 가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나의 자서전>, 1936:22-23)

 

사범학교 입학에 실패한 후 숙명여학교에서 최승희를 동경음악학교에 유학시킬 계획을 세웠던 것인데, 이 역시 연령 제한으로 1년 더 기다렸다가 16세가 되는 봄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으므로, 졸업 당시의 나이는 15세였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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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는 졸업식날이었던 1926323일 저녁에 오빠 최승일과 함께 이시이 바쿠의 무용공연을 관람했다. 아마도 여동생을 위한 오빠의 졸업 선물이었겠지만, 이 선물은 여동생을 무용의 길로 이끌기 위해 최승일이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것이었다. 오빠의 의도는 성공했다. 이틀 후인 325일 최승희는 이시이 무용단에 입단해 경성을 출발해 도쿄로 향했다.

 

<경성일보><매일신보>가 당시 최승희의 나이가 16세였다고 보도했지만, 이는 세는 나이였고, 연 나이로는 15, 만 나이로는 14세였던 시기였음은 이미 앞에서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시간이 지나서 최승희의 생년월일이 알려지고 실제 나이가 밝혀졌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최승희가 16세에 무용을 시작했다는 보도가 계속되었다. 특히 세는 나이를 전혀 쓰지 않고 만 나이만 사용하던 일본에서도 그런 관행이 이어졌다.

 

 

1926615일자 <도쿄니치니치(東京日日)신문>무용계에 싹트는 조선의 꽃 한송이-최승자양이라는 기사에서 최승희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기사 중의 최승자는 스승 이시이 바쿠가 고쳐준 최승희의 일본 이름이었다.)

 

새로운 제자의 이름은 최승자(崔承子, 샤이 쇼코)씨로, 올해 16세이며, 조선에서는 상당히 존경을 받는 양반 가문 출신이며, 그의 오빠는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했다. 그는 자신이 다녔던 경성의 여고,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올 3월에 졸업했다.”

 

19266월에도 최승희의 나이는 여전히 만14(+7개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쿄의 일간신문은 여전히 최승희의 나이를 16세라고 보도했다. 그로부터 한 달반이 더 지난 1926730일자 <야마토(やまと)신문>유일의 조선문용가 최승희, 눈물의 정진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도 같은 서술을 반복했다. (이 기사에서는 최승자라는 이름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최승희가 본명을 유지하고 싶다는 뜻을 스승에게 전달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기사에서는 조선이 낳은 유일한 무용가, 올해 16세의 아가씨 최승희, 최근 이 소녀로 하여금 더욱 예술의 길에 몰두하게 한 에피소드가 있다면서 무용을 천한 기생의 일로 여기는 가족과 친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쿄 유학을 오게된 경위를 소개했다.

 

 

이때에도 최승희의 실제 나이는 여전히 만14(+8개월)이었지만 <야마토신문>은 그의 나이를 16세라고 서술했다. 이러한 경향은 시간이 더 지나서도 변하지 않았다. 최승희가 무용을 시작할 당시 <경성일보>의 학예부장으로서 오빠 최승일에게 이시이 바쿠를 만날 수 있도록 소개장을 써주었던 테라다 토시오(寺田壽夫, 1892-?)<조선행정> 19374월호에 기고한 무희 최승희론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최승희는 올해 26세이다. 그러니까 벌써 11년이나 전의 이야기다. 그녀가 16세의 젊은 나이에 숙명여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 봄, 이시이 바쿠가 경성에서 첫 번째 공연을 가졌다. 당시 나는 경성일보에 있으면서 연예계 일을 맡고 있었고, 또 이시이 바쿠의 매니저와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기 때문에 이시이 바쿠의 공연에도 후원자의 마음으로 구경을 갔다.”

 

테라타 토시오가 1937년의 최승희가 26세라고 한 것은 맞게 계산한 것이다. 당시 최승희가 일본 언론이 사용하던 연 나이26세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937년 보다 11년 전이었던 1926년의 나이는 15세가 되어야 맞는 계산이다. 그런데 테라다 토시오는 최승희가 “11년 전에 ... 16세의 젊은 나이였다고 서술했다. 산수가 엉터리였는데도 버젓이 활자화되었고, 그 뒤로도 바로잡히지 않았다.

 

 

혹시 최승희 자신이 당시 나는 16세였다고 발표한 적이 있었는지 조사해 봤지만, 그런 사실도 없었다. 예컨대, 최승희는 조선어판 <나의 자서전(1936: 6)>에서 당시 자신은 15세였다고 밝혔다. “그때는 1926, 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시절이었는데 그 해에 서울에 있는 숙명여학교를 막 졸업했으니, 내가 열다섯 되던 해 봄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썼던 것이다.

 

최승희가 16세였다는 보도는 어째서 이렇게 끈질기게 계속되었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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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323, 최승희가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325일 아침 이시이 무용단에 입단해 도쿄 유학길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가 16세라고 보도되었다. 325일자 <경성일보>는 최승희와 이시이 바쿠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조선 예찬자 바쿠씨가 이번 조선 방문을 기회로 조선 소녀를 제자로 얻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 일행이 경성 제3회 공연을 끝낸 23일 밤10시경 공회당의 이시이씨 일행의 대기실을 찾아와 제자가 되고 싶다고 부탁한 아름다운 조선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경성)부내 체부동 137번지 최준현씨의 영양(令孃) 최승희(崔承喜, 16)였다.”

 

 

326일자 <매일신보>는 최승희가 문사 최승일의 여동생이라는 점, 숙명여고보의 우등 졸업자라는 점, 그리고 325일 아침에 이미 도쿄를 향해 출발했다는 점 등을 보강하며 후속 기사를 게재했다.

 

유럽 순회공연의 길을 가는 중에 경성(서울)에 이르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자, 특히 무용시가 남매의 눈에 띤 가련한 흰옷 입은 조선 소녀의 아담한 자태가 매우 흥미를 끌어 결국은 조선 소녀를 몇 명 제자로 쓰겠다는 말까지 나왔는데, 이에 대하여 청년 문사 최승일(崔承日)씨의 영매로 올해 봄 숙명(淑明)여자고등보통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최승희(崔承喜, 16)양이 다행히 부모의 승낙과 이시이씨 남매의 눈에 들어 이십오일 아침 경성을 떠나게 된 것이다.”

 

<매일신보>327일의 보도에서도 숙명여학교 고등과 우등 졸업생 최승희(崔承喜, 16)양이 세계적 무용가 석정막(石井漠) 석정소랑(石井小浪)의 남매에게 제자가 되어 이십오일 아침 경성 역을 떠나 스승을 좇아 세계만유의 길을 떠났다함은 직보한 바 있다고 거듭 밝혔다.

 

 

이 두 매체의 보도에 나타난 최승희의 당시 나이는 16세였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19111124일생으로 알려진 최승희는 19263월말 현재 만 나이14(+4개월)이었고, 언론에서 흔히 쓰는 연 나이로도 15세였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나이를 16세라고 보도한 것은 조선식 세는 나이였던 것이다.

 

최승희의 여학교 졸업 당시 나이가 만14세밖에 되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조기입학이다. 최승희는 19184월 숙명여자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때 나이가 만6세로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정한 취학연령 만8세에서 2살이나 모자랐다. 부친 최준현의 교육열과 최승희 자신의 영민함 때문에 세는 나이만 나이로 여기며 일찍 입학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이유는 2년의 이른바 월반때문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했는데, 보통학교(=초등학교)의 교육연한을 4년에서 6년으로, 고등보통학교(=중학교)의 교육연한을 3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것이 골자였다.

 

이 때문에 1922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혼란이 생겼는데, 2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보통학교 졸업 후 바로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고등보통학교 입학지원 자격이 ‘6년의 소학교(일본인) 혹은 보통학교(조선인) 교육과정을 이수한 자로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총독부 학무국은 1922년 보통학교 졸업자들이 2년의 보습과를 이수한 후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도록 지침을 정했지만, 그 시행은 학교장의 재량에 맡겼다. 숙명여고보의 이정숙(李貞淑) 교장은 이 재량권을 활용해서 보통학교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보습과를 건너뛰고 바로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도록 허용했는데, 최승희가 그 혜택을 입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최승희는 동급생들보다 최대 4살 어린 나이에 숙명여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졸업한 것이 최승희에게 도움만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도쿄음악학교와 경성사범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연령 제한을 벗어나기까지 기다리기 보다는 오빠 최승일의 권고에 따라 이시이 무용단에 입단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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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의 조선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나이 산정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생일을 정하는 데 사용하는 달력으로 음력양력의 두 가지가 있고, 그 각각을 기준으로 나이를 세는 방법이 세는 나이’, ‘연 나이’, ‘만 나이의 세 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양력이란 흔히 말하는 그레고리력이다. 한국에서는 1895년 김홍집 내각에 의해서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그레고리오력 채택을 추진했고, 고종은 김홍집의 의견을 받아들여 음력 18951115일에 공식적으로 개력을 반포, 음력 18951117일을 양력 189611일로 정하고, 태양력 채택을 기념하며 왕의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변경하기까지 했다.

 

책력을 관장하던 기관도 이름을 관상감에서 관상소로 바꾸고 양력 달력을 발행, 배포했으나, 갑작스런 양력 채택으로 일반 백성뿐 아니라 궁궐 행사에도 혼란이 초래됐고, 음력에 맞춰 농사를 짓던 농촌에서는 새 달력에 반발했다. 책력을 양력으로 바꾸고 왕의 연호까지 건양으로 정한 것은 중국에서 독립하려는 의지로 보였지만, 사실은 일본에 종속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양력과 친일파에 대한 반발로 양력 시행은 저항에 부딪혔고, 시행 1년 만에 과거의 시헌력(時憲曆)으로 돌아갔으나, 일제의 강점(1910)으로 조선은 재차 양력을 사용해야 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의 일환으로 1873년에 음력을 완전히 폐지하고 그레고리력을 채택했었다.

 

조선에서 사용하던 시헌력(時憲曆)은 순수 음력이 아니라 양력과 음력을 합친 태음태양력이었다. 태음태양력은 한 달의 날짜를 정하는 데에는 달의 움직임을, 하루의 시간과 일 년의 계절을 정하는 데에는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삼은 달력이다.

 

삼국시대 이후 한국에서 쓰인 책력은 모두 태음태양력이다. 신라와 고구려는 인덕력(麟德曆), 백제는 원가력(元嘉曆)을 쓰다가 통일신라에서는 대연력(大衍曆), 후기에 선명력(宣明曆)을 사용했다. 고려에서도 통일신라의 선명력(宣明曆)을 그대로 썼으나 충선왕 때에 수시력(授時曆)을 채택했고, 공민왕19(=1370)에 수시력의 이름을 바꾼 대통력(大統曆)을 사용했다. 조선에서는 <칠정산내편>에 의해 수시력을 수정하여 사용하다가 효종4(=1653)에 마테오리치가 개발한 서양식 계산법을 사용한 시헌력(時憲曆)을 채택해 대한제국 시기까지 이르렀었다.

 

 

한편 20세기 초반 조선인들의 나이를 세는 방법은 세 가지였다. 가장 널리 쓰이던 것이 세는 나이였다. 태어나자마자 1살로 정하고, 이후 새해를 맞을 때마다 1살을 더하는 방식이다. 이는 생일이 언제인가와 상관없이 새해를 맞을 때 1살을 먹는 방식인데, 이때의 새해는 음력상의 새해, 즉 설을 가리켰다.

 

만 나이는 양력의 도입과 함께 본격화되었고, 특히 일제 강점 이후에는 공식 기록에 남기는 유일한 나이가 되었다. 태어났을 때를 0세로 보고, 출생 후 첫 번 생일을 맞으면 1세가 되는 것으로 계산하는 방법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관공서 기록에 반드시 만 나이를 써야 했고, 그에 준하는 학교와 회사에서도 만 나이를 사용했다.

 

연 나이는 현재 연도에서 태어난 연도를 빼는 가장 간단한 나이 산정 방식이다. 당사자의 생일을 모를 때 사용하며, 신문이나 방송 등의 언론매체에서 주로 사용하던 방식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세는 나이가 음력(사실은 태음태양력) 및 대한제국과 연결되고, ‘만 나이가 양력 및 일제침략과 연관되어서 관공서나 교육기관에서는 만 나이를 써야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는 세는 나이에 집착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와 30년대까지도 세는 나이(일상)와 만 나이(관공서), 연 나이(언론)의 적용이 이상과 같이 엄격하게 분야별로 지켜진 것도 아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 학무국이 정한 취학연령은 만8세였지만 최승희는 19184, 즉 세는 나이로 8세 때에 숙명여자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6325일의 <경성일보>와 326일 <매일신보>는 이시이 무용단에 입단해 무용 유학을 떠나는 최승희가 16세라고 보도했지만, 당시 최승희의 만나이는 14세였고, 16세는 세는 나이였다. 말하자면 일제강점 이후 10년 이상이 지나고 나서도 조선에서는 세 가지 나이 중에서 세는 나이가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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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428, 미이민국의 뉴욕 입국자 명단에 나타난 최승희의 나이(27)가 의구심을 던졌다면, 그보다 1년 전, 1939420일자로 발행된 벨기에의 노동허가서는 그 의구심을 증폭시킨다. 이 문서에는 최승희의 생일이 19125월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1939430일부터 514일까지 약 2주일 동안 열린 제2회 국제무용경연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했고, 경연대회 중간인 510일에는 조선무용 갈라 공연도 개최했었다.

 

그런데 이 공연을 위해서는 최승희에게 노동허가서가 필요했다. 예술가들이 외국에서 공연을 하려면 노동허가를 얻어야 했다. 공연은 입장료를 받는 경제행위이기 때문이다. 80년 전의 일본은 벨기에의 노동 허가 면제국이 아니었으므로 일본 여권으로 순회공연을 하던 최승희도 벨기에에서 공연을 하려면 노동허가를 받아야 했다.

 

 

예술가가 타국에서 예술 행사를 할 때 노동허가는 주관사나 흥행사가 서류 작업을 담당한다. 최승희의 유럽 순회공연 흥행사는 <국제예술기구>였고, 벨기에 국제무용대회의 주관사는 <필하모닉협회>였다. 따라서 이 두 단체가 최승희의 노동 허가 문제를 해결해야 했을 것이다.

 

브뤼셀 시립기록보관소의 공문서 서고에서 발견된 최승희의 노동허가서에 따르면 과연 그의 흥행사 <필하모닉협회>가 후원자(sponsor)로서 최승희의 노동허가를 신청했고, 벨기에 노동 및 사회복지부(Ministere du Travail et de la Prevoyance Sociale)가 이를 승인해, 법무부 장관에게 고지하는 형식을 취했다. 외국인의 출입국 관리는 법무부 소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노동 허가서에 기록된 최승희의 인적사항이 이례적이다. 최승희가 “19125월에(en mai 1912) 서울에서 태어났고(né a Seoul), 파리에 거주(demeurant à Paris)”하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최승희가 파리에 거주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유럽 순회공연 동안에는 파리 샹젤리제의 스튜디오를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출생지를 서울이라고 기입한 것도 맞는 기록이다. 최승희는 서울의 수창동에서 태어나 체부동에서 숙명여학교를 마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서울경성(京城)’이라고 쓰고 일본어로는 케이조라고 불렀다. 그런데도 이 노동허가서에는 최승희의 출생지를 게이조(Keijo)’가 아니라 서울(Seoul)’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서울이라는 이름은 조선의 한양에서 시작되어 대한제국 시기에는 한성으로 변경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경성으로 재차 변경되었고,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에야 서울로 개칭되었다. 그런데 1939년에 발행된 벨기에 노동허가서에서 한성경성도 아닌 서울이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벨기에 노동허가서의 서울표기가 이례적이라는 점은 다른 나라 입국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최승희가 1938111일 샌프란시스코에 입국했을 때나 19401010일 멕시코에 입국했을 때, 그리고 1940428일 뉴욕에 입항했을 때, 그의 입국 서류에는 출생지가 모두 게이조(Keijo 혹은 Keiyo)’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유독 벨기에 노동허가서에 최승희의 출생지가 서울이라고 표기된 것은 아마도 18세기부터 조선에서 활동했었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조선과 대한제국 시기에 한반도에서 포교활동을 하면서 조선을 꼬레(Coree)’, 그 수도 한양을 서울(Seoul)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남긴 기록이 굳어져서 프랑스어권에서는 한양=한성=경성서울이라고 불렀다. 프랑스어가 공용어의 하나인 벨기에도 이 관행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의 벨기에 노동허가서에 기입된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은 최승희의 국적을 한국인(de nationalité Coréenne)으로 기재한 것이다. 최승희가 일본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을 한국인(coréenne)으로 기입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194010월의 멕시코 입국기록에는 최승희의 국적이 일본인(japonesa)으로 되어 있다. 모국어도 일본어(japonas), 출생지도 일본 경성(Keijo, Japan)’, 거주지도 일본 도쿄(Tokyo, Japan)’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이 기록에 따르면 최승희는 전적으로 일본인이었다.

 

한편 19381월의 미국 입국기록에는 최승희의 국적(Nationality)은 일본(Japan), 민족(Race or People)은 한국인(Korean)이다. 최근 거주지는 일본의 도쿄(Tokio, Japan), 출생지는 일본의 한국(Korean, Japan)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미국 입국 기록에 따르면 최승희는 일본인이며, 일본의 속방인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종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19394월의 벨기에 노동허가서는 전혀 다르다. 최승희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서울에서 태어난 한국인으로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벨기에 노동허가서가 작성된 프랑스어에서는 나쇼날리티(nationalité)국적뿐 아니라 민족이나 인종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국적난이 따로 없이 코레안느 나쇼날리티라고 썼다면 이는 최승희를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인지했다는 뜻이다.

 

 

이 노동허가서에 기입된 최승희의 인적사항 중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19125이라는 최승희의 출생연도이다. 그의 생일은 흔히 19111124일이라고 알려져 왔고, 19401010일의 멕시코 출입국 기록에 그의 출생연도가 1912년으로 기재된 적이 있지만, 생월이 19125월로 명기된 것은 벨기에의 노동허가서가 유일하다.

 

최승희의 생년이 1912년으로 기록된 공식 문서가 1건 이상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일회성 실수가 아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앞에서 최승희의 생일 19111124일이 음력날짜였다면 그의 실제 생년월일은 1912112일임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벨기에 노동허가서는 최승희의 생월이 19121월이 아니라 5월이라고 기록했다. 프랑스어에서 1(janvier, 쟈비에)5(mai, )은 표기나 발음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기록상의 실수라고 보기 어렵다.

 

또 이것을 의도적 오기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것이 오기라면 그 의도는 나이를 줄이려는 것이었을 텐데, 이 기록으로 최승희의 나이가 변하지는 않는다. 최승희의 실제 생일이 19111124일이라면 이 노동허가서 발급이 신청되었던 1939420일 현재 최승희는 만27(+5개월)이다. 실제 생일이 19121월이었더라도 만27(+3개월10)임에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의 생일이 19125월이라면 최승희는 만26(+11개월)가 되지만 만27세를 만26세로 줄이는 것이 어떤 필요 때문이었을지 짐작할 수 없다. 더구나 이 노동허가서는 1939510일에 발효되기 때문에, 그때는 최승희의 나이는 다시 만27세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의 생일이 19125월로 기록된 것은 기록상의 실수이거나 의도적인 오기라고 보기 어렵다. 더구나 생년월일처럼 금방 확인이 될 수 있는 신상정보를 실수나 왜곡할 가능성도 없고, 아무리 건망증이 심하거나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생년월일을 잊거나 잘못 기억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최승희의 벨기에 노동허가서에 나타난 ‘19125이라는 생일 정보는 무언가 사실에 닿아있었음에 틀림없다. 어떤 사실이었을까? 당시 조선의 상황을 고려하면 유일한 설명은 그것이 최승희의 공문서 기록이거나, 최승희의 실제 생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최승희의 학적부에는 그의 생일이 19111124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날짜가 음력날짜였다면 최승희의 실제 생일은 1912112일로 환산되고, 이는 그의 미국과 멕시코 입국기록에 나타난 나이를 잘 설명할 수 있다. 이에 더해 벨기에 노동허가서가 기록한 생일 19125월은 출생신고일이 아니었을까?

 

출생신고는 원래 아이가 태어난 직후에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20세기 초 한국에서는 아이가 출생한 이후 몇 달씩 기다렸다가 출생신고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출생신고가 늦었을 경우 원래의 생일대로 신고를 하면 대개 벌과금을 내야하기 때문에 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는 보통 출생신고일을 생일로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같은 관행으로 보아 최승희가 노동허가서에 생일을 ‘19125이라고 쓴 것은, 실수나 왜곡이 아니라면, 출생일이라기보다는 출생신고일이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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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학적부와 샌프란시스코 입국서류, 멕시코 입국서류 등을 조사한 결과, 일반적으로 알려진 최승희의 생일 19111124일은 아마도 음력 날짜였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관공서 기록에는 음력 생일을 양력 생일인 것처럼 신고했지만, 실제 생일은 1912112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다른 자료를 보면 최승희 생일의 비밀은 약간 더 복잡해 진다. 예컨대 최승희와 안막은 1940425일 푸에르토리코 산후앙(Ssan Juan)에서 여객선 코아모(Coamo)호를 타고 당일로 뉴욕항에 입항했는데, 이때도 입국신청서와 함께 승객명단이 제출되었다.

 

코아모호가 제출한 선객명단 4쪽에 안막과 최승희의 이름이 보이는데, 기재내용은 두 사람의 샌프란시스코 입항 때와 거의 비슷하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출생지 정보였다.

 

 

안막과 최승희가 국적을 일본(Japan), 인종을 코리안(Korean)으로 기록한 것은 샌프란시스코 때와 같았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샌프란시스코 입항 시에는 인종이 일본인(Japanese)로 타이핑된 것을 연필로 지우고 그 위에 코리안이라고 수정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뉴욕 입항 때에는 처음부터 코리안으로 깨끗하게 타이핑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장 큰 차이는 출생지 정보였다. 샌프란시스코 입항 때에는 두 사람의 출생지가 일본의 경성(Keijo, Japan)이라고 되어 있었으나, 뉴욕 입항 시에는 출생국이 코리아(Korea), 출생지는 조선(Chosen)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모두 타이핑된 기록이었다.

 

엄격히 말하면 조선과 코리아는 둘 다 나라 이름이다. 코리아는 대한제국(Korean Empire, 1897-1910)에서 유래한 이름이고, 조선(Chosen, 1392-1897)은 그 이전 518년동안 지속되었던 나라 이름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뉴욕 입국기록에 코리아와 조선을 나란히 기입했다.

 

 

안막의 경우에는 이같은 출생지 정보가 더 정확한 기록일 수 있다. 그의 출생일인 1910418일에는 조선이 대한제국으로서 아직 독립국이었으므로, 출생지를 당시의 국호와 지명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강점 이후에 태어난 최승희까지 출생지를 조선, 코리아라고 쓴 것은 형식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기록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승희와 안막이 자신의 출생지를 한국과 조선이라고 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이는 안막과 최승희가 외국 순회공연을 다니면서도 가는 곳마다 자신들이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며 조선인이라는 점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된다. 일본 여권으로 여행하는 중이었으므로 공식기록이나 문헌에는 어쩔 수 없이 국적을 일본이라고 써야 했지만, 인종이나 출생지 정보 난에는 악착같이 조선과 한국이라는 이름을 남기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0425일의 뉴욕 입국자 명단에는 안막의 나이는 30, 최승희의 나이는 27세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안막의 정확한 생일은 추정하는 데에 특히 중요한 정보이다. 그의 생일은 일반적으로 1910418일로 알려져 있으므로 이 생일날짜가 양력이라면 그의 나이는 만30(+1주일)가 된다. 그러나 만일 그의 생일날짜가 음력이었다면 이를 양력으로 환산했을 경우 1910526일이 되며, 따라서 그의 나이는 만29(+11)가 된다. 그런데 이 입국기록에 만30세로 기입했으므로, 그의 생일날짜는 양력생일이었다는 점이 확실해 지는 것이다.

 

 

그러나 최승희의 나이는 복잡해 진다. 그의 생일 19111124일이 양력날짜라면 1940425일 현재 만 28(+5개월)이다. 만일 생일날짜가 음력이라면 실제 생일은 1912112일이므로 그의 나이는 여전히 28(+3개월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승희는 이 서류에 자신의 나이를 27세로 기록했다. 왜 그랬을까?

 

지금까지의 논의에서는 생일이나 나이를 기록으로 남길 때에는 그 정확성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이 기록만은 예외로 두어야 하는 것일까? 최승희는 실수나 혹은 고의로 자신의 나이를 한 살 줄였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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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010일 최승희와 안막은 멕시코에 입국했다. 유럽과 미국과 남미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오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길에 멕시코를 경유했던 것이다.

 

최승희와 안막이 멕시코에 입국했을 때 작성한 입국서류 겸 신분증서에는 두 사람에 대한 인적 사항이 세세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인적 사항은 <신체특징><보충자료>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여기에 기재된 개인정보가 요즘 기준으로 거의 신상털이 수준이다.

 

우선 최승희의 <신체특징>을 보면 체형이 마른 편(delgado)’이며 키는 ‘164센티미터이고, 피부색깔은 노랑(amarillo)’, 머리카락은 짙은 밤색(castañoo obscuro)’이라고 기재되었다. 눈썹은 반쯤 무성(semi pobladas)’하고 눈동자는 커피색(cafés)’이며, 코는 뭉툭납작(roma)’하고, 턱 끝은 정상(normal)’이라고 되어 있다. 이어서 콧수염이 고 턱수염도 으며, 기타 다른 특징적인 사항도 없다고 되어 있다.

 

 

<보충정보>난에는 최승희의 결혼상태가 기혼(casado)’, 직업은 클래식 발레리나(bailarina clásica)’, 모국어는 일본어(japonés)’, 2외국어는 영어(inglés)’라고 되어 있다. 현재의 국적은 일본(japonesa)’, 출생지는 일본의 경성(Keiyo, Japón)’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경성(京城)의 일본어 발음은 케이조(Keijo)'인데 스페인으로 Keiyo라고 쓴 것이 생소했다. 하지만 이걸 스페인사람에게 읽어보라고 하니까 케이조에 가깝게 발음했다. 한편, 최승희의 종교는 불교도(budista)’, 인종은 황인종(amarilla)’, 거주지는 일본 도쿄(Tokio, Japón)'라고 되어 있었다. 이 입국서류는 신분증명서를 겸했기 때문에 이처럼 자세한 신체적 특징과 인적사항을 기입해 작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서류의 <보충자료>난에는 최승희의 나이(28)와 생년(1912)도 기록되어 있다. 우선 최승희의 나이에는 별반 이상한 점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최승희의 생일은 19111124일이므로, 이 신분증명서를 발급받은 19401010일 현재 만28(+11)였기 때문이다.

 

이상한 점은 최승희가 자신의 생년을 1912년이라고 적은 것이다. 생년만 기재하고 생월일을 생략한 것은 이 서류의 질문이 태어난 해(ano en que nacio)”만 물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왜 자신의 생년을 1911년이 아니라 1912년으로 기입했을까?

 

 

아무리 건망증이 심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생년을 잊어버리거나 헷갈리는 경우는 없다. 어린 시절부터 나이 계산에 꼭 필요할 뿐 아니라,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출생연도가 학업성취도보다는 친구를 사귀는 데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승희의 숙명여학교 학적부에는 그의 생년이 1911(=메이지44)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멕시코 입국 기록에는 1912년이라고 기입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앞에서 보았듯이, 만일 학적부에 기재되었던 최승희의 생일 19111124일이 실제로는 음력 날짜였다면 최승희가 외국에서 생년을 1912년이라고 쓴 것이 설명될 수 있다. 음력 19111124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912112일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최승희의 나이는 여전히 만28(+10)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남편 안막도 같은 신분증서를 발급받았는데, 그의 나이는 30, 생년월일은 1910418일로 기록되어 있었다. 안막이 자신의 생년월일을 다 기입한 까닭이 궁금해서 양식의 질문을 읽어보니, 두 사람이 사용한 양식의 포맷이 약간 달랐다. 최승희에게는 태어난 해는(ano)?”만 물었는데, 안막에게는 태어난 생년월일(fecha)?”을 물었던 것이다. 안막의 생일(1910418)이 음력날짜이든, 양력날짜이든 그의 나이는 만30(양력이라면 +6개월, 음력이라면 +5개월)가 된다.

 

여담이지만, 안막-최승희 결혼 사진을 보면 두 사람의 키가 거의 같아 보이길래 안막이 단신인 줄 알았으나, 이 서류에 나타난 안막의 키는 173센티미터였다. 일제강점기 1910년생 조선인 남성의 평균 신장이 162센티미터였던 것을 고려하면 안막의 키는 평균보다 10센티미터 이상 더 컸을 뿐 아니라 아내 최승희보다도 9센티미터나 더 컸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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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11일 최승희와 안막은 세계 순회공연 첫 목적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19371229일 요코하마를 출발한 여객선 치치부마루(秩父丸)를 타고 2주일 항해 끝에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한 것이다. 치치부마루 선장은 여객 명단을 미이민국에 제출했는데, 이 명단이 지금까지 미이민국 아카이브에 남아 있다.

 

한 면에 30명씩 8면으로 작성된 이 명단의 마지막 면(8)에 안막과 최승희의 이름이 있었다. 안막의 이름은 안 히츠쇼(An Hitsusho), 최승희의 이름은 사이 쇼키(Sai Shoki)라고 표기되어 있다. 안 히츠쇼는 안막의 본명 안필승(安弼承)의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은 것이고, 사이 쇼키도 최승희(崔承喜)의 한자 이름의 일본식 발음을 영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두 사람의 인적 사항에는 결혼여부와 직업, 국적과 인종, 비자번호 및 발급일 등의 정보가 기입되어 있었다. 두 사람의 국적은 일본(Japan)이지만 인종은 한국인(Korean)으로 되어 있었고, 최승희의 직업은 직업 무용가(Professional Dancer)”, 안막의 직업은 최승희의 매니저로 명시되었다. 또 두 사람이 부부라는 사실도 부기되어 있었다.

 

 

이 명단에는 생년월일을 기입하는 난은 없었지만 나이를 기입하게 되어 있었다. 안막은 27, 최승희는 25세였다. 1910418일 출생의 안막이 1938111일 현재 27세인 것은 맞다. 당시 그는 만으로 27(+8개월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승희의 나이가 25세로 기록된 것은 의외였다. 최승희는 19111124일생이었으므로 19381월 현재 만나이26(+2), ‘연나이27, ‘세는 나이로는 28세여야 했다. 안막이 만나이를 기입했으므로 최승희의 나이도 만나이였을텐데, 어째서 26세가 아니라 25세라고 기재된 것일까?

 

이 명단이 승객명단이나 여권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라면 담당자의 착오나 실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어느 나라나 출입국 기록 관리는 정확하고 엄격한 것이 보통이므로, 실수나 착오의 가능성은 배제하자. 그럼 최승희의 나이 25세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여권에 기입된 최승희의 생년월일이 19111124일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최승희의 생일이 음력이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양력 날짜는 1912112일이다. 바로 이 날짜가 최승희의 여권과 입국신고서에 기재되었다면 최승희의 나이는 하루 차이로 만25(+355)가 된다.

 

안막의 경우는 어땠을까? 그의 생일 1910418일이 음력 날짜였다면 그의 양력 생일은 1910526일이 되어, 그의 나이는 여전히 만27(+7개월)이다. ,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에 제출된 입국자 명단에 나타난 안막과 최승희의 나이는 모두 정확한 기록이 되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두 사람의 생일이 음력 날짜였음을 전제로 한 것인데, 당시 이같은 상황은 빈번했다. 20세기 전반 조선인들은 음력을 주로 사용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양력만 사용하던 일본의 관행을 따라야했기 때문에 혼란이 생기곤 했다. 조선인들은 생일을 음력으로 기억하고 축하했지만, 그것을 관공서에 제출할 때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째는 음력 생일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해 관공서 기록에 등재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공식 기록의 생년월일은 실제의 생일과 달라진다. 음력 생일의 양력 날짜가 매년 달라지기 때문이다. 둘째 방법은 음력 날짜를 그대로 관공서에 제출하는 것이다. 그러면 관공서 기록의 생일과 실제 생일이 다른 것은 마찬가지더라도, 적어도 그 날짜를 매년 양력으로 환산해 실제 생일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최승희와 안막이 첫 번째 방식을 택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의 진짜 생일은 음력 19111124(최승희)1910418(안막)이었지만, 관공서의 기록에는 1912112(최승희)1910526(안필승)로 기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의 나이는 각각 만27세와 만25세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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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근교 애국열사릉에 세워진 묘비에는 최승희가 19111124일 출생해 196988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승희의 공식 생몰일이다. 하지만 여기에 새겨진 날짜들이 그 석비처럼 단단하고 확실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우선 최승희의 사망일과 사망 경위 및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주장이 있지만, 어떤 것도 정설로 인정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최승희의 사망일에 대한 확정은 분명한 자료 혹은 결정적 증언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반면 최승희의 탄생일에 대해서는 그동안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남북한과 중국, 일본에서 개최되었던 최승희 탄생 1백주년 행사들도 모두 19111124일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최승희가 활동하면서 제자를 키웠던 모든 지역에서 이날은 최승희의 출생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최승희의 생년월일이 19111124일로 확정된 것은 숙명여학교 학적부 덕분이다. 거기에 명치44(=1911) 1124일 경성 출생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호적이나 여권 기록, 북한 시절의 주민등록이나 가족관계 기록이 있다면 더 확실해 지겠지만, 학적부의 기록만으로도 그의 생년월일을 특정하는 데에 그다지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필자는 최근 최승희의 생년월일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세계 각처에 흩어진 최승희의 삶과 춤에 대한 기록을 수집, 검토하는 과정에서, 그의 출생연도가 1912년이며, 출생일이 1224일 혹은 1227일이라는 문헌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최승희와 안막이 세계 순회공연 중이던 1940, 멕시코에 입국하면서 제출한 입국신고서에는 최승희의 생년이 1912, 나이가 28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외국에 입국할 때에 제출하는 입국신고서는 출입국 관리에 의해 여권 정보와 대조되고 확인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1912년생의 28라는 기록은 최승희의 여권 기록과도 일치했을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의 여권에는 그의 출생년도가 1912년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에 이르게 된다.

 

 

최승희가 스스로 1912년생이라고 밝힌 기록은 더 있었다. 19395월 브뤼셀에서 두 번째 공연을 준비하면서 최승희는 벨기에 당국으로부터 노동허가서를 발급받은 적이 있었다. 바로 이 노동허가서에 나타난 최승희의 생년월일이 “19125이었다. 이 역시 최승희의 여권기록과 대조되었을 것이므로, 최승희의 여권에 나타난 출생연도는 “1912이었을 것이라는 추론은 조금 더 확실해 진다.

 

한편 출생연도와는 별도로 출생일이 1124일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도 나타났다. 192999일자 <중외일보>의 인터뷰 기사에는 섯달 수무일햇날(=섣달 스무 이렛날)이 생일이라는 최양은 열아홉이라는 나이보다 훨씬 어리고 순진하게 보였다는 내용이 있다. 섣달은 음력 12월이므로 최승희의 생일이 음력 1227일이었을 가능성도 제기한 것이다.

 

<중외일보>의 기자는 192998일 아침 최승희의 옥천동 자택을 찾아가 그를 인터뷰한 다음, 이를 다음날(9) 기사로 보도했다. 따라서 생일이 1227이라는 말은 최승희 본인이 직접 밝힌 것임에 틀림없고, 인터뷰한 기자의 기억이나 메모가 왜곡될 만큼 시간이 지체된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 정확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 기사는 최승희가 인터뷰 당시의 나이를 밝힘으로써 그의 출생연도를 추론할 근거도 제공했다. 최승희가 192998일 현재 19세였다는 말은 이 나이가 한국식 세는 나이였음을 고려할 때 최승희의 생년월일은 19111227일로 역산될 수 있다. 19291127일이 음력 날짜였다면 양력으로는 1912214일이 된다.

 

따라서 최승희의 생년월일은 학적부의 19111124일뿐 아니라, <중외일보> 인터뷰 기사와 외국 기록에 따르면 19111227, 혹은 1912214일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이 진짜 생일이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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