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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호 선생이 관람한 최승희 공연이 (1) 194142-6일의 경성 부민관 공연이거나, (2) 1942216-20일의 경성 부민관 공연, 혹은 (3) 19422월말-5월하순 사이의 지방 순회공연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정병호 선생의 중학시절이 19404월부터 19453월까지였을 것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이다.

 

이중 어떤 것이었는지 범위를 더 좁히려면 정병호 선생이 어디에서 중학교를 다녔는지 알면 된다. 박경중 선생님은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셨다고 하셨고, 김준혁 선생은 광주에서 다니셨다고 했다. 동시에 두 곳에서 중학교를 다닐 수는 없으므로 서울과 광주, 둘 중의 한 곳일 것이다. 만일 서울에서 중학교 생활을 했다면 (1)(2)의 부민관 공연일 가능성이 높고,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녔다면 (3)의 지방 순회공연 중의 광주공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가능성이 높다고 한 것은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녔어도 광주공연을 관람했을 가능성도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신문기사들은 정병호 선생이 관람한 공연이 광주 공연이라고 못 박기도 했는데, 정병호 선생의 평전 <춤추는 최승희(1995)>의 머리말에 기록한 자신의 증언에는 지역이 특정되지 않았고, 박경중 선생님과 김준혁 선생의 증언이 엇갈렸기 때문에 이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정병호 선생이 재학했던 중학교가 어디였는지가 확인되기 전까지는 모든 가능성을 다 살펴볼 수밖에 없는데, 그 방법 중의 하나가 최승희 공연의 레퍼토리를 살피는 일이다. 정병호 선생은 최승희 공연에서 <에헤야 노아라(1934)><초립동(1937)><보살춤(1937)>을 관람했고, 특히 <보살춤>의 의상이 선정적이었다고 기억했다. 따라서 위의 (1), (2), (3)의 공연에서 이 세 작품이 한꺼번에 발표되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194142-6일의 경성 부민관 공연 레퍼토리는 194141일자 <조선신문(4)>에서 기사화되었다. “호화로운 프로그램의 최승희 공연이라는 제목의 기사 전문은 다음과 같았다.

 

“(제목) 호화로운 프로그램의 최승희의 공연, (부제) 2일부터 부민관에서, (본문) 2일부터 경성부민관에 출연하는 세기의 무희 최승희의 귀국 제1회 무용공연은 만도(滿都)의 뜨거운(灼熱的) 전인기아래 그 개회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호화로운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다.

 

1: (1) 두 개의 속무(つの俗舞, 음악은 속곡(俗曲)), (2) 옥적조(玉笛調, 고곡(古曲)), (3) 화랑무(花郞, 속곡), (4)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 고곡), (5) 보현보살(普賢菩薩, 고곡), (6) 두 개의 전통적 리듬(つの傳統的リズム, 고곡); 2, (7) 긴소매의 형식(長袖形式, 고곡), (8) 소년 신랑(少年花婿, 속곡), (9) 관음보살(觀音菩薩, 고곡), (10) 가면무(假面舞, 속곡), (11) 동양적 선율(東洋的旋律, 속곡), (12) 즉흥무(卽興舞, 고곡). (사진은 그의 무대모습).”

 

 

이 기사에 보이듯이 19414월 경성 부민관 공연의 레퍼토리는 1,2부에 6작품씩 모두 12작품으로 구성되었다. 괄호 안의 속곡(俗曲)이나 고곡(古曲)이라고 표시한 것은 반주음악이다. ‘속곡이란 민간에서 불리던 민요,’ ‘고곡이란 조선의 고전음악인 아악을 가리킨다.

 

민요와 아악을 반주음악으로 사용하더라도 원곡 그대로 사용된 적은 거의 없다. 최승희 선생은 자신의 각 작품에 맞추어 원곡을 편곡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듬과 박자, 멜로디와 가사는 원곡과 같더라도 그 진행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축음기를 이용한 녹음 반주일 경우에는 가사가 있는 경우도 있었겠으나 대부분은 가사가 없는 기악곡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레퍼토리에 따르면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다는 <에헤야 노아라>, <초립동>, <보살춤>이 같은 제목으로 발표된 것이 없었다. <보현보살><가무보살><보살춤>에 가까운 제목인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둘 중의 어떤 것이 정병호 선생이 관람한 작품이었을까? 더구나 <에헤야 노아라><초립동>은 그 비슷한 이름의 작품도 찾을 수 없다.

 

어찌된 일일까? 19414월의 부민관 공연은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던 최승희 공연이 아니었던 것일까? 암튼, 조사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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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선생은 193712월부터 194012월까지 만 3년동안 세계순회공연을 단행했다. 19381월의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시작으로 4회에 걸쳐 미국에서 공연했고, 19391월의 파리 공연부터 그해 6월의 네덜란드 덴하크(=헤이그)공연까지 유럽순회공연, 2차대전의 발발로 유럽을 떠난 이후 19399월에서 194012월까지 북미와 남미 공연을 가졌다. 최승희 일행이 세계 순회공연을 마치고 요코하마로 돌아온 것은 1940125일이었다.

 

 

따라서 정병호 선생이 19404월부터 중학생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조선에서 최승희 무용공연을 관람하려면, 최승희 선생이 세계 순회공연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후 다시 처음으로 조선을 방문한 19414월까지 기다려야했다. 최승희 선생은 1941328일 경성에 도착, 42일부터 6일까지 경성공연, 425일에는 부산공연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때 경성 공연과 부산공연 사이에 광주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 공연을 가졌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이후 최승희 선생은 19415-6월 베이징과 톈진에서 18회의 공연을 가진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1942년에는 2월부터 8월까지 6개월간 조선과 만주와 중국 각지에서 대륙전선 위문공연이 있었는데, 216-20(5일간) 경성부민관에서 공연한 후, 2월 말부터 5월 하순까지 강릉, 예산, 군산, 이리, 전주, 순천, 여수, 목포, 광주, 대전, 청주, 천안, 안성, 수원, 춘천, 개성, 평양, 신의주 등에서 공연한 바 있다.

 

 

이는 일제의 조선군사보급회가 최승희 선생을 초빙해 주최한 조선 순회공연으로 강준식(2012)은 강릉을 제외한 17개 도시를 나열했으나, 정병호(1995)는 개성과 신의주를 제외한 16개 도시를 나열한 바 있었다. 하지만 두 도시 목록 모두 순천과 여수, 광주와 목포 등 전남 4개 도시를 포함했고, 나주와 벌교는 들어있지 않았다.

 

1943년에는 812일 도쿄를 출발하여 시모노세키, 부산, 신의주, 만주, 안둥, 푸순, 선양(봉천), 다롄, 창춘(신경), 지린, 하얼빈, 치치하얼, 베이안, 자무쓰 린커우, 무단장, 투먼에서 공연을 갖고, 914일부터 26일까지 난징 공연, 927일부터 1015일까지 상하이 공연, 113일부터 한커우, 텐진, 칭타오 공연, 1123일부터 29일까지 베이징 공연 등, 4개월 반의 중국 공연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갔다.

 

1944년 연합군의 공습이 심해져 일본에서의 공연이 어려워지자 최승희 선생은 315일 조선으로 이주했다. 이후 425일 부터 부산과 대구공연을 거쳐 52-9(8일간) 경성 부민관 공연, 511-15(5일간) 평양공연, 612-13일 개성공연, 619-21일 대구 공연을 가졌고, 이후에도 전주, 부산, 대구, 대전에서 공연을 가졌다. 다시 97-11일 경성 중앙극장에서 공연한 후 최승희 선생은 11월 북경으로 이주했고 해방이 될 때까지 중국에 머물렀다.

 

 

따라서 박경중 선생님의 증언대로 정병호 선생이 중학생 시절 서울에서최승희 선생의 공연을 관람했다면, 이는 194142-6일의 경성공연이거나 1942216-20일의 경성공연, 혹은 194452-9일까지 8일간 열렸던 경성공연이었을 것이다. 세 공연은 모두 경성의 부민관(=후에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렸다.

 

그러나 만일 김준혁 선생의 증언대로 정병호 선생이 중학생 시절 광주에서최승희 선생의 공연을 관람했던 것이라면, 19422월말부터 5월 하순까지 가졌던 조선 순회공연이었을 것이다. 1944년에도 425일부터 621일 사이에 조선의 지방 순회공연을 가지기는 했으나, 광주에서 공연을 했다는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지방 순회공연 보도에는 공연도시가 망라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시기에도 광주 공연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고려할 점은 최승희 선생의 공연 작품들이 1941-1942년 공연과 1943년 이후의 공연 작품들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 정병호 선생이 중학생 시절에 관람했다는 <에헤야 노아라>, <초립동>, <보살춤> 등의 대표적 작품들은 1942년까지만 공연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던 최승희 공연은 194142-6일의 경성공연이거나 1942216-20일의 경성공연, 혹은 19422월말-5월하순 사이의 조선 순회공연이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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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연구의 권위자이자 최초의 본격 평전 <춤추는 최승희(1997)>의 저자이신 정병호(鄭昞浩, 1927-2011) 선생님이 나주 출신이심을 나는 나주에 와서야 알았다. 다시 찾아보니 약력에 분명히 나주 출생이라고 되어 있는데도 전에는 보지 못했었다. 사람의 인지과정은 선택적이고 상황구속적임에 틀림없다. 취재할 때 반드시 현장에 가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주 문화원장을 역임하신 박경중 선생님은 정병호 선생의 절친이셨다고 한다. 박경중 선생님도 1927년생이라고 하셨으니까 갑장이셨던 셈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의 증언이나 공식 기록에 나오지 일화를 많이 이야기해 주셨다. 그런 일화들은 대개 최승희 연구와 직접 관련되지는 않지만 정병호 선생의 삶과 그의 최승희 연구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박경중 선생의 말씀 중에 사실 관계에 의문을 불러일으킨 점도 있었다. 박경중 선생님은 정병호 선생이 중학 시절에 최승희 선생의 무용공연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자신도 무용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공연이 경성(=서울) 공연이었다고 하셨다.

 

나는 혹시 정병호 선생이 중학교 시절에 보셨던 최승희 공연이 나주공연이었을까, 하는 의문으로 조사연구를 시작한 것인데, 박경중 선생님은 그것이 서울공연이라고 단정하셨다. 그러나 그 다음날 인터뷰에 응했던 나주문화원 전 사무국장 김준혁 선생은 그것이 광주공연이었다고 하셨다. 따라서 이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정병호 선생이 평전 <춤추는 최승희>의 머리말에 쓰신 내용을 다시 찾아보았다. 다소 길지만 인용해 보자.

 

일제 시대에 우리 학생들은 이침 조회 때에 동쪽을 향해 서서 천황에게 경례를 하고 자기들이 황국 신민이라고 맹세하고 살았다. 그러니 이승만, 김구도 몰랐고 뒷소문으로 김일성과 박헌영이 들먹여질 정도였다. 그런 시대에도 손기정과 함께 최승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그 둘은 그 시대에 우리 민족의 마음속 깊이 자리를 차지했던 인물이었다.

 

나도 중학생의 몸으로 몰래 극장에서 최승희 무용 공연을 보았다. 그때에 본 최승희의 춤은 <보살춤>, <초립동>, <에헤야 노아라> 들이었다. <보살춤>은 광채가 나는 보석과 구슬을 꿴 줄을 몇 가닥 몸에 걸쳤을 뿐일 정도의 반나체의 모습을 하고 높은 무대에 올라가 손만 가지고 춘 것이었다. 조명이 처음에는 배꼽 부분을 비추다가 차차 온몸으로 퍼졌는데, 사춘기에 보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겠지만 하도 요염해서 어쩌면 사람이 저렇게 아름다울까! 저렇게 아름다운 예술이 있을까!’ 하고 느꼈다. 소문에 그이가 세계적인 무희라는 말이 들렸다. 나는 그때에 그 흥분과 감격을 간직하려고 최승희의 사진 몇 장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손기정이 조선인들의 영웅으로 떠오른 것은 19368월의 베를린 올림픽 이후이므로 정병호 선생의 무용공연 관람도 그 이후임을 알 수 있다.

 

 

또 정병호 선생이 최승희 공연에서 보셨다는 작품들의 창작연대를 조사해 보았더니, <에헤야노아라>1933520,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영녀계주최의 근대여류무용대회에서 초연되었고, <초립동><보살춤>193724, 오사카 아사히칸(朝日館) 공연에서 초연되었다. 따라서 공연작품을 기준으로 해도 정병호 선생의 최승희 무용 첫 관람은 19372월 이후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제가 황국신민 서사를 지어낸 것은 1937년이다. 그해 102일 미나미 지로 총독이 최종 결재한 후 황국신민 서사는 전 조선의 학생들에게 암송하도록 강제됐다. 따라서 정병호 선생의 기억 내용은 193710월 이후로 다시 미루어지게 된다.

 

 

또 정병호 선생은 중학생이었을 때 최승희 무용 공연을 보셨다고 했다. 당시는 제3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취학연령이 만8세였다. 학제는 6년제 심상소학교를 졸업하고 5년제 중학교에 진학하도록 되었다. 정병호 선생은 19404월부터 19453월까지 중학교에 다니셨을 것이다.

 

따라서 정병호 선생께서 최승희 무용공연을 보신 것은 1940년 이후의 일이게 된다. 다만 영민한 학생들은 7세 혹은 심지어 6세에 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는데, 최승희 선생도 만6세에 숙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했었다. 정병호 선생도 그와 비슷한 전례를 따랐다면 그의 중학교 시절은 19394월이나 19384월로까지 앞당겨질 수는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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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2719일 나주 시내의 한 찻집에서 박경중 선생님을 만나 뵙고 약 1시간 반 동안 인터뷰를 진행했다. 나주 문화원장을 역임하신 박경중 선생님은 지금도 나주 문화계의 지도자급 원로이시고, 나주의 명소 남파고택의 주인이기도 하시다. 지금도 그는 나주시 금성길 13번지(지번주소, 남내동 95-7번지)”의 남파고택에 거주하신다.

 

이 저택은 1884년 남파(南坡) 박재규 선생이 초당채를 지으신 이래 1910년대에 안채와 아래채를 짓고 1930년대에 문간채와 바깥사랑채를 지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다. 3,750평의 대지에 20동의 건물로 구성된 남파고택은 국내 최대 규모의 개인주택으로 남도지방 상류층 주택의 전형일 뿐 아니라, 각 건물들이 근대 한옥의 시기별 변천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198761나주 박경중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전남 나주 문화재(153), 20091217일에는 남파가옥이라는 명칭으로 국가 민속문화재(263)로도 지정됐다.

 

 

박경중 선생님께서 인터뷰 요청에 응해주신 것은 전적으로 나주 큰언니 김순희 선생 덕분이었다. 김순희 선생은 나주시 도시재생주민자치위원회에서 활동하실 때부터 박경중 선생님을 모셨다고 했다. 인터뷰 자리에는 <케어팜 더욱>의 최현삼 선생도 동석했는데 박경중 선생님은 농사일을 노년층 돌봄과 치유 목적으로 활용한다는 취지에 공감하셨고 구체적인 실천 방향에 대해서도 의견을 개진하실 만큼 깊은 관심을 나타내셨다.

 

나는 박경중 선생님께 (1) 최승희 나주 공연 여부와 (2) 나주의 8개 극장의 역사를 파악하는 것이 리서치의 목적이라고 말씀드렸고, 이와 관련해서 최승희 연구가 정병호 선생에 대해서, 그리고 일제강점기 문헌에서 찾아낸 나주의 4개 극장에 대해 질문을 드렸다. 박경중 선생님께서는 정병호 선생님과 직접 교분이 있으셨기 때문에 그의 생가와 최승희 연구 과정에 대한 여러 일화를 전해 주셨고, <나주극장><나주중앙극장>에 대한 사실들도 다수 말씀해 주셨다.

 

박경중 선생님의 말씀 중에서 관심을 끌었던 것은 (1) 정병호 선생이 태어나 자란 집에 대해 여러 번 강조하셨던 점, 그리고 (2) 정병호 선생이 어려서부터 춤과 노래에 능했고 중학교 시절 (서울에서) 최승희 무용공연을 관람한 이후 부쩍 무용에 관심을 가졌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우선 정병호 선생의 생가를 찾아보기로 했다. 박경중 선생님께서 최승희 연구의 권위자이신 정병호 선생의 생가 위치를 여러 번 강조해 말씀하셨는데, 거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면 일단 조사해 둘 필요가 있다. 박경중 선생님께서 정병호 선생의 생가가 나주성당의 길 건너 집이자 박정자 선생 댁 뒷집이었다고 하셨다.

 

박경중 선생님과의 인터뷰 다음날 이른 아침 나는 바로 나주성당을 찾아갔다. 나주성당은 지금의 나주시 박정길 3번지,’ 지번 주소로는 나주시 산정동 18-2번지에 자리 잡고 있었고, 숙소에서 약 1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었으므로 로시난테를 타니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박정길은 영산로에서 갈라져 북동쪽으로 뻗어나간 작은 도로인데, 두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는 <나주향토음식체험문화관(박정길 1번지, 산정동16번지)>이 자리 잡고 있고, 나주성당은 바로 그 오른쪽 옆이다. 나주성당과 향토음식체험문화관 사이에 옛날식 대문이 보존된 한식 저택이 남아 있는데, 어떤 건물인지 알려주는 표지판은 없었다.

 

 

지금은 박정길은 물론 영산로 주변 지역이 산정동에 포함되어 있지만, 1913년의 지적원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는 이 지역이 나주면 서문정(西門町)’에 속해 있었다. 나주성의 북문인 북망문(北望門)에서 멀지 않은 곳인데 북문정이 아니라 서문정이었다는 점이 특이했다.

 

지적원도(1913)와 카카오지도(2022)를 비교하니 박정자 선생님 자택의 일제강점기 주소는 서문정 86 혹은 87번지였을 것으로 추정되었고, 그렇다면 정병호 선생님의 생가는 서문정 87번지였을 것이 분명했다. 87번지는 후면에 국유지를 면한 대단히 큰 집이었는데, 정병호 선생의 부친이 천석꾼이었다는 박경중 선생님의 말씀이 실감이 났다.

 

그러나 이 주소지들은 지금은 모두 주차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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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희 선생은 이번 <최승희 나주공연><나주의 극장들> 조사에 참가해 주신 홍일점이다. 역시 첫 나주 방문에서 홍양현 선생의 소개로 처음 인사했는데, 원래 말이 없으신가보다, 하는 착각을 했다. 에코왕곡에서 머무는 동안 말씀이 거의 없으셨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착각이었다. 이순형 선생님네 스마트 하우스를 구경하고 정찬용 선생 댁으로 이동할 때 김순희 선생의 차를 얻어타게 됐는데, 아마도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예의와 접대 차원이었겠으나, 얼마나 이야기를 구성지고 재미있게 하시는지 깜짝 놀랐다.

 

 

게다가 김순희 선생의 전라도 말이 일품이었다. 나는 전라도말에는 여성 앨토 목소리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 편견은 열여덟살 때 생겼다. 대학 시험을 떨어지고 2차 시험을 회피하기 위해 무전여행을 떠났었는데, 광주 검찰청에 근무하시던 외삼촌에게서 여비를 뜯어내기 위해서 충장로 우다방 앞에서 검찰청 가는 길을 물었었다. 그때 들었던 친절한 대답은 둘째 치고 나는 그분의 앨토성 전라도 액센트에 뻑~ 가고 말았다. 재수를 앞둔 비감한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당연히 작업을 걸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내게는 전라도말이 프랑스어보다 아름다웠는데, , 여성의 앨토성 액센트여야 했다.

 

그런데 김순희 선생의 목소리가 딱 그랬다. 운전하시면서 친구 분과 전화통화를 하실 때나 나주가 어떤 곳이고, 자신이 왜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셨는데, 내가 열여덟살 때 들었던 딱 그 목소리였다. 그때 그분이 다시 나타나신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김순희 선생의 또 다른 특징은 자뻑이다. 자신이 이쁘고 아름답고 총명하다는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계셨다. 한때 나주 최고의 미인이었는데, 지금은 3위로 내려앉은 것을 대단히 애석하게 여기셨다. 순위를 누가 매긴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자신이 그렇게 믿고 사신다는 데야 어쩔 도리는 없다. 실제로 이쁘신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이쁘고 총명하다는 점을 자신감의 근거로 당당하게 내세우시는 모습이 특이했다. 이런 현상을 전문용어로 깔때기 혹은 자뻑이라고 부르는데, 나한테도 익숙한 개념이다.

 

 

나는 대학 1학년때 빵꾸(F) 났던 학점을 때우느라고 복학한 뒤에 심리학 개론을 재수강해야 했는데, 그때 담당교수가 장병림 교수님이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당시 수업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고, 특히 마지막 수업에 하셨던 말씀 중의 한 구절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제군들, (, 실제로 제군이라는 말을 쓰셨다.^^), 살다보면 힘든 일이 많을 거다. 그럴 때마다 이만하면 괜찮다고 큰소리로 자꾸 말해라. 그러면 진짜로 괜찮아질거야.”

 

이게 무슨 말인지 그때는 몰랐지만, 아마도 자성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의 일종이 아닌가 나중에 짐작이 되었다. 그리고 그 주문이 실제로 도움이 되었다. 굴곡과 구비가 많은 삶을 살아오면서도 이만하면 괜찮지하면서 지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이만하면 잘한 거지하면서 자뻑의 경지를 업그레이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남들한테 하지는 못했고, 언제나 혼잣말이었지만, 그래도 효과는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김순희 선생은 그런 자뻑 멘트를 남들에게도 서스럼없이 날리신다. 웬만한 자신감이 아니고는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이다. 정찬용 선생 댁에서 바비큐 파티 하는 동안에도 대각선으로 맞은편에 앉으신 김순희 선생이 간간이 날리는 자뻑 멘트에 감탄하느라 고기 맛을 몰랐다.

 

<최승희 나주공연><나주의 극장들> 조사연구를 도와주시도록 김순희 선생께 부탁을 드린 것은 물론 그윽한 앨토성 전라도 액센트나 심각한 수준의 자뻑 때문은 아니다. 김순희 선생의 나주 네트워크가 매우 넓고 촘촘하고 끈끈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주제로 질문을 하든지 김순희 선생은 그건 이러저러한 분이 잘 아실텐데, 소개해 드릴까요하고 대답하곤 하셨다. 그게 뻥이 아니라면(실제로 뻥이 아니었다) 처음 방문하는 낯선 곳에서 조사연구를 하는 연구자에게는 꼭 필요한 가이드였다. 그래서 초면의 실례를 무릅쓰고 조사팀에 참가해 주시기를 부탁드렸던 것이고 다행히 승낙해 주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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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까지만 해도 역대 나주의 극장들을 6개로 파악됐었다. <호남의 극장문화사(2007, 위경혜)>는 해방 이후 나주 지역에 <나주극장(1955)><영산포극장(1958)>, <중앙극장(1963)>이 있었다고 했고, 나는 고신문을 조사해 남문정의 <마연(馬淵)극장(1931)>, <금성정(錦城町)극장(1931)>, <촌상(村上)극장(1938)><나주극장(1939)>을 더 찾아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6개의 극장을 이미 찾아내어 발표한 논문이 있었다. 김남석의 <나주지역 극장의 생성과 역사적 전개에 대한 연구(2022, 160)>가 그것이다. 조금 길지만 인용해 보자.

 

 

“19313월 나주에 방문한 김소랑 대표 삼천가극단은 방문 공연을 남문정(南門町) <마연극장>에서 시행했다(조선일보 193138). 19317월 나주에서 시행된 영사대회 역시 금성정극장에서 시행되었다(동아일보, 193178). 그런가 하면 1938년에 열린 나주국방의회(羅州國防義會)는 촌상극장에서 정기총회로 개최되었다(동아일보, 193884). 1938년 나주 시국 강연도 이 촌상극장에서 개최된 바 있다(동아일보 1938107). ... 1939년 나주에서는 가정방호조합(家庭防護組合)’ 결성식이 나주극장에서 열렸다(조선일보, 1939628). ... 동 시기에도 촌상극장은 여전히 존재했다. 가령 19399월 나주에서 열린 신불출, 유추강, 고봉선의 만담과 야담대회는 촌상극장에서 시행되었다(동아일보, 193993).

 

촌상마연은 둘 다 일본인의 성()이다. 각각 무라카미마부치라고 발음한다. 이 두 극장의 설립자는 일본인이었고, 그들의 성을 따서 극장 이름을 지은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촌상극장><무라카미(村上)극장>, <마연극장><마부치(馬淵)극장>이라고 불러야 맞겠으나, 이 글에서는 당시의 관행대로 <촌상극장><마연극장>이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그런데 김남석(2022, 157)은 나주 지역에 극장이 더 있었다고 서술했다. 영산포에 <영산포극장> 말고도 <영산포 중앙극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김남석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또한 나주 지역에는 영산포도 포함되는데, 영산포에는 영산포극장과 영산포중앙극장이 존재했다. 영산포극장이 더 오래된 극장이었고, 영산포중앙극장은 이와 경쟁 관계에 있는 극장이었다. 두 극장은 시차를 두고 설립되었고, 그로 인해 영산포극장은 전통과 역사성을 확보한 극장이 되었고, 영산포중앙극장은 개성과 세련미를 겸비한 극장으로 설립되었다.”

 

실제로 내가 <영산포극장> 터를 답사했을 때, 인터뷰에 응한 영산포 주민 한 분의 증언에 따르더라도 <영산포극장> 외에도 <영산포중앙극장>이 영산포 다리에서 홍어거리 쪽으로 50미터쯤 내려간 곳에 3층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었다. 그는 또 <영산포중앙극장>이 개관되기는 했으나 극히 짧은 기간만 영화 상영을 하다가 이내 폐업했었다고 서술했다.

 

이 증언은 1969228일자 <동아일보(3)>기사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당시 영산포에는 <영산포극장>과 함께 새로 <영산포중앙극장(1969)>도 개관했는데, 두 극장은 라이벌 관계였다. 더구나 이 기사는 1969228일에 열렸던 나주의 국회의원 재선거 과정에서 두 극장주의 대립과 갈등으로 <영산포중앙극장>의 주인이 쇼크사한 사실도 언급했는데, 대립과 갈등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보도되지 않았다.

 

 

한편, 남평 지역에도 극장이 있었다는 정찬용 선생의 증언이 있다. 그는 젊은 시절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남평에도 극장이 있었다고 언급했는데, 따라서 <영화연감(1980)>과 위경혜(2007), 김남석(2022)의 서술, 그리고 정찬용 선생과 성명 미상의 영산포 주민의 증언을 종합하면 일제강점기 이래 나주 지역의 극장은 모두 8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조사는 최승희 선생의 나주공연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시작됐으나, 이내 취재의 초점이 나주의 극장들로 옮겨졌다. 최승희 선생이 나주에서 공연했다는 문헌 기록이나 증언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가운데, 지금까지 나주 지역에 설립되었던 극장들을 조사하다보면 새로운 실마리가 발견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조사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이래 나주 지역에 설립되었던 극장은 총 8개였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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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삼 선생을 만난 것도 2022년 5월의 내 첫 나주 방문 때였다. 홍양현 선생의 안내로 봉황면 욱곡리 욱실마을에 있는 그의 <더욱 케어팜>을 방문했고, 그날 밤을 케어팜에서 지내면서 내가 몰랐던 나주의 농업, 의료, 사회보장 부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더욱 케어팜>의 설립자 최현삼 선생을 모두들 귀농, 즉 귀향한 농부라고 불렀다. 서울에서 역사 교사로 오래 일하다가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있으니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의 귀향은 과거 나주 선비들의 귀향과 사뭇 다른 점이 있다. 서울을 떠나 고향에 돌아온 것은 같으나, 서울로 복귀하기 위해 칠천팔기의 기회를 노리거나 혹은 그저 안빈낙도를 꿈꾸던 과거의 선비들과는 달리 최현삼 선생은 욱실마을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일들은 한국사회가 첨단 분야로 지정해 그 발전을 위해 노력을 경주하는 사업이었던 것이다.

 

 

나주 선비들의 귀향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더욱 케어팜>에서 서쪽으로 약 1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송죽리에는 금사정(錦社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현량과 실시(1518)와 소격서폐지(1518) 등을 추진한 조광조(1482-1519)의 개혁이 실패하고 기묘사화(1519)로 조광조 자신을 포함한 70여명의 선비들이 처형당한 뒤, 조광조를 따르던 나주 출신의 선비 11명이 고향으로 돌아가 안빈낙도의 한 방편으로 지은 정자라고 한다.

 

이 정자의 원래의 이름은 11명의 선비들이 결성한 모임 금강계를 딴 금강정(錦江亭)이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현종 6(1665)에 재건, 고종 6(1869)에 중수한 후 1973년에 나주시가 복원하면서, 편액이 지금의 금사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금강정이 금사정이 된 구체적 시기와 자세한 이유는 알아내지 못했다.

 

최현삼 선생의 환향은 시간적으로는 멀지만 지리적으로는 가까운 금사정의 선비 11인의 낙향과 사뭇 다르다. 금사정의 11인은 중앙정계에서 실패하고 마지못해 고향에 돌아온 것이지만, 최현삼 선생은 비교적 안정적인 서울생활을 뒤로한 채 자발적으로 귀향한 것인데, 특히 최현삼 선생이 부모님의 건강을 염려했던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고 했다. 나는 내심 깊은 감동을 느꼈다.

 

 

최현삼 선생은 연로해 가시는 부모님의 의료적 필요를 위해 케어팜(Care Farm)을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 농사일을 의료적 목적으로 활용한다는 케어팜의 개념은 일찍이 19세기초 미국의 국부로 숭앙되는 벤자민 러쉬(Benjamin Rush, 17461813)의 저서 <마음의 병(The Diseases of The Mind, 1812)>에서 개진된 바 있었지만, 그것이 사회운동으로 꽃이 핀 것은 20세기 후반 유럽 각국에서였고, 한국에 소개된 것은 21세기 초였던 것이어서, 최현삼 선생은 자신의 개인적, 가족적 필요를 한국사회에서 개발되는 첨단 산업부문의 관행에 접목시켜 해결할 뿐 아니라, 공동체적, 사회적 관행으로 정착시켜 나가려고 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내가 최승희 선생의 전남 공연, 특히 나주 공연 여부를 조사하면서 최현삼 선생의 의견과 조언이 필요했던 것은 그의 효성이나 사업적 안목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가진 역사학적 소양과 그것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그의 절제된 소통방식 때문이었다. 이같은 그의 성향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회활동가들이 보이는 실천 중심의 경향성을 균형잡는 데에 아주 긴요하게 느껴졌다.

 

 

부딪힌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연쇄적으로 구상하고 행동에 옮기느라 바쁜 최현삼 선생에게 조언과 도움을 부탁하는 것은 미안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내가 용기를 내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최현삼 선생이 <더욱 케어팜> 사무실 입구 안쪽에 붙여둔 <방문객>이라는 정현종의 시 한편 때문이었다.

 

자기 집/사무실에 미카사 수카사라든가 이집에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평화,” 혹은 시작은 미미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같은 문구를 붙이는 사람은 많지만,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라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라는 시구를 걸어둔 사람은 최현삼 선생이 처음이다. 나는 어쩌면 그런 환대를 기대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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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극장> 좌담회의 담장(談場)’ 포스터를 비판한답시고 원고지를 10매 가량 낭비했지만, 좌담회 자체는 사뭇 중요한 행사임에 틀림없다. <나주극장>이 문화체육관광부가 공모한 유휴공간 문화재생사업 대상지로 선정되었다고 발표된 것이 202065일이었고, 나주시가 <나주극장>의 소유사 나주신용협동조합과 문화재생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한 것이 2021120일이었으므로, 반년이 더 지난 지금쯤 시민과 전문가들의 중지를 모을 시기인 것이 맞다.

 

신문기사들에 따르면 문화재생사업은 보존 가치가 높은 지역 내 유휴공간을 찾아 특성에 맞는 문화재생 공간으로 조성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나주시는 옛 나주극장이 가진 역사, 장소적 가치를 되살리고 다시 나주극장이라는 테마로 근대 문화·예술·생활역사를 영사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보존가치라는 게 뭘까? 이 좌담회의 1부 강연에서는 그 점이 논의되었을 것이다. 보존 가치의 기준의 하나는 아마도 오래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오래된 것은 보존가치가 있다. 그래서 나주시의 계획 중에 이 극장의 역사적 가치를 되살린다는 말이 포함된 것이리라.

 

사실 나주시 자체가 보존가치가 높은 고장이다. 1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고장이 한국에서 그리 많지 않다. 한양의 역사는 6백여 년에 불과하고 부산의 역사도 2백년이 되지 못한다. 북한에는 평양과 개성이 1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도시라면, 한국에서는 경주와 나주 정도일 것이다. 당연히 보존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

 

<나주극장>이 보존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그것이 1930년대에 세워진 오래된 극장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오래된 역사가 제대로 구명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공모사업 선정과, 업무협약 체결, 그리고 좌담회 등에 관한 기사들을 보면 이 극장이 “1930년대에 들어선 나주 지역 최초의 극장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맞는 말일까?

 

 

우선 언론 기사들은 <나주극장>“1930년대에 들어섰다고 했지만 개관 시기를 더 특정하지는 못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1930년대는 2번의 변곡점을 갖는다. 1931년과 1937년이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 침략을 시작했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이 두 시기를 기준으로 <나주극장>이 언제 설립되었는지에 따라 그 성격이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그동안 <나주극장>의 설립연대를 특정하지 못했다면 이 극장의 성격과 활용도가 제대로 파악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다행히 문화재생 좌담회의 주제가 옛 나주극장의 추억 찾기이고, 부제가 시민들의 기억 나눔이다. 나주시민들이 간직해 온 <나주극장>의 추억을 공유하자는 취지였을 것이다. 그런 기억들이 소중한 정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나주시민들의 개인적 추억을 수집해도 극장의 역사가 충분히 구명되지는 못한다. 나주극장의 역사가 90년이라면 개인들의 기억은 그 절반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생존한 개인들의 <나주극장> 경험은 1980년대 이후가 대부분이고 19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쉽지 않다. 1950년대와 그 이전의 <나주극장>의 역사는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록이 중요하다. 나주극장이 1930년대에 설립되었다면 당시의 기록을 찾아내야 한다. 지금까지 발굴된 <나주극장>에 대한 문헌 기록은 일제강점기의 신문기사, 그것도 중앙지의 지방판에 수록된 단신 수 건에 불과하다. <나주극장>90년 역사와 그 진면목을 파악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기록이다.

 

기록이란 문헌뿐 아니라 사진과 영상도 포함하는데, 안타깝게도 1980년대 이전의 <나주극장> 사진이나 영상은 단 한 건도 남겨진 것이 없다. 이른바 활동사진을 상영하던 최초의 근대적 문화공간이었던 <나주극장>이 단 한 장의 사진이나 단 한 편의 활동사진도 남기지 않다는 것은 역설이다.

 

지금부터라도 <나주극장>에 대한 기록부터 부지런히 발굴해야 한다는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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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용 선생을 만난 것은 내가 처음 나주에 갔을 때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집으로 초대하고 잠자리를 제공하는 분위기였다. 이 첫 방문에서 나는 윤대근 선생의 집/작업실에서 차를 마셨고, 이순형 선생의 스마트 하우스를 구경했고, 정찬용 선생의 집에서 바비큐 저녁을 먹었고, 최현삼 선생의 케어팜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당시 동행이었던 정연진 선생을 재워주신 게 정찬용 선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외국에서 살 때는 누구를 집으로 초대하거나 누군가의 초대를 받는 것은 사전 계획이 필요한 큰일이었고, 지인이 있는 지역에 출장을 다닐 때도 호텔 잠에 익숙했다. 서울에 돌아온 뒤에도 예고 없이 친구 집에 쳐들어가던 옛날 관행은 사라졌음을 알았고, 모임은 대개 식당과 카페에서 이뤄졌다. 그에 비해 나주에서의 즉석 초대와 활수한 대접은 거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방문 중에 나는 정찬용 선생이 상처하신지 얼마 되지 않으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 원인이 여러 면에서 내 경우와 비슷했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동병상련을 느꼈고, 그가 앞으로 헤쳐 나갈 일들에 대해 좀 걱정도 되었다. (큰아이가 딸이라는 점이 나보다는 나을 것이라며 혼자 안도를 느끼기도 했다. 분주한 아버지와 사춘기 아들은 최악의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주극장 프로젝트>에 정찬용 선생의 도움을 받고 싶었던 까닭은 그가 베푼 호의나 내가 느낀 동병상린 때문이 아니다. 나는 그의 글쓰기가 좋았다. 페이스북과 블로그의 글을 보면 그의 문장은 짧지만 글은 길다. 이게 요즘 한국의 저널리즘에서는 독특한 현상이다.

 

특집이나 잡지의 글이 아니라면 한국 저널리즘의 글은 너무 짧다. ‘두괄식을 너머 만 있는 느낌이다. 독자가 궁금한 디테일이 턱없이 모자란다. 내가 20년 이상 익숙해졌던 미국 저널리즘은 신문기사도 긴 편이다. ‘야마를 앞에 두되 뒤쪽의 디테일도 생략하지 않는다. 어디까지 읽을 것인지는 독자가 결정하라는 식이다.

 

방송도 그렇다. 티비 방송에서도 야마와 디테일을 병행하는 것이 표준인데, 이는 미국의 전설적인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의 선례 덕분이다. 크롱카이트가 은퇴한 뒤 2000년대 초까지 20년 이상 미국 뉴스방송을 주도한 3인방 댄 래더(Dan Rather, CBS), 톰 브로카우(Tom Brokaw, NBC), 피터 제닝스(Peter Jennings, ABC)도 크롱카이트의 전통을 이었다. 정찬용 선생의 글은, 미국 앵커들처럼, 야마와 함께 디테일이 살아 있어서 읽는 맛이 나고, 읽고 나면 그림이 그려진다. 특히 그의 디테일 때문에 저널리즘뿐 아니라 아카데미즘에도 도움이 된다.

 

 

또 한 가지의 특징은 그의 글에 사진이 많다는 것이다. 보통의 신문, 잡지 기사는 글이 짧은 만큼 사진도 별로 쓰지 않는다. 많아야 2-3, 적으면 1장에 그친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그 기자가 현장에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찬용 선생의 페이스북과 블로그 글에는 사진이 많다. 잘 찍은 사진도 있고 대충 찍은 듯한 사진도 더러 눈에 띠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사진이 많다는 것은 취재 현장에 처음부터 끝까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찬용 선생은 적어도 한국의 평균적 저널리스트와는 다른 저널리스트이다.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서재를 보고 감탄했다. 단지 책이 많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분야 관련서적들이 중심이었고, 그 자료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이는 그가 관심이 확실한 취재자이며, 관련 자료를 부지런히 모아 정리하는 성실한 취재자라는 뜻이다.

 

 

더구나 음악가 안성현의 삶과 작품이 그의 관심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의 도움이 꼭 필요해졌다. 음악가 채동선의 가계와 교우범위를 조사한 것이 최승희의 벌교 공연으로 이어졌듯이, 안성현의 삶과 노래가 최승희의 나주 공연을 조사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정찬용 선생이 가진 안성현에 대한 자료는 내게 무척 요긴한 참고가 될 것이다.

 

그의 고마운 호의가 바베큐에 그치지 않고 자료와 관심의 공유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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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 번째로 나주를 방문하기 이틀 전인 202277일 나주에서 좌담회가 하나 열렸다. <나주극장>의 문화재생을 위한 좌담회라고 기사화되었다. 장소는 <나주극장> 옆의 나주 신협 본점 주차장이었고, 시간은 오후 7시였다. 좌담회 날짜는 주말이 아닌 목요일인데, 시간은 저녁 7시였다. 777, 이 한 가지만으로도 주최 측이 매우 애를 쓴 흔적이 읽혀진다.

 

좌담회의 목적은 <나주극장>의 성공적인 문화재생 공간을 조성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좌담회를 알리는 일부 기사에는 퇴락한 <나주극장>의 오늘날 모습과 함께 주최 측이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포스터도 게재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 포스터를 보면서 뭔가 불편했다.

 

 

포스터에 쓰인 커다란 談場이라는 한자 때문이다. 이 한자의 폰트크기는 다른 어떤 글자보다 4-10배 이상 컸기 때문에 눈에 얼른 띌 수밖에 없다. 의도는 이해가 된다. 한국어로 읽으면 담장이지만 한자로 읽으면 이야기 터라는 뜻이니, 역설과 반전을 노린 표어일 것이다.

 

하지만 제작자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려면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포스터를 보는 사람이 한자 자와 자를 이라고 읽을 줄 알아야 하고, 그 각각이 대화라는 뜻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 역설과 반전, 그리고 그 포스터 제작자의 재치를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요즘 젊은 세대는 한자를 모를 뿐 아니라, 아주 싫어한다는 점이다. 중국을 얕잡아 보거나 싫어하는 일부 젊은이들의 심리도 한자를 경시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지금 40대에 도달해 중년에 진입하는 세대도 학교에서 한자를 필수과목으로 배운 적이 없다. 그런 배경을 가진 젊은 세대에게 한자는 결코 매력적인 언어나 효과적인 전달매체가 아니다.

 

 

그런데도 공공포스터에 한자를 쓴다는 것은 젊은 세대는 빠져라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커다란 한자 옆에 작은 글씨로 담장이라고 써놓아도 소용없다. 읽을 수 있어도 뜻을 모르면 말짱 도루묵이기 때문이다. 담장이라는 한글 대신 이야기 터라고 번역을 해 놓아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談場이라는 한자를 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담장(談場)’은 그 담장(-)이 아니라면서도 포스터의 배경 사진은 담쟁이덩굴에 뒤덮인 육중한 담장이다. 혼란은 가중된다. 그 담장이 아니라면 담장 사진을 쓸 것이 아니라, 중요한 사건 때마다 나주 사람들이 한데 모여 의논하고 행동에 돌입했던 금성관 앞 광장 사진이나, 하다못해 고대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사진이라도 써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런 소통상의 문제점보다 약간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런 식의 표기는 한자는 중요한 시니피앙(signifiant)”이지만 한글은 불완전한 보조적 시니피에(signifié)”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한글 반포를 저지하려고 거듭 상소를 올리던 집현전 학사들의 마인드는 6백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심지어 나주에서도 말이다.

 

 

그러나 이 한자 문제를 국수주의로 끌고 가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 한자 키워드를 젊은 세대가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뿐이다. “담장이지?” 하며 의아해 하는 젊은이들에게 한자를 알아야 뜻을 알 수 있다고 재삼 재사 설명해야 한다면, 이 포스터의 기능은 원래 의도와는 달리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공공포스터의 목적은 공중 일반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가 함께 이해할 수만 있다면 외래어든, 외국어든, 영어든, 일본어든, 타갈로그어이든 스와힐리어든, 어떤 말이든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포스터의 구성요소가 특정 계층을 소외시키는 쪽으로 제작된다면 그 포스터는 본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주극장> 문화재생 프로그램을 성공시키기 위해 좌담회를 연 것은 환영할 일이다. 젊은이들도 좌담회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청년들이 문화재생 사업에 직접 참여하고,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이 지역사회 현안에 관심이 없다고 한탄하는 경향이 있지만, 청년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조건과 기회를 마련하는데 더 애써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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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홍반장 홍양현 선생의 소개로 알게된 분이 시습재 임재택 선생님이다. 내 선배님 중에 민청학련 사건의 피해자 임상택 선생님이 계시고, 영화감독 중에도 임권택 선생이 계신데, 아마도 임재택 선생님과 같은 문중 동일 항렬의 인물들이신 것으로 짐작된다.

 

시습재 선생님은 내가 최승희의 벌교 공연을 조사할 때 결정적인 도움을 주셨다. 벌교 문화계의 명사 한광석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기 때문이다. 딱 한 번 만나 뵈었지만 말씀도 별로 없으시고, 약간 미소띤 표정으로 누구의 말이든 경청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홍양현 선생은 임재택 선생님의 호가 시습재라고 알려주었는데, 호가 따로 있으신 걸 보니까 한문과 고전에 능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발견된 문헌에는 최승희의 벌교 공연’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의 벌교는 일제 강점기의 벌교와 상황이 사뭇 다르기 때문에 최승희의 벌교 공연에 대한 담론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요즘의 벌교는 소설가 조정래 선생님의 <태백산맥>과 작곡가 채동선 선생님의 <고향>과 <모란이 피기까지는>, 그리고 꼬막 정식 이야기로 요약될 수 있는 곳이다.

 

 

내가 최승희의 벌교 공연을 조사하게 된 것은 신문에서 어렵사리 발견한 홍보기사 한 줄 때문이었다. 19311126일자 <동아일보(3)>에서 최승희여사 무용회, 126일 벌교구락부에서 개최라는 두 줄짜리 단신을 발견한 것이다. 완전한 문장을 갖추지도 못한 단신 기사였지만 6하원칙의 4(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가 명시된 훌륭한 정보였다. 이제 나머지 2(어떻게, )를 보충하는 것이 연구자로서 내가 할 일이었다.

 

이 자료를 보시자마자 임재택 선생님은 벌교 문화계 유지 한광석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다. 두분은 초등학교 동창이시라고 하셨다.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리 사이가 뜨기는 했다지만 동창생과 연락하면서 반세기를 함께 살아오신 분들이 계신다는 게 감탄스러웠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던 나는 초등학교(2)의 동창은 물론 중학교 동창들까지도 모두 끊어져서 연락되는 친구들이 없다.

 

임재택 선생님은 내게 한광석 선생님을 소개하셨을 뿐 아니라, 그 즉시 한광석 선생님께도 내 이야기를 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당장 다음날 만날 약속을 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광주 조사 중이었으므로 <광주극장> 취재를 마치자마자 벌교로 향할 계획이었으나, 한광석 선생님께서 거꾸로 광주에 오시겠다고 하셨다.

 

 

한광석 선생님은 건장하고 호남형의 인물도 출중하신 분이었고, 맵시를 보니 패션 감각도 상당하셨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글과 그림도 잘하시고, 특히 염색 분야의 권위자셨다. 놀라운 것은 고등학교 시절 내 미술반 지도교사이셨던 박복규 선생님을 잘 아시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박복규 선생님은 ,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그냥 형이라고 불러하셨던 화끈한 분이셨는데, 3년 전에 지병으로 유명을 달리하셨다. 고인의 명복을 빌어마지 않는다. 이후 내가 나이 차이나 지위 고하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누구든 친구를 삼거나 선생으로 모시게 된 경향성은 박복규 선생님을 모방한 덕분이라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임재택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한광석 선생님도 벌교의 음악가 채동선 선생님 이야기를 자세히 해 주셨다. 그런데 바로 그 채동선 선생님에 대한 정보가 벌교 공연 조사의 핵심 열쇠가 되었다. 채동선(蔡東鮮, 1901-1953)은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崔承一, 1902-?)과 경성시절과 도쿄 유학시절을 공유한 동년배의 가까운 사이였고, 최승희의 남편 안막(安弼承, 1910-?)의 와세다 영문학과 선배이기도 했다.

 

 

게다가 최승희 벌교 공연이 있었던 <벌교구락부>은 채동선의 부친 채중현(蔡重鉉)씨가 사재를 털어 1930126일 완공한 극장이었고, 최승희의 벌교 공연일(1931126)<벌교구락부> 개관 1주년 기념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최승희 벌교공연의 어떻게가 구명되었는데, 여기에는 한광석 선생님과 함께 임재택 선생님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던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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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수로 5년 동안 최승희 선생 공연 조사를 해오면서 개발된 방식이 있는데, 첫 단계는 신문기사 조사였다. 유럽조사에서도 그랬는데, 특히 파리와 마르세이유, 브뤼셀과 안트베르펜, 암스텔담과 덴하크(=헤이그)에서는 각각 수십 건의 최승희 관련 기사를 무더기로 발굴해 낼 수 있었다. 덕분에 최승희 선생의 유럽 공연 일정을 빈틈없이 재구성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홋카이도의 나요로(名寄)에서 오키나와의 나하(那覇)에 이르기까지 일본 전역의 42개 도시를 방문해 각 지역신문에 난 최승희 관련기사를 긁어모았는데, 그 수가 1천 건을 넘었다. 최승희의 일본공연 일정과 공연 레파토리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지역신문 기사들 덕분이었다.

 

 

그런데 나주에서는 그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지방신문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성(=서울)에서 발행되었던 중앙지의 지방판을 대상으로 최승희나주를 키워드로 삼아 검색을 해 보았지만 단 한 건의 기사도 찾지 못했다. 이것이 나주공연은 없었다는 결정적 증거는 아니다. 중앙지의 지방판 기사들은 그 수도 적고, 주로 경제와 사회문제에 국한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계학적으로 말하자면 모집단이 아니라 표본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사의 초점을 최승희의 무용공연에서 나주의 극장들로 옮기기로 했다. 극장 조사를 하다보면 공연 이야기가 곁들여지게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1930년대의 최승희 공연에 대한 단서가 발견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나주의 극장들을 조사하면서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 <호남의 극장문화사(2007, 위경혜)>였다. 1950년대 이후의 호남 지역 극장들을 조사한 책이다. 이 책에는 광주의 극장들이 제외되었는데, 이는 같은 저자의 다른 저서 <광주의 극장문화사(2005)>에서 이미 자세히 다루었기 때문이다. 이 저서들은 기존의 문헌자료뿐 아니라 각 극장 관계자들의 증언을 광범위하게 수집해 서술되었으므로 내용이 포괄적이면서도 디테일이 살아있는 훌륭한 입문서다.

 

 

<호남의 극장문화사(113-114)>에 따르면 1980년 현재 광주를 제외한 전남지역에는 모두 37개의 극장이 산재해 있었다. 그중 목포의 극장이 6개로 가장 많았고, 여수(5), 순천(4), 영광(3)에 이어 광산, 고흥, 보성, 그리고 나주가 각 2개씩의 극장을 가진 것으로 집계되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간한 <영화연감>을 참조해 집계한 통계였다.

 

<영화연감>은 나주의 극장을 <나주극장(1955)><영산포극장(1958)>2개로 정리했지만, 이는 해방 이후의 공문서 기록만 기반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포괄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위경혜(2007, 233)는 별도의 인터뷰 조사를 통해 <중앙극장(1963)>을 추가하면서 근대 이전의 식민시기, 그리고 해방 이후에 이르기까지 호남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 나주에 있었던 극장은 총 3라고 서술했다. 나주의 극장 조사를 위한 출발점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나는 별도의 신문기사 검색을 통해 1930년대의 나주에는 3개의 극장이 더 있었던 사실을 발굴해 냈다. 193138일자 <조선일보(7)>에는 남문정의 <마연(馬淵)극장>이 언급되었고, 193884일자 <동아일보(3)>에는 <촌상(村上)극장>, 193178일자 <동아일보(3)>에도 <금성정(錦城町)극장>의 영화상영 기사가 게재되어 있었다.

 

 

따라서 <영화연감><호남의 극장문화사>와 함께 금번에 실시한 추가조사 결과를 합치면 1930년대 이래 나주에는 적어도 6개의 극장이 개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연극장>, <금성정극장>, <촌상극장>, <나주극장>, <영산포극장>, <중앙극장>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중 <나주극장><영산포극장>은 그 자리와 건물이 일부나마 남아 있고, <중앙극장>의 터도 확인할 수는 있지만, <마연극장><금성정극장>, <촌상극장>은 그 이름을 제외하고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는, 이번에 새로 발굴된 극장들이다.

 

이제 이 6개 극장들의 이름과 위치, 설립연도와 설립자 등을 파악하는 것이 다음 과제이다. 그러고 나면 각 극장들에서 이뤄졌던 주요 공연을 조사할 발판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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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나주공연을 조사한다고는 하지만 처음부터 기대는 그리 높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주 공연에 대한 문헌이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의 신문과 잡지에는 최승희의 나주공연에 대한 보도가 단 한 건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나주공연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당시의 지역 문헌은 거의 다 사라진 상태이고, 남은 문헌은 중앙지의 지방판에 난 기사들뿐이기 때문이다. 중앙지의 지방 기사는 그 수도 적고, 그나마 사회나 경제 기사가 우선권을 차지했다

 

직접적 문헌증거 없이 조사를 시작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다양한 분야의 문헌에 삽화나 에피소드로 잠깐잠깐씩 등장하는 세세한 내용들을 모두 긁어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나는 이 조사에 참여해 줄 나주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틀의 의논과 부탁 끝에 다섯 분을 나의 첫 나주 선생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올해 광주항쟁 기념행사에 참석했다가 만났던 홍양현 선생과 그의 소개로 나주에서 만났던 임재택 선생님, 그리고 김순희, 정찬용, 최현삼 선생들께 도움을 청했다. 대략의 계획을 말씀드리자 모두 수락해 주셨기에 우선 카카오톡에 단톡방을 만들고 <나주극장 프로젝트>라고 이름을 붙였다. 조사를 최승희 선생의 공연에만 한정하지 않고, 1930년대 나주의 극장들을 전체적으로 조사해 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홍양현 선생은 영화 <홍반장(2004)>의 홍반장 같은 사람이다.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아주 길어서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이다. 영화에서 김주혁이 그러는 것처럼, 나주의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든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사람이 홍양현 선생인 것 같다. 그의 대표 직함은 자신이 창설한 청소년 특별활동 프로그램 <나주학교>의 교장이지만 그의 활동이 <나주학교>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나주인이라는 말을 나 주인이라고 띄어 쓰면서 나주 사람들은 내가 주인인 사람들이라고 설명해 주었는데, 재치와 어거지가 반반 섞인 느낌이기는 했지만, 말 한마디를 가지고도 깊이 생각하는 성격과 사소해 보이는 꺼리에서 멋진 이야기를 끌어내는 능력이 엿보였다.

 

 

나는 이원영-정연진 선생 부부와 함께 올해 5월 광주항쟁 기념제의 사전 행사에 참석했다가 홍양현 선생을 처음 만났는데, 그날 밤 그가 광주의 <가객>에서 시전한 시낭송에 홀딱 반했다. 이후 6월에 있었던 여순항쟁 유적지 답사에 동행했다가 일행과 떨어져 나주에 갔는데, 그때도 홍양원 선생은 <초록추어탕> 한 켠에서 김영일 선생의 질펀한 공연을 마련해 주었다.

 

내가 최승희 전남지역 공연을 조사 중이라는 말에 홍양현 선생은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 주려고 애썼다. 최승희가 나주공연은 안했소?”했던 그의 질문이 이번 프로젝트의 시발점이었다.

 

홍양현 선생은 나주가 경제적 풍요와 예술적 풍성함을 이어온 천년 역사의 고장이므로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견해가 확고한 사람이다. 최승희 선생이 목포와 광주에서 공연하면서 나주 공연을 건너뛰었다면 홍양현 선생은 섭섭했을 것이다. 이번 조사는 홍양현 선생의 섭섭함이 근거 없음을 보이려는 시도일 지도 모르겠다.

 

 

홍양현 선생은 나주에서 아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사람에 속한다. 그의 인맥과 소통의 네트워크는 이번 <아치의 노래> 나주 상영회에서도 증명되었다. 대규모의 거창한 상영회는 아니지만 그가 일단 옳은 일이라고 판단하면서 일은 시작되었다. 일을 벌이되 마무리가 약하다는 평이 있긴 한데, 그가 해온 일들이 명분 있는 일임을 잘 아는 친구와 선후배들이 그의 약점을 잘 보강해 준다. 이번에도 <실학강독회> 회원들이 상영회와 뒷풀이를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는 바람에 좋은 결과를 낳은 것 같다.

 

2022년 정태춘 선생의 노래가 나주인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다면, 90년 전 최승희 선생의 무용 공연도 그랬을 것이다. 홍양현 선생 같은 나주인들과 함께 의논하면서 느리더라도 꾸준하게 최승희 선생의 나주공연을 조사해 볼 작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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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또 시작되나 보다. 나주 때문이다. 겨우 세 번 방문으로 나는 나주에 완전히 매료됐다.

 

나주의 수려한 산수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영산강은 도도하고 금성산은 웅장하니까. 혹은 도시 구석구석 깃든 긴 역사의 흔적과 그 안에서 새로 솟는 에너지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당당한 나주목 금성관과 생기 넘치는 호수공원이 그 증거이다.

 

 

하지만 나주의 진짜 매력은 사람이다. 펜실베니아 랭카스터와 텍사스 코퍼스크리스티에서도 그랬고, 스페인 피니스테라와 남프랑스 앙티베에서도 그랬다. 홋카이도 쿠시로와 오키나와 나하에서도 그랬고, 강원도 강릉과 경상남도 통영, 전라남도 벌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고장이 기억에 남는 것은 그곳에서 맺고 얽혔던 인연 때문이다. 매력의 핵심은 항상 사람이다.

 

나주라고 예외일 리 없다. 1천년의 역사를 만들어온 것도 사람이고, 지금의 에너지를 내뿜는 것도 사람이다. 내가 나주에서 만난 남자들은 뭔가 불만에 찼지만 박력 있었고, 여자들은 이상하리만치 당차면서 아름다웠다.

 

그뿐 아니다. 나주에는 제3의 부류라고 해야 할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 이상하다고 해서 비정상이라는 말은 아니다. 평범하지 않다는 뜻이다. 나는 나주 첫 방문 때부터 이상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내가 나주에 푹 빠졌다면 박력 있는 남자들이나 아름다운 여자들 때문이라기보다는 바로 이 이상한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나주와 나주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조반니노 과레스키의 옴니버스 <돈 까밀로와 빼뽀네>를 떠올리곤 했다. (Po)강 유역의 바싸(Bassa)는 영산강변의 천년 고도 나주의 이탈리아판이다. 까밀로 신부와 빼뽀네 읍장, 스미르쪼와 비지오, 브루스코와 팔케토와 지고또, 스트라치아미와 스포키아 등이 엮어내는 바싸 사람들 이야기는, 내가 아직 세세하게 모르기는 해도, 천년 동안 이어온 나주 사람들의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수려한 나주의 산수에 살면서 이상한 나주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요즘도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돈 까밀로와 빼뽀네>의 영화 촬영지 브레스쉘로(Brescello)를 방문한다고 한다. 책으로 다 읽은 이야기지만 그곳에 가면 과레스키가 그려내었던 바싸 마을 사람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자꾸 나주에 가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나주인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으려면 나주에 가야하는 것이다.

 

외지인이 나주에 빠져들기가 쉬울 리 없다. 나주에 푹 빠지고 싶어 한다고 다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어떤 공동체의 일부가 되고 싶으면 자기 역할이 있어야 한다.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자기 역할이 자기 존재의 근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늘 해오던 일을 나주에서도 해보기로 했다. 무용가 최승희 선생의 혼적을 나주에서도 확인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 일이 성공할는지 미리 알 수 없다. 성공한다고 해도 그게 나주와 나주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 말이다.

 

 

최승희 선생의 나주 공연 조사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나는 이미 1931년의 최승희 전라도 순회공연 일정을 재구성한 바 있는데, 그해 최승희 선생은 전주(1129), 군산(30), 목포(124), 광주(5), 그리고 벌교(6)에서 공연을 단행했다. 목포공연 다음날 광주공연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 나주공연은 없었던 것으로 단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라남도 순회공연이 193111월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30년과 1932년에도 전라도 순회공연을 했고, 세계 순회공연을 떠나기 전인 1937년에도 조선 지방공연을 단행한 바 있었다. 따라서 나주 공연을 조사할 여지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셈이다.

 

이 글은, 수필이나 감상문 형식이더라도 내용은 최승희 나주공연 조사의 리서치 노트이다. 엉뚱하거나 중구난방일 수 있고, 결론이 어떻게 날지, 혹은 결론이 나기는 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자료와 사유와 의견을 정리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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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923일 최승희 무용단이 단행한 경남 진주 공연을 조사하다 보니 당시 지방순회 공연 일정은 철도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공연 동선이 철도 노선에 의해 결정됨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312월의 마산 공연 때문이었다.

 

27일 경성 공회당에서 신작무용발표회를 가진 최승희무용단은 지방 순회공연을 이어갔는데, 당시 신문 보도를 종합하면 217-18일 부산(공회당), 221일 춘천(공회당), 224-25일 대구(대구극장), 226-27일 마산(수좌)에서 공연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순회공연 일정에 특이한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는 동선이었다. 경성(=서울)에서 부산까지 갔다가 다시 경성으로 돌아와 춘천을 다녀온 다음, 다시 경부선을 타고 대구까지 갔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최승희의 춘천 공연 연구노트에서 비교적 자세히 밝힌 바 있다.

 

 

둘째는 공연 순서였다. 왜 마산 공연을 부산 다음이 아니라 대구 다음에 했을까? 철도 때문이다. 마산까지의 직선거리는 부산에서 가깝지만, 부산에서 마산으로 직접 가는 철도가 없었기 때문에 우선 경부선 상행선을 타고 북상해서 삼랑진에서 마산선으로 갈아타고 남행해야 했다.

 

마산선(삼랑진역-마산역)은 러일전쟁을 앞둔 일제가 1905526일 군용 철도로 개통했으나, 19051111일 일반 여객과 화물 수송도 시작했고, 그해 11일 개통된 경부선(경성-부산)의 지선으로 포함되었다.

 

따라서 경부선 철도로 하행하다 보면 삼량진에서 부산으로 갈지 마산으로 갈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다. 최승희무용단이 서로 가깝게 위치한 부산과 마산에서 잇달아 공연하기 어려웠던 것은 바로 이러한 철도 사정 때문이었다.

 

한편 진주 공연은 순회공연이 철도에 의해 좌우됐음을 보여주는 더욱 단적인 예였다. 1931923일의 공연이 그의 첫 진주 공연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철도 사정 때문이었다. 마산선이 193141일 경남선(마산역-진주역)과 통합되면서 국철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6개월 전인 19312월의 순회공연에서 최승희는 224-25일의 대구 공연을 마친 후 삼랑진에서 마산선으로 갈아타고 마산에 도착, 226-27일 마산 수좌(壽座)에서 공연을 단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마산선이 경남선과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주까지 갈 수는 없었고, 순회공연은 마산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319월의 경상도 순회공연 때는 사정이 달라졌다. 공연 5개월 전인 193141일 경남선과 마산선 철도가 연결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최승희무용단은 마산 공연(22)을 마친 후, 다음날 아침 경남선 기차를 타고 진주에 도착, 바로 진주 공연(23)을 가질 수 있었다. , 약 반년 전에는 불가능했던 진주 공연이 가능했던 것은 마산선과 경남선이 연결된 철도 사정 덕분이었던 것이다.

 

최승희가 지방순회공연을 철도에 의지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가 도쿄 유학 시절 이시이바쿠 무용연구소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많은 지방순회공연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에 돌아와서도 지방순회공연을 기획할 때는 철도망과 그 시간표부터 조사했을 것이다.

 

 

이시이무용단처럼 최승희무용단이 순회공연을 철도에 의존했던 것은 무용단원과 수하물의 이동 때문이었다. 수십 명의 단원이 공연에 필요한 의상과 소도구, 조명과 음향 장치 등을 가지고 이동하는 데에 철도만큼 편리하고 빠르고 저렴한 다른 교통수단이 없었던 것이다.

 

최승희무용단은 경춘선 철도 개통 전인 1931221일 춘천공연을 가졌을 때 승합자동차(버스)를 이용했다. 당시 경성-춘천의 승합차 이동 시간은 편도 4시간이었고, 1인당 왕복요금이 약 10(편도 6)이었다. 그보다 거리가 3배나 긴 경인선 철도의 이동시간은 1시간40, 왕복요금은 약 1(편도 48)에 불과했다.

 

최승희 무용단이 지방순회공연에 철도를 이용했던 것은 이 같은 신속한 이동시간과 저렴한 비용 때문이었던 것이다. (2022/6/15,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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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917일자 <동아일보(3)>에는 최승희무용단이 밀양과 마산, 진주와 통영에서 개최했던 공연을 각각 알리는 4개의 광고가 실려 있다. 이 광고들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은 어째서 4개의 공연을 한데 홍보하지 않고 4개의 광고문으로 나누어 게재했을까, 였다.

 

4개의 광고문은 비슷한 크기에 비슷한 형식을 갖추기는 했지만 내용이나 형식이 조금씩 달랐다. 밀양공연 제목은 최승희무용 대공개였고, 진주공연 제목은 최승희무용 공연회였다. 마산과 통영 공연의 제목은 최승희무용 공개로 같았지만 활자 크기가 달랐다.

 

제목의 오른편에는 공연날짜와 장소를, 왼쪽에는 주최자와 후원자를 명기한 형식은 같았다.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었다. 밀양, 마산, 진주 공연은 날짜와 시간을 표기했지만 통영공연은 시간 없이 날짜만 표기했다. 또 진주공연 광고문에는 일시(日時)”라는 표현을 썼지만, 다른 광고문들은 시일(時日)”이라고 썼다.

 

 

주최자와 후원자도 조금씩 달랐다. 밀양, 진주 공연의 주최자는 <최승희무용후원회(=후원회)>, 후원자는 <동아일보 현지지국(=지국)>이었고, 마산공연의 후원자도 <지국>이기는 했지만 주최자가 <후원회>가 아니라 <최승희무용연구소>였다. 가장 차이를 보인 것은 통영공연 광고문으로 주최자는 <지국>이었고, <경성최승희무용연구소><통영삼광영화사>가 후원자였다.

 

, 이 광고문들은 내용이 간단하고 형식이 고정되어 있는 것인데도, 표현이나 내용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 모든 광고문을 최승희나 최승희무용연구소의 매니저, 즉 오빠 최승일이나 남편 안막이 주관한 것이라면, 어째서 이런 차이가 보이게 된 것일까?

 

그로부터 6년 후 최승희는 일본 간사이 지역에서 3주일 동안 순회공연을 가진 적이 있었다. 193724일부터 27일까지 나고야와 교토, 오사카와 고베의 4개 대도시에서 공연했는데, 이때 최승희는 공연 일정과 작품명을 한 면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팜플렛을 발생했었다. 19319월의 경상도 공연에서는 왜 그러지 않았을까?

 

 

4개의 광고문을 한데 합친 크기의 광고를 한꺼번에 게재했다면, 같은 비용으로 더 큰 지면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일정과 극장, 주최자/후원자를 명기하는 것을 넘어 발표작품과 공연자들에 대한 더 많은 내용을 서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 그러지 않았을까?

 

가능한 대답은 하나였다. 이 광고문은 최승희나 무용연구소의 매니저가 주관하여 신문 게재를 의뢰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마도 주최자와 후원자로 명기된 <후원회><지국>이 게재한 광고이기가 쉽다. 즉 이 광고를 의뢰하고 그 광고비를 지불한 것은 <후원회>거나 <지국>이었다는 말이다. 다만 통영에서는 <지국>이 주최자이고 <통영삼광영화사>가 후원자였기 때문에, 아마도 이 후원 영화사가 광고비를 지불했을 가능성이 크다.

 

, 지방 순회공연은 현지의 <후원회>나 후원 신문사의 <지국>이 최승희무용단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공연이 이뤄졌고, 공연의 조직과 진행을 담당하는 한편, 수익은 공연을 제공한 최승희무용단과 주최자가 일정한 비율로 분배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공연 조직 및 진행 과정을 이해하면 포항 공연만 유일하게 <동아일보>가 아니라 <조선일보>에 광고와 기사를 낸 이유도 알 수 있다.

 

공연 즈음에 포항에는 <동아일보> 지국이 개설되지 않았거나 지국장이나 국원이 없는 사고지국이었을 것이고, 따라서 최승희 무용공연을 조직할 수 없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포항에서는 지국이 활동중이던 <조선일보>가 공연 조직을 대행했고, 포항지역에 신문이 보급되는 <조선일보>에 광고와 기사를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문에 게재된 수 개의 공연 기사와 광고를 토대로 당시에 무용공연이 지방에서 조직되고 흥행되는 방식을 모두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 지방순회공연에서는 후원 신문사의 지국과 후원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 그리고 그 결과로 공연 무용단은 신문사 지국과 공연 수익을 나누어야 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022/6/15,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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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917일자 <동아일보(3)>에는 최승희의 순회공연을 알리는 광고가 4개나 나란히 실렸다. 세로로 긴 직사각형의 광고문에는 최승희무용공개혹은 최승희무용공연회라는 말이 한자로 적혀 있었고, 그 양 옆에는 공연 일시와 극장, 주최와 후원단체 등이 명시되었다.

 

이 광고문들에 따르면 921일의 밀양 공연은 조일(朝日=아사히)극장, 922일의 마산 공연은 구()마산의 수좌(壽座=코토부키자)에서, 923일의 진주 공연은 진주좌(晉州座)에서, 그리고 925일의 통영 공연은 봉래좌(蓬萊座)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편 그 하루 전인 916일자 <동아일보(3)>에는 16일의 김천 공연이 김천(金泉)극장, 17일의 대구 공연이 대구극장에서 열린다는 기사와 광고가 실렸다. 따라서 이 시기에 진행된 최승희무용단의 경상도 순회공연은 김천(9/16)-대구(9/17)-밀양(9/21)에 이어 마산(9/22)-진주(9/23)-통영(9/25)의 순으로 진행되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19319월의 경상도 순회공연은 그해 91일 경성 단성사에서 열렸던 제4회 신작무용공연의 후속 지방공연이었고, 대구 공연 전에도 수원(913)과 안성(14)에서 먼저 공연을 가진 바 있었다. 따라서 이 순회공연은 수원-안성 등의 경기도 지역에서 출발하여 김천-대구-안동-밀양의 경상북도 내륙도시를 거쳐 마산-진주-통영의 경상남도 해안도시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925일 이후 신문에 다른 공연이 보도되거나 광고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통영 공연 이후 더 이상의 지방 공연 없이 경성으로 돌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913일부터 925일까지 약 2주일 남짓의 기간 동안 계속해서 순회공연을 가졌으니 피로가 누적되었을 만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동아일보>의 이 두 광고문에 드러난 순회공연 일정에 따르면 대구와 밀양 공연 사이에 사흘의 사이가 뜬 것이 의문이었다.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가 1920년대에 이끌었던 일본 지방공연에서나, 1930년대 초에 최승희무용단이 진행했던 조선 지방공연에서도, 3-4일의 공연 뒤에 하루 쉬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연속 3일을 쉬는 것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신문들을 조사해 보니 1931914-16일의 <조선일보(7)>에 포항 공연(9/18) 광고가 3일 동안 게재되었음이 발견되었다. 또 신문 보도나 광고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일부 평전들이 안동 공연을 단행했다고 서술했음도 확인되었다. 따라서 19319월의 경상도 순회공연은 내륙 도시인 김천(16), 대구(17), 포항(18), 안동(20), 밀양(21)을 거쳐 해안 도시인 마산(22), 진주(23), 통영(25) 공연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진주와 통영 공연 사이에 하루의 공백이 있는데, 이듬해인 1932년 순회공연에서는 진주와 통영 사이에 사천(泗川) 공연이 끼어 있었다. 따라서 19319월의 순회공연에서도 24일에 사천 공연이 진행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920일부터 23일까지 4일 연속 공연한 무용단이 24일을 하루 쉬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19319월의 경상도 순회공연에 사천 공연이 있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경상도 순회공연을 보도한 신문 기사와 광고문들을 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거의 모든 공연이 <동아일보>에만 보도되었거나 광고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시대일보> 등의 민족지들은 물론 <매일신보><경성일보> 등의 총독부 기관지, 그리고 <조신신문><부신일보> 등의 일본어 신문들도 이 경상도 순회공연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조선일보>가 포항 공연(9/18)을 보도하고 광고했던 것이었다.

 

한편 이 경상도 순회공연 직전 경성 단성사에서 열렸던 제4회 신작무용공연에 대한 모든 기사와 광고는 <조선일보>에만 실렸던 점도 눈에 띄었다. <동아일보><매일신보>는 경성의 신작무용 공연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고, <매일신보><경성일보>도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보도 및 광고 행태로 미루어 19319월의 최승희무용단 경상도 순회공연은 <동아일보>가 단독 후원하기로 계약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초부터 공연의 후원이 특정 언론사에 독점적으로 계약되는 것이 관행이었던 것이다. (2022/6/14,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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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127일 최승희 선생이 순천 공연을 가졌던 극장은 <순천극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이라고 한 것은 이 공연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나마 이런 추정이 가능한 것은 1930년대 순천에는 <순천극장> 외에 다른 극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순천극장>의 당시 이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극장은 1914년 일본인에 의해 <황금연예관>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개관되었는데, 일제 토지조사부에 따르면 그 부지는 조선시대 객사 영역의 일부로 1910년대 초 읍성의 성곽을 관통하는 도로가 개설되면서 필지가 분리된 곳이라고 한다. 지금의 주소는 중앙동 24-5번지(도로명 주소는 중앙로 16번지) 자리이다.

 

 

<황금연예관>1933년경 <극장 순천구락부>라고 불렸다. 1933112일의 <조선신문(5)>에 실린 신년축하 광고에 그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광고문에는 네 사람의 일본인 극장주 이름이 병기되어 있다. 마사무네 요시토모(正宗義智), 키자키 요시오(木崎義男), 무라카미 요시카즈(村上義一), 타케우치 아키라(武內罷)가 그들이다. 이들은 <황금연예관>을 인수해 명칭을 <극장 순천구락부>라고 바꿔서 운영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0126일 벌교에서 채동선의 부친 채중현이 낙성한 벌교 최초의 근대식 극장도 <벌교구락부>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아 1930년대 초 남도에서 구락부라는 명칭이 극장 이름으로 자주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벌교구락부>가 자주 <벌교극장>으로 불리곤 했던 것처럼 <순천구락부>도 그 공식 명칭과는 별도로 <순천극장>으로 불리기도 했을 것이다.

 

<순천구락부>의 이름이 정식으로 <순천극장>으로 굳어진 것은 19377월부터이다. 710일의 <동아일보(5)><순천극장>이 낙성되었다는 기사가 실렸기 때문이다. 그해 2월 순천 거주 일본인들이 3만원의 예산으로 극장을 지어 이날 낙성식을 가졌다고 보도되었는데, 이 극장은 건평 150평에 2층 건물로 신축되었으므로 수용인원은 대략 7백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1943년 현재 <순천극장>의 흥행주는 <순천구락부>의 발기인 4명의 한 사람이었던 마사무네 요시토모(正宗義智)인 것으로 보아 <순천극장><순천구락부> 자리에 개관되었고, 해방되기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후 <순천극장>은 일시적으로 <동춘극장>이라고 불렸다가 1950년대에 다시 <순천극장>으로 회복되었는데, 1978년부터는 <국도극장>으로 개칭되었다가 1990년대 들어 폐관되었다. 극장 건물은 오래 방치되었다가, 2009년에 철거되어 지금은 상가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같은 <순천극장>의 역사를 고려하면 최승희가 공연했던 극장 이름은 <황금연예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순천극장>이라는 이름이 굳어진 것은 19377월이었고, 1933년경에는 <순천구락부>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다만 <황금연예관><순천구락부>로 개칭된 시기를 특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193112월에 이미 <순천구락부>라고 불렸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극장이나 거리 이름에 황금이라는 말이 들어간 경우가 자주 보인다. 경성에서도 지금의 을지로를 황금통이라고 불렀고, 황금정4가에 <황금좌>라는 극장이 있었다. 이 극장은 해방 후 <국도극장>으로 불리다가 1999년 철거되어 그 자리에 호텔이 지어졌다.

 

189941일부터 시제를 시행한 일본 요코하마(横浜)시는 그 최대 상업지역을 황금정이라고 불렀는데, 이 지역에는 벚나무 대신 버드나무를 가로수로 심은 것이 특색이었다고 한다. 버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손님을 부르는 모양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조선 곳곳에 새로운 상업 지구를 만들면서 그 지명에 황금이라는 말을 넣곤 했던 것은 요코하마의 예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순천 최대 상업 지구였던 황금정은 지금 중앙동이라고 불리며, 해방 후에도 순천 최대의 <황금백화점>이 문을 열었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이 지역은 <황금패션거리>라고 불린다. (2022/6/10,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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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순천역 사진 촬영 시기, 다시 말해 그의 순천공연 시기는 19301025일부터 1932520일경까지 약 1년 반으로 줄어들었지만, 이 기간 중 최승희가 순천 공연을 했거나 했을 가능성이 있는 시기는 4번이나 된다.

 

첫째, 19301021-23일 단성사에서 가졌던 제2회 경성공연 이후 최승희는 1030일 대전공연을 시작으로 호남 공연을 기획했다. 그러나 뭔가 사정이 생겨서 대전공연은 1111일로 연기됐고, 목포(119-10, 평화관)에서 먼저 공연한 뒤 대전(1111, 대전좌)에서 공연한 뒤 더 이상의 호남공연 없이 경성으로 돌아와 여자고학생을 돕기 위한 공연(1114, 경성공회당)을 가졌다. 이 공연 후에는 해주(1117-18, 해주극장)와 재령(1120), 수원(1129)과 인천(1220, 가무기좌) 등 경성에서 가까운 도시에 공연했다.

 

만일 이 시기에 호남공연이 이뤄졌다면 그 시기는 취소된 대전공연(1030)과 목포공연(119) 사이였을 것이다. 즉 그 일주일 동안 순천과 여수, 벌교와 광주 등의 공연을 단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공연들은 아직 발견된 바 없고, 소읍 순천 공연을 위해 대도시 대전 공연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므로, 이때의 순천공연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된다.

 

 

둘째, 최승희는 1931110-12일 제3회 경성공연과 193127-8일 신작발표회를 차례로 열었고, 이후 부산(217-18), 춘천(221), 대구(24-25), 이리(31), 전주(32-3), 군산(34-5), 김제(36), 예산(38)에서 공연했다. 3주일의 사이를 두고 평양(331-41), 정주(43), 신의주(5-6), 의주(9), 선천(11-12), 사리원(12), 개성(14) 등 북선지역에서도 공연했다. 이 시기에도 전북-충남 공연과 북선지역 공연 사이의 3주일 동안 전남지역 공연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2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 2달 동안이나 순회공연을 하게 되므로, 이 시기에 순천 공연을 포함한 전남 공연까지 단행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감이 있다.

 

 

셋째, 최승희는 193151-3, 3회 신작발표회를 가진 후, 59, 청량관에서 안막과 결혼식을 올렸고, 신혼여행 겸 원산 공연(522-23)을 떠났다. 이후 신혼 생활에 여념이 없다가 91-3일에 가서야 경성 단성사에서 제4회 신작발표회를 열었다.

 

그 직후 최승희는 다시 지방공연에 나서, 수원(913), 안성(14), 김천(16), 대구(17), 포항(18), 밀양(21), 마산(22), 진주(23), 통영(25) 등의 경상도 공연에 이어 해주(1013), 신천(14), 안주(20-21), 신의주(24), 안동(27), 개성(30)의 북선 공연을 가졌고, 뒤이어 조치원(1124), 청주(25), 대전(26), 전주(29), 군산(30), 목포(124, 목포극장), 광주(5, 제국관), 그리고 벌교(6, 벌교구락부)에서 공연을 열었다. 이 시기에 순천공연이 있었다면 벌교 공연 이후인 127일 경이었을 것이다.

 

 

넷째, 1932130일 경성공회당에서 토월회 주최의 재만동포위로공연을 가진 후 천안(212), 김천(16)의 충남-전북 공연과 대구(17-18), 밀양(19) 등의 경북지역 공연, 그리고 사천(22), 통영(24), 김해(27) 등의 경남 공연을 단행했다.

 

이후 기록에 남은 공연은 428일 경성 단성사에서 제5회 신작발표회를 연 것이 처음이고, 경남 공연지인 사천, 통영, 김해는 전남 해안 지역에서 가깝기 때문에, 만일 이때 순천 공연이 있었다면 227일 이후로 이어지면서 여수, 벌교, 광주, 목포 공연으로 계속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경남 공연 일정이 사천-->통영-->김해로 진행된 것은 전남 지역에서 멀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때 순천 공연이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면, 최승희의 순천역 사진으로 추정된 순천 공연 시기는 1931127일경이 가장 유력하다. 벌교 공연을 마친 최승희가 기차로 불과 30분 떨어진 순천에서 공연을 계속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22/6/6,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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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순천역 사진을 의심할 여지없는 자료로 받아들이면 많은 새로운 정보가 추가로 제공된다. 우선 최승희가 순천을 방문한 것은 공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점은 간단히 추론될 수 있다. 그 밖의 다른 이유로 최승희가 아무 연고가 없는 순천을 방문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순천공연은 언제 이뤄진 것일까? 순천역이 문을 연 것이 1930105일이고 <최승희 자서전>의 출판일이 1937730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사진은 그 두 시기 사이에 촬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최승희는 19333월 두 번째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193712월 세계순회공연을 떠날 때까지는 조선 지방공연을 체계적으로 단행한 적이 없다. 이시이무용단에 복귀해 그 일원으로 19341028-29일에 경성 공연을 한 적은 있지만 이때도 지방공연은 없었다,

 

19355월 이시이무용단에서 독립, 도쿄에서 <최승희무용연구소>를 개설한 뒤로 최승희는 도쿄와 일본 지방공연에 치중했고 조선에서 공연한 적은 없었다.

 

영화 <반도의 무희(1936)>의 촬영을 위해 1935914일 경성에 온 적은 있으나 이때도 지방공연은 물론 경성 공연도 없었다. 19364<반도의 무희> 개봉시기에 맞춰 영화 판촉을 위해 최승희는 조선과 만주 순회공연을 단행했으나 조선에서는 부산과 대구, 경성과 평양과 신의주 공연이 전부였고, 순천에서 공연했을 가능성은 없다.

 

다시 말해 최승희가 재도일한 19333월 이후에는 순천 공연을 할 기회가 없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최승희 자서전>의 순천역 사진이 촬영된 것은 순천역이 개관된 193010월부터 최승희의 재도일이 이뤄진 19333월까지의 약 2년 반의 시기로 압축될 수 있다.

 

 

한편 최승희의 공연 일정을 자세히 조사해 보면 순천 공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2년 반의 기간은 더 압축될 수 있다. 최승희가 재도일하기 전 마지막 공연은 1932519-20일의 공주 공연이었고, 521일로 예정되었던 대전 공연은 연기되었다가 취소된 바 있었다. 이후로는 다른 공연이 없었는데 이는 이시이 바쿠의 조선 공연과 출산, 그리고 늑막염 때문이었다.

 

193264-5일 이시이 바쿠가 경성공회당에서 공연을 가졌다. 이때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를 만나 자신의 경성 활동이 난관에 부딪혔음을 고백했다. 무용연구소를 운영하면서 공연활동을 이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재정난에 빠졌던 것이다. 이시이 바쿠는 그를 다시 도쿄로 돌아오도록 허락했는데, 당시 상황을 이시이 바쿠의 부인 이시이 야에코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이시이가 경성에 공연하러 갔을 때에 최승희를 만났는데 아기를 배어 있었다. 배가 불룩한 몸으로 안막과 같이 호텔로 찾아와 다시 이시이 선생 밑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간절히 부탁하기에 나는 아주 기뻤으나 이시이는 한 달 동안의 여유를 달라고 대답했다.”

 

 

이시이 바쿠의 반승락을 얻은 최승희는 재도일의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자신의 무용연구소를 해산하고 동행을 자청한 김민자를 제외한 제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3년여의 경성 생활이 쉽게 정리되지는 않았고 무엇보다도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193284일 딸 안승자를 출산한 이후에도 문제가 생겼다. 산후조리에 이상이 있었는지 최승희는 급성 늑막염에 걸쳐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잡지 <만국부인(萬國婦人)> 193210월호에 기고한 아이의 어머니가 된 감상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이번(=1932) 가을에는 동경에 가서 그이는 남은 공부를 마저 마치고 나는 무용을 하려고 했는데 아이가 너무 어리고 또 내 몸도 완쾌되지 못한 듯싶어 내년 봄으로 미루고 있습니다.”

 

, 19325월 공주공연 이후 재도일이 이뤄졌던 19333월까지 최승희는 순천공연은커녕 다른 어떤 공연도 할 수 없을 만큼 심신이 피곤한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의 순천공연은 순천역 준공시기인 19301025일부터 1932519일의 공주공연까지의 약 1년 반의 시기로 더 좁혀질 수 있는 것이다. (2022/6/5,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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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찍은 사진은 그 심미적 특징 때문에 예술의 영역에 속하지만, 그와 함께 모든 사진은 기록의 특징도 가지기 때문에 학술 자료가 될 수 있다. 사진의 기록적 특징 때문에 때로는 한 장의 사진이 수백 쪽의 책들이 전달하지 못하는 사실적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어떤 사진을 설명하는 데에는 한 단어나 한 문장으로 충분한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그 사진 한 장이 담은 정보를 다 풀어내기 위해서는 수십, 혹은 수백 쪽의 책을 써야할 경우도 있다.

 

<최승희 자서전>에 실린 순천역 사진이 그런 예이다. 이 한 장의 사진은 십여 권에 달하는 자서전과 평전들이 서술해 놓지 않은 최승희의 순천 공연에 대한 정보를 전해 준다. 다만 그 같은 사실적 정보를 제대로, 그리고 충분히 읽어 내려면 사진의 인물과 배경, 촬영시기와 출판 시기 등에 대한 배경 지식을 활용해야 한다.

 

 

우선 이 사진이 순천역에서 촬영된 것임이 확실하다. 가장 직접적인 증거는 사진 자체이다. 순천역은 19301025일 전라선과 경전선의 개통과 함께 문을 열었고, 그 즈음에 순천역사를 찍은 한 장의 사진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순천역사에는 <순천역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거기에는 19601231일 이후의 순천역 사진, 20091222일 이후의 순천역 사진과 함께 19301025일 순천역 개통 당시의 사진이 시기 순서대로 차례로 새겨져 있다.

 

순천역 개통 당시의 순천역 사진과 최승희의 순천역 사진을 비교하면 역사의 모양이 같음을 알 수 있다. 개통시의 순천역 사진은 역사 정면에서 촬영된 반면 최승희의 순천역 사진은 역사 측면에서 사각으로 촬영되었기 때문에 역사의 정면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두 사진 모두 배경이 선명하지 않기 때문에 두 사진에 담긴 역사 모습을 비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건물 전면의 모습이 같음을 알 수 있다. , 최승희 사진의 배경이 순천역임에 틀림없다는 말이다.

 

 

또 하나의 증거는 이 사진이 <최승희 자서전>에 실리면서 순천역(順天驛)에서라는 사진설명이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이 사진설명이 한글로만 제시되었다면 평안남도의 순천과 혼동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안남도의 순천(順川)과는 한자로 구별되는 순천(順天)으로 명시되었기 때문에 이 사진의 배경이 전라남도 순천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이 사진을 <최승희 자서전>에 실은 의도이다. 최승희의 일본어 자서전인 <나의 자서전(自敍傳, 1936)>에는 사진이 단 한 장도 실리지 않은 반면, 한국어 자서전인 <최승희 자서전(1937)>에는 34쪽에 걸쳐서 37장의 사진이 실려 있다. 청색 계열의 2색도 사진이 16, 적색 2색도 사진이 8, 갈색 2색도 사진도 10쪽에 걸쳐 13장이 실려 있다.

 

37장의 사진들은 대부분 무용작품 사진이거나 홍보용으로 촬영된 사진이었고, 4장만 일상생활 중에 스냅으로, 혹은 스냅처럼 보이도록 연출 촬영된 사진들이었다. 작품 사진 중 4장은 경성에 돌아와 <최승희무용연구소>를 개설해 활동하던 시기의 사진이고 29장은 19333월 재도일한 이후의 활동을 보여주는 작품 사진 혹은 홍보용으로 촬영된 사진이었다.

 

 

일상생활을 담은 4장의 사진에는 각각 <이시이문하(石井門下) 시대>, <1회 향토방문>, <경성무용연구소 시대>, <순천역(順天驛)에서>라는 사진 설명이 붙어 있었는데, <이시이문하 시대><1회 향토방문>은 최승희의 도쿄 무용유학 시기(1926-1929)의 사진이고 <경성무용연구소 시대><순천역에서>는 경성에 돌아와서부터 재도일하기 전까지의 사진이다. 37장의 사진이 선택되고 수록된 데에는 나름대로 시기적 배분이 고려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이중 경성활동 시기의 사진 2장 중 <경성무용연구소 시대>는 대도시 경성에서 찍은 사진임에 틀림없고 <순천역에서>는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경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소읍에서 찍은 사진이다. , 이 두 장의 사진으로 경성활동 시절을 대표하도록 편집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순천역에서>가 전라남도 순천공연 때의 사진이라는 사실에 의문을 품을 여지는 없어 보인다. (2022/6/5,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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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최승희의 순천 공연은 있었다고 필자는 믿게 되었다. 근거는 한 장의 사진이다. 1937년에 출판된 최승희의 한글판 자서전에는 본문이 시작되기 전에 34쪽 분량의 사진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한 장의 최승희 독사진에 순천역(順天驛)에서라고 사진설명이 되어 있다.

 

그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땐 긴가민가했다. 당시 말로 하면 남선(南鮮)’뿐 아니라 북선(北鮮)’에도 순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살펴보니 한자가 다르다. 평안남도의 순천은 順川인 반면 전라남도의 순천은 順天이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할 당시의 근거지였던 순천과 여수의 호족이었던 박영규와 김총이 왕건을 지지하면서 고려로 귀화하면서 자신들의 결정이 하늘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뜻으로 지은 지명이 순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 자서전(1937)>의 독사진은 전라남도의 순천역에서 찍은 것임에 틀림없다.

 

 

최승희가 순천역에서 사진 찍을 일은 한 가지 밖에 없다. 공연하러 순천에 갔다가 마중 나온 기자들에게 찍힌 사진인 것이다. 1930년대에는 공연자가 역에 도착하면 기자들이 마중을 나오기 보다는 공연자가 신문사로 찾아가 인사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공연이 흥행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언론사와 기자들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시이 바쿠도 1926년의 첫 경성공연 때에는 아침 7시 기차로 경성역에 도착한 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맨 처음 한 일이 이시이 코나미와 함께 <경성일보><매일신보>를 찾아간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 형매 본사 내방이라는 제목의 단신이라도 한 줄 신문에 나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연자의 지명도가 높아지고, 특히 정상급 공연자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공연자가 언론사에 찾아가기 전에 기자들이 역으로 마중을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신문에 신문사 내방 사진이 실리면 아직 정상급 공연자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고, 기자들이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가는 공연자는 정상급이라는 뜻이다.

 

19271024일 최승희가 무용유학을 시작한 지 1년 반 만에 이시이 바쿠와 함께 경성 공연을 왔을 때는 기자들이 경성역으로 나가 이시이 바쿠-최승희 일행을 맞았다. 그때 경성역(=서울역)에서 찍은 이시이 일행의 사진이 1025일자 <매일신보(2)><경성일보(2)>에 실렸다. <매일신보>는 최승희가 가족들과 찍은 사진을 실었고, <경성일보>는 이시이바쿠와 최승희를 포함한 무용단의 사진을 게재했다.

 

 

그런데 이 <경성일보>의 사진이 잘못 소개된 적이 있다. 정수웅의 <최승희(2004: 63)>에서 이 사진을 192711월 이시이무용단 일행이 순천역에 도착한 사진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정수웅은 이 사진의 중앙에 있는 체크무늬 외투여 여성이 최승희라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인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 사진은 순천역 사진이 아니라 경성역 사진이었다.

 

192711월 이시이 바쿠와 최승희가 순천에서 공연할 수 없는 일정이었다. 19271031일의 <매일신보>는 이시이-최승희 일행이 25일부터 27일까지 주야간 공연을 합쳐서 경성에서 전후 다섯 번 공연을한 후에 “30일 밤 본사 주최 대전(大田) 무용시 공연회에 출연하고자 30일 아침 열시 경성역발 열차로 남행하였고, “대전서 즉시 조선을 등지고 남으로 내려가 구주(九州)에 순회공연을 하게 된다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121일자 <매일신보(3)>도 이시이무용단이 경성, 원산, 대전공연을 마치고 구주(九州, 큐슈) 사국(四國, 시코쿠) 지방순업을 마치고 동경에 돌아왔다고 전했다. 1030일 대전 공연을 마친 이시이 무용단은 곧바로 시모노세키로 건너가 모지, 후쿠오카, 쿠루메, 노가타, 사세보, 나가사키, 쿠마모토, 가고시마 등의 큐슈 공연을 이어갔고, 그 후에도 마츠야마, 도쿠시마, 다카마츠, 우와지마, 고치 등의 시코쿠 지방공연을 마친 후, 11월말 도쿄의 무사시노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시이 무용단이 순천에서 공연할 일정이 없었다는 말이다. (2022/6/4,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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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벌교공연 조사를 마치고 취재한 자료들을 그러모아 글로 정리하면서 벌교에서 공연이 있었다면, 순천에서도 공연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생각이 미쳤다. 순천에서 공연이 있었다면 여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1930년대에는 목포, 광주와 함께 벌교와 순천과 여수가 전라남도의 5대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헌에는 순천과 여수 공연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신문과 잡지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여수와 순천에서 공연이 있었다고 언급한 문헌은 더러 있었지만, 그 공연이 언제, 어느 극장에서, 어떤 레퍼토리로 이뤄진 것인지 상술한 문헌은 없었다. 더구나 그런 간단한 언급이나마 근거가 취약했다.

 

예컨대 정병호는 평전 <최승희(1995:207)>에서 단 한번 순천 공연을 언급했다. 그는 “(1942216-20일의) 경성 공연의 성공에 힘입어 ..., 강릉을 비롯하여 군산, 이리, 전주, 순천, 여수, 광주, 목포, 대전, 청주, 천안, 예산, 안성, 수원, 춘천, 평양 등지를 돌며 순회공연을 가졌다고 서술했는데, 목록에 오른 순회공연의 지방도시는 모두 16개였다.

 

 

한편 정수웅은 그의 평전 <최승희(2004)>에서 순천에 대해 3번 언급했다. (1) 63쪽에서 석정막무용단의 순천공연이 192711월에 이뤄졌다며 무용단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가운데 체크무늬 외투를 입은 사람이 최승희라고 설명했고, (2) 370쪽의 연보에서도 192711월 순천 등의 지방 공연을 했다고 서술했는가 하면, (3) 376쪽에서도 최승희가 1942216-20일의 부민관 공연 후인 3월에 군산, 이리, 전주, 순천, 여수, 광주, 목포, 대전, 청주, 천안, 예산, 안성, 수원, 춘천, 평양등 전국 순회공연을 했다고 서술한 것이다.

 

그러나 정수웅이 순천 공연 사진이라고 설명한 이시이무용단 단체사진은 19271024일 경성역(=서울역)에 도착해서 촬영한 사진이었다. 그러므로 순천공연에 대한 3개의 언급 중에서 2개가 오류였다. 19423월의 순천 공연에 대한 언급도 십중팔구 정병호의 서술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주가 달려있지는 않았다. 게다가 정병호의 순회공연 도시목록 중에서 강릉이 빠져 있었지만, 왜 그 도시가 제외되었는지는 설명이 없다.

 

 

가장 최근의 평전인 강준식의 <최승희 평전(2012:279)>도 단 한번 순천 공연을 언급했다. “최승희는 예정대로 2월말부터 예산-군산-이리-전주-순천-여수-목포-광주-대전-청주-천안-안성-수원-춘천-개성-평양-신의주 등 전국 17개 지역을 순회 공연했다고 서술한 것이다. 강준식의 목록에는 도시 수가 17개인데, 정수웅의 목록에 개성과 신의주를 추가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수웅과 강준식의 서술에는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병호의 평전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주가 달려있지 않았다. 또 정병호의 목록에서 정수웅은 강릉을 제외했고, 강준식은 개성과 신의주를 추가했는데, 제외하거나 추가한 이유도 밝혀져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순천공연을 처음 언급한 정병호의 순회공연도시 목록이 중요하겠는데, 이 주장도 근거가 취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병호는 16개 도시 순회공연을 서술하면서 <월간춤> 199311월호에 실린 김종욱 편주의 근대춤 자료사 29(176)”를 인용했다. 필자는 김종욱의 연재기사를 집성해 출판된 <한국근대춤자료사(2014)>을 자세히 조사했는데, 이 저서에 수록된 1942년의 어떤 자료에도 16개 지방도시 순회공연을 언급한 것은 없었다. 유일한 예외는 194242일자 <매일신보>가 보도한 안성 공연(328일 밤8, 안성애관극장) 뿐이었다.

 

만일 정병호 선생이 열거한 16개 지방도시가 서술된 순서대로 공연을 유치했다면 순천과 여수 공연은 안성보다 열흘이나 2주일쯤 앞선 315일과 18일 사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즈음에 발행된 중앙지의 지방판에는 최승희의 공연이 보도된 것이 전혀 없었다.

 

비교적 꼼꼼하게 자료를 검증한 이현준의 <동양을 춤추는 최승희(2019)>1942년 연보(425)에도 순천공연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최승희의 순천 공연은 과연 있었던 것일까? (2022/6/3,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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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126일 최승희의 벌교 공연이 열렸던 극장은 <벌교구락부>라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이 극장의 위치를 밝히려는 시도가 이뤄진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벌교구락부>의 존재했다는 사실 조차 이번에 처음 재발견되었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1930129일자 <동아일보(3)><벌교구락부>의 신축 소식을 전하면서 그 위치를 당지(=벌교) 중앙지점인 신시장 하단이라고 보도했고, 1214일의 <조선일보(7)>도 벌교의 공설극장신축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벌교 신시장 인접지에다 ... 구락부식 공설극장을 신축했다고 전했다. 1210일자 <부산일보(7)>벌교극장 신축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기는 했지만 극장의 위치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았다.

 

따라서 <벌교구락부> 극장의 위치는 신시장 하단이자 벌교 신시장 인접지였던 셈이다. 1930년대의 벌교 주민이라면 이정도의 서술로도 그 위치를 충분히 짐작했겠지만, 지금은 그 주소가 밝혀지지는 않는 한 위치를 특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벌교구락부>의 주소가 파악되었는데, 지번 주소는 벌교읍 벌교리 875번지혹은 벌교읍 시장21번지였다. 이 주소를 알아내는 데에는 <호남극장문화사(2007, 위경혜)>의 서술과 벌교 거주 한광석 선생님의 증언이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호남극장문화사>는 벌교에 등장한 첫 극장으로 1958년경에 소화다리 인근에 설립되었던 <벌교극장>1960년대에 개관한 <현대극장><제일극장>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히 서술했다. <벌교극장>은 임시로 가설된 노천 가설극장이었고, <현대극장><제일극장>은 건물을 신축해 개관한 실내 극장이었다고 한다.

 

<호남극장문화사>에 따르면 <제일극장>의 개관일은 1963311일로, 극장주는 씨 성을 가진 벌교우체국장과 벌교읍장이었던 김철수의 동생 김상수씨의 공동 경영이었으며, <제일극장>의 첫 상영작품은 <왕자 호동(1962, 한형모 감독)>이었다.

 

<현대극장><제일극장>보다 2년 먼저 개관해 성업 중이었다는 서술로 미루어, <현대극장>의 개관 시기는 1961년경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극장주는 장학사업을 하던 이길남씨라고 <호남극장문화사>는 밝혔다.

 

 

한광석 선생님께 이 두 극장에 대해 문의한 결과 “1930년대 기준 벌교 신시장 하단/인접지라면 <현대극장> 자리가 <벌교구락부>가 있던 곳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해 주셨다. 그동안 필자가 섭렵한 한국의 극장사를 보면 극장은 대개 이전의 극장자리를 이어받아 신설되거나 개설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1960-8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던 <현대극장>자리가 1930-40년대의 <벌교구락부>자리라고 보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으로 보였다.

 

지금은 <현대극장>도 폐관되어 <대성의원>이라는 병원으로 바뀌었는데, 그 주소가 바로 벌교리 875-6번지였다. 시장2길을 따라 대성병원의 오른쪽에는 <현대주차장>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주차장의 상호가 현대인 것도 아마 이전의 <현대극장> 자리였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였다.

 

<호남극장문화사(2007)>230쪽에는 벌교읍 거리와 극장의 위치를 명시한 약도가 실려 있는데, 가설극장이었던 <벌교극장>은 소화다리와 홍교다리 사이였고, 제일극장은 현 <벌교 진마트>자리이며, <현대극장>은 벌교 새마을금고 건너편의 <대성의원> 자리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교차 확인을 위해 1916년에 발행된 일제강점기의 토지조사대장과 지적원도를 찾아보았지만, <현대극장>의 주소인 벌교리 875번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지적원도 맨 앞장의 표지에 그려진 약도를 살펴보면, 벌교리의 지번은 1번지부터 862번지까지만 나와 있었다. 아마도 <현대극장>이 있던 875번지와 <제일극장>이 있던 866번지는 1916년의 지적도가 작성되었을 당시에는 주인 없는 공터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022/5/30,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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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벌교 공연>20205월 필자가 목포와 광주, 나주를 방문하면서 새로 발견되었다. 1931124일의 목포 공연, 125일의 광주공연을 조사한 후, 나주에서의 공연 가능성을 조사했으나, 126일에는 나주가 아니라 벌교에서 공연이 있었던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최승희의 벌교공연은 <동아일보(1124일자, 3)>의 기사를 통해 확인됐다. 광주공연과 함께 벌교공연이 나란히 공지된 기사였다. 공연 열흘 전에 중앙지의 지방난에 공지된 것으로 보아 이 공연이 즉흥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미리 기획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후의 보도에서 공연이 취소되거나 연기되었다는 기사가 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광주와 벌교 공연은 실제로 실행되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와 함께 벌교 공연이 열렸던 <벌교구락부>가 조선인 채중현에 의해 설립된 벌교 최초의 근대식 극장이었음도 발견되었다. 이 극장의 건축 동기와 과정, 그리고 그 완성과 낙성식 소식은 <동아일보(1930129일자, 3)<부산일보(19301210일자, 7)>, 그리고 <조선일보(19301214일자, 7)>에 보도되었다.

 

이 극장의 이름이 신문에 따라 <벌교구락부>, <벌교극장>, <벌교공설극장> 등으로 서로 다르게 소개된 것이 특이했는데, 아마도 현지에서는 <벌교구락부>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부산의 기자가 이를 극장으로 이해하고 <벌교극장>이라고 소개한 것으로 보였다.

 

다만 <조선일보>가 이 극장을 <벌교공설극장>이라고 명명한 것은 의문이다. <동아일보><부산일보>는 채중현씨가 사재로 이 극장을 설립했다고 보도한 반면, <조선일보>만 이를 공설(公設)’극장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만일 채중현씨가 <벌교구락부>를 개관, 낙성한 후 이를 벌교읍에 희사했다면 공설극장이 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벌교구락부(1930)><목포극장(1926)>에 이어 전남 지역에서 조선인이 개관한 두 번째 극장이었고, <광주극장(1935)>보다 5년이나 이르게 개관한 조선인 설립의 극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최승희의 벌교공연은 벌교구락부 개관 1주년 기념 특별 행사였음도 확인되었다.

 

 

벌교 공연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면서 여러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나주의 홍양현 선생, 화순의 임재택 선생님, 벌교의 한광석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그중에서도 벌교에서 출생, 성장하셨고 지금도 벌교에서 활동하고 계신 한광석 선생님은 직접적인 도움을 주셨다.

 

특히 한광석 선생님은 벌교의 역사와 일제강점기의 상황, 그리고 음악가 채동선 선생에 대한 말씀을 자세히 해 주셨는데, <벌교구락부>의 설립자인 채중현씨가 채동선 선생의 부친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셨다. 그 덕분에 채동선과 최승희의 가족 사이에 인적 교류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 같은 인맥이 벌교 공연이 성사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벌교 공연이 확인됨으로써 최승희 전남지역 순회공연에 대한 다른 연구 가능성도 열렸다. , 목포, 광주, 벌교와 함께 전남의 5대도시에 속했던 순천과 여수에서의 공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당시 순천과 여수가 벌교의 북동쪽과 남동쪽으로 불과 2-30킬로미터 떨어진 가까운 곳이었을 뿐 아니라, 두 도시 모두 경전선과 전라선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공연 예정지로 꼽힐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벌교 공연 이후의 최승희 일정, 특히 순천과 여수의 일정을 확인해 주는 신문기사 자료는 아직 발견된 바 없지만, 벌교 공연이 확인된 만큼 순천과 여수의 공연 가능성을 상정하고 조사연구를 계속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벌교 공연은 지금까지 최승희 연구자들에 의해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었던 공연으로 이번 조사과정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지만, 향후 최승희의 전남지역 순회공연에 대한 연구를 확장하는 데에도 자극을 주는 중요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022/5/28,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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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최승희의 벌교 공연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지만 사실 이는 잘못된 인상을 주는 표현이다. 1931126일 밤 <벌교구락부> 무대에서 춤을 추었던 것은 최승희 혼자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무용수들 외에도 공연을 위해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무대 위에서는 열 명 이상의 무용수가 최승희와 번갈아 14개 작품을 발표했다. 보이지 않게 일했던 무대, 음악, 조명 및 의상과 소품 담당자들과 매니저와 단장까지 합치면 약 20여명의 단원들이 공연의 성공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벌교 공연의 연목은 제4회 신작발표회의 연목과 거의 같았을 것이기에, 14개 작품을 상연하려면 적어도 10여명의 무용수가 필요했다. 이름이 명시된 무용수가 8(최승희, 김민자, 조영숙, 노재신, 이정자, 곽경신, 정임, 마돌)이었고, 군무에만 참여한 무용수들이 더 있었을 것이다.

 

이는 지방공연에 대한 언론보도에서도 확인된다. 1931912일자 <동아일보(7)>는 경성 단성사에서 열렸던 제4회 신작발표회 직후의 수원 공연 소식을 전하면서 최승희무용연구소 연구생 10여명 소녀의 총출동이라고 보도했고, 1931121일자 <조선일보(7)>도 군산 공연을 보도하면서 동 연구소원 전부가 총출연했다고 전했다.

 

프로그램에 이름이 명시된 7명의 제자(=연구생) 중에서 노재신과 이정자는 192911월 무용연구소가 개설됐을 때부터 최승희와 고락을 함께한 제자들이다. 193012월에 입단한 김민자는 입단은 1년 늦었지만 최승희의 수제자가 되었다. 조영숙은 19313월 이후에 입단했지만 그해 5월의 제3회 신작발표회에서 독무를 맡을 만큼 빠른 성장을 보였다. 곽경신과 정임과 마돌은 19315월 이후에 입단한 신입단원들로 보인다.

 

따라서 최승희와 수제자 그룹의 5명이 벌교 공연의 14개 연목 중에서 10개 작품을 공연한 셈이고, 연구생들의 군무는 4개 작품(세계의 노래, 영혼의 절규, 폭풍우, 건설자)이었다.

 

 

한편 최승희의 독무는 <자유인의 춤><십자가>의 두 작품이었고, 중무는 김민자와의 <철과같은 사랑> 한 작품뿐이었다. 따라서 최승희가 주목을 받을만한 작품은 14개 작품 중에서 3작품에 머물렀고 다른 11개 작품은 수제자들과 연구생들의 참여와 활약에 의지했던 셈이다.

 

그밖에 무용공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음악과 조명, 무대장치이다. 라이브 반주를 사용할 때 근대무용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사용했고, 조선무용은 북과 장구, 꽹과리와 징 등을 이용했다. 따라서 적어도 2, 많게는 4-6명의 악사가 필요했다. 비용절감을 위해 레코드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 경우에도 적어도 한 사람이 축음기 조작을 전담해야 했다.

 

무용 공연에서는 조명이 중요한데, 최승희는 조명에 대해 특히 까다로웠다. 뉴욕 카네기홀의 조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한 일이 있었을 정도이다. 그런 최승희를 만족시켰던 사람이 원우전(元雨田)이었고, 최승희무용단 제4회 신작발표회의 무대감독을 맡아 주었다. 다만 원우전이 지방공연에 동행해 무대와 조명을 담당해 줄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무용공연의 조명은 적어도 좌,우와 중앙의 3개가 필요하며, 그중의 하나(대개는 중앙 조명)는 스포트라이트 기능을 갖춰야 했다. 1930년대에 전자식 원격제어가 가능했을 리 없으므로 적어도 3명의 조명 담당자가 따라 붙어야 했다. 이렇게 보면 벌교 공연의 무대, 조명, 음악 담당자가 적어도 4-5명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승희무용단의 단장과 매니저는 가족이 맡았다. 단장은 아버지 최준현이 맡았던 것으로 보이며, 공연의 기획과 극장 섭외, 언론 홍보, 회계 관리 등의 실무는 주로 큰오빠 최승일이 담당했고, 경우에 따라 작은오빠 최승오가 맡기도 했다. 19315월 결혼 후에는 남편이 매니저 일을 이어받는 것이 자연스러웠겠지만, 안막이 결혼 직후 사회주의 문예운동 혐의로 수감되었기 때문에 벌교 공연의 매니저 역할도 최승일이나 최승오의 몫이었을 것이다.

 

최승희의 벌교 공연은 최승희 만의 공연이 아니었다. 10여명의 무용수와 4-5명의 스탭, 단장과 매니저 역할의 가족까지 합치면 20명이 넘는 공연단이었던 것이다. (2022/5/26,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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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126일의 공연에서 최승희는 벌교의 관객들에게 어떤 작품을 선사했을까? 벌교민의 반응은 어땠을까? 환호와 갈채를 보냈을까, 아니면 처음보는 근대무용에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을까? 어떤 작품이 가장 좋은 반응을 일으켰을까? 야유를 받았던 작품은 없었을까?

 

불행히도 최승희 벌교 공연의 연목(=공연작품 목록)에 대한 자료는 발견된 것이 없다. 벌교 공연의 프로그램이 남아 있다면 문제는 간단할 것이다. 혹은 당시 벌교 신문이나 잡지에 게재된 감상문이나 비평문이 발견된다면 각 연목과 그에 대한 관객의 반응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벌교 공연에 대한 문헌 자료는 1931112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한 문장짜리 단신 기사가 전부이다. 최승희가 내연(來演)했다는 것과 공연의 일시와 장소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따라서 모든 것을 추론에 의지해야 한다. 다행히 벌교 공연 전후의 상황을 잘 살피면 연목에 대한 정보를 추론해 낼 수가 있다.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공연 과정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우선 경성에서 신작발표회를 개최한 다음, 그 연목을 가지고 지방 순회공연을 단행하는 것이 순서였다. 이는 최승희가 도쿄 무용유학 시절 스승 이시이 바쿠로부터 직접 배우고 경험한 바였다.

 

이시이 바쿠가 새로 창작한 작품들은 도쿄 공연에서 첫 선을 보이지만, 거듭되는 지방 순회공연을 통해 다듬어지곤 했다. 같은 작품의 공연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무용수의 숙련도가 높아져서 오히려 지방의 관객들이 수도권 관객들보다 세련되고 성숙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최승희도 같은 방식을 택했다. 1931916일자 <동아일보(7)>는 최승희의 마산 공연을 소개하면서 최승희무용연구소 일행은 금번 신작무용을 발표함과 동시에 남조선지방을 순회 중이라고 보도했다. 마산 공연의 연목이 경성 공연의 연목과 같음을 시사한 것이다.

 

 

1013일자 <매일신보(7)>무용가 최승희는 경성에서 신작무용을 발표한 후 지방공연의 첫걸음으로 오는 13일 해주극장에서 신작무용발표회를 개최한다고 보도했다. 경성에서 발표된 신작무용 연목이 해주에서도 반복될 것임을 알린 것이다. 1031일자 <동아일보(7)>도 개성 공연의 연목이 신작무용공연회의 그것과 같을 것이라고 서술했다.

 

, 최승희는 193191일 단성사에서 공연했던 제4회 신작발표회의 연목을 가지고 수원(913)을 비롯해, 김천(916), 대구(17), 밀양(21), 마산(22), 진주(23), 통영(25) 공연은 물론, 조치원(1124), 청주(25), 대전(26), 전주(29), 군산(30), 목포(124), 광주(5), 그리고 벌교(6) 공연을 진행했던 것이다.

 

따라서 126일의 벌교 공연의 연목은 이틀 전의 목포 공연과 하루 전의 광주 공연의 연목과 같았을 뿐 아니라 석 달 전인 91일 경성 <단성사>공연 연목과 대동소이했음에 틀림없다. 193191일자 <매일신보(5)>는 제4회 신작발표회의 14개 작품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 1. 세계의 노래 (연구생 일동); 2. 자유인의 춤 (최승희); 3. 토인(土人)의 애사(哀史) (김민자, 조영숙); 4. 미래는 청년의 것이다. (노재신, 김민자, 이정자, 곽경신, 정임); 5. 번외 야곡(夜曲) (노재신).

 

2, 1. 인조인간 (최승희, 노재신); 2. 영혼의 절규 (연구생 일동); 3. 철과 같은 사람 (: 최승희, : 김민자); 4. 고난의 길 (최승희 외 연구생); 5. 번외: 이국의 밤 (이정자, 노재신).

 

3, 1. 폭풍우 (최승희 외 연구생); 2. 어린 용사 (곽경신, 조영숙, 이정자); 3. 십자가 (최승희); 4. 건설자 (최승희 외 연구생).”

 

 

물론 91일의 경성 공연 연목이 석달 후 벌교 공연 연목과 완전히 일치했는지는 의문이다. 최승희는 무용수의 숙련도와 표현력, 그리고 관객의 반응 등을 고려하면서 각 지방 공연의 연목을 조정하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벌교 공연의 연목이 제4회 신작발표회의 작품들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2022/05/26,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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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벌교 공연은 채동선과 최승일, 그리고 안막을 통해 성사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혹시 채동선과 최승희가 직접 연결되었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있었다.

 

192996일 채동선은 베를린 음악 유학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왔는데, 그보다 한 달 전인 19298월 최승희도 도쿄 무용 유학을 마치고 귀경해 있었다. 채동선의 귀국 독주회는 19291128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렸는데, 최승희의 조선에서의 첫 번째 무대는 1929125-7일 조선극장에서 열린 찬영회 주최의 <무용,,영화의밤> 행사였다.

 

이 행사에서는 박승희(朴勝喜, 1901-1964)가 이끄는 토월회의 화제작 <아리랑>이 재연되면서 화제가 되었고,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崔承一, 1902-?)의 아내 석금성(石金聖, 1907-1995)도 여주인공 봉희 역을 맡아 출연했다. 최승희는 <인도의 애수>, <황혼>, <소야곡> 등 자신의 최초 창작무용 작품을 선보여, 그의 신무용을 궁금해 하던 관객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켰다.

 

 

채동선의 독주회와 찬영회의 <무용,,영화의밤>은 저물어가는 경성의 1929년을 장식한 두 개의 주요 예술행사였다. 독일 유학 경력의 바이얼린의 귀재 채동선 독주회가 경성의 화제가 된 것은 당연했고, 최승희도 이 연주회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시이바쿠 무용연구소 시절 클래식 음악에 대한 연구를 병행했던 최승희는 이 연주회를 직접 참관했을 가능성도 있다.

 

<무용,,영화의밤>은 경성 유수의 무대예술인들이 총출동했던 행사였고, 몰려드는 관객들의 요청으로 이틀로 예정되었던 공연일을 하루 더 늘려야 했을 만큼 인기가 높았으므로, 채동선도 이 공연을 참관했거나 적어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이후 채동선과 최승희가 함께 출연한 공연도 있었다. 1930411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중앙유치원의 <신춘음악무용의밤> 행사였다. 193041일자 <조선일보(5)>에 따르면 중앙유치원은 조선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수많은 아동을 보육하여 온유치원이며 경비의 곤란을 겪는 이 유치원을 후원하기 위해 예술인들이 공연을 조직했던 것이다.

 

이 공연에서는 최승희가 무용부문을 담당하는 한편, 음악부문에는 피아노의 김영환(金永煥, 1893-1978), 성악가 안기영(安基永, 1900-1980)과 현제명(玄濟明, 1903-1960) 등과 함께 바이올린의 채동선이 참여했다. 즉 최승희의 벌교 무용공연이 있기 1년 반 전에 채동선과 최승희는 같은 연주회에 참여하면서 면식을 익혔고 서로의 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또 김영환은 숙명여학교 시절 최승희의 음악교사였고, 안기영은 배재학당 출신으로 최승일과 동창이면서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김영환의 제자였을뿐 아니라,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28년 귀국한 후에는 이화여전의 교수로 임용되어 채동선과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 초기 근대 음악가들의 명성은 당대에도 이미 자자했다. 문예지 <동광>19316월호(통권22)에서 김영환씨는 피아니스트로서 우리 악단의 길을 열은 사람이며 고종황제 생신어연이 석조전에서 열렸을 때 어전 연주를 하여 금일봉 3천원을 받은경험이 있고, “‘예술가가 칼을 찰 수 없다며 총독부 학무국 근무를 거절한 배짱 있는 음악가라고 서술했다.

 

 

안기영씨는 .. 악단의 경이라면서 작곡가로서도 촉망되는 바 그의 <작곡집1><2>, 그리고 <조선민요집> 등은 ... 선진국 악단에 내놓아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고 평했다. 현제명씨는 테너보다 바리톤에 가깝지만 안기영씨와 같이 악단의 쌍벽이라고 치하했다.

 

이어 기사는 채동선씨는 조선 안에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기술로나 예술로나 첫손을 꼽아야 할 사람이라면서. 같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채동선을 가르친 바 있던 홍난파를 상식 이하의 유치한 이론을 가진 사람으로 폄하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평가를 내렸다.

 

최승희가 이렇게 10년 이상 연상인 쟁쟁한 음악가들과 같은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무용이라는 신예술을 개척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기회를 통해 최승희는 채동선과 직접적인 예술적 교분을 갖게 되었으므로, 그로부터 일 년 반 후에 채동선으로부터 벌교 공연의 제안을 받고 이를 수락했더라도 그다지 이상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2022/5/25,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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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극장> 낙성식을 보도한 세 신문의 기사에 공통된 또 한 가지 내용은 이 극장의 설립자가 채중현(蔡重鉉)씨라고 밝힌 점이다. 특히 <부산일보>가 채중현을 벌교의 백만장자라고 소개한 것을 보면 그가 상당한 재산가였음을 알 수 있다. 다른 기록에 채중현이 만석꾼이라고 서술된 것을 보면 그가 벌교 지역의 대지주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채중현은 벌교의 근검조합장을 역임하고 남선무역회사의 이사로 활동하는 등 금융업과 무역업에도 종사했다. 게다가 사립 송명학교의 기성회장과 벌교유치원의 원감을 역임하는 한편, 새로 학교 부지를 기증하여 벌교소학교(지금의 벌교남초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에도 열의를 보였다.

 

교육에 대한 투자와 학교 경영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최중현은 1931211일 총독부학무국으로부터 전남의 대표적 교육자로 표창을 받았다. 벌교 주민들도 19343월 소화다리 인근에 채중현 기념비를 세우고 그의 공덕을 기렸다.

 

 

지주이자 기업가, 교육후원자로서 <벌교극장>을 설립한 외에 채중현씨가 필자의 주목을 끈 것은 그가 음악가 채동선(蔡東鮮, 1901-1953)의 부친이었다는 점이다. 채중현이 <벌교극장>을 설립했을 때 그의 아들 채동선은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지 1년만이었다. 채중현은 아들이 고향에서 연주회를 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부친의 재력과 함께 자신의 영민함과 예술적 재능을 바탕으로 채동선은 1915년 순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경성으로 유학, 경성제1고등보통학교(=경기고)에 입학, 3학년이던 1918년 홍난파에게서 바이얼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4학년이었던 1919년 만세운동에 가담해 투옥되었지만 벌교 대지주인 아버지의 힘으로 출옥, 경성제1고보를 중퇴하고 일본유학길에 올랐다.

 

1920년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음악대신 영문학을 전공했다. 1924년 와세다대 졸업 후 잠시 미국생활을 했으나, 바이올린 전공으로 마음을 정하고 독일 베를린의 슈테른 음악학교에 입학,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다. 19299월 귀국한 후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1939년까지 4회에 걸친 개인 독주회와 다수의 작품발표회를 가졌다.

 

 

채동선의 약력을 정리하다보니 평행선처럼 떠오른 다른 인물이 있었다.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崔承一, 1902-?)이다. 강원도 홍천 출생인 최승일은 1905년경 대지주인 아버지 최준현(崔濬鉉)를 따라 상경, 배재학당에서 수학했다. 그는 1919년 만세운동에 연루되어 학교를 중퇴하고, 1920년 도쿄의 니혼대학 미학과에 입학했는데, 1922년 집안이 경제적으로 몰락하자 니혼대를 2년 만에 중퇴하고 경성으로 돌아와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 문사로 활동했다.

 

, 채동선과 최승일은 경성에서의 고등보통학교 시절, 삼일만세운동의 경험, 같은 시기의 도쿄 유학생활 경험을 공유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이 1년에 1백명 미만이던 시절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서로를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사이에서라면 채동선이 최승일에게 최승희의 벌교 공연을 제안하고 초대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최승희의 남편 안막(安漠, 1910-?)도 채동선과 학연이 있다. 안막은 채동선보다 9살 연하이므로 학창시절이 겹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와세다 영문학과 동창이다. 재경성 와세다대 동창회는 1930115일 채동선의 귀국독주회를 주최했고, 연주회가 끝난 뒤에는 동창회 회식이 이어졌다. 당시 경성에 체재했던 안막도 이 연주회와 회식에 참석했을 가능성이 높다.

 

안막과 최승희의 결혼은 193159일로 최승희의 벌교 공연 반년 전이다. 따라서 <벌교극장> 개관1주년기념 특별행사에 최승희의 무용공연을 유치하려는 것이 채중현의 계획이었다면, 이는 채동선을 통해 최승일이나 안막을 경유해 성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는 상황증거에 따른 추론이며, 이를 뒷받침할 명시적 자료는 발견된 바 없다. 그러나 최승희와 채동선의 인적 관계망을 고려하면 그가 호남 순회공연 일정을 짜면서 전주, 목포, 광주를 거쳐 벌교에서 공연을 가졌을 개연성이 충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2022/5/24,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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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벌교 공연 보도에 의구심을 가졌던 것은 극장 때문이기도 했다. ‘인구 5천명의 벌교포에 무용 공연을 열만한 제대로 된 극장이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최승희는 도쿄 무용유학 시절 <이시이바쿠무용단>의 일원으로 적지 않은 공연에 출연했다. 도쿄의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이나 유라쿠자(有樂座), 호가쿠자(邦樂座)나 니혼(日本)극장 등의 주요 극장들은 수용인원 2천명 이상의 초대형이었다.

 

무용 유학을 마치고 경성에 돌아온 후에 가졌던 4차례의 공연은 경성공회당(1,2)과 단성사(3,4)에서 열렸는데, 둘 다 객석 1천석의 대형 극장이었다. 최승희가 벌교에 앞서 공연했던 목포의 <목포극장>도 정원이 510, 광주의 <제국관>670여석 규모였다. 1930년대에 벌교에도 웬만한 규모의 무대가 마련된 극장이 있었을까? 놀랍게도 있었다. 그것도 수용인원 1천명의 대형극장이었다.

 

 

1930129일자 <동아일보(3)>“1천여 명을 수용할 벌교구락부 신축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사는 전남 벌교포는 5천여 인구가 거주하며 문화적 모든 시설이 거개 구비한 적지 않은 도시라면서도 시민이 모여 공사간 협의할만한 장소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채중현(蔡重鉉)씨가 금번에 구락부(俱樂部)를 당지 중앙지점인 신시장 하단에다 18백원의 적지 않은 금액으로, 건평 130여평에 1천명 이상 수용할극장 설립 공사를 벌여 근일에 끝났음으로 지난 6일 오후에 낙성식까지 거행했다고 자세히 보도했다.

 

1210일자 <부산일보(7)>벌교극장 신축이라는 제목아래 벌교의 백만장자 채중현씨가 고장에 극장이 없는 것을 유감으로 여겨” <벌교극장>을 설립했으며 “6일 낙성식과 피로연에는 일본인과 조선인 2백수십명을 초대"했는데, 이 연회에는 조선 기생의 무용등이 공연되었고 오후 6시경에 마쳤다고 보도했다.

 

1214일의 <조선일보(7)>도 벌교의 공설극장신축이라는 기사를 게재하면서 벌교 신시장 인접지에다 4천여원의 거액을 들여 구락부식 공설극장을 신축하고 “6일 오후3시부터 낙성식과 피로연을 열었는데 주최자 채중현씨의 개회사가 있은 후 벌교면장 홍인표(洪寅杓)씨의 답사와 다수 내빈의 축사가 이뤄졌고, “여흥으로 조선명창 리화중선(李花中仙) 형제의 성악으로 다수한 내빈에게 많은 위안을 드리고 6시에 폐회했다고 전했다.

 

 

<벌교구락부> 혹은 <벌교(공설)극장>이라고 불리던 이 극장의 공사비용에 대해서는 기사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채중현씨가 사재를 털어 신시장 하단/인접지에 건설해 “126일 낙성식을 가졌다는 점은 모두 공통되므로 믿을 만한 내용이다.

 

당시 벌교에는 2개의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홍교에 가까운 상부마을의 구시장과 벌교역에 가까운 하부마을의 신시장이 그것이다. 지금의 벌교시장은 1930년대의 신시장이 확대되어 지금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이며, 홍교 근처의 구시장은 신시장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벌교극장이 신시장의 어디쯤에 설립되었는지는 다음번 현지 취재 때에 확인할 계획이다.)

 

 

한편 <벌교극장>의 규모가 1천명을 수용할 정도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경성공회당>이나 <단성사>에 맞먹는 크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다소 과장일 가능성도 있다. 경성공회당의 2층 넓이가 2백평인데 여기에 1천여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벌교극장>의 건평이 130여평이었다면 <경성공회당>식 계산법으로는 대략 6백여명이 정원이었을 것이다.

 

당시 지방 극장들은 대개 지정좌석제가 아니라, 다다미식이거나 장의자를 사용했으므로 행사에 따라서는 1천명이 들어갈 수도 있기는 했겠지만, 정상적으로는 수용인원 650명의 극장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는 목포와 광주의 주요극장들보다 큰 규모였던 것이다.

 

또한 <벌교극장>의 낙성식이 1930126일에 열렸다는 점은 최승희의 벌교 공연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최승희의 공연 날짜가 정확히 그 일 년 뒤인 1931126일이었기 때문이다. , 최승희의 무용공연은 <벌교극장>의 개관1주년 기념행사였던 것이다. (2022/5/23,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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