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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도리카와 준(綠川潤)<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생애(2006)>에 따르면 1926년의 부산 공연에 참가한 이시이무용단원은 모두 16명이었다.

 

“1926년 봄부터 지방 공연에 주력했습니다. 이시이 바쿠 무용단 일행은 16명으로 우선 중국에 건너가 만주일일신문의 후원으로 대련(大連) 공회당에서 첫 공연을 한 후 뤼순(旅順), 봉천(奉天), 장춘(長春), 지린(吉林) 등을 2개월 동안 순회 공연했습니다. 당시 만주에는 일본인이 다수 이주해 있어서 어느 공연이나 대만원의 성황이었습니다. 그 후 조선으로 돌아갔습니다.”

 

경성과 대구 공연 조사를 통해 16명의 무용단원 중에서 7명의 이름이 확인되었다. 단장 이시이 바쿠(石井漠)와 그의 아내 이시이 야예코(石井八重子), 야예코의 동생이자 바쿠의 파트너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 그리고 바쿠의 여동생 이시이 에이코(石井榮子)는 모두 가족이었다.

 

 

이시이 야예코(石井八重子)는 무용단의 매니저이자 작품 해설가, 무용단 대변인 역할이었다. 경성 공연 때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말을 심하게 더듬던 남편의 인터뷰를 대언하기도 했다.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는 이시이 야에코의 여동생으로, 이시이 바쿠의 지도로 14세에 니혼칸(日本館)에서 데뷔, 192212월부터 약 2년 반 동안 이시이 바쿠와 함께 유럽과 미주 순회공연에 동행했다. 일본에 돌아온 후에도 이시이 바쿠의 무용 파트너였다.

 

이시이 에이코(石井榮子, 1911-1936)는 바쿠의 막내 동생으로 나이 차이가 25년이었다. 에이코는 교사나 간호사가 되려 했으나 이시이 바쿠가 무용을 가르쳐 내제자로 삼았다. 1926년의 만주-조선 순회공연에서 에이코는 독무 <개구쟁이(わんぱく小僧)>의 상연을 담당했다.

 

이시이 히로시(石井博志)는 무용단의 무대주임(舞臺主任)이었다. 히로시가 이시이의 가족이나 친척이었는지, 혹은 우연히 성이 같은 사람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시이 바쿠의 전기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생애(2006)>에도 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마츠우라 다비토(松浦旅人, 1899-1927)는 가족 단원은 아니지만 무용단의 무용수였다. 오사카의 이와마 사쿠라코(岩間櫻子) 무용단에서 무용을 시작했던 그는 1920<도쿄오페라좌>에 가입하면서 이시이 바쿠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마츠우라 다비토는 1920년 여름의 홋카이도, 도호쿠, 호쿠리쿠 순회공연과 1921년 봄의 간사이, 산요, 큐슈 순회공연, 그리고 19262월의 만주와 조선 순회공연에 동참했다. 조선 공연에서 마츠우라 다비토는 독무 아동무용 <오늘밤은(今晩)>과 이시이 바쿠와 함께 추는 듀엣 작품 <명암(明闇)>의 상연을 담당했다.

 

호시나 테루오(保科輝雄)는 무용단의 피아니스트였다. 1926325일의 <경성일보>는 이시이무용단의 단원 4명의 이름을 명시했는데, 그중 한 명이 피아니스트 호시나 테루오였다.

 

본사 후원으로 경성에서 열린 3일간의 신작무용시회에서 충분히 천재를 발휘한 이시이 바쿠(石井漠), 야에코(八重子)부인, 그 여동생 코나미(小浪), 피아니스트 호시나 테루오(保科輝雄)씨 등 일행은 23일 아침 경성에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인천으로 향했다.”

 

 

1926328일의 <부산일보>는 무용단의 스탭과 임원 명단을 좀 더 자세하게 보도했는데, 이에 따라 무대조명(舞臺照明) 담당자 이토 다츠지(伊藤辰次) 석정무용시연구소의 대표자 키무라 센고(木村仙吾), 그리고 고문 무라오카 라쿠도(村岡楽童)의 이름이 밝혀졌다.

 

키무라 센고는 이시이 바쿠와 함께 제국극장 양악부 동창생이었다. 19126월 제국극장에서 상연된 <가극석가(歌劇釋迦)> 프로그램에 따르면, 이시이 바쿠는 정판왕의 시신(浄阪王侍臣)의 한 사람으로 출연했고, 키무라 센고는 오케스트라에서 트럼본을 연주했다.

 

무라오카 라쿠도는 대련(大連)에서 활동하면서 만주국 국가를 작곡하는데 참여했던 작곡가였다. 키무라 센고와 무라오카 라쿠도가 어떤 경로로 이시이무용단의 단장과 고문을 맡게 되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조명담당 이토 다츠지에 대한 문헌도 아직 발견된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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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시극 <젊은 판과 님프(きパンとニンフ)>는 이시이바쿠 무용단의 부산공연(1926328, <국제관>)에서 발표된 열한번째(25번째)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이었다. 피날레에 해당하는 이 작품은 이시이 바쿠의 가장 널리 알려진 초기의 대표작의 하나이며,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1>에서는 이 작품이 1924년 도쿄에서 야마다 코사쿠(山田耕筰)의 음악을 배경으로 창작한 작품으로 서술되어 있다.

 

(Πάν, Pan)’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목양의 신이다. 염소의 하반신과 사람의 상반신, 그리고 뿔이 돋은 머리를 가진 사람의 모습을 가졌다. 신화에서는 자주 물의 신 님프와 어울리는 장면이 나오고, 주로 판이 님프를 쫓아다니며 희롱하는 모습이 자주 묘사되었다. 그래서 판과 님프는 자주 남녀간의 사랑과 섹스와 자주 연관되었다. 그리스 신화의 판은 로마 신화의 파우누스(Faunus)나 사튀르(Satyr)로 이어지는데, 이들은 그 자유분방한 성격과 행동 때문에 18세기 낭만주의 예술 사조의 상징적인 존재로 내세워졌다.

 

 

한편 님프(νύμφη, nymph)는 고대 그리스 민요에 등장하는 여성신이다. 자연이 신격화된 존재로서 인간보다는 오래 살지만 불사의 존재는 아니며, 자연이 여러 모습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님프도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됐다. , 회나무 님프와 참나무 님프, 강물 님프와 바다 님프 등으로 그들이 거주하는 곳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야마다 코사쿠의 악곡 <젊은 판과 님프(1915)>과 이시이 바쿠의 무용작품 <젊은 판과 님프(1916)>은 모두 고대 그리스 신화의 판과 님프의 개념을 따르고 있다. 이는 야마다 코사쿠가 <젊은 판과 님프>를 작곡한 것은 그의 베를린 유학시절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Prélude à l'après-midi d'un faune, 1894)>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91212월 니진스키가 안무한 무대를 여러 번 관람하면서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야마다 코사쿠가 변경한 것이 있다면 드뷔시가 (faune)’이라고 불렀던 목신이라고 한 것을 (パン)’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야마다 코사쿠가 19157월에 <젊은 판과 님프>의 작곡을 마치고 악보에 제목을 썼을 때는 <젊은 켄타우로스-5개의 포엠(きケンタウル5つのポエム)>라고 되어 있었다. , 이 곡은 5개의 소곡으로 이뤄진 모음곡이었고, 분위기면에서 드뷔시의 곡과 유사한 곡들이었다.

 

 

<젊은 켄타우로스-5개의 포엠>1번곡이 126, 2번곡이 39, 3번곡이 47, 4번곡이 49, 5번곡의 51초의 길이다. 따라서 전곡은 432초이므로 이시이 바쿠의 초기 무용시들보다 약간 긴 편이다. 이시이 바쿠가 5곡을 모두 사용했다면 다소 긴 작품이 되었을 것이고, 혹은 5곡 중 몇 곡만 선택해서 편곡한 음악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시이 바쿠의 <젊은 판과 님프>가 초연된 것은 19169, 도쿄 마루노우치 소재 보험협회 강당에서 열렸던 <신극장 제3회 공연>이었다는 기록도 있고, 191868일 개명좌(開明座)에서 열렸던 <도쿄가극장공연>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초연이 이루어진 공연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더 조사가 필요하지만, 적어도 초연 당시의 제목이 <젊은 목신과 물의 요정(牧神)>이었으며, 이 제목이 후일 <젊은 판과 님프(きパンとニムフ)>로 바뀐 것이 분명하며, 제목이 바뀐 뒤의 초연은 이시이 바쿠와 코나미가 세계 순회공연을 출발하기 직전인 1922105일 제국극장에서 열렸던 <석정막도구기념무용공연>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젊은 판과 님프>의 안무과정에 대해 이시이 바쿠는 그의 자서전 <나의 얼굴(1940)>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긴바 있었다.

 

어느 날 너무 배가 고파서, 2층 선생님의 서재에 가보니, 놀랍게도 선생님은 작곡이 한창이었고, 나를 보시자 여기는 아무래도 오보에를 써야겠군'이라면서 어젯밤 의논했던 <젊은 판과 님프>의 음악을 들려주셨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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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무용단의 부산공연에서 10번째(2부의 4번째)로 상연된 <고뇌하는 그림자(ましき)>는 이날 발표된 12개 무용작품 중에서 가장 덜 알려진 작품이었다. 번외작품으로 부가된 <일본무용>의 실재를 짐작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면, 그 바로 다음이 바로 이 <고뇌하는 그림자>였다. 적어도 한국에 알려진 문헌에는 이 작품을 서술하거나 평론한 것은 거의 없었다.

 

19277월에 출판된 <석정막 팜플렛 1>의 이시이 바쿠 작품 목록에는 <고뇌하는 그림자>가 없고, <쓸쓸한 그림자(しき)라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야마다 코사쿠의 악곡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해 1921년 도쿄에서 안무된 작품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192773, 도쿄 아사히강당 공연에서도 <고뇌하는 그림자>는 발표되지 않았고, 1928518일의 춘계공연과 10월일의 추계공연, 그리고 1025-26일의 경성 공연에서도 <고뇌하는 그림자><쓸쓸한 그림자>는 발표 작품에 포함되지 않았다. 19307월에 출판된 <석정막 팜플렛 4>에도 <쓸쓸한 그림자><고뇌하는 그림자>가 빠져있었다. 즉 이 두 작품은 192773일 이후에는 이시이 바쿠의 작품 목록에 수록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으로 미루어 보아, 1921년에 창작되어 1926년까지 공연되었던 <고뇌하는 그림자>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1927년부터는 <쓸쓸한 그림자>로 개칭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1927년의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쓸쓸한 그림자>의 창작연도를 1921년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는 <고뇌하는 그림자>가 창작된 연도이기도 하다.

 

이렇게 개칭된 <쓸쓸한 그림자>나마 19277월부터는 상연되지 않았는데, 아마도 이 작품이 안무자 이시이 바쿠의 성에 차지 않았거나, 관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 작품으로 판단되었거나, 1927년경에는 이미 발표할 수 있는 레퍼토리가 상당히 축적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세 가지 이유가 모두 중첩되었기 때문에 <고뇌하는 그림자><쓸쓸한 그림자>가 모두 이시이무용단의 레퍼토리에서 누락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시이 바쿠가 <고뇌하는 그림자>를 안무할 때 사용했던 배경음악은 어떤 악곡이었을까? 이시이 바쿠의 작품 목록에는 <고뇌하는 그림자><쓸쓸한 그림자>가 모두 야마다 코사쿠의 음악을 사용한 작품이라고 서술되어 있지만, 야마다 코사쿠의 작품 목록을 보면 그림자라는 말이 들어있는 제목의 작품은 없었다.

 

<고뇌하는 그림자>의 음악에 대한 유일한 힌트는 1926320일의 <경성일보>가 제공한다. 이 기사에서는 <고뇌하는 그림자>를 설명하면서 신앙과 유혹(信仰誘惑), 계율의 빛(戒律), 처녀의 달빛 고뇌(處女月光), 고결한 마음에서 벌어지는 영과 육의 싸움(心高きものゝ)”을 묘사한 작품이라고 했다. ‘신앙이나 유혹’, ‘계율이라든가 영과 육의 싸움등의 표현은 종교적 용어들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야마다 코사쿠의 작품 중에 종교적 소재를 작품화한 것으로 교향곡 <막달라마리아(マグダラのマリア, 1916)>가 있다. 이 작품은 야마다 코사쿠 본인에 의해 무도교향(舞踏交響曲)이라고 서술되었으므로 무용작품과도 관련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야마다 코사쿠의 무도교향곡 <막달라 마리아>는 벨기에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 1862-1949)의 희곡 <막달라 마리아(Marie-Magdeleine, 1910)>의 제2막을 교향악으로 작곡한 것이다. 191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마테를링크의 <막달라 마리아> 2막은 창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 전날 밤 로마군 장군 베루스(Lucius Verus)에게 예수 처형 중지를 요청하지만, 질투심에 휩싸인 베루스는 이를 거절한다는 내용이다.

 

이 같은 내용을 잘 알고 있던 이시이 바쿠는 야마다 코사쿠의 <막달라 마리아>를 사용하여, 예수 처형 전날 밤, 예수의 가르침과 베루스의 질투 사이에서 고뇌하던 막달라 마리아, 결국 예수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던 그의 쓸쓸한심경을 그림자로 형상화하여 무용작품으로 형상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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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マスク, 1924)>는 이시이무용단의 부산공연(1926328, <국제관>)에서 9번째(2부의 3번째)로 상연된 작품이다. <마스크>는 이시이 바쿠가 미국 순회공연 시기에 뉴욕에서 안무해 초연했던 작품으로, 귀국 후에도 일본에서 자주 공연되었던 독무 작품이다.

 

이시이 바쿠는 세계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에 두 차례에 걸쳐서 쓰키지 소극장에서 가졌던 귀국공연에서도 <마스크>를 발표했고, 1926103일 미츠코시(三越) 백화점 옥상에서 열렸던 이시이무용단 공연 및 촬영회에서도 <마스크>를 상연했다. 또 이듬 해인 192773일 도쿄 아사히강당(東京朝日講堂)에서 가졌던 공연에서도 이 작품을 공연한 바 있다.

 

이 작품은 또 이시이 바쿠의 상연 모습이 영상으로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1926103일 미츠코시 백화점 옥상에서 열린 야외공연 및 촬영회 당시의 <마스크> 공연 모습이 <그로테스크>와 함께 촬영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상은 시즈오카(静岡)현의 시마다(島田) 시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시마다시 명예시민 시미즈 신이치(故清水眞一, 1889-1986)씨가 촬영회 당일 현장에서 직접 촬영한 것으로, 1986년 그가 타계하면서 다른 소장 자료와 함께 시마다 시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20143월 시미즈 소장품 중에 이 영상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고, 321일 세타가야(世田谷) 미술관의 분관인 미야모토 사부로(宮本三郎) 기념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전시회를 개최해 일본 전역의 관심을 끌었다.

 

그로부터 약 10개월 후인 20151월 이 영상의 존재가 한국에도 알려져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는데, 이는 이 영상에 불세출의 조선무용가 최승희의 공연 모습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해방 이전 공연 모습을 담은 영상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영상에 나타난 이시이 바쿠의 <마스크> 공연 모습은 그의 다른 작품들과 다른 점이 있다. 이시이 바쿠는 긴 치마 형태의 의상으로 감싼 하반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상반신, 특히 얼굴 표정과 팔 동작만으로 작품을 공연했다는 점이다. 이는 훗날 최승희의 <보살춤>을 연상시키는 공연 형태였던 것이다.

 

그런데 <마스크>를 관람하면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이시이 바쿠는 이 작품을 상연하면서 가면을 쓰지도 않고, 손에 마스크를 들고 있지도 않다. 그런데 왜 제목이 <마스크>일까?

 

 

그것은 음악 때문이었다. 이 작품의 배경음악은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Alexander Scriabin, 1872-1915)<마스크(1912)>이다. 그의 피아노곡 <두 개의 시(2 Poèmes, Op.63, 1912)> 중의 첫 번째 곡이 <마스크>이고, 두 번째 곡이 <이상함(Étrangeté)>이다. 이 두 짧은 피아노곡은 코드 구성도 생소하고, 따라서 익숙하지 않은 화음이 이어지는데도 그 멜로디와 화음이 이상하게도 청자의 뇌리에 남는다.

 

스크리아빈은 이 같은 화성과 멜로디가 주는 느낌을 특이하지만(bizarre) 달콤함이 숨어있고(avec une douceur cachée),” “미궁에 빠진 듯하면서도(enigmatique) 거짓 달콤함(avec une fausse douceur)과 일견 이상한(avec une étrangeté subite)” 느낌이라고 서술했다.

 

 

사실 스크리아빈의 음악 철학 자체에 모순된 요소를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의 음악은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고(visible-not visible),” “있으면서도 없는(real-not real)” 것을 표현하고 있어서, 아름다운 하모니가 추상적인 멜로디를 감싸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스크리아빈 음악의 매력이라고 한다.

 

스크리아빈의 음악에 먼저 반한 것은 야마다 코사쿠(山田耕莋)였다. 그가 독일 유학을 마치고 1914년 일본으로 돌아올 때 러시아를 경유했는데, 이때 스크리아빈의 음악을 처음 접했다. 깊은 인상을 받은 야마다 코사쿠는 귀국 일정을 늦추면서까지 스크리아빈의 음악을 섭렵했다. 귀국한 후에도 야마다 코사쿠는 자신의 음악에 스크리아빈의 양식을 도입했는데, 이같이 야마사 코사쿠를 통해 이시이 바쿠의 무용 안무에도 스크리아빈의 영향이 이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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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328, <국제관>에서 열린 이시이 바쿠의 부산 공연에서 발표된 8번째 작품은 무용시 <솔베이지의 노래(ソルヴエーヂの)>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의 희곡 <페르 귄트(Peer Gynt, 1867)>의 마지막 장면을 무용화한 작품이다. 배경 음악은 에드바르 그리그(Edvard Grieg, 1843-1907)<페르 귄트(1875)> 19번째 곡이다.

 

입센의 <페르 귄트>는 노르웨이 오슬로 북쪽 2백킬로미터 지점의 릴레함메르(Lillehammer) 중심의 구드브란스달(Gudbrandsdalen) 지방 민담을 바탕으로 집필된 희곡이다. 페르 귄트(Peer Gynt, 1732-1788)는 실제인물이며, 입센은 구드브란스달 지방을 여행하면서 신화나 전설처럼 채색되어 내려오던 그의 다양한 여행 편력과 기이한 행동을 채집, 538장의 희곡으로 집필했다.

 

<페르 귄트>는 운문 희곡이지만 상연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독서용 희곡이었는데, 그 상연 요구가 높아지자 입센은 1875년 그리그에게 반주음악 작곡을 의뢰했고, 1876224일 오슬로에서 초연되었다.

 

 

민담에 따르면 페르 귄트는 사격의 명사수이자 뛰어난 스키어였고 최고의 낚시꾼이었지만, 허풍쟁이이면서도 매력이 넘치는 희대의 바람둥이였다. 페르 귄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노르웨이를 주유하다가 사라진 방랑객이었다.

 

입센은 <페르 귄트>를 집필하면서 실제인물의 편력 중에서 두 가지를 수정했다. 그의 노르웨이 여행 편력을 전 유럽 편력으로 넓혔고,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던 것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 여인이 바로 솔베이지였다.

 

페르 귄트는 솔베이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돈을 벌어오겠다며 집을 떠나 세상을 주유했으나, 결국 재산과 세월을 다 보내고 병들고 나이 들어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솔베이지의 무릎을 베고 세상을 떠난다는 이야기이다. 이때 솔베이지가 불렀다는 노래가 바로 <솔베이지의 노래>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겨울이 지나고 또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세월이 갑니다./ 그러나 그대는 내 사랑이에요./ 내 정성을 다해 늘 그대를 기다립니다.”

 

 

입센의 의뢰로 1875년 작곡된 그리그의 <페르 귄트(Op.23)>는 전주곡과 전5막의 26곡으로 구성되었다. 요즘 널리 알려진 것은 2개의 <페르 귄트 모음곡(Op46 & 55)>인데, 1모음곡(Op46)은 원곡에서 4(8, 14, 15, 18)을 골라 편곡해서 1891년 관현악곡으로 완성했고, 2모음곡(Op55)은 원곡의 5(4, 13, 21, 19, 17)을 선정, 편곡해서 1892년에 완성했다.

 

1모음곡의 4번째 곡, <산마왕의 동굴(In the Hall of Mountain King)>은 이시이 바쿠의 <산을 오르다(야마오노보루, 1925)>의 반주음악으로 채택되었고, 2모음곡의 4번째 곡인 <솔베이지의 노래>는 같은 제목의 이시이 바쿠 무용의 반주음악으로 사용됐다.

 

 

<이시이 바쿠 팜플렛 1>에 따르면 <솔베이지의 노래>는 이시이 바쿠가 유럽-미주 순회공연 중이던 1924년 뉴욕에 체재할 때에 안무된 작품이라고 서술되어 있으므로, 베를린에서 안무되고 초연되었던 <갇힌 사람(われたる토라와레타루히토, 1922)>과 함께, 이시이 바쿠가 순회공연 중에도 창작을 쉬지 않았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힐 수 있다.

 

한편, 이시이 바쿠는 야마다 코사쿠의 영향을 받아 에드바르 그리그의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그리그의 악곡을 반주음악으로 사용하여 창작된 초기 무용작품만도 <솔베이지의 노래(1924)>를 포함해 6개나 된다. <멜랑콜리(メランコリィ, 1922)>, <산을 오르다(야마오노보구, 1925)>, <체념(あきらめ아키라메, 1925)>, <그로테스크(グロテスク, 1926)>, <황혼의 산들(黄昏ゆく타소가레유쿠야마야마, 1927)> 등이 그것이다.

 

이시이 바쿠가 안무한 무용시 <솔베이지의 노래>1926328일의 부산 공연에서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의 독무로 공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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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무용단의 부산공연(1926328일 오후6, <국제관>)에서 발표된 7번째 작품(또는, 2부 첫 번째 작품)2인 무용극 <명암(明暗묘안, 1916)>이었다. 원작은 오치아이 나미오(落合浪雄, 1879-1938)의 희곡, 음악은 야마다 코사쿠(山田耕莋, 1886-1965)의 악곡이었다.

 

이 작품은 1916926일 도쿄 혼고자(本鄕座)에서 열린 <신극장>2회 공연에서 이시이 바쿠(=장님 법사)와 코모리 사토시(小森敏=파계승) 주연으로 초연됐고, 62-4일 제국극장에서 발표된 <법열(法悅, 1916)>, <젊은 판과 님프(1916)>와 함께 이시이 바쿠 최초 3대 무용시다.

 

 

이시이 바쿠는 자신의 초기 작품들을 (1) 의태무용, (2) 무용극 혹은 극적무용, (3) 무용시 혹은 순무용의 세 가지로 분류했는데, <명암>무용극에 속한다. <이시이바쿠 팜플렛 1>에 따르면 무용극혹은 극적 무용이란 과장이 포함된 드라마틱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라든가 줄거리라든가, 그러한 것이 전해지는 무용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의태무용이란 사물의 모습이나 움직임을 흉내 내는 작품으로 <금붕어><그로테스크>가 이 범주에 포함되었다. ‘무용시는 이시이 바쿠가 야마다 코사쿠와 함께 시작한 신무용으로 1926328일의 <부산일보>에서 이시이 바쿠는 자신의 무용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인간이 어떤 종류의 감각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고자 할 때 이를 글로써 하는 경우에는 시()가 되고, 화필로 표현하면 그림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 신체를 통하여 인간의 감정 혹은 사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나의 무용시입니다.”

 

 

<명암>의 줄거리는 그 제목에 상징적으로 시사되어 있다. 한자어 명암(明暗)을 직역하면 밝음과 어두움이지만 이는 흔히 삶과 죽음혹은 이승과 저승이라고 의역되는 말이다. 극작가 오치아이 나미오(落合浪雄, 1879-1938)가 발표한 같은 이름의 희곡이 무용극으로 안무된 <명암>의 줄거리는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4>에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장님인 피리법사(笛法師)가 벼슬을 얻기 위해 상경하던 중 청수사(清水寺키요미즈데라, 798년 건립)의 경내에서 하룻밤을 지새운다. 거기에 쓰러져 자고 있던 파계승이 깨어나 잠든 법사의 지갑을 훔쳐 도망가려는 순간 넘어져 눈이 멀고, 반대로 법사의 눈이 떠진다.

 

법사는 부처의 가호에 감사하면서 파계승에게 그 돈을 보시하려고 하였지만, 파계승은 비록 장님이 되었지만 그 때문에 최초 출가했을 때에 목표로 삼았던 깨달음을 얻었고 청정한 신앙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이에 반해 법사는 눈을 뜨기는 했으나 오히려 물욕이 일어나고, 벼슬도 할 수 없게 되어 무한한 괴로움이 뒤따르는 세상으로 쏜살같이 빠져들고 만다.”

 

, 이 작품에서 3중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1) 밤의 어두움과 달빛의 환함, (2) 보는 눈과 보지 못하는 눈, (2) 마음의 깨달음과 혼미한 마음이 그것이다. 맹인이었던 법사가 눈을 뜨면서 오히려 물욕에 눈을 뜨는 반면, 초심을 잃고 방황하던 파계승은 맹인이 되면서 오히려 깨달음을 얻는다는 반전은 문학적 아이러니를 내포한다.

 

 

<명암>의 부산 공연에서는 이시이 바쿠가 파계승 역을 맡았고, 피리법사는 마츠우라 다비토(松浦旅人, 1901-1927)가 연기했다. 마츠우라 다비토는 오사카 출신의 무용수로 <도쿄 오페라좌> 시기(1918-1921)에 이시이 바쿠를 처음 만나 인연을 맺었다.

 

이시이 바쿠가 아사쿠사 오페라의 오락성 무용공연을 떠나 예술무용을 지향하면서 1920-21년 일본 지방 공연을 단행했을 때 마츠우라 다비토는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일원으로 동행했다.

 

이시이 바쿠가 유럽과 미주 순회공연(1922-1925)을 했던 기간에 마츠우라 다비토는 간사이로 돌아가 독자적으로 활동했으나, 이시이 바쿠가 귀국하자 다시 합류해 1926년의 만주-조선 순회공연에 동행했다.

 

조선 순회공연에서 마츠우라 다비토는 경성(1926321-23)과 인천(324), 대구(326)와 부산(328-29)에서 무용극 <명암>과 아동무용 <오늘밤은(今夜)>을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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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바쿠는 1926328일 부산 <국제관>에서 가졌던 공연에서 16번째 작품으로 <산을 오르다(, 1925)>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듀엣 작품이었고 부산공연에서는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가 출연했다.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1>의 설명에 따르면 <산을 오르다>1925년 무사시사카이(武蔵境)의 이시이바쿠 무용연구소 시절에 창작된 작품이며, “극적 무용과 순무용의 중간 형태(劇的舞踊純舞踊との中間にあるもの)”라고 분류되어 있다.

 

 

이시이 바쿠의 극적무용이란 반드시 (과장이 섞인) 드라마틱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라든가 줄거리가 있는 무용작품을 가리키고, ‘순무용이란 무용시를 가리킨다. ‘무용시라는 용어는 이시이 바쿠가 함께 협력했던 야마다 코사쿠가 만든 말이었다. 두 사람은 1916년부터 1918년까지 협력해서 무용시를 안무했으나, 야마다 코사쿠는 1918년 월 뉴욕으로 떠나면서 무용 활동을 중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야마다 코사쿠가 미국으로 떠난 후 이시이 바쿠는 <도쿄가극좌><도쿄오페라좌>를 차례로 설립해 이른바 <아사쿠사 오페라>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가극단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기고 오락무용의 경향이 짙어지자, 이시이 바쿠는 <도쿄오페라좌>를 해단하고 예술무용으로서의 무용시창작을 계속했다.

 

이어 이시이 바쿠는 유럽과 미국 순회공연(1922-1925)을 통해 자신의 신무용이 유럽에서도 환영을 받는 등 보편성을 가진 것을 확인하고, 귀국한 후에는 무사시사카이(1925)와 지유가오카(1929)에 무용연구소를 개설해 창작과 제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시기에 이시이 바쿠는 야마다 코사쿠와 공유했던 무용시라는 용어를 접고, 자신이 만든 용어인 순무용으로 대체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1(19277)>에서 이시이 바쿠는 자신의 순무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시적 감흥이 인간의 머릿속에 생겨났을 때, 그것을 말이나 글자의 힘을 빌려서 표현하면 시가 되고, 색채나 선의 힘을 빌려서 표현하면 그림이 되고, 소리를 통해서 나타낸 경우에는 음악이 된다. 그리고 이 감흥을 전적으로 신체 운동의 힘으로 표현된 것, 그것이 즉 진정한 무용이다.”

 

이시이 바쿠의 순무용은 용어는 다르지만 내용은 야마다 코사쿠의 무용시와 다르지 않다. 더구나 19307월에 발행된 <이시이 바쿠 팜플렛 제4>에는 순무용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무용시라는 말이 다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시이 바쿠는 순무용이라는 말보다 무용시라는 말을 계속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시이 바쿠가 <산을 오르다>극적무용과 순무용의 중간형태라고 분류한 것은 남녀 두 사람이 함께 등산하는 이야기를 표현하되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느끼는 다양한 서정적 감성 표현을 강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산을 오르다>는 에드바르 그리그(Edvard Hagerup Grieg, 1843-1907)의 악곡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했지만, 이시이 바쿠는 그것이 그리그의 어떤 곡인지 명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무용작품이 <솔베이지의 노래(1924)> 직후에 창작되었다는 점, 그리고 아마도 두 작품 모두에 그리그의 <페르 퀸트(1875)> 삽입곡을 사용했을 것임을 고려하면, <산을 오르다>의 음악은 그리그의 <산왕의 동굴(In the Hall of Mountain King)>일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이 음악은 입센의 희곡 <페르 퀸트(1867)>2막에서 페르가 잉그리드를 납치하려고 산속을 헤매는 장면을 위해 작곡 되었는데, 이시이 바쿠는 이를 남녀가 등산하는 장면으로 변형시켰다.

 

<산왕의 동굴>은 원래 오케스트라 음악으로 작곡되었지만 피아노로 자주 연주되어 관객들에게 매우 친숙한 곡이다. 또 악곡의 길이도 약 240초 정도여서 무용시작품 <산을 오르다>에도 적절했을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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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바쿠의 부산공연 1부의 다섯 번째 발표 작품은 어린이무용(童踊) <개구장이(わんぱく小僧완파쿠고조, 1926)>였다.

 

이시이 무용단이 19263월에 가졌던 만주와 조선 순회공연의 레퍼토리 중에는 동용(童踊), 즉 어린이 무용이라고 분류된 작품이 2개 포함되어 있었다. 부산에서 공연된 <개구쟁이>와 경성 공연에서 발표된 <오늘밤은(今晩)>이었다. <개구장이>는 이시이 에이코(石井榮子, 1911-1936), <오늘밤은>마츠우라 다비토(松浦旅人, 1901-1927)가 공연했다.

 

 

이시이 바쿠가 어린이 무용에 관심을 갖고 창작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자극이 있었다. 하나는 야마다 코사쿠(山田耕莋)였다. 1914년 독일유학에서 돌아은 야마다 코사쿠는 한동안 이와사키 코야타(岩崎小弥太)의 후원으로 도쿄 필하모닉 교향악단을 지휘하며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19155월 후원이 끊기고, 그해 9월에 결혼했던 나가이 이쿠코(永井郁子)와의 관계가 파국으로 끝나면서 시련의 시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 야마다 코사쿠는 음악일기를 쓰면서 창작을 계속했고, 이시이 바쿠와 협력해 무용시 작품을 안무했다. 또 야마다 코사쿠는 이 시기에 함께 기거하던 누님의 두 자녀, 즉 자기 조카와 조카딸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19167월에 어린이를 소재로 한 피아노 소품 10곡을 집중 작곡해 <아이들과 삼촌(子供とおったん, 1917)>라는 피아노곡집으로 출판했다.

 

191611월에는 무라카미 키쿠오(村上菊尾, 후에 河合磯代카와이 이소시로, 1893-1982)와 결혼, 19174월에 장녀 미사(美沙)가 탄생하면서 어린이에 대한 야마다 코사쿠의 애정과 관심은 더욱 높아졌고, 그의 작품 중에 어린이를 소재로 하거나 어린이를 위한 음악이 많아졌다. 이 시기에 야마다 코사쿠와 함께 작업했던 이시이 바쿠는 그의 어린이 곡으로 어린이 무용(童踊)을 안무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이에 대한 이시이 바쿠의 관심을 제고시킨 또 한 사람은 교육가 데즈카 기시에이(手塚岸衛, 1880-1936)였다. 192212월 이시이 바쿠는 유럽으로 가는 여객선 키타노마루(北野丸) 안에서 일본 자유교육의 창시자로 꼽히는 데즈카 기시에이를 만났다. 선실을 마주한 두 사람은 40일간의 항해 기간 동안 매일 얼굴을 맞대고 몇 시간씩 담론을 나누면서 자유교육에 협력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데즈카 기시에이는 이시이 바쿠의 베를린 체류 기간에 그를 찾아오기도 했다.

 

1924년 이시이 바쿠가 도쿄에 돌아오자 데즈카 기시에이는 무사시사카이의 무용연구소로 찾아와 두 사람이 선상에서 토론한 이론의 실천을 위해 자신은 초등학교를, 이시이 바쿠는 그에 이웃해서 무용 연구소를 세우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이 선상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 학교와 무용연구소를 나란히 설립한 곳이 바로 오늘날의 지유가오카(自由)였다.

 

데즈카 기시에이와 협력하면서 이시이 바쿠는 학생들의 건강을 위한 무용체조에 관심을 가졌고, 결국 전국의 소학교(=초등학교)에 무용체조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최승희는 때로 이시이 바쿠의 보조강사로서 전국에서 모여든 무용체조 교사들을 교육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1926년 만주와 조선공연을 가졌을 때도 이시이 바쿠는 15개 내외의 레퍼토리 중에 2개의 아동무용을 포함시켰다. 경성 공연에서는 야마다 코사쿠의 음악을 배경으로 한 어린이 무용 <오늘밤은>을 발표했고, 부산 공연에서는 무음악 어린이 무용 <개구장이>를 발표했다.

 

<오늘밤은>을 공연한 마츠우라 다비토는 이시이 바쿠가 1920<도쿄오페라좌>를 창립, 운영했을 때 입단한 오사카 출신의 남성 무용수로, 이시이무용단의 1920-21년 일본 지방 공연과 1926년의 만주-조선 순회공연에 동행했다.

 

부산공연에서 <개구장이>는 이시이 바쿠의 막내 여동생 이시이 에이코가 공연했는데, 당시 최승희는 이시이 에이코의 무대 공연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최승희와 이시이 에이코는 둘 다 1911년생으로 동갑이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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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바쿠는 그의 <팜플렛 제1>에서 <갇힌 사람>의 악상이 나폴레옹군이 모스크바 전투에서 패배한 것에서 떠오른 것이지만 정작 무용작품의 핵심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인간... 외로운 인간... 수탈받고... 자유를 잃어버린... 삶을 표현한 것이라고 서술했다.

 

인간의 속박과 자유에 대한 실존적 모습을 표현한 <갇힌 사람>은 경성공회당에서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관람했던 최승희에게도 깊은 감명을 준 작품 중의 하나였다. 그는 <나의 자서전(1936:)>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용을 천하고 낮은 것으로만 생각하던 나는, 오빠의 말도 있었지만 나 자신이 열심히 무대를 바라보던 중에 내 모든 것이 강력한 매력에 이끌려 무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 물 흐르는 듯 아름답게 그려지는 육체의 선의 율동과 즐거운 꿈과 같은 멜로디의 울림에 나는 술 취한 사람처럼 황홀한 세계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첫눈에 현혹되었던 것보다 더욱 강한 것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시이 선생님의 유명한 작품 <갇힌 사람>이나 <멜랑콜리>, <솔베지이의 노래>와 같은 무용에 흐르는 힘찬 정신이 내 작은 가슴 속에 꿈틀거리던 영혼을 불러일으키면서 끝없는 공감을 느끼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최승희가 잡지 <삼천리(19361월호, 108)에 기고한 나의 무용 10년기라는 글에는 <갇힌 사람>을 보면서 느꼈던 감상을 다음과 같이 더욱 생생하게 서술했다. (이 글은 <나의 자서전(1937:37)에도 전재되어 있다.)

 

석정막(石井漠=이시이 바쿠) 무용회의 밤! 이 밤은 나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인상 깊은 밤이었다. 동라(銅鑼)의 소리가 나자 불이 꺼지고 젤라틴을을 통하여 코발트빛과 그린의 빛이 교차하는 가운데 무슨 곡조인지 장중한 피아노의 멜로디가 시작되면서 석정막씨의 독무 <수인>이 시작된다. 쇠사슬에 얽히어 무거운 걸음으로 무대를 밟는 그의 한 발자국 두 발자욱!

 

 

! 나는 그때 저것은 춤이 아니라 무엇을 표현하는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나는 여태껏 춤이란 기쁘고 즐거운 때만 추는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의 무거운 괴로운 것을 표현하면서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그는 그 굵은 쇠사슬을 끊고 하늘을 우러러 고개를 들고 두 팔을 들어 환희를 표현하면서 무대에 거꾸러지고 만다. 다시금 동라는 울리면서 스포트 광선은 꺼지며 장내의 전기는 켜진다.”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의 <갇힌 사람>을 처음 관람하면서 느꼈던 충격은 유아사 가츠에()<성난파도의 외침(怒濤)>에도 서술되어 있다. <성난파도의 외침>은 최승희와 안막의 친구인 유아사 가츠에가 최승희의 반생을 소설형식으로 서술한 전기이다.

 

“‘가슴이 마치 전율을 하듯 벅차오르면서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어요. 그래서 숨을 멈추고 두 손으로 가슴을 끌어안고 덜덜 떨리는 무릎을 필사적으로 꼬면서 그 충동을 억제할 정도였지요. ... 그 때까지 무용이라고 하면 기생의 요염한 춤이나 일본인 무희들이 박람회에서 선보이는 손동작을 중시하는 춤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

 

 

그런데 이시이의 무용을 통해서 그런 기존의 개념이 깨어져 버렸다. <붙잡힌 사람들(=갇힌 사람)...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이 자유를 빼앗은 사람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번민을 상징적으로 연출한 무용인데, 최승희는 15세의 나이에 그 무용의 내용에서 가슴이 벅차오르는 전율과 무릎이 떨리는 감동을 받을 정도의 감성을 이미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갇힌 사람>을 처음 관람하면서 최승희가 받은 충격은 대단했던 것으로 묘사되었다. “가슴이 전율하듯 벅차오르고, 고함을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고, 이 충동을 억제하기 위해 두 손으로 가슴을 끌어안고 덜덜 떨리는 무릎을 필사적으로 꼬아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충동과 감격은 가라앉지 않았고, 오히려 증폭되어서 결국 그로 하여금 이시이 바쿠를 따라 무용가의 길을 걷게 만들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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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사람(1922)>은 그 안무자 이시이 바쿠가 직접 공연한 모습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작품이다. 그가 공연한 이 작품의 영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가 베를린에 도착한 것은 19221월말이었고, 10월말까지 그곳을 중심으로 유럽 순회공연을 단행했다.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1(1927)><갇힌 사람>이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완성되었고, 424일의 유럽 제1회 공연에서 발표되었으며, “작년 가을 일본에서도 개봉된 우파(Ufa) 영화사의 <미와 힘의 길> 무용편에 추가되었다고 서술했다.

 

 

유럽 각 도시에서 공연되면서 호평을 받은 이 작품은 마리 비그만(Mary Wigman)의 권유로 다큐멘터리 영화에 삽입된 것인데, 이시이 바쿠는 영화 제목을 <미와 힘의 길>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힘과 미의 길(Wege zu Kraft und Schönheit)>이다. <이시이바쿠 팜플렛 1>의 출판이 1927년이므로, 이 영화의 일본 개봉은 1926년 가을이었던 것인데, 독일 개봉이 1925316일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당시로서는 비교적 신속하게 일본 개봉이 이뤄진 셈이다.

 

빌헬름 프라거(Wilhelm Prager) 감독, 니콜라스 카우프만(Nicholas Kaufmann) 각본으로 제작된 이 다큐멘터리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인체문화(Körperkultur) 진작을 위한 홍보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는데, 주로 인체의 심미성과 역동성을 보여주는 다양한 영상을 편집해 완성되었다. 러닝타임 104분인 이 다큐멘터리는 총6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무용편은 제4부였다.

 

이 다큐멘터리의 1부는 고대 그리스에서 인체가 찬양되는 모습을 담은 영상들이 포함되었고, 그러한 모습이 어떻게 현재(=1920년대 당시)에 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2부에서는 인체의 힘과 미를 유지하기 위한 체육활동과 위생관리에 대한 내용을 담았고, 3부에서는 음악적 리듬에 맞춘 체육활동의 예시 장면들을 포함시켰다. 4부는 무용편, 5부는 스포츠편이었고, 6부는 휴양과 공기, 태양과 물 등의 인체 건강과 미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서술했다.

 

 

4부 무용편은 다시 6개의 소부분으로 나뉘어 16편의 무용작품들이 소개되었다. (1) 6개 민속무용(흑인, 하와이, 일본, 버마, 바이에른, 스페인)이 소개됐고, (2) 라반 무용학파(Laban Schule fur Tanze)의 무용극 <생생한 환상(das lebende Idol)>과 여성 독무 <난초(die Orchidee)>가 포함되었다. (3) 니디 임페코벤(Niddy Impekoven)<꽃의 삶(Das Lebens der Blume)><차주전자(Teewarmer)가 상연되었다.

 

(4) 일본의 이시이 바쿠의 현대무용 독무 <갇힌 사람>과 스톡홀롬 출신의 제니 하셀키스트(Jenny Hasselquist)의 독무 <흰장미>가 공연되었고, (5) 발레 루소의 개인 연습장면과 무용극 <실비아(Sylvia)> 중 남녀 듀엣 장면, 그리고 여성 독무 장면이 포함되었다. (6) 마지막으로 마리 비그만 무용학파(Mary Wigman Schule fur Tanze)의 무용단이 <엑소더스>의 마지막 장면을 공연하는 모습이 길게 이어지면서 무용편은 마무리되었다.

 

이시이 바쿠의 <갇힌 사람> 영상은 <힘과 미의 길>에 남은 것이 유일하다. 일본에서는 이시이 바쿠의 무용작품이 제대로 촬영되지 않았던 데다가, 설사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촬영한 것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2차대전 중의 미군 폭격으로 거의 다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이 영상에 포함된 <갇힌 사람>은 러닝타임이 약 218초 정도의 짧은 작품이었지만, 이미 독창적 스토리라인과 정감이 충분히 표현된 무용시의 형식으로 안무된 것임에 틀림없다. 이시이 바쿠의 <갇힌 사람> 공연 모습은 매우 생생하다. 이는 무용수의 움직임이 무대 전면에 꽉 차도록 거리와 각도를 조정한 카메라 촬영술 덕분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5부의 스포츠 부문에는 올림픽 경기를 포함해 유럽 각지에서 열린 스포츠 행사들의 영상들이 편집되었는데, 그중에는 1912(스톡홀름), 1920(안트베르펜), 1924(파리) 올림픽 영상들이 많이 발굴되어 편집되었고, 권투선수 잭 뎀시(Jack Dempsey), 야구선수 베이브 루스(Babe Ruth), 체조선수 베스 멘센디크(Bess Mensendieck), 수영선수 조니 와이스뮐러(Johnny Weissmüller) 등 유럽 선수들 이외의 미국선수들의 경기 모습도 삽입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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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사람(1922)>의 배경음악은 라흐마니노프의 곡()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이 공연되는 발표회의 프로그램마다 그렇게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라흐마니노프(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Рахма́нинов, 1873-1943)가 작곡한 숱한 음악 중에서 어떤 악곡이 사용되었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이시이 바쿠의 다른 작품들의 경우에는 배경음악의 작곡가 이름을 밝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특히 그의 초기 작품들은 대개 무용작품의 제목이 음악의 제목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시이 바쿠가 대체로 음악을 먼저 선곡하고 그에 따라 무용동작을 안무했기 때문이다.

 

부산공연에서 상연된 무용시 작품 <멜랑콜리(1916)>는 에드워드 그리크(Edvard Grieg, 1843-1907)의 피아노 독주곡 <멜랑콜리(Melankoli)>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했고, <일기의 한쪽(日記一頁)>은 야마다 코사쿠의 피아노 소품 <일기의 한쪽>이 배경음악이었다. 이 작품은 후일 그 내용을 반영하기 위해 <법열(法悅)>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는데, 초연시의 제목은 야마다 코사쿠의 피아노곡 <일기의 한쪽>과 제목이 같았다.

 

 

무용곡의 제목이 항상 음악의 제목과 같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에도 적어도 원제목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축약된 이름을 제목으로 삼곤 했다. 예컨대 <꿈꾸다>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Georg Strauss, 1864-1949) 작품번호 29번의 첫 번째 곡인 <황혼의 꿈(Traum durch Dämmerung(1895)>을 배경음악으로 삼았는데, 음악곡 제목에 나오는 꿈(Traum)이라는 말이 무용곡 제목 <꿈꾸다(みる유메미루)>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갇힌 사람>은 달랐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곡 중에는 갇힌 사람에 대한 곡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시이 바쿠의 무용을 관람했던 관객들 중에는 이 무용작품의 배경음악이 라흐마니노프의 <갇힌 사람>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시이 바쿠는 19277월에 발행한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1>에서 이 작품을 소개하면서 이 작품의 배경음악 제목이 <갇힌 사람>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있으나, 원곡 제목은 라흐마니노프의 <프렐류드>”라고 밝혀 놓았다.

 

그러나 이렇게 음악의 원제목을 밝혀놓았더라도 이 악곡이 어떤 것이었는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 중에는 <프렐류드>라는 제목이 붙은 것이 24개나 되기 때문이다. 작품번호 3(Op.3)의 두 번째 곡은 흔히 <올림다단조 프렐류드(Prelude in C-sharp minor)라고 불리고, 작품번호 23(Op.23)에 포함된 10개의 피아노곡과 그리고 작품번호 32(Op.32)에 포함된 13개의 피아노곡에 모두 <프렐류드>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라흐마니노프가 작곡한 24개의 피아노곡 <프렐류드>는 모두 조(調)가 다르게 작곡되었기 때문에 서로 구별될 수는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24곡의 <프렐류드> 피아노곡 중에서 일반에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은 작품번호 3번의 두 번째 곡(Op.3, No.2)<올림다단조 프렐류드(1892)>와 작품번호 23번 작품집의 다섯 번째 곡(Op.23, No.5,)<사단조 프렐류드(Prelude in G minor, 1901)이다. <올림다단조 프렐류드(1892)>는 라흐마니노프가 모스크바 음악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세 때 작곡된 최초의 피아노 전주곡으로, 5개 작품(비가, 전주곡, 멜로디, 폴리키넬리, 세레나드)을 한데 모아서 흔히 <환상적 소품집(Morceaux de fantaisie)>이라고 부르는 모음집의 2번째곡이다.

 

 

<사단조 프렐류드(1901)>1903년에 작곡된 9개의 다른 피아노 전주곡들과 함께 묶여서 작품번호 23번의 모음집에 포함되어 발표되었다. 이 작품의 초연은 1903210일 모스크바에서 열렸는데, 이 연주회에서는 작품번호 23번의 10곡 중에서 전주곡 1, 2번과 함께 5번곡인 <올림다단조 전주곡>이 연주되었다.

 

<사단조 프렐류드>는 시작이 행진곡풍으로 빠른 반면, <올림다단조 프렐류드>의 시작은 장중하고 느린 곡이기 때문에, <갇힌 사람>의 배경음악은 아마도 후자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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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사람>의 창작시기에는 이견이 있다. 이 작품이 1923년에 창작되었다고 서술한 문헌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 학술잡지 <무용학(199013)>에 실린 근대무용의 출발라는 글에서 카타오카 야스코(片岡康子)갇힌 사람의 창작연대를 1923년으로 명시했고, 홋카이도대학 문학박사 논문의 저자 방 타오(龐涛)<갇힌 사람>의 창작연대를 1923년이라고 서술했다.

 

그러나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1(19277월 발행)>에서 이시이 바쿠는 <갇힌 사람>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안무해 유럽 제1회 공연 때부터 각지에서 발표했다고 밝혔다. 이시이 바쿠는 1922114일 마르세이유에 도착하여 파리를 경유해 베를린에 도착했으므로 <갇힌 사람>의 창작 시기는 빠르면 19221월말, 늦어도 19222월이라고 할 수 있다.

 

 

미도리카와 준(綠川潤)<무용가 이시이바쿠의 생애(2006)>에서 이시이 바쿠의 뉴욕 공연을 서술하면서 유럽에서 호평을 받은 <명암>, <갇힌 사람>, <젊은 판과 님프> 등을 (뉴욕에서) 공연했다고 서술했다. <갇힌 사람>은 이미 유럽에서 공연되었다는 뜻이다.

 

<갇힌 사람>은 독일 다큐멘터리 영화 <힘과 미의 길(Wege zu Kraft und Schönheit, 1925)>에도 삽입되었다. 이 영화의 개봉연도는 1925년이지만, 이시이 바쿠가 촬영에 응한 것은 베를린에 체재기간이었다. 이시이 바쿠가 베를린에 체재했던 것은 19221월말부터 10월말까지이므로, <갇힌 사람>의 창작연도는 1922년였음에 틀림없다.

 

이시이 바쿠는 그의 <팜플렛 제1>에서 <갇힌 사람>의 악상이 나폴레옹군이 모스크바 전투에서 패배한 것에서 떠오른 것이지만 정작 무용작품의 핵심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인간... 외로운 인간... 수탈받고... 자유를 잃어버린... 삶을 표현한 것이라고 서술했다.

 

 

이같은 창작 의도는 관객들에게 비교적 잘 전달되어온 것으로 보인다. 방 타오는 그의 문학박사 학위논문 <신중국영화, 신중국문예에 대한 만영(満映)의 영향(2014:141)>에서 <갇힌 사람>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의 작품 <갇힌 사람>을 보자. 이 작품에서, 이시이 바쿠는 무대 안쪽에서 양손이 뒤로 묶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무릎을 깊이 꺾인 채 몸부림치며 비척비척 전진한다. 어깨를 세게 움직여도, 땅바닥에서 몇 번 뒹굴어도, 묶인 양손은 끈에서 빠져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 어깨를 강하게 움직이며 발버둥치고 속박당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마침내 끈의 속박에서 벗어났지만 그 끈을 손에 쥔 이시이 바쿠는 힘껏 두 손을 하늘로 뻗어 자신의 운명을 하늘에 맡기는 듯한 자세로 땅에 쓰러지고 만다. 이 작품은 끈에 묶인 절망과 몸부림치며 자유로워지려는 강렬한 감정을 육체의 움직임을 통해 힘차게 표현하고 있다.”

 

 

카타오카 야스코도 맨몸에 맨발, 허리에 천만 감고, 두 손을 뒷짐지고 묶인 채, 쇠사슬을 연상시키는 밧줄이 바닥까지 늘어져 있다. 인간의 잃어버린 자유,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표현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며, “이시이 바쿠가 이상으로 삼았던 '육체의 움직임에 의한 시'로서 새로운 순수무용의 세계가 창조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카타오카 야스코는 이시이 바쿠의 <갇힌 사람>을 마리 비그만의 <마녀의 춤(Witch Dance, 1926)과 마사 그라함의 <비통(Lamentation, 1930)>과 비교하면서 현대무용의 특징적 공통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즉 카타오카 야스코는 “비그만의 <마녀의 춤>에서는 바닥에 걸터앉아 무릎을 껴안은 자세를 취했고, 그라함의 <비통>에서도 늘어진 통모양의 천에 몸을 감싸고 받침대 위에 걸터앉은 채 춤을 추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 세 작품은 종래의 춤에서처럼 다리를 들어 올리거나 회전을 하는 기술을 이용하지 않고, 가능한 한 쓸데없는 동작을 버리고, 자기의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 독자적인 표현 방법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내면의 세계를 몸의 동작으로 표현하면서도, 동작을 간소화함으로써 작품의 깊이를 심화하는 현대무용의 특징이라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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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328일 부산의 극장 <국제관>에서 열렸던 이시이바쿠무용단의 부산 제1회공연에서 발표된 4번째 작품은 <갇힌 사람(われたる슈와레타루히토, 1922, 베를린)>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일본어 제목도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로 전해졌다.

 

최초의 제목은 <슈와레타루히토(はれたる)>였다. 이시이 바쿠의 첫 경성공연의 레퍼토리를 보도한 <조선신문(1926318)><경성일보(1926320)><슈와레타루히토(はれたる)>라고 보도했고, 최승희의 <나의 자서전(1936:39)>에서도 그와 똑같이 표기되었다.

 

 

그러나 다카시마 유사부로(高嶋雄三郎)의 평전 <최승희(1981(1959):18):>에서는 <슈와레타히토(われた)>라고 표기했고, 미도리카와 준(綠川潤)의 평전 <무용가 이시이바쿠의 생애(2006:47-48)>에서도 그와 똑같이 표기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표기가 또 달라졌다. 카타오카 야스코(片岡康子)<이시이바쿠의 무용시와 전개(<무용학>, 199949)>에서는 <슈와레타루히토(われたる)>로 표기됐고, 아키타(秋田)고교동창생 시바야마 요시타카(柴山芳隆)의 글 <창작무용의 대천재 이시이 바쿠(2014:233)>에서도 <슈와레타루히토(われたる)>로 서술됐다. <일본양무사연표(2003:9)>에도 <슈와레타루히토(われたる)>로 정리된 것을 보면 이것이 최종판 제목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작품의 제목은 발표 당시 <슈와레타루히토(はれたる)>였으나 <슈와레타히토(われた)>를 거쳐 <슈와레타루히토(われたる)>로 정착된 셈이다. 고어 일본어와 한국어에 정통한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고어 일본어가 현대화되면서 생긴 변화라고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의 제목은 한국어 번역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최승일 편저의 <최승희의 나의 자서전(1937:37)>에 실린 글 <출발전야>에서는 해당 작품을 <수인(囚人)>이라고 불렀다. 이를 따라 강이향(1993:40, 51-52)과 정수웅(2004:14, 173)과 강준식(2012:15)<수인(囚人)>으로 번역했고, 김경애, 김채현 이종호가 펴낸 <우리무용 100(2001: 55-56)>과 고정일의 소설 <매혹된 혼(2011: 76)>에서도 <수인>으로 서술했다.

 

그러나 다른 번역도 있다. 정병호(1995:28)<사로잡힌 사람>, 김찬정(2003:32-33)<붙잡힌 사람들>이라고 번역했고, 조택원(2015:22-23)<사로잡힌 영혼>이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에서 통용되는 이 작품의 이름은 <수인(囚人)>이 가장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사로잡힌 사람>, <붙잡힌 사람들>, <사로잡힌 영혼>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본어 제목에 차이가 난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진 표기법을 반영하거나, 현대문법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어 제목들은 대체적인 뜻은 비슷하더라도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시이 바쿠가 처음 이 작품을 안무할 때에는 나폴레옹이 헬레나 섬에 갇힌 모습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따라서 섬에 갇힌 나폴레옹을 묘사하기 위해 사로잡히다붙잡히다는 말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섬에) 갇히다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이시이 바쿠가 제목을 지으면서 가둘 수()’자를 사용한 것도 바로 그런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또한 조택원이 이 제목을 사로잡힌 영혼이라고 번역한 것도 일리가 있다. 비록 창작의 계기는 헬레나 섬에 갇힌 나폴레옹이었지만, 예술로서의 무용작품은 구체적 소재 상태를 벗어나 비유적인 뜻을 가지고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리적으로 갇힌 나폴레옹의 처지를 묘사한 작품에 머무르지 않고, 심리적, 정신적 곤경에 갇힌 개인을 묘사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로잡힌 사람은 곧 사로잡힌 영혼으로 승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창작자의 의도를 존중하고, 한자어보다는 고유어 번역이 바람직하다면, 이시이 바쿠의 <슈와레타루히토(われたる)><갇힌 사람>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이시이 바쿠의 <슈와레타루히토><갇힌 사람>으로 번역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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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시 소곡 <법열(法悅호에츠, 1916, 도쿄)>은 이시이 바쿠가 창작한 최초의 작품이자, 일본 신무용의 첫 작품으로 꼽힌다. <법열>의 초연은 191662일부터 4일까지 제국극장에서 열렸던 <신극장> 1회 발표회였다.

 

<신극장>은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오사나이 카오루(小山内薫, 1881-1928)가 창단한 극단으로, 연극뿐 아니라 음악과 무용을 함께 상연했던 종합예술극단이었다. 연극은 오사나이 카오루가 주도했던 반면, 음악은 야마다 코사쿠(山田耕莋, 1886-1965), 무용은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6-1962)가 주도했다.

 

그런데 이 최초의 <신극장> 발표회에서 상연된 이시이 바쿠의 무용작품은 모두 야마다 코사쿠와의 협력을 통해 완성된 것이었다. 특히 <법열>이 그랬다. 이 작품이 <신극장> 1회 발표회에서 발표되었을 때의 첫 제목은 <일기의 한쪽(日記一頁)>이었다. 이 제목은 당시 야마다 코사쿠가 글이 아니라 작곡으로 일기를 써나가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 어느 하루의 일기로 쓴 곡을 바탕으로 이시이 바쿠가 안무를 한 곳이 바로 <일기의 한쪽>이었고, 후일 이 작품의 제목이 <법열>로 개칭되었던 것이다.

 

 

이시이 바쿠의 초기작품은 야마다 코사쿠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1886년 도쿄에서 태어난 야마다 코사쿠는 1908년 도쿄 음악학교(현 도쿄 예술대학) 성악과를 졸업했고, 재벌 미츠비시(三菱)의 총수 이와사키 코야타(岩崎小弥太)의 원조를 받아 1910년부터 1913년까지 베를린 왕립 아카데미 고등음악원(·베를린 예술 대학 음악학부)에 유학, 막스 부르크에게서 작곡을 배웠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좋아해 그의 제자가 되기를 자청하기도 했다.

 

한편 야마다 코사쿠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1914년 일본으로 돌아올 때에 러시아를 경유하면서 접하게 된 스르리아빈의 음악을 접하고 자신의 음악에 스크리아빈의 양식을 다수 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19141월 일본으로 돌아온 야마다 코사쿠는 이와사키 코야타의 재정지원으로 조직된 도쿄 필하모닉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를 맡았다. 그러나 야마다 코사쿠의 불륜 문제가 불거지면서 이와사키 코야타는 지원을 끊었고, 이후 야마다 코사쿠는 1918년 미국으로 건너갈 때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 창작에 집중했다.

 

 

야마다 코사쿠가 음악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15년경부터 야마다 코사쿠는 <쁘띠 포엠>, <단시곡(短詩曲)>라는 제목과 날짜를 붙인 피아노 소품곡들을 작곡했는데, 이를 발표할 때에는 <일기의 한쪽>이라고 불렀다. 후일 이 단시곡들이 출판되었을 때에는 스크랴빈풍의 작풍에서 배우고, 사적인 표제를 가지는 소품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1916년 야마다 코사쿠가 작곡한 피아노 작품에 이시이 바쿠가 안무한 <일기의 한쪽>이라는 무용작품이 <신극장> 1회 발표회에서 발표되었는데,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1>에는 이 작품을 우리가 만든 최초의 무용시라고 서술했고, “대정4년경(=1915) 야마다 코사쿠씨가 지휘한 음악에 맞추어 제국극장에서 상연했던 작품 중의 하나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 서술에서 우리가 만든 최초의 무용시라고 한 것은 이 작품 창작에 야마다 코사쿠와 이시이 바쿠의 협력으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안무 과정에서도 음악과 춤동작을 서로 맞추기 위해 두 사람이 긴밀하게 협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발표시기를 1915(=다이쇼4)이라고 한 것은 1916년의 잘못이다. <일본양무사연표>에 따르면 <신극장>의 제1회 발표회가 제국극장에서 열렸던 것은 191662일부터 4일까지 3일간이었기 때문이다.

 

 

미도리카와 준(綠川潤)<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생애(2006)>에 따르면 <법열>한 청년이 미혹의 세계로부터 근심을 버리고 평안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이는 작곡자 야마다 코사쿠와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삶의 목표이기도 했다.

 

특히 이시이 바쿠는 가난과 예술적 난관에서 생기는 미혹에서 벗어나 근심 없는 평화를 얻고 싶어 했는데, 그가 자신의 이름을 타다즈미(忠純)에서 바쿠()으로 바꾼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당시 그는 앞날이 망막(茫漠)하다고 해서 그중 막()자를 선택해 그의 예명으로 쓰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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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바쿠의 부산공연 레퍼토리에서 3번째 곡은 <꿈꾸다(みる유메미루)>였다.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1>에서는 <꿈꾸다>1922(=다이쇼12)에 베를린에서 창작된 작품이라고 밝혔고,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4>에서도 이 작품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Georg Strauss, 1864-1949)의 음악에 맞춰 안무된 작품이며, “우아한 처녀의 성스럽고 순수한 즐거움에의 욕구에 대한 차분하고 서정적인 고백이라고 서술되어 있었다.

 

부산공연의 1번째곡 <멜랑콜리>은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의 이중무였고, 2번째곡 <법열>은 이시이 바쿠의 독무였던 반면, 3번째 곡인 <꿈꾸다>는 이시이 코나미의 독무로 발표되었다. 따라서 <꿈꾸다>는 여성적인 분위기의 무용작품이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꿈꾸다>1922년 베를린에서 창작되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정확히 어느 시기에 안무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이시이 바쿠가 마르세유에 도착한 것인 1922114일이었고, 파리를 경유해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는 1월말이었을 것이다. 겨울 동안 베를린 거주 일본인들이 모인 가운데 호텔 연회장에서 한차례 공연을 가졌던 것을 제외하면 다른 공연 활동은 없었다.

 

베를린에 도착한지 2개월쯤 지났을 때 한 미술 전람회에서 이시이 코나미가 <멜랑콜리><비통한 그림자>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일본인 무용가>의 존재를 알릴 수 있었다. 그 덕분에 1922424, 브리츠너짤 콘서트홀에서 독일 첫 공연을 열어 <젊은 판과 님프>, <멜랑콜리>, <명암> 등의 창작품을 발표했다. 이 공연의 성공에 힘입어 독일의 여러지역에서 공연을 가졌고, 독일의 정상급 무용가 안나 파블로바와 함께 <힘과 미의 길(Wege zu Kraft und Schönheit, 1925)>이라는 문화영화에도 출연했다.

 

 

이시이 바쿠의 공연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동유럽 지역으로 이어졌다가 9월초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관동대지진 소식을 전해 들었다. 10월 초에야 아내 야에코의 편지를 통해 가족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었고, 유럽 공연을 계속했다. 10월말부터 다시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스코틀랜드와 글래스고, 런던과 파리, 벨기에 등지에서 발표회를 가졌는데, 벨기에에서 뉴욕 공연 계약이 성사되어 10월말 파리와 르아브르를 경유해 뉴욕으로 향했다.

 

따라서 이시이 바쿠가 <꿈꾸다>를 창작할 시간이 있었다면, 그것은 19221월말 베를린에 도착해서 424일 첫 베를린 공연을 가질 때까지의 비교적 한가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에는 연이은 공연 때문에 차분하게 창작에 전념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갖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창작된 <꿈꾸다>424일의 베를린 공연 이후 유럽 각지에서도 발표되었을 것인데, 특히 <꿈꾸다>의 배경음악은 베를린에서 활동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악곡이었으므로 베를린의 관객들에게는 친근감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꿈꾸다>의 배경음악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어떤 작품인지는 문헌에 밝혀져 있지 않다. 널리 알려진 슈트라우스의 작품 중 을 소재로 한 것으로 대략 2개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슈트라우스의 작품번호 9번 피아노곡 <Stimmungsbilder(1884)>4번째 곡 <몽환(Trauimerei)>인데, 오늘날 널리 알려진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와는 다른 곡이다.

 

 

다른 하나는 세 개의 가곡으로 이루어진 작품번호 29번의 첫 번째 곡인 <황혼의 꿈(Traum durch Dämmerung(1895)>이다. <몽환><황혼의 꿈>은 모두 230초 안팎의 짧은 곡이지만, 편곡을 통해 조정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꿈꾸다>의 영상이나 사진은 남아 있지 않으므로 음악과 동작에 대한 더 자세한 사항은 밝히기 어려운 상태이다.)

 

이시이 바쿠의 안무에 적합했을 음악은 <황혼의 꿈>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황혼의 꿈>은 오토 비어바움(Otto Bierbaum)이 지은 같은 제목의 시(1897)에 곡을 붙인 가곡으로, 노랫말은 대체로 차분하고 서정적일뿐 아니라 아름다운 여인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2절로 되어 있는 <황혼의 꿈>의 노랫말 1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두운 황혼의 너른 초원에/ 해는 저물고 별들이 떨고 있다./ 나는 지금 아름다운 여인을 찾아간다./ 검붉은 황혼 속, 초원의 저 높은 곳,/ 재스민 깊은 덤불 속에 사는 그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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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바쿠의 첫 부산공연의 첫 발표작품은 <멜랑콜리(メランコリイ, 1922)>였다. 19277월에 발간된 <이시이 바쿠 팜플렛1(1927)>에는 이 작품이 이시이 바쿠가 유럽행 여객선 키타노마루(北野丸) 선상에서 안무한 작품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이시이 바쿠는 1922124, 그의 처제(=아내의 여동생)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와 함께 고베에서 기타노마루(北野丸)에 승선해 프랑스로 향했다. 그의 첫 해외 순회공연이었다. 이 즈음 이시이 바쿠는 오랜 무명 시절 끝에 대중적 성공을 이뤄냈고, 마침내 무명의 설움을 벗어나 돈도 벌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이시이 바쿠는 아사쿠사 오페라의 대중적 인기보다 순수예술무용을 추구하기로 하고 유럽으로 떠났다.

 

 

이시이 바쿠가 고향 아키타(秋田)을 떠나 도쿄로 상경한 것은 19093, 그의 나이 24세 때였다. 평론가 오마치 케이게츠(大町桂月, 1869-1925), 음악가 코마츠 코츠케(小松耕輔, 1884-1966) 등을 찾아가 문학수업과 음악수업을 시작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대중소설 작가 코츠기 텐가이(小杉天外, 1865-1952)의 문하에서 잠시 문학수업을 했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19112<제국극장>이 모집한 관현악 단원 모집에 응모한 이시이 바쿠는 25명의 한 명으로 합격, 바이얼린 주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시이 바쿠는 입단 2달 만에 무단결근을 이유로 해고됐다. 딱한 사정의 친구를 위해 관현악단에서 대여 받은 바이올린을 전당포에 맡겼다가 되찾아오지 못했고, 악기가 없어 연습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118월 이시이 바쿠는 제국극장에 다시 채용되었다. 이번에는 관현악부가 아니라 가극부였다. 제국극장은 극장 건물이 완성되기 전부터 여배우 양성소를 설치했고, 1기생 모리 리츠코 등의 활약으로 흥행에 성공한 데 힘입어, 이번에는 가극부, 즉 오페라단을 창단한 것이다.

 

 

4백여명이 응모해 15명이 채용된 가극부 1기생 중에 이시이 바쿠가 포함되었고, 이후 4년 동안 성악과 무용, 연기 등을 연습하면서 공연에 출연했다. 재정난을 이유로 가극부가 관현악부와 병합되어 양극부로 개칭된 후, 발레 교사로 초빙된 로지와의 갈등으로 이시이 바쿠는 1915년 양극부를 자퇴했다.

 

이후 이시이 바쿠는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음악가 야마다 코사쿠(山田耕莋, 1886-1965)와 극작가 오사나이 카오루(小山内薫, 1881-1928)와 교류하면서 일본의 신무용을 개척했다. 두 사람은 제국극장에서 실망과 실패를 경험한 이시이 바쿠를 격려하고 용기를 주었고, 이들의 우정은 평생 계속되었다.

 

이시이 바쿠의 신무용 첫 발표는 191662-4일 제국극장에서였다. 오사나이 카오루가 창단한 극단 <신극장>의 제1회 발표회에서였다. 이시이 바쿠는 야마다 코사쿠의 음악에 자신의 안무를 곁들인 신무용 작품 <일기의 한쪽(日記一頁)><이야기(ものがたり)>를 발표했다. 관객과 언론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관객은 29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대부분 초청인사들이었다. 언론의 반응도 냉담했다.

 

 

이시이 바쿠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곧이어 626일부터 3일간, 혼고자(本郷座)에서 열린 <신극장> 2회 공연에서 <명암(明闇)>을 발표했고, 9월에는 우치노마루의 보험협회강당에서 열린 <신극장> 3회 공연에서 창작무용 <유모레스크(ユーモレスク)>, <젊은 판과 님프(きパンとニンフ)>, <파란 불꽃()> 등을 발표했다. 관객과 언론의 반응은 여전히 싸늘했다. 일본 전통무용도 아니고 서양식 발레도 아닌 새로운 양식의 무용 공연이 관객들이나 평론가들에게 생소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연이은 실패 후 191610월 이시이 바쿠는 생활을 위해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의 무용 강사로 부임했다. 그러나 다카라즈카의 오락무용에 만족하지 못했던 이시이 바쿠는 1917224일 오사카의 긴마츠자(近松座)에서 <근대성악무용대회>를 열고 도쿄에서는 실패했던 자신의 작품들을 다시 상연했다. 이번에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오사카의 성공에 힘입은 이시이 바쿠는 도쿄로 돌아와 카마쿠라(鎌倉)와 쇼난(湘南), 오이소(大磯)와 히라쓰카(平塚)와 요코하마(横浜) 등지에서 <납량음악무용대회>를 성공으로 이끈 후 19171023일 도쿄가극좌(東京歌劇座)공연에서 도쿄의 관객과 평론가들의 인정을 받았다.

 

 

1917년 교토 <미나미자(南座)> 공연 중에 오바 야에코(大場八重子)를 만났고 도쿄에 돌아와 결혼했다. 혼인신고는 그로부터 2년 뒤인 191921일로 되어 있다.

 

<도쿄가극좌> 좌장으로 흥행에 성공한 후 이시이 바쿠는 19189<도쿄가극좌>를 떠나 <도쿄오페라좌>를 새로 결성, 활동을 계속했다. 이때 아내 야에코의 여섯 살 연하의 여동생 코나미(小浪)가 입단해 재능을 발휘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도쿄오페라좌>가 인기를 구가하기 시작할 무렵 이시이 바쿠는 폐침윤(肺浸潤)을 진단받아 치바현립병원에 입원해 1년 동안 폐렴 치료를 받았다. 1920년 봄에 치바(千葉) 현립병원을 퇴원한 이시이 바쿠는 <도쿄오페라좌>에 복귀했지만 그때부터는 도쿄 공연보다 지방 순회공연에 주력하기로 결정하고 홋카이도로 떠났다.

 

 

홋카이도 첫 공연은 하코다테(函館) 공연이었다. 입원 중에 구상한 돌도라(ドルドラ)<추억>, 세자르크이(セザールクイ)<오리엔탈>, 사이토 주산(斉藤住三)<도성사의 환상>, 야마다 코사쿠 곡 <포엠> 등 예술성 높은 신작 무용을 선보였다. 닷새에 걸친 하코다테 공연은 연일 대만원이었고, 구시로(釧路)에서도 성황을 이뤘다. 홋카이도 공연 후 이시이 바쿠는 도호쿠(東北), 호쿠리쿠(北陸), 간사이(關西) 등의 순회공연을 계속했고, 어디에서나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고된 순회공연 때문인지 이시이 바쿠는 다시금 건강을 해쳤다. 오사카 공연 중 숙소에서 빈혈로 쓰러져 아베노(安倍野)의 조사(鳥瀉)병원에 실려 갔는데 유문협착증(幽門狭窄症) 진단을 받았다. 재기 불능일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에 즉각 수술을 받았는데 집도한 조사 박사는 강한 정신력 덕분인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치하했다.

 

 

바쿠는 수술 후에도 한 달 동안 입원치료를 해야 했지만, 퇴원하자마자 <도쿄 오페라좌>로 돌아와 큐슈(九州)와 산요(山陽)지방 공연을 계속했다. 순회공연 도중 아내 야에코는 도쿄에 돌아가 1921330일 장남 이시이 칸(石井歓, 1921-2009)을 출산했다. 당시 이시이 바쿠는 36, 야에코가 25세였다.

 

신작 구상을 위한 시간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이시이 바쿠는 19215월 고베의 취락좌(聚楽座) 공연을 마지막으로 <도쿄 오페라좌>를 해산하고, 도쿄 아사쿠사 마츠바쵸(松葉町)의 집에 돌아와 처제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를 상대로 창작무용에 전념했다.

 

 

그는 이때부터 무용의 본고장 유럽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선배이자 스승인 야마다 코사쿠는 바쿠씨의 창작 무용은 유럽의 일류 극장에서도 통용될 것이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시이 바쿠는 1922124일 이시이 코나미를 대동하고 고베항에서 기타노마루(北野丸)에 승선해 프랑스로 향했다.

 

여행 중에도 이시이 바쿠는 창작을 쉬지 않았고, 그 항해 중에 창작한 작품이 부산공연의 첫 작품이었던 <멜랑콜리>였던 것이다. 이시이 바쿠의 키타노마루 항해는 1922124일 고베항에서 시작되어 1922114일 마르세유에 도착했으므로, 42일간의 어느 시점이 <멜랑콜리>의 창작시기일 것이다.

 

 

<이시이 바쿠 팜플렛 1>에는 이 작품이 에드워드 그리크(Edvard Grieg, 1843-1907)의 피아노 독주 작품 <멜랑콜리(Melankoli)>을 배경음악으로 하여 안무된 작품이며, 그 정조는 우울하고, 눈 내리는 무거운 하늘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그림자와도 같은, 북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포착하기 어려운 흔들리는 허무한 환상을 묘사한 작품이라고 서술되었고, “미키 로후(三木露風, 1889-1964)의 시 <황야(荒野)>에서 힌트를 얻은 무용시라는 주석도 달려 있다.

 

그러나 <멜랑콜리>의 영상이나 사진, 추가적인 작품설명 등이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이 없으므로 이 작품의 모습을 짐작하거나 재현할 방법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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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328일 개최되었던 이시이무용단 부산공연 발표곡 12작품은 321-23일의 경성공연 레퍼토리와 거의 같았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또 대부분 일 년 전인 1925428일부터 51일까지 도쿄 아사쿠사(浅草)의 쓰키지(築地)소극장에서 열렸던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의 <귀조(歸朝)1회무용시공연>에서 발표된 작품들이었던 것이었다. 1926328일의 <부산일보>에 보도된 부산공연 발표곡은 다음의 12곡이었다.

 

 

1: (1) 무용시 <멜랑콜리(メランコリイ, 1922, 北野丸키타노마루)>, (2) 무용시소곡 <법열(法悅호에츠, 1913, 도쿄)>, (3) 무용시 <꿈꾸다(みる유메미루, 1922, 베를린)>, (4) 극적무용 <갇힌 사람(はれたる토라와레타루히토, 1922, 베를린)>, (5) 어린이무용(童踊) <개구장이(わんぱく小僧완파쿠고조, 1926)>, (6) 무용시 <산을 오르다(야마오노보루, 1925, 무사시사카이)>.

 

2: (7) 무용극 <명암(明闇민야미, 1913, 도쿄)>, (8) 무용시 <솔베이지의 노래(ソルヴエーヂの, 1924, 뉴욕)>, (9) 표현파풍의 무용시 <마스크(マスク, 1924, 뉴욕)>, (10) 무용시 <고뇌하는 그림자(ましき나야마시키카게, 1921, 도쿄)>, (11) 무용시극 <젊은 판과 님프(きパンとニンフ와카키판토닌후, 1913, 도쿄)>, (12) 번외 <일본무용(1926)>.

 

이중 <개구장이(1926)><산을 오르다(1925)>, 번외의 <일본무용(1926)>을 제외한 모든 작품은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의 <귀조제1회무용시공연>에서 발표된 작품들이었다. 이중 <법열(1913)><명암(1913)>, <젊은 판과 님프(1913)>3작품은 이시이 바쿠가 야마다 코사쿠와 협력해 무용시 운동을 시작하면서 창작한 작품들이었고, <고뇌하는 그림자(1921)>는 이시이 바쿠가 구미순회공연을 떠나기 직전에 만든 작품이었다.

 

 

한편 <멜랑콜리(1922)><꿈꾸다(1922)>, <갇힌 사람(1922)><솔베이지의 노래(1924)>, <마스크(1924)> 등의 5작품은 이시이 바쿠가 구미 순회공연 중에 창작한 작품들이다. 따라서 부산 공연 12개 작품 중 8개는 구미 순회공연까지 창작된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반면, <산을 오르다(1925)>192510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 같은 쓰키지 소극장에서 개최되었던 <2회 신작무용시발표회>의 발표곡이었다. 이는 구미 순회공연에서 돌아와 무사시사카이(武蔵境)에 무용연구소를 개소한 다음에 창작한 것으로, 이후 이시이 바쿠의 전 무용경력을 통해 가장 유명한 대표작의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1926년에 초연된 <개구장이>는 만주와 조선 순회공연에 참가한 이시이 에이코(石井榮子)가 공연할 수 있도록 창작한 작품으로 보이며,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일본무용>은 만주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관객들을 위해 창작한 일본색 짙은 작품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시이 바쿠의 부산공연에서는 입단 3일차의 최승희가 맡을 역할은 없었을 것이다. 공연 준비에 참가하거나, 공연 중 대기실에서 의상과 소품 등을 위한 심부름을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직접적인 참가방법이 없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최승희가 부산공연을 선용하는 최적의 방법은 공연을 관찰하면서 무용과 무용공연에 대해 생각하고 배우는 것이었을 것이다.

 

최승희는 부산공연 레퍼토리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최승희와 이시이 바쿠는 이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이 없지만, 최승희가 배운 점이 많았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 무용 작품들이 스승에 의해 창작된 것임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당시 이시이무용단에서 안무가는 이시이 바쿠뿐이었고, 나머지 3명은 그가 창작한 작품을 익혀 공연하는 무용수였다. 심지어 구미 순회공연에 동행했던 코나미조차도 안무가가 아니라 무용수에 머물렀다.

 

대구와 부산에서의 초기 공연 관람을 통해 최승희는 무용가 중에서도 안무가와 무용수가 구별된다는 사실, 그리고 안무가를 겸한 무용가야말로 자신이 지향하는 진정한 무용가라는 점을 깨달았을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가 비교적 초기부터 안무가가 되려고 결심하게 된 것은 입단 직후부터 공연을 내부에서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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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무용단의 첫 부산공연은 1926328-29일 오후6시에서 부산 국제관에서 열렸다. 325일 아침 이시이 무용단에 입단했던 최승희는 이날이 입단 3일째였으므로 실제 공연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신입단원으로서 공연을 참관한 것은 326일의 대구공연에 이어 두 번째였다.

 

이 공연에서 발표된 작품은 모두 12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26328일의 <부산일보>11개 작품이 2부로 나뉘어 공연되었다고 보도했다. 1부는 (1) 무용시 <멜랑콜리(メランコリイ)>, (2) 무용시소곡 <법열(法悅)>, (3) 무용시 <꿈꾸다(みる)>, (4) 극적무용 <갇힌 사람(はれたる)>, (5) 어린이무용(童踊) <완바쿠고조(わんばく小僧)>, (6) 무용시 <산을 오르다()> 등으로 구성되었고, 휴식(休憩) 후에 재개된 2부에서는 (7) 무용극 <명암(明闇)>, (8) 무용시 <솔베이지의 노래(ソルヴエーヂの)>, (9) 표현파풍의 무용시 <마스크(マスク)>, (10) 무용시 <고뇌하는 그림자(ましき)>, (11) 무용시극 <젊은 판과 님프(きパンとニンフ)>가 상연되었다.

 

 

이 목록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관객의 앵콜 요청에 대비해 (12) <일본무용>이 한 작품 더 준비되었다. , <부산일보>의 같은 기사에 공연 종목은 유럽과 미국의 각국 무용은 물론 이시이 코나미의 특기인 야마다 고사쿠 씨 작곡의 <일본무용>을 번외로 더한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일본무용>에 대하여 자세하게 서술한 문헌은 없지만, 아마도 경성이나 부산 공연의 관객이 대부분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이들에게 친숙한 일본식 작품을 레퍼토리에 추가한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무용>은 경성공연에서도 발표된 바 있었다. 따라서 이시이 무용단의 부산공연 레퍼토리는 321-23일의 경성공연 레퍼토리와 거의 같았다. 경성공연에서 발표된 11작품에다가 22번째 작품으로 <법열>이 하나 더 추가되었을 뿐이다.

 

부산공연의 12개 발표작품은 대부분은 무용시로 분류되었다. 무용시는 야마다 코사쿠와 함께 이시이 바쿠가 개발한 형식과 내용의 창작 신무용으로, 일본 전통의 무용과는 전적으로 다른 형식의 신무용이었다. , 의상이나 음악, 동작 등의 거의 모든 면에서 서양식 무용을 도입하는 한편, 내용의 면에서는 일본인들의 감성을 표현한 작품들이었다. 특히 내용의 면에서 서사(敍事) 전달이 목적인 일본식 가부키나 서양식 고전발레와는 달리, 무용시는 서정(抒情)을 전달하는 데에 역점을 둔 무용작품이다.

 

 

부산공연의 12개 작품 중에서 무용시라고 소개된 작품이 5(<멜랑콜리>, <꿈꾸다>, <등산>, <솔베이지의 노래>, <고뇌의 그림자> )였고, ‘무용시 소곡으로 소개된 <명암>, ‘표현파 무용시라고 표현된 <마스크>, ‘무용시극으로 서술된 <젊은 판과 님프>를 합치면 모두 8개 작품이 무용시로 묘사되었다.

 

그밖에 <갇힌 사람>극적무용’, <완바쿠고조>어린이 무용’, <명암>무용극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이들이 무용시와는 다른 무용종목으로 서술된 것은 그 작품들에서는 일정한 서사가 전개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무용시로 서술된 <등산><솔베이지의 노래>, ‘무용시극으로 표현된 <젊은 판과 님프>에도 일정한 이야기가 전개되었던 것을 고려하면, 무용시 작품과 다른 작품들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명백히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부산공연의 12개 작품을 발표한 무용수는 모두 4명이었다. 이시이 바쿠(石井漠)와 그의 처제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 이시이 바쿠의 여동생 이시이 에이코(石井榮子)와 아사쿠사 오페라 시절부터 이시이 바쿠와 함께 활동 했던 마츠우라 다비토(松浦旅人)였다.

 

<법열><갇힌 사람>은 이시이 바쿠의 독무, <꿈꾸다><솔베이지의 노래>, <마스크><고뇌하는 그림자><일본무용>은 이시이 코나미의 독무였고, <멜랑콜리><산을 오르다><젊은 판과 님프>는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의 듀엣이었다. 마츠우라 다비토는 이시이 바쿠와 함께 <명암>, 이시이 에이코는 어린이 무용 <완바쿠고조>을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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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부산에서 무용 공연은 주로 세 극장에서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국제관(1920-1929)><부산공회당(1928-1945)><부산극장(1934-1945)>이 그것이다.

 

<국제관>에서 공연했던 일본인 무용가로는 후지마 시즈에(藤間靜枝)와 이시이 바쿠(石井漠)가 있다. 후지마 시즈에는 1925114<국제관>에서 조선에서는 최초로 신무용 공연을 열었고, 이시이 바쿠무용단도 19263월에 경성과 인천, 대구 공연에 이어 부산공연(3/27-8)을 국제관에서 가졌다. 그밖에도 19281020일의 <부산일보><도쿄무용연구소>의 신인 무용가들이 <국제관>에서 공연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최승희는 <국제관>에서 무용공연을 가진 적이 없다. 최승희가 무용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던 1929년 말에는 <국제관>이 이미 화재로 소실되어 없어졌기 때문이다.

 

 

19284월 개관한 <부산공회당>15백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공연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무대와 조명 시설이 좋았기 때문에 정상급 무용가들의 공연이 주로 부산공회당에서 열렸다. 특히 <국제관(1920-1928)>이 화재로 소실된 직후에는 무용공연이 대부분 부산공회당에서 열렸다.

 

특히 1930년에는 배구자와 최승희, 이시이 바쿠와 조택원 등이 부산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열었다. 111일에는 배구자가, 1930524일에는 최승희, 112일에는 이시이 바쿠가 부산공회당에서 공연회를 가졌다. 이후에도 1931217-18일과 193641, 1941425일에는 최승희가, 1932715일에는 이시이 바쿠가, 193451일과 193678일에는 조택원이 <부산공회당>에서 공연을 가진 바 있었다. 1934111일 이시이무용단에 복귀한 최승희와 이시이 바쿠가 함께 공연한 것도 <부산공회당>이었다. 최승희가 <부산공회당>에서 공연한 것은 5회로 다른 무용가들에 비해 가장 많았다.

 

 

이 같은 정상급 무용가들 외에도 1931418일에는 <일본음악과 무용의밤><부산공회당>에서 열렸고, 193235일에도 아트협회 주최로 조선호 모금을 위한 <음악무용의 밤>이 개최되었다. 1934224일에는 일본의 천재무용가로 불리던 카와바타 후미코(川畑文子, 1916-2007)의 공연이 <부산공회당>에서 열렸고, 1939112일에도 대구소녀들의 무용발표회가 <부산공회당>에서 개최되었다.

 

1934년에 부산부 서정1정목 9번지에 개관한 <부산극장(釜山劇場후산게키조, 1934-1945)>은 당초 일본 가부키 공연 전용의 대극장으로 문을 열었기 때문에 주로 일본식 연극과 무용 공연이 열렸다.

 

1936919일에는 후지마 시즈에가 <부산극장>에서 공연했고, 같은 해 1221일에도 <일본음악과 무용의밤>이 열렸다. 1939326일에는 <상이군인 위안 무용대회><부산극장>에서 열렸고, 19391122일에는 연예보국(演藝保國)”이라는 기치아래 <청원소패무용 합동의 헌금대회><부산극장>에서 열리기도 했다. 1941118일에도 <상이군인 유가족위안 연극과 무용의 밤>이 열렸고, 19411129일에는 <백의용사를 위한 연극과 무용의 밤><부산극장>에서 열렸다. 1942519일에도 <소패와 무용의 밤><부산극장>에서 열렸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부산의 무용 공연은 <국제관><부산공회당><부산극장>에서 열렸고, 1929<국제관>이 폐관된 이후 1930년대와 40년대에는 주로 <부산공회당><부산극장>이 무용공연을 개최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두 극장의 무용공연에도 차이가 있었다. <부산공회당>은 대체로 서양식의 신무용이나 최승희와 조택원의 조선무용 공연이 열렸고, <부산극장>에서는 일본 전통 악기를 사용하는 일본 무용이 주로 공연되었던 것이다. 후지마 시즈에의 무용은 일본무용계에서는 신무용으로 분류되기는 했지만, 이시이 바쿠의 평을 빌자면, 일본 전통 무용의 색깔이 진하게 유지된 신무용이었기 때문에 일본 전통식 <부산극장>에서 주로 공연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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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부산지역에 설립, 운영되었던 24개 극장을 정리했다. 부산에 극장이 처음 설립된 것은 1900년대 초부터였다. 행좌(1903-1915)와 송정좌(1907-1911), 부귀자(1905-1907)와 부산좌(1907-1923)4개 극장이 이 시기에 문을 열었지만, 부귀자가 이내 폐관됨으로써 1910년대로 넘어가면서도 유지된 극장은 행좌와 송정좌와 부산좌의 3개소였다.

 

1910년대에는 변천좌(1912-1916), 동양좌(1912-1918), 질자죄(1912-1918), 욱관(1912-1916), 보래관(1914-1945), 초량관(1914-1917), 행관(1916-1930), 상생관(1916-1945) 8개 극장이 개관됐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1900년대부터 유지되던 행좌와 송정좌가 폐관되고, 1910년대에 설립된 8개 극장 중에서도 5개가 폐관되었다. 12개 극장 중 8개가 폐관되는 격동기였던 것이다. 1920년대에도 살아남은 극장은 부산좌와 보래관, 행관과 상생관의 4개뿐이었다.

 

1920년대에는 국제관(1920-1929)과 유락관(1921-1932), 태평관(1922-1943)과 수좌(1924-1945), 부산공회당(1928-1945)5개 극장이 새로 개관되어 이 시기에 경영된 극장은 총 9개였지만, 부산좌와 국제관이 폐관되어 1930년대까지 유지된 극장은 보래관과 행관, 상생관과 유락관, 태평관과 수좌와 공회당의 7개였다.

 

 

1930년대에는 중앙극장(1930-1945)과 소화관(1931-1945), 부산극장(1934-1945)과 구포극장(1939-1945)4개 극장이 개관하여 총 11개 극장이 영업했으나, 이 시기에 행관과 유락관이 폐관되어 1940년대에 들어서는 보래관과 상생관, 태평관과 수좌, 공회당과 소화관, 중앙극장과 부산극장과 구포극장의 9개가 존속했다.

 

1940년부터 1945년의 광복까지는 대화관(1942-1945)과 삼일극장(1944-2006), 동래극장(1944-1992)3개소가 개관되어 총 12개 극장이 운영됐으며, 1943년에 폐관된 태평관을 제외한 11개 극장은 해방 후에도 계속 극장으로 이어져 사용되었다.

 

이 극장들의 시기적 구별은 이들이 제공하던 공연물들의 종류에 따른 분류와도 거의 일치한다. 1900년대와 1910년대 초에 설립된 극장들(1903-1912)은 대부분 일본식 구극과 신극을 상연하던 가부키 극장이었다. 행좌와 송정좌, 부귀좌와 부산좌, 변천좌와 동양좌, 질자좌와 욱관이 여기에 속한다.

 

 

 

 

이후 1910년대 중반부터 1920년대 말까지는 활동사진 상설관 시기(1914-1928), 이 시기에 설립된 보래관과 초량좌, 행관과 상생관, 국제관과 유락관, 태평관과 수장 등의 8개 극장은 연쇄활극과 무성영화 상영을 주요한 서비스로 삼았다.

1920년대 말부터 시작된 발성영화의 시대(1929-1945)에는 중앙극장과 소화관, 부산극장과 구포극장, 대화관과 삼일극장과 동래극장의 7개 극장이 설립, 경영되었다.

 

이상을 종합하면 일제강점기 부산지역에서 명멸했던 극장들은 모두 24개였다. 일부 문헌은 일제강점기 부산 극장을 23개로 집계하기도 했는데, 이는 공공기관이었던 부산공회당을 제외한 숫자였다. 설립 주체가 관청인가 민간인가의 구별을 빼면 영화상영과 공연 및 행사개최라는 기능면에서 그다지 차이가 없었으므로, 필자는 부산공회당을 포함해 일제강점기 부산의 극장을 24개로 집계했다.

 

 

끝으로, 부산지역 지도를 조사하던 중 <부산부전도(1914)>에서 <융좌(戎座)>라는 새로운 극장 이름이 발견되었다. 기존 문헌에 없던 극장이름이었으나, 추가 조사를 통해 <융좌><질자좌>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에비스로 발음되는 융()은 어부와 상인들이 숭배하는 일본의 칠복신(七福神)의 하나이며, “오른손에 낚싯대, 왼손에 도미를 든 모습으로 형상화되곤 한다.

 

일설에는 에비스가 이자나기(伊耶那岐命)와 이자나미(伊耶那美命)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히루코(蛭子命)라는 다름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결국 <질자좌(蛭子座)><에비스좌(戎座)>는 같은 극장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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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전인 1944년 부산부 법일정에는 삼일극장(三一劇場산이치게키조, 1944-2006), 수안정에는 동래극장(東萊劇場토라이게키조, 1944-1992)가 새로 개관했다. 동구 범일동 117번지에 개관한 <삼일극장>은 범일동 지역 최초의 극장으로 극장주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개관 당시부터 재상영관으로 출발한 <삼일극장>은 해방 후 시간이 가면서 3, 4번관으로 운영되던 연극과 영화 공용극장으로 광복 직후 창고로 사용되기도 했는가 하면, 한국전쟁 때는 피난민을 위한 수용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삼일극장의 일제강점기 영업기간은 1년 남짓이었으나, 해방 후 폐관까지 60여년동안 범일동 주민과 인근의 신발공장 근로자들의 문화 욕구를 해소해주던 공간이었다.

 

 

개관 당시 단층이었던 삼일극장은 1969년 철근 콘크리트 3층 건물로 개축되어 1025일 재개관했다. 이 신축 삼일극장은 무대면적은 15평으로 협소한 편이었으나 좌석수가 929(1570, 2179, 입석 180)의 대형 극장이었다.

 

해방 후 <삼일극장(1944)><조일영화극장(1946)>, <삼일극장(1947)>, <제일극장(1949)> 등으로 여러번 개칭되다가 1953<삼일극장(1953)>으로 되돌아가서 정착되었고, 2006년 폐관될 때까지 원래의 명칭으로 운영되었다.

 

<삼일극장>이 유명해 진 것은 영화촬영 장소로 이용되면서 부터였다. 우선 나운규의 일생을 그린 <아리랑(1966, 최무룡 감독)>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는데, 이는 <삼일극장>의 외관이 일제강점기 경성의 <단성사>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도 삼일극장은 <친구(2001, 곽경택 감독)><소년 천국에 가다(2005, 윤태용 감독)>, <삼거리극장(2006, 전계수 감독)> 등의 배경이 되었다. 특히 영화 <친구(2001)>의 관람자 수가 8백만을 넘어서자 부산광역시는 범일동 구름다리에서 삼일극장까지를 <친구의 거리>로 선포하기도 했다.

 

동래극장(東萊劇場토라이게키조, 1944-1992)은 극장주 다까다 쥬이찌(高田壽一)1944102일 설립 허가를 받고 부산부 수안정(=동래구 수안동 200번지)”에 설립한 동래 지역 최초의 영화 극장이자, 일제강점기에 개관한 마지막 극장이었다.

 

동래극장은 2층짜리 콘크리트 석조건물로 건축되었고, 무대는 15평으로 좁은 편이었으나 객석은 총 6백석(1400, 2100, 입석 100)의 중형극장이었다. 동래극장 개관 이전에는 동래여자고등학교 앞 붉은 벽돌 양옥 건물이었던 <동래청년회관>을 비롯해 동래구락부, 동래보통학교, 동래염불암, 일성관, 동래공회당 등이 영화와 연극공연 장소로 활용되어 왔으나, 마침내 <동래극장>이 동래구민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하게 된 것이다.

 

 

<동래극장>이 개관됨으로써 부산부 지역의 극장은 중구에 15개가 밀집되기는 했으나 동구에 5, 영도구에 2, 북구에 1개에 더하여 마침내 동래구에도 <동래극장>이 개관되어, 어느정도 지역적 안배가 이루어진 셈이었다.

 

해방후 <동래극장(1944)><동래영화극장(1947)>으로 개칭되어 경영되다가 1950년에는 <동래극장(1950)>으로 재개칭되어 2,3번관으로 운영되던 중 1984910일 폐관되었다.

 

이후에도 <동래극장>1985525동래구 수안동 378번지로 주소지를 변경해 재건축되면서 명맥이 유지되었으나 19921017일 최종 폐관되었다. 개관 당시의 <동래극장> 자리에는 대한투자신탁증권 동래점이 자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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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일제강점에서 해방됐을 때 부산지역의 일본인 소유 사설 영화극장은 보래관과 상생관, 수좌와 대생좌, 소화관과 부산영화극장, 삼일극장과 대화관과 동래극장 등 총 9개였고, 여기에 부영 극장인 부산공회당을 더하면 모두 10개였다.

 

하라구치 키요미(原口淸見)가 개업한 <구포극장(龜浦劇場, 1939-1945)>은 당시 경상남도 동래군에 속했으므로 부산부 극장에서 제외되었지만, 1963년 부산직할시 승격과 함께 극장 주소지가 부산에 편입되었다. 부산직할시에 편입된 뒤의 주소는 부산진구 구포동 193번지, 구포역 앞 간선도로를 따라 구포 장터로 들어가는 300미터 지점에 위치했었다.

 

 

 

잡지 <삼천리> 19416월호 209쪽에 실린 전 조선극장 총수 139주요 극장사진 대부요금 일람표에는 <구포극장>1939-40년 자료가 등재되었으므로, <구포극장>은 적어도 1939년부터 영업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42-43년의 영화연감><구포극장>의 극장주 이름과 함께 객석의 수가 293석임을 밝혔다. 부산극장협회의 극장실태조사표에 따르면 <구포극장>은 대지 102평에 건축된 목조 2층 건물이었고, 좌석 수는 1층에 168, 2층에 17, 입석 135석으로 총 320석의 소규모 극장이었다.

 

<구포극장>은 일제강점기부터 구포읍 유일의 대중 문화공간이었으나, 19605백석의 신영극장과 1963285석의 동영극장이 주변에 들어서자 시설이 낙후된 구포극장은 경영난을 겪던 중 1966323일 휴관에 들어갔다가 1967413일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구포극장> 자리는 도로에 편입되어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대화관(大和館야마토칸, 1942-1945)>은 부산부 수정정(=동구 수정동1) 1번지에 개관된 연극·영화 공용 극장으로 초량좌(1914?~1917?)와 유락관(1921~1932), 중앙극장(1930~1945)에 이어 부산 동구 지역에 세워진 네 번째 극장이었다. 위치는 부산진역 바로 앞이었다.

 

극장주 사이조 사다도시(西條貞利)19411111일 경남 당국으로부터 신축허가를 받았고 1942<대화관>을 완공, 개관했다. 대화관의 영화 상영 기록은 194251일의 <부산일보>에 처음으로 보도되었다.

 

<대화관><소화관>의 영화 배급업체 사쿠라바상사()로부터 주로 <도호(東寶)>영화를 배급받아 상영했다. 조선영화는 1944<어화>(1939, 안철영)<조선해협>(1943, 박기채)2편을 상영됐을 뿐 <소화관>이나 <수좌>, <대생좌>처럼 조선영화를 자주 상영하지는 않았다.

 

 

<대화관>이 개관되던 1942, 초량정(=초량동) 207번지에 있던 이웃의 극장 <중앙극장><대생좌>로 개명해 경영되고 있었고, 중구에는 <보래관><상생관>, <소화관>3대 활동사진 상설관과 <부산극장><태평관> 등의 연극장, 그리고 영도의 <수좌>와 동래읍의 <구포극장> , 모두 8개 극장이 부산에 개업하고 있었다.

 

해방공간의 대화극장에서는 악극단 공연이 주류를 이루었고, 영화 상영은 창고에 쌓여 있던 조선영화 <아리랑>(1926, 나운규)을 비롯해 <금붕어>(1927, 나운규), <사나이>(1928, 홍개명), <숙영낭자전>(1928, 이경손), <승방비곡>(1930, 이구영), <무지개>(1936, 이규환), <애련송>(1939, 김유영) 등이 재상영됐다.

 

 

해방후, <대화관(1942)><대화극장(19469)>, <부산진극장(194611)>, <은영극장(19496)>, <동양극장(19549)>로 개칭되어 운영되던 중, 1958년 극장주 이명조(李命祚)가 대지 300평에 2층 콘크리트 건물로 개축하여 69일 재개관했다. 개축된 <동양극장>은 좌석수 546(1353, 256)과 무대면적 28평을 갖춘 중형극장이었다.

 

이후에도 옛 <대화관><미성극장(1959)>, <동서극장(1974)> 등으로 이름과 극장주가 바뀌다가 1976611일 폐관되었다. 이 시기에 <수정극장><시민관(=옛 상생관)>과 <국제극장>도 <동서극장(=옛 대화관)>과 함께 폐관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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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관(昭和館쇼와칸, 1931-1945)>19311231일 남빈정에 개관된 활동사진 상설관이었다. 극장주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는 조선과 만주까지 배급망을 갖춘 영화업체 <사쿠라바상회>의 대표로, <사쿠라바상회>의 모관으로 <행관(幸館, 1915-1930)>을 경영하고 있었다.

 

1930<행관>이 화재로 전소되자, 사쿠라바 후지오는 막대한 피해에 굴하지 않고 자본금 10만원의 주식회사 <사쿠라바상사>를 다시 세우고, 지상 3층 규모의 최신 활동사진 상설관인 <소화관>을 건축해 사업을 확장했다. <소화관> 개관 당시 극장주는 오가와 요시조(小川好藏)였으나, 1943년에는 극장주 사쿠라바 후지오, 지배인은 사쿠라바 토시오(櫻庭敏雄)로 기록되어 있다.

 

화재를 견딜 수 있는 철근 콘크리트 현대식 공법으로 부산부 남빈정 2정목 22번지(=중구 창선동 247번지)”3층건물로 신축된 소화관은, 대지가 164, 연건평이 344, 무대면적 25평으로 규모 면에서 기존의 극장들과 차별화되었고, 금새 부산의 명소가 되었다.

 

 

1932년의 <부산상공안내>에 따르면 <소화관>의 주소는 부산부 남빈정 2정목 22번지에서 부산부 행정 2정목47-1번지로 변경되었고, 해방 후인 19451225일의 <민주중보>에 따르면 194611일부터 부산부 서대신정 3정목 55번지로 바뀌었다가, 1949년에는 중구 창선동 247번지로 다시 변경되었다.

 

1932에 발행된 <부산상공안내>에 따르면 소화관의 관객 수용 능력은 1층에 2등석 475(남자 135, 여자 65, 가족 275), 2층에 1등석 226(남자 71, 여자 35, 가족 120), 33등석 160(남자 48, 여자 48, 가족 64)으로 총 좌석 861석이었다. 1934년의 자료에는 총 좌석수가 1천석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1942-43년에는 150석으로 집계되었다.

 

새 영화관 <소화관>은 기존의 <행관>터를 떠나 일본인 상권의 중심지였던 행정에 인접한 남빈정에 세워졌는데, 인근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부산의 주요 극장으로 경영되어 오던 <보래관><태평관>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 거리가 부산의 영화거리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소화관>은 해방후 <조선극장><동아극장>등으로 명맥이 이어지다가 1968722일 영화상영관을 폐관했으나, 개관 당시의 건축물은 아직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부산극장(釜山劇場후산게키조, 1934-1945)>1934115, “부산부 서정1정목 9번지에 세워졌다. 지금의 중구 남포동518번지자리이다. 부산극장은 당초 일본 가부키 공연 전용의 대극장으로 문을 열었으나, 이따금씩 영화도 상영되었다.

 

<부산극장>1937<보래관>에 공급되던 영화를 대신 상영하면서부터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보래관>1937<상생관>과 함께 건물이 화재에 취약하다는 이유로 부산부 당국으로부터 신축을 명령받았는데, 신축된 보래관은 193810월에 재개관되었다.

 

 

해방후 <부산극장><부산영화극장>, <항도극장>, <부산극장>, <도립부산극장> 등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같은 터에서 극장으로 기능하던 중, 19821224일 노후된 극장을 철거 후 신축 개관 이후 <부산극장>으로 재개관했고, 1993814일 부산 최초로 복합영화관(3개관)으로 변신해 부산 극장계의 선두주자로 나섰다. 경영난이 계속되면서 2009년에는 <씨너스 부산극장>, 2013년에 <메가박스 부산극장>으로 경영이 바뀌었다.

 

1934년 개관한 이래 같은 자리에서 지금까지 극장이 영업 중인 <부산극장>, 1907년 개관해 지금까지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서울의 <단성사>를 제외하고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극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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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극장(中央劇場쥬오게키조, 1930-1936)>은 지금의 부산 동구에 개관된 세 번째 극장이었다. 초량정(=초량동) 207번지에 중앙극장을 개관한 극장주는 오이케 겐지(大池源二)<부산좌(1907-1923)><유락관(1921-1932)> 설립을 주도했던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 1856-1930)의 아들이다.

 

오이케 츄스케는 카나모리 신기치(金森新吉)와 공동 경영하는 조건으로 중앙극장을 신축하던 중 사망해, 그의 장남인 오이케 겐지가 중앙극장을 승계 받아 완공한 후 1930722일 개관을 보았다. 개관 당시 중앙극장은 연극공연 극장으로 출발했으나 1936년 상생관의 대표 미츠오 미네지로(滿生峰次郞)가 인수하면서 극장명을 <대생좌(大生座다이세이자)로 바꾸면서 상설영화관으로 전환되었다. <1942-1943년의 영화연감(일본영화잡지협회 발간)>에 따르면 <대생좌>의 대표는 스기시타 스에지로(杉下末治郞)였다.

 

 

일제강점기 부산지역의 극장은 대체로 3시기로 구분되는데, 1(1885-1918)는 가부키 극장 시기, 2(1918-1928)는 활동사진 상설관 시기, 3(1929-1945)는 발성영화 상영관 시기이다. 오이케 츄스케는 각 시기에 맞춰서 극장을 개업한 것인데, 부산좌(1907-1923)가 제1, 유락관(1921-1932)이 제2, 중앙극장(1930-1945)이 제3기에 속하는 셈이다. 특히 중앙극장은 발성영화 시대가 열린 후 처음으로 개관한 극장이기도 하다.

 

1932년 발간된 <부산상공안내>에 따르면, 중앙극장의 수용인원은 상층 190, 하층 310, 500명이었는데, <1942-1943년의 영화연감(일본영화잡지협회 발간)>에는 각각 498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일관성을 보인다. , 중앙극장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던 셈이다. 중앙극장의 입장료는 특등석 150, 1등석 120, 2등석 80전으로 책정되어 있었다.

 

필름 배급은 근거리에 있었던 상생관과 동시 개봉 시스템으로 운영되었으며, 뒤이어 소화관, 보래관과도 연계하여 동시에 영화를 개봉했다. 일본 영화는 쇼치쿠, 대도(大都), 키네마, 일본PCL, 신흥키네마, 닛카츠 계열사의 작품이 상영됐다. 중앙극장이 소재했던 초량 지역은 조선 사람이 밀집 주거했던 탓으로 홀대 받던 조선 영화가 자주 상영되었다.

 

 

이는 <중앙극장>을 뒤이은 <대생좌>도 마찬가지여서 조선인의 참여로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르곤 했다. 1962915일의 <국제신문>에 실린 부산, 어제와 오늘, 극장이라는 기고문에서는 <대생좌>의 흥행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대생좌 꼭대기에서 나팔소리가 울린다. 구성진 가락으로 유행가가 흐른다. 분칠에 연지를 바른 극단패들이 꽹과리와 나팔을 앞장세우고 동네를 한 바퀴 돈다. 극장에 극단이 들어왔다는 선전인 것이다. 극장 문 앞에는 화려한 포스터가 나붙는다.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 <줄타기광대 임상문>. 극장이 터져 나간다. 좌석제고 뭐고 없다. 이층은 신을 벗어 맡기고 올라간다. 다다미에 앉아서 구경한다.”

 

 

한편, <중앙극장(1930-1936)>에서 상영되었던 조선영화로는, 1932<방아타령>(31, 김상진), <금강한>(31, 나운규)을 시작으로 1934<아리랑>(26, 나운규), <아리랑2>(30, 이구영), 1936<홍길동전>(34, 김소봉), <춘향전>(35, 이명우), <장화홍련전>(36, 홍개명), <수일과 순애>(31, 이구영), <아리랑3>(36, 나운규) 등이 있었다.

 

이어서 개관한 <대생좌>의 조선영화 프로그램에는, 1937<홍길동전>(34, 김소봉), <홍길동전 후편>(36, 이명우), <나그네>(37, 이규환), <미몽>(36, 양주남), <풍운아>(26, 나운규), <무화과>(35, 나운규), <그림자>(35,나운규), 1938<무지개>(36, 나운규), <인생항로>(37, 안종화), <청춘의 십자로>(34, 안종화), <임자없는 나룻배>(32, 안종화), 1939<세동무>(28, 김영환), <개화당이문>(32, 나운규), <낙화유수>(27, 이구영), <청춘부대>(38, 홍개명), <국경>(최인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명우), <무정>(박기채), <나의 친구여>(28,유장안), 1940<철인도>(30, 나운규), <큰무덤>(31, 윤봉춘), <회심곡>(30, 왕덕성), 1941<사나이>(28, 홍개명), <처의 모습>(39, 이창근), 1943<망루의 결사대>(이마이)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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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822일 안본정에 부산의 13번째 극장으로 개관된 국제관(1920-1929)17번째 공연장으로 개관한 부산공회당(1928-1945)을 정리했다. 이 두 극장은 무용공연이 자주 개최된 극장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국제관과 부산공회당 개관 사이에 3개의 극장이 더 개관되었다. 유락관(遊樂館)과 태평관(太平館)과 수좌(壽座)가 그것이다.

 

유락관(遊樂館유라쿠칸, 1921-1932), 19211211, 부산의 일본인 거류민 1세대 사업가이자 이미 부산좌(釜山座, 1907-1923)를 경영하던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 1856-1930)가 좌천정(=동구 좌천동) 206번지에 개관한 다목적 극장이었다. 오이케 츄스케는 자본금 15만원, 불입금 35백원의 출자로 설립한 부산흥산(釜山興産)주식회사를 통해 유락관을 건축했는데, 주주 115명이 3천주를 보유해 설립된 부산흥산주식회사의 최대주주 오이케 타다스케는 1280주를 보유한 최대주주였다.

 

유락관은 초량좌(草梁座소오리오자, 1914-1917)에 이어 부산 동구지역에 세워진 두 번째 극장으로 연극상연과 영화상영뿐 아니라 각종 지역 및 사회단체 행사를 개최하곤 했다.

 

 

조선인 관객과 공연에 배타적이던 대부분의 부산 극장들과는 달리 유락관은 조선인들의 공연과 관람에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유락관에서는 조선영화와 연극, 음악회와 각종 조선인단체 행사가 자주 열렸다. 특히 유락관 개관 직후인 1922년과 1923년에는 조선인 연극과 조선영화 등의 프로그램이 자주 소개되었다.

 

19221229일 부산청년회 주최로 변사 최천택을 초청해 <구미대모험사진> 상영회를 가졌고(조선일보, 192312), 192336일에는 부산여자청년회의 연극 공연이 있었다. (동아일보, 1923317). 192355일에는 부산지방 배경의 위생선전활동사진이 상영되었고 (조선일보, 192356), 192383일에는 부산청년회, 부산진기독청년회 주최로 교남학우회 순회연극이 상연되었고 (조선일보, 192387), 19231217일에는 조선여자교육협회 순회극단이 신극, 무도, 합창 등을 공연했다. (동아일보, 19231222).

 

한편 박원표의 <향토부산(1967)>에 게재된 부산의 흥행가라는 글에서 개화기에 있던 서울의 연극단들이 부산에 진출, ... 토월회가 이곳 무대(=초량좌)에서 그 연기를 자랑하였다고 기술했으나, 여기에는 오류가 있어 보인다. 토월회 창립은 1922년이므로 1917년경에 폐관된 초량좌에서 공연할 수 있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토월회가 공연을 가졌던 것은 1921년 초량지역에 두 번째로 세워진 극장 유락관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1926년에는 <아리랑(1926)>의 여주인공으로 유명해진 신일선의 가극이 공연되었는가 하면, 연속활극 <명금(1915)>이 유락관에서 재상영되었을 때는 서울에서 활동 중이던 동래 출신의 변사 서상호를 초빙해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유락관의 극장주 오이케 츄스케가 1930년 사망하자 경응의숙 이재과에 재학 중이던 장남 오이케 겐지(大池源二, 1892~?)가 부친의 사업을 승계 받아 유락관을 경영했고, 유락관 외에도 오이케 츄스케가 건축하기 시작한 부산 동구의 3번째 극장인 중앙극장(中央劇場주오게키조, 1930-1936)을 완공해 병행해 경영했다.

 

1936년 유락관은 상생관 극장주 미츠오 미네지로(滿生峰次郞)가 유락관을 인수해 대생좌(大生座다이세이자, 1936-1945)로 이름을 바꾸면서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됐다.

 

 

유락관(1921-1930)은 기존의 부산좌(釜山座후산자, 1907-1923)와 보래관(寶來館호라이칸, 1914-1973), 행관(幸館, 1916-1930), 상생관(相生館아이오이칸, 1916-1945), 국제관(國際館고쿠사이칸, 1920-1929)과 함께 영업을 한 바 있고, 유락관을 뒤이어 개관된 태평관(太平館 타이헤이칸, 1922-1943), 수좌(壽座고도부키자, 1924-1945), 중앙극장(中央劇場주오게키조, 1930-1936), 소화관(昭和館쇼와칸, 1931-1945) 등과도 함께 존재했다.

 

유락관은 개관 10년만인 193212일 발생한 화재로 극장이 전소된 후 폐관되었지만, 몇차례 유락관을 재건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복구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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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23개 극장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부산의 주요한 문화 공간이었던 곳으로 부산공회당(1928-1945)이 있다. 1925417일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가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해 오면서 부산부를 대표할 문화공간으로서 부산공회당 건립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1926년 행관의 극장주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 1860-1942)10만원의 기부금을 내는 등 17만여원의 공사비가 조성됐고, 만주철도()가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면서 19268월 공사가 시작됐다. 이후 연인원 25천명이 공사에 투입되어 1년반의 공사 끝에 19283월 준공되었고, 192849일 정식으로 개관되었다.

 

부산공회당의 규모는 건평이 194, 총건평이 640(1194, 2192, 3180, 456, 지하 17)으로 벽돌 및 철근 콘크리트 병용으로 근대식 4층 건물로 건축되었다. 조선총독부 건축과장 岩井이 공회당의 설계 및 공사 감독을 맡았고, 시공은 국제관의 극장주이기도 했던 조선토목협회의 기노시타 모토지로(木下元次郞)가 담당했다.

 

 

수용인원은 대집회실이 1천석, 소집회실이 40-80석이었지만, 2층과 3층의 계단식 관람석까지 합치면 15백명의 관람객 혹은 6백명의 연회객을 수용할 수 있다는 기록도 있다. 강연회나 연예 및 예술 공연은 대집회실에서 이뤄졌으며, 부산 시민들의 문화 활동의 거점이었다.

 

부대시설로는1층에 소집회실, 이발관, 일식당과 양식당, 오락실, 당구장, 창고 등이 설치되었고, 2층에는 대집회실과 끽연실, 3,4층에는 계단식 관람석, 지하층에는 창고가 마련되어 있었다. 공회당에 식당이 마련된 것은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이발관과 당구장, 끽연실이 마련되었다는 것은 이 공간을 대민 문화공간이자 봉사공간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물론 이때의 주민이란 이 공간을 주로 사용했던 내지인, 즉 일본인을 가리켰다.

 

부산공회당 공연의 중심은 활동사진, 즉 영화 상영이었다. 19283월에 공회당이 완공되고 49일로 낙성식이 계획되었지만 부산공회당은 그보다 일주일 전인 42일부터 영화상영을 시작했다. 첫 상영작품은 미국의 종교영화 <신을 잊어버린 거리><다비데 대왕>이었다. 이후에도 부산공회당에서는 <엠텐>, <지구의 진화>, <어미에게 맹세해서>, <골고다의 언덕>, <영웅의 흔적>, <폭군 네로>, <천국의 사람>, <여자는 마침내>, <킹 오브 킹>, <노를 잡는 손>, <맹수국 횡단>, <맹수국 세계횡단> 등의 서양영화가 주로 상영됐다.

 

 

이와 함께 부산공회당은 간간이 조선영화도 상영했는데, 김영환 감독의 <장화홍련전(1924)>, 이경손 감독의 <숙영낭자전(1928) 등이 대구 만경관의 주임변사 손병두의 해설로 상영됐고, 나운규의 <아리랑(1926), 이구영의 <아리랑후편(1930)> 등도 부산공회당에서 상영됐다.

 

그 외 연극, 무용, 음악 등의 다양한 문화 공연이 부산공회당에서 열렸는데, 특히 <국제관(1920-1928)>이 화재로 소실된 후에는 정상급 무용가들의 무용공연이 대부분 부산공회당에서 열렸다. 특히 1930년에는 배구자와 최승희, 이시이 바쿠가 모두 부산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열었다. 111일에는 배구자가, 1930524일에는 최승희, 112일에는 이시이 바쿠를 부산공회당에서 공연회를 가졌다.

 

이후에도 1931217-18일과 193641일에는 최승희가, 1932715일에는 이시이 바쿠가, 193451일과 193678일에는 조택원이 <부산공회당>에서 공연을 가진 바 있었다.

 

 

그러나 1940년대에 들어서는 군국주의 일제의 선전장으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특히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1942년 이후에는 일본 육군성이 만든 <비상시 일본>, 부산 재향군인연합분회 후원으로 공개된 <대공군>, 독일대사관 특별 제공의 <독일, 폴란드 진격>, 조선 방공협회 경남도연합지부의 순회강연 및 영화가 주로 상영되었다.

 

, 일제 말기 부산공회당은 일제가 전쟁을 정당화하고 모든 부산 시민들의 황국신민화로 내몰아 가기 위한 문화적 기지로 악용되는 공간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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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부산에 활동사진 상설관 시대가 시작된 이후 1920년대는 영화관이 주도권을 잡은 시기였다. 국제관에서도 12권짜리 장편영화 <! 무정(=레미제라블)>14권짜리 <십계>(1923, 파라마운트사, 세실 B. 데밀 감독)를 상영해 주목을 끌었으나 보래관이나 상생관 등의 영화 상설관에 비하면 상영영화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보래관과 상생관은 일본 유수 영화제작사와 특약을 통해 일본 영화를 확보했고, 보래관과 행관은 미국과 유럽의 영화배급사와의 계약으로 다양한 필름을 확보했다. 특히 행관은 사쿠라바상회가 보유한 3천개 이상의 필름을 활용해 매일 주야 2회 상영을 경영전략으로 구사했다.

 

 

상영 영화 확보에 열세였던 국제관은 눈을 국내로 돌렸다. 일본영화와 서양영화의 열세를 조선영화로 만회하고자 한 것인데, 조선영화란 조선에서 제작된 영화를 가리킨다. 1920년대 초기의 조선영화들은 일본인들의 자본과 기술, 조선인들의 연기 인력의 합작인 경우가 많았다. 1920년대 중반에야 조선의 자본이 동원되곤 했지만, 촬영기법은 여전히 일본식이었다. 조선식의 새로운 촬영기법은 나운규의 <아리랑> 이후에야 도입되었다.

 

1924711일 부산 최초이자 조선 최초의 영화제작사 <조선키네마>가 설립되었다. <조선키네마>는 일본인들이 설립한 영화제작사이지만, 연기와 감독 등의 제작진에는 조선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1924년 초 조선의 연극인 안종화와 김정원, 유수준과 엄진영, 이경손과 이채전 등 <무대예술연구회>의 회원들이 국제관 무대에서 톨스토이의 <부활>, <월광곡> 등의 연극작품을 공연해 갈채를 받았는데, 이들의 연기를 눈여겨 본 부산의 일본 실업인들이 조선인 배우들을 영입해 <조선키네마()>를 설립한 것이다.

 

조선인 배우와 일본인 자본/기술이 결합해 출범한 <조선키네마()><해의 비곡(秘曲, 1924)>, <총희의 연(寵姬, 1925), 일명 <운영전(雲英傳)>, <신의 장(, 1925)>, <동리의 호걸(洞里豪傑, 1925)> 4편의 영화를 제작해, 모두 국제관에서 상영했다. 이 영화들이 국제관에서 상영된 것은 <무대예술연구회>에 속한 조선인 연극배우들이 국제관과 맺은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제관은 <조선키네마>의 조선-일본 합작의 조선영화뿐 아니라 조선인이 제작한 조선영화도 다수 상영했다. 김영환 감독의 <장화홍련전(1924)>, 이경손 감독의 <심청전(1925)><개척자(1925)><장한몽(1926)>, 이구영 감독의 <쌍옥루 전,후편(1925)>, 김수로 감독의 <괴인의 정체(1927)> 등이 모두 부산에서는 국제관에서 상영되었다.

 

<조선키네마>는 설립 1년만인 1925년에 경영난과 내부 분열로 해산되었지만, <조선키네마>의 시도는 부산에서 영화의 제작과 배급, 흥행을 모두 담당했던 경험을 남겼고, 이는 훗날 부산이 영화의 도시로 떠오르는 역사적 자산이 되었다.

 

국제관은 영화 상영 외에 다양한 공연을 유치했는데, 무용공연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인 무용가로서 최초로 조선공연을 가졌던 후지마 시즈에(藤間靜枝)의 부산 공연도 1925114일 국제관에서 열렸고, 1926327일 이시이바쿠 무용단의 공연이 열린 곳도 국제관이었다.

 

 

다만 최승희는 국제관에서 무용공연을 가진 적이 없는데, 이는 최승희가 무용유학을 마치고 독자적인 활동을 벌이던 1930년대 초에는 국제관이 이미 화재로 소실되었기 때문이었다. 19284월에는 국제관보다 규모가 크고 시설이 좋은 부산공회당이 개관했으므로 무용공연이 대개 부산공회당에서 열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국제관은 19251월 자본금 20만원이 10만원으로 감자(減資)되는 등 경영의 어려움을 겪던 중, 1929227일의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 화재로 공연 중이던 사와다(澤田) 극단의 출연배우 4명이 사망하고 9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피해액도 109천원에 달했다. 이후 국제관을 재건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고, 국제관은 설립 10년 만에 폐관되었다. 화재 당시 국제관의 위치는 대창정 4정목 40번지(1929228일 부산일보)로 기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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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822일 국제관(國際館고쿠사이칸, 1920-1929)이 안본정 5번지(=중구 중앙동)에 개관했다. 국제관은 옛 부산역(=1953년 부산 대화재로 소실) 앞에 르네상스식과 일본식의 절충적 건축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이형재 건축사의 고증에 따르면 건물 전면 한 칸 기둥까지는 근대식이지만 나머지 부분은 동서양 절충식으로 구성되었고, “건물 상부에 마련한 지붕 내밀기 디자인은 당시로서는 꽤 획기적인 디자인 발상이라고 조사했다.

 

국제관은 4천주를 나눠 투자한 194명의 주주들이 설립했는데, 설립 자본금은 20만 원, 불입금 13만 원이 출자되었다. 가장 많은 주식을 보유한 대주주 4명 중 기노시다 모도지로(木下元次郞)가 대표, 야마무라 마사오(山村正夫)가 전무, 요시오카 시게도미(吉岡重實)와 시게도미 이하치(重富伊八)가 각각 취체역으로 참여하여 공동 경영되었다. 경영진 참여자들은 모두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와 부산에서 경제인으로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국제관은 상설 활동사진 영업을 주목적으로 하되, 활동사진 필름의 제조, 판매, 임대, 위탁 매매업도 할 수 있었고, 연극 및 제흥행 경영 중개업, 그리고 극장임대업도 가능하도록 허가되었다.

 

 

국제관 개관 시기는 부산 극장사의 초기가 마무리된 시기였다. 부산의 초기 극장은 8개로, 행좌(杏座사이와이자, 1903-1916)와 송정좌(松井座마츠이자, 1903-1911), 부귀좌(富貴座후키자, 1905-1907)와 부산좌(釜山座후산자, 1907-1923), 변천좌(辨天座벤텐자, 1912-1916), 동양좌(東洋座도요자, 1912?-1918?), 질자좌(蛭子座히루고자, 1912-1918), 욱관(旭館아사히칸, 1912-1916) 등이 그것이다.

 

이 극장들은 모두 일본의 구극과 신극을 주로 상연하던 연극장이었고, 각 극장의 존속 연대에도 보이듯이 이중 부산좌를 제외한 7개 극장이 폐관되거나 영화상설관으로 전환되었다. 송정좌와 부귀자, 질자좌와 욱관은 폐관되었고, 동양좌는 1916년 대흑관으로 바뀌었다가 1918년경 폐관되었다. 다만 행좌는 행관(1916-1930)으로, 변천좌는 상생관(1916-1945)으로 개칭되었다, 이중 욱관은 폐관되기 2년 전인 1914312일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해 부산에 활동사진 상영관 시대를 처음 열었다.

 

 

따라서 1918년경에는 부산좌와 보래관, 행관과 상생관의 4곳만 남았고, 부산좌만 연극과 영화 공용상영관으로 남았을 뿐, 나머지 3곳은 모두 새롭게 개관, 혹은 재개관된 활동사진 상설관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영화관람 수요가 다시 늘어나자 1920년대에 새로운 극장이 세워졌는데, 1920년의 국제관(國際館고쿠사이칸, 1920-1929), 1921년의 유락관(遊樂館유라쿠칸, 1921-1932), 1922년의 태평관(太平館타이헤이간, 1922-1943) 1924년의 수좌(壽座고도부키자, 1924-1945)가 개관해 총 8개의 극장과 공존하면서 다시 관객 경쟁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앞선 일본식 연극장 시기(1903-1914)와는 달리 활동사진 상설관 시기(1914-1928)로 이미 활동사진, 즉 영화의 공급이 확대되고 이를 관람하는 관객의 층도 두터워졌기 때문에 부산좌가 화재로 폐관된 것을 제외하고는 7개의 극장이 모두 상존(相存)하면서 극장계를 이끌어 나갔다.

 

 

8개 극장도 부산 초기극장 시기부터 보이던 역할 분담이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태평관은 일본전통의 가부키 극장이었고, 보래관과 행관, 상생관은 봇물 터지듯 시작된 활동사진 상설관이었다. 한편 부산좌와 국제관, 유락관과 수좌는 전통적인 일본의 구극과 신극은 물론 새로운 활동사진도 상영했을 뿐 아니라, 부산부 내의 각종 사회단체와 연예행사 등도 개최하는 전천후 극장이었다.

 

그러나 영화관으로서의 국제관은 당시 부산의 3대 상설 영화관인 보래관, 행관, 상생관에 비해 경영 실적이 뒤쳐졌고, 상영된 영화도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연극 공연장으로서는 부산좌와 함께 명성을 얻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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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상생관(相生館아이오이칸, 1916-1945)이 본정1정목 16번지(중구 동광동116번지)에 문을 열었다. 상생관의 극장주 미츠오 미네지로(滿生峰次郞, 1884~?)는 교야마 하나마루(京山花丸)로부터 인수받은 연극장 변천좌(1912-1916)를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19161031일에 활동사진 상설관 상생관을 개관한 것이다. 대지 95, 1,2층 총건평 165평으로 관람석은 1350, 2307, 입석 148, 805석이었다.

 

상생관의 외형장식은 매우 독특했다. 이형재 건축사무소 대표의 고증에 따르면 인조석으로 조각을 부각시켜 석조건물과 같은 느낌을 주도록 표현했으며 2층 열주는 이오닉형에 가까운 주두로 적은 공사비를 투입, 석조집의 모양을 낸 당대 제일의 미장공 솜씨를 뽐낸 건물이다. 로코코와 바로크, 르네상스풍이 가미된 절충식 건물이라고 할 수 있어 이런 유형은 대청동의 근대 역사관에서 조금 찾아볼 수 있다.

 

 

상생관은 1918년부터 닛카츠(日活), 1923년부터는 쇼치쿠(松竹) 영화사로부터 영화를 배급받아 오던 중 닛카츠 영화가 보래관으로 넘어가버리기는 했으나 파테사를 비롯하여 키스튼, 메트로 등의 외국영화를 상영하여 인기를 끌었다.

 

특히 상생관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가장 먼저 소개하면서 인기를 끌자 독식하다시피 상영했다. 1917428, 1권짜리 <채플린의 장난>을 시작으로 <권투>, <빵집>, <신문기자>, <괴잠정>, <사랑의 도피>, <연극>, 1918년 들어 <악우>, <남의 일에 질투>, <백작>, <가짜>, <지배인>, <칼멘>이 상영됐으며 그 후 <전선의 채플린>, <황금광시대>,<나무망치>, <키드>, <방랑시대>, <스케이트>, <전당포>, <데파트 성금>, <거리의 등불>, <거리의 대장>이 상영됐다.

 

상생관의 외관은 19251115일 개축공사에 의해 새롭게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보래관, 행관과 함께 부산을 대표했던 3대 극장의 하나였던 상생관은 1932212일 쇼치쿠 가마다(蒲田) 촬영소가 만든 발성영화 제1회 작품 <마담과 마누라>를 상영하면서 부산의 세 번째 발성영화 상영관이 되었다.

 

 

이후 상생관은 1934년 부산대교(영도다리) 개통에 이어 1936년에는 극장 건너편에 부산부청(시청)이 들어서면서 주변 환경의 변화로 시민들과 더욱 가깝게 근접할 수 있는 대중 문화공간으로 융성기를 맞이했다.

 

한편 상생관의 극장주 미츠오 미네지로는 1936년 오이케 겐지(大池)로부터 초량동 소재 중앙극장을 인수하여 극장 이름을 대생좌(大生座)로 바꾸고 모관 상생관에서 가까운 잇점을 살려 한 영화를 두 극장에서 동시에 개봉하는 방식으로 경영의 내실을 기했다. 그는 사업 영역을 대구와 서울 지역까지 넓혀 대구 신흥관과 서울 용산극장도 경영했다.

 

그러나 시설과 관객 수용에서 보래관, 행관보다 열세였기 때문에 상생관은 소화통 2정목에 부지를 확보하고 극장 신축을 시도했지만 실현되지 못한 채 광복을 맞았다. 1942년의 <조선의 영화상설관목록(소화17년 영화연감)>에는 대표가 미츠오(滿生忠雄)으로 교체되어 있다.

 

 

해방 후인 194611일 새로운 이름을 현상 공모하여 <대중극장(大衆劇場)>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4812월에는 <부민관(府民館)>으로, 한국전쟁기에는 임시수도 부산의 대표적인 개봉관으로 신작영화가 모두 이곳에서 상영, 2의 전성기를 누렸으나, 19538월에는 <시민관(市民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현대극장, 국제극장, 제일극장, 대영극장, 동명극장 등이 차례로 세워지면서 극장 시설의 노후로 2,3번관으로 전락했다가 결국 197661일 개관 60년 만에 문을 닫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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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보래관과 욱관이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한 이후 많은 연극장들이 차례로 그 뒤를 따랐다. 19151219일 행좌의 극장주 하사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는 시설이 노후된 연극장을 폐관하고, 주변의 땅을 더 사들여 총 120평의 대지 위에 르네상스 러시아풍과 일본풍의 절충양식으로 2층짜리 현대식 행관(幸館, 1916-1930)을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개관했다.

 

1922년 홋카이도 하코다테 출신의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 1892-)는 행관을 인수하는 한편 영화배급회사 <사쿠라바상회(サクラバ商會)>를 설립해 부산 지역을 포함하여 전 조선과 만주까지 영화 배급망을 구축했다. 그는 행관을 <1행관>, 영도의 수좌(壽座, 1924-1945)를 임대해 <2행관>으로 직영하면서, 일본의 도호영화제작소, 연합영화예술가협회, 동아키네마주식회사 등과 특약을 맺어 경성, 안동, 대련 등에도 출장소를 두어 영화 배급업무를 확대했다.

 

 

극장도 부산 <행관> 외에 경성의 <중앙관>, 평양의 <평양키네마>, 안동의 <전기관> 등은 임대 계약관으로, 울산의 <상반좌>, 대구의 <대송관>, 대전의 <대전관>, 목포의 <희락관>, 군산의 <희소관>, 이리의 <이리좌>, 원산의 <원산극장>, 해주의 <해주좌>, 청도의 <낙락관>, 대련의 <제국관>, 무순의 <보관>을 직영순업부로 운영했다.

 

사쿠라바 후지오는 영화 상영을 극장에만 국한하지 않고, 부산호텔이나 초량의 철도클럽, 신문사와 도청 등의 각 관청과 회사에까지 출장하여 영화 영사업을 개시하여 영업 전략을 다변화해 나갔다.

 

1929718일 행관은 부산 최초로 발성영화 상영시설을 갖추고 마키노 영화사가 제작한 발성영화 제1회작 <돌아오는 다리>를 상영하여 발성영화 상영관 시대를 열었다. 1927년 최초의 발성영화 미국의 <재즈싱어>가 나온 이후 2년만의 일이었으며,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만들어지기 6년 전의 일이었다.

 

행관은 행좌(1903-1915) 시기부터 소화관(1931-1945) 시기에 이르기까지 부산지역 극장사의 등뼈와 같은 존재였다. 가장 먼저 세워진 극장이면서, 대형극장화(1916)에 성공했고, 발성영화 상영(1929)의 선두주자 역할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배급망을 확대함으로써 전조선과 만주까지 영업했던 극장이기 때문이다.

 

 

행관은 19301110일의 화재로 소실됐다. <사쿠라바상회>의 지하실 영화필름 저장소에서 발생한 화재는 극장까지 전부 태웠고, 3천권의 필름을 포함, 30여만원의 피해를 입혔다. 부산부 당국으로부터 같은 장소의 극장 재건축을 허가받지 못한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19311231일 남빈정2정목 22번지(지금의 중구 창선동247번지)에 새로운 활동사진 상설관 소화관(昭和館쇼와칸, 1931-1945)을 개관했다.

 

대지 164평에 3층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진 소화관은 연건평이 344, 무대만도 25평의 널찍한 극장이었다. 관람석도 861(1932, 부산상공안내)으로, 층별로 등급석을 구별해 1층에는 2등석 475(남자 135, 여자 65, 가족 275), 2층에는 1등석 226(남자 71, 여자 35, 가족 120), 3층에는 3등석 160(남자 48, 여자 48, 가족 64)을 배치했다.

 

 

행관(1916-1930)과 함께 부산 극장가를 모양지었던 극장들은 13개를 헤아렸다. 행관의 개관 당시에는 이미 부산좌(1907-1923)와 변천좌(1912-1916), 동양좌(1912-1918)와 질자좌(1912-1918), 욱관(1912-1916)과 보래관(1914-1945)와 초량좌(1914-1917) 등의 7개 극장이 영업 중이었고, 행관 이후에 개관되어 동시에 존재했던 극장들로는 상생관(1916-1945)과 국제관(1920-1929), 유락관(1921-1932)과 태평관(1922-1943), 수좌(1924-1945)와 중앙극장(1930-1945) 등의 6개관이 있었다.

 

부산 최초의 극장인 행좌(1903-1915)와 최초의 발성영화 상연관 행관(1916-1930), 그리고 부산 최대극장 소화관(1931-1945)의 역사를 합친다면 이는 부산극장사의 등뼈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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