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중에 나는 이학동 선생님께 출생지를 여쭈어 보았다. 그분의 출생지에 대한 궁금증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인터뷰의 모든 질문은 육하(六何)를 파악하는 데에 집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중 언제어디서는 사건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며, 그런 배경에서 누가무엇을의 좌표가 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출생지를 묻는 질문에 이학동 선생님은 북문터라고 답변하셨다. 이 대답에 나는 의아했다. 북문은 지금의 북망문(北望門)을 가리킬 터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북망문은 국유지였을 것이다. 생가가 북문에 있었다니 이학동 선생님은 어떻게 국유지에서 태어나셨던 것일까?

 

추가 조사를 통해서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알 수 있었다. 이학동 선생님의 출생 당시인 1923년경 나주성곽의 북문은 헐리고 없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북문이 헐린 자리에는 주택들이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한 집이 이학동 선생의 생가였을 것이다.

 

 

일제강점 하에서 나주 성곽과 성문들은 모두 철거되었다. 특히 성문들은 도로망 건설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모두 헐렸거나 제 모습을 유지하지 못했다. 1913723일자 <매일신보(2)>는 나주읍민들이 간신히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남문을 허물지 말고 이를 개수하여 보수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제목) 나주남문(羅州南門) 보존희망(保存希望), (본문) 나주는 구일(舊日) 전남의 수도(首都)되었던 역사가 유()하여 성문 누각이 구시(舊時)의 성황(盛況)을 상기할 자가 불소(不少)한 바 현금에는 불편한 성벽은 태반(太半) 철거되고 광주가도에 과재(跨在)한 동대문은 왕년에 자연 후폐(朽廢)되어 일야풍우에 전부 도괴(倒壞)하고 지금은 기영(基影)을 지()할 뿐이오, 금우(今又) 시중에서 나주 정거장에 통하는 대도(大道)의 성벽을 실()하여 고성낙일(孤城落日)의 자(姿)를 정()하여 아직 도괴(倒壞)의 액()을 면하였으나 일조풍우(一朝風雨)에 제회(際會)할 시()는 자연 동문의 예를 불면(不免)하리라는 우려가 유()한데, 기보존법(基保存法)을 강구(講究)하여 고적(古蹟) 보존하기로 나주의 일반 인민이 희망한다더라.”

 

이 기사에는 나주의 북문(北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나주의 동문은 이미 무너져 있고, 남문조차 그 파괴된 상황이 심각하다고 서술한 것으로 보아, 서문과 북문은 1913년경 이미 그 유적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상태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원의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에 따르면 나주성에 대한 최초의 문헌기록은 <고려사(高麗史, 103)> 열전(16) ‘김경손(金慶孫)이다. 이연년의 난을 토벌할 때 나주에는 문루와 현문 형식의 성문을 갖춘 토축의 읍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종실록(太宗實錄)> 410월의 기사는 전라도에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성나주급보성(城羅州及寶城)’을 축성했다고 기록했다. 이후 문종 1(1451) 8월 병술조에도 나주읍성의 개축작업이 필요하다는 서술이 있고, 이 공사는 나주목사 김계희(金係熙, 재임, 14578-145911)이 완성했다.

 

이렇게 토성으로 축성되고 석축성으로 개축과 증축을 거듭한 나주성벽과 성문들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헐렸다. 왜구를 막으려고 축성된 나주성이 결국 일제에 의해 철거되고 만 것이다.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인 1920년경에 남고문을 마지막으로 읍성 및 4대문이 철거되고, 대부분의 읍성터는 대지나 밭, 그 밖의 지목으로 등록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매일신보(2)>의 기사에 따르면 그보다 7년 전인 1913년에 나주성의 동,,북문은 이미 일제에 의해 철거되고 남문만 남았다. 따라서 북문은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19108월과 남문만 남았다고 보도된 19137월 사이에 헐렸던 것으로 추론된다.

 

성문과 성벽이 철거된 후에 그 터가 대지로 등록되었다는 것은 주민들이 거기에 집을 짓고 살았다는 뜻인데, 이학동 선생의 생가가 바로 그 북문이 헐린 터, 혹은 그 일부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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