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백년을 살면서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자연에서야 거의 모든 게 그렇지만 인간에는 그런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강과 산 그 자체가 변한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이 손을 댄 것은 무엇이나 10년 정도의 세월로 변하게 마련이다. 요즘 문화적 세대 단위가 30년에서 10년으로 줄어든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데 강산이 10번쯤 바뀌는 동안에도 한결같이 그림을 그려온 분이 나주에 계신다. 청운(靑雲) 이학동(李學童, 1924-) 선생님이다. 해방 직후부터 서양화와 한국화를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해 오신 분이다. ‘까치를 잘 그리는 화가로 충남 연기 출신의 장욱진(1917-1990) 선생이 있지만, ‘무궁화를 잘 그리는 화가이학동 선생님은 전남 나주 출생이다.

 

 

84일 오후3시경 이학동 선생님을 인터뷰했다. 나주 과원동 16-1번지(영산로 6366번지) 소재 <청운 아틀리에>, 이학동 선생님의 화실에서였다. 인터뷰는 나주 시청 문화예술과의 윤지향 팀장이 마련했고 나주극장 문화재생 프로젝트 담당자 3사람이 동석했다. 또 인터뷰 후에 봉황면 욱실마을 숙소로 돌아갈 차편을 제공하기로 하신 김순희 선생도 참석했다.

 

인사를 나누고 소파에 앉으신 이학동 선생님은 허리가 굽으셨기 때문에 맞은편에 앉은 나를 올려다보셔야 했다. 그래서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나는 티테이블 아래로 내려가 바닥에 앉았는데, 그렇게 해서 이학동 선생님과 자연스레 시선을 맞출 수 있었다. 소파와 테이블 사이가 너무 좁아서 가슴에 압박이 약간 느껴지긴 했지만, 인터뷰를 시작하자 금방 이학동 선생님과의 대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날 인터뷰의 주제는 <나주극장>이기는 했으나 그에 앞서 선생님의 기초 인적 사항과 교우 범위에 대한 질문을 먼저 드렸다. 이학동 선생님은 자신이 1924년생이라고 하셨고, 태어나신 곳은 나주 북문터라고 하셨다.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추가 조사를 해보니, 이학동 선생님의 실제 생년은 1924년이 아니라 1923년이었다. 당시에는 영아 출생 후 1-2년을 기다렸다가 출생 신고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영아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생존이 확실해 진 다음에야 호적에 등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로써 이학동 선생님의 올해 연세를 백세라고 하는 이유도 분명해졌다. 1923년생이시라면 올해 세는 나이로 1백세가 되신 것이 맞다.

 

이학동 선생님의 공식 생년이 1924년이어서 손해 보신 일이 있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일제는 만20세가 된 갑자년(1924)생의 조선 청년들을 심각한 신체적 결함만 없으면 무조건 징병대상으로 삼았다. 이것이 묻지 마라 갑자생이라는 말이 생긴 이유였다.

 

국가기록원의 <강제동원자명부>에 이학동 선생님에 대한 기록이 남았는지 조사해 보았다. 일제는 중국침략과 함께 1938<국가총동원법>을 제정,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2004<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회청원자료에 의하면, 7,879,708(국내 6,126,180, 국외 1,390,063, 군인·군속 363,465)의 조선인이 강제 동원되었다.

 

 

조선인들은 어떤 역할로 강제 동원되었는지에 따라 노무동원(노동자, 군속, 근로보국대, 근로정신대 등), 병력동원(군인), 성동원(일본군위안부’, 10만 명 이상 동원)으로 구분되었는데, 이학동 선생님은 병력동원의 경우로 분류될 수 있다.

국가기록원의 <강제동원자명부>에는 14명의 이학동씨 이름이 등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1924년생 나주 출신의 이학동 선생님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이 <강제동원자명부> 작성에 사용되었던 <일정(日政)시 피징용자명부(전남 지역편, 57, 143, 229)>에는 3명의 이학동씨가 등재되어 있다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청운 이학동 선생님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기록의 원본에는 본적이나 주소가 없더라도 이름은 한자로 씌였을 것이므로 이학동 선생님의 기록인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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