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강변의 <왈츠와 닥터만> 방문 이후 우리는 그 웹사이트에 게재된 <카카듀> 에세이를 텍스트로 한국의 커피사를 되짚기 시작했다. 경성 최초의 조선인 커피전문점이었다는 <카카듀>가 있던 곳을 찾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고, 노다객 이헌구의 “경성 다방 성쇠기”는 훌륭한 첫 번째 나침반이 되어 주었다.
<카카듀>에 대한 “경성 다방 성쇠기”의 실마리는 유용했기 때문에 우리는 리서치를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카카듀>의 주소를 찾을 수 있었다. 자축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인사동으로 몰려가 그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카카듀>는 아직도 대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다. 우리가 <카카듀>에 대해 조금씩 알아갈수록, 오히려 새로운 의문이 늘어났다.
영화에 미쳐 있었던 이경손 감독이 어째서 갑자기 끽다점을 개업하게 되었는지, 공동 경영했다는 ‘하와이 출신의 묘령의미스 현’은 누구였는지, <카카듀>에는 왜 간판을 달지 않았는지, 그리고 어째서 그리 급하게 폐업을 했고, 이경손과 미스 현이 경성에서 사라졌는지...
이같은 의문들에 대한 대답은 아직도 발굴되지 않았지만, 다행히 우리는 시간이 있었고, 서두르지 않고 <카카듀>에 대한 사실들을 하나씩 찾아 나가 보기로 했다.
우리가 “경성 다방 성쇠기”를 섭렵한 것은 아니다. <카카듀>를 소개한 첫 부분에 집중했고, 일부의 기록을 다른 문헌과 비교하면서 제대로 해석하려고 노력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경성 다방 성쇠기”는 앞으로도 경성의 끽다점을 서술한 다른 글들과 함께 중요한 참고문헌으로 조사하게 될 것이다.
이번 리서치 경험을 통해서 “경성 다방 성쇠기”가 소중한 텍스트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읽고 해석할 때에 주의할 점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선 ‘사실’을 찾기 위해 필요한 육하(六何)가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점이었다. ‘누가’와 ‘무엇을’이 생략된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언제’와 ‘어디서’는 자주 누락되어 있곤 했다.
‘언제’와 ‘어디서’가 뚜렷하지 않은 것은 비단 노다객 이헌구의 글뿐 아니라 80여 년 전의 글들에 공통된 특징인 것 같았다. 물론 그 글들이 ‘논문’이 아니라 ‘에세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은 연구자들이 해야할 일이라는 점은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글쓴이들의 기억과 회상이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짧은 리서치를 통해서도 저자들이 당연한 것처럼 서술한 사항이 반드시 사실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었던 점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카카듀(1928)>와 <후타미(1926)>의 개업시기에 대한 노다객 이헌구의 기록은 정확하지 않았고, 각각의 위치도 대략적으로만 서술되어 있었다. 다행히 우리는 이헌구의 기록을 가지고 <카카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후타미>의 위치는 아직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저자가 <카카듀>와 <후타미>보다 더 이른 시기에 개업했던 <백림관>에 대해 몰랐거나 알았더라도 서술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가 <백림관> 이야기를 고의적으로 누락시킨 것은 아니겠지만, <후타미>와 <카카듀>를 경성 다방의 ‘원조’라고 단정한 것은 확실히 성급한 주장이었다. 그 결과로 80년 후에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문헌들이 그 잘못된 정보로 감염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계속할 <카카듀>와 <백림관>에 대한 조사는 ‘의심’에 바탕을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에 대한 실마리를 남겨준 저자들에게 감사하면서도 그들이 말한 것을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의심이 악의적인 것이 아님은 분명히 밝혀둘 수 있다. 우리는 다만 ‘사실’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