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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スリスク高麗人文化センター訪問えた一行バスにって市立公園(городском парке)かいました公園石像崔在亨先生古宅観覧するためでした

 

 

グーグルの地図ると文化センターから市立公園までは2キロウスリスクホテルからは1キロしかありません団体旅行でなければホテルから皆歩いてけるですウスリスクホテルが韓国人にとって本当便利宿だという意味でもあります

 

 

公園正門には市立公園かれていますが地図るとドラ公園(Парк ДОРА)となっていますドーラ(ДОРА)"ロシア軍将校官舎(дома офицеров Российской армии)"ですねかつてここにあった将校官舎地域市立公園わったようです

 

 

キム·ヴァレリア先生がわざわざここに案内したのは石像せるためでしたこの石像のためドーラ公園亀公園(парк черепах)ともばれています

 

 

なるほど石像巨大でどっしりしているだけでなく単純ながらも威厳があるようにえます直径2メートルを背中には石碑てられるほどきなられていましたしかし碑石はまいます一目でも古代遺物であることがかります

 

 

この石像市立公園保管していること屋根のある亭子てて石像露天放置されないようにしたことそしてゴマのような説明文2つもてられたことからウスリスク市当局がこの石像大切管理していることがかります

 

 

キム·ヴァレリア先生はこの石像渤海遺物とみているので訪問団にぜひご紹介したかったそうです韓国近代史だけでなく韓国史全般しい知識った朴漢龍先生甲羅まれた文様韓民族文様いと同意しましたこの分野にあまりらないただ石像きながら千年近歳月じるだけでした

 

 

しかしウスリスク当局極東学術界ではこの亀石像女眞(Черепаха чжурчжэней̆)びます女真族といえば靺鞨族末裔渤海国民だったのですからこの石像渤海関連しているという信念がそれほど間違っているわけではないでしょう

 

 

この石像1864にロシアの地理学者イノセンティ·ロパチン(Инокент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Лопатин, 1839-1909)がニコルスコイエ(=今日のウスリスク)めて発掘されました発掘当時石像2つありましたが1つは1896にハバロスクのグロデコブ(Гродеков)歴史博物館されもう1つはウスリスクにされてドラ公園安着しました

 

 

つの石像はいずれも直径2メートルさが6トンほどですが背中には石碑てるられていますハバロフスクの石像にはれた石碑根元一部残っていますがウスリスクの石像には発掘当時もすでに石碑がなかったそうです

 

 

ハバロフスクの亀石像石碑には文字痕跡っていますが毀損磨耗む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その考古学者研究により石像中国石像特徴くないことからこれを女真族13世紀石像推定しました

 

 

1960年代考古学者ビタリー·ラリチェフ(Виталий Ларичев, 1932-2014)碑文石像金國4代皇帝ワン·アンリャン(完顔亮)墓碑石像であることを推定しました

 

 

女真名はディグナイ(迪古乃)太祖完顏阿骨打(1068-1123)庶子である遼王宗幹次男3代皇帝熙宗完顔亶(1119-1150)して王位いたが彼自身反乱軍によって殺害され死後廃位されたです

 

 

面白いのはこの亀石像主人公推定されるディグナイの母親渤海王孫大氏だったというですしたがってロシア学界研究結果によるとしてもこの亀石像主人公渤海子孫だとえます(jc, 202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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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방문을 마친 일행은 버스를 타고 시립공원(городском парке)으로 향했습니다. 공원 안의 거북 석상과 최재형 선생의 고택을 관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구글 지도를 보니까 문화센터에서 시립공원까지는 약 2킬로미터, 우스리스크 호텔에서는 1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습니다. 단체여행이 아니었다면, 호텔에서 모두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곳들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우수리스크 호텔이 참 편리한 숙소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공원 정문에는 <시립공원>이라고 씌여 있지만, 지도를 보면 <도라 공원(Парк ДОРА)>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도라(ДОРА)러시아군 장교관사(дома офицеров Российской армии)”의 약자더군요. 한때 이곳에 있던 장교 관사 지역이 시립 공원으로 바뀌었나 봅니다.

 

 

김발레리아 선생께서 애써 이곳으로 안내하신 것은 거북석상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거북석상 때문에 도라 공원은 거북이 공원(парк черепах)으로 불리기도 한답니다.

 

 

과연 거북 석상은 거대하고 육중할 뿐 아니라 단순하면서도 위엄이 있어 보입니다. 직경이 2미터가 넘고, 등에는 비석이 세워질 수 있을만큼 큰 홈이 파여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석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한 눈에도 고대의 유물이라는 점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 거북석상을 시립공원에 보관하고 있는 점, 지붕있는 정자를 지어 석상이 노천에 방치되지 않게 한 점, 그리고 깨알 같은 설명문이 두 개나 세워진 것으로 미루어, 우수리스크 시당국이 이 거북석상을 소중하게 관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발레리아 선생은 이 거북석상이 발해 시기의 것이라고 보시기 때문에 방문단에 꼭 소개하고 싶으셨다고 합니다. 한국 근대사뿐 아니라 한국사 전반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신 박한용 선생도 거북 석상의 등에 새겨진 문양이 한민족 문양에 가깝다며 동의하셨습니다. 아는 게 별로 없는 저는 그저 거북석상을 손으로 쓸어보면서 1천년이 넘는 세월을 느껴볼 뿐이었습니다.

 

 

정작 우수리스크 당국과 극동 학술계에서는 이 거북석상을 여진 거북이(Черепаха чжурчжэней)라고 부릅니다. 여진족이라면 말갈족의 후예이고, 발해의 국민이었으므로, 이 석상이 발해와 관련되어 있다는 믿음이 그리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거북 석상은 1864년 러시아 지리학자 이노센티 로파틴(Инокент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Лопатин, 1839-1909)이 니콜스코예(=오늘날의 우수리스크)에서 처음 발굴했습니다. 발굴 당시 거북석상이 2개였는데 하나는 1896년 하바로스크의 그로데코브(Гродеков) 역사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하나는 우수리스크에 남겨져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도라 공원에 안착되었습니다.

 

 

두 개의 거북석상은 모두 직경이 2미터, 무게가 6톤쯤인데, 거북의 등에는 비석을 세울 홈이 파여 있습니다. 하바롭스크의 거북석상에는 깨진 비석의 밑둥이 일부 남아 있지만, 우수리스크의 석상에는 발굴 당시에도 이미 비석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바롭스크의 거북석상 비석에는 글씨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훼손과 마모로 읽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 고고학자들의 계속된 연구에 의해 거북석상에 중국 석상의 특징이 전혀 없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를 여진족의 무덤을 지키는 13세기의 석상으로 추정했습니다.

 

 

마침내 1960년대 러시아 고고학자 비탈리 라리체프(Виталий Ларичев, 1932-2014)가 비문을 읽어내어, 거북석상이 금()나라 4대 황제 완안량(完顔亮)의 묘비석상임을 추정했습니다.

 

 

그의 여진 이름은 디구나이(迪古乃), 태조 완안아골타(完顏阿骨打, 1068-1123)의 서자인 요왕종간(遼王宗幹)의 차남으로, 3대황제 희종(熙宗) 완안단(完顔亶, 1119-1150)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는데, 그 자신도 반란군에게 시해당하고 사후 폐위된 사람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거북석상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디구나이의 모친이 발해의 왕손 대씨(大氏)였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러시아 학계의 연구 결과에 따르더라도 이 거북석상의 주인공이 발해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jc, 202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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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スリスク高麗人文化センターの建物には碑石てられています沿海州事業家であり体育人社会運動家でもあったキム·ミハイル·イクノコビチャ(Ким Михаила Пяк-Ноковича, 1952-1998)える碑石です

 

 

訪問団一行碑石りをんで黃光石先生説明きました事業成功させた沿海州とロシア極東地域高麗人ディアスポラ社会発展貢献されただといましたはまたこの崔在亨先生のようなだったとえました

 

 

碑石もうとしましたがロシアからないので内容かりませんでした右上まれたミハイル先生のしっかりした姿左下にムクゲがまれていることから意志であり大韓民国連帯感っていただったのだ推測しただけです

 

 

わりに写真何枚っておきましたがでグーグルリングをしてみるためでした高麗人文化センター訪問えて移動するバスのでグーグル翻訳機碑文翻訳しました

 

 

Мне всегда хотелось жить по Н. Островскому - чтобы не было мучительно больно за бесцельно прожитые годы..." (はいつもオストロップスキーの言葉のようにきることをった。「目的もなくきてしまった歳月する苦痛しまないように...)

 

 

ニコライ·オストロフスキー(Николай Островский, 1904-1936)大学時代んだ小説鋼鉄はどのようにえられたか(Как закалялась сталь, 1932)著者です。「目的もなくきてきた歳月する苦痛まされないように…」<鋼鉄>23てくるフレーズですこのフレーズの前後をもうすとこうなります

 

 

人間にとって大切なものがはたった一度与えられるしたがって目的もなくきてしまった歳月する苦痛しめないように些細過去歴史にしがみついたずかしさにまれないようにそしてぬまですべての生命大切なことすなわち人類解放のための闘争がれるようにそうきなければならない結局生命滑稽病気悲劇的事故わってしまうこともありうるのではないかこのえにふけってコルチャギンは同志れた

 

 

ウスリスクの高麗人金ミハイル先生がオストロプスキーのこの言葉大事にしながらきてきたということにきます。 『鋼鉄自伝的小説なのでこれはすなわちオストロプスキーの人生要約した言葉でもあります。 『鋼鉄出版された過程容易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

 

ウクライナまれの12学校めた食堂従業員発電所見習などで労働者人生ロシア革命内戦参戦して脊椎負傷いました共産主義運動けましたが健康悪化してけなくなると自分経験にしました

 

 

1924、『鋼鉄草稿完成出版社りましたがこの原稿紛失しました1930 健康悪化ほぼ失明りましたがオストロフスキーは鋼鉄しました15までは自分きましたが以後口述代筆しました

 

 

1931101完成した原稿19筆跡ざっていたため自分著者であることを証明するために文献学的調査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19322完成して出版されるとオストロプスキーは人生無駄ではなかったったそうです

 

 

オストロプスキーを典範としてきたミハイル記念碑死後20ぶりの2018518(陰曆55端午)除幕されましたところがまだつやつの疑問っています

 

 

キム·ミハイル·イコノコビチャとなっていますが々はキム·ミハイル·ペトロヴィッチぶこともあります名前でしょうかそしてミハイル先生がどうして46さで他界したのかもになりますがいつかかることになるでしょう(jc, 202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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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20미터쯤 되는 지붕을 씌운 진입로가 있고, 그 초입에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연해주의 사업가이자 체육인, 사회운동가였던 김 미하일 이크노코비챠(Ким Михаила Пяк-Ноковича, 1952-1998)를 기리는 비석입니다.

 

 

방문단 일행은 비석 주위에 둘러서 황광석 선생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성공적으로 사업을 일군 후에 연해주와 러시아 극동지역의 고려인 디아스포라 사회의 발전에 공헌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 이분이 최재형 선생 같은 분이었다고 덧붙이셨습니다.

 

 

저는 비석의 글을 읽어보려 했으나 러시아어를 모르기 때문에 내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오른쪽 위에 새겨진 김 미하일 선생의 다부진 모습과 왼쪽 아래에 무궁화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의지가 강한 분이며 대한민국에 연대감을 가지셨던 분이었구나, 짐작했을 뿐입니다.

 

 

대신 사진을 여러 장 찍어 두었는데, 나중에 구글링을 해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려인 문화센터 방문을 마치고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구글 번역기로 비문을 번역했습니다.

 

 

"Мне всегда хотелось жить по Н. Островскому - чтобы не было мучительно больно за бесцельно прожитые годы..." М. Ким. (나는 언제나 오스트롭스키의 말처럼 살기를 원했다. “목적 없이 살아버린 세월에 대한 고통에 시달리지 않도록...” 미하일 김.)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이름이 나옵니다.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Островский, 1904-1936)는 저도 대학시절에 읽었던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Как закалялась сталь, 1930-1934)의 저자입니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 확인하려고 인용문을 찾아봤습니다. 역시 맞습니다. “목적없이 살아버린 세월에 대한 고통에 시달리지 않도록...”<강철>의 제23장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의 앞뒤를 조금 더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이다. 생명은 단 한번 주어진다. 그러므로 목적 없이 살아버린 세월에 대한 고통에 시달리지 않도록, 사소한 과거사에 매달렸던 부끄러움에 휩싸이지 않도록, 그리고 죽을 때에 모든 생명과 모든 힘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 즉 인류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쏟아지도록, 그렇게 살아야 한다. 결국 생명은 우스꽝스런 질병이나 비극적인 사고로 끝나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러한 생각에 잠겨서 코르챠긴은 동지의 무덤을 떠났다.“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김 미하일 선생이 오스트롭스키의 이 말을 간직하며 살았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강철>은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에 이는 곧 오스트롭스키의 삶을 요약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의 생애도 그랬지만, <강철>이 출판된 과정도 쉽지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 태생인 그는 12살 때 학교를 그만 둔 뒤, 식당 종업원과 발전소 견습공 등으로 노동자의 삶을 시작했고, 러시아 혁명과 내전에 참전해 척추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공산주의 운동을 계속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일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썼습니다.

 

 

1924<강철> 초고를 완성해 출판사에 보냈으나, 이 원고는 분실됐습니다. 1930년 그의 건강은 악화되고 거의 실명에 이르렀지만, 오스트롭스키는 <강철>을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1권의 5장까지는 자신의 손으로 썼지만, 이후에는 다른 사람이 그의 구술을 대필했습니다.

 

 

1931101권이 완성됐을 때, 원고에는 19명의 필체가 섞여있었으므로, 오스트롭스키가 저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문헌학적 조사를 거쳐야 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1932년에 제2권이 완성되어 출판되자, 오스트롭스키는 내 삶이 헛되지 않았다고 했다는 군요.

 

 

오스트롭스키를 전범으로 살았던 김 미하일 기념비는 그의 사후 20년만인 2018518(음력 55일 단오)에 맞춰 제막됐습니다. 그런데 아직 한두 의문이 더 남아 있습니다.

 

 

비문에는 그의 이름이 김 미하일 이코노코비챠로 되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를 김 미하일 페트로비치라고 부르더군요. 같은 이름일까요? 그리고 김 미하일 선생이 어째서 46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했는지도 궁금합니다만, 언젠가 알게 되겠지요. (jc, 202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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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スリスク高麗人文化センターの庭園には3つの独立運動家記念碑てられています文化センターののキロバ(Улица Кирова)んでけられた洪範圖安重根柳麟錫先生記念碑がそれです3とも抗日義兵としてまったという共通点があります

 

 

柳麟錫先生乙未事変いて断髪令ると18951224(陰曆)義兵活動開始洪範圖将軍1906砲手組織である砲連隊義兵隊再編抗日鬪爭めました安重根義士1907国債補償運動など愛国啓蒙運動展開その7正味7条約締結されると沿海州亡命ノブキエフスクとウラジオストクで義兵組織しました

 

 

安重根義士についてはただ同盟記念碑紹介しながら比較的詳しく調べたことがありますが洪範道将軍柳仁錫先生についてはしずつもっと調べる必要があります

 

 

洪範圖将軍19079日本銃砲及火薬類取締法公布砲手銃器回収しようとすると同年11砲手70山砲隊組織北清後置嶺日本軍撃破その甲山三水恵山豊山などで遊撃戦日本軍守備隊撃破しました

 

 

190810鴨緑江吉林省沿海州ウラジオストクの新韓村根拠地とし豆満江しながら日本軍攻撃しました庚戌国恥(19108)以降長白山鳳梧洞(19206)青山里(192010)きな戦果げました

 

 

間島惨事(1920-21)でロシア自由市移動ロシア革命内戦後共産党入党(1927)して活動しましたが強制移住(1937)でカザフスタンのキジラルダに定着高麗劇場管理人などとして勤務194376他界キジラルダの共同墓地埋葬されました

 

 

朝鮮1993洪範圖将軍平壌出身だということを根拠遺骨奉還みましたが高麗人社会反対霧散2021815韓国奉還され大田顕忠院埋葬されました

 

 

洪範圖将軍生涯後期共産主義者として活動したという韓国ではきちんと評価されませんでしたが1980年代愼鏞廈(シン·ヨンハ)先生研究本格的関心研究いています

 

 

一方柳麟錫先生義兵活動として1962建国功労勲章光復章(=大統領章)追叙されウスリスクの高麗人文化センターにも記念碑てられていますしかし柳麟錫先生活動たして大韓民国建国勲章叙勲根拠になるのかについては個人的疑問じました

 

 

柳麟錫先生まで儒学者中国皇帝朝鮮旧秩序回復主張しました義兵活動目的尊華攘夷つまり中国じて西洋蛮族排斥するということでした大韓帝国建国された朝鮮皇帝国僭称するのは道理するとして高宗年号光武使用せずくからびた中国年号使いました

 

 

実際義兵活動でも柳麟錫先生提川郡守金益珍忠州観察士金奎植天安郡守金炳塾などを殺害したが断髪令施行したというのが理由でした日本軍との戦闘では毎回敗堤川敗北(1896)には西間島中国軍閥によって武装解除されました

 

 

沿海州義兵再結集した19106柳麟錫13道義軍都総裁推戴されましたが武力抗争開始前庚戌国恥13道義軍日帝干渉けたロシア政府によって解散しました

 

 

その柳麟錫すべての士人間島中国する義理ってという意味守華終身主張彼自身19143中国西間島奉天省西豊県亡命その後関電県方取区そこで死亡しました率先して手話終信をしたのです

 

 

柳麟錫先生沿海州時代高麗人同胞たちの内的葛藤縫合13道義軍結成寄与した肯定的なのでウスリスクの文化センターに記念碑てられたのはそれなりに意味がない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行跡大韓民国光復のために神名げた安重根義士洪範圖将軍匹敵するとは見難いというじをうことができません(jc, 202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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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 정원에는 세 개의 독립운동가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문화센터 옆의 키로바 거리(Улица Кирова) 쪽 담장 앞에 나란히 마련된 홍범도, 안중근, 유인석 선생의 기념비가 그것입니다. 세 사람은 모두 항일 의병으로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유인석 선생은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내리자 18951224(음력) 의병활동을 개시했고, 홍범도 장군은 1906년 포수 조직인 포연대를 의병대로 재편, 의병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 등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그해 7월 정미7조약이 체결되자 연해주로 망명, 노브키에프스크와 블라디보스톡에서 의병을 조직했습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는 단지동맹 기념비를 소개하면서 비교적 자세히 살핀 적이 있지만, 홍범도 장군과 유인석 선생에 대해서는 조금씩만 더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19079월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기를 회수하려하자 그해 11월 포수 70명으로 산포대(山砲隊)를 조직, 북청 후치령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이후 갑산, 삼수, 혜산, 풍산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습니다.

 

 

190810월 압록강을 건너 길림성을 거쳐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을 근거지로 삼아,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본군을 공격했습니다. 경술국치(19108) 이후에는 장백산으로 옮겨 봉오동 전투(19206)와 청산리 전투(192010)에서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간도참변(1920-21)으로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 러시아혁명과 내전 후에는 공산당에 입당(1927)해 활동했으나, 강제이주(1937)로 카자흐스탄 키질로르다에 정착, 고려극장의 관리인 등으로 근무하다가 194376세로 타계, 키질로르다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조선은 1993년 홍범도 장군이 평양 출신이라는 점을 근거로 유해 봉환을 시도했으나 고려인 사회의 반대로 무산, 2021815일 한국으로 유해가 봉환되어 대전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생애 후기에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다는 점 때문에 한국에서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으나, 1980년대 신용하 선생의 연구로 본격적인 관심과 연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편, 유인석 선생은 의병활동으로 1962년 건국공로훈장 광복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우수리스크의 고려인문화센터에도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유인석 선생의 활동이 과연 대한민국의 건국훈장 서훈의 근거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의문이 생겼습니다.

 

 

유인석 선생은 뼛속까지 유학자였고, 중국 황제를 받들고, 조선 왕을 모시면서, 구질서 회복을 주장했습니다. 의병활동의 목적도 존화양이(尊華攘夷), 즉 중국을 받들고 서양오랑캐를 배척한다는 것이었지요. 대한제국이 건국된 다음에도 조선이 황제국을 참칭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며, 고종의 연호 광무를 사용하지 않았고, 오래전에 망한 중국 명나라 연호를 썼습니다.

 

 

실제 의병활동에서도 유인석 선생은 제천군수 김익진, 충주 관찰사 김규식, 천안군수 김병숙 등을 살해했는데 단발령을 시행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는 매번 패했고, 제천 패배(1896) 후에는 서간도로 건너갔다가 중국 군벌에 무장해제를 당했습니다.

 

 

연해주 의병이 결집되었던 19106, 13도의군의 도총재로 추대되었으나, 무력항쟁 개시하기 전에 경술국치를 맞았고, 13도의군도 일제 간섭을 받은 러시아 정부에 의해 해산됐습니다.

 

 

이후 유인석은 모든 선비들은 간도로 건너와 중국에 대한 의리를 지키다가 죽어라는 뜻의 수화종신(守華終身)을 주장했고, 그 자신도 19143월 중국 서간도 봉천성 서풍현으로 망명, 이후 관전현 방취구로 옮겼다가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솔선해서 수화종신을 한 것이지요.

 

 

유인석 선생이 연해주 시절, 고려인 동포들의 내적 갈등을 봉합하고 13도의군 결성에 기여했던 점은 긍정적이므로, 우수리스크의 문화센터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진 것은 나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그의 행적이 대한민국의 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친 안중근 의사와 홍범도 장군에 필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jc, 202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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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スリスクの高麗人文化センターには歴史展示館けられています1860年代高麗人沿海州初期定着時期以来高麗人移住史各種資料紹介される展示館です

 

 

高麗人歴史館展示きく3つの部分けられます(1) 19世紀以前高麗人生活文化史(2)高麗人抗日闘争史そして(3)高麗人アリランなどがそれです展示空間沿海州高麗人らしと歴史物品写真動画など資料160点余りでられていますが19世紀高麗人使った神仙炉キセルスプーンなどもることができます

 

 

高麗人歴史館200910東北アジア平和連帯支援でオープンしましたが当時展示内容強制移住抗日闘争中心でしたしかし201612移住初期資料最近時期資料補強歴史館展示内容包括的改善されたといいます

 

 

高麗人移住史初期定着期1864-1905独立運動とロシア革命期1905-1923)、そしてソビエト時代1923-1937高麗人にとって苦難時期でしたしかしこの時期にも高麗人韓民族文化民族芸術大切にしながら苦難ちました

 

 

これは高麗人歴史館のアリラン資料室ればよくかります調和した韓民族であり韓民族文化根幹をなすアリランするくの資料展示されていますがそのにはアリランを収録した各種民謡集歌謡本いです

 

 

ところが歴史館のアリラン関連資料展示書架にびっくりするような資料がありました崔承喜先生公演パンフレットです韓国ではもちろん日本取材のためにれた49都市のどの図書館記録保管所でもつ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い公演プログラムです

 

 

崔承喜公演資料をウスリスクの高麗人歴史館発見するとはとてもきでどうしていいのかかりませんでした訪問団員んでこの資料紹介するとみんな不思議がってパンフレットと一緒写真りました

興奮まり疑問かびましたこの公演パンフレットがなぜアリラン資料として展示されているのかということで番組収録されている演目をじっくりんでみました

 

 

この公演第26番目作品<アリランの旋律>ですアリランの旋律編曲してチェ·スンヒが自分弟子キム·ミンジャとデュエットで公演した作品ですチェ·スンヒ先生もアリランの末裔でありアリランにわせて朝鮮舞踊創作した芸術家だったのです

 

 

これまでめてきた調査内容によると崔承喜先生はサハリンで公演したことがありましたが沿海州では公演したことがありませんでしたところでどのようにして崔承喜先生公演プログラムがウスリスクの高麗人歴史館展示されたのだろうか

 

 

パンフレットの表紙ると1937220-21京城府民館かれた公演のパンフレットです当時崔承喜先生世界巡回公演準備していました番組表紙にも"渡歐告別"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ヨーロッパにって巡回公演をする故国のファンにれの挨拶をする公演という意味です

 

 

そうするとまた疑問じます1937ソウル公演のパンフレットがどのようにウスリスクまでってきて20245高麗人歴史館書架展示されているのだろうか

 

 

歴史館のキュレーターにってこのプログラムの移動経路(provenance)ねなければなりませんが担当者出勤せず訪問団一行もすぐに文化センターをれて訪問地か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崔承喜パンフレットの移動経路調査後日宿題となりました

 

 

今回訪問目的<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安定発展方案模索することですが高麗人歴史館発見した崔承喜先生京城公演パンフレットのせいで今回訪問意味10えたようなごわいじでした(jc, 202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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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의 고려인문화센터에는 역사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1860년대 고려인의 연해주 초기정착 시기이래 고려인 이주사를 보여주는 각종 자료가 소개되는 전시관입니다.

 

 

고려인역사관의 전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 19세기 이전 고려인의 생활문화사, (2) 고려인의 항일투쟁사, 그리고 (3) 고려인의 노래 아리랑 등이 그것입니다. 전시 공간은 연해주 고려인의 삶과 역사를 보여주는 물품과 사진, 동영상 등 자료 160여 점으로 꾸며져 있는데, 19세기에 고려인들이 사용했던 신선로, 담뱃대, 수저 등도 볼 수 있습니다.

 

 

고려인역사관은 200910월 동북아평화연대의 지원으로 문을 열었는데, 당시 전시 내용은 강제이주와 항일투쟁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201612월 이주 초기의 자료와 최근 시기의 자료들을 보강해 역사관의 전시 내용이 포괄적으로 개선됐다고 합니다.

 

 

고려인 이주사의 초기정착기(1864-1905)와 독립운동과 러시아혁명기(1905-1923), 그리고 소비에트 시기(1923-1937)는 고려인에게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고려인은 한민족의 문화를 지키고 예술을 간직하면서 고난을 견디고 이겼습니다.

 

 

이는 고려인역사관의 아리랑 자료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한과 흥이 어우러진 한민족의 노래이자 한민족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아리랑에 관한 많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아리랑을 수록한 각종 민요집과 가요책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역사관의 아리랑 관련자료 전시 서가에 깜짝 놀랄만한 자료가 있었습니다. 최승희 선생의 공연 팜플렛입니다. 한국에서는 물론 일본 취재를 위해 방문했던 49개 도시의 어떤 도서관이나 기록보관소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희귀한 공연 프로그램입니다.

 

 

최승희 공연 자료를 우수리스크의 고려인역사관에서 발견하니, 너무 놀랍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다른 방문단원을 불러서 이 자료를 소개하자, 다들 신기해하면서 팜플렛과 함께 사진들을 찍었습니다.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이 공연 팜플렛이 왜 아리랑 자료로 전시되어 있을까? 그래서 프로그램의 안쪽에 수록된 공연의 연목들을 찬찬히 읽어봤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공연 제2부의 여섯 번째 작품의 제목이 <아리랑의 선율>입니다. 아리랑을 편곡해서 최승희가 자신의 제자 김민자와 듀엣으로 공연한 작품입니다. 최승희 선생도 아리랑의 후예이자, 아리랑에 맞춰 조선무용을 창작했던 예술가였던 것이지요.

 

 

그동안 제가 진행해 온 조사내용에 따르면, 최승희 선생은 사할린에서 공연한 적이 있었지만, 연해주에서는 공연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최승희 선생의 공연 프로그램이 우수리스크의 고려인역사관에 전시된 것일까?

 

 

팜플렛 표지를 보니까, 1937220-21일에 경성 부민관에서 열렸던 공연의 팜플렛입니다. 당시 최승희 선생은 세계 순회공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프로그램의 표지에도 도구고별(渡歐告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럽으로 건너가서 순회공연을 하기 전에 고국의 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공연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또 의문이 생깁니다. 1937년 서울 공연의 팜플렛이 어떻게 우수리스크까지 건너와서 20245월에 고려인역사관의 서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일까.

 

 

이는 역사관의 큐레이터를 만나 이 프로그램의 이동경로(provenance)를 물어야 하는 문제이지만, 담당자는 출근하지 않았고, 방문단 일행도 이내 문화센터를 떠나 다음 방문지로 향해야 했습니다. 최승희 공연 팜플렛의 이동경로 조사는 후일을 기약할 숙제가 되었습니다.

 

 

이번 방문의 주요 목적이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의 안정과 발전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지만, 고려인역사관에서 발견한 최승희 선생의 경성공연 팜플렛 때문에 이번 방문의 의미가 열배로 늘어난 것 같은 벅찬 느낌이었습니다. (jc, 202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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旅程3日目516最初訪問地はウスリスク市内高麗人文化センターです宿ウスリスクホテルではホテルのネクラコバ大通(Улица Некрасова)沿って1キロだけけばてくるいところですいても15けば5分以内きます

 

 

グーグル地図高麗人文化センター(Корейский культурный центр)検索することができず、「住所(Амурская улица, 63)入力して位置せてくれますがロシアの地図ドゥバ-ジーアイエス(2GIS)高麗人文化センターをキーワードとして登録しておきました

 

ネクラコバ(Некрасова)とアムールスカヤ(Амурская)出会地点にペキン(Пекин)公園がありその高麗人文化センターというはグーグル地図していますところが2GIS文化センターの庭園設置された洪範圖柳麟錫安重根記念碑まで表示しますきです

 

 

いわば2GIS韓国のネイバー/カカオ程度地図ですがなるがあるとすれば2GISがグーグルはもちろんネイバー/カカオより性能がはるかにロシアだけでなく大部分CIS国家とイタリアチェコチリサイプレスなどでもじるというですがサイプレスにくことはなさそうですが中央アジアやヨーロッパなどではちそうです

 

 

しばらくiPhone2GIS使う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20229ロシアのウクライナ侵攻口実米国西欧諸国がロシアに制裁その一環としてロシア企業2GISiPhoneApp Storeからしたためです

 

 

2GISのダウンロードと使用可能なことをればその制裁解除されたものとられますそうですね戦争対決毛細血管のように一般人生活々にまで影響ぼしますこのくしようとしたわけじゃないんだけど2GIS性能感心しすぎて···^^

 

 

高麗人文化センターは2004高麗人沿海州移住140周年記念して建設決定されその後約5建築過程20091031開館しました

 

 

敷地3千坪建坪12百坪2階建てで建築された高麗人文化センターには事務室会議室図書室移住歴史館ハングル教室とマルチメディアなどがけられており野外には多目的公演場えられておりウスリスク高麗人行事中心となっています

 

 

高麗人文化センターは高麗人自負心根拠でもあります20167慶尚大学新聞とのインタビューで当時ウスリスク高麗人民族文化自治会(Национально-культурной автономии корейцев города Уссурийска)副会長であり高麗人文化センターとして在任中だったキム·ヴァレリア先生、「ロシアの158少数民族のうち高麗人のように自分たちのためのための建物少数民族がいないとし文化センターにする自負心表現しました

 

 

またキム·ヴァレリア先生高麗人子供たちがSNSやインターネットに写真せる文化センターをたちの2番目とし文化センターを訪問するには自信って行動自分のようにじるのでここがたちにとって非常重要強調しました。。

 

 

キム·ヴァレリア先生はまた2018京仁日報った会見高麗人文化センターが建設される高麗人歴史文化について両親からいたことがすべてだったがここができた高麗人自分のルーツについてしく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しています

 

 

高麗人文化センターは韓国同胞沿海州同胞をつなぐ役割たしてきましたキム·ヴァレリア先生じインタビューで文化センターをれた韓国人201616千人20173万人でしたが今年2018先月7までに3万人れたとし韓国人韓国政府高麗人文化センターに関心ってくれて感謝気持ちをっているえました

 

 

はまた韓国人高麗人国籍うが歴史っているとし高麗人文化センターが今後韓国人高麗人のつながりになることを期待しているべました(jc, 202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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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 사흘째인 516, 첫 방문지는 우수리스크 시내의 고려인문화센터입니다. 숙소 우수리스크 호텔에서는, 호텔 앞길 네크라코바 대로(Улица Некрасова)를 따라 북쪽으로 1킬로미터만 가면 나오는 가까운 곳입니다. 걸어도 15, 차로 가면 5분 이내에 도착합니다.

 

 

구글 지도에서는 고려인문화센터(Корейский культурный центр)”라는 이름으로는 위치를 찾을 수 없고, 주소(Амурская улица, 63)를 입력해야 위치를 보여주지만, 러시아의 인터넷 지도 두바-지아이에스(2GIS)는 고려인문화센터를 키워드로 등록해 두었습니다.

 

네크라코바(Некрасова)와 아무르스카야(Амурская)가 만나는 지점이 페킹 공원(Парк Пекин)이고, 그 옆이 고려인문화센터라는 점은 구글 지도도 보여줍니다. 그러나 2GIS는 문화센터 정원에 설치된 홍범도, 류인석, 안중근 기념비까지 표시해 주고 있네요. 감탄입니다.

 

 

말하자면 2GIS는 한국의 네이버/카카오쯤 되는 지도이겠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구글은 물론 네이버/카카오보다 성능이 훨씬 좋고, 러시아뿐 아니라 대부분의 CIS국가들과 이탈리아, 체코, 칠레, 사이프러스 등에서도 통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사이프러스 갈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중앙아시아나 유럽 등지에서는 유용할 듯합니다.

 

 

한동안 아이폰에서 2GIS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20229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빌미로 미국과 서유럽국들이 러시아에 제재를 가했고, 그 일환으로 러시아 기업 2GIS를 아이폰의 앱스토아(App Store)에서 축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2GIS의 다운로드와 사용이 가능한 것을 보면, 그 제재는 풀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게 전쟁과 대결은 모세혈관처럼 일반인들의 생활 구석구석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암튼, (이 얘기를 길게 하려던 것은 아닌데, 2GIS의 성능에 너무 감탄한 나머지...^^)

 

 

고려인문화센터는 2004년 고려인의 연해주 이주 14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이 결정되었고, 이후 약 5년의 건축과정을 거쳐 20091031일 개관됐습니다.

 

 

대지 3천평, 건평 12백평에 2층 건물로 건축된 고려인문화센터에는 사무실과 회의실, 도서실과 이주역사관, 한글교실과 멀티미디어실 등이 마련되어 있고, 야외에는 다목적 공연장도 구비되어 있어, 우수리스크 고려인 행사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고려인문화센터는 또 고려인들의 자부심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20167월 경상대신문과 가졌던 인터뷰에서 당시 우수리스크 고려인 민족문화 자치회(Национально-культурной автономии корейцев города Уссурийска)의 부회장이자 고려인 문화센터장으로 재임 중이던 김발레리아 선생은 러시아의 158개의 소수민족 가운데 고려인처럼 자신들을 위한 건물을 가진 소수민족이 없다면서 고려인문화센터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했습니다.

 

 

또 김발레리아 선생은 고려인 아이들이 SNS나 인터넷에 사진을 올릴 때 문화센터에서 찍은 사진은 우리의 두 번째 집이라고 쓴다면서 아이들이 문화센터를 방문할 때에는 자신감있게 행동하고 자기 집처럼 느끼기 때문에 이곳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김발레리아 선생은 또 2018년 경인일보와 가졌던 회견에서 고려인 문화센터가 건립되기 전에는 고려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부모님으로부터 전해들은 것이 전부였지만 "이 곳이 생긴 후에는 고려인들이 자신의 뿌리에 대해 올바로 알 수 있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고려인문화센터는 한국 동포와 연해주 동포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도 해왔습니다. 김발레리아 선생은 같은 인터뷰에서 문화센터를 방문한 한국인은 2016년에 16천명, 2017년에 3만명이었고, 올해(2018)는 지난달(7)까지 3만명이 방문했다면서 한국인과 한국 정부가 고려인 문화센터에 관심을 가져 주는 것에 고려인들은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또 한국인과 고려인은 국적은 다르지만 같은 역사를 갖고 있다"면서 "고려인문화센터가 앞으로도 한국인과 고려인의 연결 고리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jc, 202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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夕食では今後<舞踊靴><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交流協力する方法われました民族学校直面しているしい現実をどう打開するかがわれました

 

 

<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状況楽観的ではありません1930年代まで沿海州のあちこちには340高麗人学校てられ次世代民族教育万全すことができましたが<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沿海州つだけの政府公認学校です

 

 

民族学校高麗民族後援設立され維持さ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が1930年代とは今日高麗人社会人口なく財政不足していますかつては沿海州人口41高麗人だったほど同胞農業商業きな財産いた高麗人なくありませんでしたしかもらは民族教育のために土地人材しみなく寄付したりしました

 

 

しかし沿海州事情います高麗人人口5万人沿海州全人口2百万人2010年国勢調査3%しませんまたそのくが中央アジアから最近移住された々なので高麗人社会民族資本形成されていない段階です

 

したがって民族教育文化芸術基盤用意されるためには韓国同胞支援重要時期です2010年代末までは韓国人旅行客年間100万人韓国自治体現地公館高麗人社会後援するためにくの努力けたということです

 

 

しかし2020からまったコロナ2022から本格化したロシア·ウクライナ戦争韓国·ロシアの交流急激りました仁川-ウラジオストクの航空便東海/束草-ウラジオストクの旅客船運航中断され韓国同胞沿海州旅行りつきました

 

韓国支援交流途絶沿海州高麗人社会全般低迷しましたがにロシア唯一高麗人民族学校である<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きな打撃けましたついに2023年末には校舎賃貸費用用意できず廃校危機直面しました

 

 

このニュースをいた<舞踊靴>李高恩先生主導民族学校緊急救済のための募金運動展開13百万ウォンの後援金しましたこれにより<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廃校危機して一息つきながら1年間猶予期間ることになったといいます

 

キム·ヴァレリア-キム·バレンチン先生夫妻この機会さないために民族学校中長期発展計画樹立めました。 「舞踊靴訪問団ウスリスクをしたのもその発展計画についてしく実質的方法模索するためでした

 

 

この中長期発展計画核心はの高麗劇場(仮称)設立です民族学校教師賃貸建物なので維持しく<アリラン歌舞団><花郎太鼓チーム>練習公演ちません。「高麗劇場設立劇場一部学校として使用することが合理的だという結論でした

 

 

また劇場つことになれば民族学校のすべての行事費用なしでうことができ<アリラン><ファラン>公演のたびに費用をかけて劇場りなければならないわしさをけることができるうえさらにこの劇場公演団体貸与できるようになれば学校財政役立つといいます

 

 

はこの方面専門家ではありませんのでこの計画適正性実現可能性評価する立場にはありませんしかしキム·バレリア先生芸術経営学専攻されまで30年余りその方面いてこられたのでその眼目企画尊重したいというえです

 

 

したがって韓国<舞踊靴>とその姉妹団体キム·ヴァレリア先生<高麗劇場>プロジェクトが実現するように協力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ますそれが<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安定発展機会とし沿海州韓国語教育民族芸術教育使命動揺せずに担当していけるようにけるだとっていま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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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 자리에서는 <무용신><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가 교류하고 협력할 방법도 의논되었습니다. 주로 민족학교가 처한 어려운 현실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가 논의됐지요.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의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1930년대까지 연해주 곳곳에는 약 340개의 고려인 학교가 세워져서 다음 세대의 민족교육에 만전을 기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가 유일한 정부 공인 학교입니다.

 

 

민족학교는 고려민족의 후원으로 설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는데, 1930년대와는 달리 오늘날의 고려인 사회는 인구도 적고 재정도 부족합니다. 과거에는 연해주 인구의 4분의1이 고려인이었을 만큼 동포들이 많았고, 농업과 상업으로 큰 재산을 모은 고려인도 적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민족교육을 위해 땅과 돈과 인력을 아낌없이 기부하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연해주의 사정이 다릅니다. 고려인 인구가 약 5만명으로 연해주 전체인구(2백만명, 2010년 센서스)3%에 미치지 못합니다. 또 그중 많은 수가 중앙아시아에서 최근에 이주하신 분들이기 때문에, 고려인 사회에 민족자본이 형성되지 못한 단계입니다.

 

따라서 민족교육과 문화예술의 기반이 마련되려면 한국동포의 지원이 중요한 시기입니다. 다행히 2010년대 말까지는 한국인 여행객이 연간 1백만명에 이르렀고, 한국 지자체와 현지 공관들도 고려인 사회를 후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 사태와 2022년부터 본격화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한국-러시아의 교류가 급격하게 줄었습니다. 인천-블라디보스톡의 항공편과 동해/속초-블라디보스톡의 여객선의 운항이 중단되어, 한국 동포들의 연해주 여행은 얼어붙었습니다.

 

한국의 지원과 교류가 끊기면서 고려인 사회 전반이 침체되었는데, 특히 러시아 유일의 고려인 민족학교인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도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급기야 2023년 말에는 학교 건물의 임대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폐교 위기에 봉착했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무용신>은 이고은 선생의 주도로 민족학교 긴급 구제를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 13백만원의 후원금을 전달할 수 있었고, 이로써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는 폐교의 위기를 벗어나 한숨 돌리면서, 1년간의 유예기간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발레리아-김발렌친 선생 부부께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민족학교 중장기 발전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용신> 방문단이 우수리스크를 찾은 것도 그 발전계획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였지요.

 

 

이 중장기 발전계획의 핵심은 민족학교 부설 <고려극장(가칭)>의 설립으로 모아집니다. 지금의 민족학교 교사는 임대건물이어서 유지가 어렵고, 민족학교 부설 <아리랑 가무단><화랑 모듬북 팀>의 연습과 공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고려극장>을 설립하고, 극장의 일부를 학교로 사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신 것이지요.

 

 

또 극장을 가지게 되면 민족학교의 모든 행사를 비용없이 치를 수 있고, <아리랑><화랑>의 공연 때마다 비용을 들여 극장을 빌려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는데다가, 나아가 이 극장을 다른 공연 단체에 대여할 수 있게 되면, 학교 재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나는 이 방면의 전문가가 아니므로 이 계획의 적실성이나 실현가능성을 평가할 위치는 아닙니다. 그러나 김발레리아 선생은 예술경영학을 전공하셨고,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그 방면에서 일해 오셨기 때문에 그분의 안목과 기획을 존중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무용신>과 그 자매단체들은 김발레리아 선생의 <고려극장> 프로젝트가 실현되도록 협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가 안정을 찾고 발전의 기회로 삼아, 연해주의 한국어 교육과 민족예술 교육의 사명을 흔들림없이 계속 담당해 나갈 수 있게 돕는 길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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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学生たちが準備した舞踊太鼓公演観覧してから訪問団宿所<ウスリスクホテル(Гостиница Уссурийск)>ってチェックインからしました

 

 

ウスリスクの中央路であるネクラソバ(Некрасова, д. 64大通沿いに位置するこのホテルはウスリスクでいホテルであり130客室つウスリスク最大のホテルだそうです

 

 

ホテルのチェックインはしましたが客室までがる時間はありませんでした夕食予約した時間がすでにぎていたからですホテルのスタッフの協力てロビーの片隅一行のスーツケースをめておくことにし一行びバスに食堂かいました

 

 

夕食場所きな中華料理店だったのですがその社長がキム·ヴァレリア-キム·バレンチン先生夫婦友人だとおっしゃっていました二人がタシケントからウスリスクに移住されて35にもなりますので主要食堂との関係緊密だといますが高麗人同胞ならもっとしくなれるといますこの食堂いてからりましたが一行がクラスキーノの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べた昼食もこの食堂注文されたものだそうです

 

 

たちは20人余りがゆったりれる大型円形テーブルをんでターンテーブルのがりめました中華料理店だとっていましたが料理のほとんどは韓国式でしたキムチはもちろんいろんなナムルがてきました

 

 

この夕食ではめて本格ウォッカをわうことができました食堂社長推薦によって<ベルーガ(белу́га)>ブランドのウォッカが数本テーブルにがったのですが食事とともにみんなベルーガを数本先輩としてみました李黃徽先生"理想"乾杯音頭本当魅力的でしたね

 

 

もちろんこの食事だけではなく<舞踊靴><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にしためての公式晩餐でしたそこで訪問準備団(黃光石朴美賢李高恩)はキム·ヴァレリア先生夫婦招請する感謝準備夕食伝達しました

 

 

準備団特別公演準備してくれた学生教員にもプレゼントを用意しました学生たちがどんなプレゼントがしいかいたら韓国のフードTシャツがしかったそうですそれでフードTシャツを準備してしました準備団がどれほど細心注意っていたかがわかります

 

 

食事をほとんどえてみんなベルーガでれがらいだ林尙澤先生誕生日いました生徒たちがプレゼントしたケーキを食堂ってきたので誕生日って林尙澤先生がケーキをって一切れずつりましたはおがいっぱいでしたがロシアのバースデーケーキはどういうなのかになってしだけわってみようとったのですが意外くて二切れもべました

 

 

食事わってテーブルがおおよそ片付くと余興まりました朴仁浩先生がサックスの演奏雰囲気宴会場けられたカラオケの機械まで動員してったりわせてったりしました

 

 

キム·ヴァレリア先生ロシアの夕食外食はだいたい音楽とダンスがえられるものだとっていましたこの晩餐会料理韓国式演奏韓国がほとんどでしたがりだけはロシアぐようになりましたとお音楽そして物語相次いだしい時間でした

 

 

食事わって一行宿舎りましたがそれで一日わ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中国てロシアにってきた初日目的地ウスリスクに無事到着したうえに学生たちのかい歓迎けたためいムードがくなり時間まで飲酒歌舞きました

 

 

残念ながらおがとても食事一緒んだウォッカ何杯かでそのままれてたのでその幻想的りに参加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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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에서 학생들이 준비한 무용과 모듬북 공연을 관람하고 나서, 방문단은 숙소 <우수리스크 호텔(Гостиница Уссурийск)>로 가서 체크인부터 했습니다.

 

 

우수리스크의 중앙로인 네크라소바(Некрасова, д. 64) 대로변에 위치한 이 호텔은 우수리스크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이면서, 130개의 객실을 가진 우수리스크의 최대 호텔이라고 합니다.

 

 

호텔 체크인은 했지만, 배정된 객실까지 올라갈 시간은 없었습니다. 저녁식사를 예약한 시간이 이미 지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텔 직원의 협조를 얻어 로비 한 켠에 일행의 가방을 한데 모아두기로 하고, 일행은 다시 버스에 올라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저녁식사 장소는 커다란 중국식 식당이었는데, 그 사장님이 김발레리아-김발렌친 선생 부부의 친구라고 하시더군요. 두 분이 타슈켄트에서 우수리스크로 이주하신지 35년이나 되었으니 주요 식당과의 관계가 긴밀할텐데, 특히 고려인들끼리라면 더욱 가깝게 지내실 것입니다. 이 식당에 도착해서 알게 됐지만, 일행이 크라스키노의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에서 먹었던 점심 식사도 이 식당에서 주문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20여명이 넉넉히 앉을 수 있는 대형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았고, 턴테이블 위에 음식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식 식당이라고 했지만 요리의 대부분은 한국식이었습니다. 김치는 당연한 메뉴였고, 여러 나물이 골고루 나왔는데, 심지어 깻잎무침까지 있었습니다.

 

 

이날 저녁식사에서는 처음으로 본격 보드카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식당 사장님의 추천에 따라 <벨루가> 브랜드의 보드카가 여러 병 테이블에 올랐는데, 식사와 함께 다들 벨루가를 여러 순배 마셨습니다. 특히 돌아가면서 건배사를 하면서 보드카를 마셨는데, 이황휘 선생의 이상은 높게, 사랑은 깊게의 건배사는 정말 매력적이더군요.

 

 

물론 이 자리는 식사 자리만은 아니었고, <무용신><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가 자리를 함께한 첫 공식만찬이었습니다. 그래서 방문 준비단(황광석, 박미현, 이고은)은 김발레리아 선생 부부께 초청에 대한 감사의 선물을 준비하셨고, 저녁식사 자리에서 전달하셨습니다.

 

 

또 준비단은 특별 공연을 준비해 준 학생들과 교원들에게도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학생들이 어떤 선물을 원하는지 물었더니 한국 후드티를 원했다는군요. 그래서 인원수대로 후드티를 전달했습니다. 이번 방문을 위해 준비단이 얼마나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식사를 거의 마치고 다들 벨루가로 여독이 누그러졌을 때, 임상택 선생님의 생일을 축하했습니다. 학생들이 선물한 케익을 식당으로 가져왔기 때문에, 다함께 생일 축하노래를 부르고, 임상택 선생께서 케익을 잘라서 모두에게 한 조각씩 돌렸습니다. 저는 배가 불렀지만 러시아의 생일 케익은 어떤 식인가 궁금해서 조금만 맛보려고 했는데, 뜻밖에 맛이 좋아서 두 조각이나 먹었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테이블이 대략 치워지자 여흥이 시작됐습니다. 박인호 선생이 색소폰 연주로 분위기를 띄웠고, 연회장에 마련된 노래방 기계까지 동원해서 노래도 하고, 노래에 맞춰서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김발레리아 선생은 러시아의 저녁식사, 특히 외식은 대체로 음악과 춤이 곁들여지게 마련이라고 하시더군요. 이날 만찬의 음식은 한국식이고, 연주와 노래도 한국 노래가 대부분이었지만, 술과 춤만은 러시아식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음식과 술, 음악과 노래, 그리고 이야기가 꼬리를 물었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왔지만, 그것으로 하루가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중국을 거쳐 러시아로 넘어온 첫날이었고, 목적지 우수리스크에 무사히 도착한데다, 학생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기 때문에, 자축 분위기가 길어졌고, 늦은 시간까지 음주와 가무가 이어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술이 매우 약한 저는 식사와 함께 마신 보드카 몇 잔으로 그냥 쓰러져 잤기 때문에, 그날 밤의 환상적인 축제에 동참하지는 못했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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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スリスクの<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2019にオープンしました設立当時<高麗人民族学校>という名前でしたが翌年学校名<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改名しました沿海州高麗人指導者崔在亨先生えるためでした

 

 

<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はハングル教育高麗人文化芸術教育目標にしていますキム·ヴァレリア校長先生<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設立理念紹介しながら高麗人言語文化ってこそ差別疎外環境でもアイデンティティをって々とした社会一員としてよりきな役割たせる<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設立理念たちの子孫がハングルと文化伝統教育使命感って最善くそうとすること>らかにしました

 

 

このような設立理念わせて<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はハングル学校芸術学校けて教育プログラムを運用します202310月現在ハングル学校在学生140芸術学校登録学生80これとは30園児幼稚園運営しています

 

 

<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のキム·ヴァレリア校長先生韓国語独学につけたくから高麗人韓国語教育がれるというえをっていました

 

 

キムヴァレリア校長先生1982ウズベキスタンの国立文化芸術大学(O'zbekiston Davlat San'at va Madaniyat Instituti)卒業タシケントで芸術文化プログラムのマネージャーとしていていたところ解体される直前1990にウスリスクで移住しました

 

 

ウスリスク移住当時30だったキム·バレリア先生韓国語必要性痛感しましたウズベキスタンでは家族との会話いては韓国語使うことはほとんどありませんでしたがウスリスクの高麗人社会活動するためには韓国語必要だったからです

 

 

2年間韓国語独学勉強したキム·バレリア先生すぐにウスリスク高麗人社会主導的役割たしました1994から1998までは遠東新聞編集長歴任2004から2019までの15年間ウスリスク高麗新聞編集長めました

 

 

ハングル教育重要性痛感したキム·バレリア先生2000高麗民族自治会にハングル学校設立彼自身教師となり生徒成人韓国語めましたその20年近韓国語教育活動をもとに結局2019高麗人民族学校設立するにったのです

 

 

<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芸術教育朝鮮舞踊からまりましたキム·ヴァレリア先生1996ウスリスクの高麗民族自治会アリラン歌舞団設立韓国舞踊えながら公演めました自分専攻分野だったのですぐに成果ることができ朝鮮から派遣された舞踊家指導けることができたので<アリラン歌舞団>組織公演力急速向上しました

 

 

35団員構成された<アリラン歌舞団>ウスリスクと沿海州主要都市公演はもちろん20032にはモスクワの青少年芸術祝典沿海州代表として参加1等賞受賞していますまた19998韓国公演としてまり朝鮮中国アメリカでの公演ったことがありこのように活発公演活動理由2005にはウラジオストク市政府から功勲舞踊団称号けました

 

 

アリラン歌舞団組織活動軌道るとキム·バレリヤ先生2008花郎太鼓チーム設立しましたがこれも活発公演活動けています2012高麗人強制移住75周年記念公演をはじめ2015のウラジオストク極東コンサートやモスクワ国際コンサートで1等賞受賞しており2021には崔在亨先生えて追悼公演にも出演しました

 

 

<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とその付設<アリラン歌舞団><花郞太鼓チーム>沿海州民族教育民族芸術教育のための丈夫として成長していま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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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의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2019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설립당시에는 <고려인 민족학교>라는 이름이었지만, 이듬해에 학교 이름을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로 개명했습니다. 연해주 고려인의 지도자 최재형 선생을 기리기 위해서였지요.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는 한글 교육과 고려인 문화예술 교육을 목표로 합니다. 김발레리아 교장 선생은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의 설립 이념을 소개하면서 고려인들이 언어와 문화를 잃지 않아야 차별과 소외의 환경 속에서도 정체성을 가지고 당당한 사회일원으로 더 큰 몫을 다할 수 있다고 말하고,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의 설립 이념은 우리 후손들이 한글과 문화전통 교육에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같은 설립 이념에 맞춰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는 한글학교와 예술학교로 나누어 교육 프로그램을 운용합니다. 202310월 현재 한글학교의 재학생은 총140, 예술학교의 등록학생은 총80명이고, 이와는 별도로 30명 원아의 유치원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의 김발레리아 교장 선생은 한국어를 독학으로 익힌 분으로, 일찍부터 고려인들의 한국어 교육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김발레리아 교장선생은 1982년 우즈베키스탄의 국립문화예술대학교(O'zbekiston Davlat San'at va Madaniyat Instituti)를 졸업하고 타슈켄트에서 예술문화 프로그램 매니저로 일하던 중, 소련이 해체되기 직전인 1990년 우수리스크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습니다.

 

 

우수리스크 이주 당시 30세였던 김발레리아 선생은 한국어를 익혀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할 때는 가족과의 소통을 제외하고는 한국어를 쓸 일이 거의 없었지만,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사회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한국어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2년간 한국어를 독학으로 익힌 김발레리아 선생은 이내 우수리스크 고려인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는 원동신문의 편집장을 역임했고, 2004년부터 2019년까지 15년 동안 우수리스크 고려신문의 편집장도 맡았습니다.

 

 

한글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한 김발레리아 선생은 2000년 고려민족자치회 안에 한글학교를 설립하고, 그 자신이 교사가 되어 학생과 성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20년에 가까운 한국어 교육 활동을 바탕으로 결국 2019년 고려인 민족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른 것이지요.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의 예술교육은 조선무용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김발레리아 선생은 1996년 우수리스크의 고려민족자치회 안에 <아리랑 가무단>을 설립하고 한국무용을 가르치면서 공연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전공분야였기 때문에 금방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고, 특히 조선에서 파견된 무용가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아리랑 가무단>의 조직과 공연력은 빠르게 향상됐습니다.

 

 

35명의 단원으로 구성된 <아리랑 가무단>은 우수리스크와 연해주 주요도시 공연은 물론, 20032월에는 모스크바의 청소년 예술축전에서 연해주 대표로 참가해 1등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19998월의 한국공연으로 시작해 북한과 중국, 미국 공연을 진행한 바 있고, 이같이 활발한 공연 활동을 이유로 2005년에는 블라디보스톡 시정부로부터 공훈무용단 칭호를 받았습니다.

 

 

<아리랑 예술단>의 조직과 활동이 궤도에 오르자 김발레리야 선생은 2008<화랑 모듬북팀>을 설립했는데, 이 역시 활발한 공연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2012년 고려인 강제이주 75주년 기념공연을 비롯해 2015년 블라디보스톡 극동콘서트와 모스크바 국제 콘서트에서 1등상을 수상한 바 있고, 2021년에는 <최재형 선생님을 기리며> 추모공연에도 출연했습니다.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와 그 부설 <아리랑 가무단><화랑 북팀>은 연해주 민족 교육과 민족예술 교육을 위한 튼튼한 발판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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訪問団がウスリスクに到着したときはほぼ7でした韓国時間としてはすでにくなりめる時間ですがウスリスクはまだまだるかったです韓国沿海州時差1時間あることもありますが沿海州位置するので昼間がずっといようですね

 

 

一行はウスリスクにるやいなやすぐに<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かいました今回訪問団目的地民族学校であるためでもありキム·ヴァレリア先生民族学校付設<アリラン歌舞団><花郞太鼓チーム>訪問団歓迎する準備えているとおっしゃったためです

 

 

民族学校到着するとさすがに舞踊衣装太鼓演奏服装えた生徒たちが学校って訪問団えました二人教員10学生訪問団のために特別公演準備しましたこの行事のために時間学校てくれた学生たちにないながらもありがたかったです

 

 

たちは民族学校正門建物背景学生たちと一緒記念撮影をしすぐに民族学校小講堂って学生たちの公演まることをちました全体公演40ほどきましたが(1)生徒たちと教員4中務(2)ウスリスクの高麗人歴史映像舞踊表現した舞踊劇そして(3)花郎太鼓チームの演奏につながりました

 

 

映像舞踊劇最後公演作品稲舞でしたが中央アジアに強制移住された高麗人初期苦難克服稲作豊作げたことを表現したものとられます小物として使ったきな稲穂印象的かいじの黄色舞踊衣装ともとてもよく似合っていました

 

 

公演最後、「花郎太鼓チーム演奏でした5学生10分間続けた太鼓演奏強弱とリズムがあまりにもわず足拍子わさったものでしたったのすぐ3つの太鼓にしてがかりのように演奏していた中学生技量れていてびっくりしました

 

 

公演講堂展示された賞牌とトロフィーと感謝牌などをりましたがそのにはナホトカから花郞太鼓チーム特別された感謝がありました

 

 

ナホトカ(Нахо́дка)高麗人都市ウスリスク南東約200キロメートル地点海岸都市ですウスリスクから3時間ほどかかりますナホトカ特別感謝牌ったことから、「花郞太鼓チーム都市にもよく遠征演奏をしているようです

 

 

4にキム·バレリア先生ってくれた映像<アリラン歌舞団>ウスリスク公演観覧しましたこの小公演その作品縮約して再構成したようでした

 

演出者であれば共感できるように縮約本でも新作同様練習必要です訪問団のためにんで時間って苦労してくださった教員学生たちが本当に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公演わって最後挨拶をしながら学生教員たちがもう一度私たちをびっくりさせてくれましたこの日誕生日林尙澤先生のためにバースデーケーキを用意したからですウスリスクにるバスのたちはこの林尙澤先生誕生日であることをりましたがおそらくキム·バレリア先生電話生徒たちにケーキを準備するようにおいされたようでした

 

 

生徒たちから誕生日のおいをけながらケーキのロウソクを林尙澤先生姿ながらおそらく今年誕生日一生忘れられないといましたまた誕生日にケーキを準備ろうそくのしながらをする慣行はアメリカと韓国はもちろんロシアでもじだということがわかりました訪問団学生たちにささやかなプレゼントをりました

 

 

歓迎公演じて意味深時間にしもやりとりしながら今後<アリラン歌舞団><花郎太鼓チーム>活躍をより一層期待するようになり<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舞踊靴>交流協力がより一層強固になるとじるようになりました(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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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단이 우수리스크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저녁 7시였습니다. 한국 시간으로는 이미 어둡기 시작할 시간이지만, 우수리스크는 아직도 환했습니다. 한국과 연해주 사이에 시차가 1시간 있기도 하지만, 연해주가 더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낮이 훨씬 긴 것 같더군요.

 

 

일행은 우수리스크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로 향했습니다. 이번 방문단의 목적지가 민족학교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김발레리아 선생께서 민족학교 부설 <아리랑 가무단><화랑 북팀>이 방문단을 환영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민족학교 앞에 도착하자 과연 무용의상과 북연주 복장을 갖춘 학생들이 학교 앞에 도열해서 방문단을 맞았습니다. 두 분의 교원과 10여명의 학생들이 방문단을 위해 특별 공연을 준비했습니다. 이 행사를 위해 늦은 시간에 학교에 나와 준 학생들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마웠습니다.

 

 

우리는 민족학교 정문에서 건물을 배경으로 학생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바로 민족학교 소강당으로 들어가 학생들의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전체 공연은 약 40분쯤 계속됐는데, (1) 학생들과 교원의 4인 중무와 (2)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역사를 영상과 무용으로 표현한 무용극, 그리고 (3) 화랑 모듬북 팀의 연주로 이어졌습니다.

 

 

영상 무용극의 마지막 공연 작품이 <벼춤>이었는데,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 동포들이 초기의 고난을 극복하고 벼농사의 풍작을 이뤄낸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소품으로 사용한 커다란 벼이삭이 인상적이었고, 넉넉하고 따뜻한 느낌의 노란색 무용의상과도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공연의 마지막 순서는 <화랑 모듬북팀>의 연주였습니다. 5명의 학생들이 약 10분 동안 계속한 북 연주는 강약과 리듬이 너무도 좋아서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흔들리고, 발장단이 맞춰지곤 했습니다. 특히 제가 앉은 자리 바로 앞에서 3개의 북을 앞에 놓고 신들린 듯 연주하던 중학생은 기량이 탁월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강당에 전시된 상패와 트로피, 여기저기에서 보내온 감사패 등을 둘러보았는데, 그중에는 나홋카 시에서 <화랑 북팀>에게 특별히 전달된 감사패가 있었습니다.

 

 

나홋카(Нахо́дка)도 고려인이 많이 사는 도시로, 우수리스크 남동쪽 약 200킬로미터 지점의 해안도시입니다. 우수리스크에서 차로 3시간쯤 걸리지요. 나홋카 시의 특별 감사패를 전달 받은 것으로 보아, <화랑 북팀>은 다른 도시들에도 자주 원정 연주를 다니나 봅니다.

 

 

저는 김발레리아 선생께서 보내주신 영상으로 지난 4<아리랑 가무단>의 우수리스크 공연을 관람했었습니다. 이날의 소공연은 그 작품을 축약해서 재구성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연출자라면 모두 공감할 수 있듯이, 축약본이라도 신작이나 다름없이 연습이 필요합니다. 방문단을 위해 기꺼이 시간 내고 수고해 주신 교원과 학생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학생과 교원들이 또 한 번 우리를 깜짝 놀래주었습니다. 이날 생일이신 임상택 선생을 위해 생일 케익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우수리스크로 오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이날이 임상택 선생님의 생신임을 알게 되었는데, 아마도 김 발레리아 선생께서 전화로 학생들에게 케익을 준비하도록 부탁하셨던 것 같았습니다.

 

 

학생들로부터 생일 축하를 받으시면서 케잌의 촛불을 불어 끄시는 임상택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아마도 올해 생일을 평생 잊지 못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생일에 케익을 준비하고 촛불을 불어 끄면서 소원을 비는 관행은 유럽이나 미국과 한국은 물론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방문단도 학생들에게 작은 선물을 전했습니다.

 

 

환영공연을 매개로 뜻 깊은 시간을 함께 하고 선물도 주고받으면서 우리는 앞으로도 <아리랑 가무단><화랑 북팀>의 활약을 더욱 기대하게 되었고,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무용신>의 교류와 협력이 더 끈끈해 질 것이라고 믿게 됐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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訪問団はついに目的地ウスリスク(Уссурийск)到着しました都市入口からきれいでよく整理された都市という印象けましたほどれたさなクラスキノやバラバシュラズドルノイエにべると20万人人口のウスリスクは江陵のようにきな都市なのです

 

 

ウスリスクはウラジオストク(人口60万人)いで沿海州2番目きい都市です高麗人人口はウスリスク(15千人)がウラジオストク(1万人)よりいですつまり高麗人にとっては沿海州最大都市ウラジオストクよりウスリスクの故郷のようなところです

 

 

これは歴史的にもそうです沿海州はもともと靺鞨でしたが高句麗がここを支配しました618高句麗びたその遺民698にここに渤海建国しましたが渤海15つである率賓府(ソルビンブ)現在のウスリスク地域推定されます

 

 

926渤海滅亡した12世紀女真族金王朝17世紀満州族清王朝いてここを支配しましたはここをジュルホトン満州語:Juru hoton漢語:双城子双子都市という意味またはプルダンホトンFurdan hoton漢語:富爾丹城ばれました

 

 

1860沿海州がロシアに割譲されたニコライ11866にここに軍隊派遣自分名前ってニコリスクイェ(Никольское)びました大連-ハルビンと綏芬河-滿洲里をつなぐ東清鉄道連結するためにここに鉄道開通するとニコリスクイェは交通要地となり1898ニコリスク-ウスリスク(Никольск-Уссурийский̆̆)という昇格しました

 

 

1935スターリンの側近クリメント·ボロシロフ(Климе́нт Вороши́лов, 1881-1969)ってボロシロフ名前わったがスターリンの死後ボロシロフも失脚1957から現在であるウスリスク改称されました

ウスリスクは高句麗人渤海人んでいた場所1860年代朝鮮人豆満江って農業んでいただけでなく1900年代から義兵独立軍活躍していた場所でした

 

 

ウスリスクのラズドルナヤ(Раздольная=旧名スイフォン河綏芬河)江邊には独立運動家李相卨遺墟碑があり高麗人指導者崔在亨先生活動していた1920日本軍によって殺害されたところなので最後らした住宅博物館として造成されていますまたウスリスクには義兵隊長柳麟錫独立軍洪範圖将軍とともに安重根義士記念碑てられています

 

 

ウスリスクは20世紀初沿海州高麗人中心地であり192219272にわたって高麗人自治区請願する自治区中心都市として想定されました

 

しかし1937強制移住80年間3世代にわたる高麗人いてきた生活基盤こそぎってしまいました高麗人った廃墟となったり白人または人種のロシアってきてんでいましたウスリスクも同様でした

 

 

1991にソビエト連邦解体され独立国家連合(CIS)結成されると中央アジアに移住された高麗人沿海州今日沿海州高麗人人口5万人しましたウスリスクは高麗人らしと活動中心地となっています

 

 

もちろん1930年代水準回復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2010国勢調査によると16万人のウスリスク人口高麗人5千人全体3%をわずかに上回るだけです全人口31した過去べるとまだその101回復していない状態です

 

 

しかしウスリスクの高麗人着実成長発展しています定着村友情村造成され沿海州移住140周年民族文化センターも建設されましたまた<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設立されましたがこれはロシア連邦政府公認した唯一高麗人民族学校です

 

 

今回訪問団目的ウスリスク高麗人同胞強制移住以前歴史伝統いでいく躍動的姿直接目確認するためだともえま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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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단 일행은 마침내 목적지 우수리스크(Уссурийск)에 도착했습니다. 도시 초입부터 깨끗하고 잘 정리된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날 앞서 방문했던 작은 마을, 크라스키노와 바라바쉬, 라즈돌노예에 비하면 약 20만명 인구의 우수리스크는 강릉만한 큰 도시인 것이지요.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톡(인구 60만명)에 이어 연해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그런데 고려인 인구는 우수리스크(15천명)가 블라디보스톡(1만명)보다 더 많습니다. , 고려인들에게는 연해주 최대도시 블라디보스톡보다 우수리스크가 더 고향 같은 곳입니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연해주는 원래 말갈의 땅이었으나 고구려가 이곳을 지배했습니다. 618년 고구려가 망한 후에는 그 유민이 698년 이곳에 발해를 건국했는데, 발해 15부의 하나인 솔빈부(率賓府)가 지금의 우수리스크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926년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12세기 여진족의 금() 왕조와 17세기 만주족의 청() 왕조가 이어서 이곳을 지배했습니다. 청나라는 이곳을 주루호톤(만주어Juru hoton, 한어双城子, 쌍둥이 도시라는 뜻) 또는 푸르단호톤(Furdan hoton, 한어富爾丹城)으로 불렸습니다.

 

 

1860년 러시아가 연해주를 할양받은 후 니콜라이 1세는 1866년 이곳에 군대를 파견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라 니콜리스크예(Никольское)라고 불렀습니다. 다롄-하르빈 철도와 수이펀허-만저우리 철도를 포함하는 동청철도(東清鉄道)와 연결하기 위해 이곳에 철도가 개통되자, 니콜리스크예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고, 1898년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Никольск-Уссурийский)라는 이름의 시로 승격됐습니다.

 

 

1935, 스탈린의 측근 클리멘트 보로실로프(Климе́нт Вороши́лов, 1881-1969)의 이름을 따서 보로실로프 시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스탈린 사후 보로실로프도 실각하면서 1957년부터 지금의 이름인 우수리스크 시로 개칭되었습니다.

우수리스크는 고구려인과 발해인이 살았던 곳이고, 1860년대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농사를 지었을 뿐 아니라, 1900년대부터 의병과 독립군이 활약하던 곳이었습니다.

 

 

우수리스크의 라즈돌나야(Раздольная=옛이름 수이펀허綏芬河) 강변에는 독립운동가 이상설 유허비가 있고, 고려인 지도자 최재형 선생이 활동하던 중 1920년 일본군에게 살해된 곳이어서,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주택은 박물관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또 우수리스크에는 의병대장 류인석, 독립군 홍범도 장군과 함께 안중근 의사의 기념비도 세워져 있습니다.

 

 

우수리스크는 20세기 초 연해주 고려인의 중심지였고, 1922년과 1927년 두 차례에 걸쳐 고려인 자치구를 청원할 때 자치구의 중심도시로 상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37년의 강제이주는 약 80년 동안 3세대의 고려인이 일궈온 삶의 기반을 뿌리 채 뽑아버렸습니다. 고려인이 떠난 마을은 폐허가 되거나 백인 혹은 다른 인종의 러시아인들이 들어와 살았습니다. 우수리스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가연합이 결성되자 중앙아시아로 이주 당했던 고려인들이 연해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오늘날 연해주의 고려인의 인구는 다시 5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우수리스크는 다시 한 번 고려인 삶과 활동의 중심지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1930년대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2010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16만명의 우수리스크 인구 중에서 고려인은 약 5천명으로 전체의 3%를 약간 상회할 뿐입니다. 전체인구의 3분의1에 이르렀던 과거에 비하면 아직 그 10분의 1도 회복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우수리스크의 고려인들도 꾸준히 성장, 발전하고 있습니다. 정착촌 우정마을이 조성되고, 연해주 이주 140주년을 맞아 민족문화센터도 건립됐습니다.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도 설립되었는데, 이는 러시아 연방정부가 공인한 유일한 고려인 민족학교입니다.

 

 

이번 방문단의 목적은 우수리스크 고려인 동포들이 강제이주 이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역동적인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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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行はバラバシュで30分休憩ったびバスに乗車してウスリスクにかう途中ラズドルノイエ(Раздольное)でもう一度停車しましたここの鉄道駅1937高麗人強制移住まった場所だからですここは北韓2代目主席金正日国防委員長生誕地でもあります

 

 

ブラジボストックの北約70キロメートルウスリスクの南約30キロメートルれた場所位置するラズドルノイエはロシアが沿海州割譲されるやいなや形成された沿海州初期定着地ですここに軍隊駐屯していたからですが軍事的要衝交通要衝でもあります

 

 

現在ラズドルノイエはクラスキノから北上するA189国道ウラジオストクから北上するA370国道出会場所でありハッサン-ウスリスク鉄道とウラジオストク-ウスリスク鉄道出会場所です

 

 

このようにわさったつの鉄道はウスリスクにつながりハバロフスキーをてモスクワへくシベリア横断鉄道とハルビンをてチーターへ満州横断鉄道かれます満州横断鉄道はチーターでシベリア横断鉄道合流しますから結局シベリア横断鉄道満州横断鉄道目的地はすべてモスクワです

 

 

ラズドルノイエにも高麗人がありましたロシアの記録によると1895年頃形成された高麗人村には餘戶人30世帯らし1906年頃には62世帯300えました1907ラズドルノイエの全体人口570だったということですから高麗人多数だったということですラズドルノイエの人口はロシア革命内戦終息1923には4千人増加しました

 

 

19241にレーニンが死亡スターリンが政権って集団農場化強行したラズドルノイエ人口きく19397,70019591万人増加して頂点しましたがその持続的人口減少2021には5,700らしていると集計されました

 

1939人口77百人はラズドルノイエの高麗人強制移住させられた数字であるためここの人口はおそらく1937年頃1万人以上最高値記録したと推定されます

 

 

連政府高麗人強制移住迅速みました1937821強制移住決定された2段階われましたがまず9月初めから国境地域(下山秋風ウスリスク水清地域)高麗人優先的移送されました

 

ラズドルノイエの高麗人そのでも一番先移送されました強制移住列車出発点がここだったからですが高麗人せた最初強制移住列車がラズドル奴隷出発したのは193799でした

 

 

その928日付けの追加決定により極東州りの地域高麗人強制移住され1025のソ連内務人民部イェジョポ議長報告書によると36,442世帯171,781高麗人移住えたということですそのカムチャツカおよびオホーツク地域っていた700人余りの高麗人111から最終列車移住したことで高麗人強制移住完結しました

 

 

同年11には移住民配置まで完了しましたが1937125報告書によるとカザフスタン共和国20,141世帯95,427ウズベキスタン共和国16,079世帯73,990タジクスタン共和国13世帯89キルギススタン共和国215世帯42136,448世帯169,927高麗人移送配置完了したそうです

 

 

ラズドルノイエが有名なのはここが北韓2代目主席金正日国防委員長生誕地でもあるからです北韓当局金正日誕生日1942216だと発表しましたが日本関東軍満州軍文書そしてソ連政府記録などによりますと金正日国防委員長誕生日1941216誕生地はラズドルノイエの旧名であるハマタンであることがらかになっています

 

 

金正日まれた当時ちゃんをかった助産院証言によると金正日出生地はラズドルノイエ·ラジョ(улица Лазо)88番地集合住宅であることが確認されます

 

 

最後にラズドルノエは南北にとても都市ですがそのうちラズからまでの距離12キロメートルにロシアで距離としてられていま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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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바라바쉬에서 30분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버스에 승차해 우수리스크로 향하던 중, 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에서 한 번 더 정차했습니다. 이곳의 기차역이 1937년의 고려인 강제이주가 시작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북한의 2대 주석 김정일의 탄생지이기도 합니다.

 

 

불라디보스톡 북쪽 약 70킬로미터, 우수리스크 남쪽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라즈돌노예는 러시아가 연해주를 할양받자마자 마을이 형성된 연해주 초기의 정착지입니다. 이곳에 군대가 주둔했기 때문인데, 군사적 요충지는 곧 교통의 요충지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라즈돌노예는 크라스키노에서 북상하는 A189번 국도와 블라디보스톡에서 북상하는 A370번 국도가 만나는 곳이자, 하산-우수리스크 철도와 블라디보스톡-우스리스크 철도가 만나는 곳입니다.

 

 

이렇게 합쳐진 두 철도는 우수리스크로 이어져, 하바로프스키를 거쳐 모스크바로 가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하르빈을 거쳐 치타로 가는 만주횡단철도로 다시 나뉩니다. 만주횡단철도는 치타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합류되니까, 결국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만주횡단철도의 목적지는 모두 모스크바입니다.

 

 

라즈돌노예에도 고려인 마을이 있었습니다. 러시아 기록에 따르면 1895년경 형성된 고려인 마을에는 여호인(餘戶人) 30가구가 살았고, 1906년경에는 62가구 3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1907년 라즈돌노예 전체 인구가 570명이었다고 하니까, 고려인이 다수였다는 말입니다. 라즈돌노예의 인구는 러시아혁명과 내전이 종식되면서 1923년에는 4천명으로 증가했습니다.

 

 

19241월 레닌이 사망하고, 스탈린이 집권해 집단농장화를 강행했을 때 라즈돌노예 인구는 크게 늘어서 1939년의 77백명, 1959년의 1만명으로 증가해 정점을 이뤘지만, 이후에는 지속적으로 인구가 감소해, 2021년에는 57백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특히 1939년의 인구 77백명은 라즈돌노예의 고려인들이 강제이주당한 이후의 숫자이기 때문에, 이곳의 인구는 아마도 1937년경에 1만명 이상의 최고치를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소련 정부의 고려인 강제이주는 신속하게 진행됐습니다. 1937821일 강제이주가 결정된 후 2단계로 진행됐는데, 우선 9월초부터 국경지역(하산, 수풍, 우수리스크, 수청지역)의 고려인들이 우선적으로 이송됐습니다.

 

라즈돌노예의 고려인은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이송됐습니다. 강제이주 열차의 출발점이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인데, 고려인을 실은 최초의 강제이주 열차가 라즈돌노예를 출발한 것은 193799일이었습니다.

 

 

이후 928일자 추가 결정에 따라 극동주의 나머지 지역의 고려인이 강제 이주되었고, 1025일의 소련 내무인민부 예조포 의장의 보고서에 따르면 총 36,442가구 171,781명의 고려인이 이주를 마쳤다고 합니다. 이후 캄차카 및 오호츠크 지역에 남아 있던 700여명의 고려인들이 111일부터 마지막 열차로 이주됨으로써 고려인 강제이주가 완결되었습니다.

 

 

그해 11월에는 이주민 배치까지 완료되었는데, 1937125일의 보고서에 따르면, 카자흐 공화국에 20,141가구 95,427, 우즈베크 공화국에 16,079가구 73,990, 타지크 공화국에 13가구 89, 키르기즈 공화국에 215가구 421명 등 총 36,448가구 169,927명의 고려인들이 이송, 배치가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라즈돌노예가 유명한 것은 이곳이 북한의 2대 주석 김정일의 탄생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북한 당국은 김정일의 탄생일이 1942216일이라고 발표했지만, 일제 관동군과 만주군의 문서, 그리고 소련정부 기록 등에 따르면 김정일의 생일은 1941216일이며, 탄생지는 라즈돌노예의 옛 이름인 하마탄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특히 김정일이 태어날 당시 아기를 받았던 조산원의 증언에 따르더라도, 김정일의 출생지는 라즈돌노예 라조가(улица Лазо) 88번지의 연립주택인 것으로 확인됩니다.

 

 

끝으로 라즈돌노예는 남북으로 매우 긴 도시인데, 그중 라조가는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의 거리가 12킬로미터에 달해, 러시아에서 가장 긴 거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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訪問団一行朴漢龍先生高麗人移住史独立運動史講演きながらウスリスク(Уссурийск)かいましたクラスキーノからウスリースクまでは200キロメートルの距離A189番国道A370番国道って2時間40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キム·ヴァレリア先生途中一度停車して休憩することをめました

 

 

休憩所はクラスキノとウスリスクの中間地点であるバラバシュ(Барабашское)にありました韓国高速道路のサービスエリアのように設備っ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道路沿いにガソリンスタンドや24時間カフェがありスーパーもいている便利場所でした

 

スーパーのにはタバコだけを販売する専門店もありました屋根のカフェKAФE付属建物のようにつながった黄色平屋建ての建物応急室AПTEKAんでタバク(Табак)かれたさながそれでしたフランスやスペインなどのヨーロッパでよくられたタバクが沿海州にもあるのをるとああここがヨーロッパなんだというがしました

 

 

李黃徽先生一緒にタバクにわった種類のタバコをってそのわっている一行はスーパーにってをしましたロシアのパンやアイスクリーム菓子などをってきてスーパーのけられたケグのテーブルにせてみんなでけてべましたにアイスクリームがとてもおいしかったです

 

バラバシュに停車したのはクラスキーノとウスリスクの中間地点休憩便利だったからだけ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1937強制移住以前バラバシュは高麗人住居でした

 

 

バラバシュは交通便利軍事的要衝地です1911日本軍スパイが報告したバラバシュ駐留ロシア兵力1千人だったそうですここが軍事的要衝だったという意味です

 

また1911524洪範圖全濟益·ヨンジャン李鎭龍チョ·ジャンウォン·チュンシクキム·ジュンファ崔秉圭嚴仁燮などの義兵指揮官がウラジオストクで会合義兵運動開始すると同時義兵集結場所をバラバシュとめました義兵たちもバラバシュを軍事的要衝地として認識したという意味です

 

 

一方バラバシュは高麗人密集住居地でした高麗人はここをモングガイとびましたが高麗人定着まった1885年頃にはここの公式名がモングガイだったからですおそらくモンゴルと関連した名前だったとわれます

 

高麗人はモングガイをモンゴゲ漢字表記するためにメンゴゲ(孟古介)」、「メンリョン(孟嶺)」、「メンヒョン(孟峴)」、「メンサンドン(孟山東)などの名前使いました

 

 

モングガイの高麗人人口1906年頃23世帯125調査されましたが1937強制移住直前にはここに1千人高麗人少数のロシア一緒んでいたそうですモングガイが30ぶりにこのように急速発展したのは新設された道路のおかげでした

 

 

1890年代初沿海州当局はウラジオストクから豆満江河口のクラスノイェ·セロ(=鹿屯)軍用道路建設決定ノボキエフスキー(延秋)駐屯ロシア軍守備隊兵士300人余りと近隣地域高麗人たちにノボキエフスキーからラズドルノイェに道路建設担当させました

 

このロシア高麗人民間人協業仲介したのが鉄道幹線敷設管理局通訳として勤務していた崔在亨先生ロシア政府動員された高麗人人件費支払いました

 

 

この工事崔在亨先生はロシア当局方針高麗人説明高麗人苦情当局にうまくえることで道路建設任務迅速完了しましたこれにする補償として崔在亨先生はロシア政府から銀星勲章1893には延秋地域都憲選出されました

 

 

そしてこのように建設された道路沿ってくの高麗人蓮秋からモングガイやラズドルノイェなどに簡単移住することができ農業商業じて安定した生活ることができたので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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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단 일행은 박한용 선생의 고려인 이주사와 독립운동사 강연을 들으면서 우수리스크(Уссурийск)로 향했습니다. 크라스키노에서 우수리스크까지는 약 200킬로미터의 거리이고 A189번 국도와 A370번 국도를 타고 약 2시간40분을 달려야 했으므로, 김 발레리아 선생은 중간에 한번 정차해서 휴식하기를 권했습니다.

 

 

휴게소는 크라스키노와 우수리스크의 중간지점인 바라바쉬(Барабашское)에 있었습니다.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시설이 잘 된 것은 아니지만, 도로 변에 주유소와 24시간 카페가 있고 수퍼마켓도 문을 열고 있는 편리한 곳이었습니다.

 

수퍼마켓 옆에는 담배만 판매하는 전문점도 있었습니다. 빨간 지붕의 카페(KAФE) 옆에 부속건물처럼 이어진 노란색 단층 건물에 응급실(AПTEKA, 압티카)과 나란히 타바크(Табак)라고 쓰인 작은 가게가 그것이었습니다. 프랑스나 스페인 등의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타바크가 연해주에도 있는 것을 보니까, , 이곳이 유럽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황휘 선생과 함께 타바크에 들어가 특이한 종류의 담배를 사서 그 맛을 음미하고 있는 동안, 다른 일행은 수퍼마켓에 들어가 쇼핑을 했습니다. 러시아식 빵과 아이스크림, 과자와 마실 것 등을 사가지고 나와서 수퍼마켓 앞에 마련된 케그식 테이블에 올려놓고 다같이 나눠 먹었습니다. 특히 아이스크림이 아주 맛있더군요.

 

바라바쉬에 정차한 것은 크라스키노와 우수리스크의 중간지점이고, 휴식에 편리한 곳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1937년 강제이주 이전에는 바라바쉬는 고려인 밀집 주거지였습니다.

 

 

바라바쉬는 교통이 편리한 군사적 요충지입니다. 1911년 일본군 간첩이 보고한 바라바쉬 주둔 러시아 병력이 약 1천명이었다고 합니다.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뜻입니다.

 

1911524일 홍범도, 전제익, 허근(허영장), 이진룡, 조장원, 이춘식, 김중화, 최병규, 엄인섭 등의 의병 지휘관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회합을 갖고 의병운동을 개시하면서, 의병 집결장소를 바라바쉬로 정했습니다. 의병들도 바라바쉬를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한편 바라바쉬는 고려인 밀집 주거지였습니다. 고려인들은 이곳을 몽구가이라고 불렀는데, 고려인 정착이 시작되었던 1885년 경에는 이곳의 공식이름이 몽구가이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몽골과 관련된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인들은 몽구가이를 멍고개라고 고쳐 부르기도 했고, 한자로 표기하기 위해 맹고개(孟古介)’ ‘맹령(孟嶺)’ ‘맹현(孟峴)’ ‘맹산동(孟山洞)’ 등의 이름도 사용했습니다.

 

 

몽구가이의 고려인 인구는 1906년경 23가구 125명으로 조사되었지만, 1937년 강제이주 직전에는 이곳에 1천명의 고려인과 소수의 러시아인들이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몽구가이가 30년만에 이렇게 급속이 발전한 것은 신설된 도로 덕분이었습니다.

 

 

1890년대 초반 연해주 당국은 블라디보스톡에서 두만강 하구의 크라스노예 셀로(=鹿屯島)에 이르는 군용도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고, 노보키예프스키(=연추마을) 주둔 러시아군 수비대의 병사 3백여명과 인근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에게 노보키예프스키에서 몽구가이에 이르는 도로 건설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이때 러시아군과 고려인 민간인들의 협업을 중개한 것이 철도간선부설관리국의 통역으로 근무 중이었던 최재형 선생이었고, 러시아 정부는 동원된 고려인들에게 인건비를 지불했습니다.

 

 

최재형 선생은 러시아 당국의 방침을 고려인들에게 설명하고, 고려인들의 고충을 당국에 전달함으로써, 노보키예프스키(=연추)와 바라바쉬(=몽구가이) 사이의 도로 건설 임무는 신속하게 완수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최재형 선생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은성훈장을 받았고, 1893년에는 연추 지역의 도헌(都軒)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건설된 도로를 따라서 많은 고려인들은 연추에서 몽구가이로 손쉽게 이주해, 농사와 상업을 통해 안정된 삶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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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ズベキスタンとじくカザフスタンでも高麗人事情ていました高麗人公民権制限され韓国語ぶこともできず兵役居住移転自由もありませんでした

 

しかしスターリンが韓国語少数民族言語から除外高麗人学校廃止して韓国語教育中止させたカザフスタンは高麗人新聞<レーニン旗幟(Ленин киӌи)><高麗劇場(Корейский Театр)>維持するよう配慮しました

 

 

レーニン旗幟でハングルで刊行された唯一全国日刊紙でしためた新聞なので政府法令綱領掲載解説する機関紙役割たしましたが高麗人文学作品発表できる唯一紙面でもありました

 

全盛期レーニン旗幟職員60人余りで発行部数12千部しましたタシケントクジルオルダドゥシャンベプロルゼなどにレーニン旗幟支社もできました。 『レーニン旗幟1988にソ連民族友好勲章けるほど経営内容優秀でしたが1991高麗日報名前高麗人強制移住とその苦難する手記などを報道しました

 

 

カザフスタンのアルマアタには高麗劇場があります洪範圖将軍守衛をしていた劇場カザフスタンの国立劇場です1937強制移住とともに高麗劇場大多数団員がクジルオルダに定着数回移住1969にアルマアタに定着今日ります

 

高麗劇場創立50周年1982まで180える創作品公演しましたがその芸術活動功労められ連政府名誉勲章受章しましたこれまでこの劇場公演された作品には高麗人たちが経験してきた社会的政治的状況がよくれています

 

 

<高麗劇場>韓国人集団農場農村巡回しながら250回以上公演ったということです5ずつ公演したという意味このような強盗公演日程一年中続いたという意味ですそんな理由がありました地方農村巡回しながらのたいまつを照明にして公演していた高麗劇場強制移住され苦痛生活する高麗人にとって唯一しみだったからです俳優観衆ってくことが一度二度ではなかったそうです

 

 

高麗劇場ではすべての公演韓国語われるため各地域同胞世代韓国文化韓国語民族的りをめることにも貢献しました

 

中央アジアに強制移住された高麗人韓国語韓国文化芸術命脈いだ高麗日報高麗劇場どちらも沿海州時代にそのルーツをっています

 

 

レーニン旗幟前身、「先鋒(ソンボン1923)でした1937編集長をはじめとする<先鋒>全職員強制移住直前粛清されましたが農業部長だったファン·ドンフンが強制移住定着したクジル·オルダで<レーニン旗幟>創刊<先鋒>いだ

 

高麗劇場1930にウラジオストクで設立された労働者青年劇場から出発しました1920年代末沿海州高麗人社会には自発的まれた芸術団体そのうち新韓村素人芸術団労働者青年劇場(1930)につながり193299連政府承認職業的専門劇場として<極東地域高麗劇場>出発しました

 

 

このように沿海州まった新聞劇場強制移住後中央アジアで活発活動高麗人言語文化っていくことができました

 

1991年以来くの高麗人祖父故郷である沿海州ってきており沿海州高麗人人口5万人しましたらは沿海州中央アジア時代民族アイデンティティを維持させてくれた高麗人学校新聞劇場再建しようと努力しています

 

 

植民地時代冷戦時代には国際情勢国内状況のためにけ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が21世紀には韓国同胞高麗人同胞努力けることが義務でしょう(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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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과 마찬가지로 카자흐스탄에서도 고려인들의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고려인들의 공민권은 제한되었고 한국어를 배울 수도 없었고, 군복무나 거주이전의 자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이 한국어를 소수민족 언어에서 제외하고, 고려인 학교를 폐지하면서 한국어 교육을 중지시켰을 때, 카자흐스탄은 고려인들의 신문 <레닌기치(Ленин киӌи)><고려극장(Корейский Театр)>을 유지하도록 배려했습니다.

 

 

<레닌기치>는 구소련에서 한글로 간행되었던 유일한 전국 일간지였습니다. 국가에서 허용한 신문이기에 정부의 법령과 당의 강령을 게재하고 해설하는 기관지의 역할도 했지만, 한인들의 문학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유일한 지면이기도 했습니다.

 

<레닌기치>는 전성기 때 직원이 60여 명에 이르렀고, 발행부수도 12천부에 달했습니다. 타슈켄트, 크질오르다, 두샨베, 프롤제 등에 <레닌기치>의 지사도 생겼습니다. <레닌기치>1988년 소련민족우호훈장을 받을 만큼 경영과 내용이 우수했는데, 1991<고려일보>로 이름을 바꾸고, 고려인들의 강제 이주와 이후의 고난에 대한 수기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카자흐스탄의 알마아타에는 <고려극장>이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수위를 했던 극장인데, 카자흐스탄의 국립극장입니다. 1937년 강제 이주와 함께 고려극장의 대다수 단원들이 크질오르다에 정착했고, 몇 번의 이주 끝에 1969년 알마아타에 자리를 잡아서 오늘에 이릅니다.

 

<고려극장>은 창립 50주년인 1982년까지 180편이 넘는 창작품을 공연했는데, 그 예술 활동의 공로가 인정되어 소련정부의 명예훈장을 받았습니다. 그 동안 이 극장에서 공연된 작품에는 재소한인들이 겪어 온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고려극장>은 한인들의 집단농장이나 농촌지역을 순회하면서 1년에 250회 이상의 공연을 가졌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5일씩 공연했다는 뜻이고, 이런 강도의 공연 일정이 일 년 내내 계속됐다는 뜻입니다. 그럴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방과 농촌을 순회하면서 마당의 횃불을 조명삼아 공연하던 <고려극장>은 강제 이주당해 고통 속에 생활하는 고려인들에게 유일한 낙이었기 때문입니다. 배우와 관중이 부둥켜안고 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합니다.

 

 

<고려극장>에서는 모든 공연이 한국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각 지역의 동포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한국 문화와 한국어를 알려 주고 민족적 긍지를 높이는 데에도 공헌했습니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예술의 명맥을 이어준 <고려일보><고려극장>은 둘 다 연해주 시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레닌기치>의 전신은 연해주 고려공산당의 기관지 <선봉(1923)>이었습니다. 1937년 편집장을 비롯한 <선봉>의 전 직원들이 강제이주 직전에 숙청되었으나, 농업부장이던 황동훈이 살아남았고, 강제이주로 정착한 크질오르다에서 <레닌기치>를 창간해 <선봉>의 맥을 이었습니다.

 

<고려극장>1930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설립된 노동자청년극장에서 출발했습니다. 1920년대말 연해주 고려인 사회에는 자발적으로 생겨난 예술단체들이 많았고, 그중 신한촌의 소인(素人=아마추어)예술단이 노동자청년극장(1930)으로 이어졌고, 193299일 소련 정부의 승인을 받아 직업적인 전문극장으로서 <극동지역 고려극장>이 출발했습니다.

 

 

이렇게 연해주에서 시작된 신문과 극장이 강제 이주 후에도 중앙아시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고려인들의 언어와 문화를 지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1991년 이래 많은 고려인들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고향 연해주로 돌아오고 있고, 연해주의 고려인 인구가 5만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시절에 민족 정체성을 유지시켜 주었던 고려인 학교와 신문과 극장을 재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식민지 시기와 냉전 시절에는 국제 정세와 국내 상황 때문에 돕지 못했지만, 21세기에는 한국 동포들이 고려인 동포들의 노력을 돕는 것이 의무일 것입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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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レーニンが死亡するとしい権力闘争政府軍部権力掌握したスターリンの時代まりましたレーニンは少数民族土地分配自治権約束しましたがスターリンはこれをすべて廃棄集団農場工業化推進しました

 

自治権土地約束じてロシア革命支持した沿海州高麗人はスターリンの裏切りにきく落胆しましたが方法がなくむしろ先頭って集団農場建設協力しました

 

 

1923沿海州居住する高麗人12982このうち9万人がウラジオストクポシイエットスチャンニコルスク-ウスリにんでおり3万人がスパスクハバロフスクイマンオルガなど沿海州のあちこちにらばってんでいましたらは192454韓国人農村ソビエトを結成しました

 

それから5年後1929沿海州高麗人15795沿海州全体人口24.3%1930年代半ばには20万人しましたこのうち80%以上強制的われた全面的集団化経験しましたそれでもスターリンは依然として高麗人不信していました

 

 

1937日本中国侵略するとスターリンはソがまもなく日本戦争をすることになり戦場日本沿海州になると予測しましたスターリンの予測通1938にハサン戦闘発生スターリンは日本軍すために総力げて勝利しました

 

スターリンはソ日本戦争をすれば高麗人日本つと判断しましたこれは朝鮮侵略した日本抵抗した高麗人する深刻誤解でしたがスターリンは自分判断通りに19379日本のスパイという口実高麗人指導者級2,000処刑した18万人する韓国人中央アジアに強制移住させました

 

 

制限された手荷物だけを所持したまま高麗人家畜運送貨物車せられ中央アジアの砂漠地帯のようにばれましたさと飢餓によりかなりの高齢者乳児死亡しました19371025連内務人民委員会のイェゾフ委員長36,442世帯171781高麗人がカザフスタンとウズベキスタンに移送された発表しました

 

中央アジアの砂漠地帯到着した高麗人さにえるためにモグラのようにトンネルをってらし水辺にいるたちは穴蔵ってらしていましたになると高麗人めてんぼをってっていったをまいて稲作めました初年度から豊作3ぶりに安定したということです

 

 

スターリンの弾圧きました1938スターリンは韓国語をソ少数民族言語から除外韓国語学科廃止して韓国語ばないようにしましたまた高麗人敵性民族烙印して軍服務から除外居住共和国れる旅行禁止しました

 

このような状況でも高麗人たちは自分たちがした集団農場模範農場にし労働英雄称号けた模範民族げられました

 

 

ウジュベキスタンのキム·ビョンファ農場ポリトゼル農場がその代表的ですキム·ビョンファ(Ким Пен Хва, 1905-1974)農場長自身した農場最優秀農場いて労働英雄称号2死後農場名前キム·ビョンファ農場わりましたタシケントにはキム·ビョンファもできました

 

 

黃萬金農場長めたポリトゼル農場唯一観光公社登録されました模範農場外国人観覧許可された農場という意味ですには3万余りの集団農場がありましたが観光公社登録された農場はポリトゼル農場一つだけだということです

 

 

1953にスターリンが死去したフルシチョフは1955高麗人公民権回復させ19934にはロシア連邦最高会議議長名義決定文(No.4721-1)発表1937高麗人強制移住政治的弾圧不法だったと規定被害けた高麗人とその家族子孫全面的名誉回復補償計画発表しました(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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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월 레닌이 사망하자 극심한 권력투쟁을 거쳐 정부와 군부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의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레닌은 소수민족에게 토지분배와 자치권을 약속했지만, 스탈린은 이를 모두 폐기하고 집단농장과 공업화를 추진했습니다.

 

자치권과 토지 약속을 믿고 러시아 혁명을 지지했던 연해주의 고려인들은 스탈린의 배신에 크게 낙망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고, 오히려 앞장서서 집단농장 건설에 협력했습니다.

 

 

1923년 연해주에 거주 고려인은 12982명에 달했고, 이중 9만명이 블라디보스톡, 포시예트, 수찬, 니콜스크-우수리에 살았고, 3만명이 스파스크, 하바로브스크, 이만, 올가 등 연해주 곳곳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이들은 192454개의 한인 농촌 소비에트를 결성했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29년 연해주의 고려인은 15795명으로 연해주 전체 인구의 24.3퍼센트를 차지했고, 1930년대 중반에는 20만명에 달했습니다. 이중 80퍼센트 이상이 강제적으로 진행된 전면적 집단화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도 스탈린은 여전히 고려인들을 불신했습니다.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자, 스탈린은 소련이 곧 일본과 전쟁을 벌이게 될 것이고, 전쟁터는 일본에 가까운 연해주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스탈린의 예측대로 1938년 하산호 전투가 발생했고, 스탈린은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승리했습니다.

 

스탈린은 소련이 일본과 전쟁을 벌이면 고려인들은 일본 편을 들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조선을 침략한 일제에 항거하던 고려인들에 대한 심각한 오해였지만, 스탈린은 자신의 판단대로 밀어붙였고, 19379월 일본의 첩자라는 구실로 고려인 지도자급 인사 약 2,000명을 처형한 후, 18만 명에 달하는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제한된 수하물만 소지한 채 고려인들은 가축 운송 화물차에 실려 중앙아시아의 사막지대로 짐승처럼 운반됐습니다. 추위와 기아로 상당수의 노인과 영아들이 사망했습니다. 19371025일 소련내무인민위원회 예조프 위원장은 “36,442가구 171,781명의 고려인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송됐다고 발표했습니다.

 

겨울에 중앙아시아의 사막지대에 도착한 고려인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고 살았고, 물가에 있는 사람들은 갈대로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봄이 되자 고려인들은 물을 찾아 논을 만들어 가져간 볍씨를 뿌려 벼농사를 시작했습니다. 첫해부터 풍년이었고 3년 만에 안정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스탈린의 탄압은 계속됐습니다. 1938, 스탈린은 한국어를 소련의 소수민족 언어에서 제외시키고 한국어학과를 폐지하여 한국어를 배우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 고려인을 적성민족으로 낙인찍어 군복무에서 제외했고, 거주 공화국을 벗어나는 여행도 금지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고려인들은 자신들이 속한 집단농장을 모범농장들로 만들었고, 노동 영웅 칭호를 가장 많이 받은 모범민족으로 꼽혔습니다.

 

 

우주베키스탄의 김병화 농장포리토젤 농장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김병화 농장장은 자신이 속한 농장을 최우수 농장으로 이끌어 노동 영웅 칭호를 두 개나 받았고, 그의 사후 농장의 이름이 김병화 농장으로 바뀌었습니다. 타슈켄트에는 김병화 거리도 생겼습니다.

 

 

황만금이 농장장을 맡은 포리토젤 농장은 소련에서 유일하게 관광공사에 등록됐습니다. 소련의 모범농장으로 외국인의 관람이 허용된 농장이라는 뜻입니다. 소련에는 3만여 개의 집단농장이 있었으나 관광공사에 등록된 농장은 포리토젤 농장 하나 뿐이라고 합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 흐루시초프는 1955년 고려인들의 공민권을 회복시켰고, 19934월에는 러시아 연방 최고회의가 의장 명의의 결정문(No.4721-1)을 발표해,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와 정치적 탄압은 불법이었다고 규정하고, 피해 고려인들과 그 가족, 후손들의 전면적인 명예회복과 보상계획을 발표했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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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人のロシア移住3であり独立運動2はロシアのボルシェビキ革命(1917)以後内戦てソ連政府権力沿海州までんだ1923年頃までつまりレーニンの執権時期です

 

 

ロシア革命3段階けられます1日曜日事件ばれる19051民衆蜂起2次革命19172制定崩壊3次革命はその10共産革命です

 

1905民衆蜂起失敗わりましたがロシア社会きく動揺しました1907年頃安定産業化みましたが1次世界大戦1914参戦状況悪化しました皇帝ニコライ21915から直接戦闘指揮国政皇后せましたが皇后背負ったラスプーチンの失政国政破綻ります

 

 

19172月革命帝政ロシアが崩壊ブルジョア臨時政府樹立されその10月革命でケレンスキー臨時政府がボルセビキの高麗人社会急激変化えます沿海州はロシアの辺境でしたので革命伝播速度進行一律ではなかったので高麗人社会一貫して対処するのは困難でした

 

全露韓族中央会19172月革命樹立されたケレンスキー臨時政府ちに祝賀電文りましたが10月革命しては生半可反応しにくいでしたロシア全土革命赤軍反革命白軍対決沿海州では赤軍勝利する見通しがかったからです

 

 

にたたり日本がシベリア出兵19184すと全露韓族中央会敵軍白軍では政治的中立宣言19185する一方抗日闘争けることにしました

 

10月革命直前ロシアの高麗人10万人沿海州だけで81,825高麗人んでいましたがこれは沿海州全体人口31たりました10月革命政権ったレーニンは高麗人少数民族自治権土地分配約束したためほとんどの高麗人革命支持しましたレーニンの約束じて高麗共産党1922コミンテルンに高麗人自治めましたがまだ時期尚早だという理由られました

 

 

一方朝鮮三一運動19193こると沿海州でも大韓国民議会名義独立宣言書発表万歳運動国内進攻じて国権回復する計画めましたが沿海州進駐した日本軍高麗人独立運動弾圧日本軍沿海州から撤退させるための交渉したロシア政府弾圧実現できませんでした

 

 

鳳梧洞戰鬪(19206洪範圖崔振東)青山里戦闘(192010金佐鎭羅仲昭李範奭洪範圖)大勝利した独立軍日本軍反撃けてロシアに移動沿海州白軍日本軍相手った高麗人パルチザン部隊もアムールのスバボドニー(Свободный=自由)集結しました自由市集結した独立軍規模3千人りました

 

日本軍圧力ロシア赤軍高麗人独立軍とパルチザンを赤軍吸収するかあるいは武装解除しなければならずこの過程自由市惨事(1921)発生しましたそのロシアのパルチザンと独立軍敵軍編入されこれを拒否した独立軍武装解除されたり満州ったりしました

 

 

この時期高麗人はロシア革命支持パルチザンが敵軍協力して白軍日本軍いましたが結局独自性敵軍編入されたり弾圧武装解除されました

 

これは日本軍圧力のためでもありましたがレーニンの高麗人政策のためでもありましたレーニンは沿海州高麗人反革命勢力日本軍抵抗してくれることをんでいましたが連軍統制からして独自武装勢力成長することを憂慮したのです

 

 

結局ロシア革命内戦時期(1917-1923)高麗人日本軍による新韓村事件(19204)とソ連軍による自由市惨事(19216)などの被害けました(jc, 202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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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러시아 이주 3기이자 독립운동 2기는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1917) 이후 내전을 거쳐 소련 정부의 권력이 연해주까지 미치게 된 1923년경까지, 즉 레닌의 집권 시기입니다.

 

 

러시아 혁명은 3단계로 구분됩니다. 1차는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불리는 19051월의 민중 봉기, 2차 혁명은 19172월의 제정 붕괴, 3차 혁명은 그해 10월의 공산 혁명입니다.

 

1905년의 민중봉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러시아 사회는 크게 동요했습니다. 1907년경 안정을 되찾아 산업화가 진행됐지만 제1차 세계대전(1914)에 참전하면서 상황은 악화됐습니다. 황제 니콜라이2세는 1915년부터 직접 전투를 지휘하면서 국정을 황후에게 맡겼지만, 황후를 등에 업은 라스푸틴의 실정으로 국정은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1917년의 2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부르조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그해 10월 혁명으로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볼세비키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고려인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맞습니다. 연해주는 러시아의 변방이었으므로 혁명의 전파 속도가 느렸고, 진행도 일률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고려인 사회가 일관성 있게 대처하기 어려웠습니다.

 

전로한족중앙회(1917)2월 혁명으로 수립된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즉각 축하전문을 보냈지만, 10월 혁명에 대해서는 섣불리 반응하기 어려웠습니다. 러시아 전역에서 혁명 적군과 반혁명 백군의 대결이 계속됐고, 연해주에서는 적군이 승리할 전망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제가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일본인 보호를 이유로 시베리아 출병(19184)에 나서자 전로한족중앙회는 적군과 백군 사이에서는 정치적 중립을 선언(19185)하는 한편, 항일 투쟁은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10월혁명 직전 러시아의 고려인은 약 10만명에 달했고, 연해주에만 81,825명의 고려인이 살았는데 이는 연해주 전체 인구의 3분의1에 해당했습니다. 10월 혁명으로 집권한 레닌은 고려인을 포함한 소수민족들에게 자치권과 토지분배를 약속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고려인은 혁명을 지지했습니다. 레닌의 약속을 믿고 고려공산당은 1922년 코민테른에 고려인의 자치를 요구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한편 한국에서 삼일운동(19193)이 일어나자 연해주에서도 대한국민의회 명의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만세운동을 벌였고 국내진공을 통해 국권을 회복할 계획을 진행시켰지만, 연해주에 진주한 일본군의 고려인 독립운동 탄압과 일본군을 연해주에서 철수시키기 위한 협상에 나선 러시아 정부의 탄압으로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봉오동 전투(19206, 홍범도, 최진동)와 청산리 전투(192010, 김좌진, 나중소, 이범석, 홍범도)에서 크게 승리한 독립군은 일본군의 반격을 피해 러시아로 이동했고, 연해주에서 백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던 고려인 빨치산 부대들도 아무르주의 스바보드니(Свободный=자유)로 집결했습니다. 자유시에 집결된 독립군의 규모는 약 3천명에 이르렀습니다.

 

일본군의 압력 아래 러시아 적군은 독립군과 빨치산들을 적군에 흡수하거나 아니면 무장을 해제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자유시참변(1921)이 발생했습니다. 이후 러시아내 빨치산과 독립군은 적군에 편입되었고, 이를 거부한 독립군은 무장해제를 당하거나 만주로 돌아갔습니다.

 

 

이 시기의 고려인들은 러시아 혁명을 지지했고, 빨치산들이 적군과 협력해 백군 및 일본군과 싸웠지만, 결국 독자성을 잃고 적군에 편입되거나, 탄압을 받고 무장해제를 당했습니다.

 

이는 일본군의 압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레닌의 한인 정책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레닌은 연해주의 한인들이 반혁명 세력과 일본군에 저항해 주기를 바랐지만, 소련군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무장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우려했던 것입니다.

 

 

결국 러시아 혁명과 내전의 시기(1917-1923)에 고려인들은 일본군에 의한 신한촌 사건(19204)과 소련군에 의한 자유시 참변(19216) 등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jc, 202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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