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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川公演はどうして211かれたのだろうか春川公演する疑問はほとんどけたがまだ2つがっていた。 「いつなぜだった事実上この2つはいに関連していた

 

崔承喜1931年上半期地方公演慶尚キョンサン-全羅チョンラ-忠清チュンチョン地域だったところが釜山217-18大邱224-25公演春川公演221まったことで日程動線異常じた

 

春川公演春川報道機関有志招聘崔承喜舞踊団犠牲的譲歩実現したという報道があったことから春川招聘者公演日指定して公演要請したはずだ崔承喜はその日程わせるため日程調整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なぜ221だったのか

 

第1回春川世界花火大会(2018)。 1931年2月21日も春川で花火大会が行われた。 当時は日本の<紀元節>を祝うためだった。

 

春川公演関連新聞7調べても公演日221でなければならない理由れなかった221東亜日報新春事業として崔承喜さんを招聘したとじたが江原道2うにはまだまだもり気温氷点下だからだ

 

217朝鮮新聞「(崔承喜一行犠牲的譲歩によってやっと公演できたじたがその犠牲かはらかにしなかった219毎日申報220京城日報読者慰労のため崔承喜公演誘致することになったと説明した

 

毎日申報殺人的不景気々の感情ヨンが明太のようにしおれたことをしでも活気ごう、『京城日報記事内容だったが、「明太のカクテキわりにヘチマのかけらという表現使った

 

公演当日の1931年2月21日付の<朝鮮新聞>は、崔承喜舞踊公演に先立ち、1時間にわたって花火大会が行われたと報じた。

 

この2つの記事った不景気1929のニューヨーク証券市場暴落からまった大恐慌影響すだろうしかし米国大恐慌はすでに1年半以上全世界猛威るっていたため市民慰安行事がちょうどその221わ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理由にはならなかった

 

一方公演当日221発行された朝鮮新聞公演7時半まるが1時間前から花火まるじたどうして花火だったんだろう室内行事である舞踊公演事前行事花火大会をすることはなく行事のために用意されたにいない

 

ふと211日本建国記念日だという事実かんだ1873紀元節として制定され1948廃止されたがその後名前日本節句である春川招聘者たちは新設された春川公会堂紀元節おうと崔承喜舞踊団招待し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

 

1931年2月21日の春川公演は春川の日本人や親日朝鮮人士らが<紀元節>を祝うために崔承喜舞踊団を招いて行われたものと見られる。 しかし、この日のレパートリーは日帝の圧制に希望を失わないという内容がほとんどで、内容と形式が相反するおかしな公演となった。

 

しかし問題があった崔承喜27-8京城公会堂公演予定されており217-18には韓国旧正月連休わせて釜山プサン公演計画されていたその大邱テグをはじめ三南サムナム地方主要都市公演日程々とてられていた

 

崔承喜日程った春川人次善としてその週末214-15公演をしたかっただろうが朝鮮人芸術家紀元節公演をしたかったはずがないおそらく京城公会堂での公演から3日間春川公演強行するのは日程もぎりぎりでダンサーらに無理だというをしたのだろうしかもその週末春川公演をすることになれば旧正月公演わせて釜山到着することも不可能だった

 

崔承喜結局釜山公演日付17-18はそのまま維持するものの春川有力者らのロビーで拒否できなかった春川公演その翌週末21うことをめただろうそのため釜山公演計画通りできたが大邱公演とその地方公演3~4ずつ日程調整されたり順番わ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だろうこれが1931217<朝鮮新聞>じた崔承喜一行犠牲的譲歩だったのだ

 

春川紀元節祝賀舞踊公演211から2110日延期されたことで、「紀元節祝賀意味あせ新聞紀元節公演という表現使わなかったしかし春川招聘者花火祈願節雰囲気げようとしただろう公演日211からざかったため崔承喜春川公演をしながらも紀元節祝賀公演けられたものとられる(jc2021/8/27秒高;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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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공연은 어째서 2월21일에 열렸던 것일까? 춘천공연에 대한 의문은 거의 풀렸지만 아직 2가지가 남아 있었다. ‘언제였다. 사실상 이 두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었다.

 

최승희의 1931년 상반기 지방공연은 경상-전라-충청지역이었다. 그런데 부산(217-18)과 대구(224-25)공연 사이에 춘천 공연(221)이 낌으로써 일정과 동선에 이상이 생겼다.

 

춘천 공연이 춘천 언론사와 유지들의 초빙과 최승희무용단의 희생적 양보로 성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춘천의 초빙자들이 공연일로 지정해서 공연을 요청했을 것이다. 최승희는 그 일정에 맞추기 위해 다른 일정을 조정해야 했다. 221일이었을까?

 

제1회 춘천 세계 불꽃놀이(2018). 1931년 2월21일도 춘천에서 불꽃놀이가 있었다. 당시는 일본의 <기원절> 축하를 위해서였다.

 

춘천공연 관련 7개의 신문기사를 살펴도 공연 날짜가 221일이어야 했던 이유는 나타나지 않았다. 221일의 <동아일보>신춘사업으로 최승희양을 초빙했다고 보도했지만, 강원도의 2월을 봄이라고 하기에는 이르다. 아직 눈이 쌓이고 기온도 영하이기 때문이다.

 

217일의 <조선신문>“(최승희) 일행의 희생적 양보에 의해 겨우 공연할 수 있었다고 보도했지만, 희생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219일의 <매일신보>220일의 <경성일보>는 독자 위안을 위해 최승희 공연을 유치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매일신보>살인적 불경기로 사람들의 감정이 거칠어졌고 영()이 북어깍두기같이 시들어 진 것을 위안하며 약간이나마 활기를 부어 주고자최승희 공연이 마련되었다고 보도했고, <경성일보> 기사도 같은 내용이었지만 북어깍두기대신 수세미 조각이라는 표현을 썼다.

 

공연당일인 1931년 2월21일의 <조선신문>은 최승희 무용공연에 앞서 1시간동안 불꽃놀이가 이루어졌다고 보도했다.

 

이 두 기사가 말한 불경기는 1929년 뉴욕증시 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를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대공황은 이미 1년 반 이상 전 세계에 맹위를 떨치고 있었으므로, 시민 위안 행사가 꼭 그날(221) 열려야했던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공연 당일(221) 아침에 발행된 <조선신문>공연은 7시 반에 시작되지만 한 시간 전부터 불꽃놀이(煙火)가 시작된다고 보도했다. 왠 불꽃놀이였을까? 실내행사인 무용공연의 사전행사로 불꽃놀이를 하는 경우는 없으므로 무언가 다른 행사를 위해 마련된 것임에 틀림없다.

 

문득 211일이 일본의 건국기념일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1873기원절(紀元節)’로 제정되었다가 1948년에 폐지되었지만 이후 이름을 바꿔 지금도 지키는 일본 명절이다. 춘천의 초빙자들은 신설된 춘천공회당에서 기원절을 축하하려고 최승희무용단을 초청했던 것이 아닐까?

 

1931년 2월21일의 춘천공연은 춘천의 일본인들과 친일 조선인 인사들이 <기원절> 축하를 위해 최승희무용단을 초빙하여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날의 레퍼토리는 일제의 압제에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내용이 대부분이어서, 내용과 형식이 상반되는 이상한 공연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최승희는 27-8일의 경성공회당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고, 217-18일에는 한국의 설 연휴에 맞추어 부산공연이 계획되어 있었다. 그 후에도 대구를 비롯한 삼남지방의 주요도시 공연 일정이 줄줄이 세워져 있었다.

 

최승희의 일정을 알게 된 춘천인들은 차선책으로 그 주말인 214-15일에 공연을 갖고 싶었겠지만, 조선인 예술가가 기원절 공연을 하고 싶었을 리 없다. 아마도 경성공회당 공연 3일 만에 춘천공연을 강행하는 것은 일정도 빠듯하고 무용수들에게 무리라는 핑계를 대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주말에 춘천 공연을 하게되면 설 공연에 맞춰 부산에 도착하기도 불가능했다.

 

최승희는 결국 부산공연 날짜(17-18)는 그대로 유지하되, 춘천 유력인사들의 로비로 거부할 수 없었던 춘천공연은 그 다음 주말인 21일에 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그에 따라 부산공연은 계획대로 할 수 있었지만 대구공연과 그 이후의 지방 공연들은 3-4일씩 일정이 조정되거나 순서가 바뀌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이 1931217일의 <조선신문>가 보도했던 최승희 일행의 희생적 양보였던 것이다.

 

춘천의 기원절 축하 무용공연이 211일에서 21일로 열흘 미뤄짐에 따라 기원절 축하의 의미는 퇴색했고, 신문들도 기원절 공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춘천의 초빙자들은 불꽃놀이로 기원절 축하분위기를 살리려 했을 것이다. 공연일이 211일에서 멀어짐으로써 최승희도 춘천공연을 하면서도 기원절 축하공연은 피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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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221崔承喜春川公演われたのは春川公会堂だったすべての新聞記事がそのように報道したしかしその公会堂がどこにあったのかについては記録がないまるでまあそんなものを記録必要があるかな春川たらそれがどこかかるはずなのに…」というようなものだ

 

はそうだったはずだしかしわずか80歳月れただけなのに春川公会堂建物えたのはもちろんそのあった位置する記録さえっていない地域同様本来はいろいろな記録があっただろうが日本敗退後こった韓国戦争春川廃墟過去する記録大半えてしまったのだ

 

1929年12月20日の『毎日申報』は春川公会堂が完成し、12月15日に落成式を行ったと報じた。

 

19291218朝鮮新聞によると春川公会堂完成落成式ったのは19291215だった道庁所在地としては公会堂つのが非常いわけだ<三五会><春川繁栄会>など日本人中心春川市発展のための各種団体19278から公会堂新築のための期成会設立募金運動った1928910東亜日報京城閔泳輝ミン·ヨンヒ2千圓春川崔良鎬チェ·ヤンホ1千圓寄付したとじたのをると春川公会堂設立のため日本人だけでなく朝鮮人積極的参加したものとられる

 

192944朝鮮新聞公会堂位置する最初糸口提供した。 「公会堂敷地1候補地だった面事務所まり43地鎮祭ったじたからだ49毎日新報公会堂場所役場右側だと525朝鮮新聞春川面事務所東側まった公会堂場所ならし工事まったじたつまり春川公会堂春川面事務所のすぐ東側だったのだ

 

「土地調査地籍院図」(1916)によると、京城公会堂の住所は「春川郡府内面假淵里67-1番地」(青い円)だった。 赤い円は府内面事務所の位置。

 

一方陸軍歩兵学校卒業して任官され春川配属された李大用·デヨン1925-2017将軍回顧録には1950625回想には春川公会堂する記録されていた

 

下宿竹林洞稜線にあった傾斜した道路沿って300メートルほどくと東西たわる出会この交差点西南春川公会堂というきな建物があった600収容できるこの建物当時大衆集会音楽演奏会その他何特別公演がある利用する公共施設だった」。

 

この回顧によると春川公会堂1950625まで健在だったこの証言てくる竹林洞峠稜線とは六林峠六林峠からるとたわる現在明洞路したがって春川公会堂位置陸林峠道明洞路交差点西南角そこは明洞路中央市場入口<文化劇場(1961)>場所だったのだ

 

今日のネイバー地図に表示した春川面事務所(赤い円)と春川公会堂(パランウォン)の位置。

 

確認のために1916作成された土地調査地籍原図調査した当時住所として江原道春川郡府内面假淵里66番地国有地表示された春川面事務所場所確認されたがその場所現在ブラウン5番街という雑居ビルの東京寿司がある建物場所だった

 

その東側富内面假淵里67-1番地春川公会堂当時住所だった住所江原道春川市竹林洞7-1番地この住所地<文化劇場>されそこにてられた<春川明洞SRタワー>今日住所一致する

 

かつて<春川公会堂(1929-1950年代初め)>と<文化劇場(1961-2004)>があった今日の<春川明洞SRタワー>ビル。

 

つまり<春川公会堂><文化劇場1961)>があった場所であることが確認された<文化劇場><昭陽劇場(1956)><陸林劇場(1967)>とともに春川3大公開館として春川市民されたが1970年代のテレビ1980年代のカラーテレビの普及経営難2005には6つの上映館<プリマス春川>2008には12上映館<春川CGV>開業すると廃業した

 

<文化劇場>はしばらく<ブロードウェイ劇場>改名して変身みたが結局劇場廃業してくの土地追加購入5百坪敷地10階建<明洞SRタワー>建設したが現在はある法的訴訟進行中建物使われていないようだ。 (jc、2021/8/27秒高;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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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221일의 최승희 춘천공연이 열린 곳은 <춘천공회당>이었다. 모든 신문기사들이 그렇게 보도했다. 그러나 그 공회당이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마치 , 그런 걸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을까? 춘천에 오면 그게 어딘지 다 알텐데...’하는 투이다.

 

옛날에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불과 80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지금은 춘천공회당의 건물이 사라진 것은 물론, 그것이 있었던 위치에 대한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이런저런 기록이 있었겠지만 일본의 패퇴 이후 벌어진 한국전쟁 통에 춘천은 쑥대밭이 되어버렸고, 과거에 대한 기록들이 대부분 불타버렸던 것이다.

 

1929년 12월20일의 <매일신보>는 춘천공회당이 완성되어 12월15일 낙성식을 가졌다고 보도했다.

 

19291218일의 <조선신문>에 따르면 춘천공회당이 완성되고 낙성식을 가진 것은 19291215일이었다. 도청소재지치고는 공회당을 가진 것이 매우 늦은 셈이다. <삼오회><춘천번영회> , 일본인 중심의 춘천시 발전을 위한 각종 단체들은 19278월부터 공회당 신축을 위한 기성회를 설립하고 모금운동에 들어갔다. 1928910일의 <동아일보>는 경성의 민영휘가 2천원, 춘천의 최양호가 1천원을 기부했다고 보도한 것을 보면 춘천공회당 설립을 위해 일본인들뿐 아니라 조선인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944일의 <조선신문>이 공회당 위치에 대한 첫 실마리를 제공했다. “공회당 부지는 제1후보지였던 면사무소 옆으로 결정되었고 43일 지진제(地鎭祭)를 올렸다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49일의 <매일신보>는 공회당 자리가 면사무소 우측이라고 보도했고, 525일의 <조선신문>춘천면사무소 동편 옆으로 정해진 공회당 자리에서 땅을 고르는 지균(地均)공사가 시작됐다고 보도했다. 즉 춘천공회당은 춘천면사무소의 바로 동쪽 옆이었던 것이다.

 

일제의 <토지조사 지적원도(1916)>에 따르면 경성공회당의 주소는 <춘천군 부내면 가연리 67-1번지(파란원)>였다. 붉은원은 부내면사무소 자리.

 

한편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하고 임관되어 춘천에 배속되었던 이대용(李大鎔, 1925-2017) 장군의 회고록에는 1950625일의 회상 중에는 춘천공회당에 대한 기록도 나타나 있었다.

 

하숙집은 죽림동 고개 능선 위에 있었다. 경사진 도로를 따라 약 300미터쯤 북쪽으로 내려가면 동서로 가로놓인 넓은 길과 만나게 된다. 바로 이 교차로 서남모퉁이에 춘천공회당이라는 큰 건물이 있었다. 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건물은 당시 대중 집회나 음악연주회, 기타 무슨 특별 공연이 있을 때 이용하는 공공시설이었다.”

 

이 회고에 따르면 춘천공회당은 1950625일까지 건재했다. 이 증언에 나오는 죽림동 고개 능선이란 육림고개를 가리키며, 육림고개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가로놓인 넓은 길은 지금의 명동로이다. 따라서 춘천공회당의 위치는 육림고갯길과 명동로 교차로 서남모퉁이였고, 그곳은 명동로쪽 중앙시장 입구에 가까운 <문화극장(1961)> 자리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네이버지도에 표시한 춘천면사무소(붉은원)과 춘천공회당(파란원) 위치.

 

확인을 위해 1916년에 작성된 토지조사 원적도를 조사했다. 당시 주소로 <강원도 춘천군 부내면 가연리 66번지>국유지로 표시된 춘천면사무소 자리로 확인되었는데, 그 자리는 지금의 <브라운 5번가>라는 상가복합건물 중에서 <도쿄스시>가 있는 건물자리였다.

 

그 동쪽 옆인 <부내면 가연리 67-1번지>가 춘천공회당의 당시 주소였다. 지금의 주소는 <강원도 춘천시 죽림동 7-1번지>이다. 이 주소지는 <문화극장>이 헐리고 그 자리에 들어선 <춘천 명동 SR타워>의 오늘날 주소와 일치한다.

 

과거 <춘천공회당(1929-1950년대초)>와 <문화극장(1961-2004)>이 있었던 <춘천 명동 SR타워> 빌딩.

 

<춘천공회당(1929)> 자리는 <문화극장(1961)>이 있던 자리로 확인됐다. <문화극장><소양극장(1956)>, <육림극장(1967)>과 함께 춘천의 3대 개봉관으로 1980년대 초까지도 춘천시민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1970년대의 티비, 1980년대의 칼라티비의 보급으로 경영난을 겪기 시작했고, 20056개상영관을 가진 <플리머스 춘천>, 200812개 상영관을 가진 <춘천CGV>이 개업하자 극장을 계속하기 어려웠다.

 

<문화극장>은 한동안 <브로드웨이 극장>으로 개명하면서 변신을 시도했으나 결국 극장을 폐업하고 인근 땅을 추가 매입, 5백평 부지에 10층짜리 <명동 SR타워>를 건립했으나, 지금은 모종의 법적 소송이 진행 중이어서 건물이 사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jc, 2021/8/27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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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221春川公演参加した崔承喜舞踊団員何人ぐらいになっただろうか公演プログラムも発見されておらず各新聞もこれを報道していないため確認する方法はないがレパートリーを把握すれば推論することはできる

 

1931226毎日申報29東亜日報らかにした春川公演(2/21)釜山公演(2/17-18)のレパートリーを総合すると春川公演発表作品1931110-12団成社公演発表された14作品一致するものと推定される

 

ここに春川公演初演作品としてエレジーの独舞わり全部15作品だったその15作品のタイトルと3回発表会各作品発表したダンサーをべるとのようになる

 

1: 1.<らは太陽(崔承喜, 研究生一同)>2.<らのロマンス>(崔承喜, 李玉熙, 安貞玉)3.<浄土舞姫>(張桂星, 安貞玉)4.<らのロマンス>(崔承喜)5.<愛級風景>(崔承喜, 研究生數名),

2: 1.印度人悲哀」(崔承喜)、2.西班牙少女舞踊」(金銀波, 李玉熙, 張桂星)、3.布哇·セレナーデ」(崔承喜金銀波)、4.郷土舞踊」(盧載信, 張桂星李貞子;

3: 1.<印度人恋歌>崔承喜李玉熙)2.<ジプシーの>研究生一同)3.<狂想曲>崔承喜)4.<この兵隊ブサイク>張桂星)5.<らの行進>(崔承喜研究生一同)>;その:春川公演初演作品<エレジーの独舞>

 

1930年10月15日の『朝鮮日報』に掲載された崔承喜の第2回新作舞踊発表会プログラム。 春川公演のレパートリーは概してこの公演の発表作品で構成されていることが確認された。

 

作品出演者ると崔承喜のほかに名前登場した舞踊家李玉熙, 安貞玉, 張桂星, 金銀波, 盧載信, 李貞子6しかし各種メディアに掲載された作品写真ると群舞らは太陽には7出演、「らの行進には6、「埃及風景にも6登場する春川公演出演したダンサーは崔承喜なくとも7人以上だった

 

にも音楽担当者とスタッフがいた1931110東亜日報によると崔承喜1931公演からピアノ伴奏李光俊(·グァンジュン)バイオリン伴奏崔又隱(チェ·ウウン)参加にも蓄音機音楽担当者がいたため伴奏および音楽部員なくとも3いた

 

19301015朝鮮日報によると照明舞台監督元雨田(ウォン·ウチョン)金正煥(キム·ジョンファン)同時あるいは公演別崔承喜公演舞台装置照明担当めた照明には1~2助手がもっと必要だったはずなので衣装小物担当者までえるとなくとも3~4のスタッフが参加したはずだ

 

1929年12月19日の『朝鮮日報』に掲載された12月15日に落成した<春川公会堂>の写真。

 

ここにマネージャー遂行してくれたのチェ·スンイルをめれば地方巡業時崔承喜舞踊団規模はおよそ15人前後だったことがかる

 

春川公演当時20ぎなかった崔承喜15人前後舞踊団いるのに困難はなかっただろうかしかも地方巡業には作品公演することだけでなく生活一部まで統制でき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だろう対外交渉会計問題までなったら研究所いることは容易でない問題だっただろう

 

1927年ごろ、崔承喜の舞踊留学時代、武蔵境の石井漠舞踊研究所で撮った写真。 石井舞踊団は大半が家族によって経営された。

 

師匠石井漠舞踊団内部問題大部分家族関係解決した初期石井舞踊団のダンサーは石井小浪石井英子らの家族内部マネージャーや会計担当石井漠石井八重子担当した

 

かった崔承喜場合作品活動以外舞踊団いることがきな負担だったのかもしれない京城舞踊研究所経営には長男崔承一(チェ·スンイル)がマネージャー父親崔濬鉉(チェ·ジュンヒョン)次男崔承五(チェ·スンオ)まで総動員されたしかしらのけを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地方巡業崔承喜くの困難経験したと推測される(jc2021/8/27秒高;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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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221일의 춘천 공연에 참가한 최승희 무용단원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공연 프로그램도 발견된 바 없고, 신문들도 이를 보도하지 않았으니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레퍼토리를 파악된다면 거꾸로 추론해 볼 수는 있다.

 

1931226일의 <매일신보>29일의 <동아일보>가 밝힌 춘천공연(2/21)과 부산공연(2/17-18)의 레퍼토리를 종합해 볼 때 춘천공연의 발표작품은 1931110-12일의 단성사 공연에서 발표된 14개 작품과 일치할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춘천공연 초연작품으로 <엘레지의 독무>가 추가되어 모두 15작품이었다. 15개 작품의 제목과 <3회발표회>에서 각 작품을 발표한 무용수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1. <그들은 태양을 구한다>(최승희, 연구생 일동), 2. <방랑인의 비애>(최승희, 이옥희, 안정옥)>, 3. <정토의 무희>(장계성, 안정옥), 4. <그들의 로맨스>(최승희), 5. <이집트 풍경>(최승희, 연구생 수명);

2: 1. <인도인의 비애>(최승희), 2. <스페인 소녀의 무용>(김은파, 이옥희, 장계성), 3. <하와이 세레나데>(최승희, 김은파), 4. <향토무용>(장계성, 노재신, 이정자);

3: 1. <인도인의 연가>(최승희, 이옥희), 2. <집시의 무리>(연구생 일동), 3. <광상곡>(최승희), 4. <이 병정 못났다>(장계성), 5. <그들의 행진>(최승희, 연구생 일동); 기타: 춘천공연 초연작품 <엘레지의 독무>(최승희).

 

1930년 10월15일의 <조선일보>에 게재된 최승희의 제2회 신작무용발표회 프로그램. 그의 춘천공연 레퍼토리는 대체로 이 공연의 발표작품으로 구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작품 출연자들을 살펴보면 최승희 외에 이름이 등장한 무용수는 이옥희, 안정옥, 장계성, 김은파, 노재신, 이정자의 6명이다. 하지만 각종 매체에 실린 작품 사진을 보면, 군무 <그들은 태양을 구한다>에는 7명이 출연했고, <그들의 행진>에는 6, <이집트 풍경>에도 6명이 등장한다. 따라서 춘천공연에 출연한 무용수는 최승희를 포함하여 최소한 7명이상이었다.

 

그밖에도 음악반주 담당자와 스탭이 있었다. 1931110일의 <동아일보>에 따르면 최승희의 1931년 공연부터 피아노 반주에 이광준(李光俊), 바이얼린 반주에 최우은(崔又隱)이 참여하기 시작했고, 그밖에도 축음기를 다루는 음악담당자가 있었을 것이므로 반주 및 음악부원은 적어도 3명이었다.

 

19301015일의 <조선일보>에 따르면 조명과 무대감독 원우전(元雨田)과 김정환(金正桓)이 동시에, 혹은 공연별로 각각 최승희 공연의 무대장치와 조명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조명에는 1-2인의 조수가 더 필요했을 것이므로, 의상과 소품 담당자까지 더한다면 적어도 3-4명의 스탭이 참여했을 것이다.

 

1929년 12월19일의 <조선일보>에 실린 12월15일 낙성된 <춘천공회당> 사진.

 

여기에 매니저 역할을 맡은 큰오빠 최승일을 포함하면, 지방 순회공연 때의 최승희 무용단 규모는 대략 15명 내외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춘천공연 당시 20세에 불과했던 최승희가 15명 내외의 무용단을 이끄는데 어려움은 없었을까? 더구나 지방 순회공연 때에는 때는 작품과 공연에 관한 것뿐 아니라 생활의 일부까지 통제할 수 있어야 했을 것이다. 대외교섭이나 회계의 문제까지 겹친다면 연구소를 인솔하는 일은 녹녹치 않은 문제였음에 틀림없다.

 

1927년경, 최승희의 무용유학 시절, 무사시사카이의 이시이바쿠무용연구소에서 찍은 사진. 이시이무용단은 대부분 가족에 의해 경영됐다.

 

스승 이시이 바쿠는 무용단 내부의 문제를 대부분 가족관계로 해결했었다. 초기 이시이무용단의 무용수들은 이시이 코나미와 이시이 에이코 등의 가족이었고, 내부 매니저와 회계담당은 부인 이시이 야에코가 담당했었다.

 

나이가 어렸던 최승희의 경우 작품 활동 이외에 무용단을 인솔하는 일이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경성의 무용연구소 경영에는 큰오빠 최승일이 매니저 역할을 맡고, 부친 최준현과 작은오빠 최승오까지 총동원되었다. 그러나 이들도 각기 직장인이었으므로, 가족의 도움을 얻을 수 없었을 지방 순회공연 때에는 최승희가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jc, 2021/8/27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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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喜春川公演のレパートリーはつからなかった公演プログラムもなく公演報道した新聞もそののレパートリーを全体的報道しなかったただ1931226毎日申報がその発表作品内容といくつかののようにじた

 

舞踊<らは太陽>,<浄土舞姬>,<放浪人悲哀>,<エレジーの独舞>,<愛級風景>,<布哇セレナ->3けて15演舞して... 完全観衆全精神<キャッチー>あちこち勝手きずりいっきりせてしまった」。

 

この日公演された作品3かれて15という以前発表会ていた19301114京城公会堂われた京城女子高学生慈善公演でも314作品発表され1931110團成社崔承喜第3回舞踊発表会発表曲314作品だった

 

1931年1月11日の『東亜日報』に掲載された崔承喜の現代舞踊『彼らの行進』、この作品は1931年2月21日の春川公演でも発表された。

 

新聞記事報道されたレパートリーは6作品だけだが29東亜日報によると217-18釜山公演発表作品には<らは太陽><らのロマンス><埃及風景><郷土舞踊><印度人悲哀><放浪人悲哀>などまれていることが報道された地方公演のレパートリーはじだったはずなので春川釜山公演のレパートリーをわせると9つの作品らかになったわけだ

 

この9作品はいずれも1931110-12<崔承喜第3回発表会>のレパートリーだ<3回発表会>発表作品14作品であったがここに<エレジーの独舞>わせると15作品になる

 

崔承喜19301021朝鮮日報寄稿した舞踊についてという自身初期作品印度人悲哀1929)」についてのように説明した

 

みんな人類としてじる共通不平感興表現する舞踊それは世界共有物でしょうえば振付した1回作品印度人悲哀などはその悲哀印度人にだけあるのではなくそのような悲哀った民族ならみんなじにな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1930年1月30日『毎日申報』に掲載されたチェ&middot;スンヒの創作舞踊「印度人の悲哀」。 この作品も春川公演のレパートリーだった。

 

崔承喜はまた、『印度人悲哀種類作品らは太陽げながらそれと正祖作品についてこのようにべている

 

2回新作<らは太陽>のようなものは虐待けながら光明している々の心情表現したものでそれはそのような感情ったであればもがじることができるものでありそのにも<印度人恋歌><月夜><放浪人悲哀><この兵隊ブサイク>がすべてそのであり…。」

 

その作品なくても朝鮮人独特表現した作品外国異国的紹介する作品についてものようにべている

 

そのでも<浄土舞姬>のようなものはかつての朝鮮人っていた独特壮漢太平時代ったあの時代芸術若干現代化してけしたものであり... 南陽情景布哇小夜曲みたいなものと··· <埃及風景>のようなものはその情緒表現するためのものです」。

 

1930年10月22日の『朝鮮日報』に報道された崔承喜の群舞作品『彼らは太陽を探す』。 春川公演で発表された1部の最初の作品だった。

 

しかし<エレジーの独舞>春川公演以前発表されたという記録はなかった従来のリストではエレジーの独舞創作年代1932記録しているが1931226毎日申報』」によると、「エレジーの独舞春川公演初演だった

 

崔承喜1933520東京·日本青年館かれた近代女流舞踊家大会参加した彼女エヘヤ·ノアラ1933)」とともにエレジー1931)」んで発表した<エヘヤ·ノアラ>崔承喜朝鮮舞踊めた最初作品であり代表作とされる

 

したがって<エヘヤノアラ>共選した<エレジー>崔承喜自らその完成度自信った現代舞踊代表作品であったことがかるがその初演春川公演だったのだ。 (jc、2021/8/27秒高;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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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춘천공연 레퍼토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공연 프로그램도 없고, 공연을 보도한 신문들도 그날의 레퍼토리를 전체적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다만 1931226일의 <매일신보>가 그날 발표작품의 내용과 몇 가지 예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무용은 <그들은 태양을 구한다>, <정토의 무희>, <방랑인의 비애>, <엘레지의 독무>, <애급풍경>, <하와이 세레나-> 3부로 나누어 15종을 연무하여 ... 완전히 관중의 온 정신을 <캣취>하여 이리저리 마음대로 줄줄 끌고 다니며 여지없이 매혹하여 버렸었다.”

 

이날 공연된 작품이 ‘3부로 나뉘어 15이라는 점은 이전의 발표회와 유사했다. 19301114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경성여자고학생 자선공연>에서도 314작품이 발표되었고, 1931110일 단성사의 <최승희제3회무용발표회>의 발표곡도 3부의 14작품이었다.

 

1931년 1월11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최승희의 현대무용 <그들의 행진>, 이 작품은 1931년 2월21일 춘천공연에서도 발표됐다.

 

신문 기사에 보도된 레퍼토리는 6개 작품뿐이지만 29일의 <동아일보>에 따르면 217-18일의 부산공연의 발표 작품 중에는 “<그들은 태양을 찾는다>, <그들의 로맨스>, <애급풍경>, <향토무용>, <인도인의 비애>, <방랑인의 설움> 이 포함되어 있음이 보도되었다. 지방 공연의 레퍼토리는 같았을 것이므로 춘천과 부산 공연의 레퍼토리를 합치면 9개 작품이 밝혀진 셈이다.

 

9개 작품은 모두 1931110-12일의 <최승희 제3회발표회>의 레퍼토리이다. <3회발표회> 발표 작품이 14작품이었는데 여기에 <엘레지의 독무>를 합치면 15작품이 된다.

 

최승희는 19301021일의 <조선일보>에 기고한 무용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자신의 초기 작품 <인도인의 비애(1929)>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30년 1월30일 <매일신보>에 실린 최승희의 창작무용 <인도인의 비애>. 이 작품도 춘천 공연의 레퍼토리였다.

 

다 같은 인류로서 느끼는 공통되는 불평이나 감흥을 표현하는 무용, 그것은 세계의 공유물일 것입니다. 가령 내가 안무한 제1회 작품 <인도인의 비애>같은 것은 그 비애가 인도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비애를 가진 민족이면 다 같은 그러한 느낌을 가질 것이 아닙니까?”

 

최승희는 또 <인도인의 비애>와 비슷한 종류의 작품으로 <그들은 태양을 찾는다>을 들면서 그와 유사한 정조의 작품들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2회 신작 중에서 <그들은 태양을 찾는다> 같은 것은 학대를 받으면서 캄캄한 속에서 광명을 찾고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니, 그것은 그러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다 느낄 수 있는 것이며, 그 외에도 <인도인의 연가>, <달밤에>, <방랑인의 설움>, <이 병정 못났다>가 다 그러한 종류이며...”

 

그밖에 작품의 수는 적더라도 조선 사람의 독특한 미를 표현한 작품과 외국의 이국적인 미를 소개하는 작품들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서술한 바 있다.

 

1930년 10월22일의 <조선일보>에 보도된 최승희의 군무작품 <그들은 태양을 찾는다>. 춘천공연에서 발표된 1부 첫번째 작품이었다.

 

그중에도 <정토의 무희>같은 것은 과거의 우리 조선 사람이 가지고 있던 독특한 미와 장한의 태평시대를 노래하던 그때 그 시절의 예술을 약간 현대화하여 안무한 것이며... <남양의 정경, 하와이 소야곡> 같은 것과 ... <이집트 풍경> 같은 것은 그 나라의 정서와 미를 표현하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엘레지의 독무>는 춘천 공연 이전에 발표되었다는 기록이 없었다. 기존의 연대표들에서는 <엘레지의 독무>의 창작연대를 1932년으로 기록했지만, 1931226일의 <매일신보>에 따르면 <엘레지의 독무>는 춘천 공연이 초연이었던 것이다.

 

최승희가 1933520일 도쿄 일본 청년관에서 열린 <근대여류무용가대회>에 참가했을 때, 그는 <에헤야 노아라(1933)>와 함께 <엘레지(1931)>를 골라 발표했었다. <에헤야 노아라>는 최승희가 조선무용을 시작한 최초의 작품이자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따라서 <에헤야노아라>와 함께 가려 뽑은 <엘레지>는 최승희 스스로 그 완성도에 자신감을 가졌던 현대무용의 대표작품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초연은 춘천공연이었다. (jc, 2021/8/27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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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221崔承喜春川公演主催4春川支局連合だった。 『東亜日報朝鮮新聞』、『京城日報毎日申報だった。 『東亜日報まれたのは意外3日本語新聞総督府機関紙だったためだ

 

広告文けば春川公演する記事6つだったいずれも春川発記事中央紙地方版掲載された春川にも独自新聞があったなら報道がよりしくなっただろうが中央紙春川発記事して簡略だったそれにもかかわらずこれらの記事じて崔承喜春川公演面貌ることができた公演終了後226毎日申報はこの公演についてのようにじた

 

1931年2月26日の『毎日申報』は、崔承喜の春川公演が盛況を呈したと報じた。

 

崔承喜さんの新作舞踊公演会11日夕方春川公会堂かれたが開会定刻1時間前にすでに四方からまった観衆によってそのようなきな公会堂文字通立錐余地なくいっぱいになったその々とせる観衆はまだドアの波打っていたがやむを満員入場をさせ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ためたせなかった数百人観衆あるいはドアをってあるいはけてんだこれに春川警察署からは十数人正私服警官出動らを慰撫してすことに努力するなど空前絶後大盛況めた··· 10時半大盛況のうちに舞踊会まった

 

この記事崔承喜春川公演観客動員大盛況したと叙述した公会堂定員500ほどだったがそのほかにも数百人入場できないままドアをってんだりけてというがいたというらを帰宅させるために警官10あまりが出動したほどだった

 

公演盛況したのは崔承喜名声とともにマスコミ報道のためだったはずだ219京城日報毎日新報崔承喜朝鮮'ベストワン'天才的乙女舞踊家紹介211東亜日報春川にとってめてのことだ意味づけた

 

1931年2月17日の『 朝鮮新聞 』は崔承喜舞踊団の春川公演は「崔承喜一行の犠牲的譲歩」として開かれることができたと報じた。

 

217朝鮮新聞もこの春川公演崔承喜一行犠牲的譲歩によってやっと公演できるようになったので今後数年また公会機会ることがしいとし公演当日にも朝鮮新聞今後数年間春川崔承喜さんの芸術ることができないとし、「舞踊公演開幕7時半だがその1時間前から幕前行事まるはずだ

 

これは公演良質性希少性広報であったがそれにえて効用性戦略駆使された219毎日申報殺人的不景気々の感情"明太のカクテキ"のようにえたことをしでも活気もうとするというのが公演目的なのでこのさずにけつけしと生活潤沢存分満喫することをめた

 

1929米国証券市場まった大恐慌余波日本朝鮮ったなので殺人的不景気としこれによって明太カクテキのようにんでしまった々の感情活気むとったのだ。 「明太カクテキしているのかからないがそれがどういう意味なのか見当しくない

 

1931年2月20日の<京城日報>はチェ&middot;スンヒの春川公演が「殺人的な不景気で疲弊した春川市民を慰めるために開かれた」と報じた。

 

4つの中央紙多角的広報戦略効果発揮したようだ春川公会堂500をすべてめたにもかかわらず数百人公演ないまま帰宅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通常ならこのように予想外くの観客まった場合崔承喜公演日数延長したり公演回数やしたりして観客不満じないように配慮したりした

 

しかし春川ではそれができなかった224大邱公演日程まっていたためだった21春川公演22日朝早春川出発その午後京城到着しても23日朝には大邱出発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ためだ。 『朝鮮新聞予告通崔承喜春川公演実現しなかった(jc2021/8/25秒高;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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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221일의 최승희 춘천공연 주최는 4개 신문 춘천지국 연합이었다. <동아일보><조선신문>, <경성일보><매일신보>였다. <동아일보>가 포함된 것이 뜻밖이다. 다른 세 신문은 일본어 신문이거나 총독부 기관지였기 때문이다.

 

광고문을 빼면 춘천공연에 대한 기사는 모두 6개였다. 모두 춘천발 기사로 중앙지의 지방판에 실렸다. 춘천에도 독자적인 신문이 있었다면 보도가 더 자세했겠지만, 중앙지의 춘천발 기사는 대체로 간략했다. 그럼에도 이 기사들을 통해 최승희 춘천공연의 면모를 짐작해 볼 수는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인 226일의 <매일신보>는 이 공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931년 2월26일의 <매일신보>는 최승희의 춘천공연이 성황을 이루었다고 보도했다.

 

최승희양 신작무용공연회는 지난 11일 저녁 춘천공회당에서 열렸는데 개회 정각한 시간 전에 벌써 사방에서 운집한 관중으로 인하여 그처럼 큰 공회당도 문자 그대로 입추의 여지없이 메어버려서, 그 후로 속속 밀려드는 광중은 아직도 문밖에서 물결치고 있었으나 부득이 만원으로 입장을 시키지 못하였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수백 관중은 혹은 문을 차고 들이밀며 혹은 창문을 열고 뛰어드는 판에 춘천경찰서로부터는 십여 명 정사복 경관이 출동하여 그들을 위무하여 돌려보내기에 노력하는 등 실로 공전절후의 대성황을 극하였다. ... 밤 열시 반 대성황리에 무용회의 막이 닫히었다.”

 

이 기사는 최승희 춘천공연이 관객 동원의 면에서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서술했다. 공회당의 정원은 5백명 정도였으나, 그 외에도 수백명이 더 몰려와 입장하지 못한 채 문을 차고 들이밀거나 창문을 열고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다. 이들을 귀가시키기 위해 경관 10여명이 출동했을 정도였다.

 

공연이 성황을 이룬 것은 최승희의 명성과 함께 언론보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219일의 <경성일보><매일신보>최승희는 조선이 가진 베스트원의 천재적 처녀무용가라고 소개했고, 211일의 <동아일보>춘천에 있어서는 처음 되는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1931년 2월17일의 <조선신문>은 최승희무용단의 춘천공연은 "최승희 일행의 희생적 양보"로 열릴 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217일의 <조선신문>도 이 춘천 공연이 최승희 일행의 희생적 양보에 의해 겨우 공연할 수 있게 된 것이어서, 향후 몇 년 다시 공회의 기회를 얻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했고, 공연당일에도 <조선신문>앞으로 수년간은 춘천에서 최승희양의 예술을 볼 수 없을 것이라면서, “무용공연의 개막은 7시 반이지만 그 1시간 전부터 막전 행사가 시작되기 때문에 공회당에 일찍 도착해야할 것이라고도 했다.

 

이는 공연의 양질성과 희소성의 홍보였지만, 그에 더해 효용성 전략도 구사되었다. 219일의 <매일신보>살인적 불경기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감정이 북어깍두기같이 시들어진 것을 위안하며 약간이나마 활기를 부어주고자 함이 공연의 목적이므로 이날을 놓치지 말고 달려와 영혼의 위안과 생활의 윤택을 마음껏 만끽하기를 권했다.

 

1929년 미국 증시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가 일본과 조선을 덮쳤을 때이므로 살인적 불경기라고 했고, 이로 인해 북어깍두기같이 시들어버린 사람들의 감정을 위안하고 활기를 불어넣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북어깍두기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짐작하기가 어렵지는 않다.

 

1931년 2월20일의 <경성일보>는 최승희의 춘천공연이 "살인적인 불경기로 피폐해진 춘천시민들을 위안하기 위해 열렸다"고 보도했다.

 

4개 중앙지의 다각적인 홍보 전략은 효과를 발휘했던 것 같다. 춘천공회당의 5백석을 모두 채우고도 수백 명이 공연을 보지 못한 채 귀가해야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렇게 예상 밖으로 많은 관객이 몰렸을 경우 최승희는 공연 날수를 연장하거나 공연 횟수를 늘려서 관객들이 불만을 갖지 않도록 배려하곤 했었다.

 

그러나 춘천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224일 대구공연의 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21일 춘천 공연을 마치고 22일 아침에 일찍 춘천을 출발해 그날 오후에 경성에 도착하더라도 23일 아침에는 다시 대구로 출발해야했기 때문이다. <조선신문>의 예고대로 최승희의 춘천공연은 다시 이뤄지지 못했다. (jc, 2021/8/27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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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原道民日報>咸光福(ハム·グァンボク)記者李鮮吉(·ソンギル)李英一(·ヨンイル)父親日本植民地時代初代江原道長官めた李圭完(·ギュワン, 1862-1946崔承喜春川公演をあっ周旋した可能性主張した立証資料提示されていないためまだ仮説であるしかし蓋然性排除できないため咸光福記者仮説検証する準備必要

 

まず李圭完崔承喜春川公演っていたならそれは可能なことだっただろう当時春川では日本人朝鮮人李圭完ほど影響力のあるがいなかったからだ江原道長官1908-1918咸鏡南道長官1918-1924歴任した62春川引退したが依然として全国的有名人だった

 

退任後李圭完中枢院参議職などの政務職ったが経済産業社会活動継続した東洋拓殖会社顧問(1924-1933)朝鮮山林協会理事(1925-1937)物産奨励会理事(1927)朝鮮農業会顧問(1927)京城商工協会相談(1930)漢城柴炭株式会社設立(1936)朝鮮新聞社取替役(1936-1941)として新刊会(1927-1931)にも参加した

 

日本による植民地時代 江原道と咸鏡南道の道長官を歴任した李圭完(右)と夫人の中村梅子(韓国名=李梅子)。 中村梅子は日本人外交官とスペイン貴族の間に生まれたハーフで、李圭完との間に5男4女をもうけた。 次男が李鮮吉、三男が李英一だ。

 

退任後いた李圭完影響力両者のエピソードで確認できるまず19397京春線開通式出席した水島謙春川旅行記旅行雑誌朝鮮観光19398月号掲載した著者特別李圭完氏ねてインタビューした内容記事めた日本朝鮮言論界によくられた内鮮一体先駆的人物だったからだ

 

第二1942李圭完80えると日本江原道庁産業部一生をまとめた李圭完翁逸話集出版したこの1956大韓民国江原道庁内務局によって李圭完翁逸史というタイトルで再刊行され1994には春川文化院がその再版した植民地時代道長官歴任した李圭完当然親日派リストにったが日本帝国大韓民国官吏たちは共通して非凡清廉人生記録として後世えるにすると判断したのである

 

これらのエピソードは1930年代末1940年代初めのことだから崔承喜春川公演があった1931には影響力がよりやかだったはずだところで李圭完崔承喜公演誘致関心があったのだろうか

 

1939年8月号の『朝鮮観光』には、李圭完のインタビュー記事が載っている。

 

李圭完一生武芸軍隊行政政務そして晩年農作業もれていたので芸術分野関心ったとはえないしかしりの々から春川崔承喜公演必要とか公演成事くしてほしいという要請けたとしたらどうだったのだろうか

 

さらに道庁官僚地域有志からしくてた公会堂崔承喜舞踊公演されれば春川発展様子られるといういていたなら春川への愛着かった李圭完興味っていただろう

 

そのような要請春川発展のために努力していた三五会春川繁栄会役員、「春川自動車社崔白洵春川公会堂建設した崔養浩またはその息子李英一李鮮吉からけたものである当時春川発展雰囲気かららは崔承喜招聘わせたのだろうそうしていたら春川政官財界有力者李圭完影響力りたいとっただろう

 

李圭完(左)は甲申政変居士日(1884年12月4日)、朴泳孝の行動隊員として郵政局に出動し、閔泳翊(右)の右耳を切ったが、閔泳翊は命拾いした。

 

むろんこれは推定。 「春川公演李圭完った可能性もあるという咸光福記者仮説もう極端めば達成できる結論ただしこの仮説証明できる文献証拠はまだなく今後発見されることを期待している

 

しかしこれまでの文献だけで1930年代初めに春川有力者一般市民団結春川近代化めたおかげで交通改善され公会堂新設されるなどえる成果げたことがかった

 

このような成果広報するためには全国的名声ていた崔承喜舞踊公演開催することよりも効果的方法がなかったというかだ。 (jc 2021/8/25秒高;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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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민일보>의 고 함광복 기자는 이선길과 이영일의 부친이자 일제하 초대 강원도장관이었던 이규완(李圭完, 1862-1946)이 최승희의 춘천공연을 주선했을 가능성을 주장했다. 입증자료가 제시되지 없으므로 아직은 가설이다. 하지만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함광복 기자의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해 볼 필요는 있다.

 

우선 이규완이 최승희의 춘천공연을 주선했더라도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춘천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을 통틀어 이규완 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원도장관(1908-1918)과 함경남도장관(1918-1924)을 역임한 후 62세의 나이로 춘천에 은퇴했지만 여전히 전국적 유명 인사였다.

 

퇴임 후 이규완은 중추원 참의직 등의 정무직은 거절했지만, 경제와 산업, 사회 활동은 계속했다. 그는 동양척식회사 고문(1924-1933), 조선산림협회 이사(1925-1937), 물산장려회 이사(1927-), 조선농업회 고문(1927-), 경성상공협회 상담(1930-), 한성시탄주식회사 설립(1936), 조선신문사 취체역(1936-1941)으로 근무했고, 신간회(1927-1931)에도 참여했다.

 

일제강점기 강원도와 함경남도 도장관을 역임한 이규완(오른쪽)과 그의 부인 나카무라 우메코(한국 이름 이매자). 나카무라 우메코는 일본인 외교관과 스페인 귀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으로, 이규완과의 사이에 5남4녀를 두었다. 둘째아들이 이선길, 세째아들이 이영일이다.

 

퇴임 후에도 유지되었던 이규완의 영향력은 두 일화로 확인된다. 첫째, 19397월 경춘선 개통식에 참석한 미즈시마 겐(水島謙)이 춘천 여행기를 여행잡지 <조선관광> 19398월호에 실었다. 저자는 특별히 이규완씨를 찾아가 인터뷰한 내용을 기사에 포함시켰다. 그는 일본과 조선의 언론계에 잘 알려진 내선일체의 선구적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1942년 이규완이 80세를 맞자 일제의 강원도청 산업부는 그의 일생을 정리한 책 <이규완옹 일화집>을 출판했다. 이 책은 1956년 대한민국의 강원도청 내무국에 의해 <이규완옹 일사>라는 제목으로 재간행했고, 1994년에는 춘천문화원이 그 재판을 냈다. 일제강점기에 도장관을 역임한 이규완는 당연히 친일파 명단에 올랐지만, 일제와 대한민국의 관리들은 공통적으로 그의 비범하고 청렴한 삶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할 만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일화들은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초의 일이니, 최승희의 춘천공연이 있었던 1931년에는 그의 영향력이 더욱 생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규완은 최승희 공연 유치에 관심이 있었을까?

 

1939년 8월호 <조선관광>에는 이규완의 인터뷰 기사가 실려있다.

 

이규완은 일생을 무예와 군대, 행정과 정무, 그리고 만년에는 농사일에 묻혀 지냈으므로 예술 분야에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주위의 인사들로부터 춘천에 최승희 공연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거나 공연 성사에 힘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더구나 도청의 관료 혹은 지역 유지들로부터 새로 지은 공회당에서 최승희 무용이 공연되면 춘천의 발전상을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면, 강원도와 춘천에 애착이 강했던 이규완로서도 흥미를 가졌을 법하다.

 

그런 요청이나 설명은 당시 춘천 발전을 위해 노력하던 <삼오회><춘천번영회>의 임원들로부터 들었을 수도 있고, <춘천자동차사>를 설립한 최백순이나 춘천공회당 건립에 앞장섰던 최양호, 혹은 그의 아들 이영일이나 이선길로부터 들었을 수 있다. 혹은 당시 춘천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이들이 모두 최승희 무용공연을 초청하는 일에 함께 힘을 모았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춘천 정관재계의 최고 유력인사 이규완의 영향력을 빌고 싶었을 것이다.

 

이규완(왼쪽)은 갑신정변 거사일(1884년 12월4일) 박영효의 행동대원으로 우정국에 출동 민영익(오른쪽)의 오른쪽 귀를 베었지만 목숨을 건졌다.

 

물론 이는 추정이다. ‘최승희 춘천공연은 이규완이 주선했을 수도 있다는 함광복 기자의 가설을 조금 더 극단으로 몰아가면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기도 하다. 함광복 기자와 나의 이 가설이을 증명할 수 있는 문헌 증거는 아직 없으며, 한국에서는 앞으로도 발견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동안의 문헌 기록만으로도, 1930년대 초 춘천시민들이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별 없이 유력인사들과 일반 시민들이 일치단결해 춘천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고, 그 덕분에 교통이 개선되고 공회당이 신설되는 등의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같은 성과를 대내외에 홍보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전국적 명성의 최승희의 무용 공연을 개최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일은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jc, 2021/8/25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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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光福(ハム·グァンボク)記者崔承喜犠牲的譲歩って春川公演ったのは、「一人後援者っていたからだと暗示したその後援者=崔承喜にとってれられない恩師…。当時淑明女學校訓育主任教師画家春泉·李英一·ヨンイルだというこれはくから月刊太白19894月号掲載された事実であると注釈もつけている

 

月刊太白記事そうと努力したがソウルの主要図書館(国立中央国会)には雑誌もなく春川市立図書館もそれを所蔵していなかったそのためその記事内容根拠はもちろんタイトルと文章執筆者さえ確認できていない状態

 

咸光福記者言葉通李英一1903-194「初代江原道長官めた李圭完·ギュワン三男先述した春川江原道警察局所属柔道選手李鮮吉だった李英一氏画家淑明女学校教員として在職したことがあるが、「訓育主任だったという叙述にはれていない記録には李英一氏淑明女子学校図画担当教員だったということだ

 

1928年、朝鮮美術展示会に入選した李英一の作品『田舎の少女』

 

李英一崔承喜指導したことはなかった淑明女学校教員として在職したのは1934から1943までで崔承喜李英一教員赴任する8年前19263淑明女学校卒業したためだ崔承喜春川公演断行した19312には李英一がまだ淑明女子学校赴任するだった

 

したがって崔承喜女学校恩師李英一後援けて春川公演をすることになったという主張納得しかも李英一春川ではなく京城んでいた1930年頃李英一鍾路チョンノ5画室鮮展出品作品制作していた

 

しかし李英一崔承喜春川公演成事方法貢献したかもれないそれは李英一崔承喜長兄崔承一(チェ·スンイル)とののためだ

 

1928年5月10日の『東亜日報』に掲載された李英一の鮮展特選作品『鷹追雉圖』

 

 

1928510東亜日報、「池上秀畝1874-1944画伯門下5年間研究したという記録から李英一東京留学したが美術学校にはわなかった池上秀畝当代日本画大家だった李英一1924帰国したので留学期間1919-1924であった日本大学美学科在学した崔承一留学期間1919-1923なる

 

当時東京留学生かった時代ではなかった1926東京留学卒業者数専門学校卒業生めて1301928卒業者数100であったから1924やそれ以前はもっとなかっただろう崔承一李英逸東京時代いに顔見知りか通声名程度だったにいない

 

しかも崔承一美学科在学中だったので勉強していた李英一とは格別交感があったはずだただし崔承一社会主義性向だった反面李英一日本植民地時代道長官父親親日性向家系だったため関心分野活動領域なっていたはずだ

 

 

1930年5月7日の『毎日申報』に掲載された李英一インタビュー記事。 記者が李英一の鍾路5街の画室で交わした対談を写真と共に記事にした。

 

李英一帰国して鮮展初入賞したのは1925だった東洋画部門出品作<>3入選したのであるこの崔承喜淑明女子学校4年生だった李英一翌年1926宣伝でも春光入選したが崔承喜はすでに日本舞踊留学だった

 

したがってこの時期崔承喜李英一いにうのはしかっただろう李英一氏親交っているがいたならそれは崔承喜ではなく兄崔承一だっただろう

 

もし李英一1931年初崔承喜舞踊公演春川誘致しようと決心していたならこれは崔承一との連絡じて可能だっただろう当時崔承一崔承喜公演活動のマネージャーをしていたからだ

 

李英一氏春川有志知人要請崔承喜舞踊公演春川誘致しようという提案けたなら李鮮吉よりも李英一氏崔承一氏じてこのメッセージをえる適任者だっただろう(jc2021/8/25秒高;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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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광복 기자는 최승희가 희생적 양보를 무릅쓰고 춘천 공연을 단행한 것은 한 사람의 후원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암시했다. 그 후원자는 (=최승희)에게 잊을 수 없는 은사 ... 당시 숙명여고 훈육주임교사이자 화가 춘천(春泉) 이영일(李英一)”이라고 했다. 이는 일찍이 <월간 태백> 19894월호가 밝혀 놓은 사실이라고 주석도 달았다.

 

<월간 태백>의 기사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서울의 주요도서관(국립중앙, 국회)에는 그 잡지가 없었고, 춘천의 시립도서관도 이를 소장하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 기사의 내용과 근거는 물론 제목과 글쓴이조차 확인하지 못한 상태이다.

 

함광복 기자의 말대로 이영일(李英一, 1903-194)초대 강원도장관을 지낸 이규완(李圭完)3이었고, 앞서 서술한 춘천의 강원도 경찰국 소속의 유도선수 이선길의 동생이었다. 이영일은 화가였고 숙명여학교의 교원으로 재직한 바 있었지만 훈육주임이었다는 서술은 생소하다. 다른 기록에는 이영일이 숙명여학교의 도화(=미술)담당 교원이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1928년 조선미술전시회에 입선한 이영일의 작품 <시골소녀>

 

이영일이 최승희에게 그림을 지도한 적은 없었다. 그가 숙명여학교 교원으로 재직한 것은 1934년부터 1943년까지고, 최승희는 이영일이 교원으로 부임하기 8년 전인 19263월에 숙명여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이다. 특히 최승희가 춘천 공연을 단행했던 19312월에는 이영일이 아직 숙명여학교에 부임하기 전이었다.

 

따라서 최승희가 여학교 은사이영일의 후원을 받아 춘천 공연을 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더구나 이영일은 춘천이 아니라 경성에 살았다. 1930년경 이영일은 종로5가에 화실을 내고 선전 출품 작품을 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영일은 최승희의 춘천 공연을 성사시키는 데에 다른 방식으로 기여했을 수는 있다. 그것은 이영일과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과의 인연 때문이다.

 

1928년 5월10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이영일의 선전 특선작품 <꿩을 쫓는 매>

 

1928510일의 <동아일보>이케가미 슈호(池上秀畝, 1874-1944) 화백 문하에서 5개년 동안을 연구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영일이 도쿄 유학을 했지만 미술학교를 다니지는 않았다. 이케가미 슈호는 당대 일본화의 대가였다. 이영일은 1924년에 귀국했으므로 유학기간은 1919-1924년이었다. 니혼대학 미학과에 재학했던 최승일의 유학기간(1919-1923)과 겹친다.

 

당시에는 도쿄 유학생이 많던 시절이 아니었다. 1926년의 도쿄유학 졸업자수가 전문학교 졸업생 포함 130, 1928년의 졸업자수가 1백명이었으므로 1924년이나 그 이전에는 더 적었을 것이다. 최승일과 이영일은 도쿄시절 서로 안면식이나 통성명쯤은 했을 사이였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최승일은 미학과 재학 중 소설수업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림 공부 중이던 이영일과는 각별한 교감이 있었을 수 있다. 다만 최승일이 사회주의 성향이었다면 이영일은 일제하 초대 강원도장관을 아버지로 둔 친일성향의 집안이었으므로 관심분야나 활동영역은 달랐을 것이다.

 

1930년 5월7일의 <매일신보>에 실린 이영일 인터뷰 기사. 기자가 이영일의 종로5가 화실에서 나눈 대담을 사진과 함께 기사화했다.

 

이영일이 귀국해 선전(鮮展)에 첫 입상한 것은 1925년이었다. 동양화 부문 출품작 <매화와 비둘기>3등으로 입선한 것이다. 이때 최승희는 숙명여학교 4학년이었다. 이영일은 이듬해인 1926년의 선전에서도 <춘광>으로 입선했지만, 최승희는 이미 일본 무용유학을 떠난 뒤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최승희와 이영일이 서로 알고 지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영일이 교분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최승희가 아니라 그의 오빠 최승일이었을 것이다.

 

만일 이영일이 1931년초 최승희의 무용공연을 춘천에 유치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이는 최승일과의 연락을 통해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최승일이 최승희 공연활동의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영일이 춘천의 유지들과 지인들의 부탁으로 최승희 무용공연을 춘천에 유치하자는 제안을 받았다면, 형 이선길보다는 동생인 이영일이 최승일을 통해 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적임자였을 것이다.(jc, 2021/8/25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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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川チュンチョン劣悪交通劇場そして収益性にもかかわらず崔承喜春川公演断行した理由について咸光福(ハム·グァンボク)記者のようにべた

 

春川では一人後援者彼女(=崔承喜)っていた崔承喜れられない恩師がいれば当時淑明女子高校訓育主任教師であり画家春泉李英一·ヨンイルげ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月刊太白19894月号長兄覚一全日本柔道選手権大会した鮮吉直上

 

ちょうど李英一氏鮮吉朝鮮柔道英雄として登場したころだ1931はまだ柔聖ばれたではないしかし日本舞踊界新星として浮上した崔承喜名声っていたように崔承喜李鮮吉名声っていただろう2はダンスと柔道日本さぶった江原道んだ朝鮮英雄だった李圭完春川公演主催した可能性をうかがわせる」。

 

1937年全日本柔道選手権大会の<選士権大会>優勝者たちの団体写真。 右から2番目のメガネをかけた人が李鮮吉。

 

春川崔承喜後援者咸光福記者李英一李鮮吉兄弟父親李圭完氏げた。 「李英一崔承喜後援者だったという叙述客観的証拠提示されていないため推論にとどまったが検証してみる価値があるとじたまず咸光福記者叙述事実でないものはける必要があった

 

李鮮吉(1898-1971)柔道英雄ばれたのも事実である李鮮吉朝鮮人めて熱狂させたのは193211全日本柔道選手権大会選士権大会優勝したときだった。 『東亜日報号外発行報道したのは事実だがこれは崔承喜春川公演2年後のことだった

 

193110にも李鮮吉全朝鮮柔道選手権大会出場して準優勝したことがありこれが主要大会めての成績だった朝鮮総督賞授与される優勝日本人られ李鮮吉今日国務総理賞たる政務総監賞受賞したしかし李鮮吉政務総監賞受賞したのも崔承喜春川公演から半年ぎただった

 

 

すなわち19312月頃李鮮吉柔道界浮上する新星だったにいなく新聞には柔道試合戦績報道されめたがまだ朝鮮熱狂させる状況ではなかったこのため李鮮吉柔道人資格崔承喜舞踊団誘致できたとは

 

李鮮吉朝鮮人柔道英雄として浮上したのは193211日比谷音楽堂かれた3選士権大会壮年後期30-37部門優勝したときだった李鮮吉19341936にも同部門準優勝19371938には成年前期38-43部門相次いで優勝した柔聖ばれたのはこのだった李鮮吉選士権大会本選5回入賞する8かれてわれる予選戦パスした朝鮮人一人もいなかった

 

一方李鮮吉柔道選手だけでなく警察官経歴としても記憶される必要がある李鮮吉直接警察業務担当したかどうかはからないが春川所在江原道警察局所属柔道選手だった

 

 

当時江原道警察には朝鮮人がもう1いた崔白洵チェ·ベクスン, 1897-?)である江陵生まれの1921巡査部長任命され1923普通文官試験合格して警部補昇進1925まで江陵警察署勤務した1926から春川道警察局警務警部保安警備業務担当していた19289朝鮮弁護士試験合格19291春川弁護士開業した担当した事件としては19339間島カンド共産党事件裁判がある

 

春川弁護士事務所開業した直後崔白洵6春川有志たちとともに<春川自動車運送株式会社>設立京春街道自動車運送業にも参入した当時<春川繁栄会>組織春川発展させようという地域住民いを実践していたのである

 

年配じで江原道警察局勤務経験共有した李鮮吉崔白洵には親交があったはずだ(jc2021/8/25秒高;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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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 열악한 교통과 협소한 극장, 그리고 낮은 수익성에도 불구하고 최승희가 춘천공연을 단행한 이유에 대해 함광복 기자는 다음과 같은 서술했다.

 

춘천에서는 한 사람의 후원자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은사가 있다면 당시 숙명여고 훈육주임교사이자 화가 춘천(春泉) 이영일(李英一)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월간 太白'19894월호) 이영일은 초대 강원도장관을 지낸 이규완(李圭完)3남이다. 맏형은 각일(覺一), 전일본유도선수권대회를 휩쓴 선길(鮮吉)은 바로 위형이다.

 

마침 이영일의 형 이선길은 조선 유도의 영웅으로 등장하던 무렵이다. 1931년은 아직 '유성(柔聖)'이라고 불리던 때는 아니다. 그러나 일본 무용계의 샛별로 떠오르던 최승희의 명성을 그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최승희도 이선길의 명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춤과 유도로 일본을 흔든 강원도가 낳은 조선의 영웅이었다. 이규완이 그의 춘천공연을 주선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37년 전일본유도선수권대회인 <선사권대회> 우승자들의 단체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 안경쓴 사람이 이선길.

 

춘천에 거주하는 최승희의 후원자로 함광복 기자는 이영일, 이선길 형제와 그의 부친 이규완씨를 지목했다. ‘이영일이 최승희의 후원자였다는 서술은 객관적인 증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아 추론에 머물렀지만, 검증해볼 가치가 있다고 느껴졌다. 먼저 함광복 기자의 서술 중에서 사실이 아닌 것은 가려낼 필요가 있었다.

 

이선길(李鮮吉, 1898-1971)이 유도 영웅으로 불렸던 것은 사실이다. 이선길이 조선인을 처음으로 열광시켰던 것은 193211월의 전일본유도선수권대회인 <선사권(選士權)대회>에서 우승했을 때였다. <동아일보>가 호외를 발행하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최승희의 춘천공연 2년 후의 일이었다.

 

193110월에도 이선길은 전조선유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준우승을 차지한 바 있었고, 이것이 그가 주요 대회에서 처음 거둔 높은 성적이었다. 조선총독상이 수여되는 우승은 일본인에게 돌아갔고, 이선길은 오늘날의 국무총리상에 해당하는 정무총감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선길이 정무총감상을 받은 것도 최승희의 춘천 공연 이후 반년이 지난 후였다.

 

 

, 19312월경 이선길이 유도계에서 떠오르는 샛별이었음에 틀림없었고, 신문에는 그의 유도경기 전적이 보도되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조선을 열광시킬 상황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선길이 유도인의 자격으로 최승희 무용단을 유치할 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선길이 조선인의 유도 영웅으로 떠오른 것은 193211월 히비야 음악당에서 열렸던 제3회 선사권(選士權)대회 장년후기(30-37) 부문에서 우승했을 때였다. 이선길은 1934년과 1936년에도 같은 부문에서 준우승했고, 1937년과 1938년에는 성년전기(38-43) 부문에서 연달아 우승했다. 그가 유성이라고 불린 것은 이때였다. 이선길이 선사권 대회 본선에서 5회 입상하는 동안 8개조로 나뉘어 진행되는 예선전이나마 통과한 다른 조선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한편 이선길은 유도 선수뿐 아니라 경찰관 경력으로도 기억될 필요가 있다. 이선길이 직접 경찰업무를 담당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춘천 소재 강원도 경찰국 소속 유도선수였다.

 

 

당시 강원도 경찰에는 조선인이 또 한명 있었다. 최백순(崔白洵, 1897-?)이다. 강릉 출생인 그는 1921년 순사에 임명되었고, 1923년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해 경부보로 승진, 1925년까지 강릉경찰서에서 근무했다. 1926년부터 춘천 도경찰국으로 옮겨와 경무와 경부, 보안과 경비업무를 담당하던 중 19289월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 19291월 춘천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가 담당한 사건으로는 19339월 간도공산당사건 재판이 있다.

 

춘천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직후, 최백순은 6명의 춘천 유지들과 함께 <춘천자동사운송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경춘가도를 달리는 자동차 운송업에도 뛰어들었다. 당시 <춘천번영회>를 조직해가며 춘천을 발전시키자는 지역 주민들의 염원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연배도 같고 강원도 경찰국 근무경험을 공유한 이선길과 최백순은 교분이 있었을 것이다. (jc, 2021/8/25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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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喜巡業日程動線修正する犠牲的譲歩甘受しながら春川公演断行した理由だろうか一般的にそうしたことは影響力こる公演収益十分補てんしてもらえたらんでそんな犠牲甘受したはずだまた招聘じなかった場合らかの不利益ることになれば譲歩したかもしれない

 

ところが江原道民日報咸光福(ハム·グァンボク)記者影響力仮説提示したことがあった崔承喜評伝8のうち崔承喜春川公演について一文段以上叙述したはないが咸光福記者崔承喜江原道カンウォンドについて原稿用紙130枚書いた20069ごろあるインターネットサイトに投稿したわれわれはなぜ"崔承喜洪川"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という内容

 

 

この目的崔承喜出生地江原道洪川であることを立証することだったしかしその簡単命題立証するために130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ということ自体その立証容易ではないことを反証する崔承喜出生地京城キョンソン=ソウルこれは戸籍学籍簿とパスポート土地台帳地籍原図記録マスコミインタビューそしてヨーロッパとアメリカの々で作成した入国書類証明している

 

一方咸光福記者がこのような文献記録反論するために提示した資料方法でも解釈できる新韓民報記事1つと崔承喜出生後7-80ぎて発行された雑誌記事2そして3世代ぎたてきた親戚村人証言だったしたがって資料信憑性重視する評伝著者たちは洪川出生説れていない

 

1938年2月3日の『新韓民報』の崔承喜米州公演関連記事。 これに崔承喜が「江原道洪川郡の崔濬鉉氏の霊愛」という叙述がある。 しかし、これは崔濬鉉氏が洪川出身であることを示しており、崔承喜の出生地が洪川であることを物語っているわけではない。

 

しかし咸光福記者貢献もある洪川出生説立証しようと提示した付随的叙述には崔承喜研究重要糸口えるものもあるためだ。 「崔承喜春川公演春泉李英一というタイトルの咸光福記者崔承喜春川公演についてのようにべている

 

全国巡回公演地春川んだ理由おかしなものにならざるをない大長征第一歩春川めたとすれば崔承喜しい舞踊芸術運動出発地故郷にしたかったのだろうか

 

もそうだがエンターテイメントと江原道密接ではないての巡回公演江原道はやむを参加させるようにいつも後回しだったしかも当時春川には舞踊公演消化できる環境っていなかった8年前開設された京春道路には8人乗りのワゴン10がソウルと春川しており京春線はまだ開通前

 

崔承喜舞踊芸術運動発祥地として春川んだとすれば春川には強力吸引力いているからだろう。 『毎日新報春川公演数百人群衆公演場のドアをしのけて乱入する事態発生した報道している現在文化劇場裏側にあった春川公会堂150坪余りのきさだという春川々が江原道出身舞踊家だったため熱狂したのではないかと推測できる」。

 

 

咸光福記者崔承喜全国巡回公演のという大長征第一歩春川めたのは江原道崔承喜故郷という強力吸引力のためだろうと主張したがこれは事実符合しない春川全国巡回初公演地ではなく洪川崔承喜出生地でもないためだ

 

崔承喜原跡江原道洪川うならしいかもしれない崔承喜父親崔濬鉉氏故郷洪川だからだだが崔濬鉉氏1902から1905京城移住戸籍上本籍まで京城変更した1902まれた長男崔承一洪川生まれだったが1912年生まれの崔承喜京城移住後需昌洞198番地まれた

 

それにもかかわらず咸光福記者叙述つの春川公演疑問くための提供した第一1931年当時春川舞踊公演のための条件っていないという確認第二そこには重要理由えば春川市民強力勧誘招待があったという推論むことができるようにしたのだ(jc2021/8/24秒高;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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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가 순회공연의 일정과 동선을 수정하는 희생적 양보를 감수하면서 춘천공연을 단행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일반적으로 그런 일은 영향력으로 일어난다. 공연 수익을 충분히 보전 받았다면 기꺼이 그런 희생을 감수했을 것이다. 또 초빙에 응하지 않았을 경우 모종의 불이익을 겪게 되면 양보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강원도민일보>의 함광복 기자가 영향력 가설을 제시한 바 있었다. 최승희의 평전 8권 중에서 최승희의 춘천공연에 대해 한 문단 이상 서술한 책은 없지만, 함광복 기자는 최승희와 강원도의 인연에 대해 원고지로 130매를 썼다. 20069월경 한 인터넷 사이트에 포스팅한 우린 왜 최승희의 홍천을 찾아야 하는가라는 글이다.

 

 

이 글의 목적은 최승희의 출생지가 강원도 홍천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간단한 명제를 입증하려고 130매를 써야했다는 것 자체가 그 입증이 쉽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최승희의 출생지는 경성(=서울)이다. 이는 호적과 학적부와 여권 기록, 토지대장과 지적원도의 기록, 언론 인터뷰, 그리고 유럽과 미주의 여러 나라들에서 작성한 입국서류들이 증명하고 있다.

 

반면 함광복 기자가 이같은 문헌 기록을 반박하기 위해 제시한 자료는, 다른 방법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신한민보>의 기사 1개와 최승희 출생 후 7-80년이 지나서 발행된 잡지 기사, 그리고 3세대가 지난 후에 나온 먼 친척이나 마을 사람의 증언들이었다. 따라서 자료의 신빙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평전 저자들은 홍천 출생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1938년 2월3일의 <신한민보>의 최승희 미주공연 관련 기사. 여기에 최승희가 "그는 강원도 홍천군의 최준현씨의 영애"라는 서술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최준현씨가 홍천 출신임을 가리키는 것은 확실하지만 최승희의 출생지가 홍천임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함광복 기자의 공헌도 있다. 그가 홍천 출생설을 입증하려고 제시한 부수적 서술들 중에는 최승희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주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춘천공연과 춘천 이영일>이라는 소제목 아래 함광복 기자는 최승희의 춘천 공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가 전국 순회의 첫 공연지를 춘천으로 택한 이유가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대장정의 첫 걸음을 춘천에서 시작했다면 최승희는 새로운 무용예술운동의 시발지를 고향 땅으로 잡고 싶었던 것일까.

 

지금도 그렇지만 엔터테인먼트와 강원도는 밀접하지 않다. 모든 순회공연에서 강원도는 마지못해 끼워주는 것처럼 늘 뒷전이었다. 더구나 당시 춘천은 무용공연을 소화할 만한 여건도 변변히 되어있지 않았다. 8년 전 개설된 경춘 도로에는 8인승 승합차 10대가 서울과 춘천을 오가고 있었고, 경춘선은 아직 개통되기 전이다.

 

최승희가 무용예술운동의 시발지를 춘천으로 택했다면, 춘천에는 무언가 강력한 흡인력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매일신보>는 춘천 공연에서 '수백 명 군중들이 공연장 문을 밀치고 난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현 문화극장 자리 뒤편에 있었던 춘천공회당은 150평 남짓한 크기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춘천 사람들이 강원도 출신 무용가였기 때문에 열광했던 것은 아닌지를 짐작하게 하고 있다.”

 

 

함광복 기자는 최승희가 전국 순회공연의 이라는 대장정의 첫걸음을 춘천에서 시작한 것은 강원도가 최승희의 고향이라는 강력한 흡인력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에 부합되지는 않는다. 춘천이 전국 순회의 첫 공연지도 아니었고, 홍천이 최승희의 출생지라는 주장도 아직은 사실로 확정된 상태가 아니다. 문헌증거가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원적’이 강원도 홍천임은 확실하다. 최승희의 아버지 최준현씨의 고향이 홍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준현씨는 1902년에서 1905년 사이에 경성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고, 호적상의 본적을 경성으로 변경했다. 1902년에 태어난 큰아들 최승일은 홍천 태생이었지만, 1912년생인 최승희는 경성 이주 후 수창동 198번지에서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이는 아직 단정할 수 있는 팩트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광복 기자의 서술은 두 가지 점에서 춘천공연의 궁금증을 풀기 위한 열쇠를 제공했다. 첫째는, 1931년 당시 춘천은 무용공연을 위한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해 주었고, 둘째, 거기에는 뭔가 중요한 다른 이유, 예컨대 춘천시민들의 강력한 권유나 초대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 것이다. (jc, 2021/8/24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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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川チュンチョン公演前後崔承喜舞踊団日程るとおかしな発見される1931221春川公演4日前217-18には釜山プサン公会堂公演がありその3日後224-25には大邱テグ劇場公演われた

 

釜山公演月半前1931110-12には京城キョンソン団成寺新春舞踊公演という名前3回崔承喜新作舞踊発表会があり10日前27-9には京城公会堂2回崔承喜舞踊公演会かれたこの2つの公演発表された新作をもとにチェ·スンヒ舞踊団地方公演ったのだがその初公演釜山公演だったのだ

 

釜山公演普通大邱公演うのが慣行にもじだった大邱公演ほとんど例外なく釜山公演いたこれは京釜線鉄道簡単移動できるためだ釜山から大邱までは鉄道3時間距離だった217-18釜山公演をしたなら191だけんで20-21には大邱公演をすることもいくらでも可能だった

 

1931年2月21日に決まった崔承喜舞踊団の春川公演は、4紙の春川支局が共同主催した行事だった。

 

ところが今回釜山大邱公演春川公演んできたそのため移動動線複雑になってしまった釜山-春川間には鉄道だけでなく自動車便もなかったしたがって釜山から春川くには汽車京城自動車春川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春川公演わってもじだった自動車京城列車大邱か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それで17から21まで5日間十分だった釜山大邱公演だったがその春川公演んで釜山-春川-大邱公演をするのに17から25までほぼ10かかった大邱公演えた崔承喜舞踊団馬山マサン26-27)、裡里イリ31)、全州チョンジュ2-3)、群山グンサン4-5)、金堤キムジェ6)、礼山イェサン7公演けた

 

えれば慶尚道キョンサンドから全羅道チョンラド忠清道チュンチョンド京城ってくる南側地方公演途中春川公演突然入ったことがかるなぜこんなことがきたのだろうか

 

1931211東亜日報今回本紙春川支局では新春事業として崔承喜さんを招聘221から(旧暦正月5)市内公会堂舞踊公演会開催する報道したつまり崔承喜春川公演東亜日報春川支局崔承喜招聘したためにわれたということである

 

1931年2月11日の<東亜日報>は、崔承喜の春川公演が春川新聞社の「招聘」によって行われたと報じた。

 

春川公演東亜日報だけでなく朝鮮日報』、『京城日報』、『毎日新報4つの新聞社春川支局共同主催したものなので事実上春川マスコミ連合招聘われたことがかる

 

さらに217朝鮮新聞春川では崔承喜舞踊団一行犠牲的譲歩によりかろうじて公演できるようになったじた舞踊団甘受した犠牲的譲歩とはだろうか

 

上述崔承喜舞踊団巡回公演日程によると慶尚-全羅-忠清地域公演がすでにてられてから春川公演招聘われ崔承喜はこの招聘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で釜山大邱公演春川公演まれていたことがかる

 

1931年2月17日の『朝鮮新聞』も崔承喜の春川公演を報じた。 <朝鮮新聞>はこの公演の主催側ではなかったが春川公演を持続的に報道した。

 

日程調整崔承喜舞踊団釜山-大邱汽車)」移動経路釜山-京城汽車-春川(自動車-京城自動車-大邱汽車)」変更数時間しかなかった釜山-大邱移動経路34えた春川公演予想された収益がほとんどなかったため春川公演れたのは崔承喜舞踊団犠牲的譲歩わざるをないだろう

 

春川公演むことになったため、崔承喜地方公演日程全体的再調整されるべきだったのだろう地方公演まりであった釜山公演日程をこれ以上繰げ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り春川公演わった大邱公演とそののすべての公演日程再調整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はずだ

 

収益可能性さえかったにもかかわらず崔承喜犠牲的譲歩をしながら春川公演断行した理由だろうか春川公演招聘れなかった理由だろうか。 (jc、2021/8/23草稿;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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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공연 전후의 최승희무용단 일정을 보면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1931221일의 춘천 공연 4일전인 217-18일에는 부산공회당에서 공연이 있었고, 그 사흘 뒤인 224-25일에는 대구극장에서 공연이 열렸다.

 

부산 공연의 한달 반 전인 1931110-12일에는 경성의 단성사에서 신춘무용공연이라는 이름으로 <3회최승희신작무용발표회>가 있었고, 열흘 전인 27-9일에는 경성공회당에서 <2회최승희무용공연회>가 열렸다. 이 두 공연에서 발표된 신작을 가지고 최승희무용단이 지방공연에 나섰던 것인데, 그 첫 공연이 부산공연이었던 것이다.

 

부산공연 다음에는 보통 대구에서 공연을 가지는 것이 관행이다. 거꾸로도 마찬가지였다. 대구 공연을 가진 다음에는 거의 예외 없이 부산공연이 이어졌다. 이는 경부선 철도로 쉽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대구까지는 철도로 3시간 거리였다. 217-18일에 부산공연을 했다면, 19일 하루만 쉬고 20-21일에는 대구공연을 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1931년 2월21일로 정해진 최승희 무용단의 춘천공연은 4개 신문의 춘천지국들이 공동으로 주최한 행사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산과 대구 공연 사이에 춘천 공연이 끼어들었다. 그 때문에 이동 동선이 복잡해지고 말았다. 부산-춘천 사이에는 철도뿐 아니라 자동차편도 없었다. 따라서 부산에서 춘천에 가려면 기차로 경성으로 돌아왔다가 자동차로 춘천에 가야했다. 춘천 공연이 끝나고도 마찬가지였다. 자동차로 경성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기차로 대구로 향해야 했다.

 

그래서 17일부터 21일까지 5일이면 충분했을 부산과 대구 공연이었지만, 그 중간에 춘천공연이 끼어드는 바람에 부산-춘천-대구 공연을 하는데 17일부터 25일까지 거의 열흘이 걸렸다. 대구 공연을 마친 후 최승희 무용단은 마산(26-27), 이리(31), 전주(2-3), 군산(4-5), 김제(6), 예산(7) 공연을 이어나갔다.

 

다시 말해 경상도에서 전라도를 거쳐 충청도를 돌아 경성으로 돌아오는 남쪽 지방공연 중에 춘천 공연이 느닷없이 끼어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1931211일의 <동아일보>금번 본보 춘천지국에서는 신춘사업으로 최승희양을 초빙하여 221일부터(음력 정월5) 시내 공회당에서 무용공연회를 개최하리라고 보도했다. 즉 최승희 춘천공연은 초빙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1931년 2월11일의 <동아일보>는 최승희의 춘천공연이 춘천 신문사의 "초빙"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보도했다.

 

춘천공연은 <동아일보>뿐 아니라 <조선일보>, <경성일보>, <매일신보> 4개 언론사의 춘천지국들이 공동 주최했으므로 사실상 춘천 언론사들의 연합초빙으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더해 217일의 <조선신문>춘천에서는 최승희무용단 일행의 희생적 양보에 의해 겨우 공연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최승희 무용단이 감수한 희생적 양보란 무엇일까?

 

위에 서술한 최승희 무용단 순회공연 일정에 따르면 경상-전라-충청 지역 공연이 이미 세워진 후에 춘천 공연 초빙이 이뤄졌고, 최승희는 이 초빙을 거절할 수 없었으므로 부산과 대구 공연 사이에 춘천공연을 끼워 넣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1931년 2월17일의 <조선신문>도 최승희의 춘천공연을 보도했다. <조선신문>은 이 공연의 주최측이 아니었지만 춘천공연을 지속적으로 보도했다.

 

이 같은 일정조정으로 최승희 무용단은 부산-대구(기차)’의 이동경로를 부산-경성(기차)-춘천(자동차)-경성(자동차)-대구(기차)’로 변경해야했고, 기차로 수 시간에 불과했을 부산-대구사이의 이동경로가 34일로 늘어났다. 춘천공연의 예상 수익이 거의 없었던 수준이었으므로, 춘천 공연을 수용한 것은 최승희 무용단의 희생적 양보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춘천 공연이 끼어들게 되자 최승희 지방공연 일정은 전체적으로 재조정되어야 했을 것이다. 지방공연의 시작이었던 부산 공연의 일정을 더 앞으로 당겨야 했거나, 춘천 공연이 끝난 후의 대구공연과 그 이후의 모든 공연 일정을 다시 조정해야했을 것이다.

 

수익 가능성조차 낮았는데도 최승희가 희생적 양보를 하면서 춘천 공연 초빙을 단행한 까닭은 무엇일까? 춘천 공연 초빙을 거절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jc, 2021/8/23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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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川市民近代化のためにがった結果192911には京城<内鮮自動車社>競争する<春川自動車社>設立許可12には新設公会堂落成式われた

 

さらにもうつの公演施設`川劇場られていた春川初常設館<春川劇場>がマスコミにめて報道されたのは1929722朝鮮新聞であった

 

17から春川劇場において興行した光榮團一座演劇盛大裡りをげた記者劇場主荒木氏一大奮發つて百尺竿頭一步計劃通常設館としての施設完成されんことを切望するである

 

1929年7月22日、<朝鮮新聞>は春川劇場で演劇公演が上演されたという記事が掲載された。 この劇場は仮設劇場だった。

 

記者記事露骨個人的いを記述したのは異例であるがこの記事じて々は当時春川<春川劇場>という演劇上演劇場があったが常設館ではなかったことがかるまた劇場主荒木氏常設館てるという計画発表していたことも推測できる

 

当時春川在住20年目という荒木、『朝鮮新聞春川支局長であり本町3町目にも松乃家という料理屋九州旅館というホテルを経営していた1924624朝鮮日報、「松乃家開業5周年劇場假設演劇無料上演したとじた。 「假設とは臨時設置したということであるから建物にあったわけではない

 

荒木氏假設劇場1930年初頭までいた193015朝鮮新聞荒木氏<假設春川劇場>11日夕方演劇映画上演盛況したと報道した

 

しかし1930年後半名前登場した926毎日申報峰松勝利氏一人劇場てようと万全準備めていたところ当局許可たためすぐに工事着手すると、「場所松乃家前広場とし、「工事費約一千七百ウォン予定じた

 

1930年9月26日の『毎日申報』は春川初の常設館<春川劇場>が近いうちに建設されると報じた。

 

<松乃家>荒木社長自力<假設春川劇場>常設館として発展させ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場所<假設春川劇場>のままであったことから荒木社長<假設春川劇場>場所常設館てる権利峰松氏したものとわれる

<常設春川劇場>完成落成式われたのは同年1025である劇場建築1もかからなかったのだ設計資材準備された木造建物だったとわれる

 

この<春川劇場>落成式には釜山日報(1029)朝鮮新聞(1030)東亜日報(111)報道したが総合すると1125日昼落成式われ午後3披露宴午後7映画<忠臣蔵>上演され披露宴には民官百数十名春川駐在記者たちが招待された

 

1934年10月31日の「朝鮮中央日報」によると、「春川劇場」は経営権移転に伴い「邑愛館」に名称が変更された。

 

<常設春川劇場>主人はすぐにわってしまった1932126朝鮮新聞京城松田活動写真商会22122にかけて<春川劇場>各新聞支局消防組後援初興行満員盛況した報道、「=松田がまもなく<春川劇場>毎月社会奉仕意味斬新活動写真無料公開する計画えた

 

松田<朝鮮劇場>3年足らずで主人えた19341031朝鮮中央日報によると、「今回松竹映画配給所京城徳永商店<春川劇場>買収<邑愛館>という常設館許可直営として毎日優れた映画上映することになったえた

 

荒木氏<朝鮮劇場>常設館転換できず假設劇場7~8も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ことそして松田3たないうちに<朝鮮劇場>徳永売却したのは理由からであろう春川市民映画むだろうが実質的需要くなかった春川常設館経営容易でなかったからだろう(jc2021/8/23草稿;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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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시민들이 근대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선 결과 192911월에는 경성의 <내선자동차사>와 경쟁할 <경춘자동차사>의 설립허가를 받았고, 12월에는 신설 공회당의 낙성식도 열었다.

 

그에 더해 또 하나의 공연시설 <춘천극장>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춘천 최초의 상설관 <춘천극장>이 언론에 처음 보도된 것은 1929722일의 <조선신문>이었다.

 

지난 17일부터 춘천극장에서 흥행했던 광영단일좌의 연극은 성대하게 끝을 맺었다. 기자는 극장주 아라키 마츠노주(荒木松之十)씨가 일대 분발을 통해 백척간두 일보를 추진, 계획대로 상설관 시설을 완성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1929년 7월22일 <조선신문>은 춘천극장에서 연극공연이 상연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극장은 가설극장이었다.

 

기자가 기사에 개인적 바람을 노골적으로 서술한 것이 이례적이지만,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당시 춘천에 <춘천극장>이라는 연극상연 극장이 있었지만 상설관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극장주 아라키가 상설관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었던 점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춘천 거주 20년째라는 아라키는 <조선신문>의 춘천지국장이자 본정 3정목에 <마츠노야(松乃家)>라는 요리집과 <큐슈(九州)여관>이라는 호텔을 운영하고 있었다. 1924624일의 <조선일보><송내가>의 개업 5주년을 맞아 극장을 가설(假設)하고 연극을 무료 상연했다고 보도했다. ‘가설이란 임시로 설치했다는 말이므로 건물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라키 사장의 가설극장은 1930년 벽두까지 계속되었다. 193015일의 <조선신문>이 아라키의 <가설 춘천극장>11일 저녁에 연극과 영화를 상연해 성황을 이루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1930년 후반에 다른 이름이 등장했다. 926일의 <매일신보>미네마츠 카츠토시(峯松勝利)씨가 혼자서 극장을 세우려고 만반준비를 진행 중이던 바 당국의 허가도 나왔으므로 곧 공사에 착수할 것이라고 전하면서 장소는 송내가(松乃家) 앞 광장이며 공사비는 약 일천칠백원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1930년 9월26일의 <매일신보>는 춘천 최초의 상설관 <춘천극장>이 조만간 건축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송내가>의 아라키 사장은 자력으로 <가설 춘천극장>을 상설관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장소가 <가설 춘천극장> 자리 그대로였던 것으로 미루어 아라키 사장이 <가설 춘천극장> 자리에 상설관을 지을 권리를 미네마츠 카츠토시에게 넘긴 것으로 보인다.

 

<상설 춘천극장>이 완공되어 낙성식을 가진 것은 그해 1025일이었다. 극장 건축에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설계와 자재가 준비된 목조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춘천극장>의 낙성식은 <부산일보(1029)><조선신문(1030)><동아일보(111)>가 보도했는데, 종합하면 “1125일 낮에 낙성식이 거행되고, 오후3시에 피로연, 오후7시에 첫 영화 <충신장(忠臣藏)>이 상연되었으며, 피로연에는 민관 백수십명과 춘천 주재 기자들이 초대되었고, 수백 명의 관객이 이 상설극장의 첫 영화 <충신장>을 관람했다고 한다.

 

1934년 10월31일의 <조선중앙일보>에 따르면 <춘천극장>은 경영권이 이전되면서 <읍애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상설 춘천극장>의 주인은 이내 바뀌었다. 1932126일의 <조선신문>경성 마츠다(松田)활동사진상회가 221일과 22일에 걸쳐 <춘천극장>에서 각 신문지국과 소방조의 후원으로 첫 흥행을 가져 만원의 성황을 이뤘다고 보도하면서 (=마츠다)가 곧 <춘천극장>을 인수하여 매달 사회봉사의 의미로 참신한 활동사진을 무료 공개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마츠다의 <조선극장>3년이 못되어 다시 한 번 주인을 바꿨다. 19341031일의 <조선중앙일보>에 따르면 금번 송죽(松竹)영화 배급소인 경성 덕영(德永)상점이 <춘천극장>을 인수하여 <읍애관(邑愛館)>이라는 상설관(常設館) 허가를 얻어 직영으로 매일 우수한 영화를 상영하기로 되었다고 전했다.

 

아라키가 <조선극장>을 상설관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가설극장을 7-8년이나 해야 했던 것, 그리고 마츠다가 약 3년도 안되어 <조선극장>을 도쿠에이에게 매각했던 것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춘천 시민들이 영화를 신기해하며 좋아하기는 했지만 실질 수요가 많지는 않았던 춘천에서 상설관 경영이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jc, 2021/8/23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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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川市民自発的かつ闘争的近代化要求京春線道路改修鉄道敷設問題だけでなく公会堂設立過程からもれる春川公会堂設置要求めてマスコミに報道されたのは19251112釜山日報掲載された春川支局後藤生(筆名)記事だった

 

後等生春川人口えており日本人朝鮮人のために市民のための文化施設必要だという問題正式提起したのだそれまでは春川邑許文里(ホムンリ,=現在春川市中央路1小規模公会堂春川文化行事開催していたがあまりにも小規模だったため一部映画上映することはできたものの正式文化芸術公演うには力不足だった

 

192781朝鮮新聞春川繁栄会大典記念事業として春川公会堂建設するための1回準備委員会この問題繁栄会評議員会正式提起することにしたとじた。 「大典とは1926年末死去した大正天皇いだ裕仁天皇即位記念する儀礼

 

1929年12月20日の『毎日申報』に掲載された春川公会堂の完成した様子。

 

98每日申報一道中心地である春川邑内公会堂設備がないことは一般だしく遺憾っていた、「最近公社会合があるたびにこの問題について協議ねてきた春川面長繁栄会長道平議員道庁内務主任などの有力者公会堂建設すことにしたえた

 

とくに93開催された公会堂建設問題協議会では春川面協議員崔養浩氏率先して公会堂建設資金として1千圓寄付するえをらかにしたとえた その京城春川々が春川公会堂建設基金寄付ければ1千圓2千圓なければ数百圓数十圓ずつ基金造成され総額12892した

 

1929712日付朝鮮新聞公会堂期成会公会堂敷地として春川面事務所横められ整地工事ったと1929129朝鮮新聞春川公会堂完成1215落成式えた

 

1925年11月12日の『釜山日報』に掲載された春川公会堂設立の必要性を初めてマスコミが力説した論説

 

1220毎日新報1215日午前11から盛大落成式ったこのには道知事をはじめとする道庁幹部市内各官公庁長をはじめとする市民有志500参加盛況したとえたまた記事はこの公会堂本館付属建物わせて112建設費としては173百圓がかかったので春川においては非常広大建物となったと紹介した

 

しかし1930812中外日報によると江原道春川公会堂今年新築され市内では素晴らしい建物かのをもちろんして公会堂まることになるえながらも、「天井空気穴がなくてどうしても司会者言葉客席れないのでもし演劇団のようなものが興行するでも舞台言葉々にしていただけで客席にはこえないので一般残念ながらうことはできないえた

 

この音響問題修理されたかどうかの記録はないがそれから約半年後1931221崔承喜がこの公会堂舞踊公演会いたには音響する不満言及されなかった舞踊公演会言葉ける必要がないためかもれない

 

1936年4月22日の『朝鮮中央日報』に掲載された春川公会堂内部の様子。

 

春川民間人有志たちが1925年頃から春川鉄道道路交通改善公会堂建築先頭っていたことは注目する日帝当局春川搾取にだけ関心つだけで近代化惠澤けられなかった市民直接乗して近代的施設整備めたのだ

 

<春川自動車社>設立日本人自動車社独占えた崔白洵(チェ·ベクスン)<春川公会堂期成会>初会議1千圓寄付期成会副会長として公会堂完成させた崔養浩(チェ·ヤンホ, 1882-1950)さんなど朝鮮人有志たちが春川初期近代化積極的参加した事実記憶しておく価値がある。 (jc、2021/8/18草稿;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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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시민들의 자발적, 투쟁적 근대화 요구는 경춘선 도로 개보수와 철도 개설 문제뿐 아니라 공회당 설립 과정에서도 읽을 수 있다. 춘천공회당 설치요구가 처음 언론에 보도된 것은 19251112일의 <부산일보>에 실린 춘천지국의 후등생(後藤生, 필명)의 기사였다.

 

후등생은 춘천의 인구가 늘고 있어 내지인과 조선인 모두를 위해 시민을 위한 문화시설이 필요하다는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춘천읍 허문리(=지금의 중앙로1)의 소규모 공회당이 춘천의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었으나 워낙 소규모여서 일부 영화를 상영할 수는 있었지만 정식 문화예술 공연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듬해인 192781일의 <조선신문>은 춘천번영회가 대전(大典)기념 사업으로 춘천공회당을 건설하기 위한 제1회 준비위원회롤 열고, 이 문제를 번영회 평의원회에 정식으로 제기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대전이란 1926년 말에 사망한 다이쇼 천황의 뒤를 이은 히로히토 천황의 즉위를 기념하는 의례를 가리킨다.

 

1929년 12월20일의 <매일신보>에 실린 춘천공회당의 완공된 모습.

 

98일의 <매일신보>일도의 중심지인 춘천읍내에 공회당의 설비가 없음은 일반이 심히 유감으로 여기던 바라고 전하고 최근 공사의 회합이 있을 때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협의를 거듭해 온 춘천 면장과 번영회장, 도평의원, 도청 내무주임 등의 유력인사들도 공회당 건설에 나서기로 했다고 전했다.

 

특히 93일에 개최된 공회당건설문제협의회에서는 춘천면협의원 최양호(崔養浩)씨가 자진 솔선하여 공회당 건설자금으로 1천원을 기부할 뜻을 밝혔다고 전했다. 이후 경성과 춘천의 인사들이 춘천공회당 건설기금을 기부하기 시작했고, 많게는 1천원, 2천원씩, 적게는 수백원, 수십원씩 기금이 조성되어, 총액이 12892원에 이르렀다.

 

1929712일자 <조선신문>은 공회당 기성회가 공회당 부지로 춘천면사무소 가로옆()”으로 정해져, 정지공사에 들어갔다고 보도했고, 1929129일의 <조선신문>춘천공회당이 완성되어 1215일 낙성식을 거행한다고 전했다.

 

1925년 11월12일의 <부산일보>에 게재된 춘천공회당 설립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언론에서 역설한 논설

 

1220일의 <매일신보>“1215일 오전11시부터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했다고 보도하고, 이 자리에는 도지사를 비롯한 도청 간부들과 시내 각관공서장을 위시하여 시민유지들까지 약 5백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고 전했다. 또 기사는 이 공회당이 본관과 부속건물을 합하여 112평을 차지했고, 건설비로는 모두 173백여원이 들었기 때문에 춘천에 있어서는 자못 미려 광대한 건물이 되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1930812일의 <중외일보>에 따르면 강원도 춘천공회당은 금년 신축하여 시내에서는 굉장한 건물로 무슨회를 물론하고 공회당에서 모이게 되는 바라고 전하면서도 천정에 공기구멍이 없어서 도무지 사회자의 말을 객석에서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혹 연극단 같은 것이 와서 흥행하게될 때에라도 무대에서 하는 말이 왕왕 울리기만 하고 도무지 객석에는 들리지 아니하여 일반은 심히 유감중 다시 수선치 아니하면 도저히 될 수 없다고 일반의 원성이 높다고 전했다.

 

이 음향의 문제가 수리되었는지의 기록은 나타나있지는 않지만 그로부터 약 반년 후인 1931221일 최승희가 이 공회당에서 무용공연회를 열었을 때에는 음향에 대한 불만은 언급된 바 없었다. 무용공연회는 말을 알아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1936년 4월22일의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춘천공회당 내부의 모습

 

춘천의 민간인 유지들이 1925년경부터 춘천의 철도와 도로교통 개선과 공회당 건축에 앞장섰던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일제 당국이 춘천 착취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근대화의 혜택을 받지 못한 시민들이 직접 나서 근대적 시설들을 마련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춘천자동차사>를 설립해 일본인 자동차사의 독점을 끝장낸 최백순과 <춘천공회당 기성회> 첫 회의에서 1천원을 기부하고 기성회 부회장으로서 공회당을 완성해 낸 최양호씨 등, 조선인 유지들이 춘천의 초기 근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실은 기억해 둘만 하다.(jc, 2021/8/18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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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年以来崔承喜めてきた15地方公演ると公演地選択にいくつかの傾向られた第一幹線鉄道線上やそれに都市だった釜山プサン14.6大邱テグ9.3)、大田テジョン2.2清州チョンジュ1.7水原スウォン1.3京釜線上都市であり開城ケソン4.9沙里院サリウォン2.4平壌ピョンヤン14.1京義線仁川インチョン6.8京仁線都市

 

第二木浦(モクポ3.5)鎮南浦(ジンナムポ3.8)しくめた港町だった第三海州ヘジュ2.4在寧チェリョン1.91940)、仁川水原京城都市だったカッコ数字からもかるように公演都市決定人口1万人基準にしたものとられる

 

崔承喜春川公演決定したのはおそらく3番目基準つまり京城周辺都市だということによるだろう1930春川人口1万人基準えたが海州在寧水原仁川などの京城周辺都市とはつのなっていた鉄道がなく自動車交通事情までくなかったし劇場規模さくて収益げる可能性がほとんどなかったそれなのにどうしてチェ·スンヒは春川公演ったのだろうか

 

1931年1月11日の<東亜日報>に掲載された<チェ·スンヒ舞踊発表会>の作品、<彼らの行進曲>

 

これをるためには1920年代後半春川雰囲気紹介する必要がある韓日合併以後朝鮮主要都市一定近代化経験したたとえそのような近代化日帝中国大陸侵略のための準備ではあったが鉄道港湾土地所有農業改良工業金融そして文学芸術などの分野近代化まったのは事実

 

しかし春川はそのような近代化惠澤をほとんど享受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道庁所在地でありながら農業畜産養蚕伐木などの1次産業以外にはこれといった産業がなく都市化んでいなかった鉄道もなく自動車道整備されていなかったこれを春川市民たちは1920年代半ばから絶対的不便さと相対的剥奪感問題解決のための努力傾注した

 

まず交通手段改善要求がった京春間自動車運行まったのは1910年代半ばで191586毎日申報によると、「内鮮自動車社京春間自動車運行事業権許可され営業開始したが自動車1のみであった10ぎても自動車3-4増便しただけで<內鮮自動車社>京春間片道1人当たりの運賃6策定暴利をむさぼっていた

 

1922年12月5日の「東亜日報」に掲載された「內鮮自動車運輸株式会社」の広告文

 

1926710毎日申報春川繁栄策じるために組織された三五会自動車運賃"5"決議江原道当局內鮮自動車会社交渉めたとえた。 「運賃げるには道路改善必要という<內鮮自動車史>支配人主張もあったまた<內鮮自動車社>独占的地位とこれを保護する江原道当局問題原因として指摘された

 

三五会問題提起1928527釜山日報再報道じられたことをると、「內鮮自動車社独占道当局庇護道路問題依然として解決されていないようにえるこれに春川郡民たちは1928113総督府政務総監陳情書提出鉄道12年計画京春線除外されたことは残念であり京春自動車道でも改修してほしい要求した

 

春川市民根強要求努力<內鮮自動車社>1929415人乗りの乘合車京春線配置9には自動車運賃5げるなど改善のジェスチャーをった

 

崔承喜が1929年12月5日、朝鮮劇場で開かれた<舞踊演劇映画の夜>で舞踊を発表している。

 

一方1930春川弁護士崔白洵(チェ·ベクスン, 1897-?)春川自動車運輸株式会社設立京春自動車事業許可権獲得したことで、「內鮮自動車史独占的地位ったその京春線自動車料金4504340にさらに値下げされた

 

193139毎日申報春川市民たちは<春川繁栄会>結成京春間鉄道国営自動車運輸実現策促進するとこれを具体的運動展開することを決議した報道した

 

つまり春川市民なくとも1926から不便交通問題直接解決結局京春線鉄道敷設貫徹できなかったが自動車交通問題点つずつ解決していったのである。 (jc、2021/8/18草稿;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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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이래 최승희가 진행해 온 15회의 지방공연을 보면 공연지 선택에 몇 가지 경향성이 보였다. 첫째 간선철도 선상이나 그에 가까운 도시들이었다. 부산(14.6)과 대구(9.3), 대전(2.2)과 청주(1.7)와 수원(1.3)은 경부선 상의 도시였고, 개성(4.9)과 사리원(2.4)과 평양(14.1)은 경의선, 인천(6.8)은 경인선의 도시들이다.

 

둘째, 목포(3.5)와 진남포(3.8)는 새로 번성하기 시작한 항구도시들이었다. 셋째, 해주(2.4)와 재령(1.9, 1940), 인천(6.8)과 수원(1.3)은 경성에 가까운 도시들이었다. 괄호 안의 숫자가 보이듯이 아마도 공연 도시 결정은 인구 1만 명을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가 춘천 공연을 결정한 것은 아마도 세 번째의 기준, 즉 경성 인근 도시라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1930년의 춘천 인구는 1만 명으로 기준을 넘기기는 했지만, 해주나 재령, 수원이나 인천 등의 경성 인접 도시들과는 두 가지 면에서 달랐다. (1) 철도가 없고 자동차 교통 사정마저 좋지 않았으며, (2) 극장 규모가 작아서 수익을 올릴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최승희는 춘천 공연을 단행했을까?

 

1931년 1월11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최승희무용발표회>의 한 작품, <그들의 행진곡>

 

이를 살피기 위해서는 우선 1920년대 후반의 춘천 분위기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 한일합병 이후 조선의 주요 도시들은 일정한 근대화를 경험했다. 비록 그같은 근대화가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을 위한 준비였지만, 철도와 항만, 토지소유와 농업개량, 공업과 금융, 그리고 문학과 예술 등의 분야에서 근대화가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춘천은 그같은 근대화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 도청소재지이면서도 농업과 축산, 양잠과 벌목 등의 1차 산업 외에는 이렇다 할 산업이 없었고, 도시화가 진행되지도 못했다. 철도도 없었고, 자동차도로도 정비되지 못했다. 이에 춘천 시민들은 1920년대 중반부터 절대적 불편함과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문제해결 노력을 경주하기 시작했다.

 

우선 교통수단 개선 요구가 제기됐다. 경춘간 자동차 운행이 시작된 것은 1910년대 중반이었는데, 191586일의 <매일신보>에 따르면 <내선(內鮮)자동차사>가 경춘간 자동차 운행사업권을 허가받아 영업을 시작했지만 자동차는 1대뿐이었다. 10년이 지나서도 자동차를 3-4대로 증편했을 뿐, <내선자동차사>는 경춘간 편도 1인당 운임을 6원으로 책정해 폭리를 취했다.

 

1922년 12월5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내선자동차운수주식회사>의 광고문

 

1926710일의 <매일신보>춘천의 번영책을 강구하기 위해 조직된 삼오회(三五會)”가 자동차 운임을 “5으로 결의해 강원도 당국과 내선자동차사에 교섭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운임을 인하하려면 도로 개선이 필요하다<내선자동차사> 지배인의 주장도 실렸다. <내선자동차사>의 독점적 지위와 이를 비호하는 강원도 당국도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삼오회의 문제제기가 1928527일의 <부산일보>에 재차 보도된 것을 보면, <내선자동차사>의 독점과 도당국의 비호, 그리고 도로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춘천군민들은 1928113일 총독부의 정무총감에게 진정서를 제출해 철도12년 계획에 경춘선이 제외된 것은 유감이며, 경춘 자동차도로라도 개수해 달라고 요구했다.

 

춘천시민들의 끈질긴 요구와 노력 끝에 <내선자동차사>1929415인승 승합차를 경춘선에 배치했고, 9월에는 자동차 운임도 5원으로 인하하는 등 개선의 제스처를 취했다.

 

최승희가 1929년 12월5일 조선극장에서 열린 <무용연극영화의밤>에서 무용을 발표하고 있다.

 

한편, 1930년 춘천의 변호사 최백순이 <춘천자동차운수주식회사>를 설립해 경춘 자동차사업 허가권을 따냄으로써 <내선자동차사>의 독점적 지위가 무너졌다. 이후 경춘선 자동차 요금은 450전과 4원을 거쳐 340전으로 더욱 인하되었다.

 

193139일의 <매일신보>는 춘천 시민들은 <춘천번영회>를 결성해 경춘간 철도국영 자동차운수 실현방안을 촉진할 것과 이를 구체적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고 보도했다.

 

, 춘천시민들은 적어도 1926년부터 불편한 교통 문제를 직접 나서 해결하기 시작했고, 결국 경춘선 철도 가설은 관철하지 못했지만 자동차 교통의 문제점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갔던 것이다.  (jc, 2021/8/18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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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喜19298月末留学えて帰国した同年11月初、「崔承喜舞踊研究所設立10弟子募集して教育訓練しい舞踊作品創作していった

 

帰国後初公演1929125朝鮮劇場かれた贊映会主催舞踊演劇映画であった京城主要日刊紙芸能部記者たちのまりである贊映会組織したこの公演朴勝喜土月会活動再開した公演でもあるこの公演でチェ·スンヒは印度人悲哀』、『セレナーデなどの3作品発表朝鮮舞踊界第一歩した

 

まもなく崔承喜193021京城公会堂において1回舞踊発表会11新作発表した9弟子たちと一緒だったこの公演わるやいなや24-5開城ケソン高麗青年会館講堂地方公演った

 

1929年12月5-7日、京城<朝鮮劇場>で開かれた<舞踊演劇映画の夜>公演。 この公演が舞踊留学から帰ってきた崔承喜の初舞台だった。

 

同年33141には團成社2回目<創作舞踊公演会>5新曲発表1021-22には團成社3回目公演である<2回創作舞踊発表会>16新曲発表した1931110-12には崔承喜第3回発表会いて16発表したがこのうち4新曲だった

 

その1930411には中央幼稚園主催<新春慈善音楽舞踊会>614<苦學生のための慈善舞踊会>1114<女子苦學生のための基金募金同情舞踊会>3慈善舞踊公演っている

 

京城での新作発表会慈善舞踊会にも崔承喜地方公演活発った193024-5開城公演をはじめ釜山プサン524-5)、大邱テグ526-7)、平壌ピョンヤン67-8公演平壌622-23)、鎭南浦チンナムポ625)、沙里院サリウォン627)、清州チョンジュ912-13)、木浦モクポ119)、大田テジョン1111), 海州ヘジュ1117-18), 仁川(インチョン1220)載寧(ジェリョン1121), 水原(スウォン1129)釜山(1931217)でも公演った

 

1930年1月22日付の<每日申報>に掲載された<崔承喜第1回発表会>の記事。

 

要約すると崔承喜帰国後約14正式発表会じて30新作発表このレパートリーで3慈善公演15地方公演ったということだ30新曲をタイトルだけべるとのようになる

 

“<印度人悲哀>, <=黄昏>, <セレナーデ>, 以上1929年新作; <金婚式舞踏>, <陽気舞踊>, <戱弄>, <>, <オリエンタル>, <哀愁>, <モダン風景>, <解放める>, <霊山舞>, <マズルカ>, <寂寞たるワルツ>, 以上21日第1回発表会新作; <--><農村少女><ける><運命><天女>以上331創作舞踊公演会発表新作; <らは太陽><月夜><長春不老地曲><スパニッシュダンス><南洋情景:土人><南洋情景:ハワイ小夜曲><放浪人しみ><浄土><印度人恋歌><ジプシーの>, <歌劇ファウスト:古代舞踊>, <ファウスト:クレオパトラの黄金>, <ファウスト:トロイ>, <ファウスト:各女神>, <この兵士がブサイク>, <エジプト風景>, 以上1021新作舞踊2回公演新作; らのロマンス」、「郷土舞踊:農村少女風作たら…」、<狂想曲>, <らの行進>, 以上1931110崔承喜第3回発表会新作.”

 

崔承喜の初期の代表作『印度人 の 悲哀(1929)』の一場面

 

このように活発公演活動じて崔承喜はわずか1朝鮮社会有望新進舞踊家であり人気のある芸術家としてばれるようになった崔承喜新作舞踊発表会には朝鮮総督をはじめとする京城駐在外交官要人大挙参加した

 

崔承喜人気日本人朝鮮人わず高官大作から一線近代化恩恵享受した知識人文化芸術家妓生やルンペン一般庶民るまで多様広範囲っていた

 

崔承喜1931221断行した春川公演このような公演活動一環でありすでにその名声られている崔承喜春川でも歓迎けたのである(jc2021/8/18草稿;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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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는 19298월말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해 11월초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했고, 10여명의 제자들을 모집해 교육과 훈련을 시키면서 새로운 무용작품을 창작해 나갔다.

 

귀국 후 첫 공연은 1929125일 조선극장에서 열린 찬영회 주최의 <무용연극영화의밤>이었다. 경성 주요 일간지 연예부 기자들의 모임인 찬영회가 조직한 이 공연은 박승희의 토월회가 활동을 재개한 공연이기도 했다. 이 공연에서 최승희는 <인도인의 비애><금과은>, <세레나데> 등의 세 작품을 발표하면서 조선 무용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곧이어 최승희는 193021일 경성공회당에서 <1회 무용발표회>를 열고 11곡의 신작품을 발표했다. 9명의 제자들과 함께였다. 이 공연을 마치자마자 24-5일 개성의 고려청년회관 강당에서 첫 지방공연도 가졌다.

 

1929년 12월5-7일, 경성 <조선극장>에서 열린 <무용연극영화의밤> 공연. 이 공연이 무용유학에서 돌아온 최승희의 초무대였다.

 

그해 331일과 41일에는 단성사에서 두 번째 <창작무용공연회>를 열고 5곡의 신곡을 발표했고, 1021-22일에는 역시 단성사에서 세 번째 공연인 <2회 창작무용발표회>를 열고 16곡의 신곡을 발표했다. 1931110-12일에는 <최승희 제3회발표회>를 열고 또다시 16곡을 발표했는데, 이중 4곡이 신곡이었다.

 

그밖에도 1930411일에는 중앙유치원 주최의 <신춘자선음악무용회>, 614일의 <고학생을 위한 자선무용회>, 1114일의 <여자고학생을 위한 기금모금 동정무용회> 등의 3번의 자선무용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경성에서의 신작 발표회와 자선무용회 외에도 최승희는 지방공연도 활발하게 실시했다. 193024-5일의 개성 공연을 비롯해 부산(524-5), 대구(526-7), 평양(67-8)에서 공연했고, 계속해서 평양(622-23), 진남포(625), 사리원(627), 청주(912-13), 목포(119), 대전(1111), 해주(1117-18), 인천(1220), 재령(1121), 수원(1129), 부산(1931217) 등에서도 공연을 가졌다.

 

 

1930년 1월22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최승희 제1회발표회> 기사.

요약하면, 최승희는 귀국 후 약 1년 동안 4번의 정식 발표회를 통해 약 30곡의 신작품을 발표했고, 이 레퍼토리를 가지고 3회의 자선공연과 15회의 지방공연을 단행했던 것이다. 30곡의 신곡을 제목만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인도인의 비애>, <금과은=황혼>, <세레나데>, 이상 1929년 신작; <금혼식의 무도>, <양기의 무용>, <희롱>, <사랑의춤>, <오리엔탈>, <애수의 여인>, <모던풍경>, <해방을 구하는 사람>, <영산무>, <마즈루카>, <적막한 왈츠>, 이상 21일 제1회발표회 신작; <, -->, <농촌소녀의 춤>, <밤이 밝기 전>, <운명을 탄식하는 사람>, <선녀의 춤>, 이상 331일의 창작무용공연회 발표신작; <그들은 태양을 찾는다>, <달밤에>, <장춘불로지곡>, <스패니쉬댄스>, <남양의정경: 토인의춤>, <남양의정경: 하와이소야곡>, <방랑인의 설움>, <정토의 무희>, <인도인의 연가>, <집시의 무리>, <가극파우스트: 고대무용>, <파우스트: 클레오파트라의 황금의잔>, <파우스트: 트로이처녀의춤>, <파우스트: 각여신의춤>, <이병정 못났다>, <이집트풍경>, 이상 1021일의 신작무용2회공연의 신작; <그들의로맨스>, <향토무용: 농촌소녀, 풍년이오면>, <광상곡>, <그들의행진>, 이상 1931110일의 최승희3회발표회 신작.”

 

최승희의 초기 대표작 <인도인의 비애(1929)>의 한장면

 

이 같이 활발한 공연활동을 통해 최승희는 불과 1년 만에 조선 사회의 가장 촉망받는 신진 무용가이자, 가장 인기 있는 예술가로 꼽히게 되었다. 최승희의 신작무용발표회에는 조선총독을 비롯한 경성 주재 외교관들을 포함한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곤 했다.

 

최승희의 인기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막론한 고관대작들로부터 가장 일선에서 근대화의 혜택을 누리던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 그리고 기생과 룸펜, 일반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면서도 광범위했다.

 

최승희가 1931221일 단행한 춘천 공연은 이러한 공연활동의 일환이었고, 이미 그 명성에 널리 알려진 최승희는 춘천에서도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jc, 2021/8/18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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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化において交通発達核心的重要日本朝鮮侵略する一番先鉄道敷設したのがそのである1900京仁線(済物浦-西大門駅)開通するには仁川経由入国した外国人京城到着するまで10時間かかった京仁線はそれを1時間40らした京城市民済物浦中華楼って昼食べてることができたのだ

 

1905111にそれぞれ開通した京釜線京義線じだったこのつの鉄道開通したことで日本釜山上陸24時間以内新義州通過して中国進出できるようになった

 

ところが京城春川には19397まで鉄道がなかった今日京春線鉄道延長90km高速鉄道1時間しかかからない距離であるしかし河野萬世した春川風土記(1935)によると1925年頃京城-春川道路地形しく道路不十分自動車20時間かかったという

 

1920年代の京春街道とその上を走る車

 

それも朝鮮時代べると道路事情きく改善したのだ1907までも官吏京城から江原道監営のあった春川赴任するのに3かかったという記録がある道路整備され1925年頃には自動車20時間かかったというから交通時間31ったのだ

 

それが朝鮮総督府設置した治道局主導道路整備事業った結果1935年頃には京城から春川までは直通自動車3時間乗合自動車4時間かかる水準った

 

しかし整備された道路まで洪水大雪頻繁流失くて数日くて月間交通途絶えてしまった1926720東亜日報洪水により京春街道流失郵便物発動船逓送しているところだと報道19261229中外日報大雪京春間道路不通になったとえた1928111釜山日報天気かくなり間不通になっていた慶春間道路再開されたとえたこのような報道から京春間道路には定期的自動車便があっても悪天候でよく途絶えていたことがかる

 

京春街道を運行する自動車は、時には強盗の犠牲になったりもした。

 

道路交通かしたのは自然災害だけではなかった京春間道路しく人里離れた山岳地域通過するため自動車事故自動車強盗頻発した192833毎日申報自動車から墜落した事故1929421釜山日報自動車強盗出没乗客ろして自動車京城げたとじた

 

自然災害事故強盗京春間自動車運賃非常かった1926710日付けの毎日申報京春間自動車片道料金6だと報道これをなくとも5げるべきだという要求えているとじた1926年頃教員月給40だったので京春間自動車1回往復料金12教員月給31該当した

 

1930年頃京仁線鉄道運賃片道48料金片道95だったしたがって京春間道路距離京仁間道路より2ほどいという考慮してもその自動車運賃京仁間自動車運賃べて2鉄道料金べて4かった

 

『春川風土記(1935)』に掲載された京春街道の様子

 

したがって崔承喜舞踊団1931年初めに春川公演うためには往復旅行時間だけでも2-3かかり自動車旅行中事故強盗脅威にさらされ10のダンサーと4-5のスタッフは180自動車運賃支払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当時春川公会堂客席数700大人一人当たりの入場料80だったので1公演収入最大560であったここから最低23宿泊費自動車運賃公會堂貸館料などの費用けば公演収益はほとんどなかったり赤字れにくかったりしただろう

 

崔承喜舞踊団1931221春川公演断行したのは財政的ではもちろん実際的でも簡単にはめられなかったことだった崔承喜はなぜこのような困難悪条件って春川公演ったのだろうか。 (jc、2021/8/18草稿;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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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에서 교통 발달은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면서 가장 먼저 철도를 부설한 것이 그 예이다. 1900년 경인선(제물포-서대문역)이 개통되기 전에는 인천을 통해 입국한 외국인들이 경성에 도착하기까지 약 10시간이 걸렸다. 경인선은 그것을 1시간40분으로 줄였다. 경성 시민들은 제물포 중화루에 가서 점심을 먹고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다.

 

19051월과 11월에 각각 개통된 경부선과 경원선도 마찬가지였다. 이 두 철도가 개통됨으로써 일본은 부산에 상륙해 24시간 안에 신의주를 통과해 중국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경성과 춘천 사이에는 19397월까지 철도가 없었다. 오늘날 경춘선 철도 연장이 약 90킬로미터로 고속철도로 1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이다. 그러나 코노 반세(河野萬世)가 저술한 <춘천풍토기(1935)>에 따르면 1925년 경 경성-춘천 도로는 지형이 험하고 도로가 부실해서 자동차로 20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1920년대의 경춘가도와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

 

그나마도 조선시대에 비하면 도로사정이 크게 좋아진 것이었다. 1907년까지도 관리가 경성에서 강원감영이 있던 춘천에 부임하는데 3일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나마 도로가 정비되어 1925년경에는 자동차로 20시간 걸렸다고 하니 교통시간이 약 3분의1로 줄어든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조선총독부가 설치한 치도국(治道局)의 주도로 대대적인 도로정비사업을 벌인 결과 1935년경에는 서울에서 춘천까지 직통 자동차로 3시간, 승합자동차(버스)4시간이 걸리는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정비된 도로마저 홍수와 폭설로 자주 유실되어 짧으면 며칠, 길면 몇 달씩 교통이 두절되었다. 1926720일의 <동아일보>는 홍수로 경춘가도가 유실되어 우편물을 발동선으로 체송하는 중이라고 보도했고, 19261229일의 <중외일보>는 폭설로 경춘간 도로가 불통되었다고 전했다. 1928111일의 <부산일보>도 날씨가 풀리면서 겨우내 불통되었던 경춘간 도로가 재개되었다고 전했다. 이같은 보도로 미루어 경춘간 도로에는 정기적인 자동차편이 있었더라도 악천후로 자주 두절되곤 했었음을 알 수 있다.

 

경춘가도를 운행하는 자동차들은 때로 강도의 희생이 되기도 했다.

 

도로교통을 위협한 것은 자연재해뿐 아니었다. 경춘간 도로가 험준하고 외딴 산악지역을 통과하기 때문에 자동차 사고와 자동차 강도가 빈발했다. 192833일의 <매일신보>는 자동차가 절벽에서 추락한 사고를 보도했고, 1929421일의 <부산일보>는 자동차 강도가 출몰해 승객들을 내려놓고 자동차를 탈취해 경성 쪽으로 달아났다고 보도했다.

 

자연재해와 사고, 강도에 더하여 경춘간 자동차 운임이 대단히 높았다. 1926710일자 <매일신보>는 경춘간 자동차 편도요금이 6원이라고 보도하면서 이를 적어도 5원으로 인하해야 한다는 요구가 늘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1926년경 교원 월급이 40원이었으므로 경춘간 자동차 1회 왕복요금 12원은 교원 월급의 3분의1에 해당했다.

 

1930년경 경인선 철도 운임이 편도 48, 차동차 요금은 편도 95전이었다. 따라서 경춘간 도로의 거리가 경인간 도로보다 2배쯤 길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그 자동차 운임은 경인간 자동차 운임에 비해 약 2, 철도 요금에 비해 약 4배나 더 비쌌다.

 

 

<춘천풍토기(1935)>에 실린 경춘가도 모습

따라서 최승희무용단이 1931년 초에 춘천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왕복 여행시간만 2-3일이 걸렸고, 자동차 여행 중의 사고나 강도의 위협을 무릅써야 했으며, 10명의 무용수와 4-5명의 스탭들은 약 180여원의 자동차 운임을 지불해야 했다.

 

당시 춘천 공회당의 객석수가 7백석이었고, 어른 1인당 입장료가 80전이었으므로 1회 공연수입은 최대 560원이었다. 여기서 최소 23일의 숙식비와 자동차 운임, 극장대관료 등의 비용을 제외하면, 공연 수익은 거의 없거나 적자를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최승희의 무용단이 1931221일 춘천 공연을 단행한 것은 재정적인 면에서는 물론 실제적인 면에서 쉽게 결정하기 어려웠던 일이었다. 최승희는 왜 이같은 어려움과 악조건을 무릅쓰고 춘천 공연을 단행했던 것일까? (jc, 2021/8/18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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