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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재단이 펴낸 자료집 <일본지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2019)>에 따르면 일본에는 약 170기의 조선인 추도비가 건립되어 있습니다. 일본 전역을 누비면서 조선인 추도비를 찾아 기록해 온 안해룡 선생은 이 자료집에 포함되지 않은 추도비가 30기 이상 더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에는 조선인 추도비가 약 200기쯤 세워져 있는 셈입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이 200기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불과 3년 전인 2020326일에 건립되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세워진 이 추도비는 여러모로 특징적입니다.

 

 

우선,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그 연원이 1백년 이상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추도비에 기록된 다섯 분의 조선인 희생자들이 1914년과 1929년 사이에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다카라즈카의 니시타니 촌사무소가 발행한 매장인허증에 따르면 최초의 희생자 김병순씨는 191483일에 매장됐고, 남익삼씨는 1915121, 장장수씨는 1915324일 매장됐습니다. 모두 고베수도 개수공사 중에 사고로 사망하신 분들입니다.

 

 

한편 옛 후쿠치야마선 철도 개수공사에 참가했던 윤길문씨와 오이근씨는 1929326일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사망했습니다. 따라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는 길게는 109, 짧게는 94년 전의 사고로 돌아가신 것이지요.

 

둘째, 사망 후 잊혀졌던 이 희생자들은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발굴되고, 기록되고, 제사되고, 마침내 추도비가 세워졌습니다. 철도공사 희생자 두 분은 1993년 정홍영, 콘도 도미오 조사팀에 의해 발굴되었습니다. 사망 후 64년 만이었습니다. 효고현의 조선관계 연구의 권위자인 호리우치 미노루, 히다 유이치 선생님도 자료와 도움을 제공했습니다.

 

 

반면 수도공사 중에 돌아가신 세 분은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타마세 부인회가 불교사찰 만푸쿠지의 주지스님의 집전으로 매년 위령 제사를 드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08년 동안 계속된 이 위령제사는 타마세의 바깥 세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0202월 추도비 건립 중이던 콘도 도미오 선생께 그 사실이 알려졌고, 수도공사 희생자 세 분을 철도공사 희생자 두 분과 함께 기리는 추도비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셋째, 이 추도비는 일본인과 재일동포의 협력으로 세워졌습니다. 이 추도비의 뒷면에는 이 추도비를 세운 단체가 명시되어 있는데, <추도비 건립회>, <다카라즈카시 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 <목련회>가 그것입니다.

 

<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는 다민족 공생을 위한 다카라즈카의 시민단체이고, <목련회>는 오사카의 시민단체입니다. 이들은 재일조선인 연구와 조선학교 후원에 적극적입니다. <추도비건립회>는 두 단체에 속하지 않지만 추도비 건립에 참여한 분들을 포함한 연합단체였습니다.

 

 

이 세 단체에는 일본인 회원이 더 많습니다. 모금에 참여한 후원자 명단에는 6:4 정도의 비율로 일본인 이름이 더 많습니다. 추도비 건립에 일본인들이 적극적이었다는 뜻입니다.

 

넷째, 재일동포 중에는 민단과 총련이 모두 참여했습니다. 후원자 명단에는 다카라즈카의 총련지부와 민단지부가 나란히 등재되어 있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건립하기 위해 다카라즈카의 동포들이 이데올로기와 정치성향을 초월해 협력했던 것이지요.

 

 

이런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저는 이 추도비가 구상되기 시작해서 건립되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조사해서 기록으로 남기려고 애썼습니다. 이 추도비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많은 분들이 이 추도비를 방문했습니다. <다카라즈카 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목련회>는 물론, <팀아이><무용신> 회원들도 여러차례 방문했습니다. 이 추도비의 건립을 알게 된 많은 재일동포 분들과 조선학교 학생들도 희생자들을 참배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514일 강릉 대표단도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참배하게 된 것이지요. (jc, 202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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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実務訪問団2つのイベントに参加しました切畑朝鮮人追悼碑参拝玉瀬朝鮮人参拝墓にムクゲをえました

 

100年余にこの地域死亡した朝鮮人労働者追悼1韓国訪問団感謝のコンサートをいたことにするいとして用意された行事でした朝鮮人殉難者をめぐって好循環いているのですね

 

 

1月末<舞踊靴>1回目訪問わった直後滿福寺足立泰敎僧侶足立智敎僧侶日本<チームアイ>複数会員協力して参拝墓近くにムクゲをえることを企画され町民同意されたそうです村共同事業主管する丹心会毎年朝鮮人犠牲者のために慰霊祭ってきた婦人会参加しました

 

滿福寺丹心会婦人会行事準備している<チームアイ>会員たちから韓国参加してほしいという要請がありそこで今回実務訪問団構成されました<1江陵フォーラム>3参加することになったことは玉瀬住民にとってきなみとなったようです玉瀬參拜墓られた3のうちの1キム·ビョンスンさんが江陵出身だったからです

 

 

もともと514訪問団日程しいでした午前11には大阪朝鮮学校同胞祭午後1玉瀬のムクゲ植樹行事そして午後3時半には神戸市立中央図書館<青丘文庫研究会>論文発表会がありました

 

東大阪菱江大阪朝高玉瀬滿福寺神戸市市立中央図書館移動してもそれぞれ1時間かかる距離なのでとてもがなければようやくたどりけない日程でした

 

いなのか不幸なのか大阪朝鮮学校行事3日間降室内行事転換されたため訪問団参加されました大阪朝鮮学校10月初めの運動会訪問できるというえで今回訪問しないことが当日朝即席まりました

 

 

午前中余裕ができた訪問団玉瀬のムクゲ植樹行事参加する長尾山麓切畑てられた宝塚朝鮮人追悼碑をまず参拝することをめました

 

この追悼碑1914-15神戸水道改修工事中にトンネル落盤事故死亡した朝鮮人労働者3(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南益三(ナム·イクサム)張長守(チャン·ジャンス))1929福知山線鉄道改修工事中にダイナマイト事故くなった2朝鮮人労働者2(尹吉文(ユン·ギルムン)吳伊根(·イグン))追悼するため2020建設されました

 

一行宿くの十三駅宝塚行きの列車いて福知山線えて武田尾駅りました宝塚から武田尾まではわずか3でしたが都市風景完全深山幽谷展開されていました

 

 

宝塚朝鮮人追悼碑れるという連絡鄭鴻永(チョン·セファ)先生真銅敏之先生えにてくれました武田尾駅から切畑追悼碑まではいても30分以内という距離ですがムクゲ記念植樹行事手伝うために滿福寺到着していたお二人訪問団便宜のために車便提供したんですよね

 

馬蹄形がった武庫川がソ出会うところにそこからはいて追悼碑かいました。 「宝塚朝鮮人追悼碑てられた親水広場までは10もかかりません

 

 

線路撤去され枕木だけがっていてここがかつて福地山線っていた鉄道だったことをしています枕木沿っていていくと2つのトンネルを通過することになりますがこれらのトンネルがまさに朝鮮人労働者発破掘削したトンネルでありそのつが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現場です

 

姜承昊(カン·スンホ)李洪範(·ホンボム)先生1月末訪問以来2度目訪問でしたが追悼碑参拝めてだった金重男(キム·ジュンナム)趙殷慧(チョ·ウネ)先生印象金重男先生追悼碑きなお辞儀をすることもありました(jc, 2023/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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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일 방문단은 두 행사에 참가했습니다. 키리하타(切畑)의 조선인 추도비를 참배하고, 타마세(玉瀨)의 조선인 참배묘에 무궁화를 심었습니다.

 

1백여 년 전에 이 지역에서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들을 추도하고, 지난 1월 한국 방문단이 감사의 콘서트를 열었던 것에 대한 보답으로 마련된 행사였습니다. 조선인 희생자들을 둘러싸고 선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1월말 <무용신>1차 방문이 끝난 직후, 만푸쿠지의 아다치 타이쿄 스님과 아다치 치쿄 스님이 일본 <팀아이>의 여러 회원들과 협력해서 참배묘 인근에 무궁화를 심기로 기획하셨고, 마을 주민들도 동의하셨다고 합니다. 마을 공동사업을 주관하는 단신회(壇信)와 매년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해 위령 제사를 지내오신 부인회도 참석하셨습니다.

 

만푸쿠지와 단심회와 부인회가 행사를 준비하는 동안, <팀아이> 선생님들로부터 한국 분들도 참석해 주면 좋겠다는 요청이 있었고, 그래서 이번 실무 방문단이 구성되었습니다. 특히 <1강릉포럼>의 세 분이 참가하게 된 것은 타마세 주민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타마세 참배묘에 모셔진 3분 중의 한 분인 김병순씨가 강릉 출신이었기 때문이지요.

 

 

원래 514일은 방문단 일정이 분주한 날이었습니다. 오전 11시에는 오사카 조선학교의 동포 축제, 오후 1시에 타마세의 무궁화 식수 행사, 그리고 오후 3시 반에는 고베시립 중앙도서관에서 <청구문고 연구회>의 논문발표 모임이 있었습니다.

 

히가시오사카 히시에(菱江)의 오사카 조고와 타마세 마을의 만푸쿠지, 고베시의 시립중앙도서관은 자동차로 이동해도 각각 약 1시간씩 걸리는 거리이기 때문에 매우 서둘러야 간신히 소화할 수 있는 일정이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사카 조선학교의 행사가 3일 동안 내리는 비로 실내행사로 전환되는 바람에 방문단의 축제 참여가 취소됐습니다. 오사카 조선학교는 10월초의 운동회 때에 방문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번에는 방문하지 않기로 당일 아침에 즉석 결정되었습니다.

 

 

오전이 여유로워진 방문단은 타마세의 무궁화 식수행사에 참여하기 전에 나가오(長尾)산기슭의 키리하타(切畑)에 세워진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먼저 참배하기로 했습니다.

 

이 추도비는 1914-15년 고베수도 개수공사 중에 터널 낙반사고로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 3(김병순, 남익삼, 장장수)1929년 후쿠치야마선 철도의 개수공사 중에 다이너마이트 사고로 사망한 2명의 조선인 노동자 2(윤길문, 오이근)을 추도하기 위해 2020년에 건립됐습니다.

 

일행은 숙소 인근의 주소(十三)역에서 다카라즈카행 열차를 탔고, 이어 후쿠치야마(福知山)선으로 갈아타고 다케다오(武田尾)역에서 내렸습니다. 다카라즈카에서 다케다오까지는 3정거장에 불과했지만, 도시풍광은 완전히 사라지고 심산유곡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방문한다는 연락을 받고 정세화 선생과 신도 도시유키(真銅敏之) 선생이 차로 마중을 나와 주셨습니다. 다케다오역에서 키리하타의 추도비까지는 걸어서도 30분 이내의 짧은 거리지만, 무궁화 기념식수 행사를 돕기 위해 일찍 만푸쿠지에 도착하셨던 두 분께서 방문단의 편의를 위해 차편을 제공하신 것이지요.

 

말굽모양으로 굽은 무코(武庫)강이 소강과 만나는 곳에 차를 세우고, 거기서부터는 걸어서 추도비로 향했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세워진 신수이(親水)광장까지는 10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지금은 선로가 철거되고 침목들만 남아서 이곳이 한때 후쿠지야마선이 지나가던 철도였음을 보여줍니다. 침목들을 따라 걷다 보면 2개의 터널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 터널들이 바로 조선인 노동자들이 발파와 굴삭으로 파낸 터널이고, 그 중 하나가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의 현장입니다.

 

강승호, 이홍범 선생은 1월말의 방문 이래 두 번째 방문이었지만, 추도비 참배가 처음이었던 김중남, 조은혜 선생은 깊은 인상을 받으셨고, 특히 김중남 선생은 추도비 앞에 큰 절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jc, 2023/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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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陵宝塚々の会談出会自体意味ある会合でしたがめての出会いだからといって儀礼的挨拶だけをわし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今後交流協力重要原則討論されこれをじていにじてれるといういにじることができたものとみられます

 

それは参加者主要なキャリアからすでに推測できました金重男(キム·ジュンナム)先生全国公務員労組委員長歴任江陵市長候補経歴民主党員であり江陵原州大学校国際通商学科在職中姜承昊(カン·スンホ)教授中国沿海州との通商問題しい研究者です

 

 

このお二人共同代表という<1江陵フォーラム>対内的地域社会民主化目指対外的国際通商実質的拡大することに関心団体であることがかります

 

さらにこのお二人江陵出身として韓国社会民主化のためにくしてとした金成洙(キム·ソンス)烈士える人権団体<金成洙烈士記念事業会>理事めていることから普遍的人権伸張関心っているとみられます

 

 

一方今年4選挙当選した兵庫県議員橋本成年さん宝塚市役所勤務経歴とやはり公務員労組委員長経歴、「朝鮮学校無償化排除制度的差別主張これを是正するための市民請願主導しています

 

北野さと子市会議員はかつて20083宝塚市議会日本軍慰安婦問題する日本政府誠実対応請願採択するのに先頭同年7韓国訪問823回水曜デモで日本政府国家的ちをめてこそ慰安婦問題解決できる主張していましたらの活動日本地方議会議員として非常異例です

 

 

今日兵庫県進歩勢力保守勢力いという日本地域共通していますが自民党よりも保守的<維新>勢力巨大でありながらもこれに対抗する無所属政治家多数活躍しているという特異地域です

 

兵庫県議会定員86議席自民党24維新21公明党13保守党32進歩的野党である立憲民主党4共産党2少数です特異点無所属22議席にもなるというですが兵庫県知事斎藤元彦さんも無所属です

 

 

宝塚市議会定員26議席維新4自民党3公明党4などの保守党多数ですが過半数にはかず立憲民主党2)、共産党3)、社民党2)、参政堂1などの野党劣勢なのにして無所属7議席です市長山崎晴恵さんも無所属です

 

ちなみに近隣大阪府議会定員88維新55公明党14自民党7相対的進歩的野党である立憲民主党共産党はそれぞれ1ぎません大阪府知事吉村洋文さんも維新所属しています

 

 

橋本成年県議北野さと子市議する立憲民主党綱領、(1立憲民主主義追求、(2人権多様性保障される差別のない共生社会目指、(3個人幸福尊重される経済体制実現目指、(4持続可能発展5平和国際関係けて努力することに要約されます

 

この日訪問団った両議員朝鮮学校高校無償化含むことをめる街頭署名集会参加したのも人権多様性保障され差別のない共生社会実現するという立憲民主党目標合致するためだとみられます

 

 

この会談では交流協力具体的方策われ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議題事前調整がなかっためての会合だったからでしょう

 

しかし参加者はおいの政治的志向追求する目標ていること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ので今後江陵宝塚江原道兵庫県交流協力けたいパートナーになれるとじられます(jc, 2023/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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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과 다카라즈카 인사들의 회담은 만남 자체가 의미 있는 회동이었지만, 첫 만남이라고 해서 의례적인 인사만 교환한 것은 아닙니다. 향후 교류와 협력에 중요한 원칙이 토론됐고, 이를 통해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점을 서로 느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참가자들의 주요 경력으로 이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김중남 선생은 전국 공무원노조 위원장을 역임한 뒤 강릉 시장 후보 경력을 가진 민주당원이고, 강릉원주대학교 국제통상학과에 재직 중인 강승호 교수는 중국과 연해주와의 통상 문제에 밝은 연구자입니다.

 

 

이 두 분이 공동대표라는 점에서 <1강릉포럼>은 대내적으로 지역사회 민주화를 지향하면서, 대외적으로 국제 통상을 실질적으로 확대하는 데에 관심이 깊은 단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 두 분은, 강릉 출신으로서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가 젊은 나이에 목숨을 읽은 김성수 열사를 기리는 인권단체 <김성수기념사업회>의 이사를 맡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 인권 신장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올해 4월 선거에서 당선된 하시모토 나루토시 효고 현의원은 다카라즈카 시청 근무 경력과 역시 공무원노조 위원장의 경력을 가졌고, “조선학교의 무상화 배제는 제도적 차별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시정하기 위한 시민 청원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키타노 사토코 시의원은 일찍이 20083월 다카라즈카 시의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성실한 대응을 촉구하는 청원을 채택하는 데에 앞장섰고, 그해 7월 한국을 방문, 823차 수요시위에서 일본 정부가 국가적으로 잘못을 인정해야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었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일본 지방의회원으로 매우 이례적입니다.

 

 

오늘날 효고현은 진보세력이 약하고 보수 세력이 강하다는 면에서 일본의 다른 지역들과 공통되지만, 자민당보다 더 보수적인 유신회 세력이 거대하면서도, 이에 대항하는 무소속 정치인들이 다수 활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한 지역입니다.

 

효고현의회(정원 86)는 자민당(24)과 유신회(21)와 공명당(13) 등 보수당이 3분의2를 차지했고, 진보적 야당인 입헌민주당(4)과 공산당(2)은 소수입니다. 특이점은 무소속이 22석이나 된다는 점인데, 효고현의 지사 사이토 모토히코(斎藤元彦)씨도 무소속입니다.

 

 

다카라즈카시의회(정원 26)는 유신회(4)와 자민당(3)과 공명당(4) 등의 보수당이 다수이지만 과반에는 미치지 못했고, 입헌민주당(2), 공산당(3), 사민당(2), 참정당(1) 등의 야당도 약세인 반면, 무소속이 7석입니다. 시장 야마사키 하루에(山崎晴恵)씨도 무소속입니다.

 

참고로 인근 오사카부의 의회(정원 88)는 유신회(55)가 가장 많고, 공명당(14)과 자민당(7)이 상대적으로 약하며, 진보적 야당인 입헌민주당과 공산당은 각각 1석에 불과합니다. 오사카부의 지사 요시무라 히로후미(吉村洋文)씨도 유신회 소속입니다.

 

 

하시모토 나루토시 현의원과 키타노 사토코 시의원이 속한 입헌민주당의 강령은 (1) 입헌민주주의를 추구하고, (2) 인권과 다양성이 보장되는, 차별 없는 공생 사회를 지향하며, (3) 개인의 행복이 존중받는 경제 체제 구현을 목표로 하고, (4) 지속가능한 발전과 (5) 평화로운 국제관계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이날 방문단이 만난 두 의원이 조선학교의 고교무상화 포함을 요구하는 가두서명 집회에 참여한 것도 인권과 다양성이 보장되어 차별 없는 공생 사회를 구현한다는 입헌민주당의 목표에 부합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날 회담에서는 교류와 협력의 구체적인 방안들이 논의된 것은 아닙니다. 의제의 사전 조율이 없었던 첫 만남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참석자들은 서로의 정치적 지향과 추구하는 목표가 비슷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 향후 강릉과 다카라즈카, 강원도와 효고현의 교류와 협력을 위한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jc, 2023/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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宝塚駅高校無償化集会訪問団橋本成年兵庫県議員北野さと子宝塚市議員面談しました513日午後4時半宝塚市内のワシントンホテルロビーででした

 

午前11手軽服装街頭署名集会参加していた両議員訪問団うためスーツに着替えて出席する誠意しました金重男(キム·ジュンナム)姜承昊(カン·スンホ)趙殷慧(チョ·ウネ)先生午後ずっと宝塚市内視察するのにれていたでしょうが期待感って面談様子でした

 

 

東京からんできたキム·ジェホ(김재호)先生面談通訳江陵チームは両議員江陵コーヒーと申師任堂インジョルミをプレゼントし意外両議員印象けたものとみられます

 

この面談長年念願でした江陵宝塚々が直接会って共通関心事懸案についていながら交流協力のきっかけを模索することを間望んできました

 

 

202011日本<チームアイ(当時会長近藤富男先生)>依頼<宝塚朝鮮人追悼碑>犠牲者5韓国内縁故地およそ半年にわたる調査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さんの故郷江陵であることをらかに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姜承昊, 洪眞善(ホン·ジンソン)柳善起(·ソンギ)先生などの案内慶州金氏樹隱公派江陵支会金子正(キム·ジャジョン)金喆旭(キム·チョルウク)先生けで可能なことでした

 

そのから金炳順さんの犠牲媒介江陵宝塚づくことをんでいましたそれが金炳順さんの犠牲くすることだとじたからです

 

 

江陵市<宝塚朝鮮人追悼碑>建設主導者感謝牌贈呈するよう請願したのもそのためでしたこの請願れられ江陵市役所のパク·ジョンシ(박종시)パク·インスン(박인순)係長東京所在江原道本部のカン·ビョンジク(강병직)本部長とムン·ミヒョン(문미현)部長迅速推進20224金漢根(キム·ハングン)江陵市長名義感謝牌6日本人2在日朝鮮人贈呈されました

 

その江陵宝塚への関心げてほしいといながらよく江陵れました人権団体<金成洙(キム·ソンス)烈士記念事業会>人文学会<ロングロード>そして市民運動団体<1江陵フォーラム><バリの>のキム·ヒョンドン(김현동)先生東海江原道議員キム·ヒョンウォン(김형원)先生とも交流することになりましたこの江陵-宝塚交流につながることをっていました

 

 

20228江原大学校学術誌<平和たちPEACES><つの都市物語:江陵宝塚>した論文寄稿江陵宝塚交流がおいにする両地域市民認識変化させてくれることを人的·象徴的交流にとどまらず物的·実質的交流につながることをっていました

 

また両地域交流がり在日朝鮮学校後援にもつながり両国民主化にも役立つことをっていましたサッカーのふるさと江陵在日朝鮮学校のサッカー支援してくれるよう要請もしましたし江陵<チョッカベ(조각배=片舟)コンサート>こうという提案もしました<江陵人権映画祭><舞踊靴>参加するめました

 

 

このような念願努力姜承昊教授(江陵原州大学校国際通商学)127-30<舞踊靴>1次日本訪問団参加してついに今回訪問団<1江陵フォーラム>共同代表金重男先生事務局長趙殷慧先生参加することになりました

 

今回面談実現したのは日本<チームアイ>鄭世和(チョン·セファ)先生木基文先生努力のおかげでした二人最近県議市議選出馬した両議員選挙運動支援することで信頼両議員当選確定した自然<1江陵フォーラム>との面談提案しました

 

 

<1江陵フォーラム>日程両議員動線考慮して面談自然われるようめてさった木基文鄭世和先生から感謝申げます(jc, 2023/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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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역의 고교무상화 집회가 끝난 후 방문단은 하시모토 나루토시(橋本成年) 효고 현의원, 키타노 사토코(北野サト) 다카라즈카 시의원과 면담을 가졌습니다. 513일 오후4시 반, 다카라즈카 시내 워싱턴 호텔 로비에서였습니다.

 

오전 11시 간편한 복장으로 가두서명 집회에 참여했던 두 의원은 방문단을 만나기 위해 정장으로 갈아입고 참석하는 성의를 보였습니다. 김중남, 강승호, 조은혜 선생도 오후 내내 다카라즈카 시내를 시찰하느라 피곤했겠으나, 기대감을 가지고 면담에 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도쿄에서 날아온 김재호 선생이 면담의 통역을 맡았고, 강름팀은 두 의원에게 강릉 커피와 신사임당 인절미를 선물했고, 뜻밖의 선물에 두 의원은 좋은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날의 면담은 저의 오랜 염원이었습니다. 강릉과 다카라즈카의 인사들이 직접 만나서 공통관심사를 찾고 현안을 의논하면서 교류와 협력의 계기를 모색하기를 오랫동안 바랐습니다.

 

 

202011월 일본 <팀아이(당시 회장, 콘도 도미오 선생)>의 의뢰로 저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 5분의 한국 내 연고지를 찾기 시작했고, 약 반년의 조사 끝에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릉임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강승호, 홍진선, 유선기 선생 등의 안내와 경주김씨 수은공파 강릉지회의 김자정, 김철욱 선생의 도움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김병순씨의 희생을 매개로 강릉과 다카라즈카가 가까워지기를 바랐습니다. 그것이 김병순씨의 희생을 값지게 하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강릉시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 주도자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하도록 청원을 낸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이 청원은 받아들여졌고, 강릉시청의 박종시, 박인순 계장, 도쿄 소재 강원도 본부의 강병직 본부장과 문미현 부장의 신속한 추진으로, 20224월 김한근 강릉시장 명의의 감사패가 6명의 일본인과 2명의 재일조선인에게 증정되었습니다.

 

그 뒤로도 저는 강릉 분들이 다카라즈카에 대한 관심을 넓혀가 주시기를 바라면서, 자주 강릉을 방문했습니다. 인권단체 <김성수기념사업회>, 인문학 모임 <롱로드>, 그리고 시민운동단체 <1강릉포럼>을 알게 됐고, <바리의 꿈>의 김현동 선생, 동해의 강원 도의원 김형원 선생과도 교류하게 됐습니다. 이 인연들이 강릉-다카라즈카의 교류로 이어지기를 바랐습니다.

 

 

20228월 강원대 학술지 <평화들 PEACES><두 도시 이야기: 강릉과 다카라즈카>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하면서, 강릉과 다카라즈카의 교류가 서로에 대한 양 지역 시민들의 인식을 변화시켜 주기를 바랐고, 인적, 상징적 교류에 머무르지 말고 물적, 실질적 교류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또 두 지역의 교류의 폭이 넓어지면서 재일 조선학교 후원으로도 이어지고, 양국의 민주화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축구의 고장 강릉이 재일조선학교의 축구부를 지원해 주시도록 요청도 했고, 강릉에서 <조각배 콘서트>를 열자는 제안도 했습니다. <강릉 인권영화제><무용신>이 참여하는 방안도 강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같은 염원과 노력은 강승호 교수(강릉원주대학교 국제통상학)127-30일의 <무용신> 1차 일본방문단에 참가하면서 결실을 맺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번 방문단에 <1강릉포럼>의 공동대표 김중남 선생과 사무국장 조은혜 선생도 참여하게 됐습니다.

 

이번 면담이 성사된 것은 일본 <팀아이>의 정세화 선생과 사사키 모토후미(木基文)선생님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두 분은 최근 현의원과 시의원 선거에 출마한 두 의원의 선거 운동을 지원하면서 신뢰를 쌓았고, 두 의원의 당선이 확정된 후에 자연스럽게 <1강릉포럼>과의 면담을 제안했습니다.

 

 

<1강릉포럼>의 일정과 두 의원의 동선을 고려해 면담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애써주신 사사키 모토후미, 정세화 선생님께 진심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jc, 2023/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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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고교무상화 집회는 원래 방문단 일정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3일 전에 오사카에 도착한 저는 정세화 선생님과 의논 끝에 이 다카라즈카 집회에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전날(12) 저녁 오사카에 도착한 <화강문화재단>의 이홍범 선생과 현홍진씨는 물론, 당일(13) 새벽 비행기로 간사이 공항에 도착한 <1강릉포럼>의 김중남, 강승호, 조은혜 선생도, 호텔 체크인도 미루고 바로 다카라즈카로 직행, 집회에 참가했습니다.

 

 

우리는 이 집회가 일본인 주도로 열리고 있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일본인 활동가들이 집회를 진행하는 데에 열과 성을 다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정세화 선생과 저는 다음날의 무궁화 식수 준비를 위해 12시쯤 집회 현장을 떠났다가 오후3시쯤 다카라즈카 역으로 되돌아갔는데, 일본인 활동가들은 집회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연설가들의 목은 쉬어있었고, 구호를 외치는 분들의 얼굴에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가두시위와 서명운동은 오후5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조선학교의 고교 무상화에 어째서 일본인들이 이다지 열심인가. 궁금했습니다. <팀아이> 선생님들의 설명은 간단했습니다. 조선학교의 문제는 재일조선인들의 문제이기 이전에, 일본사회의 민주화 문제라는 인식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본은 2010년부터 고교 무상화를 실시했습니다. 공립학교는 학비를 받지 않고, 사립학교에는 정부의 교육보조금이 지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정책은 일본 민주당이 집권했던 짧은 시기에 도입되었는데도 조선학교가 대상에서 제외됐습니다.

 

자민당의 아베 내각도 조선학교 보조금 지급을 거부했습니다. 이미 지급되던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보조금도 중단했습니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미사일 발사,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북한 공민을 자처하는 조선학교를 지원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조선학교 재단인 조선학원도 항변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조선학교 체계가 시작되었던 1953, 조선학원은 일본 정부의 교육 보조금을 자발적으로 거절한 바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교육은 우리 돈으로 할 테니, 일본 정부는 관여하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민족교육의 과정과 내용에 대해서 일본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상황이 변했습니다. 재일동포들이 자녀들을 조선학교에 보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재일동포 북송사업(=귀국사업)과 일본인 납치사건 등의 여파가 재일동포 사회에 큰 타격을 준 것으로 평가됩니다. 문부성 통계에 따르면 한때 20만명을 헤아리던 조선학교 재학생 수는 20155천명 이하로 감소했습니다.

 

조선학원은 일본의 중앙 및 지방정부들과 협상해, 북한과 거리를 두는 몇 가지 조치를 취함으로써 초,중급학교의 보조금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2010년 고교무상화 정책을 계기로 조선학교 보조금은 전면 중단됐습니다. 2019년에는 유아교육 무상화 대상에서 조선학교 부설 유치원까지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됐습니다.

 

 

재일동포가 조선학교를 떠나고, 조선학원이 일본 정부의 공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가운데, 일본인들이 나섰습니다. 일본인 활동가들은 그동안의 우여곡절이야 어떻든 조선학교를 보편적 무상교육에서 제외한 것은 민주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제도적 차별이라고 주장합니다.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획기적인 국제 정세의 변화가 없는 한,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를 무상화 교육 대상으로 포함시킬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쇠퇴하는 조선학교가 자력으로 회생할 가능성도 희박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아도 그 주장을 유지할 권리는 지켜주어야 한다는 일본인들의 실천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방문단이 다카라즈카의 가두시위와 서명운동에 동참하기로 한 것도 그러한 노력에 감동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jc, 2023/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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訪問団参加した最初行事513宝塚駅前かれた朝鮮学校高校無償化含める街頭署名集会でした

 

土曜日午前なのに20人余りの活動家まり、「高校無償化朝鮮学校排除したのは差別市民にビラを同調する市民署名けました

 

 

宝塚にはつあります私鉄阪急宝塚駅JR宝塚駅ですねどちらも電車通行量きなですジェイアール(JR=Japan Railways)はもともと国鉄でしたが19876つにかれて民営化されたのでではJR私鉄です

 

宝塚には温泉1877最初商業化された宝塚温泉開業日本全土からくの観光客めました観光客ぶためにくから鉄道架設されたのはもちろんです

 

JR宝塚線前身である国鉄福知山線尼崎-宝塚-福知山区間架設されたのが1891阪急宝塚本線大阪梅田-宝塚区間架設されたのが1910です

 

 

阪急電鉄会社よりくの観光客をより誘致するため1914少女歌劇団創設ショービジネスを開始しました日本初のガールズグループだったわけですが宝塚少女歌劇団専用大劇場定期的超豪華公演提供したので観光客はさらにくなりました温泉やショービジネスでホテルえました

 

宝塚はまた漫画家手塚治虫活動のおかげで日本漫画漫画映画発祥地としてもられています宝塚日本漫画のメッカとぶこともあります手塚治虫記念館歴史温泉歌劇団大劇場んで宝塚3大名物えられます

 

 

この3大名物のおかげででもくの観光客宝塚せています宝塚人口22ほどの小都市ですが毎年120万人観光客宝塚れます週末休日には宝塚駅人出がさらにえます

 

JR宝塚駅阪急宝塚駅はお20メートルほどれてかいっていて高架橋でつながっているのであるからることができますどちらもきな終着駅電車通行量いので住民観光客わず通行人いです

 

 

街頭署名集会はその高架橋JR駅側かれました日本語からない訪問団をかけ高架橋沿ってっているだけでした日本人活動家たちは一緒をかけ順番拡声器演説したり朝鮮学校える合唱したりしました

 

この街頭集会一番不思議だったのは活動家がほとんど日本人だったというです在日朝鮮人がいなくはありませんでしたが20人余りの参加者のほとんどが日本人活動家でした

 

 

たちの訪問団6たちを案内するためにてこられた<チームアイ>鄭世和(チョン·セファ)具実(クシル)先生もキャンペーンに参加してはいましたがこの集会はもともと日本人活動家主催する恒例行事でした

 

宝塚日本人活動家たちは毎年4高校無償化朝鮮学校めることをめる街頭集会いています朝鮮学校高校無償化政策発表された20104からまり毎年4か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今年事情があってれてかれることになりそのおかげで韓国訪問団参加できたのです

 

 

この街頭署名キャンペーンには宝塚出身日本人政治家参加しました兵庫県会議員橋本成年議員宝塚市会議員北野サト子議員らです

 

 

通行人反応比較的冷淡でした観察では大体201くらいの通行人がチラシをもらいそのうちの一部説明いて連判状署名しましたほとんどの市民活動家えを無視してぎました(jc, 2023/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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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단이 참가한 첫 행사는 513일 다카라즈카 역 앞에서 열린 조선학교의 고교 무상화 포함을 요구하는 가두서명 집회였습니다.

 

토요일 오전인데도 20여명의 활동가들이 모였고, “고교 무상화에 조선학교를 배제한 것은 차별이라고 호소하면서 시민들에게 전단을 나눠주었고, 동조하는 시민들의 서명을 받았습니다.

 

 

다카라즈카에는 역이 두 개입니다. 사철 한큐(阪急)의 다카라즈카 역과 제이알(JR) 다카라즈카 역이지요. 둘 다 기차 통행량이 많은 큰 역입니다. 제이알(JR=Japan Railways)은 원래 국철이었지만 19876개로 쪼개지면서 민영화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제이알도 사철입니다.

 

다카라즈카에는 좋은 온천이 많았고 1877년 최초로 상업화된 다카라즈카 온천이 개업하면서 일본 전역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관광객을 실어 나르기 위해 일찍부터 철도가 가설된 것은 물론입니다.

 

제이알 다카라즈카선의 전신인 국철 후쿠치야마선(아마가사키-다카라즈카-후쿠치야마 구간)이 가설된 것이 1891, 한큐 다카라즈카 본선(우메다-다카라즈카)이 가설된 것이 1910년입니다.

 

 

한큐 전철회사는 더 많은 관광객을 더 오래 유치하기 위해 1914년 소녀가극단을 창설, 쇼 비즈니스를 시작했습니다. 일본 최초의 걸그룹이었던 것인데,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의 전용 대극장을 세우고 정기적으로 초호화 공연을 제공했으므로 관광객은 더욱 많아졌습니다. 온천과 쇼 비즈니스로 호텔업이 번성했습니다.

 

다카라즈카는 또 만화작가 데즈카 오사무의 활동 덕분에 일본 만화와 만화영화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카라즈카를 일본 만화의 메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은 역사가 오랜 온천, 가극단의 대극장과 함께 다카라즈카의 3대 명물로 꼽힙니다.

 

 

3대 명물 덕분에 지금도 많은 관광객이 다카라즈카에 몰려듭니다. 다카라즈카는 인구 22만 정도의 소도시이지만 매년 약 120만명의 관광객이 다카라즈카를 찾습니다. 주말과 휴일이면 다카라즈카 역의 인파가 더욱 불어납니다.

 

JR 다카라즈카 역과 한큐 다카라즈카 역은 서로 20미터쯤 떨어져 마주보고 있고, 고가다리로 연결되어 있어서 한 역에서 다른 역으로 건너갈 수 있습니다. 둘 다 큰 종착역이고 기차 통행량이 많기 때문에 주민과 관광객을 가리지 않고 통행인들이 많습니다.

 

 

가두서명 집회는 그 고가다리의 JR역 쪽에서 열렸습니다. 일본어를 모르는 방문단은 가슴에 구호를 걸고 고가다리를 따라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일본인 활동가들은 함께 구호를 외치고, 돌아가면서 확성기로 연설도 하고, 조선학교를 지지하는 노래를 합창하기도 했습니다.

 

이 가두집회에서 가장 신기했던 것은 활동가들이 대부분 일본인이었다는 점입니다. 재일동포, 즉 재일조선인들이 없지 않았지만, 20여명의 참가자 대부분이 일본인 활동가였습니다.

 

 

우리 방문단 6명과 우리를 안내하기 위해 나오신 <팀아이>의 정세화, 구실 선생님도 캠페인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이 집회는 원래 일본인 활동가들이 주최하는 연례 행사였습니다.

 

다카라즈카의 일본인 활동가들은 매년 4월 고교무상화에 조선학교 포함을 요구하는 가두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조선학교를 제외한 고교 무상화 정책이 발표된 20104월부터 시작되어 매년 4월에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올해는 사정상 조금 늦게 열리게 되었고, 그 덕분에 우리 방문단도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 가두서명 캠페인에는 다카라즈카 출신의 일본인 정치인들도 참가했습니다. 효고 현의원 하시모토 나루토시 의원과 다카라즈카 시의원 키타노 사토코 의원이 그들입니다.

 

 

행인들의 반응은 비교적 냉담했습니다. 제 관찰로는 대략 스무 명에 한 명 정도의 행인이 전단지를 받았고, 그중 일부가 설명을 듣고 연판장에 서명했습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활동가들의 호소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가곤 했습니다. (jc, 2023/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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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踊靴>会員たちが来日えて皆帰ってきましたくは23くは2週間関西れていたのですが参加者わせて6でした

 

<1江陵フォーラム>のキム·ジュンナム(김중남)姜承昊(カン·スンホ)チョ·ウネ(조은혜)先生513-15<和江(ファガン)文化財団>で李洪範(이홍범, イ·ホンボム)先生と玄洪珍(현홍진, ヒョン·ホンジン)さんが512-17<舞踊靴>会員としては510-23大阪兵庫県々なれました

 

 

今回訪問実務訪問です<舞踊靴>定期訪問区別するための名前です<舞踊靴>127-30めて訪日団構成していました30会員(1)大阪朝鮮学校開校70周年記念公演参観(2)宝塚朝鮮人追悼碑参拝(3)玉瀬滿福寺音楽会きました2次定期訪問10月初めに予定されています

 

ところで今回訪問性格います参加者皆共通目的日程遂行したのではなくなる任務のためになる日程動線活動しました

 

 

もちろん6参加したイベントもありました日本人団体主催した<朝鮮学校高校無償化含>のための街頭署名集会玉瀬参拝墓地にムクゲをえる行事がそれでした

 

にはそれぞれやるべきことがいました江陵-宝塚江原道-兵庫県交流協力策模索している<1江陵フォーラム>今回訪問じてその具体的方法見出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その第一歩としてキム·ジュンナムカン·スンホチョ·ウネ先生橋本成年(Hashimoto Narutoshi)兵庫県議員北野さと(Kitano Satoko)宝塚市会議員面談共通関心事懸案について意見交換しました

 

 

<和江文化財団>7月初大学生たちの来日プログラムを企画中です20人前後大学生1週間日本九州関西訪問することになりますがその期間中大学生れる場所参加するイベントを踏査める必要がありましたそれでイ·ホンボム常任理事とヒョン·ホンジンさんが今回訪日同行されたわけです

 

一方仕事4つでした(1) <舞踊靴>7キャンペーンで用意された舞踊靴朝鮮學校舞踊部伝達(2)2次訪問団日程動線もあらかじめ調べ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3) <青丘文庫研究会>月例会論文発表することになっていてそのにも(4)主要地域図書館記録保管所訪問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関西公演する資料調査する計画てました

 

 

今回実務訪問団参加した6はそれぞれなる団体しますが<舞踊靴>後援会員という共通です舞踊靴キャンペーンに参加すればもが<舞踊靴>後援者だからです<舞踊靴>はそれ自体よくまれた組織というよりは在日朝鮮学校舞踊部後援するためにまった個人団体連帯えます

 

キャンペーンがわれたり訪問団活動をする<舞踊靴>体系的活動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が普段各会員した団体友好協力めることに集中したいといます

 

 

<舞踊靴>snsのグループトークを中心朝鮮学校支援することを公示討論計画実行報告します会員数150人余りであるためこのようなコミュニケーションと実践可能です会員数300えると分業必要ですし指導部必要でしょうその非営利団体登録もして指導部選出して活動していくのがいいでしょう

 

のところ<舞踊靴>活動(1)2舞踊靴キャンペーンと沿海州キャンペーン(2)2定期訪問団構成程度にとどまっているのでのような単純体制でもうまくりしていけるといますそれまでは今回実務訪問のようなことがよくわれるといます

 

 

たちのスローガンはにまた一緒です実務訪問定期訪問そして舞踊靴沿海州キャンペーンをじて在外民族学校後援効果的になされるだけでなく<舞踊靴>姉妹団体疎通協力活発になることをっていま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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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신> 회원들이 일본 방문을 마치고 모두 돌아왔습니다. 짧게는 23, 길게는 2주일 동안 간사이 지역을 방문했던 것인데, 참가자는 모두 6명이었습니다.

 

<1강릉포럼>의 김중남, 강승호, 조은혜 선생께서 513-15, <화강문화재단>에서 이홍범 선생과 현홍진씨가 512-17, <무용신> 회원으로는 제가 510-23, 오사카와 효고현의 여러 곳을 방문했습니다.

 

 

이번 방문은 실무 방문입니다. <무용신>정기 방문과 구별하기 위한 이름입니다. <무용신>은 지난 127-30일 첫 번째 일본 방문단을 꾸린 바 있었습니다. 30명의 회원이 (1) 오사카 조선학교 개교70주년 기념공연을 참관했고, (2)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참배했고, (3) 타마세 만푸쿠지에서 음악회도 열었습니다. 2차 정기 방문은 10월초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방문은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참가자들이 모두 공통의 목적으로 같은 일정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임무를 위해 서로 다른 일정과 동선으로 활동했습니다.

 

 

물론 6명이 함께한 행사도 있었습니다. 일본인 단체들이 주최한 <조선학교 고교무상화 포함>을 위한 가두서명 집회와 타마세 참배묘역에 무궁화를 심는 행사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밖에는 각자 할 일이 달랐습니다. 강릉-다카라즈카, 강원도-효고현의 교류와 협력 방안을 모색 중인 <1강릉포럼>은 이번 방문을 통해 그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그 첫 걸음으로 김중남, 강승호, 조은혜 선생은 하시모토 나루토시 효고 현의원과 키타노 사토코 다카라즈카 시의원과 면담을 갖고 공통 관심사와 현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화강문화재단>은 오는 7월초 대학생들의 일본 방문 프로그램을 기획 중입니다. 20명 내외의 대학생들이 약 일주일 동안 일본의 규슈와 간사이 지역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 기간에 대학생들이 방문할 장소와 참가할 행사들을 답사하고 결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홍범 상임이사와 현홍진씨께서 이번 방일에 동행하신 것이지요.

 

한편, 제 일은 네 가지였습니다. (1) <무용신> 7차 캠페인으로 마련된 무용신을 무용부에 전달하고, (2) 2차 방문단의 일정과 동선도 미리 살펴야 했습니다. (3) <청구문고 연구회>의 월례모임에서 논문을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밖에도 짬짬이 (4) 주요 지역 도서관과 기록보관소를 방문해 최승희 선생의 간사이 공연에 대한 자료도 조사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번 실무 방문단에 참가한 여섯 명은 각기 다른 단체에 속하지만, <무용신> 후원회원이라는 점에서 공통입니다. 무용신 캠페인에 참여하면 누구나 <무용신> 후원자이기기 때문이지요. <무용신>은 그 자체가 잘 짜인 조직이라기보다는 재일조선학교 무용부를 후원하기 위해 모인 개인과 단체들의 느슨한 연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캠페인이 진행되거나 방문단 활동을 할 때는 <무용신>도 체계적으로 활동해야겠지만, 평소에는 각 회원이 속한 단체들과 우호와 협력을 다지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무용신>, 단톡방을 중심으로, 우리학교 지원에 관한 일들을 공지하고, 토론하고, 계획하고, 실행하고, 보고합니다. 회원 수가 150명 남짓이기 때문에 이 같은 소통과 실천이 가능합니다. 회원 수가 3백 명이 넘으면 분업도 필요하고 지도부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때는 비영리단체 등록도 하고, 지도부도 선출해서 활동해 나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무용신>의 활동이 (1) 2회의 무용신 캠페인과 연해주 캠페인, (2) 12회의 정기 방문단 구성 정도에 머물고 있으므로, 지금 같은 단순한 체제로도 잘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까지는 이번 실무방문과 같은 일이 자주 진행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슬로건은 따로 또 같이입니다. 실무 방문과 정기 방문, 그리고 무용신과 연해주 캠페인을 통해 해외 민족학교 후원이 효과적으로 이뤄질 뿐 아니라, <무용신>과 자매단체들의 소통과 협력도 활발해 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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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チームアイ>会員3韓国(統営羅州江陵ソウル)訪問してから3韓国<舞踊靴>会員30日本(大阪宝塚)訪問してから1月半ちましたこの2つの訪問じてくの事実らされ感動共有されました

 

また相互訪問じてよりくのことがまりました日本では<神戸青丘文庫>映像会<宝塚朝鮮人追悼碑>についてのドキュメンタリー(鄭世和制作)上映され韓国でも写真映像映像アルバムが制作されており書画報告書などが用意されています

 

韓国日本制作されるこれらの作品これから韓日市民交流協力する大切資料になると期待しながら時間財政そして才能次第一生懸命準備しています

 

 

ところで最近韓日政府っているかなことをながら両国市民共有したいことがあってこのきますそれは市民国家そして市民関係についてのえです

 

<舞踊靴>韓国市民まりで<チームアイ>日本市民団体ですこのつの市民団体協力じて在日朝鮮学校宝塚朝鮮人追悼碑についていろいろなことをしてきましたつまりたちの仕事市民活動であり政府立場方向なることがいのです

 

市民政府立場市民がもっと重要です市民国家主権者であり政府上官だからです国家/政府しい方向市民団体はこれを支援することができった政策展開する批判打倒することができます

 

それがまさに民主主義原則であり共和国性格です韓国日本はどちらも民主共和国標榜していますのでこうした原則られられるべきだとじていますそのについてはもが同意でき疑問余地はないでしょう

 

 

このでもっと強調したいのは韓日両国市民関係です韓国日本市民葛藤して対立するのではなく交流して協力でき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

 

韓日歴史する日本韓国政府歪曲りをすのは市民任務ですがそれは両国市民認識共有交流協力実現してこそ可能だといますこれまでそのような目標達成されなかったとすればそれは市民政府をまともに牽制できなかったからです政府非難することはできますが結局市民責任だということです

 

 

韓国市民には一部日本市民する敵対感もいれば日本市民にも嫌韓感情形成されているのも事実ですしかしそれは政府政策貫徹のために助長維持することであっても市民堅持する立場ではないといます

 

日本市民嫌韓感情在特会活動韓国市民反日感情はその範囲強度々ですがそれにして過剰反応する必要はないといます否定的よりは肯定的焦点わせたがはるかにいです

 

それで日本市民共感できることをして好意感謝そのようなことがおいにくように努力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ます。 「在日朝鮮学校支援宝塚朝鮮人追悼碑建設としてげられるのもそのためです

 

 

くおしましたがらせば市民事案によって政府政策賛成することも反対することもできますが市民では交流協力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どんなでも市民関心葛藤戦争ではなく平和繁栄だからです

 

これにして韓国日本市民共感理解くことができれば市民政府される主客転倒すことができますそして市民いことがくことがあります

 

市民韓日両国政府批判することができはそうすべきですしかし政府市民区別さ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市民同士対立葛藤ではなく交流協力堅持さ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うしてこそ過去ちをさず平和繁栄むことができるといます(2023/3/8,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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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팀아이> 회원 세 분이 한국(통영, 나주, 강릉, 서울)을 방문하신지 세 달이 지났고, 한국의 <무용신>회원 삼십 분이 일본(오사카, 다카라즈카)을 방문한지 한 달 반이 지났습니다. 이 두 방문을 통해서 많은 사실이 알려졌고, 깊은 감동도 공유되었습니다.

 

또 상호방문을 통해 더 많은 일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고베 청구문고>의 영상회에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다큐멘터리(정세화 제작)가 상영되었고, 한국에서도 사진과 영상으로 영상 앨범이 제작되고 있고, 시와 서화와 보고서 등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제작되는 이 작품들은 앞으로 한일 시민이 교류하고 협력하는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시간과 재정, 그리고 재주가 닿는 대로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한일 양국 정부가 벌이는 멍청한 짓을 보면서 공유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이 글을 씁니다. 그것은 시민과 국가, 그리고 시민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생각입니다.

 

<무용신>은 한국의 시민모임이고 <팀아이>도 일본의 시민단체입니다. 이 두 시민단체는 협력을 통해 재일 조선학교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관련된 일을 해 왔습니다. , 우리의 일은 시민 활동이고, 국가나 정부의 입장이나 방향과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시민과 정부의 입장이 다를 때는 시민이 더 중요합니다. 시민이 국가의 주권자이고 정부의 상사이기 때문입니다. 국가/정부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시민단체는 이를 지원할 수 있고, 잘못된 정책을 펼 때 비판하고 타도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의 원칙이고 공화국의 성격입니다. 당연한 말이지요. 한국과 일본은 둘 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하므로 이러한 원칙이 지켜질 수 있고, 지켜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고,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이 글에서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일 양국 시민의 관계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은 갈등하고 대립할 것이 아니라, 교류하고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일 과거사에 대한 일본과 한국 정부의 왜곡과 오류를 바로잡는 것은 시민의 임무이지만, 그것은 양국 시민들이 인식을 공유하고 교류와 협력을 이룰 때에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그런 목표가 달성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시민이 정부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부를 비난할 수는 있지만, 결국은 시민 책임이라는 말이죠.

 

 

한국 시민 중에서는 일부 일본 시민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분들도 있고, 일본 시민들 사이에도 혐한 감정이 형성되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부가 정책 관철을 위해 조장하고 유지하는 것일 수는 있어도, 시민들이 견지할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시민의 혐한 감정이나 재특회 활동과 한국 시민의 반일감정은 그 범위와 강도가 다양하지만, 그에 대해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그래서 일본 시민들의 좋은 점과 공감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호의와 감사를 드리고, 그런 일들이 상호간에 계속될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재일 조선학교> 지원과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이 좋은 예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길게 말씀드렸지만, 짧게 줄이면, 시민들은 사안에 따라 정부 정책에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지만, 시민들 사이에서는 반드시 교류와 협력이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나라든 시민의 관심은 갈등과 전쟁이 아니라 평화와 번영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한국과 일본 시민이 공감하고, 이해하고, 함께 일할 수 있다면, 시민이 정부에게 휘둘리는 주객전도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 사이에 좋은 일들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시민들은 한일 양국 정부를 비판할 수 있고, 지금은 그래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정부와 시민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시민들끼리는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교류와 협력이 견지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평화와 번영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23/3/8,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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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9() 오후 630, 서대문의 <연화>에서 [우리학교 무용신] 일본 방문단의 마지막 모임이 열립니다. 이 모임에서는 방문기간 중의 각 행사에 대한 소감을 나누고, 불편했거나 부족했던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면서 다음 방문을 위한 제언을 모아보려고 합니다.

 

우리를 환영해 주신 일본 <팀아이> 선생님들과 조선학교, 타마세 마을과 만푸쿠지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궁금해서, 어젯밤 정세화 선생님과 무려 2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글로 전부 전해 드릴 수는 없지만 요지를 말씀드린다면,

 

(0) 일본에서는 이번 방문을 대단히 만족스럽게 생각하시고, 방문단을 고마워하신다고 합니다. 특히 <팀아이> 선생님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준비를 다 했지만 한국 분들이 어떻게 느끼셨는지 궁금하다고 하십니다. 일본의 준비와 대접은 실제로 특별했고, 최상이었습니다.

 

 

(1) 일본 <팀아이>의 회원들은 한 가지 이상씩 준비를 담당하면서 전원이 참여하셨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콘도 타쿠미 회장님과 정세화 선생님은 물론,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과 히다 유이치 선생님, 만푸쿠지의 아다치 타이쿄와 아다치 치쿄 스님도 마찬가지입니다.

 

(2) 예컨대, 우리 연주회가 만푸쿠지의 경내, 그것도 법당에서 열린 것은 만푸쿠지 역사 이래 처음이라고 합니다. 연주회 장소로 법당을 내어주신 스님들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 타마세 마을은 작고 조용한 마을이지만, 온 마을 주민이 힘을 합쳐 우리를 환영해 주셨습니다. 작은 마을이더라도 의견 차이가 있게 마련이지만, 우리 방문단을 환영하는 일에는 어느 쪽 할 것 없이 모두 협력하여 행사를 지원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4) 아마가사키 조선학교는 방문단에게 제한 없는 수업참관을 허용하셨습니다. 이것도 이 학교의 75년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학교 시찰이나 수업 참관은 보통 교사나 학부모의 안내를 따르게 하고, 학생과 교사의 사진촬영은 자제를 당부하는 것이 관례인데, 우리 방문단에게는 자유로운 수업 참관과 제한 없는 사진/영상 촬영을 전면 허용하신 것입니다.

 

조선학교가 처한 내외의 어려움, 그동안 간간이 발생해온 불미스런 일들을 생각하면, 아마가사키 조선학교가 보여준 이런 조치는 상호 신뢰를 전제로 한 매우 고마운 일입니다.

 

 

(5) 오사카 조선학교도 기념공연에서 우리 방문단에게 특별좌석을 제공하셨습니다. 초청된 오사카부/시의 각급 의원들에게도 일반 객석을 제공했다고 합니다. 우리 방문단에게는 로열박스를 제공했습니다. 건너편의 로열박스에는 오사카 정재계와 교육계의 주요 인사들이 초청되었다고 합니다. 오사카 조선학교가 우리 방문단을 어떻게 배려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6) 우리가 머물렀던 화이브 호텔과 연회를 가졌던 두 식당에서도 정세화 선생님께 감사의 전화를 해 오셨다고 합니다. 아무런 사고 없이 잘 머물다 가시게 되어서 다행이고, 인연을 맺게 되어 고맙다는 말씀과 함께 언제 다시 오시더라도 환영이라는 인사를 전해 오셨습니다.

 

일본 방문 직후에 강릉의 활동가들과는 전화통화로, 나주는 직접 방문해서 이번 방문의 의의와 성과를 설명드렸습니다. 아직 단언할 단계는 아니지만, 그 두 곳에서 각각 10명 내외의 회원들이 다음 번 방문에 동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곧 2차 방문단을 구성하게 될 것 같고, 아마도 오사카 조선학교의 70주년 기념 마지막 행사인 514(일요일)의 동포초청 축제에 참가하게 될 듯합니다. 방문 기간을 512-15(34)로 잠정 결정하고 준비를 미리 시작할 수 있겠습니다.

 

 

2차 방문에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무용신>과 북방 지역에서 활동해 오신 <대륙학교>에 더하여, 미주동포들이 많이 활동하시는 <AOK>도 참여해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세 단체의 공동 주최로 하고, 돌아가면서 주관을 담당하시면 어떨까 싶어요.

 

그렇게 된다면 다른 지역의 해외동포들도 재일동포의 상황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릴 수 있고, 해외동포운동 시민단체들도 교류와 협력을 실질적으로 다지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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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2일 저는 3년 만에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코로나 방역이 완화되었고 한일간 무비자협정이 다시 가동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세화 선생님과 반갑게 만났고,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는 동안에도 함께 이룬 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무용신 캠페인과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이야기가 가장 많았고, 어려움에 처한 조선학교에 대한 걱정도 함께 나눴습니다.

 

 

우리는 콘도 도미오 선생님 댁을 방문했습니다. 다카라즈카시 외곽의 콘도 도미오 선생님 자택에서는 사모님과 자제분들이 정세화 선생과 저를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방에 들어가니 모든 것이 생전에 쓰시던 그대로라고 하셨고, 침대 맡에 놓인 설합장 위에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유해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강릉시가 보낸 감사패가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정세화 선생님과 저는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 큰 절을 올렸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한 번도 콘도 도미오 선생님을 직접 뵌 적이 없었습니다. 사진으로만 뵈었고, 라인으로만 말씀을 나눴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막역한 선배이자 큰 형님처럼 느끼곤 했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장남이신 콘도 타쿠미씨가 아버님의 뒤를 이어 <팀아이>의 회장직을 수행하신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자신이 못다 하신 일을 아드님에게까지 넘기신 것은 지나친 책임감이 아니신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저는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판단이 항상 옳다고 믿습니다. 아마도 거기에는 오래 지나서 증명될 깊은 뜻이 있으실 것입니다.

 

콘도 타쿠미씨는 부친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남기신 유품 중에서 큰 박스에 가득 찬 연구 자료와 원고뭉치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자료들을 제가 사용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콘도 선생님이 사용하시던 데스크탑 컴퓨터에도 수천 개의 파일이 남겨져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 자리에서는 이 자료들을 어찌할 것인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고, 그저 네에, 콘도 선생님의 이름을 위해 잘 사용하겠습니다고 대답했을 뿐입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타계하시고, 감사패 전달이 이뤄진 뒤에도 다카라즈카 추도비를 둘러싼 많은 일들이 생겼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타마세 부녀회와 만푸쿠지에서는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참배묘를 유지할 뿐 아니라, 그곳을 무궁화와 진달래 동산으로 꾸밀 계획을 세우셨다고 합니다.

 

 

정세화 선생님의 노력으로 앞으로 인근 조선학교에서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연례 참배 장소로 정하고 정기적으로 방문하기로 했다는 말씀도 전해 주셨습니다.

 

일본 <팀아이>의 회원들이 많이 늘어나서 활기를 띠고 있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조선학교를 후원하는 일이 조금 더 빈번해 지고 활발해질 것이라는 기대도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정세화 선생님과 함께 부친 정홍영 선생님의 묘에도 가서 참배했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은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가족들보다 더 자주 찾아오시던 묘역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추도비가 건립된 날에도 정홍영 선생님을 찾아오셨다고 하셨습니다. 20205월호 <무쿠게통신>에 쓰신 글에서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늘상 찾아왔지만 발견하지 못했던 묘비의 글을 그날 발견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묘비 옆에 새겨진 글을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습니다. “통일을 바라면서 이곳에 묻음.”

 

 

정홍영 선생님은 마츠에로 가는 하쿠비선 열차 안에서 옆에 앉으신 콘도 도미오 선생님에게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고향에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고 하십니다.

 

정홍영 선생님을 고향 상주에 모시는 일이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숙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뒤에 남은 우리들이 계속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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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23ぶりに日本訪問しましたコロナ防疫緩和され韓日間のノービザ協定稼動したためです

 

鄭世和先生しくいにられないにも一緒げたことをしました舞踊靴キャンペーンと宝塚朝鮮人追悼碑困難直面している朝鮮学校する心配一緒わしました

 

たちは近藤富男先生れました宝塚市郊外近藤富男先生自宅では奥様とおさんたちが鄭世和先生かくえてくれました

 

 

近藤富男先生部屋るとすべてが生前使っていたままだということでベッドサイドにかれたたんすの近藤富男先生遺骸かれていましたそしてそのには江陵市った感謝牌んでかれていました

 

鄭世和先生近藤富男先生にお辞儀をしましたえてみると近藤富男先生直接会ったことがありませんでした写真だけでおいしてラインだけでおをしただけですそれでもまるでしい先輩であり長兄叔父のようにじたりしました

 

 

近藤富男先生長男近藤卓海さんがおさんのいでチームあい会長職担当しているというきました自分わらせないことだからといって息子さんにまでったのは責任感すぎるのではないかとしばらくっていたのですが近藤富雄先生判断がいつもしいとじていますおそらくそこには間経って証明される意味があるでしょう

 

近藤卓海さんは父親近藤富男先生した遺品きなボックスにまれた研究資料原稿せてくれましたそしてこれらの資料使ってもい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近藤先生使っていたデスクトップパソコンにも数千個のファイルがされているとおっしゃいました

 

しかしそのそのではこれらの資料をどうするかえもわからずただはい近藤先生名前のためによく使いますえただけです

 

 

近藤富男先生他界され感謝牌伝達がなされた宝塚朝鮮人追悼碑くのことがこったときました

 

玉瀬婦人会滿福寺では金炳順南益三張長守さんの参拝墓維持するだけでなくそこをムクゲとツツジの計画てたそうです追悼碑てられたともよく似合うといます

 

 

鄭世和先生努力今後近隣朝鮮学校では宝塚朝鮮人追悼碑恒例参拝場所定期的訪問することにしたというおえてくださいました

 

日本<チームあい>会員えて活気づいているというおきました朝鮮学校後援することがもう頻繁になり活発になるだろうという期待まるようになりました

 

 

鄭世和先生一緒父親鄭鴻永先生のおにもって参拝しました鄭世和先生近藤富男先生家族よりも頻繁れていた墓地だとえてくれました

 

近藤富男先生追悼碑建立されたにも鄭鴻永先生ねてきたとおっしゃいました20205月号むくげ通信かれた文章近藤富男先生はいつもねてきましたが発見できなかった墓碑文章をその日発見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

 

墓碑まれた文字でてみました。 「統一いながらここに

 

 

鄭鴻永先生松江行きの伯備線列車った近藤富男先生統一されるまでは故郷にはかないわれたことがあるそうです

 

鄭鴻永先生故郷尚州えることが近藤富男先生宿願だ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そしてそれはったたちがけ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だと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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固城統営系図調査難航している緊迫した状況発生しました202111から近藤富男先生健康悪化めましたってきました

 

宝塚朝鮮人追悼碑犠牲者5のうちゆかりが確認されたのはまだ金炳順さん一人だけでしたしかし近藤富男先生をはじめ追悼碑建立されたそして100年以上無縁故慰霊祭ってきた々にえるいをしたかったのです

 

 

20211119日江陵市請願書提出しました金炳順さんの故郷江陵市宝塚朝鮮人追悼碑建立者感謝牌贈呈してほしいという内容でした請願文にはこの追悼碑建立されるまで宝塚100年間あったことを簡略説明感謝牌贈呈対象8指名この々が感謝牌るにする理由明示しました

 

げた感謝牌対象者日本人6在日同胞2でしたこの々の経歴追悼碑建立寄与事項請願文まれていますが21ページ(証憑資料含)するためここにさず請願文全体をこの最後別途添付しましたただここにはその8名前だけをべることにします

 

鄭弘永1929-2000郷土歴史家)、近藤富男1950-2020教師市民活動家)、金礼坤キム·レゴン事業家)、堀内稔在日朝鮮人史研究家)、飛騨雄一神戸学生青年センター代表)、玉野誠三彫刻家)、足立泰教足立知教万福寺住職)。

 

 

この請願文江陵調査積極的協力してくれた洪眞善柳善起先生江陵市議会され市議会はこれを江陵市長送付しました異例いスピードでこの請願れられ請願内容確認作業着手されましたしかし当時新型コロナウイルス感染症状況非常深刻だったため江陵市公務員宝塚出張請願内容事実有無直接確認することがしかったです

 

江陵市庁でこの請願担当した実務者パク·ジョンシ課長·ジュンハ係長パク·インスン係長3でしたにパク·ジョンシ課長はこの請願調査難航するとこれを東京所在江原道本部送付江原道本部江陵市庁わって実態調査めることを要請しました

 

 

これに江原道本部の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とムン·ミヘ部長東京から宝塚出張断行され関係者との懇談会じて請願内容事実であることを確認したこれを江原道江陵市庁報告しましたこの報告書けて江陵市庁やかに感謝牌贈呈感謝牌伝達もカン·ビョンジク江原道本部長においしました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とムン·ミヘ部長以後2宝塚訪問感謝牌伝達支障がないよう万全しました

 

 

ついに感謝牌伝達式2022415宝塚ホテルの宴会場われました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江陵市長わって8感謝牌したそうですはその出席できませんでしたが伝達式伝達される時間にオフィスにってその時間にしました

 

一方ではこのしい行事くからでも気持ちでしたがもう一方しみにしつぶされていました近藤富男先生がこの感謝牌伝達式出席できなかったからです近藤先生江陵市感謝牌伝達決定らせをきましたが伝達式までつことができず210くなりました

 

 

それでもいなら江陵市積極的協力近藤富男先生感謝牌製作して発送することにするなど最善くしましたが結局感謝牌ることはできずただ完成した感謝牌写真だけをされたときました

 

近藤富雄先生35年間努力べるとあまりにもさなおぎ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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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과 통영의 족보 조사가 난항을 겪고 있는 가운데, 급박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202111월부터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 다섯 분 중에서 연고가 확인된 것은 아직 김병순씨 한 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콘도 도미오 선생님을 비롯해 추도비를 건립하신 분들, 그리고 1백년 이상 무연고 위령 제사를 드려온 분들에게 무언가 가시적인 보답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20211119일 강릉시에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김병순씨의 고향 강릉시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자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청원문에는 이 추도비가 건립되기까지 다카라즈카에서 1백 년 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고, 감사패 증정 대상으로 8분을 지명하면서 이분들이 감사패를 받아 마땅한 이유를 명시했습니다.

 

제가 지목한 감사패 대상자는 일본인 여섯 분과 재일동포 두 분이었습니다. 이분들의 경력과 추도비 건립 기여사항은 청원문에 포함되어 있으나 21(증빙자료 포함)에 달하기 때문에 여기에 옮기지 않고 청원문 전체를 이 글 끝에 별도로 첨부했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그 여덟 분의 이름만 나열하기로 하겠습니다.

 

정홍영(1929-2000, 향토역사가), 콘도 도미오(1950-2020, 교사, 시민활동가), 김례곤(사업가), 호리우치 미노루(재일조선인사 연구가), 히다 유이치(고베학생청년센터 대표), 타마노 세이조(조각가), 아다치 타이쿄와 아다치 치쿄(만푸쿠지 주지).

 

 

이 청원문은 강릉 조사에 적극 협조해 준 홍진선, 유선기 선생의 손으로 강릉 시의회에 전달되었고, 시의회는 이를 강릉시장에게 송부했습니다.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로 이 청원은 받아들여졌고, 청원내용의 확인 작업이 착수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코로나 상황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에 강릉시의 공무원에 다카라즈카에 출장하여 청원 내용의 사실여부를 직접 확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강릉시청에서 이 청원을 담당한 실무자는 박종시 과장, 이준하 계장, 박인순 계장 등 세 분이었습니다. 특히 박종시 과장은 이 청원의 조사가 난항에 처하자 이를 도쿄 소재 전국시도지사협의회의 강원도본부에 송부해, 강원도 본부가 강릉시청을 대신해 실사를 진행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이에 강원도 본부의 강병직 본부장님과 문미혜 부장님이 도쿄에서 다카라즈카로 출장을 단행하셨고, 관계자들과의 간담회를 통해 청원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한 후, 이를 강원도와 강릉시청에 보고하셨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라 강릉시청은 신속하게 감사패 증정을 결정하고, 감사패의 전달도 강병직 강원도본부장에게 부탁했습니다. 강병직 본부장님과 문미혜 부장님은 이후 두 차례나 다카라즈카를 방문하여 감사패 전달에 차질이 없게 만전을 기하셨습니다.

 

 

마침내 감사패 전달식이 2022415일 다카라즈카 호텔 연회장에서 열렸습니다. 강병직 본부장님이 강릉시장을 대신해 여덟 분에게 감사패를 전달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전달식이 전달되는 시간에 사무실에 앉아 그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제 마음 한편은 이 기쁜 행사를 멀리서나마 자축하는 마음이었지만 다른 한편은 슬픔에 밀리기도 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이 전달식에 참석하시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콘도 선생님은 강릉시의 감사패 전달 결정의 소식을 전해 듣기는 하셨지만, 전달식까지 기다리시지 못하고 210일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강릉시의 적극적인 협조로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감사패를 먼저 제작해 발송하기로 하는 등,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 감사패를 손에 만져보시지는 못하셨고, 다만 완성된 감사패의 사진만 전달받으신 것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35년 노력에 비하면 너무도 약소한 답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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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戸水道工事犠牲者金炳順さんの故郷江原道江陵推定され南益三さんの故郷慶尚南道統営そして福知山線鉄道公社犠牲者尹吉文さん吳伊根さんの故郷慶尚南道固城推定されましたらなければならない段階突入しました

 

これは鄭鴻永-近藤富男先生先例ったものでもあります二人糸口つかるやいなや現地踏査したからですいがあるとすれば宝塚-玉瀬1時間距離でしたがソウル-高城/統営4-5時間距離江陵3時間もかかる距離です

 

また鄭鴻永先生近藤富男先生同行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が一人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々でくの々のけをけることができました高城調査では高城郡庁歴史資料研究士キム·サンミン先生高城放送局社長韓昌植(ハン·チャンシク)先生けをました

 

 

江陵調査では出発するから民族問題研究所出身朴漢龍(パク·ハンヨン)先生諮問ることができ江陵到着してからも金性洙(キム·ソンス)記念事業会活動家洪眞善(ホン·ジンソン)柳善起(·ソンギ)先生江陵原州大学国際通商学科姜承昊(カン·スンホ)先生けをけることができました

 

現地活動家たちのけをはしましたが100年前故郷れた々の縁故すことは容易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一番簡単方法官庁住民登録戸籍調べることですが2011制定された個人情報保護法のため他人個人情報閲覧する方法がなくなりました

 

またこの々がいつ朝鮮れたのかかりませんでしたので公的記録閲覧できる場合でもどの時期記録るべきか特定できませんでしたえば高城ではジャーナリストの韓昌植先生けで高城面住民センターのデータベースを制限的検索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が尹吉文吳伊根さんの名前てきませんでした

 

 

これはおそらく尹吉文さんと吳伊根さんが日本による植民地時代以前時期家族全員日本移住したからでしょうそうしていたら今日行政電算網入力さえされなかったでしょう尹吉文さんは死亡当時192921でしたので日本による植民地支配以前まれ父親尹在裕(ユン·ジェユ)さんが同居していたことから1910年以前家族全体日本移住していた可能性いです

 

公的記録閲覧不可能だったため私的記録るしかありませんそこで代案としてじたのが系図記録閲覧です韓国ではでも苗字別家門別系図発刊保存する慣行がありこれを管掌する宗親会活発活動しています

 

系図閲覧方法江陵奏効しました数回試行錯誤洪眞善柳善起姜承昊先生けで金炳順さんの本貫慶州金氏樹隱公派だったことがらかになり慶州金氏樹隱公派江陵支会支会長金子正(キム·ジャジョン)先生支会員金喆旭(キム·チョルウク)先生けで最近系図である慶州金氏樹隱公派世譜(2014年刊行された甲午譜)調べることができました

 

 

この系図21ページをえていますので100年前朝鮮った金炳順さんの記録つけるのは簡単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金子正先生努力により金炳順さんが(1)慶州金氏樹隱公派17世孫であり(2)金東秀(キム·ドンス)さんの三男長男であり(3)生没年代記録されないわりに日本居という記録っていることを確認しました

 

系図によりますと金炳順さんは結婚していませんがにはなくとも4がいることも確認されていますしかし宗親会のあらゆる努力にもかかわらず親族つけ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しかしこの記録だけでも金炳順さんの故郷江陵だという十分確認されています

 

 

しかし固城統営では系図調査がまだ成功していません固城では坡平尹氏系図調べましたが尹吉文氏記録つけることができず呉伊根氏本貫確認されていません南益三氏固城南氏だったと推定されますが本貫確認されていません

 

しかし近藤富男先生のようにめておらず系図調査進行中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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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수도공사의 희생자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원도 강릉으로 추정되었고, 남익삼씨의 고향은 경남 통영, 그리고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의 희생자 윤길문, 오이근씨의 고향은 경남 고성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제는 발로 뛰어야 하는 단계에 돌입했습니다.

 

이는 정홍영-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선례를 따른 것이기도 합니다. 두 분은 실마리가 발견되자마자 현지를 답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다카라즈카-타마세는 자동차로 1시간 거리였지만, 서울-고성/통영은 4-5시간 거리이고, 강릉도 3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입니다.

 

또 정홍영 선생님은 콘도 도미오 선생님과 동행하실 수 있었지만 저는 혼자 다녀야 했습니다. 다행히 가는 곳마다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고성 조사에서는 고성군청의 역사자료연구사 김상민 선생과 고성방송국의 사장 한창식 선생의 도움을 얻었습니다.

 

 

강릉조사에서는 출발하기 전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출신 박한용 선생의 자문을 얻을 수 있었고, 강릉에 도착해서도 김성수기념사업회의 지역 활동가 홍진선, 유선기 선생과 강릉원주대학 국제통상학과의 강승호 선생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현지 활동가들의 도움을 얻기는 했으나 1백 년 전에 고향을 떠난 분들의 연고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관청에서 주민등록이나 호적을 조사하는 것이지만, 2011년 제정된 <개인정보 보호법>으로 타인의 개인정보를 열람할 방법이 없게 되었습니다.

 

또 이분들이 언제 조선을 떠났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공적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 경우에도 어느 시기의 기록을 보아야 하는지 특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컨대 고성에서는 언론인 한창식 선생의 도움으로 고성면 주민센터의 데이터베이스를 제한적으로나마 검색할 수 있었지만, 윤길문, 오이근씨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윤길문씨와 오이근씨가 일제강점기 이전 시기에 가족 전체가 일본으로 이주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오늘날의 행정전산망에 입력조차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윤길문씨는 사망당시(1929) 21세였으므로 일제강점 이전에 태어났고, 그의 부친 윤재유씨가 동거했던 점으로 보아, 1910년 이전에 가족 전체가 일본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적 기록 열람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적 기록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대안으로 강구한 것이 족보기록 열람입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성씨별, 가문별로 족보를 발간하고 보존하는 관행이 있고, 이를 관장하는 종친회들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족보 열람의 방법은 강릉에서 주효했습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홍진선, 유선기, 강승호 선생의 도움으로 김병순씨의 본관이 경주 김씨 수은공파였던 것을 밝혀낼 수 있었고, 경주 김씨 수은공파 강릉지회의 지회장 김자정(金子正) 선생과 지원 김철욱(金喆旭) 선생의 도움으로 최근 족보인 <경주김씨 수은공파 세보(2014년 간행된 갑오보)>를 조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족보 책도 2권으로 1천쪽이 넘었기 때문에, 1백년 전에 조선을 떠난 김병순씨의 기록을 찾아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김자정 선생의 끈질긴 노력으로 김병순씨가 (1) 경주김씨 수은공파의 17세손이며, (2) 김동수씨의 3남 중 장남이었고, (3) 생몰연대가 기록되지 않은 대신 일본에 거주(居日本)”라는 기록이 남아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족보에 따르면 김병순씨는 결혼하지 않았으나, 그에게는 적어도 4명의 조카가 있다는 점도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종친회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친족을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만으로도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릉이라는 점은 충분히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성과 통영에서는 족보 조사가 아직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고성에서는 파평 윤씨의 족보를 조사했지만 윤길문씨의 기록을 찾아내지 못했고, 오이근씨는 본관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남익삼씨는 고성 남씨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의 본관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콘도 도미오 선생님처럼 저도 포기하지 않았고, 족보 조사는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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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知山線鉄道工事中死亡した尹吉文吳伊根さんの朝鮮内縁故地調査は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報道した4記事のおかげで比較的簡単把握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慶尚南道固城郡固城面がその々の故郷であるかを現地資料確認するだけです

 

しかし神戸水道工事中くなった金炳順南益三張長守さんの朝鮮内縁故地すのはもうしかったですこのたちがくなった西谷村村長発行した埋葬認許證本籍地記入するがありましたがその記録がそれほど正確ではなかったからです

 

埋葬認許証住所欄いている場合もあれば本籍地住所ではなく現住所のみ記入されている場合もありました朝鮮住所記録されていてもみにくかったり当時朝鮮にない住所記録されていたりしましたこれをることは暗号解読作業ているようでした

 

 

それでも簡単だったのは犠牲者名前明確記載されておりらの生年追跡可能だというでしたまず金炳順さんは生年月日1883519明記されていましたそして埋葬認許證発行日191483その午後2時以降埋葬するよう指示されていることから死亡日はその前日191482だった可能性いです工事中だった当時朝鮮人同僚死亡したからといって3日葬でも状況ではなかったはずだからです

 

南益三氏張長守氏埋葬認許証には生年月日記録されていませんが二人年齢がそれぞれ3727となっていますしたがって南益三氏はおよそ1877年生まれ張長守氏1887年生まれと推定できますることになりますが生年でもることは系図調べる非常有用資料になりました

 

3朝鮮縁故地調査簡単解決されたのは張長守さんでした現住所玉瀬村イズハリ1番地45とはっきり記入されていましたが朝鮮本籍地住所れていたからですそれで縁故地把握不可ることができました

 

 

金炳順さんの埋葬認許証れた朝鮮内本籍地住所朝鮮江原道江陵郡北一里大川洞でした近藤富男先生江陵郡江華郡んでいたので江華島調べたことがあるということでしたそれだけ埋葬認許證記録された書体みにくかったです

 

しかし北一里という地名江陵にあったという事実確認しながら金炳順さんの故郷江陵だったと確信しました191441断行された行政区域改編江陵郡北一里面北二里面そして南一里面わさって郡内面となりましたがすでにその日本った金炳順氏はそのような事実らなかったはずでそれで故郷住所北一里記入されていたのです

 

そして今後調査じて大川洞大倉里りであることがらかになりましたおそらく発音ていることからじた間違いだったのでしょうしたがって金炳順さんの本籍地住所今日江原道江陵市浦南洞あるいは校洞特定されることができました

 

 

一方南益三さんの本籍地住所解読するのが一番難しかったです埋葬認許證れた本籍地住所をすぐえるままむと、「朝鮮忠清道春元郡延北面先三村ですしかし1915年当時忠清道はなく当時朝鮮行政区域名前をすべて調べても春元郡延北面または先三村という地名はありませんでした

 

はこのうち春元という名前先三という名前をキーワードに当時行政区域名前全部探してみました。 「春元面高城郡にあり春元面には先三村ではなく光三村がありましたおそらくているので勘違いしているようにえました

 

そのため、「春元面光三村推定される南益三氏本籍地住所現在慶尚南道統営市広道面である可能性非常いという結論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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はまず4新聞記事みました事故報道する記事通常被害者身元をある程度報道するからです最近個人情報保護のために犯罪事故被害者身元報道自制するですが100年前新聞はそのような概念がなかったので年齢住所までも報道したりしました

 

ところが各記事ごとに被害者名前年齢しずついました。 『神戸新聞朝鮮慶尚南道出身尹吉文(ユン·ギルムン, 21)同尹日善(ユン·イルソン, 25)吳伊根(·イグン, 25)余時善(·シソン, 19)吳伊目(·イモク)5が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被害尹吉文即死吳伊根病院移送中死亡したと報道しました

 

 

神戸又新日報朝鮮慶尚南道高城郡高城面出身朝鮮人尹吉文(21)尹日善(25)金時善(キム·シソン, 19)4が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被害けたとこのうち尹吉文吳伊根さんが死亡したとじました

 

大阪朝日新聞朝鮮人土工3が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土工尹吉文一(21)吳伊根(25)2死亡、「土工である伊日善(·イルソン, 25)重傷... 揚時善19顔面ったじました

 

朝日新聞東京版土工伊吉文(21)、呉伊根(25220んで身体々になる惨事、「土工である伊日善(25重傷って卒倒くの小屋食事準備をしていた伊日善揚時春(19いけがをったじています

 

 

神戸新聞神戸又新日報明示した被害者54いましたが報道した被害者名前はほぼ一致しましたただ女性被害者名前だけ余時善金時善いましたおそらく漢字ていることからじたりだとわれます余氏金氏って表記したのはているうえ朝鮮人金氏がより一般的だったため勘違いしたものとわれます

 

また大阪版東京版朝日新聞記事では、『神戸新聞神戸又新日報らかにした尹吉文尹日善名前伊吉文伊日善報道しましたがこれもやはり漢字ていることからじたりだとわれます

 

 

しかも韓国には伊氏姓がないので神戸新聞報道正確だとみられ鄭鴻永先生神戸新聞記録いましたしたがって鄭鴻永先生先例死亡者名前尹吉文呉伊根断定調査めることにしました

 

朝日新聞尹日善氏妻余時善氏揚時善大阪版)、揚時春東京版などと々に報道しましたがこれもやはり余時善しいようです余氏揚氏って表記したのは揚氏日本語音読ようであるためでしょうまた余時善揚時春表記したのはその二文字ているからでもあり日本式音読がシュンで韓国式音読善ていたからでしょう

 

 

4の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犠牲者名前表記しずついますが調査研究目的上そのようないはにとってあまり重要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なくとも死亡者2その名前尹吉文氏吳伊根氏一致するのでらの縁故地すだけです

 

朝日新聞はこの2朝鮮ゆかりのじませんでしたが、『神戸新聞死者朝鮮慶尚南道出身、『神戸又新日報はさらに具体的朝鮮慶尚南道高城郡高城面出身明示しましたこの程度情報であれば90年前犠牲者本拠地調べるための非常具体的出発点になってくれると期待されてい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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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선 4건의 신문기사를 읽었습니다. 사고를 보도하는 기사는 보통 피해자의 신상을 어느정도 보도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범죄나 사고 피해자의 신상 보도를 자제하는 편이지만, 1백년 전의 신문들은 그런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나이와 주소까지도 보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각 기사마다 피해자의 이름과 나이가 조금씩 달랐습니다. <고베신문>조선 경상남도 출신 윤길문(尹吉文, 21), () 윤일선(尹日善, 25), 오이근(吳伊根, 25), 여시선(余時善, 19), 오이목(吳伊目)의 다섯명이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피해를 입었고, 윤길문은 즉사, 오이근은 병원으로 이송중에 사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고베유신일보>조선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 출신의 조선인 윤길문(21), 윤일선(25), 김시선(金時善19) 4이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피해를 입었다고 보도했고, 이중 윤길문과 오이근씨가 사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오사카아사히신문>조선인 토공 3이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를 당했고 토공 윤길문일(尹吉文一, 21), 오이근(吳伊根, 25)의 두명은사망했고 토공의 우두머리 이일선(伊日善, 25)는 중상... 양시선(揚時善, 19)은 안면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아사히신문 도쿄판>토공 이길문(伊吉文, 21) 오이근(吳伊根, 25)의 두명은 약 20칸을 날아가 신체가 산산조각이 나는 참사를 당했고, “토공의 우두머리 이일선(伊日善, 25)은 크게 중상을 입고 졸도했으며, 인근 오두막에서 식사준비 중이던 이일선의 아내 양시춘(揚時春, 19)은 얼굴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고 보도했습니다.

 

 

<고베신문><고베유신일보>가 명시한 피해자의 수는 5명과 4명으로 조금 달랐지만, 보도한 피해자 이름은 거의 일치했습니다. 다만 여성 피해자의 이름만 여시선과 김시선으로 달랐습니다. 아마도 한자 여()자와 김()자가 비슷해서 생긴 오류로 생각됩니다. ()씨를 김()씨로 잘못 표기한 것은 글자의 모양이 서로 비슷한 데다가, 조선인들의 성으로 김씨가 더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착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오사카판과 도쿄판 <아사히신문>의 기사는 <고베신문><고베유신일보>이 밝힌 윤길문과 윤일선의 이름을 이()길문과 이()일선으로 보도했는데, 이것도 역시 한자 윤()자와 이()자가 비슷하게 보여서 생긴 잘못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한국에는 이()씨 성이 없으므로, 고베의 신문들의 보도가 정확할 것으로 보이며, 정홍영 선생도 고베 신문들의 기록을 따랐습니다. 따라서 정홍영 선생님의 선례를 따라서 사망자의 이름을 윤길문(尹吉文)과 오이근(吳伊根)으로 단정하고 조사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아사히신문>은 윤일선씨의 아내 여시선(余時善)씨를 양시선(揚時善, 오사카판), 양시춘(揚時春, 도쿄판) 등으로 서로 달리 보도했지만, 이 역시 여시선이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선씨를 양()시선씨로 잘못 표기한 것은 양()자의 일본어 음독이 (よう)’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여시선()을 양시춘()으로 표기한 것은 두 글자가 비슷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의 일본식 음독이 슌(しゆん으로 한국식 음독 선()과 비슷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4개 신문의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 희생자의 수와 이름 표기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조사연구의 목적상 그런 차이는 제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사망자가 2명이며 그 이름이 윤길문(尹吉文)씨와 오이근(吳伊根)씨로 일치하므로 이들의 연고지를 찾기만 하면 됩니다.

 

<아사히신문>은 이 두 사람의 조선 연고지를 보도하지 않았지만 <고베신문>은 사망자들이 조선 경상남도 출신이라고 보도했고 <고베유신일보>는 더 구체적으로 조선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 출신이라고 명시했습니다. 이 정도의 정보라면 90년 전 희생자의 연고지를 조사하기 위한 매우 구체적인 출발점이 되어 줄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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宝塚朝鮮人追悼碑まれた記録几帳面んだ鄭鴻永先生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宝塚朝鮮人みました1部第1神戸水道公社についての調査報告書2には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べられていましたこの研究報告書えることがないほど徹底的完璧だったので背景知識ました

 

いて近藤富男先生えてくださったむくげ通信文章もじっくりみました鄭鴻永先生行跡とともにそのがどんなだったのかもじることができましたまたきになった飛田雄一先生堀内稔先生そして近藤富男先生人品じました

 

 

この々ははどのようにれても自分たちの信念またその信念かちえる同僚たちとやかで愉快自分仕事をしていく々でしたこのたちが兵庫朝鮮関係研究会むくげの活動しながらめた信頼友情切実じられました

 

近藤富男先生1983鄭鴻永先生めてった、「わたしは鄭鴻永さんの金魚したとおっしゃっていましたはそのみながら二人友情ましかったです

 

宝塚朝鮮人追悼碑建立された近藤富男先生はその鄭鴻永先生墓所追悼碑建立について報告したそうです1985二人めたことが2020くのんだ感激鄭鴻永先生らせるためだったのでしょう

 

 

一度生きる人生このような仲間つことができるのはせなことでしょう。 「金魚がこういうものならかの金魚になりたいといました

 

しかし二人友情同志愛感歎しているわけにはいきませんでしたはそのうちの一人のおいで追悼碑犠牲者々の縁故課題遂行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からです

 

背景知識つようになりましたが準備運動ぎませんでした仕事めるには出発点必要でしたその出発点もチョン·ホンヨン先生著書提供しましたこのには3 埋葬である虚証写真2 新聞記事のコピーが収録されていました

 

 

埋葬認許證鄭鴻永先生1985、「宝塚市史編纂室編集担当主事若林泰さんから入手したものですこれを根拠神戸水道工事(1914-15)死亡した朝鮮人労働者3(金炳順南益三張長守氏)調査まりました

 

しかし付録収録されている埋葬認許證写真さすぎる3扇形なって撮影されたもので記録をきちんとむ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近藤富男先生はすぐにそれぞれの埋葬認許證画質写真ってくれましたそのはどうやってこの写真近藤富男先生所蔵していたのかからず理由れませんでした

 

一方鄭鴻永先生著書3部資料編には2新聞記事収録されていましたそのうち神戸又新日報記事1985325堀内稔先生からいただきましたそして翌日チョン·ホンヨン先生近藤富雄先生一緒現場踏査きました

 

 

さて3資料編には神戸又新日報神戸新聞記事だけが収録されていましたが本文には「『神戸』、『朝日』、『毎日新聞などがそれぞれかなりしい記事じたされていました。 『朝日新聞毎日新聞もこの事故じたという意味です

 

早速鄭世和先生神戸市立図書館調査をおいし東京国立記録院勤務する恵那功刀直儀先生にも朝日毎日記事してほしいとみました鄭世和先生大阪朝日新聞記事つけられ惠那功刀先生朝日新聞-東京版記事してってくださいましたそこで4新聞記事確保されました

 

 

毎日新聞記事つかりませんでしたが追慕碑犠牲者たちの縁故調べるためのしっかりとした出発点られたわけ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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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새겨진 기록을 꼼꼼히 읽은 후에, 정홍영 선생님의 <가극의 거리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를 읽었습니다. 1부 제1장은 고베수도공사에 대한 조사 보고서였고, 2장에는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가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이 연구보고서는 덧붙일 것이 없을 만큼 철저하고 완벽했기 때문에 저는 좋은 배경지식을 얻었습니다.

 

이어서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전해 주신 <무쿠게통신>의 글들도 찬찬히 읽었습니다. 정홍영 선생님의 행적과 함께 그분이 어떤 분이셨는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글을 쓰신 히다 유이치 선생님과 호리우치 미노루 선생님, 그리고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성품도 느껴졌습니다.

 

 

이분들은, 세상이야 어떻게 흘러가든,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고, 또 그 신념을 나눌 수 있는 동료들과 함께 잔잔하고 유쾌하게 자기 일을 해 나가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이 <효고조선관계연구회><무쿠게회>에서 활동하시면서 다진 신뢰와 우정이 절절히 느껴졌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1983년 정홍영 선생님을 처음 만난 후 나는 정홍영 선생의 금붕어 똥(金魚)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두 사람의 우정이 부러웠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건립되던 날,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그길로 정홍영 선생의 묘소에 찾아가 추도비 건립을 보고드렸다고 합니다. 1985년에 두 사람이 시작한 일이 2020년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열매를 맺은 감격을 정홍영 선생께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한 번 사는 인생에서 이런 동료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일 것입니다. 저는 금붕어 똥이 이런 것이라면 나도 누군가의 금붕어 똥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두 분의 우정과 동지애에 감격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그중 한 분의 부탁으로 추도비 희생자분들의 연고를 찾는 과제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배경지식은 갖게 되었지만 준비운동에 불과했습니다. 일을 시작하려면 출발점이 필요했습니다. 그 출발점도 정홍영 선생님의 저서가 제공했습니다. 이 책에는 3장의 매장인허증 사진과 2건의 신문기사 사본이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매장인허증은 정홍영 선생이 1985년 봄, “다카라즈카 시사(市史) 편찬실의 편집담당주사 와카바야시 야스시(若林泰)씨로부터입수한 것입니다. 이를 근거로 고베수도공사(1914-15) 중에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 3(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조사가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부록에 수록된 매장인허증의 사진은 너무 작은데다가, 세 장이 부채꼴 모양으로 겹쳐져 촬영된 것이어서, 기록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즉시 각각의 매장인허증을 화질 좋은 사진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이 사진을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소장하고 계셨는지 몰랐고, 이유도 묻지 못했습니다.

 

한편 정홍영 선생님의 저서의 3부 자료편에는 2건의 신문기사가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그중 <고베유신일보>의 기사는 1985325일 호리우치 미노루 선생님으로부터 건네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로 다음날 콘도 도미오 선생님과 현장 답사를 가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3부 자료편에는 <고베유신일보><고베신문>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었지만, 본문에는 “<고베>, <아사히>, <마이니치> 신문 등이 각각 상당히 자세한 기사를 보도했다고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아사히신문><마이니치신문>도 이 사고를 보도했다는 뜻입니다.

 

저는 즉시 정세화 선생님께 고베도서관 조사를 부탁드렸고, 도쿄의 국립기록원에 근무하는 에나 크누기(功刀恵那) 선생께도 <아사히><마이니치> 기사를 찾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은 <오사카아사히신문>의 기사를 찾아내셨고, 에나 크누기 선생도 <아시히신문-도쿄판>의 기사를 찾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4건의 신문기사가 확보되었습니다.

 

 

<마이니치신문> 기사는 찾아내지 못했지만, 추도비 희생자들의 연고를 조사하기 위한 탄탄한 출발점이 만들어진 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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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鴻永先生著書むくげ通信文章とともに、『宝塚朝鮮人追悼碑まれた記録重要資料だという事実えるようになりましたしかしはこの追悼碑一度直接見たことがありませんコロナが猛威るっていて日本けなかったからです

 

それで鄭世和先生追悼碑写真ってほしいとおいしました多様方向角度からった写真必要まれた文字模様しくえるように近接撮影もおいしました鄭世和先生はさっそく追悼碑写真ってくださいました

 

 

追悼碑前面下段には旧国鉄福知山線改修工事犠牲者尹吉文呉伊根氏神戸水道導水トンネル工事犠牲者金炳順南益三張長守氏名前まれており裏面には追悼碑てた理由されていました

 

1914から15年間おこなわれた神戸市水道導水トンネル工事現在分かっているだけでも三人朝鮮半島出身労働者事故くなりましたこれは千苅水源地から神戸市まで淨水るための難工事であったとえられています

 

また旧国鉄福知山線敷設後ここ武庫川のほとりで氾濫土石流から鉄道改修工事のさなか19293262朝鮮半島出身者爆発事故としました

 

地域生活重要役割たしている水道鉄道建設現場犠牲になった5々を事故れず後世えてゆくためにこの追悼碑建立しました2020326」。

 

それによります、『宝塚朝鮮人追悼碑』の建設目的は2つです。 「犠牲になった5人の方々を悼」とし「事故を忘れず後世に伝えてゆくために」ということです。 犠牲者を悼むのは「地域生活に重要な基盤施設を建設する中で殉職した方々だから」です。 覚えて伝えようとする理由は「そんな事故が二度と起こ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いてこの追悼碑建立した3団体名前まれています。 「追悼碑建立する宝塚市外国人市民文化交流協会」、そしてもくれんのがそれでした

 

追悼碑には建立当時宝塚市長中川智子さんのまれています日本全土朝鮮人慰霊碑追悼碑200もありますがそこに現職市長哀悼文字まれたのは宝塚朝鮮人追悼碑唯一だといています

 

 

最後追悼碑には「『福知山線敷設工事殉職者切畑立合新田にあるというえられています西谷青年会1979切畑建立したこの殉職者福知山線敷設工事1891-1912犠牲になった殉職者える追悼碑ですこれには20日本人犠牲者名前まれています

 

宝塚朝鮮人追悼碑にこの殉職者言及した理由、「宝塚近代化のためにとした犠牲者国籍関係なくいに連携して追悼されるのが当然というえからでしょう追悼碑建立者たちの細心配慮じられました

 

 

宝塚朝鮮人追悼碑洗練されたデザインは大阪彫刻家玉野勢三先生作品です玉野勢三先生追悼碑前面男女2子供姿飛天のイメージを形象化したもの、「飛天韓半島から仏教伝来とともにわったモチーフなので韓半島日本文化交流歴史暗示するものだと説明していますはまた5つのさな木蓮つぼみで犠牲になった5象徴するっていました

 

 

近藤富男先生にこの追悼碑名前いたことがあります越鳥南枝碑慰霊碑追慕碑追悼碑などを検討した近藤富男先生追悼碑適切だとおっしゃいましたそのたちはこの追悼碑宝塚朝鮮人追悼碑んで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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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영 선생님의 저서와 <무쿠게통신>의 글들과 함께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새겨진 기록이 중요한 자료라는 데에도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추도비를 한번도 직접 본적이 없었습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서 일본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세화 선생님께 추도비의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다양한 방향과 각도에서 찍은 사진이 필요했고, 특히 새겨진 글과 문양들이 자세히 보이도록 근접 촬영도 부탁드렸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은 즉각 추도비의 사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추도비의 전면 하단에는 구국철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 희생자 윤길문(尹吉文)과 오이근(吳伊根), 고베수도도수터널공사 희생자 김병순(金炳順), 남익삼(南益三), 장장수(張長守)씨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추도비를 세운 이유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1914년부터 약 15년간 진행된 <고베시 수도터널공사> 중에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도 3명의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가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이는 센가리 수원지에서 고베시까지 깨끗한 물을 보내기 위한 어려운 공사였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옛 국철 후쿠치야마선 부설 후, 이곳 무코강변에서 자주 일어나는 범람과 토석류로부터 철도를 지키기 위한 개수공사 중, 1929326일에 두 명의 조선반도 출신자가 폭발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역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도와 철도 건설현장에서 희생된 다섯 분을 애도하면서, 사고를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추모비를 건립합니다. 2020326.”

 

이에 따르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희생된 다섯 분을 애도하고 사고를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것은 지역생활에 중요한 기반시설을 건설하는 중에 순직한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고 전하려는 까닭은 그런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어서 이 추도비를 건립한 세 단체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추도비를 건립하는 모임><다카라즈카시 외국인시민 문화교류협회>, 그리고 <목련회>가 그것이었습니다.

 

추도비에는 건립 당시의 다카라즈카 시장 나카가와 도모코씨의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일본 전역에 조선인 위령비나 추도비가 2백개나 되지만, 거기에 현직 시장의 애도의 글씨가 새겨진 것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끝으로 추도비에는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 순직자의 비>는 키리하타 다치아이신덴에 있다는 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니시타니 청년회가 1979년 키리하타에 건립한 이 <순직자의 비>는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1891-1912)에서 희생된 순직자들을 기리는 추도비입니다. 여기에는 20명의 일본인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이 <순직자의 비>를 언급한 까닭은 다카라즈카 근대화를 위해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서로 연계되어 추도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추도비 건립자들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세련된 디자인은 오사카의 조각가 타마노 세이조 선생의 작품입니다. 타마노 세이조 선생님은 추도비 전면의 남녀 2명의 아이의 모습은 비천(飛天)’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으로 비천은 한반도에서 불교 전래와 함께 전해진 모티브이기 때문에 한반도와 일본의 문화 교류의 역사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는 또 “5개의 작은 꽃은 목련꽃봉오리로, 희생된 다섯 분의 영혼을 상징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 이 추도비의 이름을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월조남지비, 위령비, 추모비, 추도비 등을 검토하신 끝에,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추도비>가 적절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로 우리는 이 추도비를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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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回舞踊靴キャンペーンがわった近藤富男先生宝塚朝鮮人追悼碑犠牲者5韓国内縁故してほしいとんできました犠牲者たちの家族親戚たちにこの5たちがよくえているというをした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

 

鄭世和先生から近藤富男先生2犠牲者縁故すために韓国れたことがあるというきましたそれだけ追悼碑主人公たちの縁故すことが近藤富男先生切実課題だといました

 

 

近藤富男先生直接会ったことはありませんしかしその寡黙普段はあまりしゃべらないのですが一旦切したらそのことが大切だという意味であり一度決心したことはいくら時間がかかってもげられるだということはよくっていました

 

しかし最初疑問いましたはこの分野専門家でもないのになぜこの仕事んだのだろうかになじみのある社会学分野でもないだけでなくしくなっている朝鮮舞踊朝鮮学校問題でもないので追悼碑にとってしい分野でした初心者同然にこんなおいをされたのが疑問でした

 

近藤富男先生日本語ができなくても日本全域りながら8~90年前崔承喜先生記録すのが不思議だったといましたですから韓国での調査にはもっと上手なのではないかと推察されたようです

 

 

研究調査れているのは事実です生涯研究所学校めながら調査研究執筆えられたというかしかしもっと正直うとそれしかにできることがあまりないという意味でもあります

 

それでも心配でした崔承喜先生当代最高芸術家だったので彼女公演はどこでも新聞雑誌のニュースでした日本大都市だけでなく中小都市図書館記録保管所でも崔承喜先生関連した記録すのはそれほどしくありませんでした

 

一方追悼碑主人公たちはられていることがほとんどない々です土木工事荒労働者身上生活記録素材になることはしかったでしょう新聞記事になるのはらがとした場合唯一でしたそれでも事故記事てであるだけで事故犠牲者死後がどうだったかをらせる後続報道があるはずがありませんでした

 

 

それにもかかわらず一応調査かりました5とも事故くなっているのでなくとも事故記録つかると期待していましたしかも舞踊靴キャンペーンと崔承喜研究手伝ってくれたことにするさな恩返しでもできればという気持ちで調査めました

 

とりあえずまで収集された基礎資料ってほしいとおいしましたライングループトークがられたのでコミュニケーションはリアルタイムでわれすぐにえがました鄭世和先生はたった一部残った父親鄭鴻永先生著書特急郵便郵送してくださり近藤富男先生むくげ通信掲載されていた文章えてくださいました

 

 

鄭鴻永先生著書歌劇のもうつの歴史:宝塚朝鮮人3部構成そのうち1123資料編つものとみられます

 

近藤富男先生えてくれたむくげ通信文章全部5つでした信長正義先生サラム:鄭弘永インタビュー115)」、堀内稔先生新聞記事武庫川改修工事朝鮮人153)」、飛田雄一先生鄭鴻永さんの178)」兵庫在日朝鮮人史研究スタートさせましよう256)」、そして近藤富男先生鄭鴻永さんとのこと300)」などでした

 

これらの資料宝塚朝鮮人追悼碑主人公たちを調査する出発点と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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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무용신 캠페인이 끝났을 무렵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 다섯 사람의 한국내 연고를 찾아달라고 부탁해 오셨습니다. 희생자들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이 다섯 분을 우리가 잘 모셔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으로부터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두 차례나 희생자들의 연고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신 적이 있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만큼 추도비 주인공들의 연고를 찾는 일이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 절실한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콘도 도미오 선생님을 직접 만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과묵하신 분이고, 평소에는 말씀이 별로 없으시지만, 일단 말씀을 꺼내셨다면 그 일이 중요하다는 뜻이며, 한번 마음먹은 일은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꼭 이루어내시는 분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의아했습니다.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도 아닌데 어째서 이 일을 내게 부탁하신 것일까? 내게 익숙한 사회학 분야도 아닐 뿐 아니라, 이제 막 친숙해져 가는 조선무용이나 조선학교의 문제도 아니어서, 추도비는 제게 완전히 새로운 분야였습니다. 초심자나 다름없는 내게 이런 부탁을 하신 것이 의문이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제가 일본말을 못하면서도 일본 전역을 다니면서 8-90년 전의 최승희 선생의 기록을 찾아내는 것이 신기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한국에서의 조사에는 더 능숙하지 않겠느냐고 짐작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연구와 조사에 익숙해져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평생 연구소와 학교에 근무하면서 조사연구와 집필로 단련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일밖에는 다른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걱정은 되었습니다. 최승희 선생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기 때문에 그의 공연은 어디에서나 신문과 잡지의 뉴스거리였습니다. 일본의 대도시뿐 아니라 중소도시의 도서관이나 기록보관소에서도 최승희 선생과 관련된 기록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반면 추도비의 주인공들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분들입니다. 토목공사 막노동자들의 신상이나 생활이 기록의 소재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신문에 기사화되는 것은 그들이 목숨을 잃은 경우가 유일했습니다. 그나마 사고 기사가 전부일 뿐, 사고 희생자들의 사후가 어떠했는지 알리는 후속보도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다섯 분이 모두 사고로 사망하셨기 때문에 적어도 사고 기록은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더구나 무용신 캠페인과 최승희 연구를 도와주신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도 된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일단 지금까지 수집된 기초자료를 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라인 단톡방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의사소통은 실시간으로 이뤄질 수 있었고, 바로 답이 왔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은 딱 한부 남은 부친 정홍영 선생님의 저서를 특급우편으로 우송해 주셨고, 콘도 도미오 선생님도 <무쿠게통신>에 게재되었던 글들을 전해 주셨습니다.

 

 

정홍영 선생님의 저서 <가극의 거리의 또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3부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1부의 1,2장과 3부의 자료편이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알려주신 <무쿠게통신(むくげ通信)>의 글은 모두 다섯 개였습니다. 노무나가 마사요시 선생님의 <사람사람: 정홍영 인터뷰(115)>, 호리우치 미노루 선생님의 <신문기사로 보는 무코강 개수공사와 조선인(153)>, 히다 유이치 선생님의 <정홍영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178)><효고의 재일조선인사 연구를 다시 시작하자(256)>, 그리고 곤도 도미오 선생님의 <정홍영씨와의 일(300)> 등이었습니다.

 

이 자료들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들을 조사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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