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표지에 ‘김혜정 장편소설’이라고 되어 있지만 나는 이 작가가 누군지 모릅니다. 물론 내 탓입니다. 오랜 외국생활로 한국 출판계의 흐름을 놓쳤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게 내게는 좋은 점이기도 합니다. 거품 낀 유명세나 기획된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내 시점을 유지한 채 작품을 대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이킹 걸즈>의 첫 인상은 좋지 않았습니다. 제목 때문입니다. 씨바, 왜 제목조차 제나라 말을 못 쓸까? 한국어 작가 맞아?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게다가 ‘걸즈’라니... 최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는 ‘하이킹’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어원이 영어 방언인 ‘하이크(hike)’에는 ‘멀리 떠나다’와 함께 ‘올리다’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죠. 고양과 성숙을 위해 먼 길을 걷는 전통이 없는 한국에는 하이킹에 해당하는 말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방랑이라는 말이 있을 뿐인데, 그건 하이킹과는 전혀 다른 말이니까요.
굳이 말하자면 <하이킹 걸즈>는 청소년 소설이자 성장 소설입니다. 나도 아들이 대학 준비할 때 읽어보라고 사준 책인데, 일차언어가 한국어가 아닌 아들은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당시 아들의 절친은 책보다는 리그 오브 레전드였으니까요. 이후에도 ‘애들 책’이라고 생각해서 꽂아만 두고 있다가 이번에 ‘버리기 전에 읽자’는 심정으로 지금 막 다 읽었습니다.
두 소녀가 비단길을 걷는 이야기입니다. 우루무치에서 둔황까지 약 1천2백킬로미터를 걸으면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이야기죠. 카미노와 올레를 다녀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둘레길이나 자락길을 걷는 저에게는 당연히 혹할 만한 소재입니다.
그렇다고 비단길의 풍광이나 역사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책은 아닙니다. 나온다고 해야 사막길의 신기루와 오아시스, 그리고 명사산 정도가 나오고, 스파게티가 비단길에서 시작된 음식이라는 설명 정도일까요? 그보다는 어두운 경험과 격렬한 갈등으로 얼룩진 두 소녀의 내면이 정화되면서 인생의 방향이 생기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실 그게 도보여행의 목적이고, 도보여행 소설의 주제이기도 하죠.
이 소설의 주인공은 소년원에 가는 대신 비단길 하이킹을 택한 ‘거짓말쟁이 상습절도범’ 보라와 ‘욱하는 성격의 상습폭력범’ 은성이지만, 두 10대 소녀 말고도 두 명의 여자가 더 등장합니다. 두 소녀의 하이킹을 이끌어주는 20대의 ‘마귀할멈’ 미림과 이 책을 쓴 (아마도 당시) 30대의 김혜정씨입니다. 김혜정씨의 인생여정과 하이킹 경험은 미림에게 전수되고, 미림의 인내어린 잔소리가 은성과 보라의 마음을 잡아주는 이야기입니다.
청소년 성장소설이라고만 생각했으면 이 책을 읽거나 독후감까지 쓸 생각은 안했을 겁니다. 은성이와 보라의 과거 비행이 서술된 것을 읽으면서, 모든 개인의 문제에는 원인, 특히 사회적 원인이 있다는 데에 다시 한 번 생각이 미쳤고, 그것은 개인의 힘으로 극복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주변 사람과 사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러면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태극기/일베/메갈의 문제가 겹쳐졌습니다. 일탈사회학 측면에서 보면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그냥 개인이나 소집단의 일탈 문제가 아닙니다. 해방 후 7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독립군과 친일파의 싸움이 전개되는 기형적인 현대사가 낳은 결과일 수 있습니다. 한 때 이 문제는 시간만이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시간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미 세대를 건너 고착되기 시작했으니까요.
한국 사회의 이 고질병을 치료할 한 가지 방법을 <하이킹 걸즈>가 제시합니다. 하이킹입니다. 자기 자리를 떠나볼 수 있어야 하고, 거기서 자기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모습이 객관화되고, 자리와 조건이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마귀할멈 역할을 해 주어야 할 종교와 학문, 언론이 무너진 한국사회는 명사산 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었던 은성과 보라의 경험을 제공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다보니 얼척 없는 윤석열 정부가 탄생한 거죠. 아이고~ (jc, 202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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