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공연 마지막 날 이시이무용단의 공연을 관람했던 최승희는 2단계에 걸쳐 충격을 받고 무용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나의 자서전(1936)>에서 최승희는 이렇게 회상했다.
“... 열심히 무대를 바라보던 중에 내 모든 것이 강력한 매력에 이끌려 무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던 새롭고 빛나는 시의 세계를 난생 처음 발견한 희열을 느꼈습니다.”
이같은 문화적 충격과 함께 최승희는 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다. 그동안 ‘유흥거리’로만 알았던 춤이 ‘미적 감흥’을 주는 예술임을 깨달은 것이다. <삼천리> 1936년 1월호에서 최승희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그때 저것은 춤이 아니라 무엇을 표현하는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나는 여태것 춤이란 기쁘고 즐거운 때만 추는 것이라고만 믿었었다. 그러나 그(=이시이 바쿠)는 지금 무겁고 괴로운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의 무용이 ‘아름다움’과 ‘힘’을 표현하고 있다고 느꼈다. <조광> 1940년 9월호에서 최승희는 그날 자신이 본 이시이 바쿠의 무용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그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 <산에 오른다>는 춤이었고, 그 다음에 <식욕(食慾)을 끈다> <갇힌 사람(囚はれた人)> 등 그 외에 몇 가지를 보고서 무엇인지 모르게 가슴을 찌르고 또 생각하게 하고 또 힘차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여 그만 정신이 팔리었다.”
실제로 ‘아름다움과 힘’은 이시이 바쿠 무용의 주제였다. 최승희는 <나의 자서전(1936)>에서 이 아름다움과 힘에 현혹되었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조금 더 자세히 서술한 바 있었다.
“물 흐르는 듯 아름답게 그려지는 육체의 선의 율동과 즐거운 꿈과 같은 멜로디의 울림에 나는 술 취한 사람처럼 황홀한 세계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첫눈에 현혹되었던 것보다 더욱 강한 것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시이 선생님의 유명한 작품 <갇힌 사람>이나 <멜랑콜리>나 <솔베이지의 노래>와 같은 무용에 흐르는 힘찬 정신이 작은 내 가슴 속에 꿈틀거리던 영혼을 불러일으키면서 끝없는 공감을 느끼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최승희가 “아름다움”과 “힘”의 “표현”을 느꼈다는 대표적 작품이 <갇힌 사람>이었다. 이 작품은 대구 공연에서도 공연되었을 것이다. 이시이 바쿠의 초기 대표작이었기 때문이다.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1집>의 설명에 따르면 <갇힌 사람>은 1922년 유럽순회공연 중 베를린에서 안무되어 초연되자마자 호평을 받았고, 이후 유럽과 미주 공연 공연에서 빠지지 않은 인기작이었다. 이 작품으로 이시이 바쿠는 <미와 힘의 길>이라는 독일 문화영화에도 출연했다.
<갇힌 사람>의 음악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 <프렐류드(작품번호 3번)> 제2번곡이었는데, 후일 일본에서도 이 작품이 널리 알려지자, 일본 대중 사이에 이 피아노곡의 제목이 <갇힌 사람>으로 알려지기까지 했다. 이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이시이 바쿠는 <이시이바쿠 팜플렛1집>에서 “원곡은 라흐마니노프의 <프렐류드>이지 <갇힌 사람>이 아니”라고 설명해야 했다.
또 이시이 바쿠는 “<갇힌 사람>의 악상은 분명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모스크바에서 패배한 것에서 얻”었지만 “이 무용작품의 주인공이 나폴레옹인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그보다는 “수탈 받고 자유를 잃은 인간이 얼마나 큰 고통을 받게 되는지, 그리고 자유를 되찾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표현한 작품이라고 이시이 바쿠는 덧붙였다.
최승희는 대구 공연을 통해 <갇힌 사람>을 두 번째 관람했다. 경성에서는 초짜 무용 관객의 입장이었지만, 대구에서는 무용단원의 제자 입장에서 스승의 대표작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자기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 작품을 3일 만에 다시 마주한 최승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감격은 조금 가라앉았더라도 경이는 늘어났을 것이다. 이제 자신이 저런 작품을 만들어 공연할 수 있어야한다는 생각했을 것이다. 최승희의 무용수업은 대구에서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