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31일자 <무쿠게통신> 300호에 실린 곤도 도미오 선생의 기고문 제목은 <정홍영(鄭鴻永)씨와의 일>이다. 곤도 도미오 선생이 정홍영 선생과 함께 했던 40년의 세월을 회고한 글이다.
1983년에 처음 만난 두 사람은 20년 동안 다카라즈카 지역 재일 조선인 역사를 함께 조사하고 연구했다. 2000년 정홍영 선생이 타계하신 후에는 곤도 선생이 그의 유지를 받들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모비>를 건립하기까지 또 다시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A4 한 장 분량의 기고문에 40년의 추억을 채우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곤도 도미오 선생은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필체로 그 일을 해내셨다. 문장과 문장들 사이에 담긴 추억과 감성의 밀도가 워낙 높아서 읽는 이의 마음을 소용돌이치게 하는 멋진 글이었다.
특히 추모비 제막식 직후 곤도 선생도 전에 몰랐던 정홍영 선생의 묘비문을 발견한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일본어가 서툰 내가 번역해가며 읽으면서 느낀 것이 이 정도이니, 일본어 원문은 얼마나 명문일지 짐작만 할 뿐이다.
곤도 선생은 1983년 가을 다카라즈카의 시립A중학교 직원연수회에 강연자로 초청된 정홍영 선생을 처음 만났고 그의 온화한 말투에 끌린 나머지 연락처를 교한하자마자 그의 “금붕어똥(金魚の糞)”이 되었다고 했다. 일본어 관용표현으로 “항상 붙어 다니는 단짝”이라는 뜻이다.
그 첫 부분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떠올랐다. 최승희 선생의 일본 초무대 작품이 <금붕어춤(金魚の舞)>이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도쿄 유학 시절 이시이바쿠 무용단에 속했던 최승희 선생이 1926년 6월25일 도쿄의 호가쿠자(邦樂座)에서 데뷔하면서 춘 춤이다.
최승희의 <금붕어춤>은 <물고기춤(魚の舞)>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아마도 금붕어가 어항 속에서 너울너울 헤엄치는 모습을 형상화한 춤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하고 있다. 이 춤은 1930년대 중반에 <인어의춤(人魚の舞)>으로 더욱 발전되었기 때문에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암튼, 그렇게 만난 금붕어와 금붕어똥은 효고현의 향토사는 물론 일본 전역의 재일조선인 수난사를 연구하는 단짝이 되었다. 마츠시로(松代) 대본영은 물론 코요엔(甲陽園)과 아이노(相野), 야마나카(山中) 온천과 쿠쿠리(久々利)의 지하호 등을 함께 답사하고 기록을 남겼다. 그 하나하나가 일제강점기의 재일조선인들에게 기억하기조차 가슴 아픈 곳들이다.
곤도 도미오 선생의 기고문은 한국어로 번역해서 이 글 뒤에 덧붙일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5인의 조선인 순직자들을 발굴하여 추도비에 새겨지도록 노력한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정리하는 데에 그치려고 한다.
우선 정홍영 선생과 곤도 도미오 선생이다. 두 사람은 후쿠치야마선 철도터널공사에서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의 사고장소를 확인하고 1993년부터 제사하기 시작했다. 니시타니무라 사무소가 발행한 매장 인허증을 발굴해 고베 수도공사 중에 사망한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기록을 찾아낸 것도 이 두 사람이었다.
한편 무쿠게회의 호리우치 미노루(堀内稔)씨는 윤길문, 오이근씨를 발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그는 1929년 3월28일자 <고베신문>의 사본을 정홍영 선생에게 전달해 사고현장인 “카와베군 니시타니무라 키리하타 나가오산 제6호 터널 입구”를 방문하도록 한 것이다.
끝으로 니시타니의 타마세(玉瀬)에 있는 불교사찰 만후쿠지(萬福寺)의 주지스님이다. 그는 만후쿠지의 여신도 회원들이 1백년이상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를 제사해 왔음을 알려왔고, 결국 이들이 윤길문, 오이근씨와 함께 추도비에 새겨져 추도되도록 했다.
그밖에도 많은 다카라즈카 시민들과 재일동포들이 추도비 건립을 후원했고 참여했다. 이렇게 보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이 지역 근대화 과정에서 희생된 5인의 조선인을 잊지 않으려는 많은 일본인 시민들과 재일동포들이 힘을 합쳐 이룬 작품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