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에는 부산부 행정1정목(=중구 창선동) 9번지에 태평관(太平館타이헤이칸, 1922-1943)이 개관했다. 일본인 상권과 주거지 중심인 행정에 요시다 겐조(吉田元藏)가 문을 연 태평관은 일본 거류민 관객들을 주요 고객으로 일본의 신극과 구극, 연쇄극 공연 위주로 경영되었던 연극 전용 극장이다.

 

1917-18년도에 부산의 극장들은 대부분 활동사진(=영화) 상설관으로 거듭나고 있었고, 새로 개업하는 극장들도 일본식 연극장이 아니라 영화 상영을 위한 시설로 건축되고 있었다. 유일한 예외가 부산좌(1907-1923)였는데, 당시 일본인 유수 사업가인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가 주식회사 형태로 설립한 부산좌도 일본식 가부키 극장으로 개관했으나, 점차 연극과 음악 공연이나 부정기적으로이기는 하지만 영화 상영도 실시하고 있었다.

 

태평관은 활동사진으로 옮겨가는 부산 극장계의 경향에 역행하여 구일본식 극장으로 건축되었는데, 아마도 극장주 요시다 겐조가 부산의 가부키 관람 인구가 충분하다고 계산했기 때문일 것이다. 때마침 태평관이 개관한지 1년 후인 1923322일 동종의 경쟁극장이었던 부산좌가 화재로 전소되자 마츠모토류타로극단, 산유 데이에이유극단, 시사극단 등 내로라하는 일본 공연물들을 독식하다시피 상연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태평관은 이웃한 활동사진 상설관 보래관과 행관과 함께 부산의 대표극장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으나, 1934년 가까운 곳에 연극전용극장인 부산극장이 개관되면서 다시 경쟁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19431119일에 발생한 화재로 태평관도 전소되었고 다시 재건되지 못했다.

 

수좌(壽座: 코토부키자, 1924-1945)1924년 부산부 목도(牧島=영도)에 세워졌다. 영도 최초의 극장이었던 <질자좌(蛭子座히루코자, 1912?~1918?)가 경영난으로 폐관된 지 6년 만에 세워진 영도의 두 번째 극장이었다. 1924년 목도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극장설립을 추진하여 192436일 덴도(田頭孝一)를 조합장으로 하는 수좌경영조합이 설립했다.

 

목도 영선정 195번지(=영도구 남항동151번지)에 위치했던 수좌는 1등석 165, 2등석 115, 3등석 57명 총 337명을 수용할 수 있는 소규모 활동사진 상설관이었다.

 

 

개관 당시 수좌의 외형은 서양일본 절충식 건물이었다. 이형재 건축사의 고증에 따르면, 수좌는 일본 전통 목구조에다 외벽체 부문만 벽돌에 미장을 한 건물로 르네상스식 정면에 일본전환기 신건축의 절충식 구조였던 것이다. 그러나 수좌는 해방 후 이름도 <항구극장>으로 바뀌고 건물도 전면 개,보수되어서 과거의 모습이 사라졌는데, <항구극장>은 건평 351, 무대면적 26.8, 수용인원은 682명이었던 목조 2층 건물이었다.

 

수좌도 질자좌와 마찬가지로 경영난을 겪었으나 1934년 영도대교가 개통되고 이듬해(=1935) 2월에는 구덕운동장이 세워지고 서면으로부터 전차노선이 개통되면서 활기를 띄었다. 수좌는 영선정(=남항동)의 전차 종착지에 위치했던 까닭에 접근성이 좋아졌기 때문에 영도 주민들뿐 아니라 부산 시가지의 주민들도 수좌를 찾기 편리해졌던 것이다.

 

1924년 개관 당시 <수좌>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던 이 극장은 1926년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 1892-)가 임대해 <2행관(第二幸館)>으로 개명되었다. 그러나 1932년에는 극장이름이 <수좌>로 되돌려졌고, 해방된 후인 1946년에는 <항구극장>으로 개명되었다. <항구극장>1990년에 폐관되었다.

 

수좌의 극장주도 자주 바뀌었다. 수좌를 건축한 최초의 건축주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926년부터는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가 경영했고, 1932년에는 이케다 다다오(池田忠夫), 19351월부터는 부산부 회의원이던 시라이시 마타로(白石馬太郞), 1942년부터는 토가 토미오(富賀四郞)가 경영하던 중에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