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는 다른 조선인 추도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 있다. 당시의 다카라즈카 시장 나카가와 도모코(中川智子)씨의 글씨를 함께 새긴 것이 그것이다.
“추도합니다(悼). 다카라즈카 시장 나카가와 토모코 씀.”
추도비의 뒷면에 새겨진 이 문구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지역사적 의미를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다카라즈카 시정부의 대표가 추도비 건립에 공개적으로 찬성했을 뿐 아니라,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글을 직접 써서 추도비에 새겨지도록 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조선인들이 값싼 노동력으로 활용되었다는 점과 그들이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는 것은 한일 양국의 역사가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바이다. 당시 일본제국의 식민지의 처지에 있던 조선인들은 때로는 자발적인 이민노동력으로, 때로는 비자발적인 강제노동력으로 일본의 탄광과 댐, 철도와 도로, 수도와 전력 등의 사회기반시설을 확충하는 데에 다수 동원되었다.
다카라즈카 지역에서도 조선인 노동자들은 고베수도공사, 무코강 개수공사, 사카세강 개수공사, 롯코사방공사, 후쿠치야마 철도공사, 한신국도공사, 현도아마가사키-다카라즈카선 공사 등에 대거 참가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이 다카라즈카의 공식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정계향 선생은 <다카라즈카 시사>와 <다카라즈카 시제 30년사>, <다카라즈카 대사전>과 논문집 <다카라즈카>(총10권)의 네 문헌을 조사한 후 자신의 논문에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다카라즈카 시사』에는 재일 조선인과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다. 무코가와 개수공사에서 조선인이 일했다는 기록이 아주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고, 전후(戰後)의 다카라즈카를 서술할 때 초급학교에 대해 몇 줄을 서술한 것이 전부이다. 『다카라즈카 시제 30년사』에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다.
“『다카라즈카 대사전』에는 다카라즈카의 외국인을 소개하며 중국인과 재일조선인을 비슷한 양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주의 연원에 대한 언급은 없다. 논문집인 『다카라즈카』에는 권당 4~5편의 논문이 실려 있는데, 총 50여 편의 논문 중 재일조선인과 관련된 것은 조선사(朝鮮寺)에 관한 소논문 한 편 뿐이다. 재일조선인이 다카라즈카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에서 발행하는 책에는 재일조선인의 존재가 지워져 있다.”
뒤늦게나마 정홍영 선생이 조선인 노동자들의 희생을 밝혀냈고, 결국 그들을 기리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이 추도비 건립 과정에서 나카가와 도모코 시장이 이를 인지하고 “애도한다(悼)”는 글씨를 보내어 추도의 행렬에 참여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다카라즈카 지역사회에서 도외시되었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공헌과 희생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중요한 사례일 것이다.
나카가와 시장의 추도 글씨가 다카라즈카시의 전체 의견을 대표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카라즈카의 시민사회 전체의 공식 입장이라면 아마도 시의회의 의결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의회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논의를 하거나 의결을 시도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나카가와 도모코 시장은 아마도 시정부나 소속정당을 대표하거나 혹은 개인 자격으로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 추도의 대열에 합류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심지어 그런 경우일지라도 현직 시정부의 대표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건립 과정에 참여한 것은 대단히 중요해 보인다. 오랫동안 공식 기록에 무시되었던 이 지역의 조선인들이 지역 근대화를 위해 일본인 시민들과 함께 노력하고 희생한 점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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