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무용신을 선물하기 위해 고베를 방문했을 때 정세화 선생은 내게 자신의 절친 신도 도시유키(신도근동) 선생을 소개하셨다. 신도 선생은 정세화 선생의 부친 정홍영 선생과 함께 지역의 조선인 관련 사적을 답사하면서 연구 활동에 참여했던 분이었다. 고베의 니시노미야 지하호에서 “푸른 봄”과 “조선독립”이라는 벽서를 발견한 것도 정홍영-신도 도시유키 답사조였다.
정세화 선생은 이때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거의 준비되었고 3월26일에 세워질 것이라고 알려 주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최승희 연구자인 내게 조선인 추도비 이야기를 자꾸 해 주시는 게 조금 의아했다. 그 의문은 고베를 떠나기 전, 정세화 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나 식사를 하면서 풀렸다.
내가 시코쿠와 고베, 도쿄와 오사카 등을 방문하면서 동포 분들을 만날 때마다 스스로 ‘최승희 연구자’라고 소개했고, 일본 조사에서 발굴된 최승희 선생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곤 했다. 특히 최승희 선생의 지역 공연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드릴 때마다 듣는 이들은 흥미로워했다.
예를 들면 최승희 선생이 우와지마 공연에서는 공연 수익금을 그 지역 도서관 건립에 기부해서 그 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이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며, 나고야 공연 수익금을 조선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에 전달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삿포로 공연 수익금을 올림픽에 출전하는 스키 선수들의 여비로 쾌척했다는 이야기들을 해 드리곤 했다. 그러면서 항상 소지하는 랩탑 컴퓨터에 고이 저장된 신문, 잡지 기사들을 증거삼아 보여드리곤 했었다.
정세화 선생이 내게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들을 찾아줄 수 있겠느냐고 처음 말을 꺼낸 것도 내가 수집한 자료들을 보고난 직후였다고 한다. 80여년전의 최승희 선생의 행적을 고신문과 잡지, 자서전과 예술사 서적들을 통해 밝혀내고 있는 것을 보시고, 혹시 조정희 선생이 1백년 전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다카라즈카의 조선인들의 행적도 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런 부탁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내 능력의 한계를 이유로 거절하고 싶었다. 우선 나는 한국 근대사나 한일관계사 전공자가 아니었다. 일제강점 초기의 노동이민은커녕 후기의 강제동원의 역사도 잘 몰랐다. 비교적 오랜 학문 생활을 통해 나는 자기 전공이 아닌 분야에 발을 들여놓으면 각별히 주의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사회학 안에서도 일탈사회학 하던 사람이 예술사회학으로 분야를 바꾸면 초심자처럼 행동해야 한다. 이미 가진 학위나 장서, 지식과 경험이 거의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연구 대상의 성격이었다. 최승희 선생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고 그의 활동 범위도 일본 전역이었다. 따라서 그가 가는 곳마다 행적이 당시 언론에 보도되었다. 각 지역의 도서관이나 기록보관소에는 그 기록들이 잠들어 있었고, 나는 재주껏 그 기록을 찾아서 깨우기만 하면 되었다. 실제로 그렇게 기지개를 켠 기록은 엄청나게 많기는 했다.
그러나 추도비의 조선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생존 당시 차별받는 조선인 노동자였고,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을 사망하게 한 사고에 대한 기사는 발견될 수 있겠지만 희생자들의 인적 사항이나 생존시 사정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기록으로 남아있을지 알 수 없다. 유명 인기인이었던 최승희 선생과는 달리 무명인들이었던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을 발굴해 내기란 대단히 어려울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정세화 선생의 부탁을 대놓고 거절하지 못했다. 평소 장난기와 익살이 가득한 그의 얼굴이 그 부탁의 말씀을 하시는 동안 매우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조선인 추도비는 정세화 선생의 가계와도 관련된 문제였다. 조선인 추도비의 건립은 그의 부친 정홍영 선생이 1970년대에 시작하셨던 지역사 연구의 마지막 단추였던 것이다.
나는 다소 자신없는 목소리로 정세화 선생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연구자는 자료가 없으면 꽝입니다. 일단 어떤 자료들이 남아 있는지 살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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