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 선생은 <에헤야 노아라(1933)>는 물론 <한량무(1938)>를 창작했던 시기까지도 ‘한량’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춘추> 1941년 5월호에는 “최승희와 여류명사 회담”이라는 좌담회 기사가 실렸는데, 최승희와 참석자들 사이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다.
“최승희: ... 멕시코에 가니 거기에 옛날에 이민으로 가셨던 조선분이 한분 계신데 70노인이라고 해요. 열세 살 때부터 돌아다니며 춤추고 장구치고 그랬다는데 무슨 장단이고 못하는 게 없어요. 그분이 나를 찾아와서... 춤을 추는데 덩실덩실 어찌도 잘 추는지요. (일동 웃음) 소위 난봉꾼인가 봐요. 그런데 그분더러 장구쳐달라고 그랬죠. (일동 웃음) 그런데 활량이란 어떤 의미예요? 활량이라는 춤을 창작해서 추었지요.
고봉경: 활량이라는 게 화랑(花郞)이라는 말이 변해진 것이 아닐까요?
최승희: 기생꽁무니나 따라 댕기는 건달이라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어떤 분보고 물어봤더니 글도 잘하고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요.
이근영: 그건 요새 말하는 활량과는 다를 겁니다. 신라 때의 화랑이란 문과 무도 겸한 채 호탕하게 지내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모윤숙: 원래는 글도 잘 짓고 활도 잘 쏘는 사람을 옛날에 전해오는 말에 화랑이라고 하잖아요?
박승호: 그렇지만 요즘이야 건달을 활량이라고 그러지.”
이 좌담회가 열렸던 것은 최승희 선생이 세계 순회공연(1937.12-1940.12)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였다. 일시는 1941년 4월1일이었고, 좌담회 장소는 경성 반도호텔이었다.
위의 대화에 따르면 이때까지도 최승희 선생은 ‘한량’의 의미를 잘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저 “기생꽁무니나 따라 다니는 건달이라는 의미인 줄” 알고 있었다면서, “한량이 어떤 사람이냐”고 되물었기 때문이다. 최승희 선생의 질문에 답을 해 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고봉경이나 이근영, 모윤숙과 박승호 등의 참석자들은 한량이 본래 글도 잘하고 활도 잘 쏘는, 즉 문무를 겸비한 신라 화랑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좌담회 당시, 즉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한량이 그와는 정반대의 젊은이들, 즉 술과 기생을 좋아하는 건달이나 난봉꾼으로 변질된 상태였던 것이다.
최승희의 멕시코 공연은 1940년 11월1일이었으므로 위의 대화에 등장한 멕시코 에피소드는 <한량무(1938)>가 창작되었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즉, 한량을 소재로 <한량무>가 창작된 것이 1940년 전후, 즉 세계 순회공연 중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보다 7년 앞서 도쿄에서 초연된 바 있었던 <에헤야 노아라>가 한량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고 보기는 대단히 어렵다.
한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에헤야 노아라>의 ‘의의와 평가’를 서술하면서 이 작품이 “1933년 조선춤의 소재를 서양춤의 기법으로 살려낸 최승희의 첫 조선무용 작품”이라고 소개했고, “이 작품의 성공을 발판으로 최승희는 그녀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발견하고 훗날의 ‘최승희류 조선무용’ 확립에 이르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에헤야 노아라>에 대한 이같은 평가는 대부분 사실이지만, “최승희의 첫 조선무용 작품”이라는 표현은 유보되어야 한다. <에헤야 노아라(1933)> 이전에도 최승희 선생은 <영산무(1930)>와 <농촌소녀의 춤(1930)>, <장춘불로지곡(1930)>과 <정토의 무희(1930)> 등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이 조선무용 작품이었다는 것은 우선 그 음악으로 알 수 있다. <영산무>의 음악은 ‘조선고악(영산회상)’이었고, <농촌소녀의 춤>은 ‘조선민요’로 반주되었다. <장춘불로지곡>의 음악은 ‘조선아악(보허자),’ <정토의 무희>의 음악은 ‘조선정악’이었다고 한다.
또 이 작품들은 그 제목으로 미루어 조선음악과 함께 조선의상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들을 조선무용으로 보는 데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