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613, 35회 민족민주 열사를 위한 범국민 추모제가 열렸다. 장소는 서울 시청 인근이었지만 영정 사진 행진은 안국동에서 시작했다. 서민동 단톡방에 영정 사진을 들고 행진할 사람은 신청하라는 공지가 올라왔을 때 나는 우종원 선생의 영정을 들겠다고 신청했다.

 

나는 한 달 전에 복막염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중에 악성 종양도 발견됐다. 엉겁결에 암 환자가 된 것인데, 기회가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종원 선생의 영정을 들고 행진하겠다고 신청한 것이다.

 

 

나는 모이기로 한 시간보다 1시간가량 일찍 행사장에 도착했다. 우종원 선생의 사진이 준비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내가 그의 영정 사진을 들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서민동 사무국장 이은정 선생은 전민동이 영정 사진을 준비하기 때문에 행진이 시작되기 전에 해당 텐트에 가서 그의 사진을 요청하면 된다고 했다. 다행히 올해는 내가 장갑을 낀 두 손으로 우종원 선생의 영정 사진을 들고 행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안국동에서 광화문을 거쳐 시청 앞까지 1시간 남짓의 행진을 마치고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 연단 전면에 영정 사진들이 이미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우종원 선생의 사진을 찾아보니 맨 윗 열 오른쪽 끝에서 23번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내가 운반해온 영정사진을 행사 위원들에게 반납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행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우종원 선생을 생각했다.

 

 

나는 우종원 선생의 오랜 친구나 절친이 아니다. 같은 사회대 81학번이라는 점만 빼고는 다른 학연도 지연도 없다. 그렇다고 같은 현장에서 함께 일해 본 적도 없다. 나는 그가 명을 달리하기 전에 딱 한 번 만났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열사들이 언급될 때마다 그를 떠올리곤 한다. 내가 떠올리는 그의 모습은 격렬하게 투쟁하거나 참혹하게 희생된 장면이 아니다. 내가 회상하는 그의 모습은, 심각한 표정의 영정 사진과는 달리, 말없이 웃고 있던 우종원 선생의 조용한 모습이다.

 

내가 오랜 외국 생활을 마치고 아주 귀국했을 때, 조선무용가 최승희 선생의 조사연구와 함께 재일 조선학교의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보내는 캠페인도 시작했다. 독지가들의 후원 덕분에 최승희 조사연구를 9년째 진행 중이고 이제 결과를 출판할 단계에 이르렀다. 또 서민동을 비롯한 많은 후원자들의 참여 덕분에 2018년부터 약 8년 동안 일본 전역의 조선학교 무용부에 약 14백 켤레의 무용신을 보낼 수 있었다.

 

재외동포 후원활동은 한두 분야에만 전념하는 전문 활동이 될 수 없었고, 동포들이 요청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과 러시아 동포들과도 교류하기 시작했고, 일본에서는 일제강점기에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추모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그중 효고현 다카라즈카에 세워진 조선인 노동자 추모비가 관심을 사로잡았다. 다카라즈카시 타마세 마을의 주민들이 조선인 희생자들을 1백년이 넘도록 위령 제사해 온 것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20203월 희생자들을 위한 추도비가 건립됐는데, 이는 일본 전역에 세워진 약 170기의 조선인 추도비와 위령비들 중에서 가장 최근에 건립된 것이다.

 

재일 활동가들의 요청에 따라 그 희생자 다섯 분의 한국 내 연고를 조사했고, 그중 한 분이 강원도 강릉 출신임을 밝혀낼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강릉과 다카라즈카의 교류가 시작됐다. 나도 강릉에 자주 오가게 되었는데, 강릉 출신의 민주열사 김성수 선생을 알게 된 것도 그 때였다. 강릉에는 김성수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는데, 동문인 홍진선 선생이 그 이사장직을 맡아 오래 일해 왔다.

 

 

기념사업회는 매년 마석 모란공원에서 김성수 열사 추모제를 거행했다. 나는 2021년에 처음으로 그 추모제에 참석했는데, 그때 우종원 선생을 다시 만났다. 우종원 선생의 묘가 김성수 열사의 묘 바로 아래에 마련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묘석 위 유리상자 안에는 우종원 선생의 영정이 담겨 있었고, 그 옆에는 민주열사 고 우종원의 묘라고 쓴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때가 내가 귀국한 후 다시 우종원 선생을 만난 첫 만남이었다.

 

 

내가 생전의 우종원 선생을 만난 것은 19856월이었다. 같은 사회대 81학번이었지만 나는 그를 몰랐고, 그도 나를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각자 맡은 일이 다양했고, 또 자신이 하는 일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절이었다. 81학번이면서 85년에야 서로 통성명을 했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 시대의 기형적인 일상일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만난 곳은 사회대 73층의 사회복지학과 대학원 연구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교수 연구실 크기의 방에 8명의 대학원생들의 책상이 좌우에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 방 주인의 한 명이었던 이선우 선생은 아침나절이 아니면 볕도 잘 들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날의 그 방의 분위기가 아주 환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나는 1983년 메아리 회장을 맡았고 그해 5월에 노래책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한 일로 수배 끝에 강집됐다. 아마도 그날 나는 말년 휴가를 이용해 복학 문제를 알아보려고 학교에 갔다가 절친 이선우 선생을 만나러 그 방을 찾았던 것 같다. 이선우 선생은 나와 단짝으로 메아리 집행부 활동을 하다가 대학원에 진학, 첫 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깡통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들고 대학원 연구실을 찾았다. 이선우 선생은 커피는 여기도 있는데...’ 하면서 나를 맞아 주었는데, 방에는 이미 2명의 손님이 더 있었다. 한 명은 신문학과 81학번 허진 선생이었고, 다른 한 명이 우종원 선생이었다.

 

그냥 우연히 모인 것이기 때문에 이야기는 중구난방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외무고시에 막 합격한 허진 선생은 갑자기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기 시작한 주역 이야기를 오래 했지만, 나는 귀담아 듣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보다는 이선우 선생이 타준 이른바 특제커피를 홀짝거리면서 맑은 눈으로 말없이 듣고 있던 우종원 선생의 모습이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그가 원래 그렇게 우직한 모습인지, 아니면 수감 생활이 만들어준 절제된 모습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지나치게 심각하거나 음울한 성격은 아니었다는 기억이다. 네 명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우종원 선생이 지나가듯이 한 마디 툭 던지자 우리들이 모두 폭소를 터뜨렸던 것도 기억난다.

 

 

그날 그 대학원 연구실의 우연한 만남은 확실히 이상한 만남이었다. 방주인 대학원생과 강집 끝에 복학을 앞둔 군바리, 주역에 푹 빠진 외무고시 합격자와 민추위 활동 중이던 빵잽이가 한 자리에 모인 그런 모임은, 내가 기억하는 한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스물 서너살의 나이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모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조합의 모임은 그 2-3년 전에도 불가능했을 터이지만, 인생행로가 본격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한 후로는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20224월 나는 임상택 선배님과 함께 강릉을 찾았었다. 김성수 열사의 부모님은 임상택 선배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임상택 선배님이 김성수 열사의 사망사건 진상규명 노력이 결실을 보도록 협력하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우종원에 대해서도 질문을 드려보았다. 임상택 선배는 기록과 증언 등의 자료가 너무 없어서 우종원에 대한 진상규명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이야기를 전하는 임선배의 표정이 우울했다.

 

우종원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목소리가 낮아지고 분위기가 비장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나 역시 누군가와 그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비감해지곤 한다. 그러나 혼자서 우종원 선생을 생각하면 이야기가 다르다. 40여 년 전 대학원연구실에서 만났던 그 한 번의 우연한 만남 때문이다.

 

 

그날 우리는 처음 만났고, 나도 그도 별로 말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만났다면 분명히 친구가 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종원 선생이 나를 어떻게 느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분명히 그를 친구로 삼기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 한 번의 만남이 오랜 우정으로 이어지지 말란 법은 없다. 그것은 이생이든 저생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jc, 사회81, 2026/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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