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720-21일 대구 취재를 단행했다. 대구 매체가 이시이무용단의 대구 공연을 어떻게 보도했는지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대구 취재에 나서기 전에 먼저 경성의 신문들을 조사했다.

 

경성의 중앙지들도 이시이무용단의 대구 공연을 보도했지만, 첫 보도는 그다지 정확하지 않았다. 1926325일자 <경성일보>가 이시이무용단이 오늘밤 인천(=24)과 모레 부산(=26)의 각 1회 공연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보도했는데, 이는 오보였다. 인천 공연은 24일 하루가 맞지만 부산 공연은 28-29일의 이틀이었다. 26일 공연도 부산이 아니라 대구였지만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경성일보> 경성 본사 사옥

 

이 오보는 사흘 후인 328일의 <경성일보>가 바로잡았다. 이 날짜의 <경성일보>에는 대구 공연에 대한 기사가 2꼭지나 실려 있었다. 하나는 [부산발]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구발]이었다. 먼저 보도된 [부산발] 기사에는 이시이 바쿠, 코나미 남매는 27일 대구에서 부산으로 들어와 28일과 29일 양일 매일 오후 6시부터 국제관에서 그 묘기를 공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도 대구의 공연여부나 그 내용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곧 이어진 [대구발] 기사에서는 이시이 바쿠와 코나미의 무용시 공연회는 26일 오후 6시부터 <대구극장>에서 개최되었다고 전하고 (대구)부내 관위회사원(官衛會社員)을 비롯하여 그 외에도 다수의 관객이 몰리는 성황을 이루었다고 보도했다. ‘군위회사원이란 관원(官員)과 위병(衛兵)과 회사원을 가리키므로, 대부분 민관군의 일본인 관객이 몰렸다는 말이겠다.

 

이어서 기사는 서구의 예술가가 추대한대로 이시이의 무용에는 힘찬 인간미가 넘쳤고, 햇빛에 미소짓는 듯한 코나미의 아름다운 곡선과도 잘 어울려서 관객을 매료하기에 충분했다고 평하고, 공연은 근래에 없는 대성공적으로 폐막, 일행은 부산으로 향했다고 덧붙였다.

 

325일의 경성판 기사에는 오보가 많았지만 부산발 기사와 대구발 기사는 공연에 대한 정보를 정확히 전달했고, 특히 대구발 기사는 공연 상황까지 비교적 상세히 보도했다.

 

1926년 3월25일의 <경성일보> 2면에 실린 이시이무용단의 경성, 인천, 부산 공연 보도.

 

<경성일보>의 경성판 기사가 부정확했던 점은 의문이다. 이시이 바쿠는 320일 아침부터 25일 아침까지 경성에 6일이나 체류했고, 그동안 <경성일보>의 기자들은 그를 취재할 기회가 많았다. <경성일보>는 이시이무용단 조선순회공연의 후원사였고, 학예부장 테라다 토시오(寺田壽夫)가 이 공연 행사를 직접 챙기면서 취재를 지휘했기 때문이다.

 

각종 문헌 기록을 종합하면 테라다 토시오 학예부장은 이 기간에 이시이 바쿠와 그의 무용단을 다섯 번이나 직접 만났다. 거의 매일 만난 셈이다. 그런데도 <경성일보>가 이시이무용단의 경성 공연 이후의 일정을 잘 몰랐다는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조선 최대 신문이었던 <경성일보>는 경성 이외 지역의 뉴스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취재를 하거나 제보를 받았더라도 지면 제한을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밀리곤 했다.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경성일보>는 지방 주요도시에 지국을 설치했다. 경성판에 보도된 대구공연 기사도 [부산발] 기사는 부산 지국이, [대구발] 기사는 대구 지사가 송고한 것이다.

 

1926년 3월28일의 <경성일보>에 실린 이시이무용단의 대구와 부산 공연 보도

 

<경성일보>의 대구 지국이 생긴 것은 1919년이다. 지국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였다. 중앙지를 그 지방에 보급하는 것과, 그 지역의 뉴스를 본사에 송고하는 것, 그리고 현지 뉴스를 모아 지역 광고와 함께 지방판을 만드는 것이었다.

 

대구 지국의 활동은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경성일보>에 대구판을 만들어 현지 인쇄 및 배포했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시이무용단의 대구 공연 소식을 취재해서 본사에 송고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1926326일의 이시이무용단 대구공연의 일시와 장소, 관객과 그들의 반응, 대략의 일정 등에 대한 세부사항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구 현지 언론보도를 조사하기 위해 <대구근대역사관>의 학예사에게 문의해 본 결과 당시의 신문들은 일부 소장되어 있지만 공개는 금지되어 있다고 했다. 따라서 <경성일보> ‘대구판의 기사가 더 있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못한 상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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