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326일의 이시이무용단 대구공연 리서치는 최승희의 국내 지방공연 중에서 첫 번째였다. 준비도 많이 하고 노력도 꽤 기울인 조사였다. 원고지로 120매를 웃도는 글을 쓰게 된 것을 보고 나 자신도 놀랐다. 한 번의 공연에 대해 쓸 것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기 때문이다.

 

대구조사를 일단락 짓고 나서도 미진함이 느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아직도 밝혀야 할 것이 많음을 알기 때문이다. 내 능력이나 부지런함이 모자라서 생긴 구멍도 있지만, 가장 절실했던 것은 자료부족이었다. 그렇게 찾아다녀도 필요한 자료가 나타나지 않아 무척 안타까웠다. 이번 대구조사의 경우 <대구근대역사관><대구시립중앙도서관>의 고신문을 열람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아쉬웠다.

 

최승희 리서치를 하면서 어떤 주제이든 ‘6(六何)’에 대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게 되면, 만족도에 차이가 있더라도, 그 리서치는 일단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조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대구공연 리서치는 3분의2쯤 성공한 조사이다.

 

1926년 3월, 경성공연에서 <갇힌 사람(1922)>을 열연했던 이시이 바쿠(왼쪽)는 숙명여학교 졸업생 최승희 (오른쪽)를 신입단원으로 받아들였다.

 

우선 누가를 밝히는 데에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만주공연을 마치고 조선순회공연에 나섰던 16명의 이시이무용단원이 누구였는지 완전히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무용수 4명의 이름과 경력을 밝혀낸 것과 피아노 반주자와 무용단 내부 매니저를 알아낸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바이올린 반주자가 누구였는지만 더 알아냈으면 만족도는 꽤 많이 높아졌을 것이다. 나머지 인물들은 조명과 음향, 무대담당 등을 담당한 스탭 구성원들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름은 대개 문헌에 잘 나타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무엇을도 마찬가지였다. 이시이무용단이 대구에서 공연했던 작품을 21개로 좁혀놓을 수는 있었지만 그중에서 어떤 작품이 <대구극장> 무대에서 실제로 상연되었는지 특정화할 수는 없었다. 상연 여부를 확신하지 못한 채 각 작품에 대한 세부사항을 조사하는 것이 허망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이번에는 상연되었던 사실이 확실한 <갇힌 사람(1922)>의 한 작품만 조금 더 자세히 조사해서 정리했다.

 

언제어디서는 밝힐 수 있었다. 1926326일 오후6<대구극장>에서였다. 대구극장의 위치를 보여주는 당시의 지도와 오늘날의 지도를 확보한 것은 나쁘지 않았다. 당시의 대구극장 사진을 더 많이 찾아낼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1926년 3월26일, 이시이무용단의 공연이 열렸던 <대구극장>의 모습. 최승희가 무용단원이 되어 방문한 최초의 극장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다른 조사에서는 어떻게가 가장 중요한 조사항목이지만 이번 대구공연 조사에서는 그 점은 거의 자명했다. 무용단원들이 어떻게이동했고, ‘어떻게시간을 보냈고, ‘어떻게공연을 했었는지는 대략 밝혀낼 수 있었다. 그들이 대구에서 공연을 한 이유는 자명하다. 관객을 얻어 신무용의 층을 넓히고, ‘입장료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대구공연의 경우 이시이무용단에게 입장료 수입이 특히 중요했다. 1926년 만주-조선순회공연의 주요 목적이 이었기 때문이다. 이시이 바쿠는 1925년 무사시사카이(武蔵境)2층 양옥으로 무용연구소 건물을 새로 건축했는데, 그 건축비를 갚아야했던 것이다. 이 문제는 더 조사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대구공연 조사결과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아마도 대구공연 이전의 경성공연 조사결과를 정리할 때 포함시키면 더 좋을 것이다.

 

이시이무용단이 19263월의 조선순회공연에서 올린 최대의 성과는 최승희를 발굴한 것이다. 경성공연 마지막 날인 323일 이시이 바쿠를 찾아간 최승희는 바로 입단 허락을 받았고, 26일의 대구공연은 최승희가 무용단의 일원으로 참관한 최초의 공연이었다. 이때 최승희의 심경과 감상을 알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 같은 내용을 보여주는 자료는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대구좌=대구극장>이 있었던 1920년대의 대구 동성정의 거리 모습.

 

대구공연 이후 최승희와 이시이무용단은 328-29일의 부산공연에 임했으니, 다음 리서치는 부산 조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부산 공연이 끝난 다음날인 330일 이시이무용단은 신입단원 최승희와 함께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돌아갔다. 최승희의 참관은 끝나고, 무용유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