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 17회 졸업생 4

 

19263월에 졸업장을 받은 숙명17회 졸업생들은 <조선인 정체성>이 확실했던 것을 알 수 있다. 76명의 졸업생들이 모두 그랬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이름이 알려진 졸업생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들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박화성(朴花城, 1903-1998)은 숙명17회 수석졸업생이었다. 본명이 박경순인 박화성은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에 천재성을 보였고, 17회 졸업생이 되기 전에 이미 문단에 등단했다. 한 상태였다. 일본유학까지 마친 오빠 박제민이 노동쟁의 끝에 사망한 후 박화성은 고향인 목포에서 꾸준히 작품을 썼다. 1932년 단편 <하수도공사>와 장편 신문소설 <백화>를 발표했고, 이어서 일제 강점기의 고통 받는 도시노동자, 서민, 농민들을 그린 장,단편 20여편을 발표했다. <논 갈 때(1934), <한귀(1935)>, <홍수전후(1935)>, <고향 없는 사람들(1936)> 등은 자연재해로 고통 받는 극한 상황을 그렸고, <비탈(1933)>, <헐어진 청년회관(1934)>, <불가사리(1936)>는 일제 치하에서도 자본주의적 향락에 젖어 사는 부친과 형제 사이에서 고뇌하는 민족주의자의 모습을 그렸다. <온천장의 봄(1934)>, <중굿날(1935)>은 돈에 팔려가는 여인들의 행로를 담아냈다. 해방전 박화성의 작품세계는 조선인들의 삶에 밀착되어 있었다.

 

1932년 6월3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박화성의 연재소설 소식(왼쪽)과 1936년 3월11일에 실린 노남교의 2년6개월 복역후 출감 소식 (오른쪽). 

 

노동운동가 노남교(盧南橋, 1907-2006)는 최승희와 입학동기였지만 사회주의 독립운동과 관련되어 3학년이던 1924년에 퇴학당했다. 이후 일본 유학 중에는 근우회 활동을 했고, 고향인 김해에 돌아와서도 경남지역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을 이끌었다. 1931년의 <김해 메이데이사건>으로 시위를 주도하다가 처음으로 투옥됐고, 도쿄 유학시절 지하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것이 발각되어 오사카와 사가 형무소에서 2년반을 추가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북한 인민군의 도쿄 주재 스파이로 일하던 중 맥아더 사령부의 상륙작전 최종 목표지가 인천임을 탐지해 북한 인민군 사령부에 타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공훈을 인정받아 노남교는 영웅 혁명가라는 칭호롤 받고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이정희(李貞喜, 1910-?)는 권기옥(權基玉, 1901-1988), 박경원(朴敬元, 1897-1933)과 함께 조선의 초기 3인의 여류비행사였다. 이정희도 최승희와 입학동기였으나 졸업하지는 않았다.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비행사의 꿈을 가졌고, 거의 혼자의 힘으로 천신만고의 도쿄 비행학교 유학 끝에 3등과 2등 비행사 자격증을 받았다. 그러나 1등 비행사가 되지 않는한 항공사 취업이 불가능했고 여성에게는 1등비행사 응시자격이 없었으므로 자기 자신의 비행기를 갖지 못하면 하늘을 날지 못했다. 이 때문에 박경원은 일본 체신성 대신 고이즈미 마타지로의 후원으로 비행기 <청연>을 불하받아 조선으로 비행하려다가 추락사했다. 이정희는 그 길을 가지 않았고 해방될 때가지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그러나 1949917일의 <동광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정희는 대한민국 현역 공군대위로 임관되어 전투기를 운전했다. 식민지 조선의 하늘을 날지는 못했지만, 해방된 대한민국 공군의 조종사가 된 것이다. 그는 195040세의 나이로 여자항공대 대장으로 임명되어 근무하던 중 한국전쟁 중에 실종되었다.

 

1928년 7월16일의 <매일신보>의 이정희 항공대회 입상 소식(왼쪽)과 1929년 11월28일 <동아일보>의 최승희의 무용연구소 개소 소식(오른쪽)

 

최승희(崔承喜, 1911-1968)의 무용 활동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1930년대에는 조선은 물론 일본에서도 조선무용가 최승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주요한 무용 관련 프로젝트가 있었다면 우선 최승희가 거명되곤 했다. 하지만 최승희는 일본 국책 사업에 지원하거나 요구에 응한 적이 없었다. 유일하게 수락한 것이 영화 <대금강산보(1938)>의 주연을 맡은 것이었는데, 이것도 금강산을 해외에 홍보한다는 대의와 자신의 세계 순회공연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제가 일본의 식민지였음을 내용으로 하는 국책 무용작품 <부여회상곡(1941)>과 조선청년의 일본군 지원을 부추키는 국책영화 <그대와 나(1941)>에 출연하기는 거부했다. 거액의 예산이 책정된 <부여회상곡>은 조택원(趙澤元, 1907-1976)이 맡았고, <그대와 나>의 주연은 문예봉(文藝峰, 1917-1999)에게 돌아갔다.

 

이 네 사람의 숙명17회 졸업생의 공통점은 강한 <조선인 정체성>을 지녔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특히 자신의 활동분야에서 조선인의 자부심을 잃지 않았고 일제의 도움을 받거나 정책에 동원되어 조선인과 조선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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