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존 연구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은 근대사 혹은 예술사의 연구 주제로 떠오른 적이 없다. 자료 부족 때문이다. 유럽이나 미주, 남미 공연 소식이 더러 평전에 인용되었지만, 대부분 최승희가 순회공연 중 현지에서 스크랩한 것을 발췌 번역한 것이었고, 이후 다른 연구자가 별도의 조사를 벌인 적은 없어 보였다. 필자가 2017년 여름의 유럽 취재를 통해 발굴한 신문과 잡지 기사와 사진, 공연 팜플렛 자료는 평전들이 소개한 자료의 수백 배에 달했다.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은 여전히 전인미답의 연구 분야이다.

 

평전들은 최승희 세계 순회공연의 일정과 각 공연의 레퍼토리를 파악하지 못했다. 서만일(1958)의 세계 순회공연 서술은 한쪽의 5분의1에 불과했고, 다카시마 유사부로(1959)160쪽 중에서 9(81-89)을 할애했을 뿐이다. 정병호(1995)에서도 유럽순회공연 서술은 평전 전체 362쪽 중에서 13(151-163), 강준식(2012)에서도 424쪽 중에서 16쪽에 머물렀다. 세계 순회공연에 포함된 30개 도시 150개 공연의 서술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세계 순회공연에 임했던 최승희의 민족 정체성과 그것이 현지 언론에 반영되었던 양상에 대한 연구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 연구는 세계 순회공연에 임했던 최승희의 민족정체성에 관련된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부문의 지형을 살피는 탐색적 성격을 가진다. 그리고 일정한 한계 속에서나마 평전들이 제시한 최승희의 민족정체성 주장을 가설로 다듬어 문헌분석을 통해 검증하게 될 것이다.

 

 

이글에서 사용하는 정체성이라는 용어는 풍부한 역사적 준거나 엄밀한 개념적 분석을 거친 정치한 용어는 아니다. 가장 간단한 의미에서 정체성은 개인이 처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 내면화한 지위와 역할에 대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은 다양한 사회에 처할 수 있고, 또 각 사회 속에서의 지위와 역할이 다양할 수 있으므로 개인의 정체성은 다중적일 수 있으며 시간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인들이 식민모국 일본에 합병된 조선사회에 살면서 조선인이자 일본인이라는 이중적 정체성을 가져야 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이 있었던 시기(1937-1940)는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지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시기였고, 일본의 군국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했던 시기이다. 따라서 조선인이나 조선무용이라는 표현은 내선일체황국신민화정책에 위배되는 처벌 대상이었다. 따라서 나는 조선인이다는 선언은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의 조선인이라는 뜻일 때만 허용되었고, ‘조선무용이라는 장르도 일본무용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통용되었다.

 

 

이글에서는 1930년대말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을 단행할 즈음에 가졌던 정체성을 여러 문헌을 통해 정리하고, 특히 최승희의 민족정체성이 미주와 유럽 공연 중에 어떻게 표현되었으며, 현지 언론이 그것을 어떻게 보도했는지 살폈다. 조사연구의 단순화를 위해 최승희가 세계무대에서 자신을 조선인 무용가, 자신의 무용작품을 조선무용으로 소개한 것을 민족정체성의 지표로 삼았고, 이 민족정체성이 현지 언론에서 어떻게 보도되었는지를 조사했다.

 

여덟 권의 평전에 서술된 단편적인 언급을 종합하면 최승희의 정체성은 그녀의 성장 과정, 그가 직면했던 상황,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에 따라 대체로 네 시기로 나누어 고찰될 수 있다.

 

1기는 최승희가 경성에서 태어나 숙명여학교를 마칠 때까지의 시기이고, 2기는 도쿄 무용유학 시기, 3기는 3년 반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안막과 결혼한 시기, 4기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무용의 창작과 공연 활동에 몰두하다가 해방을 맞을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연구의 초점은 제4, 그중에서도 유럽 순회공연 시기에 맞춰져 있지만, 최승희가 다중의 정체성을 갖게된 과정을 보기 위해 앞선 시기의 상황을 개략적이나마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초기의 조선인 정체성과 유학기의 예술가 정체성,’ 조선활동기의 신여성 정체성과 일본과 세계활동기의 세계일 정체성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각각의 정체성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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